1982년 12월 14일, 아마추어 사진작가이자 보일러 배관공으로 일하던 이동식이 단골 이발소에서 만나 애인이 된 여성 면도사 김경희를 상대로 죽어가는 모습을 찍기 위해서 독극물을 먹게 하여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에 해외에서도 해외토픽으로 나왔을 정도로 쇼킹한 사건. 국내 번역된 일본 모 유명 사진작가의 에세이집에도 이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비뚤어진 미학을 경계하자는 의미로 예를 들었다 한다.
1982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 구로구 호암산에서 24세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조사결과 사망자는 이발소 여종업원 김경희 씨로 밝혀졌다. 발견 당시의 상태가, 일단은 독살로 추정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저항한 흔적이 전혀 없고, 시신이 옷을 벗고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다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럼 이 김씨는 산에 올라간후 굳이 자의로 옷을 벗은 뒤 독약을 먹고 바닥에서 몸부림치다 사망했다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결과가 나온다.
그런 이유로 한국 경찰 역사상 최초로 프로파일링 기법이 동원되었으며 곧 범인이 잡혔다.
이 사건의 범인은 특수절도 등으로 여러 차례 옥살이를 했던 전과 4범으로, 복역 후 사진작가 겸 보일러 배관공으로 살던 이동식(李東植, 당시 42세)이었다. 그는 1940년 경상북도 대구부(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6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숙부 집으로 보내져 국민학교 과정을 마쳤으며, 14세 때 서울로 상경하여 15년 동안 폐지와 고철 등을 주우면서 넝마주이로 살아가다 몇 차례 특수절도 혐의로 콩밥을 먹고 출소 후에 사진에 취미를 붙여 이것저것 사진을 찍으면서 살았다. 사진가로써 재능은 출출해서 한국사진작가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사진 공모전에서 10여 차례 입상한 경력도 가지고 있으며 개인 전시회까지 열었을 정도였다. 또한 배관공 월급이 수십만 원이던 시절에 150만 원짜리 일본제 카메라를 구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일반적 SLR카메라인 Nikon FE 가 24-30만 원 정도로 국립대 한 학기 등록금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줄곧 특별한 아이디어를 고안해내지 못해 사진 공모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그는 고심 끝에 죽음을 비롯한 더욱 자극적인 컨셉을 사진에 담기로 작정했다. 그는 죽음을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했고, 후처를 모델로 네크로필리아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사진을 몇 번이나 찍었으나 연출된 죽음에 대해 그는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가서는 안될 길을 걷고 말았다.
어느 날 자신이 다니던 퇴폐 이발소의 직원인 김경희(金敬姬, 당시 24세) 씨 에게 출세를 시켜주겠다며 전라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수락하자 함께 산에 올라갔고, 옷을 벗기 전 김 씨에게 추울 테니 감기약을 준답시고 사이안화칼륨 약을 건네주었다. 이씨는 독약을 먹은 김 씨가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몸부림치는데도 생명을 구하는 일엔 아랑곳도 없이 그 모습을 21장이나 사진으로 찍었으며 그걸 숨을 거둔 후에도 계속했다. 검거 후 재판을 거치는 동안에도 혐의를 극구 부인하다가 아래에 후술할 사진 감정을 담당했던 모 대학 사진과 교수의 증언으로 이동식이 범인이었다는 사실이 완전히 탄로나자 홧김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결국, 범인 이동식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에 형량이 무겁다면서 항소, 상고를 거듭했지만 모두 기각당한 뒤 1984년 2월 16일에 사형이 확정 판결되어 1986년 5월 27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을 이루었다.
처음에 이동식을 검거했을 때 이동식은 범행을 부인했고 경찰은 유력한 증거인 피해자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도, 이동식이 거주한 보일러 현장 소장실에서도 결국 발견하지 못했는데 한 담당형사가 그 소장실에 일부분만 도배가 되어있는 걸 보고 벽을 두들기니 합판이 있다는 걸 발견, 합판을 뜯어내어 사진이 들어있는 필름을 발견했다. 그러자 이번엔 이동식이 '본인은 이미 죽은 이후에 피해자를 찍은 것일 뿐 본인이 죽이지 않았다'라고 발뺌하기 시작했고, 형사들이 전국 사진 관련인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려는 끝에 결국 모 대학 유명 사진과 교수가 한 가지 조언을 형사들에게 해주고 또 법정 증언을 통해 완벽하게 이동식이 범인임을 굳혀버렸다. 그 조언은 사진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솜털이 서있으면 살아있었다는 것을, 솜털이 누워 있으면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였는데, 검증 결과 솜털이 서있는 사진부터 점점 누워가는 흔적들을 발견했고 결국 살아있을 때부터 죽어가는 사람을 찍었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증거로 채택되었다.
이동식 입장에서는 결국 자승자박한 꼴이 되었는데, 본인이 사진작가였기 때문에 80년대 일반인들이 거의 쓰지 않는 고해상도의 카메라를 사용했고 덕분에 현미경 확대가 가능해 땀구멍이나 솜털을 확인해 증거로 채택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서울구치소의 서대문 시절의 마지막 사형 집행이었으며 이 사건의 범인인 이동식은 이곳에서 집행된 마지막 사형수로 이 이후 서울구치소는 이듬해에 시흥군 의왕면(현 경기도 의왕시)으로 이전했다.
사건을 조기종결하지 않았다면 이동식은 한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자 (우범곤 제외)로 기록될 뻔했다. 이판능은 17명, 유영철은 20명, 이춘재는 10여명으로 21명을 죽인 이동식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