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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ll조회 1156l
이 글은 3년 전 (2021/3/09) 게시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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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왕검성 전투 王儉城戰鬪

B.C 108

"원봉 3년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옛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반란을 일으켜 다시 관리들을 공격했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재상 노인의 아들 최(最)씨를 시켜 그 백성들을 설득하여 성사를 죽이게 했다."

한국사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춘추전국의 열국 연(燕)과 경쟁하였고, 위만 집권 이후엔 주변의 군소 국가들을 정복하며 우거왕 대에 이르러서는 한반도 남부의 진과 한 제국 사이의 중계무역을 주관할 정도로 그 위세가 성장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한 무제는 고조선의 이러한 성장을 경계하였다. 결국 한의 사신 섭하가 고조선의 호송관을 죽이며 이 갈등이 표면화 되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거왕이 섭하를 살해하자 양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지속되는 전쟁 속에서 고조선은 내분을 앓은 끝에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우거왕과 성기 장군이 살해당했으며, 결국 기원전 108년, 왕검성의 함락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후 한은 고조선의 옛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한반도의 역사도 새로운 고대국가들이 등장하며 전환기를 맞게 된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평양성 전투 平壤城戰鬪 

A.D 371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 한반도 일대의 옛 고대 국가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세력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었으며, 이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한강을 중심으로 말갈, 낙랑, 대방,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과 경쟁-교류를 병행해 성장하던 백제였다. 근초고왕대에 이르러서 백제는 사방으로 대대적인 확장책을 실시하였으며, 북방의 고구려와도 그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371년 결국 백제와 고구려가 평양성에서 충돌한 끝에 고국원왕이 전사하였으며, 그순간 한반도 역사의 패권국이 결정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수십년간 국왕이 살해당한 치욕을 감내하며 권토중래를 꿈꿀 수밖에 없었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사방합전 四方合戰 

A.D 407

"1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기보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 5만이 모종의 세력과 벌인 회전 끝에 거둔 대승.

역사학계에서는 406년 12월까지 고구려가 후연과 싸우고 있었다는 점과 407년에 후연이 멸망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모종의 세력을 대부분 '후연' 으로 추정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407년에 벌어진 이 전투가 후연의 멸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언급된 모종의 세력이 백제였다는 설도 있었지만, 그 정체는 차차하더라도 광개토대왕이 치룬 이 한번의 회전을 통하여 고구려는 동북아의 유력강국으로 급부상하였음이 확실하다. 이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사후에도 장수왕과 문자명왕 대에 이르기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관산성 전투 管山城戰

A.D 554

"백제 왕 명농(明穠)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삼국 시대 후기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전투.

고구려의 성장으로 맺어진 나제동맹은 고구려에 맞서 한강 상류를 차지했던 신라가 하류까지 내려와 백제 측이 점령했던 한강 유역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면서 그 끝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분노한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하여 태자 창을 앞세워 관산성을 공격하여 초기의 승세를 점하지만, 신라의 김무력이 북쪽 한강 유역의 점령군을 이끌고 원군으로 내려오자 전세가 백제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성왕은 태자가 분전하는 상황에서 전세를 만회하고자 밤을 틈타 신라군을 기습하려던 중 거꾸로 신라 복병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고간도도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점유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중국과 직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문호를 확보하였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살수대첩 薩水大捷

A.D 612

"신묘한 책략은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계산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승의 공 또한 이미 높으니 이제 만족함을 알았으면 돌아감이 어떠한가."

612년, 수 양제는 전투병만 113만 3천 8백에 이르는 유례없던 규모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수나라의 대병력은 고구려의 끈질긴 대응과 지휘관들의 부실한 지휘능력으로 요동에 발이 묶인 채 전세에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수 양제는 이러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30만 5천의 별동대를 구성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들의 군수품과 병력을 지원해야할 내호아의 수군은 고건무의 활약으로 궤멸되었기에 30만여 대군은 그저 무용지물이었다. 이윽고 수나라의 별동대는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을지문덕은 이들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안시성 전투 安市城戰鬪

A.D 645

"당나라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을 쌓았다. 이 작업에 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한국사에서 최고의 수성전으로 손꼽히는 전투.

이 시기 당 태종에게 있어서 고구려는 수십년 전 수나라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으며, 동북아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당과 경쟁하는 국가였기에 좌시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곧이어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킨 당은 파죽지세로 비사성,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등을 함락시켜 요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에 고구려는 요동 전선의 지원병력으로 고혜진과 고연수의 15만 대군을 급파하였으나 이들은 주필산에서 궤멸되었으며, 곧바로 당군은 압도적인 군세를 자랑하며 안시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시성의 군민들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성주의 지휘 아래 일치단결하여 당 태종이 지휘하는 당나라 본군의 파상공세를 수십일 간 기적적으로 막아내었다. 이후 당 태종이 쌓아놓은 토산이 무너지자 고구려는 승리의 냄새를 직감했고, 안시성 이외 함락되지 않은 신성과 건안성을 중심으로 당을 향해 반격을 가하였다. 때마침 당 태종은 안시성에서의 장기전으로 보급난을 겪고 있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요동에서 군사를 철군시킬 수밖에 없었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황산벌 전투 黃山野戰鬪

A.D 660

"백제군 한 명이 천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라군이 끝내 퇴각하였다. 이렇게 진퇴를 네 번이나 거듭하다가, 힘이 다해 전사하였다."

백제의 멸망을 결정지은 최후의 전투.

백제는 의자왕이 즉위한 이래 신라를 수차례 압박하며 압도적인 기세를 자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왕권과 신권의 반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외부에서는 나당동맹이 결성되며, 그 첫번째 연합작전으로 백제 공격을 실현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조정에서는 성충과 흥수가 제안했던 '기벌포와 탄현에서 당, 신라군을 동시에 모두 저지하려는 전략' 과 '당군의 상륙을 일단 허용한 뒤 좁은 길목에서 당과 신라군에게 공세를 가하는' 두 가지의 전략 방안이 맞섰고, 결국 후순위의 방안을 택하게 되며 황산벌로 계백을 파견했다. 계백은 5천 결사대를 구성하여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도 분투했으나, 결국 신라의 매서운 공세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백강 전투 白江戰鬪

A.D 663

"유인궤가 백강 입구에서 부여풍, 왜인과 4번 싸워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웠다."

아마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실현된 대규모의 국제 수전.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복신과 도침은 부여풍을 왕으로 내세우며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 내부의 권력다툼 끝에 복신과 도침이 사망하고, 나당 연합군의 반격이 점차 거세지자 부여풍은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마침내 일본의 원군이 도착하여 백제 부흥군과 일본의 연합세력은 함선만 천여 척이 넘고 병력만 5만이 넘는 대군세를 자랑했으나 한발 앞서 백강에 도착하여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던 나당 연합군의 화공에 백제-일본의 연합군은 전선 400척을 잃으며 궤멸되고 말았다. 백제 부흥 운동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를 사이에 둔 양면 전선을 강요받게 되었으며, 일본 역시 백제 중심의 외교관계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이 전투는 이후의 동아시아 세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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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함락 平壤城陷落

A.D 668

"총장(總章) 원년 9월에 적(勣)이 또 평양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니, 남건(男建)이 자주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대패하였다. 남건의 밑에서 병사를 총관(總管)하던 승(僧) 신성(信誠)이 비밀리 군중(軍中)으로 사람을 보내어, 성문(城門)을 열고 내응(內應)하겠다고 하였다. 5일이 지나서 신성이 과연 성문을 열었다. 적(勣)이 군사를 놓아 들여보내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요란하게 두들기고, 성(城)의 문루에 불을 지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었다. 이에 남건(男建)은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키고 고장(高藏), 남건(男建) 등을 사로잡았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그의 아들들이 중심이 된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멸망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결국 연남생이 당군을 끌어들이며 제 3차 고당 전쟁이 발생하게 되고, 신라 또한 이에 호응하며 고구려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를 직면하였다. 이제 고구려의 최후 방어선으로 평양성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고구려군은 연남건이 중심이 되어 나당 연합군에 맞서 처절한 사투를 지속하던 와중, 평양성의 내부에서 신성이라는 승려가 당과 내통하여 성문이 열리게 되었다. 평양성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연남건은 자결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결국 보장왕과 함께 당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요동의 주인이자, 유수한 중국의 제국들과 당당히 맞서던 고구려가 700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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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소성 전투 買肖城戰鬪

A.D 675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말 3만 3백 8십 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얻은 병장기도 그만큼 되었다."

평양성의 함락으로 신라와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은 한반도 전역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으며, 도독부를 설치하는 등 신라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하고 압박하였다. 결국 이와 같은 당의 행보에 신라가 반발하고 이는 곧 나당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쟁 초기부터 신라는 석문전투와 고구려 부흥군의 패망 등 불리하게 진행됐던 전황을 타개하고자 임진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며, 당나라는 유인궤가 지휘하는 20만 대군을 대대적으로 편성해 동시다발적으로 임진강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후 칠중성에서 신라군이 패퇴하는 등 전황이 점점 더 불리해지려던 찰나, 매소성에서 기적같은 승전보가 전해졌다. 이근행이 이끌었던 당의 주력군이 매소성을 수성하던 신라군에게 일대의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 승리를 기점 삼아 나당전쟁의 판세는 신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서서히 그 변화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기벌포 전투 伎伐浦戰鬪

A.D 676

"겨울 11월,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다시 진군하여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벌어진 나당전쟁 최후의 전투.

나당전쟁의 승리 요인으로는 당나라가 대륙 반대편 서역에서 토번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더 이상 양면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 판단한 것도 있겠으나 당시 당에 맞서 싸우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끈질긴 저항의식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투 초기에 신라 수군은 당의 공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패배하였으나, 이후 당의 전함들과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전황을 장기전으로 변화시켰다. 이 동안 신라 수군은 더욱 더 증원되기 시작했고, 분산돼 있던 신라 전함들이 속속 집결하며 당군과 22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이 때문에 날로 지쳐가던 당 함대는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상당수의 당 전함이 침몰되고 4천 명의 당군이 전사했다. 이 기벌포 해전의 승리로 나당전쟁에서 신라는 최종 승리를 거뒀으며,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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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령 전투 天門嶺戰鬪

A.D 697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는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여, 먼저 걸사비우를 물리쳐 목을 베고, 이어서 대조영을 추격하여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모아서 이해고에 대항하자 황제가 보낸 군대는 대패했고, 이해고는 겨우 탈출해서 돌아왔다."

발해 건국의 계기가 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연합 세력이 주나라와 벌인 일대의 격전.

696년, 거란족의 이진충이 영주에서 주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틈타 대중상의 고구려 유민 세력은 걸사비우의 말갈족들과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동의 옛 고구려 땅에서 세력을 점차 키워 나갔다. 이에 주의 황제 무측천은 거란의 반란을 진압한 뒤, 이들과의 정면충돌에서 일어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대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는 회유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무측천의 봉작을 거절하며 독자행보의 의지를 명확히 하였고 무측천은 이들의 행보를 반란으로 규정, 거란족에서 항복한 이해고를 총대장으로 삼아 공세를 가했다. 걸사비우가 전사하고 대중상이 병사하는 등 주요 지도부가 붕괴된 어려운 상황에서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후퇴를 반복하며 이해고와의 전투를 지속했다. 그렇게 그들은 천문령에서 일대 격전을 벌였고 승리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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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주 습격 登州襲擊

A.D 732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자, 좌령군 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이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하였다."

무왕이 즉위한 이래 발해는 활발한 정복 사업을 벌였다. 이는 당의 입장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기에 때마침 흑수말갈이 입조한 것을 계기로 당은 흑수말갈 지역에 관청을 설치하여 동서 양면에서 발해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발해는 이러한 당의 조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무왕은 대문예로 하여금 당과 연합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으나 대문예는 오히려 당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어진 대문예의 처분 문제로 당과 발해 사이의 갈등은 더 심화되었으며, 이는 곧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발화되고 말았다. 그 전초전은 장문휴의 등주 습격이었으며, 당시 발해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신당서』의 「오승자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에서는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가 발생하였으며, 등주라는 항구도시는 완전히 파탄났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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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전투 公山戰鬪

A.D 927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을 빼앗고 전야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통일신라 말기에 신라의 지배력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점차 국가의 체계를 갖추면서 옛 삼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통성을 세우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하고, 이어서 왕건이 궁예를 축출해내며 한반도는 후백제-고려-신라의 형세를 구축하게 되었다. 특히 왕건과 견훤은 삼한일통의 경쟁자로서 충돌이 불가피했고 신라와의 대 외교 관계에서도 그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는데 결국 먼저 견훤이 직접 후백제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시해하고 금성을 유린하자, 왕건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원군으로 참여하였다. 이 둘의 주력군은 공산에서 맞붙게 되었고, 결과는 후백제군의 대승이었다. 이 전투의 피해로 고려는 신숭겸, 김락과 같은 주요 지휘관들을 잃었으며, 왕건 본인도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 탈출하는 굴욕을 맛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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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전투 古昌戰鬪

A.D 930

"구차히 살려는 마음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싸워야만 승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적과 마주하고 있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기세가 꺾여 달아날 걱정만 하면 어찌되겠습니까? 만약 뒤쫓아 가 구원하지 않고, 고창군의 3천명 넘는 군사들을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준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길 바라옵니다."

공산 전투에서 견훤이 대승을 거두자, 후백제는 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며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드디어 견훤은 상주에서 고려의 경상도 마지막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고창을 점령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기 시작했다. 당시 후백제군이 워낙 기세등등했기에 왕건은 고창을 포기할 것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유금필의 진언에 따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진군하였다. 고려와 후백제의 양측 군사가 각각 병산과 석산에 진영을 배치한 채, 치열한 전투가 3~4일간 지속되었다. 마침내 견훤에게 반감을 가진 고창 일대 신라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그 틈을 타서 유금필이 저수봉에서 정예 기병을 이끌고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자 견훤은 대패했다. 후백제군의 전사자만도 8천여 명에 달했고 견훤도 겨우 목숨만 건져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 전투의 복수 뿐만이 아닌 후삼국 시대의 향방을 결정지었다는 것에서도 이 전투는 그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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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 전투 一利川戰鬪

A.D 936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후삼국 시대를 종결지은 최후의 전투.

고창 전투를 계기로 후삼국의 주도권은 고려에게 돌아갔으며, 이후 고려는 전방향에서 후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후백제의 판도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934년, 멸망한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귀순한 데 이어 오랜 전란을 더이상 버티지 못한 천년 왕조 신라도 마침내 935년, 고려에게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후삼국의 2/3를 아우르는 영토들을 모두 평정하였고 이제 남은 것은 후백제 한 나라뿐인 상황이 되었다. 그러한 와중, 왕건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또 찾아왔다. 후백제의 후계자 다툼 끝에 맏아들 신검이 이복동생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한 것이다. 견훤은 기회를 틈타 탈출해서 고려로 귀부하였으며, 왕건은 평생 동안 싸워왔던 이 희대의 라이벌을 상부(尙父)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다. 견훤은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벌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며 왕건에 대한 적극 협조를 약속하고, 마침내 고려와 후백제의 양군은 일리천에서 총력전을 각오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자가 후삼국의 난세를 통일하고 새로운 한반도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귀주대첩 龜州大捷

A.D 1019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 낙타, 갑옷, 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가파른 성장을 보이고 있었으나 그 성장과정은 탄탄대로만 걸을 수는 없었다. 외교 관계에서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로도 팽창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고려는 북진정책과 송과의 화친으로 인해 거란에 대한 적대노선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양국간의 이해관계는 국가의 명운을 건 대규모의 전면전으로 이어졌으며 이렇게 발화된 여요 전쟁은 2차례에 걸쳐 지속되었다. 마침내 소배압을 총대장으로 하여 10만의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하며 제 3차 여요 전쟁이 발생하자, 상원수 강감찬이 이끄는 약 20여 만의 고려군은 수공, 유격전, 청야전술, 포위 섬멸전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거란의 대군을 격멸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고려는 국가의 위상을 굳건하게 함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후 120여 년간의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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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성 전투 龜州城戰鬪

A.D 1231-1232

"안 된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릴 것이다."

몽골에서 일어난 기마민족의 폭풍은 유라시아를 집어삼켰고, 고려 역시 그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몽골은 살리타이를 총대장으로 하여 고려를 침공했으며, 곧이어 압록강을 넘어 의주, 철주 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남하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고려의 군세가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당시 귀주성을 지키던 박서와 김경손만은 몽골군에 맞서 끈질긴 저항을 이어나갔다. 특히 당시의 김경손은 낙석에 깔려 죽을 뻔한 위기를 겪고도 두려운 기색없이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하였으며, 이는 고려 관민의 정신적 결집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231년 9월부터 1232년 1월까지 장장 4개월 간의 기나긴 공방전을 치루며 고려군은 귀주성을 수성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래도 불리한 전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마침내 고려 조정이 몽골과의 강화를 택하며 항복을 명했기에 박서와 김경손은 결국 왕명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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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 處仁城戰鬪

A.D 1232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1232년 8월 몽골의 대대적인 2차 침략이 시작되고, 서경을 함락한 이래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살리타이는 전란 당시의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작은 토성(土城)인 처인성(處仁城)을 마주하기에 이른다. 이에 처인성의 수호장을 맡게된 승려 김윤후는 군민들에게 무기를 나눠 주고 전투를 앞둔 채 동요하는 그들의 심리상태를 진정시켰으며, 적들의 주요 공략지로 판단한 처인성 동문 밖에 저격수 수십 명을 배치시켜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고 기적이 일어났다. 김윤후가 쏜 단 한 발의 화살이 몽골군의 총대장 살리타이를 즉사시킨 것이다. 총사령관이었던 살리타이의 사망은 몽골군에게 있어서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몽골군은 결국 고려의 왕이 나올 때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고려와의 강화를 체결하며 철군하게 되었다. 이후 김윤후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관작을 하사받았으며, 21년 후의 충주 부곡 전투에서도 활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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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三別抄─亂

A.D 1270-1273

"왕이 다시 김방경을 시켜 토벌하게 했는데, 김방경이 힌두 등과 함께 공격해 들어가자 적은 마침내 궤멸되었다. 김통정이 잔당 70여 명을 이끌고 산 속으로 도망쳤다가 목을 매 자결하니 탐라가 드디어 평정되었다."

배중손이 군사를 일으킨 이래 강화도, 진도, 제주도를 돌며 수년간 고려 조정과 몽골제국에 대항한 삼별초의 반란은 김통정의 자결로 그 끝을 맞이하였고, 이후로 고려는 몽골 제국의 부마국으로서 내정간섭을 감수하여야만 했다. 몽골제국은 그 외에도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1273년부터 1290년까지 제주도를 직할하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다. 그리고 오키나와에 남아있는 12-13세기의 유물, 유적들이 대부분 고려의 양식과 그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것을 근거로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이동하여 류큐왕조의 역사에 기여한 것으로 보는 오키나와 이동설이 조금씩 조명되고 있는데, 위와 같은 사례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삼별초의 난을 두고 발생한 수많은 역사적 입장과 논쟁들을 차차하더라도 이 시기 벌어졌던 삼별초의 난은 당시 고려의 정치적, 국제적 지형에 큰 변화를 이끌었음이 확실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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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수복전 開京收復戰

A.D 1362

"저희끼리 밀고 밀치다 죽은 적들의 시체가 가득했고 10만이 넘는 적들의 머리를 베었으며 원나라 황제의 옥새(玉璽)와 금은보화, 금·은·동으로 만든 인장, 무기 등의 물품을 노획했다. 그 잔당인 파두반(破頭潘) 등 10여만 명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도망쳐 버리니 적도들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추진하며 고려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 하였으나, 대륙에서부터 시작된 홍건적의  불길은 고려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고려는 그렇게 발화된 홍건적의 첫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은 또다시 20만의 군세를 이끌고 2차로 고려를 침공했으며, 결국 공민왕이 개경을 빼앗기고 안동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안우와 이방실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무장들은 병력을 재편하여 반격을 준비했으며, 홍건적과의 치열한 공성전에 돌입한 끝에 마침내 개경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 신흥 무인들이 큰 전공을 세웠으며, 이들은 훗날 고려 역사의 방향을 결정지을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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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 전투 鴻山戰鬪

A.D 1376

"신이 비록 늙었으나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뜻은 결코 쇠하지 않았으니, 빨리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놈들을 격퇴하게 허락하여 주소서."

이 시기 고려를 위협했던 것은 비단 홍건적 뿐만이 아니었다. 서북면에서는 북원과 나하추의 잔당이, 동북면에서는 여진족이, 남방에서는 왜구가 사방으로 고려를 향해 위협을 가하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376년에 쳐들어온 왜군은 나주, 부여, 공주, 논산을 점령하고 그  일대를 약탈하며 세력을 불려 나가고 있었다. 이에 최영은 당시 60세를 넘긴 노구였으나, 우왕을 설득하여 홍산 일대에 잡결한 왜군을 맞아 직접 전장에 선봉으로 나섰다. 입에 화살까지 맞을 정도로 치열했던 전투를 치룬 끝에 최영은 큰 승리를 일궈내었고, 이후 '백수 최만호' 로 불리우며 왜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전투가 벌어졌던 홍산 일대는 그 전장의 규모가 작았던 데다가, 당시의 국면에 있어서 영향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기에 홍산 전투 자체를 두고 '대첩(大捷)' 이라 부르기엔 많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때 당시 최영이 거둔 승리는 고려 말기의 혼란을 종식시킬 그 발판이 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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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전투 荒山戰鬪

A.D 1380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홍산에서 최영이 대승을 거뒀다고는 하나, 왜구의 침공은 기름칠한 짚단을 태우는 불길처럼 그 열기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최무선이 진포에서 500여 척의 규모를 자랑하는 왜구의 대선단을 맞아 이들의 함선을 대부분 분멸하는 큰 승리를 거뒀지만, 이때 함선을 잃은 왜구들은 내륙으로 흘러들어간 기존의 왜구들과 결합하여 더 방대해진 규모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결국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의 삼도 순찰사로 임명하여 점점 기세를 올리고 있었던 왜군의 주력부대와 맞서게 하였고, 마침내 이성계는 황산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이성계는 고려를 구한 구국 제일의 영웅으로 조명받게 되었으며, 이는 차후 이성계를 따라 고려의 개혁 혹은 신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신진사대부들의 정치적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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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전투 開京戰鬪

A.D 1388

"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고 남옥의 막북원정으로 북원 세력이 궤멸하자 두려울 것이 없어진 명나라는 고려에 대한 외교적 강경책의 일환으로 철령위의 설치를 요구하였다. 이 일을 두고 고려의 두 명장 최영과 이성계 사이에서 논쟁이 일었다. 당시의 최영은 요동 공격론을 내세웠으나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논거하며 요동공격의 불가능성을 역설한 것이다. 결국 최영의 의견대로 고려는 5만의 공요군을 구성하였으며, 이성계는 압록강 너머의 위화도까지 북상하여 공요군을 정착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장마철에 불어난 물은 더 이상의 행군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지속적인 익사자와 아사자의 발생으로 사기마저 바닥을 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계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요군은 즉시 회군하여 개경을 공격하였고,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도 최영은 분투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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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저강 전투 婆猪江戰鬪

A.D 1433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 촌토(尺地寸土)라도 버릴 수 없다."

조선 세종의 대북방 정책인 4군과 6진 개척의 전초전.

개국 이래 조선은 태종과 세종대에 이르러 정치,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허나 개국 이전부터 이어져 온 북방 여진족의 위협은 더더욱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아져만 갔고, 당시 세종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는 좌시할 수가 없었다. 이후 세종은 화약무기와 그 체계를 발전시키고, 진법 훈련을 확대하는 등 철저히 여진 정벌을 계획하였다. 마침내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며 여진 정벌전을 실현시켰고, 최윤덕은 파저강 일대에서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행하였다. 조선측의 피해로는 사상자만 9명을 내었던 데 반해 여진족은 170명의 사망자를 내고, 236명이 포로로 사로잡혔으며 천여 점 이상의 무기손실을 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가축과 군마가 조선군에게 노획당하고 수많은 부락이 없어지는 등 여진은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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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 해전 玉浦海戰

A.D 1592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태산과 같이 무겁게 움직여라."

이순신의 첫 해전이자,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

200년 간 대규모의 외침없이 긴 평화를 누려옴과 함께 군역의 체계가 무너져 가던 조선은 4월 13일, 부산포로 순식간에 닥쳐온 일본 정규군의 침공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며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결국 탄금대에서 신립의 패배로 조정은 몽진을 결정하기에 이르고, 개전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빼앗긴 이후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를 겪으며 조선은 급속도로 무너져가는 듯  보였다. 그때, 바다에서 국면의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조선 수군이 첫 승전보를 전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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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해전 閑山海戰

A.D 1592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 장쾌한 대승.

옥포의 승전 이후에도 이순신이 잇다른 해전에서 연승연승하며 그 기세를 이어나가자 일본군은 단순한 병력의 피해 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보급에도 난항을 겪으며 전세의 불리함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용인 전투의 승리로 이름을 알린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대규모 병력을 증원해 주며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와의 연합을 통해 조선 수군과 결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공로에 눈이 멀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단독으로 출정하였고, 곧이어 이순신은 견내량에 정박해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대함대를 한산도 근해로 유인해 내었다. 마침내 이순신이 구상한 학익진에 걸려든 일본 전선들이 대부분 분멸되었다. 연이어 안골포에서도 큰 타격을 입게 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해전을 포기하기에 이르고,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으며 장기농성을 준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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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진주성 전투 第一次晋州城戰鬪

A.D 1592

"대개 온 나라가 무너진 나머지 한 사람도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만은 홀로 외로운 성을 능히 굳게 지키면서 바깥 원조도 받지 않고 큰 적을 물리쳤습니다. 그리하여 한 도를 온전하게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호남으로 가는 길을 막아 적으로 하여금 내지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목사의 공이 이에 더욱 크다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의 치열한 혈투끝에 전라도 방어선을 지켜낸 대승.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의 활약과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함으로 인해 수륙 병진 작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고, 조선의 육군도 본격적인 방어태세를 구축하기 시작하자 기세가 꺾인 일본군은 전세의 반전을 꾀하기 위해 곡창지대인 호남 진입을 노려 진주성을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이어 진주성을 응원하러 온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최후로 시작된 전투는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3만의 일본군이 파상공세를 가해오며 치열한 공성전의 양상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그러나 진주성의 관민들은 성주 김시민의 지휘아래 끈질긴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여주었고, 6일 간의 공성전 동안 일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성 밖에서도 곽재우, 최경회, 김준민 등 조선의 의병장들도 끊임없이 유격전을 감행하며 일본군에게 지속적인 손실을 입혔으므로 우키다 히데이에는 결국 전멸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진주성에서 퇴각을 결정하여야만 했다. 고된 혈투끝에 이룬 조선군의 장쾌한 대승이었으나 진주성의 성주 김시민은 이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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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전투 幸州山城戰鬪

A.D 1593

"남아(男兒)는 감의기(感意氣)요, 공명(功名)을 수복론(誰復論)이겠는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 수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대승.

평양성의 탈환 이후 권율은 행주산성에 주둔한 채 남하하는 조명연합군에 호응하며 일본군이 주둔 중이던 한양을 수복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벽제관에서 명나라가 패하며 전황은 급격히 반전되었고, 일본군은 한양의 지근거리에서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고 조선군은 천자총통,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수많은 화기를 이용하며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시간이 흘러 결국 화살이 떨어져 수세속에서 조선군의 패색이 짙어졌던 그때, 기적처럼 구원군이 도착했다. 정걸 혹은 이빈으로 추측되는 경기 수사가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실어 한강으로 거슬러 온 것이다. 게다가 같이 온 수십 척의 전라도 조운선도 일본군에게는 이순신이 인솔하는 조선 수군의 원군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일본군은 당황하며 최종적으로 퇴각을 결정하였고, 조선군은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3천의 조선군에 비해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할 정도로 승리에 집착한 일본군이었으나, 결국 참패를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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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진주성 전투 第二次晋州城戰鬪

A.D 1593

"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임진왜란의 전투들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으며, 가장 참혹했던 전투.

마침내 행주산성의 대승 이후 한양까지 조명연합군이 탈환하며 전세를 반전시키자, 일본군은 총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은 명과의 협상에 돌입하며 불리한 전황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김시민에게 당했던 진주성에서의 복수전을 계획하였다. 곧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주요 다이묘들과 본토에서 추가된 일본군의 전 병력이 진주성으로 향했다. 곽재우와 같은 수많은 의병장들이 구원을 거부하며 진주성의 방어를 포기하라는 권고를 할 정도로 양측간의 전력차는 엄청났다. 그러나 황진, 최경회 이하 대부분의 조선 지휘부들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일본군의 대공세에 맞서기로 하였으며, 곧이어 10만에 가까운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조선군은 7일간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너무나도 열세였던 전력차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기록에서는 이때 당시의 전투 이후 5만 명의 백성들이 학살당하였다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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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 鳴梁海戰

A.D 1597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며 전세의 판도를 뒤바꿔놓은 해전사의 기적.

심유경과 고니시의 사기극으로 강화는 결렬되었고, 이후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조선을 재침공한다. 개전 초기부터 조선은 정보의 혼선과 이로 인한 군왕 선조와 신료들의 오판으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으나 원균은 졸렬한 지휘로 칠천량에서 대패하였으며, 조선 수군도 궤멸당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일본군에게 호남의 진입을 허용하고, 수륙 양면에서 수도 한양과 내륙의 조명 연합군이 동시에 전면적으로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복직하자마자 곧장 궤멸된 수군을 수습해내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선조조차 수전을 포기하라 권고할 정도로 전력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던 가운데 1597년 9월16일(음력), 이순신은 명량해협에서 단 13척으로 백 삼십여 척 이상의 대규모 일본 수군 선단과 맞섰다. 그리고 이 날의 장쾌한 대승은 역사에 남게 되었고,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여 전황의 반전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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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 露梁海戰

A.D 1598

"전투가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과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이어진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

명량 해전 이후 직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이 남하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에만 전전하고 있었던 도중, 본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고, 이에 일본 전군은 철군 준비를 서둘렀다. 그 중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서 이순신의 봉쇄망에 갇혀 철군에 난항을 겪게 되었으므로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남해의 소 요시토시,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수백척 이상의 대선단을 꾸리며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노량해협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명의 진린과 연합 함대를 꾸린 이순신은 야간에 해협으로 진입한 일본의 선단을 향해 기습 포격을 가했고, 순식간에 수많은 일본의 전함들이 불타올랐다. 연이어 조명 연합 수군은 포위망을 좁혀가며 일본군의 선단을 압도적으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승세가 완전히 조명 연합 수군에게 기운 순간, 눈먼 탄환이 이순신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렇게 최고의 영웅은 자신과 조국의 마지막 전투와 그 승리를 끝까지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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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 전투 薩爾滸之戰

A.D 1619

"너무나 순식간이라 구원할 틈이 없었다. 석양 아래 쏘는 화살이 비와 같고, 철마들이 오고가는 것이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려울 따름이었다."

절대적 강국 명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운 사이, 누르하치의 만주족은 급속도로 거대해졌고, 이윽고 명나라는 이들을 서둘러 제압하지 않는다면 큰 재앙에 직면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조선 조정도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며 지원군을 파견하였고, 명나라와의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의 대규모 원정군은 전력만 보자면 후금의 군세를 격파하고도 남았으나, 지휘관들의 무능한 지휘 탓에 분산되어 각각 호랑이 아가리 속을 향해 진격하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노련한 누르하치는 승리의 냄새를 놓치지 않았고, 만주족의 기동력과 각개격파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때 파견된 조선군은 7천 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항복하여 포로로 잡힌 이가 2천 7백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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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李适—亂

A.D 1624

"관군이 적과 안현(鞍峴)에서 크게 싸웠는데, 적병이 크게 패하여 도망쳤다. 애당초 이괄이 정사(靖社)하던 때에 큰 공을 세웠으나 조정의 대우가 그의 뜻에 차지 못하였다. 이괄이 자기의 재능을 믿고 국가를 경시하여 불궤(不軌)를 음모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잡히게 되자 자기 휘하를 협박하고 한명련(韓明璉)과 연합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평안도 병마사 이괄은 인조반정의 공신이었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는 상황이었고, 조정 신료들은 지속적으로 이괄에 대한 역모 고변을 제기하고 있었다. 마침내 이괄은 조정으로부터의 압송을 요구받게 되고, 곧바로 금부도사를 죽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괄 휘하의 반란군들은 북방 방어를 위해 기존부터 육성되어 오던 정예병이었고, 이들은 항왜 세력과도 결합되어 있었기에 반란 초부터 관군에 비해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였다. 곧이어 이괄의 반군은 한양을 점령하기에 이르지만 정충신이 중심이 된 관군의 지휘부는 안령을 점거하며 반격을 개시했고, 이괄의 도성 점령은 불과 며칠 만에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괄의 난 이후 조선의 북방 방어선은 약화되었으며, 이것은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압주의] 주관적으로 선정한 한국사 45대 주요 전투 | 인스티즈

용골산성 전투 龍骨山城戰鬪

A.D 1627

"정봉수는 의병을 소집하여 외로운 성을 고수하면서 먼저 장사준을 베어 사기를 치솟게 하였고, 대부대의 적이 쳐들어 왔을 때에는 힘을 다해 죽을 각오로 싸워 적의 선봉을 무찔러서 보전시켰으니, 옛사람 중에서 찾아보아도 이런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정묘호란의 급박한 국면을 안정시킨 수성전.

누르하치 사후 그를 계승한 홍타이지는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인 조선을 쳐서 양면전선의 형성을 방지해야 한다고 여겨 아민으로 하여금 3만의 병력을 이끌게 하고, 사르후 전투 당시 항복한 강홍립을 길잡이로 삼아 조선을 침공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후금의 말발굽에 의주, 안주, 정주, 평양, 황주 등 조선의 북방 거점들이 연이어 함락되자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기에 이르고, 소현세자 역시 전주로 내려가며 분조를 이끌었다. 전황의 열세가 호전될 기미가 없었기에 후금군이 얼마안가 한양으로 진입할 듯 보였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후금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 용골산성에서 의병장 정봉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후금군의 공세를 연달아 막아내고 끊임없는 유격전을 전개하며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용천에서도 이립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자 조선 내에서의 고립 위기를 직면한 후금군은 결국 조선과 상호 형제국의 예를 맺는 조약을 체결하며 본국으로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위기는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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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전투 南漢山城戰鬪

A.D 1637

"다만 생각하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병자호란을 끝낸 조선의 비극적인 수성전.

홍타이지는 후금이라는 기존의 국호를 청으로 바꾸며 조선에게도 형제의 예가 아닌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다. 기존에 맺었던 형제국으로서의 관계도 꺼림칙했던 조선은 홍타이지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리가 만무하였고, 이에 청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명을 공략하기 이전에 확실히 배후를 안정시켜야 했던 청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이와 같은 태도가 아주 좋은 구실이 되었고, 결국 청은 또다시 조선을 공격하였다. 청은 주요 방어 거점들을 우회하며 신속히 남하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먼저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신시켰고, 인조의 본 조정은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곧이어 홍타이지의 청나라 본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군은 장장 40여 일간의 끈질긴 수성전을 전개하였으나, 장기전으로 인한 식량난과 병사들의 지속적인 사기 저하를 동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침내 왕자들이 피난 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항복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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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촌 전투 黃龍村戰鬪

A.D 1894

"연달아 들려오는 소식에 호남(湖南)에서 비적(匪賊)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출몰하면서 다시 전주부(全州府) 근처에 육박하였다고 합니다. 경군(京軍)을 출동시킨 지 벌써 수십 일이 지났건만 즉시 소멸하지 못하여 도적에게 느긋하고 대처하고 있으니 참으로 해괴한 일입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은 사상과 정치의 붕괴가 심화되고, 개화와 동시에 열강이 각축전을 벌이는 무대로써 지독한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당시 그 여파를 받고 있던 조선의 민중들도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으로 시작된 동학교인들의 집회를 중심으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우며 사회의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은 이후 전봉준을 위시한 남접의 동학교인들이 '보국 안민' 과 '제폭 구민'을 외치며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나선 조선의 민중들은 장성 일대의 황룡촌에서 관군에 승리하는 성공을 거두며 전주성에 입성, 조정과 전주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 자주적인 개혁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이후 조선을 향한 외세의 개입이 본격화되었기에 결코 민중의 그 의지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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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牛禁峙戰鬪

A.D 1894

"지난 10월 23일에 후원 참령관(後援參領官) 구상조(具相祖)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公州)의 효포(孝浦)에서 파수하고 있었는데, 비적 전봉준(全琫準)이 옥천(沃川)의 비적들을 대교(大橋)에 모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가보니, 숲기슭에 모여서 기(旗)를 세우고 둘러선 자가 족히 수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동학의 1차 봉기는 선전하여 전주화약을 맺는데에 이르렀으나, 청과 일본의 국내 개입 시도로 동학 농민군은 조정과 합의하며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양을 점령하고 청과의 조약파기를 강요하며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내정 간섭이 심화되자 반일을 기치로 내세운 2차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때는 그동안 관망 자세로 있었던 북접의 지도자들도 참가하여 수만 명 이상의 대규모 집결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 육군은 개틀링 기관포와 야포로 무장하며 화력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였으며, 동학 농민군은 결국 공주 우금치에서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자들은 관군에 의해 대거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결국 실패로 끝난 동학농민운동이었지만 거기에서 보여준 민중의 자주의식은 이후의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전주화약에서 비롯된 동학 농민군의 의견이 갑오개혁에 반영되며 하층계열로부터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반외세의 기치를 최초로 내건 무장투쟁으로써의 그 정신은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의병 운동과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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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전투 崇禮門戰鬪

A.D 1907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恩金)을 나누어주니 너희들 장교(將校), 하사(下士),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각기 자기 업무에 나아가 허물이 없도록 꾀하라."

통감부는 1907년 8월 1일 아침 7시에 서울 내 모든 대한제국군 지휘관들을 소집하였고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병부대신 이병무가 순종 황제의 조서를 낭독했다. 대한제국군을 해산한다는 것이었다. 박승환 참령은 이를 장병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군대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자신의 방에서 권총으로 자결하였으며, 이에 격분한 장병들은 일선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하였다. 대한제국군은 일본군이 3회에 걸쳐 돌격을 반복할 정도로 분투했지만 전력의 차이는 명확했다. 야포나 기관총 같은 중화기들과 소총의 탄약들이 모두 일본군이 장악한 무기고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숭례문 누각을 선점한 일본군의 기관총 제압 사격과 견제로 인해 대한제국군은 병영 안에서 고립 되었고, 시가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싸웠던 이들 중 다수는 이어지는 정미의병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이후의 무장 독립투쟁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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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鳳梧洞戰鬪

A.D 1920

"싸움을 끝내고보니 독립군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땅에 풀썩 주저 앉으며 「독립군들이 안개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어두워서야 호박골로 후퇴하던 일본군은 피파골에서 오는 자기쪽 지원군들과 오해로 말미암아 전투가 있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자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방해하고 소탕하기 위한 일본의 진공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1920년 6월, 홍범도를 필두로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에서 정규 일본군인 월강 추격대대와 교전하였다. 일본군의 추격대는 우수한 화기를 갖추었기에 홍범도는 이들과의 화력격차를 극복하고자 매복전을 구상하였고, 홍범도의 예측대로 일본군의 추격대가 매복장소로 다가오자 사방에 숨어있던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지형문제 때문에 압도적인 화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제대로 반격조차 못한 채 퇴각했다. 당시의 전공이 과장되었다는 논란은 차차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이 전투에서의 성과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독립군 연합 지휘부의 일원화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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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靑山里戰鬪

A.D 1920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 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어리, 두 덩이씩 동지들 입에 넣어 주었다."

10월 21일을 시작으로 6일 동안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연합 부대는 만주 허룽현의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에 걸친 일련의 전투들을 벌였고, 마침내 10월 25일 저녁부터 그 다음날까지 이어진 일본군의 습격을 고동하 계곡에서 저지시키며 최종전투까지 완전히 끝마치게 된다. 이 전투는 독립군들의 전과와 그 규모에 대해서 의문점들이 많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당시의 전투로 독립군을 섬멸하겠다는 일본 측의 작전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무장 독립투쟁도 다양한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혀져 오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하였고, 소련의 제안에 따라 적백내전에 참여했다가 자유시 참변에 휘말리면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역량도 상실했다. 즉 이 전투는 한국 독립군 세력이 단일 체계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인 마지막 전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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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방어선 전투 漢江防禦線戰鬪

A.D 1950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모름지기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상사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든가, 아니면 제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분단과 함께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개전 초반부터 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뺏기고, 부대간의 지휘체계마저 와해되며 전력 이탈이 가속화되던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이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부임한 김홍일 소장은 곧바로 전방으로부터 무질서하게 철수하는 병력과 기존 경인지구의 관할 부대들을 재편성하며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력부대들이 흩어진 지 불과 10시간 만에 3개 사단으로 재편성된 국군은 한강 방어선에서 도하를 시도하려는 인민군을 맞아 지연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애시당초 국군은 한강 방어선에서 당초 3일간만을 목표로 적의 도하를 저지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한 6월 28일부터 그들의 전차가 한강을 도하하여 경부국도로 진격한 7월 4일 아침까지의 일주일 동안 한강 방어선을 고수해냈다. 이로써 국군은 흩어진 부대를 재편성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에 필요한 시간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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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仁川上陸作戰

A.D 1950

"인천상륙작전은 5천 대 1의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런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이다."

6.25 전쟁이 발발한 이래 인민군은  겉보기에는 승리를 거듭하며 낙동강 안으로 국군을 포위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길어진 보급로와 지속되는 전투, 미군과 유엔군의 합류 이후 증강된 화력이 정예부대의 전투력을 나날이 갉아먹는 상태였다. 그 시기 인민군의 주요 보급로는 경부선철도와 경부국도였는데 이 노선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하였고, 이들과 가까우며 해안가를 둔 지리적 요충지는 바로 인천이었다. 당시의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러한 점들에 착안하여 인천에 상륙작전을 펼쳐 인민군의 보급로를 끊고, 서울을 수복하고자 하였으며 마침내 9월 15일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인천의 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컸으며 넓은 갯벌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에도 사실상 상륙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다양한 제약들이 존재하였지만 유엔군이 실시한 일대의 작전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곧이어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과 서울을 연이어 수복하며 인민군에 대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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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長津湖戰鬪

A.D 1950

"산 중턱에 포진한 중국군을 다음날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 날, 거기서 움직이는 중국군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얼어죽은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개성, 해주, 평양을 연이어 점령하고 마침내 압록강에 이르러 통일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한반도로 진입한 중공군은 동시 산발적이며 지속적인 유격전을 감행하여 맹렬한 기세로 국군과 유엔군에게 끊임없는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내준 채 북위 37도선 이남의 평택-제천-삼척까지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당시의 가장 참혹했던 전투는 장진호 전투였는데, 중공군 9병단 예하 7개 사단에 고립된 유엔군이 그 포위망을 뚫어내며 양측 사이에 수많은 사상자와 실종자를 발생시킨 이 퇴각전은 단순한 군사적 교전뿐만이 아닌 전장에서의 기후도 그 영향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최저기온이 영하 45도에 달했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양측이 도합 만 명을 넘기는 수많은 동사자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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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 白馬高地戰鬪

A.D 1952

"사단이 적 공격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중 10월 6일 06:00부터 같은 날 19:00까지 백마고지 일대에 대한 적의 맹렬한 포사격이 실시되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4 후퇴를 겪으며 북위 37도선 이남까지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개시하였고, 마침내 1951년 3월 서울을 재탈환하여 전세의 균형을 다시 맞추게 되었다. 이후부터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곧이어 1951년 7월부터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전투에서도 상대방의 진영으로 직접적인 충돌을 가하는 전면전에서 전선 주변의 전술적 요지를 두고 벌이는 고지전으로 그 양상이 변화되었다. 그 변화를 겪으며 벌어졌던 가장 치열한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였다. 열흘동안 국군의 제 9사단과 중공군 제 38군 산하 3개의 사단이 교전하여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던 이 전투는 중공군이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고지의 북쪽 능선에서 최종적으로 후퇴, 마침내 국군의 완벽한 승리로 그 끝을 장식하게 되었다.

가독성 떨어지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에서 선정한 전투들 외에도 중요한 전투들이 많았지만 한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마다 그 순간을 관통했던 전투들을 위주로 최대한 서사에 맞춰 기술하려 했습니다.

기술된 내용 외에도 언급이 좀 더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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