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오래된 취미, 이현호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하늘냄새, 박희준
나는 계속 완벽한 실패에 대해 실패하였네
/시, 허민
초라한 골목이 어째서 해가 지기 직전의
그 잠시동안 황홀할정도로 아름다워지는지,
그 때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 깃드는 적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달콤하고 또 괴로워 울고싶었을 뿐.
/고요한 사건, 백수린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습니다
내가 세상의 꽃들과 들풀, 숲의 색을 모두 훔쳐올 테니
전부 그대의 것 하십시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도둑이 든 여름, 서덕준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불멸의 표절, 정끝별
나는 거지였다.
코를 박고 납작 엎드려 사랑을 구걸했다.
딱딱한 애정 한조각
어쩌다 흘린 미소 한 푼에 감지덕지했다.
나는 개였다.
걷어 차이고 돌을 맞으면서도
요요요 불러주기만 기다렸다.
부러져라 꼬리를 흔들며
피멍든 주둥이로 네 손을 핥았다.
/어떤 조사, 강무순
잠시 머물렀다 가는
간이역이 돼도 좋다
그대, 부디 한 번만 정차하여라
/조우, 이훤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장미꽃나무 너무 다정할 때 그러하듯이
저녁 일몰 유독 다정할 때
유독 그러하듯이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다정이 나를, 김경미
하도 오래 살았더니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 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 삼아 남의 눈물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
/슬퍼할 권리,노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