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주전에 그쪽 옆집으로 이사온 김여주라고 해요. 아, 워낙 집밖으로 안나오셔서 제가 이사온지 모르시려나요? 사실 이 편지를 읽으실지도 의문이네요. 그래도 제가 다른 우편물들하고 차별화 좀 두려고 스티커도 붙여놨는데. 물론 시시콜콜한 안부나 묻자고 편지한건 아니니까 꼭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해요.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제 딴에선 성공이긴 해요. 그럼요. 그쪽이 아직 살아 숨쉬어서 제 편지를 열어봤단 소리니까요. 근데 제가 이런 딱딱하고 무거운 형식의 편지는 영 어색해서 펜 움직이기가 힘드네요, 중간 중간에 말 좀 편하게 할게요. 억울하면 창문에 대고 욕해요. 따지러 찾아오면 더 좋고요.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현실성이 좀 떨어지기는 한데, 한치의 거짓도 없다는점만 알아주세요. 그 후에는 그쪽이 이 편지를 불태우던 찢어버리던 신경 안쓸테니까요.
[일구서해]prologue
: 일반에서 구반, 서울에서 해남
w. 일벌
삼년 전, 고등학교 이학년때 제가 좋아하게 된 친구가 있었어요. 유치원때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했던 남자애 이후로 처음이였으니까, 거의 첫사랑이였던 셈이죠. 그렇다고 쭉 좋아하진 않았어요. 원래 그 시기쯤엔 한달에 한번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잖아요. 저만 그런걸수도 있고요. 어쨌든 그 시기의 저한테는 뒤로가기 패치가 없었어서, 그 친구 반에 찾아가 무턱대고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반 아이들 다 보는 앞에서 대차게 까였어요. 말 한마디 안해본 사이였으니까 당연한 결과였죠. 저도 고백을 받아줄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냥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던거죠. 내가 얘 찍었다고.
그 뒤부터 그 친구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정확히 두달 후에 포기했어요. 말 했잖아요, 쭉 좋아하진 않았다고. 무슨 이런 끈기없는 여자가 다 있냐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근데 이게 생각보다 엄청 힘든 일이거든요. 의미없는 말에 혼자 의미 부여하고, 의미 있었을지도 모를말은 의미 없다고 치부해버리고, 너무 높아서 바닥이 안보이는 산꼭대기에서 외줄타기를 하는데, 그 관객은 내가 아니라 산 경치를 구경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만 뒀어요. 아침마다 책상위에 초코우유 올려두던 짓도 그만하고, 시험 요점 필기한 공책 주는짓도 그만 뒀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공부는 나쁘지 않게 하는 편이였거든요. 어쨌든 헛짓거리를 그만 두고 얼마 안지나서 걔가 찾아와서 묻더라고요. 왜 요즘은 초코우유 안주냐고. 거기에 또 혼자 의미 부여해서 그 친구에게 되물었어요. 내가 초코우유 안줘서 서운했냐고.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라고요.
잘 생각했어. 그만 좋아해줘서 고마워.
그날 집에 돌아가는길에 엉엉 울었어요. 고작 열여덟이 무슨 사랑을 알겠냐고 비웃을진 모르겠지만, 제 딴에선 태어나서 이정도로 진심인적이 처음이였거든요. 차였을때랑은 비교도 안되는 비참한 기분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처음에는 나쁜놈, 길가다가 똥이나 밟아라,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 하고 그 친구를 욕하다가 나중에는 내가 뭐가 그렇게 모자라서 그렇게 모질게 말한건지, 내 얼굴이 예쁘지 않아서 그런건지 하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생각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내내 울다가 집에 도착할 쯤에 속으로 굳게 다짐했어요. 차라리 없었던 일처럼 굴자고. 마주쳐도 표정 하나 안바뀔거라고. 이딴 개자식 처음부터 좋아한 적 없었던 걸로 하자고.
다짐대로 시도하기도 전에 저절로 없던 일이 되어버린건 그 다음날이였어요. 종례를 마칠 때까지도 그 친구 그림자 한번 보지 못하고 그대로 하교했어요. 그 날 하루종일 최대한 피해다닌건 맞지만 정말 한번도 마주치지 않다니, 내심 서운하긴 했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죠. 계속 이렇게 마주치지 않다보면 서로 잊어가겠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의 다음날도, 일주일이 지나도 그 친구가 보이질 않았어요. 꼭 일정하게 자전하던 지구가 멈춘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그 친구를 찾아 나섰죠. 불과 일주일 전까진 어떻게든 피하려고 용을 쓰던 제가, 그 친구를 찾으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저는 일반이였고 그 친구는 구반이였어서 우연히 지나가다 봤다는건 말도 안돼는 극과 극의 거리였죠. 당시엔 그 거리가 제가 살았던 서울에서부터 여기 해남까지의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어요. 과장같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 땐 진짜 그렇게 느껴졌어요. 어쨌든 구반으로 향하다 되돌아가고, 다시 향하다가 멈춰서고. 그러길 반복하다가 겨우 구반에 도착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잘 살고 있는데, 정말 우연찮게 마주치지 않은것 뿐인데, 난 또 이 아이를 마주치기 위해 스스로 핑계를 만들고 있는건 아닌지 하는. 결국 도저히 문을 열 엄두가 나질 않아서 돌아섰더니 그 친구의 가장 친했던 친구가 제 바로 앞에 서있더라고요. 편의상 그 친구의 가장 친했던 친구니까 친친이라고 부를게요. 처음부터 얘한테 물었으면 되는건데, 뭐하러 이렇게 고생을 한건지 후회스럽더라고요. 머리까지 심장뛰는 소리가 전해질 정도로 떨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친친한테 물었어요. 걔 요즘 잘 살고 있냐고. 다시 마음이 생긴건 아니니 내가 안부를 물었다는건 말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려는데, 갑자기 친친이 제 말을 가로막고 쏘아붙였어요.
너 걔 전학간거 모르냐?
순간 누가 혀를 제멋대로 꼬아버린것처럼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머릿속이 새하얘진건 아닌데, 오히려 복잡해졌는데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처럼 멀뚱히 서있기만 했어요. 친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묻더라고요. 좋다고 따라다니던 애가, 전학간건 여태껏 몰랐던거냐고. 답답한 한숨을 내쉰 친친이 작게 중얼대는 소리가 제 귀를 파고 들어왔어요.
그럼 걔가 너 좋아했었던것도 모르겠네.
친친의 충격적인 발언에 무슨 소리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가 문을 열고 구반 안쪽으로 사라졌어요. 사고회로 기능을 잃은 뇌가 심장까지 고장낸건지, 분명 미친듯이 뛰던 심장이 오히려 잠잠해졌어요. 이러다 심장이 멎으려나보다 싶더라고요. 사람이 쇼크사로 죽는다는게 이런거구나 싶었죠. 말이 안돼잖아요. 그만 좋아해줘서 고맙다던 애가 저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나중에, 아주 나중에. 제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알게된 얘긴데 그 친구가 많이 아팠다고 하더라고요. 종종 원인 미상의 열에 시달리는걸 보긴 했는데, 그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저를 쫓아내서 신경 안썼거든요. 그냥 단순 두통인가보다, 하고 책상 위에 두통약 하나 올려놓고 돌아서곤 했죠. 근데 그게 아니였대요. 몸이 너무 안좋아서, 정말 너무 안좋아져서,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게 해남으로 꽁꽁 숨어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이건 같은 대학교에 가게 된 친친이 휴학신청 기간에 말해준 사실이예요. 웃기죠, 딱 그 시기에 말해준게. 그게 꼭 그 머저리 찾아내서 살리라는 소리처럼 들리더라고요. 당연히 친친이 먼저 찾아갔었죠. 근데 찾아가서 그 친구가 친친에게 한 첫 마디가 누구세요, 였대요. 절망한 친친이 그대로 서울로 올라와서 저한테 사실대로 털어놓은거고요.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를 마지막 카드로 사용하려는 친친이 미웠지만, 애초에 제 손에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어요. 걔를 찾아 나서는 일 말고는.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그래서 그 친구를 찾았냐고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찾은것 같긴 한데,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것 같아서. 솔직히 서운하긴 한데 어쩔수 없잖아요. 친친 말로는 그 친구는 자기가 기억을 잃은줄도 모른대요. 자기는 평생 해남에서 나고 자랐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아, 송두리째 기억을 잃은 애를 찾아내서 뭐 어떻게 할거냐고요?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때처럼,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처럼 졸졸 따라다니면서 두 달간 저를 행복하게도, 절망하게도 만들었던 그 친구에게 보답하는게 제 계획이긴해요. 보란듯이 그 친구랑 행복해질 테니까, 꼭 성공하라고 응원해 주세요. 그렇게 해주실거죠?
p.s. 제가 그 친구에게 어떻게 빠졌는지, 두달간 저를 얼마나 헷갈리게 했는지 궁금하시면 답장 주세요. 궁금하지 않으셔도 말씀드리긴 할거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