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의 계절 영재는 숨을 헐떡이며 재범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얼른 나가라며 조용히 손짓하며 웃던 그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라 영재는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는 그의 뒷모습은 오직 달빛만이 비추고 있었다. 재범이 처음 영재에게 반한 것은 여름께 풍금을 타는 모습에였다. 고운 손이 한 번 건반을 타면 물 흐르듯 유한 선율이 들렸다. 영재의 가는 손가락이 건반에서 떨어졌다. 재범은 그 때까지도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별 질문 없이 그저 재범과 눈을 마주쳤다. 재범은 영재의 눈 아래에 눈물처럼 찍힌 점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랑은 나비처럼 팔랑팔랑 가슴 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가슴 한 켠에 꽃이 피어났다. 영재와 재범은 쉽게 친해졌다. 가끔 영재가 풍금 타는 것을 재범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가을이 되어선 재범은 산에 들러 들국화를 꺾어 영재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건반 옆 빈 한쪽에 꽃을 모아두고 보답인 양 풍금을 마저 연주하는 모습을 재범은 거진 매일 바라보았다. 서로 무어라고 말은 안 했지만 둘은 여즉 가슴에 간질거림을 품고 있었다. 재범이 영재를 마주치기 전까지, 집 안 한 곳에 놓인 풍금은 사실상 애물단지와도 같았다. 영재의 부친은 풍금은 사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영재가 풍금 타는 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영재의 연주를 지켜봐 준 것은 모친 다음으론 재범이 유일했다. 영재는 그렇게 남 몰래 다른 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영재가 이처럼 도피하게 된 까닭은 절반은 재범에게, 나머지 절반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영재라고 사내를 좋아하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단 말이었다. 곁엔 다른 무엇도 없었다. 들국화 몇 송이가 영재의 곁을 지켰지만 위안이 되진 않았다. 꽃만 봐도, 풍금 건반 하나만 봐도 어른거리는 재범의 낯이 전혀 잊혀지질 않아서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