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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별꽃 전체글ll조회 2403l

 

 

 

 

 

 

 

기범은 제 머릿결을 살랑이는 바람결을 느끼며 조용히 소년을 쫓아 부산히 움직였다. 하는 것이라고는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창문 너머의 그를 살펴보는 것이 다 였으나, 기범은 그 것 나름대로 제 체력이 소비됨을 느끼고 있었다. 열린 창틈 새로 불어오는 가을의 바람이. 마냥 시리고 선선한 것만은 아니라 기분이 좋아졌다. 이어 교문을 비집고 드는 사람들에게 일일히 인사를 건네는 자그마한 뒷모습을 바라다보며 기범은 알 수 없는 기분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곱게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간질거렸다. 교복 끝자락을 쥐어잡은 손이 부서지도록 세게 부여잡은 기범은 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그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젯밤, 그의 생각으로 밤을 새던 탓에 미처 하지 못했던 숙제를 떠올리고선 제 자리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앉는다. 가방 지퍼를 열고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채 문제집을 찾기 위해 허우적대던 기범은, 얼마 가지 못하고 제 손에 잡히는 익숙한 형체에 놀라 두 눈을 가늘게 치켜떠야만 했다.

기범의 손에 잡힌 것은 본디 익숙해져서는 안될 악보였다.

 

 

 

나쁜 취미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돌리자, 이젠 눈에 익을대로 익숙해진 음악실의 풍경이 드러났다. 부러 창문을 열어둔 것인지, 크림색의 커튼이 소리없이 바람을 따라 너울거리며 빛을 마구 흐트러놓고 있었다. 끝없이 반사되는 빛무리 탓에 눈이 아려왔지만 기범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진기를 향해 다가갔다. 오늘도 진기는 피아노 앞에 앉아 아무렇게나 손을 놀리고 있었다. 박자도, 음계도, 악보도 소용없다는 듯이 마구 헤쳐놓는 손짓은 두서없이 서툴기만 했으나 기범은 그 것에서 저도 모를 일말의 회의감을 엿보았다.

이진기. 소리내어 불러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홀깃 기범을 향해 시선을 돌려둔 뒤, 계속해서 건반을 쳐 내려갈 뿐이었다. 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연주가 끝나고, 새로운 악장을 넘겨준 기범은 자리를 옮겨 바깥과 가까운 탁상에 걸터앉았다. 여차하면 금방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있었고, 너비가 큰 공간이니 그 사이에 숨어 사람들 몰래 그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도 있었다. 긴장감에 말라오는 침을 가져다 삼키며 기범은 그의 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

 

기범에게 악보를 건네받은 그 재수없는 후배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황스러운 눈을 들어 기범을 쫓아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도한 척, 고상한 척은 다 하던 놈이 그렇게 방어태세를 바꾸어오니 당황스러운 것은 기범도 마찬가지였다. 가을이라고 하더라도 9월의 중순은 늘 그렇듯 계절과 계절 사이의 오묘한 시점에 놓여져 있었다. 즉, 하복을 입기에도 동복을 입기에도 아직은 조금 애매모호한 시기였다는 말이다.

여름 특유의 무더위가 남아있는 공간 속에서 기범은 머리 춤이 팽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진기를 내려다보는 것조차도 그렇게 힘들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에게 악보를 건네주었으니 더 이상 할 말도, 해줄 위로도 없었다. 아마 그는 제게 어째서 제가 악보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고 싶어할 것이다.

애초부터 발길이 끊긴 음악실에 찾아온 목적도 그에게 악보를 돌려주는 것이었으니, 이렇다할 문제도 없어보였다. 신경쓰이는 것이라 하면, 후배의 옆구리에 끼워진 익숙한 색의 학생부 차트와 유난히 돋보이는 도톰한 입술이 다 였다. 무언가 건넬 말이 있는 듯 그는 줄곧 주저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기범은 애써 그 환상을 머릿 속에서 떨쳐버리려 애썼다. 그의 뭉툭한 손가락 사이로 걸쳐진 파일에 시선을 고정하며 그 곳에만 정신을 쏟으려고 집중했다. 사실 저와 이진기라는 작자가 이런 곳에서 만난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기범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제 앞에 선 소년을 살폈다. 제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제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걸 그에게 들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머릿 속이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기범은 진기에게 보이지 않도록 탁상 뒷편에 놓아둔 손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오돌토돌하니 튀어나온 주먹뼈가 더욱 도드라지도록 힘껏 힘을 주었다. 제 앞에 놓여진 악보를 매만지는 아이의 단정한 손끝에 기범은 급격히 갈증을 느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아침, 그의 뒷모습을 몰래 훔쳐보다 느꼈던 그 기분 나쁜 모든 것들이. 제 발끝을 애워싸고 종아리를 둘러 차례 차례 제 몸을 훑어내는 것 같았다.

기범은 부러 진기와 마주하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바깥 둘레로 돌아 음악실을 빠져나갔다. 문을 세게 내치고 나가는 순간, 찰나의 바람이 기범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놓았지만 그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이 아니었다. 서둘러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내달리며 기범은 숨을 들이마쉬었다. 숨이 막혔다. 가슴을 판판하게 편 채로 인적이 드문 복도를 가로질렀다. 계단을 오르고, 교무실을 지나 아무렇게나 흩어진 아이들 사이를 헤집은 기범은 제 교실 앞에 도착해서야 온전히 숨을 뱉을 수 있었다.

 

-

 

진기는 피아노를 잘 쳤다. 실은 잘 치는 수준에서 그칠 실력이 아니었다. 날고 뛰는 아이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에서도 몇 안되는 유망주로 손 꼽힐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타고난 재능에 받쳐주는 집안, 그리고 갖추어진 조건에서도 멈출 줄 모르는 노력은 단 기간에 진기를 정상의 자리에 앉혀놓았다. 나가는 대회마다 속속이 상을 타오고, 이름을 날리니 왠만해선 이진기와 같은 콩쿨에서 붙어선 살아남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기범은 그를 시기했다. 기범은 그를 범상치 않은 후배라 이야기했지만, 그 것은 겉치례에 지나치지 않았다.

진기에게는 제가 가지지 못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한 그 얼굴도, 어디 하나 못난 곳 없이 새하얀 그 성품도. 게다가 뛰어나기까지만 실력도. 그 어느 것 하나 기범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를 시기하고, 그를 봄으로서 열등감을 느꼈다. 저는 가져보지 못한 것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흔히 부러움을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향해 얻는 감정이라 하던데, 기범은 진기를 향한 제 감정을 부러움이라기보단 질투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라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아이를 두고 그리 큰 열등감을 가질 수가 없었다. 제가 출전하는 대회마다 따라나와 대상을 앗아가고, 제 손에 들어올 트로피, 상장, 상금을 뺏어갔다. 차라리 실력이라도 없었으면 부모 빽이 있다며 입을 놀리기라도 할텐데, 그가 건반 위에 손을 올려두고 연주를 시작할 때면 기범도 저도 모르는 새에 입을 떡하니 벌린 채 그의 모습을 올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타고난 천재 앞에 기범은 무릎을 꿇었고, 남 몰래 그를 시기하며 폄하했다.

진기를 향한 상반된 두 감정은 기범도 모르는 새에 기범을 천천히 갉아먹고 잠식해갔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조금씩. 기범은 무너져갔다.

그의 상상 속 진기는 언제나 패배자였다. 불상사를 당해 손가락을 다친다거나, 머리를 다친다거나 해 음악을 관두고 집에서 틀어박혀 사는 그런. 측은한 그림의. 그런 모습의 진기를 상상하고 있다보면 기범은 어느 새 제 몸을 끊임없이 감싸려드는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 것조차도 기범의 위험한 상상을 멈출 수는 없었다.

 

 

 

" 야, 너 그거 들었냐? "

" 뭐. "

 

기범은 멀뚱한 눈으로 제 옆에 앉은 동기들을 향해 술을 날라주었다. 왠만해선 적당히 치고 빠지는 게 적기라 하던 제 선배들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침이나 맥주가 섞였을지 모를 소주잔을 함부로 입에 대거나 남에게 섣불리 입가에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술이 부족하다 하면 부어주고, 안주가 부족하다하면 나서서 주문하고 이야기를 하면 들어주며 그저 이 밤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새로 들어온다는 신입생들의 이야기를 안주삼아 한껏 들떠있던 분위기는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한 동기의 입에서 나온 지나치게 익숙한 이름 때문이었다. 너무 놀란 탓인지 기범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후배에게 쏟아버렸고, 기범의 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버린 후배는 잔뜩 울상을 지은 채 가게에서 가져다주는 앞치마를 두를 수 밖에 없었다. 기범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민호가 더럽다며 끌끌 혀를 찼고, 그 옆에 앉은 후배 태민이 제 가방에서 물티슈를 건네주었다. 만약 복학생 형이 나서서 기범에게 핀잔을 주지 않았더라면 기범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냈을지도 몰랐다.

어, 어어. 이걸 미안해서 어쩌지. 의례적이고 가식적인 사과를 연발하며 후배의 옷을 물티슈로 닦아주는 동안에도 기범은 제 머릿 속을 맴도는 익숙한 형상을 차마 숨길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저를 스쳐가던 그 익숙한 향을 기범은 기억했다.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해 정신없이 살다보니 모두 잊어버렸으리라 여겼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를 떠올리게 하는 한 마디만으로도 그의 향기, 그의 코 끝, 목소리가 모두 생생히 되살아나는 듯 했다.

 

- 그, 유망주로 엄청 유명하던 걔 있잖아. 걔 사고 당했대.

 

기범은 제 목을 타고 피가 역류함을 느꼈다. 결국 간신히 몸만을 부지한 채 술집 바깥으로 나와 속을 게웠지만, 그렇다고해서 불편했던 속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더부룩한 속이 부디 술기운을 타고 저 멀리 떠나가 주길 간절히 바라며 기범은 술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제 주량도, 뭣도 생각치 않은 채 그저 부어주는 대로 마셨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제 안위를 위해 필사적으로 술을 멀리하려고 했었던 저인데. 그의 말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저는 무너져버린다.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찾아와 저를 옭아매는 그 감정은, 두 번 다시 느껴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

 

진기와 기범은 그 짧은 기억이 저들의 끝일 것이라 여겼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 끝이 무엇인지를 따질 정도로 큰 연관점은 없었다. 그저 한 학교의 선배이자 후배. 가끔씩 복도를 거닐거나 할 때 마주치면 서로를 모른 척 지나치는. 이름도 모르고, 몇 반인지도 모른 채 명찰색 정도로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다인 사이였다. 동급생도, 그렇다고 돈독한 사이도 아닌 두 사람은 심지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마저도 판이하게 달라 좀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칠 만할 기회가 없었다.

기범이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 진기는 큰 사고를 당했다. 사실 '당했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은 표현 방식일지도 몰랐다. 어찌되었든, 그는 회복을 하고 새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문제라면 기범이 그 소식을 이 년이나 지난 지금이 되어서야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야기는 끝없이 부풀려져 그가 손가락을 절단 당했다, 그가 미쳐버려 스스로 사고를 자초했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으나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 구설수들을 쉽사리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여느 소문들이 그렇듯, 그 것들도 어느 순간 없었던 듯 사그라들 것을 알았기에 기범은 더 이상 그에 대해서 입을 놀릴 수 없었다.

고등학교 당시의 악몽이 도로 되살아나 저를 애워감싸는 그 느낌들에 기범은 끊임없이 제 기억들을 토해냈다. 민호는 그런 기범을 두고 평소에 술도 잘 안 마시는 녀석이 왜 그리 말썽이냐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기범은 신경쓰지 않았다. 아끼던 후배인 태민 역시도 그런 기범을 두고 애정어린 충고들을 아끼지 않았다. 형. 요즘 술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요. 그러다 건강 망쳐요. 술에 의지하는 듯 아닌 듯 아슬아슬한 생활들을 이어가며 들었던 말에 기범은 태연히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런 기범도 결국 저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루 아침에 거짓말처럼 뚝, 술을 끊어버렸다.

신입생 OT 때 우연처럼 마주한 얼굴 탓에 기범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안녕하세요. 기범은 제게 다가온 선의의 손길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기범이 머리 속으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동안에도 그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손을 내밀고 그 손을 기범이 마주 잡아주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우리 만난 적 있죠? 얼마 전 새로 원예가를 들여 새롭게 손질했다던 교정을 거닐며 받는 질문 치고는 꽤나 추상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기범은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마주잡힌 손목이 아려올 법도 했건만 기범도, 그도 소리내어 그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그 것을 고요히 바닥 아래로 묻어버렸다.

기범은 소리내어 진기의 이름을 불렀다. 너, 이진기 맞지. 선연히 닿아오는 손 끝에도 기범은 쉽사리 진기의 손길을 내쳐내지 못했다. 넌 언제나 그렇지. 결코 소리내어 뱉을 수 없는 말들이 스멀 스멀 기범의 마음 속을 덮어왔다. 이 년 만에 도로 떠오르기 시작한 학창시절의 기억들은 기범을 망쳐놓았다. 형. 진기는 사람 좋은 얼굴로 다가와 기범의 팔목을 스치듯 잡아왔다. 제법 센 손아귀에 놀라 두 눈을 부릅 뜬 채 얼굴을 마주하자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한 두 번도 아닌데. 왜 그래요.

기범이형. 기범은 진기의 입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잊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그였기에 더 그랬던 것일지도 몰랐다. 제 팔목이 슬슬 아려온다고 느낄 즈음, 진기는 힘을 풀며 기범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순간적으로 저를 휘어감았던 그 위화감이 기범을 감싸 돌고 있었다. 진기는 자신의 이름을 알아서는 안되었다. 우리는, 그냥.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던 게 다 였단 말이야. 기범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진기를 바라다보았다. 진기는 늘 그래왔 듯, 저를 스쳐지나며 설핏 웃었다. 말려올라가는 입술 끝에서 매달린 비웃음을 본 것 같아 기범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

 

과방에 앉아 빈둥 빈둥 시간을 채우던 것도 잠시였다. 늦은 겨울에 느긋하게 가라앉은 캠퍼스 안의 분위기는 기범 역시 피해가지 못했고, 덕분에 기범은 몇 시간 째 수업도 없는 주말에 과방 중앙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보일러 버튼 하나만 눌러도 간단하게 끝날 일을 굳이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대신하겠다는 동기들도 이해가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의심쩍은 것은 그런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저의 모습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용케 술자리와 모임을 피해다니며 가늘고도 긴 대학생활을 연명해가고 있던 자신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경계가 묘하게 허물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범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나빠졌다. 잘 나아가던 그래프가 바닥으로 곤두박칠치는 것만 같아서 기범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쥔 손에 힘줄이 돋도록 힘을 주었다. 졸업한 선배들이 놔두고 갔다는 난로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앉아있던 사람들은 슬슬 취기가 돌기 시작한 것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잔뜩 흐트러진 발음으로 혀를 빼어물며 되도않는 애교를 보이는 새내기들도 있었다.

새내기들이 어쩌다 우리한테 걸려가지고. 한탄을 하듯 나지막히 뱉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용케도 잡아낸 종현이 히죽 웃음지었다. 김기범이! 고작 몇 잔 마셨다고 벌써부터 취했다는 건지 종현의 얼굴에 졸음이 대롱 대롱 매달려있었다. 저러다 또 우는 거 아냐. 슬슬 기미가 보이는 것이 기범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 너! 지혜 좋아하지! "

 

종현의 짖궃은 말에 당황한 것은 기범이 아닌 맞은 편의 지혜였다. 제 몸의 반도 안되는 술병에 몸을 의지한 채 몸을 흔들어대던 종현은 그런 지혜의 반응을 보며 개구진 목소리로 흐흐 웃어댔다. 평소라면 체면 구긴다며 절대 그리 웃지 않을 사람인데. 평소답지 않은 짓을 하는 걸 보니 술에 취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혜는 오히려 술 때문인지 방금의 발언 때문인지 모를 붉다란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새내기라도 슬슬 가을 즈음이 오면 친해진 선배들에게는 본색을 드러내는 법인데. 지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조막만한 얼굴로 언제나 수줍은 듯이 웃고, 나풀거리는 여성스러운 옷을 빼어입은 채 교내를 배회했다. 수줍고, 착하고 일도 잘하니 솔직히 기범이 지혜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 만큼 지혜가 나름 괜찮은 후배라는 말이다.

기범은 저와 똑바로 부딪혀오는 수줍은 시선에 어찌 해야할지 몰라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인상을 굳혔다. 나는 이런 애들이랑 엮이는 거 별론데. 게다가 이런 술자리에서 어영부영 엮었다 끝까지 끌고가는 경우는 더더욱이었다. 빨리 이 술자리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기범의 바람과는 다르게, 술자리는 새로운 안주거리에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야, 누가 나 술 좀 따라줘. "

 

술에 취해 흐물흐물해진 손이 자꾸만 소주병을 놓쳤다. 충분히 취한 것이 보이는데도 종현은 끊임없이 술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물론 그 중의 태반은 옆자리에 앉은 민호가 짖궃은 얼굴로 가져다주는 소주잔이었다. 소주와 맥주를 적당히 섞어 종현의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가는 술잔을 바라다보며 기범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는 저도 몸에 슬슬 취기가 도는 것 같았다. 눈에 띄게 오른 열과, 붉어진 얼굴색이 그를 말해주었다. 평소 하얀 편이라 빨개지기만 해도 티가 잘 나는데.

기범은 고개를 돌려 저보다 조금 먼 곳, 가깝다고 하기에도 멀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곳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하나로 올려묶은 머리가 찰랑거렸다. 여자 과대 치고는 저 사람처럼 성격이 나긋나긋한 사람도 없었다. 옆 동네 경제학과 과대는 장난 아니게 무섭다던데. 얼마 전 태민에게서 넋두리처럼 들었던 경험담을 떠올리며 기범은 두 눈을 꿈벅였다.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다시 뜨인다. 평소라면 눈치채지도 못할 사이에 저도 모르게 행했을 행동들이 차차 느려져 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술 자리는 달아올랐고, 술이 들어간 사람들은 기분좋은 취기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슬슬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해에도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자각이 없는건지 혹은 부러 그러는 것인지 나가려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물론 그 것은 기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방을 들고 잽싸게 바깥으로 나가려던 기범을 붙잡은 과대는 헤실거리며 웃었다. 어디 가셔요!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이 헤죽거리며 웃어대자 기범은 순간 얼굴이 홧홧 다가왔다.

그 것은 기범의 가슴으로부터 온 설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수치심 때문이었다. 여자의 얼굴 위로, 유독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느낌의 얼굴이 찬찬히 겹쳐졌다. 여자가 붙잡은 가방 끈을 바깥으로 돌려 빼낸 기범은 망설이는 기색으로 서 있다가 결국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런 기범이 기특하다는 듯 술잔을 들어 한번 거하게 건배를 외친 종현이 실실 웃으며 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은 종현이 미처 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닥쳤다.

소리없이 열린 문 틈새로 익숙한 체취가 흘러들었고, 기범은 술에 취한 와중에도 그 것을 잡아냈다. 소름이 끼칠 만큼이나 익숙하고 서러운 그 냄새는 본디 제가 아는 그의 것이 맞았다. 기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단색의 코트를 걸친 진기가 과대의 뒤에 서서 걱정스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런 와중에도 제게 돌아오는 인사는 놓치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꼭. 제가 알던 그 모습과 묘하게 겹쳐지는 것 같아서 기범은 기분이 나빠졌다.

릴레이라도 하는 듯 종현을 필두로 시작되었던 인사가 어느 새 제게로 돌아와 마지막 제 차례가 되었을 때 기범은 제 머리 위로 치솟는 짜증을 느끼곤 고개를 푹 수그려버렸다. 갑작스레 식어버린 분위기에 당황한 종현이 말꼬리를 늘리며 기범의 변호를 해주는 동안, 기범은 제 옆 자리. 그러니까 동기의 앞에 놓여져 있던 술잔을 들고 제 목구멍으로 탈탈 털어버렸다. 그 모습이 기범이 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끝까지 지켜보았던 민호도, 종현도 처음보는 모습이라 사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목구멍을 타고 술이 끝까지 들어감을 느낀 기범이 고개를 들고선 제 앞에 앉은 지혜와 눈을 마주했다. 지혜야, 나랑 나갈래?

기범의 말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쥐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 속에 잠겼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라는 듯,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종현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봤냐? 봤어! 내 촉 봤냐고! 흥분한 목소리로 고막이 터져라 소리질러대는 종현의 모습에 불쾌할 만도 한데 사람들은 그런 기색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소 두 사람의 가방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이렇게 인연이 시작되는 거지. 아흔 먹은 노인네같은 말투로 고개를 끄덕이며 기범의 목에 몸소 가방을 둘러준 민호가 가벼운 손짓으로 기범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김기범. 너한테도 드디어 봄이 오는구나. 감동이라는 듯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을 하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동기들을 뒤로 한 채 기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혜의 앞으로 다가섰다. 지혜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기범과 눈을 마주했다.

동그란 두 눈이 순간 누군가를 닮은 것 같아 기범은 저도 몰래 살며시 웃어버렸다. 슬몃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포착한 사람들은 아우성을 지르며 술자리를 더욱 뜨겁게 달궜고, 기범과 지혜는 얼떨결에 손까지 잡은 채로 과방을 나서게 됐다. 그러나 기범은 보았다. 문을 닫던 찰나의 순간 저를 향하던 잠깐의 눈빛을. 그 모습이 평소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따스한 눈빛이나 말소리와는 다르게 소름이 끼칠 만큼이나 서늘한 것이라 기범은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팔뚝이 돋은 팔뚝을 쓸어대며 바깥으로 나온 기범은 자연스럽게 지혜의 가방을 받아들고선 앞장서기 시작했다.

 

-

 

별 것 없는 데이트를 끝낸 뒤, 그 후로도 지혜와 기범은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졌다. 기범은 수줍은 듯 하면서도 예상 외로 당돌한 모습을 보여주는 지혜의 모습이 새로웠고, 지혜는 제게 다가와준 기범이 고마웠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었다.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남을 때에는 근처의 영화관에 표를 예매해두고 단둘이서 심야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고 어두워지면 기범은 누가 귀한 집 딸내미를 채간다는 핑계로 집 앞까지 데려다줬고, 지혜는 그런 기범이 고맙다는 듯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날 때마다 단것들을 하나 씩 선물로 주었다.

동기들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드디어 사귀는 거냐며 괜히 설레여했지만 기범은 대답없이 사람들의 모습을 관망하기만 했다. 때로는 지혜가 건네준 사탕 껍질을 까 입 안에 집어넣으며 혀로 살살 굴려먹기도 했고, 예비 애인님 초콜릿은 어떤 맛이냐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동기들의 입에 초콜릿 몇 조각을 나누어 똑똑 떨어트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그랬든 어쨌든, 두 사람의 사이는 물론 거기까지였다. 더 무언가를 원하는 듯 보이던 지혜의 마음을 알아챈 기범은 쉽사리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못했다.

순수하고, 약한 아이에게 차마 너를 이용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사실 이용했다 이용하지 않았다 가지고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그 것은 또 그 것대로 무서운 일이었다. 순간의 욱함으로 쳤던 일 하나가 이렇게까지 이어져 제 발목을 잡을 줄은. 사실 상상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기범은 침대에 지친 몸을 뉘이며 휴대폰 액정을 바라다보았다. 선배, 내일 시간 되세요? 발신자는 언제나 그렇 듯 지혜. 기범은 몇 번이나 반복해 보아 실핏줄이 터질 것 같은 눈을 애써 비비며 눈꺼풀을 가만 가만 감았다 떴다.

얼굴을 마주 한 것도 아닌데. 마치 지혜의 목소리를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벚꽃처럼 예쁜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묻는 머리꼭지. 가방을 꽉 쥐어잡는 얇다랗고 끝에는 분홍빛이 도는 몽실몽실한 손가락. 기범은 저도 몰래 시시때도 없이 잠식해드는 죄책감에 매일마다 밤을 세웠다. 그러다 휴대폰을 들고 고민한지 한 시간 하고도 십분이 지나서야 답장을 보냈다. 응, 내일 우리 만날까?

학교에 나갈 일이 없는 내일 같은 날에 만나는 건 처음있는 일이었다.

 

-

 

상영 시간까지는 앞으로 삼십분이나 남아있었다. 너무 빨리 온 것 같다며 어떻게 하냐고 쩔쩔 매는 지혜를 뒤로 한 채 기범은 먹을 거리를 사오겠다며 발길을 틀었다. 사람들이 많은 안전한 곳에 지혜를 앉혀두고 금방 오겠다는 약속을 한 뒤, 기다랗게 이어진 줄의 뒷자리로 가 섰다. 커다랗게 자리한 판매코너의 가장 위쪽에는 영어로 시네마라는 글짜가 대문짝하게 박힌 간판이 있었다. 외국 영화관 같은 분위기를 유도해내려고 한 것인지, 상단에는 백열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의 줄이 어서 줄어들기를 바랬다. 영화 상영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왜 이리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왠지 모르게 점차 쳐지는 분위기에 숨을 뱉은 기범은 운동화를 바닥에 직직 끌어대며 제 차례까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홀깃 홀깃 고개를 돌려 지혜가 잘 있는 지를 확인하던 기범은 우연찮게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어준 지혜는 꼼지락거리며 휴대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부끄러운가보다. 하며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던 기범은 문득 고개를 돌려 화장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바라다보았다. 한번 깊숙한 곳까지 이어지는 어두운 복도를 쭈욱 훑어보다 고개를 돌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러던 것도 잠시. 기범은 저도 모르게 눈길에 밟히는 익숙한 인영도 도로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제 앞에 자리한 큼지막한 아저씨의 등에 가려 제 모습이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기범은 다시 한번 제 앞에 펼쳐진 모습에 제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진기와 그 옆의 익숙한 얼굴이 마주보며 서로를 향해 웃음짓고 있었다. 마흔은 족히 넘었을 테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여자. 제가 또렷히 알고 있는 그 사람. 분명, 어제도 보았던. 그.

아차. 기범은 순간 저를 향해 돌려지는 얼굴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하긴,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시선을 느끼질 못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어느 새 제 앞으로 다가온 순서에 기범은 제 입으로부터 무어라 말이 튀어나오는지도 모르고 마구 주문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기범의 품에는 팝콘과 콜라, 오징어 따위가 한가득이었고. 이내 어수룩히 웃으면서 도로 제 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지혜야, 많이 기다렸지? 손이 부족해 입으로 까지 물고 왔더니 입술이 다 얼얼했다. 지혜의 옆자리에 콜라를 올려두고 푸르딩딩해진 입술을 만지며 물으니 오히려 괜찮다고, 미안하다며 손을 내저어보인다.

 

" 그런데, 선배. 아까 어딜 그렇게.. 본 거에요? "

 

지혜는 스스로가 뱉어낸 말에 놀란 것인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 선배. 그러니까요. 제가 선배를 본 게 아니라..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지혜의 머리꽁지를 내려다보며 기범은 설핏 웃었다. 그냥, 뭐 재밌는 게 있어서. 기범은 실로 오랜만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구미가 당기는 일은 또 처음이었다. 만약 그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며 제 입으로 넘어오는 팝콘을 받아먹은 기범이 고맙다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물론 그 때까지도 기범의 머릿 속에는 방금 전의 장면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머리를 단정히 올려묶은 채, 진기야. 하고 부르는. 언제나와 같은 명랑하고 정갈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범은 간을 쟀다. 누굴까. 누가 진짜일까.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상향을 그리고 있었다.

 

-

 

기범은 막 강의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가려던 진기를 붙잡았다. 진기는 그런 기범의 행동이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바쁘게 가봐야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범은 용케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다시는 제가 이런 용기를 내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람이 다 빠져나가 휑한 복도에 대고 기범은 나지막히 이야기했다. 교수님 뵈러 가려고?

그러자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범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던 진기의 목소리가 뚝 멈춰버렸다. 허공에서 멈춰버린 입술이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늘 그렇 듯 진기의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던 사람 좋은 미소도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은 또렷하고 생경한 의혹 뿐이었다.

 

" 교수님은 알고 계셔? "

" 뭘요. "

 

전에껏 듣지 못한 까칠한 말투와 가라앉은 목소리. 기범은 그 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복감을 느꼈다. 약점이다. 기범의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 것 뿐이었다. 기범은 부러 비릿하게 보이도록 웃으며 진기와 눈을 마주했다. 한번 헛웃음을 친 진기가 고개를 들더니 기범과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어디 갈까요? 눈에 띄게 달라진 표정에 기범은 가방을 쥔 손을 보이지 않도록 반대쪽으로 여미며 따라 웃었다. 짜증이 났다. 약점이 잡힌 와중에도 이렇게 태연히 웃는 얼굴이 역겹게 느껴졌다.

기범은 웃었다. 앞장서 카페에 들어가면서도, 진기 대신 주문을 하면서도. 물론 나중에 제게로 다가와 대신 돈을 내겠다는 진기의 행동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기는 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진기처럼 웃었다. 너도 한번 느껴봐. 계속 웃는 짝으로만 상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지겹게 느껴지는지.

 

-

 

" 아니, 누나는 알고 있나? "

커피를 홀짝이며 묻는 질문에 진기는 눈을 찬찬히 내려감았다 뜨며 눈을 마주했다. 느릿한 듯 깊은 눈동자가 조금 게을러보이기도 해서 기범은 순간 웃음이 났다. 이런 순간까지도 제 앞의 모든 것들을 살피는 행동이 조금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부러 태연한 얼굴로 진기에게 웃어보였다. 너 못됐구나. 머그컵을 매만지며 나지막히 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기는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예상된 플레이처럼 딱딱 떨어지기만 했다.

 

" 어린 게 벌써부터 양다리나 걸치고. "

 

기범은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죽여 말했다. 차피 카페 안에 시커먼 남자 둘이 마주 앉아 커피잔을 드는 것도 우스운데, 괜시리 시선을 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여차하면 이진기가 이런 파렴치한 놈이라고 동네방네 소리칠 생각도 있었지만 그렇게 소문이 퍼지면 또 원인제공자인 저만 힘들어질 것 같아서 아직은 보류 중이었다. 기범은 인내심있게 진기의 대답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 양다리 아닌데. "

" ..뭐? "

" 무슨 오해를 하신 건지 모르겠는데요, 선배님. "

" ... "

" 전 두 분과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

 

진기는 태연한 얼굴로 웃었다. 저, 아무 하고도 안 사귀어요. 흐트러지게 웃는 모습에서 기범은 아주 깊은 곳에 숨겨진 불덩이를 발견했다.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우위인 것 같았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지 알 수 없었다. 진기에게 보이지 않도록 테이블 아래로 넣은 손을 말아쥐며 이를 갈았다.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된다면 이 뜨거운 커피를 저 짜증나는 낯짝에 흩뿌려주고도 싶었다.

진기는 그런 기범의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웃었다. 선배 덕분에 커피도 마시고 좋네요. 사실 오늘 교수님 뵈러가기도 조금 그랬거든요. 커피숍을 나와 도로 학교로 돌아가던 중 들은 말에 기범은 획 고개를 돌려 진기와 눈을 마주했다. 들킨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말을 짓껄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얘가 내 말을 단단히 오해한걸까. 싶어서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였다. 그럼 감사했다며 꾸벅 인사를 하는 진기의 반듯한 등을 바라보던 기범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목덜미의 윗부분을 조금 덮고 있던 머리가 아래로 쏠리며 드러난 맨 살에 붉다란 멍이 들어있었다.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모를 리 없는 선명한 흔적에 기범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녀석의 의도를 모르겠다. 오히려 제가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여유롭게 골목을 돌아 사라지며 벤치 옆에 앉아있던 익숙한 뒷모습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에 기범은 기가 찼다. 진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환한 얼굴로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나,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먼 곳에 있어 들릴리 없는 목소리가 기범의 귓가를 찾아들었다.

 

 

 

 

 

 

 암호닉

겨울

 

 

눈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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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ㅠㅠㅠ글잘읽었어요 문체가좋네요..!
8년 전
달별꽃
감사합니다ㅠㅠㅠ 우연찮게 들어온 차에 쪽지가 와서 놀랐어요! 문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럽네요..
8년 전
독자2
헐 이거 너무 좋은데여 취향저격..이런 진기 너무 좋아요ㅠㅠ사실 내용이해가 다 되진 않았지만 ,,다음 편도 있나여???
8년 전
독자3
겨울이에요. 엉엉... 왜 이걸 이제 본 걸까요ㅠㅠ 제목부터 완전 취향 저격... 기범이가 진기한테 갖고 있는 감정은 비단 열듬감 뿐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좋아요 노래랑 같이 들으니까 막 더 몰입하게 되고. 진짜 작가님 글은 빠져드는 것 같네요. 계속 곱씹어서 읽게 되고, 완전 집중해서 읽은 것 같아요. 빙글빙글 웃으면서도 이중적인 면모를 띠는 진기가 눈에 그려져서 막...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ㅠㅠ
8년 전
독자4
이제 읽었어요~ 문체가 너무좋아요
취적인데요 다음편도 보고싶어지네요ㅠ

8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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