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 막장 로맨스는 처음이라 5
10. 그토록 찾아 헤맨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랍장 안 엠피쓰리를 꺼냈다. 어딜 가나 손에서 놓지 않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게 해줄 유일한.
돈을 벌기 위해 야간 배달 알바를 하다 사고가 났다고 했다. 그래서 머리를 다쳤고, 기억을 잃은 것이라 했다. 긴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본 건 새하얀 병실 천장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헐레벌떡 일어나 내손을 잡는 누군가의 얼굴. 그리고 급히 병실을 뛰쳐나가는 다른 누군가. 몸을 흠칫 떨며 손을 쳐냈다.
누구세요. 눈을 뜬 내가 뱉은 첫마디였다. 아무말없이 나를 보던 여자가 오열했다. 왜 그러냐고 나를 다그치면서.
"엄마잖아, 윤기야. 왜 그래, 응?"
내 삶은 잔뜩 어그러졌다. 현실 감각이 없어졌고, 곁을 감싸고 있는 모든 상황이 어색했다. 민윤기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은 주위 모든 사람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부모님이 내게 들려줄 수 있는 기억은 한정적이었다. 워낙에 과묵한 아들이었다는 내 주변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었으니.
한없이 낯선 시간 속에 유일한 희망을 안겨준 것이 고작 엠피쓰리 하나였다. 사고 당시 입었던 패딩 주머니 안쪽에서 나왔다고 했다. 휴대폰이 다 박살이 났는데 엠피쓰리 하나만 멀쩡했다.
엠피쓰리에 저장된 노래는 고작 한 곡이었다. 누군가가 녹음해 저장해준 듯 곡 이름은 '윤기에게'였다. 기억이 없는 내가 사람을 만나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동안 질리도록 들었다.
반복재생 설정이 된 노래는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이어폰을 타고 흘렀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완전히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자주 잠에 빠졌다. 깊게 잠에 들지 못해 늘 꿈을 꿨다. 처음엔 온통 흐릿했다. 회색. 안개같은 것이 내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꿈의 형태는 날이 갈수록 점차 짙어졌다.
"네 생각 하면서 만든 노래야."
현실에서 깊은 우울에 허덕일 때쯤, 노래 속 목소리가 꿈에 등장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여자가 새하얀 손으로 건반을 꾹 눌렀다.
창가로 흘러내린 햇살이 그녀 곁을 감쌌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긴생머리. 의자에 앉은 그녀의 뒷태가 내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꿈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나의 상상이 만들어 낸 허구일까. 아님 간절함이 불러온 기억의 일부일까. 후자로 생각하는 편이 편했다. 기억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는 것.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철심을 박은 다리를 다시 움직이기 위해 재활치료를 받으며, 처음 한 일은 펜을 드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키보드를 샀다. 중고로 구입해 뻑뻑한 건반을 밤새 눌렀다.
"작업하신 곡 쭉 들어봤어요. 다음 앨범에 들어가는 곡으로 하나 같이 작업하고 싶은데."
취미에서 본업으로 작곡을 이어가며, 끊임없이 엠피쓰리 속의 곡을 찾았다. 세상에 나온 곡이 아닐까 하고. 그래서 그 곡을 만든 사람을 부디 만났으면 했다.
눈두덩이 위로 가라앉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마 위에 손등을 얹었다. 엠피쓰리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아까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전주에서 익숙한 피아노 반주가 흘러나올 땐 두 귀를 의심했다.
한소절도 채 지나가지 않았지만, 수천번도 더 들어 가사도 멜로디도 모조리 다 외워버린 이 노래라는 걸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꿈 속의 그녀는 아직까지도 종종 잠자리에 찾아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실제로 마주친다면 바로 알아 볼 수 있을 거라고. 아주 많이 변했더라도 그 느낌과 분위기로 알아맞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심한 새끼."
마른 얼굴을 두 손으로 쓸었다. 어떻게 그걸 몰라. 그 여자가 내 앞에서 그렇게 우는데 왜, 모른다고 대답해서는.
경계하는 나를 편하게 대하려 애쓰던 여주의 모습이 이제야 떠올랐다. 속상해하던 얼굴도, 잔뜩 취해 나를 찾던 전화도.
그냥, 친구라고 말하던 그녀의 물기 어린 눈도.
콧잔등을 타고 열기가 느껴졌다. 코끝이 징 울렸다. 노래가 끝나자 끝없는 정적이 드리웠다. 결국 욱 하고 올라온 눈물이 속절없이 흘렀다.
희망 그까짓 거 줄거면 조금만 더 주지. 조금의 틈도 양보하지 않던 잃어버린 기억이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기억 앞에 무력한 자신이었다.
11. 감추지 못하는, 아니 감추기 싫은 마음
'커피 많이 마시면 몸에 안 좋으니까!
커피 대신 차 드셔용'
뜬금없이 내 책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쇼핑백이 눈을 끌었다. 하늘색 바탕의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또박또박 쓰기 위해 꾹꾹 눌러쓴 듯한 글씨를 훑었다.
쇼핑백 안에는 티백 세트가 들어있었다. 차를 우려먹을 수 있는 텀블러도 함께 포장되어 있는 채였다. 요즘 이렇게 한 번씩 누군가가 자그마한 선물을 두고 갔다. 그리고 이러한 호의를 베푸는 누군가는 바로,
"큼큼. 뭐야, 누가 줬어요?"
탕비실에서 나온 정국이 다가와 칸막이 위에 손을 턱 얹었다. 호기심 어린 눈이 쇼핑백을 훑었다. 눈썹 한 쪽을 치켜올리며 능청을 떠는 모습에, 한 템포 쉬었다 느리게 답했다.
그러게ㅡ, 누가 준 거지? 쇼핑백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전혀 모르겠다는 내 눈빛에 정국이 팔짱까지 끼고 바라봤다.
"흐음, 누가 준 건진 모르겠지만 진짜 센스쟁이네요!"
그가 엄지를 척 올렸다. 그의 오바스런 반응에 눈을 가늘게 떴다. 푸스스 웃음이 터진 정국이 검지를 입 앞에 갖다대며 쉿, 하라는 모션을 취했다.
"부서 사람들한텐 비밀이에요. 이건 진짜 대리님한테만 드리는 거란 말이에요."
정국이 제 입까지 가려가며 조용히 말했다. 그의 말에 부서 내를 둘러봤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아직 사람이 없었다.
" 왜?"
"그냥 어쩌다 선물받은 건데 제가 차를 별로 안좋아해서... 그렇다고 사람들 다 나눠주긴 애매한 양이잖아요, 그게."
그리고 또, 요즘 유독 피곤해보이시길래. 그러니까 탕비실에 가져다놓지 말고 대리님 드세요. 이말저말 길게 늘여놓던 정국이 내가 뭐라 덧붙일세라 얼른 제자리로 총총 뛰어갔다.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처음 몇 번은 괜찮다며 받은 걸 돌려보냈더니, 요즘엔 저렇게 잘도 도망갔다. 쟤가 분명히 회사 후배는 맞는데, 가끔은 너무 강아지 같았다. 주인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고 제 간식까지 물어다주는 강아지.
물론 귀엽긴 하지만 저렇게나 날 챙기는 정국에게 미안하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내게 대가없는 호의를 자꾸만 베푸니까. 왜 이리 챙겨주냐는 내 물음엔 항상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냥 고마운 게 많으니까요. 정대리님이 자꾸 막 괴롭힐 때마다 김대리님이 다 막아주시구, 김대리님은 진짜 좋은 분 같아서..."
참 정국다운 말이었다. 정호석이 괴롭히려 들 때마다 내게 쪼르르 달려오던 게 떠올랐다. 그런 거라면 납득이 가기도 했다.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정국만큼 단순한 아이도 없었으니까.
나를 약간 악당 물리쳐주는 영웅 그쯤으로 보는 듯 했다. 그게 아니어도, 뭐든 고마운 일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티나게 표현했다.
"아니라니까? 전사원이 김대리한테 딴마음 품고 있는거라니까?"
"아, 뭐래 자꾸ㅡ"
"딴게 아니라 정국이 걔가 하는 행동, 어? 그런 걸 보고 흑심이라 하는 거야."
어휴, 인생 헛살았나. 뭔 눈치가 저렇게 없대? 혀를 끌끌 찬 호석이 답답함에 커피를 들이켰다. 정신없이 말을 쏘아대는 주둥이가 잠시 쉬는 틈을 타 따가운 귀를 파댔다.
호석과 점심시간에 종종 산책을 할 때마다 호석은 대화 지분율 99%를 차지했다. 그런 그가 요즘 꽂힌 대화 주제는 바로 정국이었다. 툭하면 저리 말도 안되는 얘기들을 늘어놓곤 했다.
"야, 솔직히 너같으면 맨날 괴롭히는 놈한테서 지켜주고 잘 챙겨주는 상사한테 안 그러겠냐?"
"...잠깐. 거기서 맨날 괴롭히는 놈이 혹시, 나냐?"
흐물거리던 호석의 손가락이 제 가슴팍을 콕 찔러 가리켰다. 그래, 너, 너. 너 아님 누구겠냐? 호석의 팔뚝 위로 손가락을 사정없이 쿡쿡 찔렀다.
그리고 걔가 날 왜 좋아해? 나이도 6살이나 차이 나고, 자기 또래 중에 괜찮은 사원도 많고, 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따박따박 따지고 들자 호석이 한숨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선배 차암 모르는 소리 한다."
"뭐뭐, 또 뭐"
"나이가 뭔 상관이야. 지가 좋으면 그만이지."
암튼, 난 진짜 확신한다. 전정국이 선배 좋아한다에 내 모든 걸 걸지. 샐쭉 웃는 호석의 등을 착 소리나게 내려쳤다. 악! 비명을 내지른 호석이 울상을 짓다 저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며 달려갔다.
"전사원!"
다른 부서 사원 동기들과 걸어가고 있는 정국이 보였다. 한달음에 달려간 호석이 그새 제 등을 가리키며 무어라 쫑알대고 있었다.
"김대리 저거 완전 난폭해. 봤지? 나 때리는 거?"
난감하게 커피 빨대를 잘근 씹어대는 정국 옆으로 다가섰다.
"그래ㅡ 내가 너 이런 거 하지말라는 거야.
왜 자꾸 정국이 귀찮게 해?"
정국의 팔뚝을 잡고 내 옆으로 끌어당겼다. 제 팔 위로 내려앉은 내 손을 잠깐 내려다보던 정국이 내 말에 고갤 끄덕였다.
"이거 봐, 둘이 완전 찰떡콩떡이라니까!"
"찰떡콩떡이 뭐야. 찰떡궁합도 아니고."
나란히 선 정국과 나를 번갈아보며 입을 삐죽이던 호석이 홱 돌아 쿵쾅대며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질린다는 듯 웃다 정국의 어깨를 앞으로 떠밀었다.
"우리도 들어가자 이제."
"네! 우리ㅡ 도 들어가요!"
정국과 빠르게 부서로 돌아와 업무의 굴레 속에 빠졌다. 연초와 설 명절의 콜라보는 나를 녹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쉴 틈 없이 일하다보니, 오후는 빠르게 지나갔다.
그럼에도 조금 밀린 업무를 마저 처리하느라 퇴근시간을 조금 오버해서 일어났다. 제 자리에 앉아 멍때리던 정국이 이쪽을 보며 슬금슬금 외투를 챙겨들었다.
"오늘은 진짜 거절 안받을래요..."
어느 새 퇴근할 채비를 마치고 성큼 다가온 정국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뭐가?"
"저 하나두 안 피곤하구 차에 기름도 빵빵한 상태임다. 제 차 타고 가시죠."
아니, 얘는 날 왜 이렇게 제 차에 못 태워 안달인지. 결국 고갤 끄덕였다. 알겠다고 할 때까지 저렇게 물어보고, 주절대고, 괜찮다고 하면 되려 속상해할 아이였다.
"너도 퇴근하면 네 시간 지킬 줄도 알아야지. 왜 그렇게 상사한테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사니, 정국아."
요즘엔 너처럼 그렇게 안해 인마. 다들 사생활 지킨다고 퇴근시간만 되면 선 딱 긋는다고, 엉? 백날 말해봤자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그였다.
"저도 그래요. 회사 밖에 있을 때 업무 전화 안 받으려 하고,"
"엉."
"무조건 정시에 퇴근하고 싶고."
"그래그래. 근데 생각만 하면 뭐해 실천을 해야지. 호구냐?"
"싫은 거 안해요. 남들처럼 똑같이 좋은 것만 하지."
"그러니까 저 이거 억지로 하는 거 아니고, 좋아서 하는 거라구요. 상사라서 챙기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럼 왜 챙기는, 야! 웬일로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한 정국이 휙 돌아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재빨리 차에 올라타려던 정국이 다시 뒤돌아 나를 기다렸다.
어김없이 내가 탈 때까지 조수석 문을 열고 기다렸다. 마침내 운전석에 앉아 벨트를 맨 정국이 차를 몰았다.
"카풀할래요?"
잠깐의 정적 뒤에 불쑥 튀어나온 뜻밖의 제안이었다.
"갑자기?"
"어차피 집도 가깝고 지나가는 길에 태우고 내려주면 되고."
"어우, 됐거든. 너 피곤해."
"그럼 커피 한잔으로 퉁 쳐요ㅡ"
솔직히 커피 한 잔이야 사주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차 타고 다니면 나야 좋은데, 대답하길 망설였다. 차라리 정대리라면 몰라, 어떻게 일개 사원한테 나를 태우러 오라 시키냔 말이다.
"부담스러워요?"
정국이 신호를 기다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니아니, 그냥 미안하니까. 너한테 받은 것도 많고... 결국 부담스럽다는 의미였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덩달아 망설이더니 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누나도 저한테 선물 하나만 해줘요."
"무슨 선물?"
"나 영화 좋아하는데."
"영화 한 번 보여주기."
"어?"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직장 사람과 휴일에 만나길 썩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피했음 피했지. 물론 정국이라면 괜찮긴 한데,
"어때요?"
핸들에 손을 올린 채 앞만 쳐다보는 그를 바라봤다. 이게...어째 데이트 신청 같기도 하고.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그 위로 머물던 시선을 멀리하며 고개를 삐그덕거렸다. 조그만 고갯짓을 캐치한 정국이 함박웃음 지었다.
요즘 나를 쪼아대는 정호석의 말이 떠올랐다.
"걔가 선배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래, 요즘 나를 대하는 게 퍽 다정하긴 했다. 근데 정말로 그게 단순한 고마움의 표시가 아니라면,
아, 모르겠다. 히터 바람에 무거워진 눈을 꾹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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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좀 많은가요? 적당한가요? 지루할까봐 걱정이 돼서 쉽게 올리질 못하겠어요...ㅠㅅ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