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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사랑을 너에게 바친다/

01

[방탄소년단/김태형/전정국] 내 첫사랑을 너에게 바친다 01 | 인스티즈








/





그해 여름은 따사로웠다. 귀가 따갑도록 매미가 울었고, 밖으로는 남자애들의 공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간간히 패스를 외치는 격한 소리들과 함께. 우리 학교는 자습시간이 잦았다. 다른 학교에 비해 학구열이 높은 탓인지, 예체능 수업은 종종 자습으로 채워졌다. 여느때와 다르지 않게 주어진 자습시간이 무료했던 나는 쉴새없이 종이를 넘기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화장실을 핑계 삼아 운동장으로 나왔다. 운동장 구석에는 구 체육 창고가 있었다. 강당 내에 신식 체육 창고가 만들어지면서 곧 철거될 회색 컨테이너 박스가 되어버린 곳이어서 최근엔 주로 담배를 피우는 애들이 선생의 눈을 피하기 위할 장소로 쓰이곤 했다. 작년 여름에 폐쇄되었으니 실질적으로 체육 창고에 들어가본 건 몇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운동장 끝을 돌아야 도착할 수 있는 체육 창고로 발을 움직인 건 교실이 있는 본교와 뜨거운 햇빛 아래만 아니라면 어디든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물쇠가 걸려있을 것이라는 내 짐작과는 다르게 창고의 문이 쇠줄로만 칭칭 감겨있었다. 쇠줄을 두어 번 정도 풀자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체육 창고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경첩도 나이가 든 모양이다.


겨우 1년간 청소를 하지 않았을 뿐인데, 체육 창고는 먼지 구덩이였다. 신식 체육 창고로 채 옮기지 못한 파란색 대형 매트 두어 개와 바람 빠진 배구공들, 노란색 캐비넷에 보관되어 있는 각종 시설기구들이 보였다. 절로 나오는 기침에 공기 중의 먼지가 이동하는 게 눈에 보였다.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작년의 기억을 더듬어 문 바로 옆에 위치한 스위치를 찾았다. 할아버지 집 창고에서나 볼 수 있었던 구형 스위치였는데, 작은 막대기를 아래로 내리면 불이 켜지는 형태였다. 창고 천장에 달려있는 작은 전구에 희미하게 불빛이 들어오자 어렴풋이 보였던 작은 것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창고 구석에 위치한 책상에 올려져 있는 작은 탱탱볼이라든지, 원통형 철필통에 꽂혀진 검정색 모나미 볼펜들, 투박한 검은색 클립보드에 꽂혀진 몇년 전 체육대회 대진표가 그것들이다. 먼지구덩이 속에서 꼭 먼지가 되어가는 것 같아 나가려던 참에 체육대회 대진표 종이 한 구석에 끄적여 있는 글씨가 보였다.





  ㅡ 다음 체육대회 땐 물총 싸움도 했으면 좋겠다





어른스러운 글씨에 그렇지 못한 내용이었다. 문장 뒤엔 야무진 표정까지 그려놓았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자 먼지가 공기 중에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때부터였다. 이름 모를 그 애와 오래된 체육 창고의 먼지 뒤덮인 클립보드 위에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래 전, 이미 졸업한 선배의 것이라 짐작했던 풋풋한 다짐 아래 동조했던 여자애는 나였고, 종종 체육 창고를 방문하는 듯 뜸하게 답글을 달아주던 남자애는 그 애였다.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고도 글 몇자로 우리는 소소한 얘기부터 가까운 친구에게는 하지 못했던 속마음까지 털어놓곤 했다. 어느 한쪽이 줄을 놓으면 끊어지는 비밀스러운 관계 속에서 무료했던 학교 생활이 조금은 달콤해졌고, 나와 같은 비밀을 품고있는 그 애가 언제나 가까이 있는 듯한 든든한 느낌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ㅡ 방학 잘 보냈어?

  ㅡ 응 너는?





처음의 호기심과는 다르게 정의할 수 없는 마음이 커지기 시작했고, 얼굴, 이름, 하물며 나이도 모르는 그 애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던 어느 때에 나는 그 애가 누군지 꼭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쉬는시간마다 체육 창고 뒤쪽에서 창고 문이 열리길 기다렸을까. 수업이 늦게 끝나 슬리퍼를 신고 달려갔던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정확히는 5교시가 끝난 후, 내가 감았던 쇠줄이 풀려있었고, 창고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때 나는 그 애를 보았다.





/





김태형. 그 애가 다니는 곳이 여기라는 사실은 고등학교 동창을 통해 알고있었다. 나의 꿈의 대학보다는 김태형의 꿈의 대학에 가까운 웅장한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처럼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을까. 괜한 기대감에 부풀어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밀려오는 긴장감에 불과 몇분 전까지 촉촉했던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청바지에 닦고 가방끈을 꼭 쥐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 그 애의 모습에 애꿎은 손톱만 물었다. 도착하자마자 김태형 그 애만을 쫓은 내 시선이 무색하게도 그 애의 시선은 내게 잠시 머물렀다 금방 이동했다. 나와 동갑인 선배가 내 이름을 물어볼 때도, 자리를 안내해 줄 때도, 어쩌다 내 옆자리에 앉은 한살 어린 동기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올 때도, 김태형 그 애가 콜라가 담겨있는 종이컵을 내 앞에 놓을 때도 온통 내 신경은 일방향이었다.


왜 나를 모른 척하지. 왜 나한테 말 안 걸지. 혹시 내 얼굴을 모르는 건가. 아직 내 얼굴이 눈에 안 익어서 그런 건가. 이름을 말하면 알겠지. 그때서야 나한테 말을 걸겠지. 실망에 이은 또다른 기대감이 머리를 뒤덮었다.





  "스물하나 김탄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름 한자, 한자를 힘주어 발음했다. 혹시나 그 애가 내 이름을 잘못 들을까 싶어서. 그럼 나를 모르는 애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그 애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남들이 박수를 칠 땐 본인도 형식적으로 박수를 쳤고, 남들이 웃을 땐 폰을 보다가도 웃긴 장면을 확인하곤 다시 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별 흥미 없이 남들의 부탁으로 참석한 사람처럼 자세는 삐딱했고, 도무지 웃질 않았다.





  "...대구 J고등학교 나왔어요."





그제서야 그 애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제서야 시선이 맞닿았다. 별 호기심도 없어 보이는 시선이었지만 그 애의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김태형, 너랑 같은 학교 아니야?"





김태형은 탐색하듯 한참을 나를 쳐다보았다. 꼭 내가 누군지 알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나를 향한 호기심 가득한 몇몇 시선들과는 다르게 김태형은 호기심이라고는 단 일 퍼센트도 없는 느릿한 시선으로 나를 탐색하고는 굳은 입술을 그제서야 열었다.





  "그런가 보네."





/





그 애와의 감동적인 재회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아니 사실은 그런 재회를 바란 걸지도 모르겠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독자들이 박수를 칠 법한 그런 감동적이고 감격에 차오르는 재회, 그런 거.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따위의 재회를 바라진 않았다. 이건 공정하지 못했다. 기대감에 부풀어올랐던 어제의 나를, 지난 일년간의 나를 너무 안쓰럽게 만드는 불공정한 결과임이 분명했다. 내 얼굴을 보고도, 내 이름을 듣고도, 하물며 출신 학교가 같은 걸 똑똑히 들었으면서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우리의 지난 시간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에 눈 앞에 있는 술만 꼬박 네잔째 들이키고 있었다.





  "태형이 형! 아진 누나 왔어요."





엎친 데 덮친 격일까. 오티 몇시간 동안 도통 웃질 못하던 김태형의 얼굴이 낯선 이름 하나에 무장해제되어버린다. 짧은 가죽 치마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생경한 구두 소리를 내며 그 애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익숙한 듯 그 애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는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벌써 세 번째의 시련이다. 이런 상황을 보려고 여기 온 건 아닌데. 답답한 마음에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3월의 밤은 여전히 찼다. 취기가 올라 뜨거워진 얼굴을 찬바람에 식히려 술집 앞에 있는 하얀색 기둥에 몸을 기댔다.





  "아, 토하고 싶다."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지만 정의할 수 없는 역함이 몸을 지배한 듯 속이 울렁거렸다. 과거의 시간을 부정당한 사람의 감정이 이런 걸까. 쌍방이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나만의 감정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것이 이런 걸까. 역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한 걸까, 정신 없는 시간 속에 있다가 밖으로 튕겨져나온 것처럼 외로워졌다. 누구라도 붙잡고 터뜨리고 싶은 감정을 품고있는 것 같았다. 애써 생각을 지우며 입김을 불고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웬 처음 보는 애가 내 가방을 쥐고 있었다.





  "바닥에 끌리잖아."





그 한마디와 함께 가방 바닥을 꼼꼼히 털어주고는 내게 다시 건네더라. 그 애가 건네는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시선을 올려 그 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정한 검정색 머리와 토끼 같은 동그란 두 눈이 어딘가 익숙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





내 물음에 그 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보는 애가 내 앞에서 그렇게 웃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지만 술을 마셔서일까, 그런 기분이 또 퍽 나쁘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기분이 좋은 쪽이라고 해야 할까. 입꼬리가 제자리를 찾은 그 애가 큼지막한 손으로 쥐고있던 내 가방을 본인의 어깨에 걸쳤다.





  "그걸 왜 그쪽이 매요?"

  "구면이었으면 하는 마음인 것 같아서."

  "무슨 소릴..."

  "전정국이야. 스물한살이지? 나도 스물한살. 말 편하게 해."





다짜고짜 이름을 밝힌 전정국은 내 이름과 나이를 이미 알고있는 듯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전정국은 살갑게 웃어보였다. 호기심 가득한 두 눈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출신학교를 밝혔을 때 나를 향한 몇몇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술자리에서도 몇번 비슷한 류의 질문을 받았다. 학교 다닐 때 김태형은 어땠는지, 김태형과는 아는 사이였는지, 김태형은 그때도 공부를 잘했는지. 정작 김태형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데, 아니, 관심이 없다 못해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구는데, 남들이 나를 들쑤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더라. 더이상 좋았던 기억을 최악으로까지 끌어내릴 자신이 없어 김태형에 관한 질문은 사절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 앞에서 그 사람들과 똑같은 눈을 하고있는 전정국도 사절이었다.





  "김태형이랑 안 친했어.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김태형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물어볼 거면..."

  "집 갈 거야?"

  "김태형한테 직접... 뭐?"

  "집 갈 거면 택시 잡아주고."

  "...안 가면?"

  "한잔 할래?"

  "..."

  "둘이."





/





눈을 뜨면 낯선 듯 익숙해야 하는 내 방이어야 했다. 불과 며칠 전 계약하고 곧바로 이사한 내 방. 어딘가 내 방 천장보다 짙어 보이는 빛깔에 천장 색깔이 원래 저랬던가 두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고 있는데, 침대가 평소보다 넓은 걸 느꼈다. 휴대폰을 찾으려 침대 속으로 손을 더듬거리는데 생경한 느낌이 손에 닿는다. 꼭 공포영화를 보는 것과 같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게나 엎드려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기억 저 뒤편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가까운 기억 저장소 내에 입력되어 있는 익숙한 얼굴이. 꿈을 꾸는 걸까. 천장을 보던 멍청한 눈으로 새하얗고 동그란 얼굴을 끔뻑이며 쳐다보는데, 어제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사진을 찍은 것처럼 한 장면씩 이어지는 기억이 요상하다. 필름이 끊기기 전 가장 마지막 기억에서 나는 내 옆에서 아기처럼 자고있는 저 애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다급하게 이불 속을 들췄다. 깨질 듯한 비명은 내 의지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내 비명에 잠에서 깬 듯 비명의 근원인 그 애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전정국. 그 애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상황파악이 아직 덜 된 듯 처음 내가 잠에서 깬 그 모습과 아주 흡사했다.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너 뭐야?"





당혹스러워하는 내 질문에도 전정국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전정국과 다르게 셔츠 단추만 풀어져 있을 뿐 정직하게 모든 옷을 갖춰입고 있던 나는 빠르게 셔츠 단추를 잠그고 이불을 들추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이불에서 벗어나 침대에 앉았다. 한숨을 쉬며 헝클어진 머리를 고쳐 묶었고, 바닥에 떨어져있는 휴대폰을 주웠다. 전원 버튼을 눌러도 휴대폰이 켜지지 않는 걸 보면 배터리가 나간 모양이었다. 술독이 올랐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신을 차린 듯 이불을 걷는 소리와 함께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는 소리가 들렸다. 바지 지퍼를 올리는 소리까지 듣고 난 후에서야 몸을 돌렸다. 어제와 같은 복장을 하고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제법 기억이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나 왜 여기 있어?"

  "...그게..."

  "취해서 그랬겠지. 우리 집 몰라서 네가 못 데려다 준 거야. 그치."

  "어제 네가..."

  "아, 머리 아파. 뭐가 됐든 난 너랑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같이 술 마시고, 내가 너무 취해서 네가 집 빌려준 거야. 넌 침대에서 잔 거고, 난 바닥에서 잔 거야. 그치."





잠시 머뭇거리던 전정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최악이다. 굳이 최악의 수준을 따지자면 어제가 가장 최악이었지만 오늘까지도 최악이다.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고 남자의 집에 출입한 것도 모자라서 말도 안 되는, 내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기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도는 게 정말이지 너무도 최악이었다.


얼굴의 상태를 확인할 새도 없이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주워 현관으로 직진했다.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못하고, 전정국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남기지도 않고 그 애의 집을 벗어났다. 복잡한 머릿속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탓에 연신 한숨을 쉬어대며 건물을 벗어나는데, 그 애가 보였다. 김태형. 담배를 입에 물고 신발끈을 묶고있던 그 애는 본인 앞에서 멈춘 발을 느끼고는 발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그 얼굴에 무언가 해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해명이 아니라 변명이겠지만. 변명따위 할 사이 아닌 거 알고있지만. 시선이 맞닿았지만 그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정확하게는 옮기려 했다. 그 애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여기 사나 봐."

  "...아니."





김태형의 눈빛이 다소 날카로웠다. 그 애쪽을 보지 않아도 그런 시선쯤은 느낄 수가 있었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탓에 진실이 담긴 말이 튀어나왔다. 친구 집이라고 덧붙여야 하는데. 그 정도 거짓말은 할 수 있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고 있는 와중에 김태형은 익숙하게 단초를 벽에 지지고는 아무 감정 없는 말을 던지며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그럼 잘 가라."





그 자리에는 변명도 해명도 하지 못한 여자애 하나와 남자애의 알싸한 담배향만이 남아있었다.





/





  "그날 잘 들어갔어?"





전정국은 폭탄을 쥐고있는 애였다.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전정국은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말을 걸었다. 아는 척 안 했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앞으로도. 전정국의 뒤에는 김태형이 있었다. 가죽 치마가 잘 어울렸던 그 여자와 함께. 마음이 찢어지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건 이미 그 애를 쫓는 게 습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웃으며 그 여자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고등학생의 김태형은 여자애들보다는 남자애들과 곧잘 어울렸던 애였다. 일 년을 꿇은 탓에 같은 학년 애들보다 한살이 많았음에도 인기가 많았다. 어딘가 특별해 보였고, 어딘가 자유로워 보였으니까.


질문에 좀처럼 대답하지 않는 내 시선이 어딘가 어긋나있는 걸 느낀 전정국이 내 눈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기분 좋은 상상 속에서 깨어버린 것에 원망이라도 해야 할까, 부질없는 상상 속에서 깨워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까. 쉬이 좁혀지지 않는 마음의 거리에, 앞으로도 좁혀지지 않을 것을 직감하면서도 좀처럼 접혀지지 않는 마음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김태형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여자의 구두와는 완전히 다른 내 투박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구두굽으로 마음이 짓밟히는 기분이 들었다.





  "미안한데 나한테 말 안 걸면 안 될까."





자리를 옮겼다. 전정국에게 똑똑히 내 의견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내 차분한 물음에 전정국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그날 일은 없었던 거로 하자. 그냥... 그냥 우리 둘이 술 마신 것부터... 아니,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자. 모르는 사이로 하자, 우리."





전정국이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과 다르게 나는 그 애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 애와 시선을 마주하면 꼭 내가 그 애의 무언가를 부정하는 기분이 들었다. 전정국은 그렇게 한참을 나를 보더니 한숨을 한번 쉬고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럼 나 이제 그만..."

  "그럼 우리 지금부터 아는 사이 하자."





왜? 바보처럼 터져나오려던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 말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꼭 언어유희라도 하듯 내 말의 맹점을 찾아 찌르는 전정국의 말에 헛웃음이 다시금 터져나왔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꽤 재미있었다. 나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사람이 있었던가. 아니, 내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사람은 아니었던가.





  "왜 이러는데?"





내가 김태형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때의 추억이 문득문득 어느 순간에도 떠오르기 때문이다. 김태형과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른 채 순수하게 우리의 대화를 주고받았던 추억과, 누구보다 먼 사이면서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추억과, 나만이 그 애를 알고 그 애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그 애도 나를 알게 되면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추억. 그 기억들이 내 머리뿐만이 아니라 마음을 뒤덮고 있는데, 김태형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애를 추억했고, 그 애를 쫓았다. 그런데 너는. 너는 내게 이럴 이유가 없었다. 우리 사이엔 불과 며칠 전 첫만남과 어리숙한 실수를 저질렀던 기억이 전부인데, 네가 왜.


전정국은 내 물음에 그저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답이 있는 걸까. 맞닿은 시선에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어색하고 불안했다. 그 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이 가질 않아서. 아니, 어쩌면 내가 예상한 말이 나올까 봐.


꾹 다물어져있던 입이 열렸다.





  "난 아무것도 잊고 싶지 않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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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 작가님 저 어남전 갑니다!!!!
3년 전
플레이리스트playlist
답글 감사합니다!!!!🤭 작가도 모르는 결말, 어남전일지 어남태일지 기대해주세요❤️
3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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