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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요?"






아무래도 이 말이 그 선배와의 관계에 있어 시발점이 된 것 같다. 물론 여기서의 시발점의 표현은 다소 다의적이다. 계기라는 뜻도 있지만, 내가 말하는 건 여기서 점이라는 말을 빼면, 하여간 뭐 그런 의미도 없지 않아 있다. 이 말이다.


















오전 수업 때문에 설정해놓은 여섯 번째 알람을 끄고 나서야 겨우겨우 눈을 떴다. 알람을 끄기 무섭게, 알람 배너에 문자메시지 알림이 곧바로 밀려왔다.





새로운 메세지 1건




희미한 시야 틈으로 들어온 빛 때문에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보다가 결국 핸드폰 모서리 쪽을 얼굴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아침부터 재수 없게. 얼얼해진 코를 매만지며 발신인을 보니 '강영현'이라는 이름 석 자가 떡하니 쓰여있어서 1차로 놀랐고, 내용에 2차로 더 놀랐다.






「오늘 같이 밥 먹을래?」 오전 7시 12분






오늘, 같이, 밥




이 세 단어가 한눈에 확 튀었다.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아무리 생각해도 밥을 같이 먹을만한 사이도 아닌 뿐더러, 평소에 그가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제스처라든지, 약간의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느낌조차 없었기에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하여간 어느 의도 간에 다 노 땡큐다.










그 와중에 또 하나 문자가 밀려왔다. 이번엔 고등학교 동창회 얘기였다.








「이번에도 올 거지?」오전 7시 15분









"....오늘따라 유독 아침부터 피곤하네."








하루의 초반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게 딱 질색이라, 일단은 폰을 이불 구석으로 던져놓고선 화장실로 향했다.




부기 빼는 겸, 정신 차릴 겸, 수도꼭지 방향을 찬물이 나오는 오른쪽으로 한껏 당긴 다음, 세수를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울에는 튀긴 물방울들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며 흘러내리는 물방울들.

이맘때쯤이면 잊지 않고 돌아오는 동창회.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이상하게도 씁쓸한 감정과 함께 그때의 장면 한 조각이 떠오르곤 했다.
















물먹은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내 눈앞에 튀기는 물방울들ㅡ






그리고 인어처럼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 형체, 그 형체를 향해 열광하는 내 주변 여학우들. 저마다의 플랜카드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하나같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열광했다. 그가 첫 번째로 결승선에 도착하자마자 귀가 찢어질 듯 커지는 함성소리. 그가 수영모와 물안경을 벗고선 팬 서비스로 열기로 후끈거리는 관중석을 향해 손을 살짝 흔들어주며 웃자, 여기저기서 심장을 부여잡고선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 그대로 연예인이 따로 없었다. 아, 물론 나도 그 팬 서비스에 조용히 가슴 설렌 팬 중에 하나였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수영부로 유독 유명했다.



전국체전에서 많이 우승도 하고 그랬단다. 그래서 각종 지역에서 수영을 하는 애들이 일부러 이 학교에 입학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 아이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각 지역에서 수영으로 난다 긴다 하는 애들만 모였는데도 그중 제일 실력으로 나 인물로나 성격으로나, 모든 면에서 , 모든 면에서 돋보이던 그 아이는 항상 주변에 사람이 들끓었다. 수많은 사람들에 섞여있어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를, 한번쯤은 그를 가슴에 품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ㅡ





한마디로 만인의 연인이였다.





그 누구보다 만인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렸다. 웃는 걸 보고있으면 정말 그 아이 주변 모든게 화사해보였다. 한편으론 부럽기도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그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해주니, 어찌보면 타고난 팔자인가 싶기도했다. 그래서 더 끌렸을지도 모른다. 나와 너무 다르니까. 반대인 사람에게 끌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잖아. 아마 내가 그런 쪽이였던 것같았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때는 여름이 다가오던 5월 말. 교실안에서 학생들의 반은 춘추복, 반은 하복을 입었던 그 때, 학교 대청소때문에 분리수거하는 역할을 맡은 내가, 쓰레기처리장에서 그 날 입은 하복이 싱그럽게도 무척이나 잘어울리던 그 아이가 수많은 아이들이 제게 준 정성과 애정이 담긴 선물들을 라이터로 태우고있는 그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얘가 담배를 피던 사람이였던가. 하여간 그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건 아니였다.





붉게 타들어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바라보고있던 텅 비어있는 눈빛. 그다음, 무너지듯 벽에 기대어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 것까지ㅡ 의도치않게 그 아이의 감정의 밑바닥을 보게 된 나는, 말없이 깊은 우울감으로 가득차있는 그 곳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운동장 구석에 위치해있는 수돗가로 달려가, 수압 때문에 이리저리 튀는 물방울을 무시한 채로, 세수를 했다. 물에 비쳐, 블라우스 안에 받쳐 입던 검은 티셔츠가 선명해질 정도로. 계속해서 닦고 또 닦았다. 그 우울감이 내게 달라붙었을까 봐, 덜컥 겁이 났었다. 그리고선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여름날의 햇빛이 너무나 강렬했던 탓이었을까. 수돗가에 이리저리 어지럽게 흐트러진 물방울들이 빛을 받아 구슬처럼 반짝였을 때, 살짝 눈물이 고였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굳이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 않다.





그날 이후로. 그 아이에 대한 감정은 애정이 아닌, 연민으로 바뀌게 되었고, 내 짧은 짝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허무하거나 아쉽진 않았다. 그냥, 조금 씁쓸했다. 쟤도 똑같은 사람인 건데, 내가, 아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마저 이상적인 틀에 그를 억지로 끼워 넣은 거겠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인데, 너무 가혹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탈출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숨구멍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때 내가 도망치지않고 그 아이 옆을 지켜줬다면, 좀 더 상황이 나았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그 아이의 무섭도록 텅 비어있는 눈빛에 나마저도 텅 비어버릴 것만 같아서ㅡ 한때는 그때의 그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목 끝까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 괴로웠다. 그래서 애써 그 아이를 잊으려고 하기도 했다. 노력 끝에 지금은 이름, 얼굴조차 희미했지만, 아직까지 그 장면만큼은 어제 일만큼 생생하게 머릿속에 자동 재생이 돼버린다. 그리고, 그때보단 감정이 아주 많이 희석 되었지만 그래도 그 일을 떠올릴 때면 항상 마음이 아렸다.








그 이후로 난, 그런 유형의 사람을 극도로 불편해했다. 솔직히 싫어한다는 표현이 맞기도 한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때 그 기억이 떠올라서. 그래서 더더욱 영현을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었던 것 같았다. 첫 만남 때부터 그랬다.
















"너어는 진짜, 박제형 혈육이라 해도 믿겠다."







시끌벅적한 동아리 회식 분위기, 그 속에서 겨우 소주 반병으로 한껏 벌게진 얼굴을 하고는 원필이 한 손으론 숟가락이 안에 들어간 소주 병을 들고선 마이크처럼 입에 대고선 소리쳤다. 어묵탕을 먹고 있던 나는 제형이와 동시에 한쪽 눈썹을 들썩이곤 대답했다. 기가 막히게, 그것도 같은 음절 수로 라임 맞춰서.






"뭔 개소리야."

"뭔 지랄이야."

"와, 성진이 형 이거 봐봐. 나 지금 소름 돋은 거 보여? 너넨 진짜 찐이야 찐."






술기운 때문에 텐션이 꼭대기까지 간 원필은 긴팔 소매를 걷고선 핸드폰으로 연락하는 데에 열중한 성진의 눈앞에 들이대다가, 저것 좀 보라며 팔을 붙잡고 계속해서 흔든다. 성진은 그런 원필을 겨우 진정시키고선, 옆에 두었던 자신과 원필의 겉옷들을 챙기며 말했다.








"오버하지 말고, 영현이 도착했단다 가자. 잠깐 갔다 올게."

"벌써? 아까는 이제 나왔다면서ㅡ"






원필이 약간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을 팔랑거리며 성진을 따라갔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엔 나와 원필, 성진, 제형밖에 없었기 때문에 덕분에 여기 자리에는 잠시 찾아온 정적. 나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선 천장에 달려있는 실링팬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다른 애들은 신나게 술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안주랑 술이 엎질러져 엉망이 된 테이블에 비하면, 우리가 앉은 자리는 완전히 양반이었다. 그나저나,








"영현이?"

"경영학과. 너보다 세 살 많아."










성진과 원필을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 계속 앉아있던 제형이 혼잣말로 내뱉은 내 말에 서비스로 준 감자튀김을 입에 하나 넣으며 친절히 알려줬다. 너도 하나 먹을래? 아뇨 괜찮아요. 제형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선, 손에 남아있는 소금을 털어냈다.












"내가 봐도 성격이 닮긴 한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

"아마 영현이라는 애, 너한테 완전 안 맞을 거야."

"네?"

"너만 빼고 다 괜찮아. 딱 그 느낌이라고"

"뭔 소리예요 그게."










다짜고짜 저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으라는 건지. 약간 어벙한 표정을 짓고만 있자, 습관처럼 뒷머리를 털던 제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만나보면 알게 될 거야. 그리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라이터를 챙겨 자리에 일어났다. 나 담배 좀.










형광등 아래, 탈색으로 잔뜩 상한, 부스스한 제형의 머릿결이 흔들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거품이 다 빠져버린 나머지 맥주를 한꺼번에 마셨다. 뒤늦게 올라오는 술기운 때문에 몸이 몽롱해져, 약간의 여백이 남은 테이블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그렇게 잠깐 잠이 든 것 같았다.
































"야, 일어나."






흐릿하게 들리는 원필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자리 배치가 오묘하게 바뀌었다. 내 앞에 있던 제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제형 대신에 성진으로 바뀌었고, 분명히 내 옆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는데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한번 어루만지고선 다시 눈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도 여전히 낯선 얼굴이었다.












성진도 꽤나 피어싱을 즐겨 하는 편이라 눈에 익숙한데, 드롭 피어싱은 처음 봤다. 검정 가죽 라이더 자재킷 안에 검은색 목폴라, 흑발 머리. 그리고 술잔을 들고 있는 팔목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팔찌들. 내 주변에는 볼 수 없는 화려한 스타일링들. 그래서 더욱 어색해하는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 남자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게 무색할 정도로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







"아 쟤는 얘 처음 보려나, 아까 들었지, 얘가 영현이다."

"그치, 그때 영현이 형은 휴학했으니까."

"성진이 형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앞으로 잘 부탁해."








영현이라는 저 낯선 사람과 더불어 동시에 세 명의 목소리를 듣게 되어 정신이 없어 머리를 부여잡곤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 영현이 악수를 청하기 위해 뻗은 손을 살포시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잡은 영현의 손은 상당히 차가웠다. 그때 담배를 피우고 온 제형이 영현에게 다가와 손으로 어깨를 감싸 쥐며 아는 척을 했다.





"강영현 왔네."

"어 제형이 형! 오랜만이에요"

"아까부터 현우가 너 찾던데. 저기 테이블."

"아 그래요? 잠깐만요ㅡ"










영현은 자리자리에 일어나 다른 쪽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에 다다르자마자, 그 테이블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한껏 업된 텐션. 오빠 진짜 오랜만이에요ㅡ 야, 그동안 뭐하고 살았냐.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뻗는, 퍽 소리 날 정도로 등을 두드리는 각종 손길과 함께 격하게 반가워하는 반응. 그걸 익숙하게 받으며 웃고 있는 저 사람.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인데.






"........"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언제 왔는지, 제형이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담배를 피우고 나면 늘 습관처럼 핸드크림을 바르는 제형이, 영현을 관찰하고 있는 내게 툭 말을 건넸다. 감귤 향이라고 정직하게 쓰여있는 핸드크림에 눈길을 한번, 그리고 또다시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네, 대충은요."






한 마디로 나랑은 전혀 안 맞는다는 뜻이었다.





































가능한 그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 같다 싶으면, 얼른 다른 길로 찾아 나섰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나는 어김없이 도망을 선택했다. 그게 마음이 한결편했으니까.










그 사람의 성격을 처음에 잠깐 보고 어림짐작으로 판단하고, 아직 내게 일어난 일도 아무것도 없는데도 지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른다잖아. 감정의 아주 깊고 어두운, 우울하기 짝이 없는 그 밑바닥을, 그리고 그걸 목격했을 때 느꼈던 내 감정. 마치 우울이라는, 푸르고 검은색을 띤 심해에 첨벙 빠져버린 느낌.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로 가득 찬 느낌. 뱃멀미할 것같이 울렁이는 속. 난 다시는 그런 느낌을 받는 것에 있어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말하고 싶다.







영현도 며칠간은 다른 사람처럼 나를 대해주다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어느 날부터는 굳이 내게 아는 척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내 눈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지진 했지만, 그래.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저번 주 금요일

학교 근처 앞 호프집

동아리 회식.



거기서 내가 가위바위보에 지지지지만 않았어도ㅡ








"나란히 졌으니까 둘이 아이스크림 사가지고 온나."

"야 나는 메로나ㅡ"

"........."






아까 홧김에 너무 달렸던 탓이었을까, 회식의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올라오는 술기운 때문에 가뜩이나 정신없는 상태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러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심란함과, 생리적으로 자꾸만 올라오는 토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금 이 자리에 계속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냥 내가 혼자 갔다 올까? 밖에 춥잖아."










그런 내 상태를 눈치챈 건지, 그전부터 계속 자기를 피하던 것을 의식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영현이 먼저 저렇게 말하니 내 쪽에선 할 말이 없어졌다. 물론 몸 컨디션이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만, 나는 저 지독한 다정함이 오히려 더 숨이 막히고 힘들어서, 말없이 고개를 젓고선 영현과 같이 따라나갔다. 영현은 그런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살짝 오묘해졌다.















편의점으로 가는 동안 서로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보다 더 어색한 상태였다. 서로 간의 거리를 철저히 지킨 상태로, 나는 팔짱을 낀 상태로, 영현은 계속해서 연락이 오는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저 멀리 편의점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11월이 되니, 슬슬 빼빼로데이니 뭐니, 입구 앞부터 현수막에, 초콜릿에, 반짝반짝 화려하게 배열을 해놓았다. 나는 큰 빼빼로 모양의 등신대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편의점을 향해 계속 걸어가는데, 한참 말이 없던 영현이 대뜸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선,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하루야."

"네?"

"혹시 나 피하는 거야?"

".........."

".........."







아. 역시 눈치챘구나.





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불편한 관계로 지내는 걸 싫어한다는 걸 대충 눈치로 알고 있었으니, 언젠가 나에게 저 질문을 할 것이라는 걸 당연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근데 상상만 했던 저 말을 막상 들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기서 맞는다고 하면, 원래 없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양심의 가책이 들 것만 같았다. 어느새 편의점 앞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습관처럼 등신대 옆에 배치되어 있는 캡슐 뽑기에 돈을 넣으며 말했다.






"...선배가 잘못한 건 없어요. 그냥 제가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너 성격 안 이상해."






유독 뻑뻑하게 느껴지는 태엽을 겨우 돌리니, 달그락 소리를 내며 분홍색의 캡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여우 모양의 인형 키링이었다. 영현은 그 키링을 보며 귀엽다. 라고 한마디 던지며 나를 바라봤다. 또다시 정적. 그나마 들린 건, 저 멀리 희미하게 어디론가 배달하러 가는 오토바이 소리. 그의 드롭피어싱이 예쁘게 살랑거렸다. 향수 냄새도 살짝 은은하게 퍼졌다.




"선배도 아마 들었을 텐데, 저 싹바가지라고 이미 소문 쫙 돌았어요."

"아 제형이 여자 버전이라는 그거?"

"네, 그거요."

"글쎄, 난 제형이를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냥 표현방식이 남다른 거지. 너도 그렇고."

"절 너무 좋게봐주시는 것 같은데."

"글쎄ㅡ?"





사람 좋은 미소를 씩 짓더니 앞장서서 아이스크림 박스로 향했다. 아마 사람들이 이런 모습에 저 사람을 좋아하는 거겠지. 싶었다. 동아리 회원들에게 사줄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던 그 뒷모습을, 남들은 듬직하다고 말하는 저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나에겐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꺼내고 있을 테니까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영현의 말에 먼지 가득한 테라스 테이블에 얼굴을 맞대었다. 여우 인형의 키링을 검지에 끼고선 원을 그리며 돌렸다. 생각해보니, 인형의 생김새가 영현 외모와 매우 흡사해 보였다. 키링 인형이 불안정하게 내 검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초점을 다시, 인형이 아닌 인형 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고 있던 영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불안정해.






그 생각이 들자마자, 툭. 하고 키링 인형이 내 손안에서 떨어졌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 나는, 항상 그를 보면 생각했던 것을 나지막이 툭 던지고야 말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술김에 한 말이었다














"근데요 선배."

"응?"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요?"





그런 내 말에 고르고 있던 손짓을 멈추고선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눈빛. 희미한 시야로는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우리 둘의 정적을 간간이 메꿔주는, 곧 겨울이 오는 걸 알려주는 차가운 바람들.






"............"

"............"

"하루 너는 뭐 먹는다고 했지?"

"괜찮아요, 저는 속이 안 좋아서."

"...계산하고 나올게 잠시만."







나는 다시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눕혀져 있던 키링 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편의점 입구에 설치해놓은 작은 종소리가 어지럽게 내 귓가에 맴돌았다. 머리가 윙윙 울렸다. 나는 그게 마치 수면 유도제가 되는 것처럼 기절하듯, 픽 잠에 들고 말았다.



















그 후의 기억들은 온전치 못했다. 완전히 산산조각이 돼버린 조각들을 겨우겨우 끌어모아봤자 소용이 없다. 장면 단위로 그나마 인상 깊게 남아있던 건, 분명한 사실은ㅡ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내게 생판 초면인 인형 키링이 생겼다는 걸 침대 머리맡 근처에 발견한 걸 보아서는, 일단 술 먹으면 캡슐을 뽑는 버릇이 어김없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내가 영현에게 업혔다는 것.



그거 하나였다.






근데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동아리 멤버들이 그걸 보고서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특히 김원필이 그 다음날이라도 나에게 와서 혹시 썸이라도 타는 거냐고 난리 칠 게 뻔할 텐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제 숙취는 괜찮냐며 안부를 건네는 게. 정말 모르는 눈치라서. 아직까지 그게 의문이었다. 나 집에는 어떻게 들어갔냐고 물어보자 너랑 집 방향 비슷한 동기 두어 명같이 택시 태워서 보냈단다. 그렇다면 내 기억 속 그 장면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 또한 여기서 더 의미 부여를 하면 안 될 것 같아, 더 이상 생각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더 깊이 빠져봤자, 그 사람과 엮이는 꼴밖에 안되니 의문점이 남더라도 넘어가는 게 제일 간단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했었다. 근데 오늘 먼저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화장실에 나오니, 이번엔 전화벨 소리가 나를 재촉했다. 보나 마나 아까 동창회에 나올 거냐는 친구일 것이다. 하여간 성질 급하기는. 아직 물기 묻은 손 때문에, 회색 이불에는 검은색 얼룩이 생기고 말았다.








"여보세요."

ㅡ야, 너 갈 거지?

"왜 이렇게 급해. 천천히 해"

ㅡ이번에 사람이 많아서 따로 예약할 거야 그니까 빨리 말해야 돼

"웬일이래? 원래 오던 사람만 왔잖아."

ㅡ그랬지, 근데 이번엔 걔도 온다고 하니까. 걔 때문에 애들이 올해 몰리는 걸껄?

"걔가 누군데"

ㅡ아 그 있잖아, 아이돌 뺨치게 인기 많았던, 수영하고

"아."









모를 리가 있나. 애써 잊으려고 했던 이름과 얼굴. 나는 부디 친구가 그 이름을 꺼내질 않길 바랐다. 이름을 듣게 되면, 여태껏 잊으려 했던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하지만, 친구가 그걸 눈치챌 리가 있나.






ㅡ윤도운이잖아, 윤도운. 너 진짜 몰라?







아, 그 이름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기억 속에 희미했던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윤도운. 하복이 매우 잘 어울리던,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 자신의 텅 비어있는 눈빛을 내게 들켜버렸던. 여태껏 동창회에 나오지 않았던 걔가 돌연히 이번에는 나온다고 답했단다. 나는 그 아이를 똑바로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도망쳐야만 한다. 그때 그래왔던 것처럼.




근데 왜 지금 여우 인형 키링과 또다시 눈이 마주치는 건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

ㅡ그래서 간다고 만다고, 빨리 말해라.







화장실 거울 표면에 맺혀 흐르던 물방울은 어느새 말라버린 지 오래다. 그저 흔적만 남아있었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얼룩이 돼버린 물자국을 지워내며 말했다.






"이번엔 어디서 모일 건데?"






















ㅡ넌 좋겠다. 꼴리는 대로 막 살아서.




내가 최근에 이별했을 때, 이제는 남이 돼버린 상대방에게 들은 말이었다. 정확히 내 양심을 저격한 가시가 덕지덕지 붙은 말이었지만, 나는 이미 그 레퍼토리는 지겹도록 들은 터라 아쉽게도 내겐 딱히 타격이 없었다. 아, 그리고 원체 양심이 없기도 하다.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성격.이라고들 내게 많이들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수많은 어른들로부터 참으로 선하게 생겼다며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 들어왔었고, 그것이 내겐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항의 의미로 오히려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행동했었고, 그게 굳어져 지금의 성격이 돼버렸다.


내 첫인상을 보고선 각자 자기들만의 이상적인 틀에 나를 끼워 맞추고선 다가가갔다가 막상 그게 뒤틀려버리면 실망하며 떠난다. 어쩔 땐 그냥 떠나는 게 아니라 내게 욕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걸 이제 익숙해질 정도로 경험하게 된 나는 그저 웃겼다. 왜 자기들이 착각하고선 왜 내 탓을 하는 건지.





난 딱히 그들의 기대치에 부합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쭉. 영원히. 네버. 없음. 그리고, 다정, 배려, 이타심. 이것들은 전부 다 나와 거리가 먼 것들이니 딱히 내 이미지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아니, 원래 내 가치관이 이렇다.




나는 내 이미지를 위해 다른 것들을 굳이 희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차피 지구에 인구는 몇십억이다. 안될 인연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기엔 새롭게 만날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냥 안 맞으면 안 맞는 거다. 서로 가치관이 안 맞아 얼굴을 붉힐 바에, 그게 깔끔하잖아? 어떤 사람은 쿨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며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난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인간관계의 가치관이 다른 거고 이게 난데 왜.



사실은 이렇게 된 것도 막 오래되진 않았다. 정확하게 시기를 짚어보자면,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 아이의 깊은 바닥을 본 이후로, 갈팡질팡했던 노선을 확실히 잡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안 그러면 언젠가 나도 저럴 것 같아서. 무서워서. 그런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다.


















"식후땡?"



나름의 사색을 잠기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내 옆에 털썩 앉은, 회색 후드집업 모자를 뒤집어쓴 제형이다. 매너상 담배를 끄려고 하자, 바로 내 행동을 저지하며 오히려 손바닥 방향으로 손을 불쑥 내게 내밀었다.




"나도 불 좀."











잠깐 동안은 연기를 내뱉는 소리만 우리 둘 사이에 들려왔다. 원래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기도 하고 둘 다 원필이나 성진처럼 살갑게 말을 붙이는 성격도 아닌 터라, 그저 말없이 맞담배를 피웠다. 제형은 자신의 긴 손가락으로 가볍게 재를 한번 털고선 내게 먼저 말을 건넸다.







"어제 영현이랑 같이 밥 먹었다면서."

"선배가 먼저 그렇게 말을 해요?"

"아니, 같이 밥 먹자 했는데 이미 너랑 먹었다 해서."

".........."

".........."

"근데 선배는 영현 선배랑 어떻게 친한 거예요?"

"친한 거야?"

"적어도 저보단 친근한 사이죠."




내 대답에 제형은 잠시 무언갈 생각하는 듯, 담배 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곤 연기 한 모금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럼. "




제형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선 다시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웬일로 늘 입던 빨간 체크남방 대신, 회색 후드집업 차림이다. 의외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몇 초 만에 관심을 접었다. 굳이 언급하곤 싶지 않아서. 나는 남은 담배 캡슐을 터트리며 다시금 아까 있었던 일을 한번 곱씹어 보았다.






















"그때 저 실수한 거 있었어요?"

"저번 주 말하는 거야?"

"네."


학교 근처 닭발집이었다. 내가 물컵을 채우는 동안 영현은 냅킨을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예쁘게 세팅을 해놓았다. 오늘은 드롭 피어싱이 아닌, 작은 은색 링이었다.



"없었는데? 걱정 안 해도 돼."

".........."



그때의 일은 묻어버리기로 암묵적으로 결정했나 보다. 그렇다면 뭐, 나도 딱히 그 일의 기억을 굳이 꺼내서 헤집어놓고 싶진 않아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잠시 침묵.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핸드폰만 하기엔, 영현은 핸드폰을 보지 않고선 가만히 앉아만 있고. 그 상황에서 나 혼자만 핸드폰 보고 있으면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애꿎은 손 밑의 살만 뜯어댔다. 반쯤 입을 가린 채 턱을 괴고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탁자 밑으로 시선을 향했다.



뭐야. 왜 자꾸 보는 건데.

결국 나는 영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는 영현에게 나는 말했다.




"근데 갑자기 밥은 왜"

"다른 동아리 멤버들이랑은 다 한번씩은 먹었는데 너랑은 한 번도 못 먹어서."

".........."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요.라는 말을 물과 함께 꾸역꾸역 삼켜냈다. 날카롭게 가로로 뻗은 영현의 눈매를 바라보고 있자, 문득 가방 밑바닥에 두었던, 여우 인형 키링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가방 구석에 처박힌 인형을 꺼내 영현에게 불쑥 건넸다.




"어, 그때 뽑았던 인형이네. 이거 나 주려고?"

"네, 선배랑 닮았어요."




집에 계속 둬봤자, 그때 그 기억만 떠오를 뿐이라서. 사실상은 떠넘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근데 난 원래 양심 없다니까.


애써 합리화하며 영현에게 인형을 떠넘겼다. 그런 내 속마음을 알리 없는 영현이 잔뜩 신난 표정으로 어때, 나랑 닮았어? 그렇게 말하면서 인형과 자신의 얼굴 옆에 나란히 대보는데, 맨정신으로 다시 봐도 똑 닮아서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강하게 몇 번 끄덕였다.




"고마워, 이거 백팩 같은 곳에 해놔야겠다."




인형이 정말 마음에 든 건지, 입꼬리가 귀까지 걸린 영현을 보니 그제야 살짝 아주 살짝, 양심의 가책이 생겼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씹고 있는 게 음식인지 돌인지 모래인지 모를 만큼, 불편했다. 그래서 젓가락을 입에 물고 가만히 멍을 때리고만 있자, 영현이 내 눈앞에 손바닥을 흔들었다.




"왜 그래, 졸려?"



영현의 질문에 무어라 대답이라도 하려는 그때,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영현의 핸드폰 액정이 잠시 반짝였다. 물밀듯 밀려오는 연락들. 잠시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영현.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 미미하게 내쉰 한숨. 그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무섭도록, 텅 비어서. 그때 그 아이의 눈빛과 너무도 똑같아서.




영현은 흔들리는 내 동공을 표정 변화 없이 계속해서 응시했다. 그리곤 정신없이 깜빡거리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선 아예 뒤집어 놓곤 말했다.




"하루야."

".........."



그리고선, 천천히 내뱉는 한 마디.



"네가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지만"



영현은 조금 남은 물컵을 마저 마시고선,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테이블 위에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올려놓고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영현의 뒤에서, 설거지를 하느라 온갖 그릇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우리 자리의 양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합해져서 모든 것이 산만했다. 하지만, 낮으면서도 느린 그 목소리는 묻히지 않고 선 오히려 더 또렷하게 내 귓가를 때려 박았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하루야."

"......."






뭔가, 핀트가 어긋난 느낌. 조금도 아닌 아주 많이.




마음에 든다는 게, 이성으로서인지 같은 동아리 회원으로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많이,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걸까.



그 말이 왜 이렇게, 나한테 화가 난 것처럼 들리는 걸까.

































"선배."

"응"

"육감을 따라가는 게 맞을까요."

"갑자기? 어떤 면에서 말하는 건데."

"예를 들어, 인간관계 같은 거요"

".........."

".........."

"좆됐다 싶으면 그 느낌이 맞아."

"아, 그럼 맞는 거네."





제형은 명료하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한마디로 좆됐다. 라는 거네. 보통 상대방이 이런 말을 던지면, 뭔 일 있어? 왜 그래?라는 말을 보통 사람들이라면 물어볼법한데 제형은 그런 흔한 반응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관심조차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아까 내가 제형의 옷차림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 곧바로 없앤 것과 비슷한 맥락이겠지.



나와 제형은 무척이나 닮았다. 다행히 동족혐오 이런 건 느끼질 못했다. 그냥 남들에 비해 나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변명 같은 것들을 할 필요가 없어서 덜 귀찮았다. 그래서 친하지 않지만 마음이 편한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내가 걔랑 의외로 잘 지내는 이유는."




짐을 챙기며 일어나려는데, 제형이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우리에게 없는 곡선이 걔에게 있는 거고 걔에게 없는 직선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서로 상호보완하니까. 의외로 잘 지내는 걸로 보이는거지. 아마 너도 그럴 거야."

"전 필요 없어요."

"필요할걸."

"지금은 아니에요"

"그래, 그럼."




또다시 침묵. 난 마저 짐을 챙기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형은 아직 반쯤 남은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느라 내리깐 제형의 속눈썹은 무척 길었다.




"....근데 오늘은 왜 그거 안 입었어요?"

"뭘"

"체크남방."

"그거 어제 술 먹은 후배가 토해서 빨았음."


아, 토해서ㅡ 괜히 물어봤다는 마음이 절로 드는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내 갈 길을 가려는데,






"어, 그쪽으로 가면 강영현 있는데."






그 말에 나는 바로 반대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급하게 방향을 트는 내 모습에 제형이 밥솥 소리를 내며 크게 웃었다. 농담이야, 오늘 강영현 거기 수업 없음. 나는 그런 제형의 모습이 얄미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제형 쪽으로 돌아보지 않고선 바꾼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어, 거긴 진짜 영현이 있는 곳인데ㅡ"




영현이 있는 방향 쪽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외쳤지만, 이미 떠나간 빈자리에 혼잣말을 내뱉은 꼴이었다. 제형은 입맛을 쩝 다시다가, 담배를 하나 더 꺼내어 물었다. 마침 자기 앞을 지나가는 원필이 있어 붙잡았다.




"야 김원필, 불 있냐."

"형, 나 비흡연자라고 열 번은 말한 듯."

"아 그러냐 쏘리."

"하여간 남한테 존나게 관심 없어요"


























떨어진 낙엽들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하루 네가ㅡ 머릿속에 맴도는 소리를 잊으려 괜스레 더 힘을 주어 바스락 소리가 크게 나도록 걸었다.





ㅡ우리가 없는 곡선이 걔에게는 있는 거고.




글쎄, 과연 그 사람이 곡선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까 제형에게서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의문점이 들었다.






"아 씹..."



낙엽 밑에 숨겨진 은행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밟아버리고 말았다.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가방 안에 들어있을 물티슈를 찾는데 전화가 왔다. 동창회 얘기를 꺼낸 그 친구였다.







"여보세요?"

ㅡ2주 뒤에 금요일. 불만 없지?

"뭐를"

ㅡ기지배야, 좀! 동창회! 정신머리 어디?

"아, 맞다. 돈 지금 보내?"

ㅡ될 수 있으면 지금 보내는 게 좋지.

"잠시만ㅡ"

"어, 하루다."





친구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한창 폰뱅킹에 한참 열중하는데, 영현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러보니, 검은색 코트에, 검정 백팩을 멘 영현이 서있었다. 영현이 매고 있는 백팩 디자인과는 어울리지 않게 인형 키링이 달랑거렸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오면 영현이 부담스러워, 나도 모르게 한두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여기 수업 있어?"

"어, 화장실이요. 화장실. 많이 급해서 이만 가볼게요."

"그래. 화장실 중요하지. 얼른 가"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이 웃는 영현의 표정이 꼭 나를 놀리는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불쾌했지만,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라. 나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ㅡ화장실은 너무 갑분싸다 친구야.

"아씨, 그런 게 있었어"

ㅡ복학생 선배야? 진상이야? 찝적대?

"그런 건 아니고.... 돈 보냈어 확인해."

ㅡ오냐~ 혹시나 그 선배가 밥 사준다 하면 아무리 싫어도 니 성격대로 욕하지는 말고. 알았냐





응, 이미 밥 먹었어. 하지만 딱히 그 말에 덧붙이지 않고선 깔깔거리는 친구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로 통화를 끊었다.





그 때, 어디선가 체교과 애들이 우르르 나왔다. 아 맞다 여기 건물 체교과 애들이 쓰지. 그때, 수영모로 보이는 것을 들고 가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수영, 그 아이도 참 잘 했는데.


그러보니, 아직도 수영하고 있나? 생각해보니 나 스무 살 때까지는 어디 대회나갔다 라는 소식같은 걸 여기저기 들린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그런 소식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때 또다시 겹쳐떠오르는, 아까 영현의 백팩에서 흔들리던 인형 키링. 그게 갑자기 왜?





ㅡ..... 이게 뭐야?

ㅡ마니또 선물. 늦어서 미안

ㅡ다행이다.

ㅡ뭐가?

ㅡ난 네가 나 싫어해서 안주는 줄 알았어








"......."





아 맞다. 왜 익숙하나 했다.

예고도 없이 불쑥 떠오른 옛 기억에 입안만 씁쓸해졌다.




수영, 라이터, 하복, 여름, 인형 키링.


모든 잔상들이 내게 물밀듯이 밀려왔다. 풍덩, 소리와 함께 수영장의 소독약 냄새가 갑자기 나는 듯했다. 넌 잘 살고 있는 걸까. 아직도 넌, 사람들이 만든 틀에서 갇혀있을까.







"니 여기서 뭐 하니."

"어, 선배."




맞다. 성진이 체교과인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깔끔한 성격상, 샤워까지 하고왔을 성진이 샴푸 냄새 풀풀 풍기며 젖은 머리를 털며 내게 아는 체를 해왔다. 공학관은 여기랑 정반대인데. 누구 보러 왔나. 아님 나? 아니 뭐 어쩌다 보니. 성진은 자신이 들고있던 백팩에서 물티슈를 꺼내 내게 건넸다. 닦아라.



"니 은행밟았나. 냄새 한번 고약하다."

"고마워요, 아까 지나가다 밟았어요."

"맞다, 영현이 말이야."

"........"



또, 또 강영현 얘기다. 도대체가 영현이 복학한 이후로 이야기의 서두가 영현으로 시작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한쪽 눈썹이 살짝 찡그리다 말았다. 성진은 그런 내 인상을 검지로 친히 펴주며 말했다.






"찡그리지 마라. 더 못나진다."

"그 선배는 왜요?"

"조금 있음 공모전 하는데ㅡ"

"나 그 선배랑 같은 팀이에요?!?"

"어어 맞다. 와. 싫나?"

".......설마 2인 1조는 아니죠?"

"설마가 맞는데?"

"........."

"걔랑 뭔 일 있나. 싫으면 조 바꿔줄게. 아직 영현이는 모르니까."





순간 내적 갈등이 일었다.


내적 갈등이라고도 할 게 없잖아. 당장 팀 바꾸겠다 말해. 그게 맞잖아. 근데 왜 고민하는데? 지금 망설이고 있는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팀을 바꾸면 피하는 게 너무 대놓고 티 날까 봐? 근데 계속 그래왔잖아. 갑자기 왜 이러는데. 설마, 그 사람이 나한테 내가 마음에 든다 해서? 아니지. 그건 호감 표현이 아니라 일종의 경고ㅡ






"아."

"아는 무슨 아야. 그래서 뭐 우짠다고."

"아뇨 그냥 그대로 할게요."






난 청개구리 심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경고를 하면, 이 선을 넘지 마시오,라고 빨간 선을 대놓고 긋는다 하더라도 나는 의도적으로 그걸 피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과 계속 마주쳐야 한다. 이럴 때 내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그러면 좋게좋게 잘 지내야지. 굳이 싸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치, 굳이 와 싸우나. 알고 보면 잘 맞을 수도 있는 거고."

"됐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원필과 성진의 대답이 내겐 영 시원찮았다. 물론 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마찰을 싫어했고, 가급적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라 예상은 했다만. 나는 다 먹은 막대 하드를 오징어처럼 어금니로 질겅질겅 씹어대다가, 그들의 대답에 난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뱉어내고선 동방의 낡아빠진 소파에 눕듯이 기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꽤나 요란했다. 제 수명을 거의 다 한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거렸다. 원필과 성진은 공모전 얘기로 방향을 바꾸어 흘러갔다. 손목으로 눈가를 가리고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옆에선 희미하게 담배냄새가 났다. 왜냐면 내 옆에는 아까부터 말없이 핸드폰 게임만 하고 있던 제형이 있었기 때문에.


제형은 나를 힐끗 보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싫으면 그냥 얘기를 해."

"내가 아무리 성격 지랄맞다 해도, 그렇게 사회성 떨어지는 사람 아니에요."

"............."

"뭐요."

"그래. 그렇다 치자."

"............."



손목을 치우곤 제형을 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자, 시선을 느낀 제형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선 나를 향해 피식 웃었다. 아니, 썩소가 좀 더 맞는 표현 같았다. 나보고 어쩌라고요, 답정너세요?




"선배는 말을 해도 듣는 사람 좆같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네요"

"응 그건 너도 마찬가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하는 꼴이 내게는 약오르기 짝이 없어, 나는 제형이 입고 있는 후드티의 모자를 씌우게 한 뒤 그대로 모자 끈을 콱 조이고선, 그대로 동방을 나갔다. 뒤에서 눈치를 보고만 있던 성진과 원필이 그제야 제형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까 쟤 누구 저격하고 말하는 거야?"

"아, 설마 영현이 보고 말하는 건가, 가가 영현이랑 같은 팀이라고 하니까 성질이란 성질은 다 내던데."

"영현이 형을? 왜?"

"아니니까 뇌피셜 돌리지 마셈."



헛기침을 몇번하다, 제형은 닫혀진 동방 문을 바라보며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꽉 묶인 모자 끈 매듭을 풀어냈다. 그리곤 빨간 자국으로 남겨진 목 주변을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놓고서부터 시작했다. 컵을 집으려고 뻗은 팔 덕분에, 레이어드한 여러 팔찌들이 영현의 손목 근처에서 짤랑짤랑소리를 내었다. 한모금 마시고선, 영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고 싶은 아이디어 있어?"

"아무래도, 트렌드에 맞게 제작하는 게 사람들 반응 얻기에도 안전빵이니까ㅡ"

"너무 식상하지 않을까"

"........."




곧바로 커트해버리는 영현의 말. 근데 반박할만 한 대답이 없어, 0승 1패. 나는 패배의 의미로 아메리카노를 한입 마셨다. 영현의 차례였다. 어디 네 의견이 그리 잘났는지 한번 들어보자. 눈에 불을 켜고 선 귀를 기울였다. 이번엔 붉은 계열로 염색을 한 영현의 머리칼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이사람은 염색을 해도, 머릿결이 말짱하네. 색깔이 꼭 토마토같다. 튀는 색깔을 해도 묻히지않는 이목구비가 신기했다. 이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는 그 때, 영현이 말했다.




"근데 식상한 게 먹힌다는 게 아이러니지ㅡ"

".........그래서 뭐 어쩌자고요. 하자고요?"

"레트로, 괜찮은 것 같아."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씩 웃곤 커피를 마시는 여유로운 영현의 모습에 0승 2패. 그냥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완전히 영현의 페이스에 말린 것 같았다. 입술을 한번 깨물고선,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럼, 목차부터 짜보죠."

"자료조사를 해보고 그다음 목차를 짜보는 게 어때?"

"목차를 짜야, 자료조사를 할 틀을 마련하죠."

"그러면 시야가 좁아지잖아. 조사를 먼저 하고나서 그다음에 추리는 방향이 더 나은 것 같아."

".........."

".........."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1도 안 맞는다. 어쩜 이러지. 성격뿐만 아니라, 자료조사하는 것부터 아예 스타일이 달랐다. 이래서 같이 하고 싶지 않았는데, 갑자기 내가 왜 오기가 생겨가지고. 관자놀이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검지로 눈가 주변을 꾹꾹 누르며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아메리카노 안에 남아있던 얼음이 녹아, 컵의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숨을 한번 스타카토처럼 몇 번 쉬고선 말했다.




"그래,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러면."

"........"

"왜요, 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나는 아직도 궁금해."

"뭐를요."

"하루가 나한테 어떤 감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건지. 단순히 싫음의 감정인건지, 뭔지."

".........."

".........."





또, 또 그 눈빛이었다. 텅 빈 눈빛. 솔직히 난 저런 눈빛을 볼 때마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조차 오질 않는다. 목구멍에서부터 턱턱 막히기 시작해, 숨이 막혔다. 아무래도 그 아이에 관한 기억이 떠올라서? 물론 그것도 있기는 있다. 근데 아무래도 내가 제일 숨 막혀하는 것은, 그렇게 숨이 막혀 버둥거리고 있던 그 아이를 발견하고서도, 도망가 버린 나 자신. 그것에 대한 자책감.

응,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것 같다.






ㅡ그렇게 싫으면 그냥 얘기를 해.



"...맞아요. 난 그냥 선배가 싫어요."

"............"

"............"

"...왜 싫은데?"





싫다고 면전에서 들은 사람치고는 표정과 말투는 꽤나 침착했다. 아마 짐작을 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렇게 티를 냈으니, 모를 리가. 나는 괜히 빨대로 남은 얼음들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싫은 데에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그래도,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

"저는 없어요. 제가 전에 말했잖아요 저 성격 이상하다고요."

"아니라고 나는 대답했던 것 같은데."

"선배한테만 아닌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은 상대적이니까. 그래서 난 아니라고 대답한거고."

"............"

"..........."

"왜 저를 좋게 봐요. 그냥 저처럼 탐탁지 않게 보면 서로가 편하잖아요."

"그럴 이유가 있어? 난 그러기 싫어."

"그거야 선배는, 남들에게 미움받기 싫으니까 그렇죠."

"..........."




기어코 내 입으로 뱉어내고야 말았다.

그게 어찌 보면, 영현에게 있어 버튼 역할을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나도 이렇게 생각없이 내뱉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놈의 성질머리는 정말 어딜 가나 도움이 안 된다, 나도 내 스스로 뱉어낸 말에 순간 후회되어, 내 입을 막듯이 턱을 괴어 창밖을 바라봤다.





"....그래서 날 싫어하는 거야?"

"........."

"........."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내 마음이 더 편할 텐데. 영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갈 생각하는 듯, 왼손의 다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피아노 치듯 툭툭 두드렸다. 일정한 패턴 없이 두드리는 박자. 나는 남은 얼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입안 가득 냉기가 차올랐다. 오도독 소리를 내며 얼음을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이가 시려웠다. 하지만 차가운 얼음을 먹어도 침착하게 내 마음이 잘 가라앉지가 않았다. 진짜 바보인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후회할 거면 왜 내뱉었을까. 오히려 상대방보다 초조해진 나 자신을 보며 난 내 스스로를 비웃었다.





"너 말이 맞아."




잠시 동안 테이블 피아노만 치던 영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서늘한 눈매가 더욱더, 날카로워 보였다. 아니, 눈빛이 더 탁해 보여, 아니 아니. 그냥 슬퍼 보였다.





"난 남들에게 미움받는 게 무서워."

"........"

"그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내가 자만했었나 봐."

"....그게ㅡ"

"사실 나도 너 싫어해. 어느 누가 나를 싫어하는데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겠어. 말이 안 되지. 그리고 특히나, 네가 내 약점을 보란 듯이 꿰뚫고 있는데. 죽기보다도 들키기 싫은 그 약점을 네가."

"........."

"........."



ㅡ네가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지만

ㅡ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하루야



그 때 핀트가 어긋났다고 느낀 그게, 착각이 아니었나보네.

창밖의 날씨와는 대조되게 착 가라앉아버린 분위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마디 밖에 없었다.





"....술 마실래요?"

































이상했다. 이상한 것 투성이다.






오늘 같은 날이면, 사람들이 가득 붐볐을 텐데 호프집 안에는 이상하게도 손님이 우리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커플이 아니라고 그렇게 몇 번이나 강하게 부정했는데도, 커플 서비스라며 사장님이 감자튀김을 서비스로 주었다. 때는 2019년인데, 가게 안에는 옛날 가요만 주야장천 틀어댔다. 영현이 술이 약한 편이 아닌 걸 아는데, 오늘따라 소주 2병부터 취하기 시작했다. 그냥 오늘 내가 어딘가에 홀린 것같이. 다 이상해.





"하루야."

"......."

"너는 왜 항상 인상을 이렇게 찡그리고 있어ㅡ?"




영현은 두 검지로 가뜩이나 날카롭게 위로 뻗은 자신의 눈매를 더더욱 위로 밀어냈다. 그러다 킬킬거리며, 고개를 테이블 쪽으로 떨구었다. 발음이나, 흐느적거리는 폼을 봐선 벌써 간 것 같다. 저 사람을 어떻게 짊어지고 집까지 데려가냐. 나는 벌써부터 심란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만 마셔요. 진짜 두고 가기 전에."

"안돼, 두고 가지 마."

"..........."



두고 간다는 말에, 영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약간은 뭉개진 발음으로 두고 가지말라며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는, 이상하게도 물기가 어려있었다.




"하루야."

"......."

"김하루, 하루야."

"왜요."

"네가 날 좀 도와줘."

".....뭐를요."

"나도 너처럼 살고싶어."

"나처럼?"

"응, 너처럼."

"......."

"나도 이렇게 살기 싫어. 귀찮아. 피곤해."



ㅡ근데요 선배

ㅡ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요?



"......."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근데 어쩌냐, 이게 내 생존법인 걸. 난 이거 말고는 살아가는 방법을 몰라 하루야."

"......."

"남들이 좋아하는 틀에 맞춰야,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잖아. 그제야 내 말을 들어주잖아."

"선배, 아까는 제가ㅡ"

"도와줘."

"......."

"도와줘, 하루야."

"........'

"나를 좀, 살려줘."



이제는 눈가 가득 어린 물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번에도, 이번에도. 나는 상대방의 감정에 있어 가장 밑바닥을 보고야 말았다. 그 아이와 마찬가지로, 영현도 탈출구가 절실하게 필요해하고 있었다.


이제는 테이블에 엎어져있는 영현의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게에서 틀고 있는 옛날 가요는 이제 클라이맥스를 지나, 곡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내 앞에 마시다 만 맥주는 거품이 다 빠진 지 오래였다. 진짜, 오늘 하나같이 다 이상해.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요."





"우리, 사귄다고요."

"나랑 하루 사귀기로 했어"



"니들 진짜 돌랐나. 아님 뭐 사고라도 쳤나."

"찐이야? 진짜? 농담 아니고? 오늘 만우절 아니야, 재미없어."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원필아"




어정쩡한 자세로, 어깨동무를 한 채 나는, 아니 우리는 저 셋에게 충격 고백을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성진은 턱을 괴고있던 팔이 잠시 삐긋했고, 원필은 사레가 들렸으며, 제형은 말없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들을 보고선 순간적으로 현타가 오긴 했지만,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영현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영현은 잡고 있던 어깨를 더 당겨서 제 쪽으로 오게 만들며 저 셋에게 씩 웃어주었다. 그제서야 성진은 나와 영현이 붙어있는 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선 팔짱을 꼈고, 원필은 우리 쪽으로 바짝 다가와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먼저, 어떻게? 제형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줍고선 묵묵히 다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내 예상에 정확히 떨어지는 반응이었다.


나는 남들 몰래 한숨을 한번 짧게 내쉬었다. 그러다, 잡고 있던 내 어깨을 고쳐 잡고 있던 영현과 눈이 마주쳤다. 어디 불편한 거라도 있어? 영현은 고개를 숙여 내게만 들릴 정도로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가까이 맞붙게 된 영현의 얼굴을 내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밀어내고선 고개를 저었다.










ㅡ좋아하거나, 마음에 드는 남자 있어?




취한 사람을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갈 자신이 도저히 없어서, 편의점 앞 테라스에 앉혀 바람을 쐬게 만들었다. 애초에 아예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가 아니어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이 깬 영현이 내게 던진 첫마디가 저거였다. 괜히 핸드폰으로 인터넷 실검이나, 뉴스 같은 것만 보고 있던 나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없어요. 그건 왜요"

"그럼 나랑 당분간만 연애하는 척할래?"





그 말에, 나는 마시고있던 물을 뿜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영현의 얼굴이 아닌 바닥에 뱉어서, 아니 오히려 얼굴에 할 걸 그랬나. 나는 턱에 남아있는 물기를 손등으로 벅벅 닦아냈다. 물을 뿜게 만든 당사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내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뿐이다. 아스팔트에 맺힌 물은, 편의점 조명에 의해 반짝였다. 나를 보고있던 영현의 눈동자도 같이 반짝였다.






"....미쳤어요?"

"도와준다면서"

"도와주는데 연애를 왜 하는데요, 아다리가 안 맞는데."

"원래 안 친했던 사이가 갑자기 살갑게 지내는 게 더 아다리가 안 맞을걸?"

"안 친한 사이가 같이 붙어먹는 게 더더 아다리 안 맞아요."

"글쎄, 적어도 너한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걸."

"아뇨, 적자만 날 것 같은데요."

"공개연애는 나도 생각 없어, 그냥 동아리 멤버들한테만 알리면 돼. 어차피 우리가 당분간의 행동범위는 그것밖에 안될 테니까."

"................"





그와중에, 영현이 손에 쥐고있는 핸드폰에는 또다시 연락에 불이 붙었다. 깜빡깜빡 연락알림이 뜨는 화면이 정신없어서 눈을 꾹 감았다떴다. 아직도 남아있는 술기운이 자꾸만 내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두통이 지끈지끈 일었다. 모든 것이 내 눈앞에서 울렁울렁거렸다. 영현이 잠깐 내 시야에서 두 개로 겹쳐보였다. 나는 두 엄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에요 이건."

"엔간한 족보, 나한테 다 있어."

"과가 다른데 뭔 소용이에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껌이지."

"와 방금 그 말 완전 재수 없었어요"

"그 재수 없는 능력 마음껏 써먹으라고, 적어도 인간관계, 학점 관련에 있어서 골머리 썩이는 일은 없을 거야."

"............"





요즘 들어, 과외 알바를 시작해서 시험공부에 소홀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럴수록 족보의 존재는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 나한테 족보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겠냐면, 전혀. 대학 입학하면서 솔플을 자처하면서 살아왔던 터라 이제 와서 족보 달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랑방귀 뀔 수 없는 타이밍이고, 그럴 성격도 못된다. 그리고 또 최근에 주변에서 대학생활 중 연애가 없으면 섭섭하지,라는 구닥다리 말들과 함께 자꾸만 나에게 누군가를 소개하려고 안달 나있었다. 아니, 너네 지인들의 솔로 탈출을 왜 나를 통해 해결하려는데. 애인 있다고 거짓말을 쳐도, 없는 걸 있는 척하니 금방 들통이 났었다. 그래, 이번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니까 꽤나 속이기 괜찮을지도 모르겠고ㅡ 점점 솔깃해졌다.







"............"

"어떡할래?"






손을 내게 내밀며 싱글싱글 웃는 꼴이 얄밉기 짝이 없지만, 생각할수록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영현의 말이 사실인 게 드러나면서 더더 얄미웠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딱히 가릴 게 없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내 안에 계속 품고 있었던 자책감ㅡ 내가, 그 아이를 내버려 두고 선 도망 쳐버린, 물론 꼭 내가 그 아이를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영현을 도와주게 되면 조금 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좋아요, 대신."

"대신?"

"그에 따른 비용은 별도로 받을게요"

"밥으로 대신하면 돼?"

"계약 성사"






내민 손을 맞잡으며 대답하자, 영현이 다른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박장대소를 했다. 그래, 그래. 계약 성사. 영현은 맞잡은 손을 어느새 깍지까지 자연스레 꼈다. 밤에 부는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편의점에서 틀고있는 노래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밤하늘만큼이나 까만 눈동자를 갖고있는 영현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지않고 오히려 내게 웃는 영현의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도 목덜미 부근이 간질간질했다. 그 느낌이 낯설고 싫어서 나는 곧바로 손을 빼며 말했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굳이 이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아, 실례했네. 미안"





그나저나 빙글빙글 잘만 웃는 저 낯짝이 익숙해져야만 할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지만, 이미 도장은 찍었다. 무를 수 없는 거, 까짓것 해보지 뭐.
























"거절하는 연습부터 해봐요."

"에이, 그거는 나도 할 수 있지."

"못하는 것 같던데요"

"아니야"

"정말?"






진짜로. 영현은 어깨를 으쓱이다 기지개를 폈다. 일단은, 우리 시험부터 끝내놓고 생각해볼까. 그렇게 말하는 영현의 눈가 밑에는 다크서클이 퀭하니 자리 잡았다. 나 또한, 다크서클이 자리 잡은지 꽤 오래되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게 영어인지, 아니면 꼬부랑 그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피곤이 완전히 맥스를 찍어버렸다.





"저, 잠깐 담배 좀."





그런 내 말에 영현은 눈이 동그래졌다. 하긴, 그 반응은 지겨울 정도로 내겐 익숙했다. 너 담배 피워?라는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나는 미리 차단을 했다. 왜요, 피면 안 돼요? 가시 돋친 내 말에 영현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며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같이 따라가도 돼?"

"선배도 펴요?"

"아니, 그냥 구경."

"........"




가끔은, 저 사람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행동 범위를 넘어서서 당황스러웠다. 나와 가짜 연애를 하자는 것도, 그리고 지금 내게 보이는 저 반응도.



"좋을 대로 하세요."



간접흡연이 그리도 좋으시면요.라는 말을 덧붙이려다 꾹 참고선, 담뱃갑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신기하다."



정말 영현은,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기만 했다. 그리곤, 내가 다섯 번째로 연기를 내뱉었을 때, 영현은 저렇게 말했다. 악의 없는 정말 순수한 감탄사로. 나는 바람 때문에 연기가 영현 쪽으로 오지 않게 등을 지고선, 대답했다.




"뭐가요."

"담배 피우면 기분이 좀 좋아져?"

"....그건 담배가 아니라 마약이죠"

"그런가?"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는 낯짝을 보고만 있자니, 아무래도 지금 피고 있는 담배는 포기해야 될 것 같았다. 나는, 몇 모금밖에 빨지 못한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껐다. 영현은 대뜸 내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난 무슨 뜻이냐는 말 대신, 왼쪽 눈을 찡그렸다.





"나도 한 개비만 줄래?"

"비흡연자라면서요."

"응, 지금은 안 피고. 혹시 나중에 피고 싶을 때가 있으면 그때 한번 펴보려고."

".........."





난 담뱃갑에 달랑 하나 남은 담배 한 개비를 그에게 주었다. 고마워.라고 대답한 영현은, 주머니에 넣지않고선 나에게서 받은 새하얀 담배 개비를 가지고 손장난하듯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대뜸 이런 말을 내게 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네?"

"그냥, 그렇다고. 알아두면 네 마음 더 편할까 싶어서."

".........."





순간적으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건지, 당혹스러웠다. 그니까, 영현의 말뜻을 해석해보자면, 내가 너에게 이성적 관심은 쥐뿔도 없으니, 착각하지 말라. 그 뜻인 건가? 선이 여기 분명하게 그어져있으니, 넘어오지 말라. 이 뜻인 것같다. 그렇다 해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게 가짜 연애를 하자고 제안을 할 수 있는 건가?





"나중에 그 사람이 이것 때문에 오해하면 어쩌려고요"

"괜찮아, 그럴 일 없으니까."

"뭘 믿고 그리 확신해요"

"걔는 여기에 안 살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영현은 손바닥에 담배 개비를 굴리고 있었다. 아, 한국말고 다른 곳에.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영현이 중고등학교 생활을 미국에서 보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비상용으로 하나 갖고 다니는 초록색 라이터를 그에게 주며 말했다.






"그 여자분에게서 애인이 생기면, 그때 제가 준 담배를 피우겠네요."

"생각보다 눈치가 많이 빠르네?"

"네, 뭐."

"너는,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요?"

"응."

"없어요."

"아니면, 누굴 짝사랑했던 적이라도?"

"꼭 내가 누굴 좋아해 본 적 없었던 사람처럼 구네요."

"기분 나빴으면 미안, 악의는 없었어."

"있었겠죠, 근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짝사랑. 누군갈 좋아해서 가슴이 뛰어본 적이 내겐 오래된 일이긴 했다. 물론, 대학 와서 연애를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정말 내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가슴 설레서 연애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보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느끼게 한 사람은?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의 그 아이, 윤도운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말 그대로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고의로, 그리고 자의로 그의 이름과 얼굴을 지워버렸으니, 그를 좋아했던 감정의 기억마저 희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의 생각에 담배가 다시 당겼다. 나는 남은 한 개비를 영현에게 준 것을 순간 후회하며 입맛을 다시다 영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거 다시 저한테 주면 안 돼요?"

"응, 싫어."

"진짜로 거절 잘하시네요."




그 말에 영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거봐, 내가 거절은 잘 한다고 했잖아.





"누가 준 건데, 당연히 안 주지."

"이상한 거에 왜 의미 부여해요."

"이상한 거 아닌데."

"..........."

"들어가자, 춥다."





도대체가, 영현과 대화를 하면 할 수록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짜, 이상해. 이상한 사람맞아.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바닥까지 긁어온 체력을 다 쓴 탓에, 시험을 다 보고 나니 머리가 핑핑 현기증이 일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강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쏜살같이 빠져나갔지만, 나는 그럴 기운조차 없어 책상에 그대로 엎드렸다. 그러고 보니, 내일 은 그렇게도 친구가 난리 친 동창회 날인데 그냥 가지 말까. 바닥난 체력 때문에 모든 약속들이 귀찮았다.




"수고했어."

"아, 감사합니다."




언제 왔는지, 이온음료 캔을 내 볼에 갖다 댄 영현이 내 앞에 서있었다. 근데 제가 여기서 시험 보는 건 어떻게 알고. 아까 복도에서 원필이 만났는데 알려주더라. 아.





"밤새웠나 보네."

"네, 집 가면 바로 자려고요."

"푹 쉬어. 그래야 나중에 나한테 과외하러도 오니까."

"비유 한번 죽이네요."

"근데 과외 말이야, 좀 빨리 서둘러야 될 것 같아."

"왜요, 그럴만한 일이 있어요?"

"응, 걔가 오기전에는 내가 좀 바뀌어있어야 되니까."

"걔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말이야."

".........."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한국에 한번 온다고 해서."

"가짜 연애기간이 생각보다 많이 짧네요?"

"왜, 아쉬워?"

"아뇨. 근데 동아리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해서요."

"그럼 그 사람들 앞에서만 좀만 더 오래 그렇게 연인인 척 행세하면 되니까."

"완벽하네요."





아직도 영현의 가방에서 달랑거리는 여우 인형 키링을 보며 대답했다. 난 이제 그 아이에 대한 자책감을 영현을 통해 대신 덜어내게 되는 거고, 저 사람은 저 사람 나름대로 바꾸고 싶은 성격을 바꿔놓는 거니까. 계산은 완벽하다. 물론, 그것이 둘 다 완벽하게 수행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완벽해야만 했다.

그리고, 완벽할 거야.





나는 내 스스로 최면처럼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도운은 왜 안 나와?"





그 말에 나는 젓가락으로 집고 있던 양념치킨을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아무도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괜히 스스로 멋쩍어진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윤도운, 걔 차가 막혀서 좀 늦는다는데ㅡ 각자 안부를 묻느라 정신없어 전체적으로 각자 자기 할 말만 하느라 웅성거리는 분위기들. 500CC로 주문해서 지금은 바닥에 조금 남아있는 맥주를 입에 쭉 털어놓고선 겉옷을 챙겼다. 그러자 내 옆에 앉아있던 친구 한 명이 나를 불렀다.





"하루 너 어디 가?"

"어, 나 잠깐 전화 좀."




물론 이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밖에 나오니 찬 바람이 매섭게도 나를 반겼다. 밖에 배치되어잇는 대리석으로 된 네모나게 긴 의자에 앉자, 찬 기운이 엉덩이부터 허리까지 찌르르 올라왔다. 숨을 들 이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도 따라나왔다. 나는 버릇처럼 입김을 담배연기처럼 불어보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근데 약간은 어색한 느낌. 머릿속에서 부팅하느라 행동에 잠시 버퍼링이 생겼다.




"........."

"........."




흰 피부에 검은 머리칼, 아니 지금은 붉은 갈색 계열로 염색한, 회색 후드티에 검정 코트를 입은 윤도운이 내 눈앞에 가득 밀려왔다. 어, 그니까. 인사를. 나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 건지조차 망설여졌다. 하지만, 다행히 도운이 먼저 내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간만이네."

"....어. 오랜만."






내 옆에 앉으려는 몸짓을 보이자, 나는 살짝 옆으로 비켜 앉을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땐 늘 수영장에서 연습하느라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서 잘 나질 않는 소독약 냄새가 났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서 흔하게 났던 향수 냄새가 도운에게서 나니까 많이 어색했다.




".........."

".........."





같이 나란히 앉아있으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상황이 숨 막혀서, 너 안 들어가? 애들이 기다리던데.라고 먼저 운을 떼려는 순간, 도운은 대뜸 왼쪽 주먹을 허공에 뻗었다. 돌발스러운 그 행동에 이해가 가질 않아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손을 펼친 도운의 손에는 내 눈에 익숙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거 기억나?"

"어, 뭐야"




강아지 인형이 달린 2G폰 전용 핸드폰 고리였다.




"..........."

"왜 아직도 갖고 있냐고 할 거지 너."



정확히 집었다. 저거, 윤도운 말대로 왜 아직도 갖고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2G폰 핸드폰 고리라서 가 아니라, 저거 내가 선물해 준거니까.



그때, 스마트폰이 막 나온 시기도 아니었다. 근데 저걸 왜 선물했냐 하면. 그냥 윤도운과 닮았는데 그게 하필 핸드폰 고리였을 뿐이다. 도운이의 검지에 고리가 걸려 달랑달랑 흔들리는 강아지 인형. 순간 떠오르는 그 여우 인형 키링. 아, 그래서 내가. 그 키링을 볼 때마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제야 지금, 원인을 찾게 되었다.




























ㅡ졸업 전까지 마니또를 진행할 거야





우리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무슨 마니또 나며 볼멘소리로 야유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담임선생님은 꿋꿋하게 진행하셨다. 내가 교탁 위에 남아있는 마지막 쪽지를 펴보았을 때, 윤도운이라는 세 글자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뒤를 돌아 윤도운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도운은 애들에게 빌린 패딩들로 이불과 베개 삼아 자고 있었다. 하필 걸려도 참. 반 애들이 몇 명인데.





처음엔 윤도운이 교실에 오기 전에 식상하지만 그래도 바나나우유 하나라도 책상 위에 몰래 올려줄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굳이 내가 마니또로 안 해도 다른 애들이 올려놓으니 그거는 패스.



그렇다고 내가 윤도운이랑 평소에 말을 하는 사이도 아니니 이건 뭐, 내가 어떤 행동을 윤도운에게 해도 나 마니또에요 라고 티가 안날 수 없었다. 그만큼 나와 윤도운은 접점이 아예 없었다.



마니또 진행 기간 동안, 그래도 네가 너 마니또로 되긴 했으니까.라며 얼떨결에 받은 초콜릿을 손에 들고선 시내를 걷고 있었다. 나한테 초콜릿 준 그 마니또처럼 나도 뭐라도 윤도운에게 하나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떤 것이 나의 시선을 확 바로잡았다. 강아지 인형이 달린 핸드폰 고리였다.





닮았다, 완전히 똑 닮았어. 윤도운이랑




홀린 듯 강아지 인형 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오도카니 서있었다. 마침, 가게를 닫으려고 준비 중인 아주머니와 마주치게 되었다. 학생, 그거 사려고?




"요즘 스마트폰으로 다 바꿔버려서 이제 저거 소용이 없어졌어. 남은 재고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원."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곧바로 망설임 없이 강아지 모양의 핸드폰 고리를 구매하였다.




수요가 바뀜에 따라, 한때는 없어서 못 팔던 것들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는다는 것.

나는 그대로인데, 주변의 반응이 변한다는 것



글쎄, 그 나이 때는 그렇게까지 딥하게는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주머니의 말을 더 듣고선 그 핸드폰 고리에 대한 묘한 끌림을 그때의 어린 내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했을 뿐, 나름 저런 이유도 없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졸업식이 다가오는데도 나는 끝까지 윤도운에게 핸드폰 고리를 전달해주지 못했다.





















졸업식 날은 눈이 내렸다.





각자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 바빴고, 어떤 아이들은 졸업에 대한 싱숭생숭한 감정 때문에 누군가를 끌어안고 울기도 했으며, 또 누군가는 이제 곧 대학생이 된다는 설렘 감어 가득 차 있기도 했으랴.




만인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도운은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점심 먹으러 안 가냐고 재촉하는 혈육에게 잠시만 차에서 기다리라고 먼저 보낸 뒤, 한참 동안 그 인파가 사라질 때까지 뒤에서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인파가 다 빠지고 나서 홀로 남게 된 도운은 허공에 한숨을 한번 쉬었다. 하얀 입김과 함께 흰 눈송이가 소복소복 내렸다.








"윤도운"

"........."

"........."





코까지 거의 덮을 정도로 검은 목도리를 칭칭 매고선, 크고 화려한 꽃다발을 들고 있던, 앞머리가 제법 길어 눈을 찌를듯한 검은 머리칼 때문에 도운의 표정이 잘 보이질 않았다. 나는 내가 매고 있던 빨간 목도리를 턱 부근 아래로 끌어내고선 교복 치마 주머니에 넣어놨던 그 핸드폰 고리를 꺼내어, 도운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게 뭐야?"

"마니또 선물. 늦어서 미안"

".........."

".........."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핸드폰 고리 인형만 빤히 쳐다보는 윤도운의 행동에, 나는 처음에 윤도운이 화난 줄 알았다. 그런 줄 알았는데. 도운은 손에 쥐고있던 핸드폰고리를 손바닥을 한번 폈다가 다시 쥐면서,오히려 내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다행이다."

"뭐가?"

"난 네가 나 싫어해서 안주는 줄 알았어."

".........."

"고마워."





도운이 매고 있는 검은 목도리에 듬성듬성 묻어있는 흰 눈송이를 바라보다, 다시 도운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보니 내 입술에서 절로 뱉어져 나오는 말 한마디.





"미안해."

"응?"





너 나한테 잘못한 거 있었어? 도운은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감추려 내게 애써 웃음소리와 함께 섞여보냈다. 흰 입김이 검은 목도리 사이를 비집고 나와 허공이 떠돌아다녔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내가 겁이 많아서, 미안."

"........"

"........"





그런 내 말에 도운은 말없이 그저 동상처럼 아무 움직임 없이 서있기만 했다. 말 뜻을 이해한 건지, 아닌지 전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도운을 부르는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졸업 축하해. 그리고선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당연히 그 후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 그때 그랬지. 그러고 보니 오늘 날씨도 잘하면 눈이 온다고 했던 것만 같다. 옛 추억의 회한에 젖어 윤도운이 내게 건네준 강아지 인형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웃기게도 인형은 때가 탄 곳없이, 새 것처럼 아주 깨끗해보였다. 그 때, 대뜸 도운이 내게 말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

"누군가 알아준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았어"

"........."




어느새 내 시선은 도운이의 붉은 머리칼에 고정이 되어버렸다. 그다음엔 앳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성숙해진 도운의 이목구비를 눈부터 코, 입, 턱까지 차례차례 옮겨갔다. 그렇게 시선을 옮기는 동안에도 도운은 가만히 내가 강아지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을 보고 있기만 했다. 엇갈리는 시선들을 유지하고만 있는 중에ㅡ






"하루야"

"어."

"나랑 영화 볼래?"

"..........."

"나 너랑 영화 보고 싶어."





날씨는 이미 겨울이 다가왔는데 내게는 갑자기 봄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다행히 오늘 밤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왜 다행이냐고?

만약에 눈이 왔다면, 나는 바로 그에게 널 좋아했었다고 고백했었을 것만 같으니까.




































"동창회 재밌었어?"

"왜 궁금해요 그게."

"그냥 형식상 하는 얘기였는데... 나 방금 상처받았어."





자신의 가슴팍을 양손에 얹고선 장난 식으로 찡그리는 표정에도 나는 웃어주지 못했다. 그러면 토요일 영화 보는 걸로 하는 거다?라고 말했던 도운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내 귓가에 생생히 맴도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영현이 밥 대신, 내가 영어 과외수업할 자료를 봐주는 걸로 대신해주었다. 빨간펜으로 문법적 표현이 틀린 것들을 고치고 있던 영현을 보고 있자, 이번에는 영현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ㅡ누군가를 좋아했던 경험이라도 있었어?

ㅡ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





If i were to love you, what would you do?



지금 상황에서, 하필 영어 구문도 이런 것만 보인다니. 나는 채점하고 있던 것을 멈추고선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괜히 핸드폰 화면을 켜보았다. 12월 17일. 영현이 말한 크리스마스가 곧 일주일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이번 주 주말에 도운이를 만나기로 했고, 그렇다면.





"일어나요."

"응?"

"수업해야죠."


















평일날. 애매한 시간대라서 그런지, 꽤나 한적했다. 영화티켓을 구매하는 동안, 팝콘 라지 사이즈를 산 영현이 나를 보고 씩 웃어주었다. 오늘 수업은 뭐길래?





"이제부터 제가 진상 짓을 좀 할 거예요. 그거, 받아주지 않는 연습하기."

"어떻게 진상 짓을 하게?"

"지금부터 보면 알아요."






나는 비어있는 영현의 오른손을 잡았다. 놀란 눈으로 보는 영현에게 어깨를 한번 가볍게 으쓱이고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영현의 높게 뻗은 코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오늘은 드롭피어싱을 아닌 검은색의 스터디 귀걸이였다.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 말이에요"

"응?"

"한국이 아니고 다른 곳이라면 미국에 있을 때에요?"

"정확힌 고등학교 때지?"

"꽤 오래 좋아했네요."

"글쎄. 순수하게 날짜로만 따지면 생각보다 그리 얼마 안 돼. 걔도 나도, 각자 애인이 생겼을 때가 있으니까."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그만한 감정의 이상을 느껴보지 못해서 돌아오는 거지"

"첫사랑을 아직도 못 잊은 거네."

"첫사랑까지야."

"지금보다 그때가 더 심했어요, 아니면 지금이 더?"

"뭐를 더 심해졌어?"

"성격이요, 성격."

"현재가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안 고치고 오히려 왜 더 그렇게 된 건데요"

"그때의 내가 살 길이 그것밖에 없었어"

"..........."

"..........."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우리는 말없이 손을 잡은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티켓에 쓰인 영화관을 가기 위해서 3층을 눌렀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잠시 잡고 있던 영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군데군데 굳은 살이 박혀있어, 전체적으로 손이 단단했다. 영현은 살짝 움찔거리다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왜, 할 말 있어?





"최종 목표는 성격을 개조해서 그 사람과 잘되고 싶다. 이거네요"

"굳이 결론을 내리면, 응."

"나도."

"어?"

"나도 같아요 목표는."

"나 지금 이해를 못 했어. 너도 성격을 고치고 싶다고?"

"네."

"갑자기 왜? 너라면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선배처럼은 아니지만, 비슷하게라도 한번쯤은 살아볼까 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구나."

"세상 모든 사람이 선배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성격을 바꾸고, 다 그렇진 않아요."

"넌 아니야?"

"난 맞아요. 근데 좋아하진 않아요"




뭐야 그게. 수수께기도 아니고. 영현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선 잡았던 손을 빼고 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렸다.


원인을 따지자면, 윤도운이 주 원인인게 맞기는 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였다. 그냥 언젠가 한번쯤은 궁금하긴 했었다. 만약에 내가 어릴 때 내 가치관을 잡는데에 갈팡길팡하고있을 바로 그 때, 내게서 도운이의 그런 장면을 보지않았더라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무던하게 묻어가며 살아갈 수 있는 성격이 되었을지. 그리고, 그 성격이 오히려 내게 맞는 건지. 윤도운과 대화를 하면서 내 스스로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한번 바꿔보기로 했었다. 다행히 내 바로 눈 앞에 좋은 예시가 있으니, 영현의 성격을 그대로 한번 따라해보면 되는거다.


영현이 곧바로 내 앞쪽으로 걸어오더니, 내 어깨를 살포시 잡고는 내 쪽으로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서늘한 눈매 안에 들어있는 까만 눈동자에 내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럼 우리 쌤쌤이네. 각자 서로의 성격을 따라 하면 되는 거고."

"그런 셈이죠."

"..........."

"..........."

"그래."



내 어깨에서 빠져나오는 영현의 손을 나는 또다시 덥석 잡았다. 이번엔 깍지까지 끼고선, 남은 한 손으론 영현이 들고 있던 팝콘통에서 두어 개의 팝콘 조각을 꺼내 영현의 입에 넣어주었다. 내가 진상 짓 한다고 했잖아요. 무어라 영현이 말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쳤더니 영현은 눈이 접히게 웃어주었다. 이건 진상 짓이 아닌데?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

"앞으로 기대할게?"





서로의 얼굴 간격이 종이 한 장만큼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영현은 얼굴을 맞붙여오다가 다시 뒤로 물러갔다. 능구렁이같이 웃는 영현의 저 특유의 표정에 나는 괜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일단 오늘은 이쯤 해서 그만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내가 영현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윤도운과 약속한 날이 되었다.



검은 목폴라를 입은 윤도운이 나를 발견하고선 반갑게 인사했다.

우리가 보게 될 영화 장르는 평범한 하이틴 영화였다. 첫사랑에 관한 줄거리였고, 스크린에 나온 배우들은 자신의 나이대보다 훨씬 어린 학생 역할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이 없었다. 우리가 지금 머물러있는 계절은 겨울이었지만, 스크린 안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쨍한 햇빛 아래,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 흰 줄의 이어폰을 나눠끼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남녀 커플. 풋풋하고 예뻐보였다.



내가 만약 윤도운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로 계속 좋아하는 감정을 품게 되었다면, 그러다 운 좋게도 윤도운과 잘 되어서 저렇게 사귀게 되었다면?



나는 내 옆에 앉아있는 윤도운을 힐끗 바라보았다. 영화 스크린 불빛에 은은하게 보이는 윤도운은 턱을 괸 채로 한껏 집중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웃는 얼굴은 똑같네.



그때, 갑자기 윤도운의 얼굴에 강영현의 얼굴과 겹쳐보였다. 그러고보니, 강영현과 영화를 볼 때도 이렇게 눈이 마주쳤던 것같은데.




ㅡ설레서 영화에 집중 못하겠어?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입모양을 크게 벙긋거리는 강영현의 모습에 나는 들고있던 팝콘통에 팔을 집어넣어 손 안에 가득 팝콘을 채워 그대로 강영현의 입에 친절히 넣어주었다. 강영현은 살짝 놀랬는지 눈이 커졌다가 다시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어주었다. 그 모습에, 결국 나도 같이 웃어주며 강영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엔 강영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가 손을 고쳐잡았다. 그래, 그렇게 손 잡은 채로 영화를 계속 봤었다. 손을 잡은 이유는 글쎄, 내가 안하던 짓을 한다고 했던 행동이었으니까 별 의미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 스스로 결론지었었다.


근데 여기서 내가 왜 강영현 생각을 하는 걸까.


최근 영화를 보러 간 게 그때 강영현과 갔던 것밖에 없으니까 그렇겠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 순간 어이가 없기도 했다. 전에는 이성적 호감도 없었던 선배였는데, 고작 영화 한번같이 봤다고 신경 쓰이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금사빠 기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나한테 먼저 플러팅을 걸지도 않았잖아. 솔직히 말하면 플러팅 같은 걸 먼저 한 거는 내 쪽이지. 물론 그 행동들은 내 성격을 고치려고 시도했던 것들이지만은, 하여튼. 응.



ㅡ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ㅡ네?

ㅡ그냥, 그렇다고. 알아두면 네 마음 더 편할까 싶어서.

ㅡ..........



어차피 강영현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잖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감정을 가졌던 사람은 강영현이 아니라 윤도운 이였잖아. 감정이 흐르는 순서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시원한 탄산 음료로 이런 감정들을 잠재우려했지만, 탄산때문에 부글거리는 속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영화 재밌었어?"

"........"

"하루야."

"아, 어어. 재밌더라."

"......."




성의 없는 내 대답에 윤도운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약간은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데이트 신청과 다름없는 것을 수락해서 만난 건데, 반응이 이렇게 미적지근 할 리가 없으니까.


영화가 끝난 후 검은화면과 함께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난 어떤 감정을 느꼈던걸까.

자꾸만 나를 힘없게 다운시키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싶었지만, 내 스스로도 결론지을 수 없어 더욱 답답했다.




"도운아."

"응?"




사실, 나는 성질이 매우 급한 사람이다.

그리고 복잡 미묘한 감정은 딱 질색이거든.

어떻게든 결론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너, 나한테 호감 있어?"

"........"

"........"

"없으면 영화를 왜 보자고 했겠어 내가."

"사실은 있잖아, 도운아."

"........"

"나 고등학교 때 너 좋아했었어."



나도 모르게 되지도 않는 무리수를 던졌던 것같다. 툭 하는 힘없는 소리와 함께 빈 팝콘 통이 구멍 안에 떨어졌다.


팝콘은 캬레멜 맛이었다.
























오늘도 다른 날들과 다름없이, 강영현을 만나러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늘 강영현과 앉았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데, 종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하늘색 포스트잇에 단정하고 깔끔하게 쓰인 글씨체. 누가 봐도 강영현이 썼다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수업 못 받을 것 같아 미안.』





서로 번호도 알면서 굳이 포스트잇에 써놓은 이유가 뭘까.

덕분에 헛걸음만 한 셈이었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어차피 학원에서 내준 토익 숙제도 마저 해야 하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책을 펼치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김원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밖에서 전화를 받으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창밖에서 보이는 풍경에 내 눈을 의심했다.







".........?"




저거 강영현 아니야?



뭐야, 근처에 있으면서 왜 저런걸 남긴건데.

나도 모르게 강영현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 이유는 굳이 왜 포스트잇으로 남겼냐고 강영현에게 직접 묻고싶어서 그런거라고, 변명할 상대방도 없으면서 그렇게 나혼자 합리화를 하며 가는 그때. 누군가와 부딪쳐, 들고 있던 커피를 다 쏟고 말았다. 얼음까지 모조리 다. 내 흰색 티셔츠에는 커피향이 솔솔 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와 부딪친 주인공은 박제형이었다.

박제형 역시 자신의 체크 셔츠에 묻은 커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같은 딱 그 느낌. 박제형이 왜 여기 있어. 그걸 물어보기 전에, 내가 잘못한건 맞으니까. 사과로 먼저 말을 시작했다.





"죄송해요 선배."

"됐어, 어차피 세탁할 거라서. 너야말로 괜찮아?"

"네? 네."

"지금 너 영혼이 딴 데 간 것 같아.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선배도 여기 근처 살아요? 자주 와요?"

"엉, 나 요 앞에 자취하는데. 자격증 때문에"

"............"

"왜?"



아 이거 좆됐다.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나랑 강영현같이 있는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의심을 갖겠지.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 같지 않아 보였을 테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멘붕에 빠져있는 동안에 대뜸 자신이 입던 체크 셔츠를 벗더니 내게 입히는 박제형이다. 이거는 왜요, 세탁해서 달라고요? 그러자 박제형이 셔츠의 맨 윗단추를 손수 채워주며 말했다.




"다 보여."

".....아"

"어디 급히 가는 것 같던데 마저 가. 세탁해서 돌려주면 더 좋고. 나 간다."

"........."







흰 티셔츠라 그런지, 커피때문에 속옷이 다 비추고 말았다. 나는 재빨리 단추들을 마저 잠궜다. 박제형은 다음에 셔츠 돌려달라며, 도서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제형은 저런 순간에도 무신경해서 이럴땐 참 편하긴하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다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밖에 나가니, 차가운 바람이 내 폐 안까지 들어가 기침이 절로 나왔다. 젖은 옷 때문에 더 춥게 느껴졌다. 이러다 감기 걸리면 재수없는건데. 날씨는 뭐라도 내릴 듯이 흐렸다. 아, 저기있다 강영현.






"...........?"





혼자있는 줄 알았더니, 강영현 옆에는 어떤 여자가 서있었다.


나는 조용히 팔짱을 끼고선 머리를 전봇대에 기대어 삐딱하게 서서 지켜보았다. 뭐야 꼭 구도가 바람피는 남자친구 보는 느낌이네. 분위기상, 그때 강영현이 자기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여자 같은데. 밝은 갈색의 똑단발이 무척 잘 어울려 보였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니, 웃는 것도 귀엽게 생기기도 했고. 한마디로 완전 나랑 반대인 스타일이네. 아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패딩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 하나를 꺼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저 풍경들을 안주삼아 담배를 태우니, 지금 내가 담배연기를 내뱉는건지 삼키는 건지 모르겠다. 강영현은 내가 담배를 피고있는 몇 분동안 앞에 있는 여자와 즐겁게 무어라 대화를 하다, 손을 흔들어 헤어졌다.


저 멀리 담배를 태우고있는 날 발견한 강영현이 놀란 표정으로 잠깐 멈칫하다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서둘러 담배를 지져끄며 손날로 허공을 휘저었다.






"어."

"....."

"....."

"도서관에서 잠깐 쉴려고 나왔는데, 보이길래. 아니, 그 우연히 발견해서"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변명같이 늘어놓는 내 모습에 강영현은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들고 있던 커피를 마셨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까 옆에 있던 여자분. 선배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에요?"

"....응?"

"........"

"아니? 나랑 같은 과 후배인데, 공모전때문에. 걔가 우리가 할 주제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고있길래."

"아.."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였다. 안도감? 내가 도대체 왜?




"어, 눈온다ㅡ"

"......."





어쩐지 하늘이 흐리다했더니, 함박눈이였다. 하얀 눈송이들이 강영현의 붉은 머리 위에 안착했다. 나는 강영현의 눈 대신에, 머리 위에 있는 눈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문자로 하지, 왜 포스트잇으로 써놨어요."

"이것 때문에."




액정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자신의 핸드폰을 내 눈앞에 들이미는 강영현이다. 어제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는데, 아스팔트에 떨궈서 박살이 났거든. 수리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오늘이라도 하려고




"연락은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원필이나 성진한테 네 번호를 물어볼 수가 없잖아. 걔네는 우리 사귀는 줄 아는데 어떻게 여자친구 번호도 못 외웠냐고 의심할 게 뻔하니까."

"그럼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포스트잇을 붙인 거예요?"

"그것밖에 방법이 없잖아."

"........."






그제야 나는 시선을 강영현의 눈 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아 이거 존나 골때린다. 라고.









내가 왜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미래를 생각을 하지않냐면,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내 가치관때문도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사실은 말이지. 감정소비하는게 제일 두려워서였다. 내가 퍼준 감정만큼 돌아오지않아 텅 비어버린 자리가 내겐 너무나도 공허하게 느껴지니까. 그 작은 감정조차 돌아오지않게 된다면 나는 걷잡을 수 없을만큼 너무너무 비참해서. 그래서, 그래서 그랬던 거야.




ㅡ사실은 있잖아, 도운아.

ㅡ........

ㅡ나 고등학교 때 너 좋아했었어.




나는 항상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 내가 우위에 서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든지 이성적으로 행동하고싶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선수를 쳤다. 미안, 내가 인성이 좀 덜 되었어. 이렇게라도 난 내 자신을 방어해야겠거든.




ㅡ지금은?

ㅡ.........

ㅡ.........

ㅡ하루야.

ㅡ응

ㅡ지금 여기서 좀 더 진전을 원한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면, 그 때 돌려줘.





갑작스러운 나의 고백에 윤도운은 잠시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그러다 내 손에 자신이 계속 가지고있었던 응, 그 강아지 모양 인형의 핸드폰 고리를 쥐어주며 이렇게 얘기했지. 자신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고싶다면, 그 때 말없이 이걸 돌려줘도 된다고.




그래서 마치 손지압용으로 갖고다니는 것처럼 계속 내 패딩 주머니에 넣어둔 인형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계속 생각했었다.


내가 너와 어떤 사이로 되던지간에,

어떻게 해야 내가 덜 상처받을지에대해서.




난 그정도로 정말 성격이 못됐다. 그 때 담배를 피면서 강영현과 어떤 여자와 다정하게 얘기를 하는 모습을 바라봤을 때. 강영현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하기전에, 강영현이 좋아하는 그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그 때는 인형이 생각조차 나질 않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게 되어버린 거지.



이거 존나 골때린다. 고 말이야.




그래서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워 계속 생각을 해봤다. 과연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사랑인걸까? 내가 과연 강영현한테 이성적 감정을 느끼고있는 걸까? 그래 백번 양보해서 내가 강영현을 좋아한다고 쳐. 그다음에는? 다음 플랜이 전혀 나오질 않잖아.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할건데. 걘 좋아하는 사람 있다잖아. 그렇다고 내가 짝사랑만 할 위인은 못되잖아. 뭐 차이던지, 아니면 어쩌다 사귄다고 쳐. 그렇게되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난 스트레스를 극도로 받게될 것이다. 왜냐고? 걔의 다정함에 반한 주변사람들이 들끓을테니까. 윤도운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럼 난 그걸 지켜봐야하는거고. 그 때, 내가 스트레스 없이 잘 지낼 수 있느냐? 그것도 아니야.






"그런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 남자를 만나는건 진짜 개쓰레기같잖아."

"너 원래 개쓰레기야. 새삼"

"야ㅡ"

"뭔 상관이야. 어차피 당사자인 너 빼고 그 둘은 아무것도 몰라. 그리고 어찌보면 서로에게 해피엔딩인데 뭘."

"걔는 내가 정말 잘되고싶어서인 줄 알거아니야. 불순한 의도인줄 모르면서."

"반은 맞잖아. 불순한 의도인지 아닌지간에 일단은 본 목적은 맞으니까."

"미친"

"야 솔직히 다 까놓고 모든 커플이 처음에 정말 서로를 좋아해서 사겼을 거라고 생각해? 생각보다 아니야. 얘 꽤 괜찮아보이는데? 뭐 나쁘지않겠네 하고 사귀다가 더 감정이 깊어지는 커플도 꽤 있어"

"........"

"너 의외로 재밌는 점이 뭔지 알아? 니 스스로 존나 쓰레기라 해놓고, 막상 그런 짓을 하지도 못해. 간이 콩알만해서 말이지."

"지랄하지마 좀, 토나오니까. 언제는 내가 꼴리는 대로 살아서 부럽다며?"

"그 떈 정말 그런 줄 알았지. 근데 의외로 멍청이라는 걸 정확히 일주일 뒤에 알았지. 네가 술먹고 우는 걸."

"닌 꼭 남의 흑역사를 들쳐내야 속이 편해?"





ㅡ넌 좋겠다. 꼴리는 대로 막 살아서.



타격이 없었다. 맨정신의 나로선.

근데, 술먹은 나에겐 타격이 엄청났나보다.


그걸 하필 눈치없는 친구 한명이 내 핸드폰에 있는 연락처를 뒤져 전남친 번호로 전화한 탓에 그걸 들켜버리고 말았고, 그건 지금까지 나한테 있어 흑역사리스트중에 하나였다. 헤어진 당일날 바로 ♥남자친구♥ 라고 저장된 이름을 바꾸지 못한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짜증스러운 마음에 난 먹고있던 뻥튀기 과자를 한 때 사겼었던 전남자친구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그리곤, 술이 반 쯤 남은 소주잔을 내 입에 털어놓자 전 남친은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서고선 말했다.





"그리고 이젠 따로 만나자고 더이상 연락하지마라ㅡ 곧 만날 사람이 있거든."

"다음 여자도 나처럼 존나 보살인가보네"

"그럴지도?"

"오래가고, 너랑 나랑 했던 것처럼 맨날 싸우지 좀 말고."

"싸운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화낸거지 내가."

"잘 아네."

"내가 왜 화냈는지는 알고?"

"........."

"모르나보네."

"뭔데"

"네 자신한테 솔직하지 못한게 화난거야 난."

".........."

"그럴 성격도, 깡도 못되면서 사람들을 자꾸 밀어내지말라고"

"니 진짜 재수없는거 알지."

"하여간 잘 지내라. 다음 연애는 한번 찌질하게 굴어봐. 우리 나이대 아니면 언제 그렇게 해보겠어 연애를."

"....알았으니까 빨랑 꺼져"

"그래 미리 메리크리스마스"

"응, 너도"





내일이면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이틀뒤면 크리스마스.

그 날 강영현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겠지. 그리고 또, 내가 그 전까지는 윤도운한테 어떻게든 답을 줘야한다. 물론 언제까지 꼭 얘기해달라 한 건 아니였지만, 거의 무언의 약속같은거니까. 근데 너무 웃기잖아. 평소같았으면 이런거에 별로 흔들리지도 않았을텐데. 왜 이제와서 지금상황에 풍선인형처럼 이리저리 감정이 흔들리는건지. 내가 많이 외로워서인가? 아니면ㅡ




ㅡ난 남들에게 미움받는 게 무서워.

ㅡ그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내가 자만했었나 봐.

ㅡ사실 나도 너 싫어해. 어느 누가 나를 싫어하는데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겠어. 말이 안 되지. 그리고 특히나, 네가 내 약점을 보란 듯이 꿰뚫고 있는데. 죽기보다도 들키기 싫은 그 약점을 네가.

ㅡ남들이 좋아하는 틀에 맞춰야,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잖아. 그제야 내 말을 들어주잖아.

ㅡ도와줘.

ㅡ도와줘, 하루야.

ㅡ나를 좀, 살려줘.



강영현이 했던 얘기들 중 무언가가 내 차갑고 무딘 감정중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들었나보다.

그래, 그렇다면 이건 동정심인걸까. 호감인걸까. 아님, 윤도운과 비슷하게 보이기때문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던걸까. 그 감정이 어느 쪽이든 뭐든지 내가 강영현을 생각할 때 계속해서 그어놨던 선을 훌쩍 넘어버리는 건 똑같다. 일단은 이렇게 따로 강영현 생각을 하고 있다는거니까. 일단 여기서 멈춰야돼. 멈추지않으면 더 복잡해져버린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삼각관계가 될 수 있으니까.




ㅡ여보세요.

"도운아, 지금 볼 수있어?"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이 선택이 맞길 바라.



















"왔어?"

"...누가 왔다 갔나 보네."

"아 그거, 신경 안 써도 돼. 소주 한 병 시킨다?"

".........."




검은색 볼캡을 푹 눌러쓴 윤도운이 숨을 헐떡거리며 내게로 왔다. 여기까지 달려왔나 보네, 추운데. 나는 우선 물컵을 건네주며, 메뉴판도 같이 건네주었다. 하나 더 시켜, 같이 먹자.



『공모전 슬슬 마무리해야지?』오후 10시 34분



강영현에게 온 연락에, 나는 답장 대신 핸드폰을 끄는 것으로 대신했다. 윤도운은 그런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다 나를 따라 자신의 핸드폰도 전원을 껐다. 그 모습에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너는 왜 꺼. 네가 껐으니까.




"지금 이 시간에 불렀다는 건 내가 오해해도 되는 거지?"

"아직 긍정의 대답이라는 건 얘기 꺼내지도 않았는데?"

"야, 그건 진짜 너무하다. 거절을 늦은 시간에 이렇게 따로 불러서 하는 거면 희망고문이다 못해 잔혹한 건데."

"손 내밀어봐."





내 말에 아무 망설임도 없이 내게 큼지막한 손바닥을 내미는 윤도운이다. 나는 윤도운의 손바닥을 뚫어져라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야, 손금이라도 봐주는 거야?




"아니."

".........."

"이렇게 손잡으려고"

"와, 너 진짜."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우리."




손을 잡지도, 안 잡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린 윤도운이 잠시 몇 초 동안 멍청한 표정을 내게 지어주다, 이내 손깍지를 끼며 내 손을 자신의 차가운 볼로 갖다 대었다. 그리곤 입술을 내 손등에 갖다 댄 채로 말하는 탓에 퍼석한 입술의 촉감이 손등으로 생경하게 느껴졌다. 있잖아, 하루야.




"나도 너 고등학교 때 좋아했어."

"........"

"아니 지금까지도 널 좋아해."





차가웠던 윤도운의 볼이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아직 술도 한 모금 하지도 않았던 윤도운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곤 내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거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인데. 사람들에게 늘 지어줬던 그런 예의 차린 미소가 아니라 진짜 이거는. 이거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감정의 깊이가. 순간, 이거 완전히 잘못 계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네가 나 불장난하는 거 몰래 훔쳐봤을 때부터."

"너도 나 봤구나."

"응."

"........"

"처음엔 그저 들켰다는 생각에 신경 쓰였는데, 나중엔 그게 다른 감정으로 바뀌더라."




신경 쓰였는데, 다른 감정으로 바뀐다더라.

이거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랑 너무 비슷한데.




"지금 너랑 내 감정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는 거 잘 알아."

"........"

"그렇다고 그게 우리의 관계가 시작하지 않을 이유가 되질 않아."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사양할래, 아 그래서 인형은?"

"아 그거 지금 없는데. 충동적으로 부른 거라."

"그래, 그럼. 그러면 그건 진짜 나 좋아하게 됐을 때 돌려줘."



손등에 쪽 소리 날 만큼 입맞춤을 하고선, 깍지 낀 손을 푸는 윤도운이다. 소맥? 소주만? 응, 나 소맥으로 줘.




"좋아해."

"........."

"너 이런 거에 면역력이 없구나"

"시끄러, 나도 연애해봤거든"

"알았어 사랑해."

"팔 떨어져 빨리 잔 가져가."







....강영현 얘기는 안 꺼내는 게 낫겠지?


어차피 윤도운이랑 다른 학교고, 강영현과는 곧 끝날 관계니까 상관없겠지.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너무 안일한 생각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복잡하게 흘러갈 줄 모르고.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날이 다가왔다.

나와 영현은 크리스마스 당일날을 대비하기 위해 미리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했던 행동이나 말투, 기억하죠?"

"응. 일단은 거절을 잘하라고 했지"

"그다음엔?"

"나에게 오는 부탁을 무조건 다 받아주지 않기. 무례한 행동일 경우 제때 말하기 등등"

"잘 할 수 있을거라 믿을게요."

"고마워, 믿어줘서."

"........."

"나 잘해볼게."



그 말에 괜히 나는 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바람피운 사람처럼 이 자리가 가시방석같이 불편했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쥐며 말했다.



"그리고, 나 할 말 있어요."

"뭔데?"

"나 남자친구 생겼어요."

"........."



영현은 겨울에도 항상 꿋꿋이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다, 잠시 멈칫했다. 계속 말하라는 듯, 대답 대신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에 익숙지 못해 습관처럼 손 밑의 살만 뜯으며 말했다.




"그니까, 크리스마스 이후엔 이렇게 따로 만날 일 없을 거예요. 공모전이 끝나면요"

"............"




아무 말 없는 영현에,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영현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영현의 묘한 표정에 나는 또다시 긴장을 하고 말았다. 아니, 내가 왜? 영현은 한숨 같은 것을 내뱉더니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머그잔과 테이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내게는 날카롭게만 들렸다.




"그래 알았어."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대답하는 영현의 모습에 살짝 기운이 빠졌다.

너무나 순순히 알겠다고 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일까?

웃기잖아, 내가 뭐라고 긴장하고 서운해하는 건지.

나는 억지로 한껏 광대를 끌어올리며 영현에게 말해주었다.




"잘하고 와요. 둘이 잘 되길 응원할 테니까"

"고마워."





그래, 깔끔하게 잘 끝냈다.


더 이상 구구절절 무언가를 붙일 이유가 없는 거야. 그럴 사이도 아니니까. 그저, 나와 영현은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잠시 가까워졌던 사이였으니까. 나는 영현에게서 인공적이지만,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한 다정함을 배웠고. 영현은 나에게서 호구가 되지 않을 정도의 단호함을 배웠으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도운이의 손을 잡고 크리스마스 날의 거리를 걷는 게 아니겠어?


크리스마스 날의 거리에는 커플들로 가득 차있었고, 어느새 도운과 내 눈앞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가득 찼다. 트리에 달려있는, 별도 하나 없는 서울의 밤 하늘 대신 작은 전구들이 별처럼 반짝일 때. 마음속으로 소원을 하나 빌었다. 어느 쪽이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쪽으로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루야"

"응"



도운은 자신의 두 손으로 내 양 어깨를 감싸쥐었다. 바람때문에 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들을 손으로 다정하게 떼주며 말했다.



"사랑해. 이 말을 예전부터 네 앞에서 해주고 싶었어."

".........."



작은 전구의 불빛을 가득담은 도운의 눈동자는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잔뜩 상기된 볼이 참 보기 좋아보였다. 근데 어리석게도 나는 왜 이 상황에서 바람때문에 흔들리는 네 붉은 갈색빛 머리칼을 보니, 설렘을 느끼기보다는 이런 말들을 떠올리는 걸까.



ㅡ글쎄. 순수하게 날짜로만 따지면 생각보다 그리 얼마 안 돼. 걔도 나도, 각자 애인이 생겼을 때가 있으니까.

ㅡ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ㅡ그만한 감정의 이상을 느껴보지 못해서 돌아오는 거지



하지만, 궁금해졌다. 도운이 너도 이런 감정으로 날 좋아했던 건지 말이야. 네가 갑자기 이렇게 감정이 폭주할 사람이 아닌걸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알고있었는데. 왜 나한테 곧바로 그랬을까 넌. 그래서 정말 어리석은 걸 알면서도 이런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계속해서 날 좋아했던 거야?"

"....무슨 뜻이야?"

"중간에 다른 사람을 사귀었다든지, 그런 거없이 계속 쭉 말이야."

"......"

"......"



예상치못한 내 질문에 곤란한 듯, 내게 멋쩍게 웃는 도운의 얼굴을 보자 나는 말없이 씩 웃어주었다. 그래, 그게 오히려 말이 안되겠다. 난 도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어주는 걸로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은 그 대답이 긍정일지 부정일지에 대해 상관없이 그 뒷감당을 할 자신도 없어서였다. 도운은 꼬집고있던 내 팔을 붙잡고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눈을 스르르 감는 도운에, 나도 따라 눈을 감았다.


"...사랑해"



이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맞대는 도운이의 행동에, 나는 가만히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야, 지금 영현은 그 여자와 데이트를 잘하고 있을까 와 같은 잡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으니까. 난 팔을 도운의 목에 두르며 속도를 맞췄다. 눈을 살짝 떠보니, 흐릿하게 트리 전구들의 노란 불빛들이 잔뜩 번져보였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선 도운의 목을 더욱 끌어안았다.
























"제출은 내가 할게 고생했어."

"아뇨, 선배도 고생했어요."

"......"

"......"




드디어 공모전에 낼 작품을 끝나게 되었다.

정말로 강영현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이 끝나자,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전에도 항상 있었던 상황인데 왜 오늘따라 이 침묵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건지. 이젠 정말 따로 만날 일이 더이상 없어서 그런걸까. 나는 입이 자꾸만 바싹 말랐다. 뭐라도 떠들어야 될 것만 같았다. 무슨 얘기를 꺼낼지 고민하는데, 영현이 먼저 그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데이트는 나름 괜찮았어."

"다행이네요."

"지금 담배 피러갈거야?"

"아, 선배가면 좀이따 가려고요."

"같이 가."

"간접흡연이 뭐 그리 좋은거라고 따라와요"

"나도 필건데."

"....네??"



순간 잘못들었나싶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영현을 바라보았다. 영현은 빙글빙글 웃으며 패딩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은색 케이스를 꺼내 그 안에 들어있는 담배를 꺼냈다. 아니, 그 담배 한개비 보관한다고 케이스에 넣어두기 까지 해요. 마침 다 먹은 껌 케이스가 있길래. 얼른 가자. 영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내 등을 떠밀며 말했다.



"처음 피는 사람치고는 자세가 자연스럽네요."

"겉멋만 든 거야. 지금 눈 빨개진 거 보이지. 이렇게 매운 걸 어떻게 펴?"



정말 처음 피는 사람 치고는 담배를 잡는 자세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누가 봐도 밀려오는 담배연기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이 붉어진 채로 콜록거리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담배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맞기는 한가보다. 그렇게 기침을 하면서도 끝끝내 담배를 놓지 않고 다시 한번 담배를 입에 무는 영현이다. 그 모습이 잘 어울린다 하면, 너무 좀 그런가? 영현은 연거푸 기침을 하면서 연기를 내뱉었다.



"이렇게 담배 피우는 걸 보면. 선배가 좋아하는 그분이 남자친구 있다고 하셨나 봐요?"

".........."



그런 내 말에 영현은 고집대로 계속해서 피던 반쯤 남은 담배를 땅바닥에 버려 검은색 컨버스 신발 뒤축으로 지져끄면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또, 또 나왔다. 그 고요한 눈빛. 영현은 불이 식어버린 담배꽁초를 집어 들고선 그대로 쓰레기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버리며 내게 말했다.



"아니."

".........."

"사귀기로 했어, 그 사람이랑."



ㅡ그 여자분에게서 애인이 생기면, 그때 제가 준 담배를 피우겠네요.

ㅡ생각보다 눈치가 많이 빠르네?



그럼 도대체 왜. 뒤통수에서 쥐가 나듯이 저린 느낌을 받았다. 왜 자꾸만 온몸이 죄이는 느낌을 받는 걸까. 어째서 내 목이 계속해서 갈증을 느끼는 걸까. 영현은 손으로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를 털듯이 정리했다. 찰떡같이 어울리던 붉은 색 머리칼은, 뿌리가 자라 군데군데 검은색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윗 입술을 한번 말아올리다, 끝내 말을 뱉었다.



"......오래가요."

"응, 너도."



그동안 고생했어, 여러모로. 영현은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내게 뒷모습을 보이며 떠났다. 흐린 하늘에는 한겨울에 눈이 아닌 비가 내렸다. 그래서인지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나는 젖어버리고 말았다.





























『옷이 없어서 밖에 못 나가고 있어』오전 11:04

『? 그게 무슨 말이에요』오전 11:47

『내 거 셔츠 달라는 말이야』오전 11:50




"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럼, 도서관 있을 때 말씀하세요 제가 그 때 줄게요. 나 지금 도서관인데. 네, 지금 갈게요 그럼. 도서관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있던 제형에게 나는 셔츠가 안에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봉투도 내가 가져?"

"네, 가져가기 편하게."

"됐어, 나 바로 입을거라서."



정말 입을 옷이 없었던 건지, 옷을 내게서 다시 받자마자 곧바로 입어버리는 제형이다. 제형은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단추를 채우며 대뜸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영현이랑 안 사귀지. 그니까 내 말은, 처음부터 말이야."

"........."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브레이크 없이 말할 줄은 몰랐는데. 난 앞니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입술에 바른 붉은 립스틱의 맛이 씁쓸했다.




"왜 그런 거야?"

"눈치챘네요?"

"처음부터 이상했는데,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보니까 확신이 생겼지"

"차피 공모전만 끝나면 곧 헤어졌다고 말할 거였어요"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이유를 굳이 말해야 돼요?"

"넌 손해 볼 장사할 성격이 아닐 테니까. 궁금해서"

"........."

"걔가 너한테 협박했어?"

"아뇨, 그런 부류는 아니고."

"음"

"........."

"너 영현이 좋아하지."

".....미쳤어요?!?"

"아니면 말고, 왜 이리 발끈해."

"......."

"너도 아닌 척하면서 알고 보면 참 피곤하게 산다."

"선배"

"왜"

"...라이터 있어요?"

"곧 새해 되니까 끊어라."

"와, 진짜 치사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형은 얼마 안남은 초록색 라이터를 내게 던지듯 주었다. 나는 담배를 바로 피우지않고선, 그저 라이터로 불을 켰다 껐다하는 손장난을 반복했다. 정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로의 몸을 기댄 채 앉아있는 커플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흐릿한 불꽃이 켜졌다 꺼졌다를 계속 지켜보며 말했다.




"원래 사람은 이기적인 게 맞죠? 결국은 다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선택을 몰게 되어있잖아요."

".........."

".........."

"지금 네 양심에 찔리는 행동을 하고 있나 봐?"




웃음을 흘려보내며,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뚫어져라 보는 제형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나는 대답했다. 눈을 마주치게 되면, 내 모든 생각을 꿰뚫어볼까 봐 무서웠다.





"....사람과의 관계가 너무 어려워요"

"누구나 다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님."

"선배도 그래요?"

"야, 나도 사람인데."

"의외네요"

"적어도 굶어죽지 않으려면 사회생활은 해야 되니까"

"나는요, 선배."

"엉"

"내가 어른이 되면, 내 감정을 스스로 완벽하게 컨트롤할 줄 알았어요."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딱 이렇게. 나는 곧바로 담배에 불을 붙이곤 다시 제형에게 라이터를 돌려주었다. 제형은 그런 내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음을 짓다가 다시 내게 라이터를 손에 쥐어주었다. 얼마 안남은거라서, 너 가져라. 난 마치 내 마음처럼 이리저리 흘러가는 담배연기를 보며 말했다.



"근데 지금 보니까 영 아니에요. 어찌 보면 내 중고등학교 때보다 더 휘둘려요. 내가 맞는다고 생각했던 틀이 자꾸만 어긋나요. 미칠 것 같다고요"

"그거 혹시 강영현 얘기?"

"...아,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래. 아니라고 치자."

".........."

"...그렇게 다들 기계처럼 어느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결정을 잘했을 거면, 왜 티비에 나오는 그리 흔한 로맨스 드라마가 흥하겠어."

"..........."

"네 감정을 거부할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이걸 어떻게 다룰지를 생각해."

"그냥 다른 감정으로 덮을 순 없는 거예요?"

"크기에 다르지, 그건 네 판단. 난 자격증 시험이 얼마 안남아서, 먼저 가봄."




제형은 또다시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고, 난 제형이 내게 준 초록색 라이터를 가만히 보기만 하다가 어디에 홀린 듯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정말 어떻게든 돌아버릴 것 같아서.





ㅡ여보세요?

"도운아."

ㅡ응, 무슨일이야.





제형은 감정의 크기에 따라 다른 감정으로 그것이 덮여질 수 있냐 없냐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도운이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강영현에 대한 감정이 덮여졌으면 좋겠어. 도운이 너도, 나에 대한 감정이 어느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외로웠는데 타이밍이 좋아 나랑 사귄거라 한더라도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저 난 네 감정이 다른 감정으로 덮여질 수 있을 만큼의 크기였으면 좋겠어. 네가 제발 내가 너를 향한 감정만큼만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도운아 사랑해."

ㅡ.........

"사랑해, 사랑해."




난 끝끝내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결국은 내가 제일 문제였다.





공모전이 끝난 그 이후로 우리는 정말 서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 그게 당연한 거잖아. 왜 센치해지고 난리야. 없어 보이게. 나는 괜히 화풀이하듯 검지로 강아지 인형의 배 부분을 꾹 눌렀다. 사귀기로 했지만은, 아직까지 도운에게 이 인형 고리를 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그걸 돌려주지 않았다는 걸 잊을 리 없는 도운이가 아직까지도 가만히 있는 이유는, 걔도 내 감정이 순수하게 자신을 향하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서겠지. 이건 기다린다는 의미와 같았다. 미안했다.




ㅡ사랑해, 사랑해 도운아.




얼렁뚱땅 한 타이밍에, 그것도 울면서 고백한 말이라니. 최악이었다. 진짜 개진상이 따로 없었다. 근데 도운은 그런 내 진상 짓에도 아무 말 없이 이렇게 말해줬지





ㅡ...... 용기 내줘서 고마워.





라고.


그 행동은 용기가 아닌, 오히려 영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했던 것에 불과한데 너한테는 내가 너에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나. 김하루 너, 진짜 존나 별로야. 나는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켜보았다. 역시나 도운에게서 연락이 와있었다. 보고 싶다.라고. 연인들 사이에 흔히 말하는 말들 중에 하나인데 왜 이렇게 이 말이 내 마음에 깊숙이도 아프게 파고들까. 그래, 원래 연애라는 게 이런 문자도 주고받잖아. 자연스럽게 행동해 제발. 나는 답장을 하기 위해, 잠금을 푸려는데 또다시 도운에게서 문자 하나가 더 왔다.





『우리 다음주 화요일에 바다나 보러갈까』오후 10:56





다음 주 화요일이라면, 12월 31일이라는 건데.

나는 냉장고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맥주캔을 꺼냈다. 무릎에 턱을 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어제 제형을 만났을 때 제형이 내게 했던 말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네 감정을 인정해야지. 그리고선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 이 말들이. 나는 괜히 머리를 털듯이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한 움큼 원 샷 했다. 소용없는 짓이다. 애초에 말이 안 된다. 내가 영현을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설렌다든지, 호감이 생겼다든지 그런 감정 하나 없었는데 갑자기 훅 들어오는 영현의 존재가 이해가 가질 않았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인정하기엔 더더욱 싫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이건.




"....완전 내가 이상한 사람 같잖아."




내가 그렇게도 이해하기 싫은 사람의 부류가 금사빠였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같아서. 그래서 인정하기 싫었다. 야, 언제는 내가 싫어하는 성격 타입이라서 피하기만 했으면서 갑자기 이렇게 되버린다고? 어떻게든 덮어야한다. 덮어져야만 해. 커버가 되지않을 정도의 감정은 절대 아닐거야.




ㅡ이번 해가 다 가기전에 바다 한번 가보려고

ㅡ겨울바다요?

ㅡ운치있잖아 나름. 서해로 갈까 생각중이야

ㅡ서해요? 동해도 아니고?

ㅡ응, 서해.



창밖을 멍때리듯 바라보며 던졌던 영현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밖에 내리는 빗소리의 박자에 맞춰 손톱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들리는 듯 했다. 보통 바다를 간다하면 동해를 간다는 데, 서해를 간다는 영현의 이유가 궁금했었지만 애써 캐묻지않기로했었다. 사람이 많은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건지, 동해를 자주 가서 그런건지. 글쎄, 그냥 영현에 대해 궁금한 것을 질문하다보면 그 사람의 존재가 알게모르게 내 머릿속 어딘가에 흡수될 것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그랬다. 나는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내 양손 엄지들로 핸드폰 화면을 몇번 두드렸다.



『동해바다로 가고싶어』오후 11:13



그리고 나는 문자를 보내자마자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ㅡ여보세요?

"선배, 잠깐 나좀 볼 수 있어요?"


























"왜 불렀는데"

"선배한테 조언 좀 들으려고요"

"나한테?"






자리에 털썩 앉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제형의 표정에도 나는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박성진이라면 모를까, 하필 왜 난데?





"선배가 나랑 비슷한 점이 많으니까."

"언제는 닮아서 싫다며,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임"

"융통성 있게 좀 받아들여요 슬슬 짜증 날려 하니까"

"진작에 이럴 것이지. 성깔 죽이니까 어색해 죽는 줄"

"........"

"연애상담이지?"




이거 미리 시킨 거임? 땡큐. 제형은 자신 앞에 놓인 요거트스무디를 망설임 없이 보라색 빨대에 꽃아 마셨다. 이럴 때 보면 눈치가 참 빠르다. 평소에 지낼 때 눈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행동 변화를 빨리 알아차리니까 신경 쓰기 싫어서 그냥 가만히 있는 건가 싶었다.




"선배가 겉보기와 다르게 이상하게 눈치 빨라"

"빠른 게 아니라, 네가 해온 행동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어."

"연애해봤겠죠 선배도?"

"해봤지"




제형의 둥근 금색 안경 테가 카페의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나는 쥐고 있던 머그잔을 검지로 두들기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 좋아하게 됐어요 선배는?"

"엉?"

"금사빠로 누군갈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야, 이건 중학생도 나한테 이런 질문 안 할 것 같은데. 게다가 너도 연애해봤으니 이런 질문을 안 할 거라 생각했거든"

"질문에 대답만 해줘요"

"맥락상 영현이한테 금사빠로 빠지게 된 건가 보네"

"이럴 때마다 선배 진짜 재수 없어요"

"고백하게?"

"저 남자친구 있어요. 영현 선배도 애인 있고요"

"엥, 그게 뭐임"




존나 코미디네. 완전 그 사랑과 전쟁 재질 아님? 제형은 밥솥소리와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등 뒤의 쿠션에 기대었다.





"김하루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 연애할 때 진짜 나쁜 여자네"

"아니, 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요"

"방어기제로 나오는 건 별로 터치 안 하고 싶은데, 너 방향을 너무 이상하게 잡았어"

"뭐라고요?"




나도 모르게 발끈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하고 치고 말았다. 반쯤 남은 커피가 머그잔 밖으로 튀어나와 테이블을 적셨다. 에이, 지지. 제형은 태연한 표정으로 냅킨을 뽑아 테이블을 닦아내며 말했다.




"넌 영현이 같은 유형을 피곤해하는 거나 싫어하는 게 아니야."

"........"

"오히려 좋아해서 네가 피하는 거지. 그 이유는 내가 잘 모르겠다만, 예측을 해보자면 자존심이겠지?"

"자존심 때문에 내가 그런다고요?"

"그런 사람과 썸을 타든, 연애를 하게 되든 상처받는 건 너 자신이라 생각하고 느낄 테니까."




아니야, 내가 피하게 된 건 누누이 말했지만 다정함 뒤에 숨겨진 그늘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었어. 좋아해서 아니라, 거북해서 그랬어. 나는 진짜 말이지.



"..........."



내가 그때 윤도운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이 도대체 뭐였었지. 반짝이는 여름의 햇살 아래에서 얼굴을 적시다, 눈물을 흘리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이유를 스스로 생각해내지 못했었지. 연민은 전혀 아니었어. 그저 그렇게 남모르게 무거운 감정을 짊어지며 만인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안타까웠고 그 상황의 피해자가 윤도운이였다는 게 마음이 아팠을 뿐. 그뿐이라 생각했지.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런 상황을 목격하기 싫다고 생각했기에 영현을 처음에 피했던 거잖아.






















"하루야, 입술."

"아... 어."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버렸나 보다. 난 어색하게 웃어주며 지금 동해로 가기 위해 타고 있는,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머리를 도운의 어깨에 기대었다. 한 시간 정도 걸린대, 좀 기대고 있어. 내 오른쪽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더 편하게 기대게 만든 뒤 도운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전혀 졸리진 않았지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도운은 내 오른손을 살포시 잡고선 말했다.





"하루야."

"응"

"네가 크리스마스 때 했던 말 있잖아."

"크리스마스?"

"응, 그동안 계속 하루 너를 좋아했었냐는 그 말."

".........."

".........."

"...마음에 두지 마. 그냥 투정 부린 것 뿐이니까."

"만약 내가 계속 널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하면,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선 급하게 도운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운은 눈은 웃지 않은 채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있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네가 나를? 도대체 왜? 목구멍에 무언가 틀어막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도운의 두 볼을 잡고선 가볍게 입을 붙였다 뗐다.



".....나 도착할 때까지만 눈 좀 붙일게."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하는 거, 바로 도망치는 것 밖에 나는 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선 이번엔 도운의 어깨 대신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잠을 억지로 청해보았다. 옆에서 희미하게 도운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이건.



























우리가 예약해놓은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덧 저녁이 다 되었다. 우리는 각자 싸온 짐을 풀고선, 저녁 준비를 하기로 했다. 간단하게 삼겹살이나 구워 먹기로 했는데, 생각해보니 음료나 종이컵 같은 걸 챙겨놓질 않았다.




"내가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올게."

"기다려, 같이 가자."

"아냐 괜찮아 내가 사 올 테니까 준비 좀 해줘. 가는 김에 햇반 몇 개 더 사 올게."

"....그래, 조심해서 갔다 와."



도운은 무언갈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나를 보내주었다. 아마, 그래도 어두워졌는데 같이 가지. 이런 말을 하려고 했을거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도운에게 활짝 웃어주며 숙소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봉지 필요하세요?"

"네, 큰 걸로 주세요"





도운을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려, 빨리 숙소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에 비닐봉지에 음료수들과 종이컵들을 되는대로 쑤셔 넣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리게 느껴졌다. 뒤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 나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옆으로 살짝 비켜주며 마저 물건들을 봉지에 넣으려는 순간, 더 이상 비닐이 그 용량을 버티지 못했는지 봉지 한 귀퉁이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줄줄이 짐들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이런 시발. 나는 혼잣말처럼 욕을 내뱉으며 바닥에 떨어진 종이컵들과 음료수들을 줍는데, 뒤에 있던 손님이 내 등을 조심스레 두드리며 내게 떨어진 음료수 캔을 건네주웠다.






"아, 감사합니...."

"........"

"...다...."

"......"

"......"




........미친 거 아니야? 왜 강영현이 여기 있어?




언제 또 염색을 했는지, 흑발로 머리를 덮은 영현이 나를 말없이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 속에서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강영현을 멍하게 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짐이 많아서 잠깐 들어준다는 영현을 한사코 말렸지만, 고집을 꺾기엔 나보다 영현의 고집이 조금 더 셌다. 영현은 나 대신 무게가 나가는 음료수 캔, 병들을 품 안에 가득 들고선, 차갑게 식어버린 모래사장을 나란히 걸었다. 한걸음 한걸음 디딜 때마다, 발이 모래에 푹푹 빠졌다. 겨울바다의 바람은 생각보다 많이 차가웠다. 바람소리보다도 더 큰 파도소리를 귀에 가득 담고선, 영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근데 선배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여행하러 왔지."

"서해 가고 싶다면서."

"여자친구가 동해 가보고 싶다고 해서."

"아."

"........"

"........"




그치. 여자친구랑 여행 올 수 있지. 왜 그걸 간과했을까. 여자친구가 원해서. 동해로 왔다는 영현.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똑같구나. 자신의 의견보다 남의 의견이 더 중요한 건.




"하루 너도 남자친구랑 놀러왔어?"

"...네."

"해돋이 보러 가겠네."

"선배도 보러 갈거에요?"

"음, 난 괜찮은데, 워낙 잠이 많은 사람이라."

"여자친구분이요?"

"응."

"........"




목이 자꾸만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지금 내 표정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너무 정색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다행인 건, 어두운 밖이라 내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점. 하지만 단점은 영현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 아니지, 왜? 굳이 내가 영현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할 이윤 없잖아. 누군갈 좋아해서, 그 사람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 짓는 표정이 궁금해서 그런 걸까.




"선배."

"응?"

"연애하니까 어때요?"

"......"

"......"




너무나 어이없는 질문이다.

이 사람은 애초에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되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고 나한테 그랬잖아. 당연히 좋아죽겠지. 자꾸만 바보처럼 굴게 되는 나 자신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영현의 입에서 직접 나와야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걸까. 무엇을 포기해? 몰라. 그냥 영현에 대한 어느 감정이든. 뭐든 간에. 다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근데 영현은 내 질문에 대한 답 대신 갑자기 이런 말을 내뱉었다.





"....너랑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어."

"뭐를요?"

"내가 그동안 사람들한테 해왔던 행동들과 말투. 왜 내가 이렇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선배가 그렇게 해야 살 수 있다고 했었잖아요."

"응, 그렇게 생각했었지. 근데."

"........"

"어찌 보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된 나 자신에게 심취해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지 않을 기회가 있었는데. 언제든 바꿀 수 있었는데. 이런 것들 말이야."

"........"



영현의 갑작스러운 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내 침묵을 검은색 파도소리가 대신 메꿔주었다. 그래서, 이 말의 목적은? 나한테 고맙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거야? 너 덕분에 정신 차리게 되었고 연애하게 되었으니 고맙다. 이 말인가? 애써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해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영현 앞에서 이성대신 감정으로 먼저 말을 이해하게 되어버렸다. 자꾸만 있는 그대로 말을 이해하고 싶어도 배배 꼬아서 듣게 되잖아.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는데, 말 대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애써 참았다. 언제부터일까. 언제부터 이렇게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게 될 만큼 감정이 커지게 된 걸까 나.




"그리고 내 판단이 맞았단 생각이 들었어."

"...무슨 판단이요."




어느새 내 패딩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이 울렸다. 아마 도운에게서 오는 연락이겠지. 다행히 파도소리 덕분에 영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다행이라 하면 이건 도운이한테 몹쓸 생각인 거잖아. 점점 수많은 감정들이 엉켜버려서 머리가 너무 아팠다.




"넌 절대로 주변 사람들이 멋모르고 가볍게 판단했던 것만큼의 성격이 아니라는걸."

"........."

"호박씨 까는 나보다는 몇 배는 더 괜찮은 사람인데 말이야.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네."

"언제는 저 마음에 안 든다면서요. 선배 약점 꿰뚫는다고."

"음, 그건 사실 오기였어. 아니, 오만함이었던 것 같아"

"네?"

"열등감의 이유도 아닌,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건 처음 겪어봤으니까. 근데 거기다가 네가 보란 듯이 내가 항상 머릿속에 생각만 하던 말을 나 대신 뱉어버렸으니까.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고."

"........."

"그래서 그때 많이 욱했나 봐. 만약에 너한테 그게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해."

"미안하면 나한테 이러지마요."

"...어?"

"나한테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말라고요, 제발. 적어도 선배한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하루야"




비참해서 미칠 것만 같으니까.

연애하는 척하다가 결국 너한테 빠져버려서, 지금 이렇게 내 감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까지 피해를 주는데. 상처를 입히는데. 안 그래도 미치겠는데. 그 감정 소용돌이의 원인인 네가 나에 대해 그렇게 좋게 말해버리니까 죄책감 때문에 아예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고. 너에겐 습관같은 빌어먹을 다정함이 나를 미치게 만들어버리니까.



"미리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선배. 그리고 학교에서도 다시는 저한테 아는 척하지 말아 주세요. 죄송해요."


나는 영현이 들고있던 짐들을 뺏듯이 가져가고선 도망치듯 숙소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영현이 내 이름을 외쳤지만, 계속해서 빠지는 모래때문에 넘어질뻔했지만, 그래서 들고있던 짐들이 또다시 빠져나가 모래 어디론가 숨어버렸겠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달렸다. 그래야 영현한테 눈물을 안들킬테니까.


















"하루야."


달리던 도중, 누군가가 강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결국 얼마남지 않은 짐들 마저, 다 모래에 후드득 떨어뜨리고 말았다.



"......."

"무슨 일 있어? 누가 너 쫓아와? 전화는 왜 안 받아. 걱정되게"

"...도운아."



눈물때문에 흐린 시야 속, 이와중에 순간 왜 난 영현이길 바랬던걸까.

그런 내 맘을 알 리없는 도운은 울고있는 나를 꽉 안아주었다. 울지말라는 말 대신, 그저 말없이 등을 쓸어주면서.




























"누가 거의 새 거인 라이터 버려놨더라."

"........."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아버린 탓에, 결국 기껏 사놓은 고기파티는 물거품이 돼버렸다. 도운은 내가 편의점에 갔다 오는 동안, 잠시 근처를 둘러보다가 불꽃놀이 세트를 파는 걸 발견했단다. 분위기를 띄울 겸, 나와 도운은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각자 한 개씩 꼬챙이 같은 걸 손에 쥐었다. 손 조심해야 돼. 도운이 라이터 불로 살짝 갖다 대자, 작은 불꽃들이 예쁘게 터져 나왔다. 타다닥 불붙는 소리들이 듣기 편안했다.




"예쁘다."

"마음에 들어?"

"응"

"다행이다. 아까 너 울길래 많이 놀랬어."

"......."




작은 불꽃들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그 많던 생각들이 점차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도운아."

"응"

".....왜 내가 좋아?"

"......."

"네가 나한테 주는 감정만큼 내가 돌려주지 못하는데."

"그걸 바랬으면 애초에 연애를 안 했지."

"도운아."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이상해 보여?"

"......."

"좋아하는 그 이유가 있어야 안 이상해 보일 것 같아?"

"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난 여전히 비겁한 사람일 뿐이니까."

"......."



그렇잖아. 그때도, 지금도.

누군가의 영역에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도망칠 뿐이잖아.



".....하루 네가 그때 졸업식 날 나한테 말했지. 미안하다고."

"그랬었지."

"근데 있잖아, 과연 고등학교 때 네가 발견한 내 그 모습을 너만 발견했었을까?"

"......."

"정말 내가 들키기 싫었다면, 학교가 아닌, 아무도 모르는 골목 어딘가에 그랬겠지. 그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게 말이야. 근데 왜 내가 굳이 학교 쓰레기처리장에서 그랬겠어."

"야, 너 혹시"

"그 나이 때, 나는 나름 티를 낸 거였어. 나를 좀 알아봐달라고."



점점 희미해져가는 불꽃을 담아내는 도운의 눈동자를 난 멍하니 바라봤다. 충격적인 도운의 고백에 잠시 머릿속이 올 스톱 돼버렸다. 오늘 여러모로 참 머리가 아픈 날이다.



"우연히 발견했어도, 무시를 하더라. 그럴 리 없겠지. 그냥 잘못 봤겠지 하고 넘기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아니면 그 이후로 아예 나를 귀신 보듯이 기겁하면서 피해버렸지. 내가 말하려고 했던 의미는 그게 아닌데말이지. 근데 있잖아, 그런 내 모습에 응답해준 사람은 딱 한 명, 하루 너밖에 없었어. 미안하다는 말도. 나한테는 정말 처음 들어봤거든."

".........."

"고등학교 졸업을 한 뒤에도, 내가 수영선수 생활을 끝내기 전까지도. 그 말을 너한테밖에 못 들어봤어."



아, 수영선수 생활을 그만뒀다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수많은 가십거리처럼 가볍게 떠들던 동창 애들의 입모양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계속 네가 생각났어. 네가 보고 싶어졌어. 그러다 보니 좋아하게 됐어. 그러면 너를 좋아하는 이유가 좀 타당해질까?"

"........."

"처음 사귀던 날도 지금도, 네가 날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아. 아직은 나에 대한 감정이 없는건지, 아니면 누가 네 마음에 들어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니면. 누가. 네 마음에.

넌 도대체 어디까지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던 걸까. 도운이 덤덤하게 저 말을 내뱉으니 오히려 내겐 그 모습이 더 슬퍼보였다.




"네가 나한테 울면서 전화했을 때 사랑해라는 말이. 진심이 담긴 말이 아닐지라도, 막상 들으니까 마음이 벅차고 마냥 좋더라. 그래서 이젠 그냥 상관없어해하려고. 계속 기다려보려고. 나 기다리는 거 잘하거든."

"도운아."

"곧 새해 시작 되겠다. 벌써 2분 남았네. 어서 소원 빌 준비하자 우리."




도운은 11시 58분인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밝게 웃어준다.

내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차갑게 식어버린 내 손을 꼭 잡고선 기도하듯이 눈을 감았다. 나도 결국 도운을 따라 눈을 감고선 기도하는 시늉을 냈다. 소원? 글쎄, 그게 나한테 통하기나 할까. 그건 착하게 살아온 사람한테만 베푸는 거 아니였나.


조금 뒤에, 해피뉴이어ㅡ 라고 사람들의 들뜬 외침이 곳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도운아 해피뉴이어."

"하루, 너도."



소원을 그래도 빌어보자면, 이렇게 착해빠진 사람이 내 욕심때문에 더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 솔직히 계속 이러기엔 내가 마음이 안 편안해서. 응, 난 끝까지 내 생각밖에 안하나봐. 그래. 영현이나 도운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2020년이 시작되었다.



영현의 번호는 이미 지운지 오래지만, 아직 카카오톡에 친구 목록으로 등록되어있는 영현의 프로필을 확인하는 게 이제는 습관이 돼버렸다. 하지만 영현의 프사는 내가 영현의 번호를 처음 저장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상메도, 배사도 그 무엇도 없었다. 아니, 보통 애인 있는 티를 내려고 디데이 표시는 내지 않나.


「점심 먹었어?」 오후 01:13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영현의 프로필을 확인하려고만 하면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도운에게 연락이 오는 탓에, 자연스레 확인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월, 밸런타인데이가 되던 날. 나는 도운에게 커플 후드티를 선물해주었다. 3월, 화이트데이가 되던 날, 도운은 나에게 커플링을 선물해주었다.



그리고 개강이 시작되기 하루 전, 나는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혼자 살 때, 제일 서러운 게 아픈 거라더니. 일어났을 때,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나 혼자 아프게 되었을 때. 아무리 기침소리를 내어도 내게 관심 하나 줄 사람이 없는 이 집안에서 고독을 씹을 뻔했던 내게, 나와 전화를 하고선 기가 막히게 내가 아프다는 걸 캐치한 도운이 죽을 사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선물해준 당일 빼고는 한 번도 입지 않은 검은색 커플 후드티를 입고선.



"하루야."

".........."

"내가 아플 테니까, 넌 아프지 마."

"..........."

"네가 약한 모습이 보일 때, 난 그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어. 차라리 내가 아플 테니까 그냥 넌 이기적이기만 해도 괜찮아. 계속 내 마음 모르는 척해도 괜찮아."

"도운아."

"그게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것 중 유일한 하나야 아프지 마. 무너지지마."


아프지 말라는 저 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어서, 결국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운은 누워있는 내 모습을 보고 약간은 울먹였다. 그 모습에 나도 울컥해서 덮고 있던 건조한 이불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핀 탓에, 하얀 이불에 주름이 생겨버렸다. 울음을 삼키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을 때, 그때 도운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나와 함께 커플로 맞춘 실버링이 내 방의 형광등에 반짝인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이후부터 나는 밖에 나갈 때마다 강아지 인형 고리를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개강이 시작된 이후, 어느 커플과 다름없이 우린 벚꽃놀이를 즐기러 나갔고, 환하게 빛나고 있는 벚꽃나무 아래에 살랑거리며 웃는 도운의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잡고 있던 도운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있잖아, 도운아.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조상님이 우릴 돕는 기회가 몇 번 있대."

"응."

"그게 지금인 것 같아. 네가 지금 도망치고 싶으면, 바로 도망쳐도 좋아."

"....지금 그 말을 무슨 뜻으로 해석해야 돼?"

"말 그대로야."



나는 결국 도운에게 인형 고리를 건네주게 되었다.



"늦게 돌려줘서 미안해."

"......하루야."



자신의 손에 쥐어진 인형 고리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 도운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더 밝게 빛나 보였다. 그렇게도 좋을까. 도대체 왜. 그저 네 본모습을 발견했던 것, 그것 하나 때문에?


"내가 진짜 잘할게 고마워. 나한테 와줘서."


숨 막힐 듯 꽉 끌어안는 도운에게서 비누냄새가 났다. 손으로 도운의 넓은 등을 서툴게 쓰다듬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탓에, 두드러진 날개뼈가 내 손바닥에 생생히 느껴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숨 쉴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등의 움직임이, 그리고 가슴팍에 느껴지는 심장박동이, 모든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난 늘 너한테 모호하게 대하기만 했는데, 넌 동창회에서 나를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항상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행동이 쭉 올곧았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싶을정도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 나는 도운의 품에 완전히 안기지않고 약간은 떨어진 채로 말했다.



"있잖아, 사실 내 성격 네 생각보다도 더 엄청 안 좋아. 욕도 진짜 잘하고, 나 자신밖에 몰라. 나 그래서 학교에서 싹바가지 취급도 당해. 다들 나보고 이기적인 사람이라 손가락질해."

"응, 괜찮아."

"비겁한 성격이라, 도망치는 것도 잘해. 예전에도 그랬듯이."

"그것도 상관없어."

"너 진짜 호구구나."

"원래 사랑이 그러라고 있는 거 아니야?"

"........"

"사랑해."

"........."

"........."

"나도 사랑해."



응, 사랑해볼게. 이젠, 정말 너를 사랑해보려고. 그리고 나 자신도.















"너 괜찮아?"




오늘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원필에게 듣게 된 첫마디가 저거였다. 아니, 왜 개강한 지 일주일밖에 안지났는데 벌써부터 과제가 미친듯이 쌓이냐고. 며칠 밤을 새느라 컨디션이 극도로 최악인 상태인 터라 대답도 하기 귀찮아서 말없이 계속 얘기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샷을 두 번이나 때려박은 그란데 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쪽 마셨다.



"진짜 몰라? 그 여자애 너도 알지, 허구한 날 영현이 형한테 플러팅 걸고, 단발에다가 이렇게 앞머리 겁나 짧게 자른 걔, 알지? 개총때, 영현이 형이 걔 집 근처까지 데려다줬다는 거 아니냐."

"김미진?"

"와, 어떻게 한 글자도 못 맞추냐. 서현이잖아 이서현."

"몰라 내가 어떻게 알어."

"남한테 관심 좀 가져라"

"나 살기도 바빠죽겠는데 왜 그래야되는데, 귀찮게."

"네 애인문제니까 당연한거 아니야?"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냐. 김원필의 침튀기는 상세 설명 덕분에 이름은 모르지만 어떤 이미지인지 대충 기억은 나는 듯했다. 그때 공모전 때문에 얘기를 후배와 나눴다고 했을 때, 김원필이 말하고있는 생김새가 내 기억속의 그 얼굴과 똑같았다. 사실은 또, 언제 한번 나랑 영현이 같이 있을 때 내 존재감을 무시한 채 곧바로 영현 앞에서 선배, 저 밥 사주세요 라고 말을 건네기도 했었다. 일단 영현과 진짜로 사귄 것도 아니라서, 그다지 눈길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뭐, 결정적으로는 강영현이 걔한테 관심 있는 것도 아니였어서. 별생각도 없었기도 하고. 하여튼 딱히 아무 신경도 안 쓰는 아이였는데 김원필이 쟤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더 난리를 치고있다. 어찌 보면 싸움 나기를 바라는 거일 수도. 근데 따지고 보면, 속사정을 알리없는 제3자 입장에선 나랑 강영현이 커플로 보였을 테니.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무래도 영현이 먼저 동아리 사람들한테 헤어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 보다. 그러니까 원필이 나한테 와서 저러는 거겠지.



원필은 아무 표정 변화가 없는 내 모습에, 당사자인 나보다 더 속이 타들어가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쓰고 있는 내 검은 캡 모자의 챙을 살짝 올렸다. 그 사이에 기습적으로 들어온 햇빛 때문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햇빛의 잔상 덕에 원필의 어깨 부분에 보라색 지렁이가 꿈틀 꿈틀거렸다.



"뭐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질투 안 나? 이제부터 걔 더 대놓고 그럴걸?"

"......."


뭐, 여기서 나 이미 헤어졌는데? 라고 대답하기도 애매하네.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하지? 라는 생각과 함께 여전히 가득 남아있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목 넘김 끝에 밀려오는 씁쓸함. 뭐, 굳이 따지자면 커피만이 원인은 아니지만.



"왜 가만히 있는 애를 쌈박질하라고 불 붙여놓냐."



다행히 타이밍 좋게도 제형이 나타나 원필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 인사하는 자세로 만들었다. 안경의 렌즈 너머 보이는 무심한 눈빛과 맞닥뜨리자, 제형이 공학관 건물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 애들이 너 찾던데. 연락 안 받고 뭐 해"

"...아, 어. 무음이라 몰랐어요."

"얼른 가봐"



자리에 떠나기 전, 나는 타이밍 좋게 끊어줘서 고맙다는 눈빛을 주었고, 제형은 그 대답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었다. 나는 뒤에서 내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보고 있을 원필 때문에, 오늘은 교양수업만 있어서 원래는 목적도 없었던 공학관 건물로 발길을 옮겼다.






"........."











"여보세요?"

ㅡ어, 하루야. 바빴어?

"무음이라 이제 봤어요 선배 어딘데요?"

ㅡ공학관 건물 쪽으로, 아 보인다.




롱 코트를 입은 영현이 나를 발견하고선 크게 팔을 몇 번 흔들었던 모습이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 그때의 난, 통화를 끊고선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영현을 향해 걸었었다.






"이럴 줄 알았어, 또 밤새웠지."

"밤 안 새면 시험 범위까지 다 못 나가는데 어떡해요."

"잠에서 깨긴 한 거야? 아직 잠이 덕지덕지 붙어있는데"






내 얼굴을 감싸던 두 손 중에 엄지만 내 볼을 문질렀다. 시험 보는 날은 내가 화장하지 않고 온다는 걸 알기에 한 행동이었다. 내 맨얼굴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맨얼굴도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내 얼굴을 반죽하듯 손으로 문지르는 걸 좋아하는 영현이다. 손에 세균이 그렇게 많다는데. 괜찮아 아까 손 씻고 왔어. 뭐, 나도 딱히 그런 스킨십에 거부감은 없어서. 다시 생각해보니 영현이라서 가능했던 스킨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이제서야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떡하려고."

"뭐 어때. 사귀는 사이라고 거짓말이라도, 일단 말은 했으니 상관없잖아."

"그건 동아리 사람들한테만 해당되는 거잖아요."

"아, 그런가?"

"뭘 그러긴 그래요 그만 주물럭거려요. 여드름 나니까"

"딱 1분만, 아니, 10초만, 나 손 씻었다니까ㅡ"




그러보니, 참 이상한 관계였다. 술김에 도와준다는 말로 시작해서 그 과정 속에 나는 홧김에 영현의 손을 잡아봤고 그 이후로 습관처럼 손을 잡았었다는 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서로한테 해왔던 행동 자체에는 누가봐도 사랑이 묻어나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게.



따로 영현과 만날 때마다 영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에는 쉴 틈 없이 알림들이 떴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문자메시지 미리 보기들에 잠깐이지만 환멸이 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 시선을 느낀 영현은 그런 핸드폰의 화면을 내 쪽으로 보이지 않게 뒤집어들곤 했었다.




"배터리 빨리 안 닳아요?"

"응?"

"연락 그렇게 자주 오면 빨리 닳을 텐데."

"옛날에 제형이가 물어봤던 거랑 똑같이 물어보네."




내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래서 보조배터리가 꼭 필요하지. 라고 말하며, 내가 여우 인형 키링을 준 이후로부터 여우와 관련된 것들이 꽂힌 건지, 여우 모양 스티커가 붙여진 하얀 보조배터리를 보여주었었다. 그런 영현의 모습을 봤을 때 난, 영현에게서 궁금증과 안쓰러움이 동반되었다. 굳이 그래야할 이유가 있는 걸까. 영현에게 있어 이런 행동방식들이 정말 영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걸까. 약간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찰랑거리는 다정함. 물론 그 인위적인 다정함은 나 혼자만 눈치챘었지. 아, 아니 박제형까지는 눈치를 이미 챈 것 같았다. 아니, 또 어쩌면 윤도운처럼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챘었는데 그냥 피하고 있을지도. 그래도 나한테까지는 그런 인위적인 다정함을 보일 필요는 없을 텐데.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영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왔다.













"....예쁘네 벚꽃"




갑자기 문득 떠오른 예전 생각에 기분만 씁쓸해지는 그때, 도운과 벚꽃놀이하러 갔을 때보다 더 예쁘게 핀 벚꽃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런 거 있잖아, 벚꽃잎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거. 물론 남자친구가 이미 있기는 히지만, 꽃잎을 잡으면 더 관계가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바람이 부는 타이밍에 맞춰, 손바닥을 펼쳐 팔을 벚꽃나무로 향해 뻗었다. 하지만 한껏 펼친 내 손바닥에 내려앉은 건 벚꽃잎이 아닌,




"........"




다름 아닌 영현의 손바닥이었다.




"........"

"........"

"안녕."

"....안녕하세요."





갑작스럽게 내 손을 잡는 것도 모자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살갑게 인사하는 영현의 모습에 나는 표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뭐야, 그때 내가 했던 말 기억 못 하는 건가? 전보다도 더 살이 빠졌는지, 원래도 날카로웠던 이목구비가 더 날카롭게만 느껴졌고, 오늘따라 영현의 눈꼬리가 더 뾰족하게 느껴졌다. 예전엔 늘 화려한 피어싱을 꼭 달고 다녔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은 영현의 귀가 허전해 보였다.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죠."

"다행이네."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인 건지. 마치 전 애인과 말하는 대화같이 느껴져서 더 당황스러웠다. 영현은 잡고 있던 내 왼손의 약지, 아니 정확히는 내가 끼고 있던 커플링을 느릿하게 자신의 약지로 살살 문지르는 탓에, 목 한가운데에서부터 무언가가 자꾸만 꽉 막힌 듯 숨쉬기 힘들었다. 근데 그러고 보니, 영현의 약지에는 반지의 존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 네가 이제는 학교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 그랬잖아."

"........"

"그래, 앞으로 하지는 않을게. 근데 있지."

"........"

"우리가 지내온 정이 있으니까, 내가 부탁 하나만 할게."

"....뭔데요."




잡고있던 내 손을 놓았을 때,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다시 영현의 손을 잡을 뻔했다. 미쳤나봐 진짜. 내 스스로 나무라는 듯, 나는 내 두 손을 엄지 손톱으로 자국이 날 정도로 꾹 눌렀다.




"딱 한 번만. 한 번만은 내가 너를 찾아오게 되어도, 그때 한 번만은 받아줘. 내가 무너질 것만 같을 때. 그때 한 번만 나를 도와주면 안 될까."

"....선배도 여자친구분 있잖아요. 굳이 왜 나한테서 힘을 얻으려 해요, 왜."

"헤어졌어."

"......."

"많은 거 안 바래. 그냥, 옆에 있어달라 부탁하면 딱 한 번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한 번만 옆에 있어주면 안 될까."

"...선배, 진짜 나한테 왜 이래요."





진짜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강영현 진짜 약았어.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더 울고 싶은 표정을 짓는데. 그런 표정으로, 그때 네가 나한테 호프집에서 도와달라고 했던 말보다 더 처절하게 그렇게 부탁하면,





ㅡ그게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것 중 유일한 하나야 아프지 마. 무너지지 마.





내가 무너지고 싶어지잖아. 자꾸만 도운한테 미안할 짓을 내 스스로 만들고 싶어지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럼 좀 더 오래가던가, 왜 이렇게 빨리 헤어져서 이렇게 사람 마음 뒤숭숭하게 만드는데."

"뭐?"

"내가 선배한테 아는척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요?"

"........"

"........"

"하루야."

"......."

"...나 좋아해?"

"......."

"......."




지금 이 상황 속에서, 하필 바람 때문에 떨어진 벚꽃잎들이 마치 꽃 비처럼 우리 머리 위로 내리는 게, 너무나 예뻐서, 더 비참해졌다.




"어, 좋아해. 나 선배 좋아해요. 아니, 이젠 좋아했었어라고 말하려고 노력 중이야, 알았으면 제발 좀 나한테 이런 행동하지 말아줘요."

"저기, 있잖아"

"그래, 선배 좋아하는 사람들 주변에 많잖아. 선배 후배 중에 서현이라고, 그 사람 선배 좋아하는 것 같더라. 차라리 그 사람한테 하라고요 이런 행동들. 굳이 왜 나한테 이래요, 왜."

"너 그 말 진심이야?"

"......."

"내가 왜 그러겠어 너한테. 그래, 네가 말한대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는데도 굳이 너한테 이러는 이유를."

"선배 약점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그러겠죠."

"...야, 너 진짜..."

"이제는 진짜로 아는 척할 상황이 없을거라 믿고 싶어요. 이건 저한테도, 제 애인한테도 못할 짓이란 거, 선배도 잘 알잖아."

"......."

"......."




한숨을 푹 쉬고선, 나를 바라보는 영현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봐왔던 영현의 표정들 중에서 제일 굳어있었고, 눈빛도 제일 서늘했다.



"...그래."

"........"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내게 보이는 영현의 뒷모습에서, 매고있던 검정색 백팩에 아직도 내가 준 여우인형 키링이 달려있는 걸 발견하자, 나는 결국 후들거렸던 다리가 더이상 버티질못하고, 무릎을 굽힌 채 내가 서있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위에 떨어져있었던 벚꽃 잎이 내 손바닥에 하늘거리며 내려앉았다. 난 연약한 벚꽃잎을 힘껏 주먹쥐며 자꾸만 터져나올려는 울음을 막으려 손 대신, 내 팔로 입을 막아버렸다.







"너 여기서 뭐해"

".....선배"





익숙한 제형의 목소리에 나는 결국 눈물이 터진 상태로, 뒤를 돌아봤다. 뭐야, 너 왜 울어. 천하의 박제형도, 사람이 갑자기 울면 당황을 하나보다. 하지만 곧 원래 표정으로 돌아오고선 오늘은 남방 대신 남색 과잠을 입은 제형이, 과잠을 벗고선 내 머리 위에 던지듯 덮어놨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왕 우는 거 덜 쪽팔리라고"

"이게 더 쪽팔릴걸요"

"보니까 네 우는 얼굴 보이는 게 더 쪽팔릴 것 같더라."





박제형만의 위로 방식인 걸 알고 있는 나는, 결국 담배 냄새와 감귤 핸드크림 냄새가 섞인 제형의 과잠을 얼굴에 덮은 채로 계속해서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참 어렵게도 사랑한다"






박제형이 누군가에게 한탄하듯 혼잣말하며 라이터를 켜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다 울었냐?"

"......."

"째려보는 거 보니까 다 울었네. 내놔, 나 추움."



뺏어가듯 과잠을 가져가는 탓에, 몸에 휑하고 찬기운이 돌아 추워졌다. 손등으로 대충 눈가에 남은 물기를 벅벅 닦았다. 눈 화장을 안 했길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다 피고선, 핸드크림을 바르고 있는 제형을 빤히 바라보다, 나도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뱃갑을 꺼냈다. 그러자 내 팔을 잡고 제지하는 제형이다.



"너도 피려고?"

"...네."

"울다가 담배피면 안됨."

"누가 그래요?"

"엉, 내가. 대신에 이거 먹어."



딸기맛 츄파춥스를 내게 불쑥 건넸다. 나, 딸기맛 안 먹는데요. 그럼 말고. 한번 시도는 해볼게요. 하여간, 줄 때 한 번에 좀 받아. 껍질까지 친히 벗겨서 건네주는 제형 덕분에, 나는 우물거리며 사탕 맛을 음미했다. 아, 딸기향 살짝나는 설탕맛. 예상대로 맛은 없었다. 퉁퉁 붓게 된 눈 위에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탓에, 눈이 시려워 눈물이 절로 났다. 덕분에 한번 짧게 훌쩍거렸다.



"........"

"........"

"안 물어봐요?"

"뭐를 안 물어봐"

"왜 울었는지."

"별로"

"........"

"........"

"선배가 동아리 사람들한테 말 안했나봐요. 이제 그런 사이 아닌거. 아니, 원래부터도 아니었지만."

"엉, 근데 말안해도 아까보니까 엄청 그래보이긴했음. 근데 너 말하려면 빨리 말해야될걸."

"왜요?"

"우리 담주에 동아리 회식 있음."

"....아, 미쳤다."

"그동안 공모전 준비한다고 정신없었어서, 이번에 제대로 한번 모이자고 성진이가 그랬는데, 아마 다 오지않을까 엔간하면."

"........."

"내가 대신 성진이한테 말해줘?"

"아니, 내가 먼저 말을 할..."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어쩜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성진에게 전화가 오는건지. 들고있던 핸드폰에 갑작스럽게 진동이 울렸다. 받아봐. 곰성진 선배라고 저장된 내 핸드폰 화면을 본 제형이 말했다. 나는 혹여나 운 것을 들킬까봐 목을 몇 번 가다듬고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ㅡ어, 하루야 지금 통화 가능하냐.

"네 괜찮아요."

ㅡ다름이 아니라, 어......그...

"무슨 일인데요?"

ㅡ니 괘안나.

"네? 뭐가요?"

ㅡ우리가 담주 동아리 회식이 있거든. 근데 너네 헤어졌다고 영현이가 그러길래...

"........"

ㅡ일단 영현은 오기 힘들 것같다고 하긴했는데, 그래도 정 불편하면 참석안해도 된다. 내가 사정 잘 말해볼게.




나는 말없이 제형을 힐끗 바라봤다. 제형은 들리지않는 통화내용이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니 알아서 하란 뜻이었다.




















"저번주는 미안, 난 니가 헤어진 줄도 모르고.."

"됐어, 몰라서 그런 건데."

"진짜 미안."

"한 번만 더 미안 이 소리 하면 내가 고기 안굽고 너한테 시킨다 진짜."

"헐, 미안. 아니, 알았어 말 안 할게."




고기 다 태운다, 빨리 안 뒤집나. 그럼 선배가 대신 좀 뒤집어봐요. 알아따 알아따, 다행히 동아리 사람들은 초반에만 내 눈치를 잠깐 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이 대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테이블 어딘가에 울리는 진동 덕에 소주를 가득 넘게 따른 잔이 살짝 휘청이며 넘쳐흘렀다. 어디서 진동 울리는데, 하루 핸드폰 아니가. 아, 제 거 맞아요, 받고 올게요. 봄이지만 아직은 밤에는 서늘한 온도 탓에, 가디건을 챙겨입고선 밖으로 나가 대충 술집 옆에 있는 편의점 근처 골목 쪽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ㅡ재밌게 놀고 있었어?

"술만 마시는 건데 뭘."


전화를 하면서 어디에 눈을 둘 데가 없어서 떼어진 포스터 자국들이 얼룩덜룩하게 남아있는 골목 벽을 시선을 고정한 채 바라보았다. 웃음소리를 잠시 내던 도운이 말했다.


ㅡ적당히 마시고. 끝나갈 때쯤 말해, 데리러 갈게.

"괜찮아, 도운이 너도 오늘 회식이라면서. 너야말로 회식 어때, 재밌어?"

ㅡ아니, 너 없어서 재미 하나도 없어

"뭐야, 그게"

ㅡ진짠데


도운은 가게 바로 밖에서 전화를 받는 건지, 유난히 뭔가 시끌시끌한 게 약간 거슬릴 정도로 내 귀에 들려왔다.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어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ㅡ야, 윤도운. 안 들어와?

ㅡ아 알았어, 알았어.



갑작스러운 동기의 출연에 적잖이 당황한 도운의 목소리가 웃겼다. 이번엔 내가 피식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곤 말했다.



"알았어. 얼른 들어가기나 해"

ㅡ응, 사랑해.

"...나도."



내가 먼저 전화를 끊어야 그제서야 끊는 도운 떄문에, 나는 서둘러 전화를 먼저 끊었다. 전화를 끊고서 그제야 풍경이 내 눈앞에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둑한 밤이 되어 보이는 벚꽃은, 비록 저번주보단 꽃이 조금 졌긴 했지만, 낮에 봤던 것과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나름의 운치를 느끼게 해주었다. 저것도 좀 있으면 언제 있었냐는 듯이 깔끔하게 다 져버리겠지. 담배연기는 자꾸 어느 한쪽으로만 흘러갔다.



".........."


무심코 연기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 저 멀리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느낌상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건 분명한 것 같았다. 입에 한껏 담배연기를 머금은 채,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누군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근처 가게들의 조명 덕분에 실루엣만 보였던 모습이 점차 내게 뚜렷하게 보였다.



".........."

".........."



뜻밖의 영현의 등장에, 나는 어벙한 표정으로 짧아져만 가는 담배를 그저 들고만 있었다,

그러다 내 근처에 있는 편의점 문의 벨소리 덕에 정신이 들었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영현에게 무어라 말을 할 뻔했다. 화려한 머리색을 평범한 흑발로 바꾸었을 때, 그리고 저번주에 이것저것 화려하게 피어싱으로 장식했던 귀에 아무것도 끼지 않았을 때도, 옷만큼은 라이더 재킷이라든지 항상 무언가 포인트를 주게 입던 사람인데. 지금 내 눈앞에 검정색 맨투맨에, 흑청바지를 입고 있는 영현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도 느껴졌다. 한껏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게 네 본모습인 걸까. 싶을정도로 하나같이 다 처음보지만, 그렇다고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않은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 상태를 파악하는 게 싫다면서 늘 웃는 표정을 하고 있던 사람이. 눈에 띄게 입어야만 화려한 옷들에 묻혀 정작 자신의 피곤함은 잘 보이지않는다고 했던 네가. 이제는 왜.


영현은 나와 눈 마주친 이후, 내 쪽으로 다시 눈길 한번 주지도 않은 채로, 아까 내가 있었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헐, 영현이형? 아까는 못 온다면서. 어어 앉아라, 여기 빈자리 있다. 당황스러움 반, 빈가움 반으로 맞이하는 동아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문 틈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에이씨,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회식 안 나간다 할걸. 이미 후회를 해봤자 늦었다. 나는 짧아진 담배를 버리고선 다시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어...또, 뭐 시킬까?"



분위기를 어떻게든 전환하려고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웃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원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찔렀다. 성진은 벨을 눌러 메뉴를 더 시켰고, 제형 옆자리에 앉은 영현은 제형과 무어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내게 자꾸만 귓속말로 물어보는 원필에게 결국 나는 원필에게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한마디만 더 그러면 고기가 아니라 네 손을 지지는 수가 있어. 원필은 헙 소리를 내며 서둘러 다른 화제를 돌렸다. 아, 여기 집 잘하네 맛집이네.



다행히 각자 자리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느라 생각보단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나는 성진과 원필을 상대로 각자 전공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었고, 영현은 여전히 제형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한 잔, 서너 잔, 한 병, 두 병, 하나씩 빈 소주 병과 맥주병이 늘어만 갈 때, 성진은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먼저 일어섰고, 소주 한 병이 테이블에 더 늘어가자, 원필은 술에 꼴아서 테이블에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애초에 술이 잘 안 맞아서 거의 술을 마시지않아 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제형은 잠깐 담배 피우러 간다면서 잠깐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내가 제형을 보며 그렇게 필사적인 눈빛으로 말렸는데도, 제형은 본 척도 안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진짜 저거 사탄 맞다니까? 결국엔 다시 강영현과 둘만 남게 되었다.


누가 먹을 사람도 없는데, 그렇다고 어색한 이 상황에 내가 아무것도 하는 게 싫어서 그냥 계속해서 고기만 구웠다. 이따금씩 튀는 기름 탓에, 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영현은 그러든지 말든지, 핸드폰에 계속 시선을 고정했다. 도대체 박제형은 줄담배를 피우는 거야 뭐야. 아직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않는 제형이 더더욱 미워졌다. 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에 일어나 급하게 가게 안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그만큼 훅 들어오는 술기운에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무게중심을 잡으려 상체를 문 앞에 숙이다가, 하필 급하게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린 화장실 문 덕분에 내 머리는 문에 명중으로 빡 소리가 날 정도로 부딪쳤다.


".....아,"

"헐,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이마가 얼얼했다. 약간 취한 듯, 발음이 어눌한 상태로 내 팔을 붙잡고 괜찮냐고 확인하는 여자에게 됐다면서 대충 손으로 휘휘 저었다. 술집가게 특성상, 가게 안이 시끄러운 탓에 목소리가 볼륨 조절이 잘 안될 수 밖에 없다, 술이 들어간 상태에선 더더욱. 그래서 큰 목소리때문에 혹시라도 뒤에 앉아있는 영현에게 눈길을 끌게 되면 그건 너무 쪽팔릴 테니까. 근데 저기 그, 코피 나시는 것 같은데..




"아, 환장하겠네 진짜..."

"저..."

"진짜 괜찮으니까 그냥 지나가세요"



설상가상 코에 뜨뜻하게 내려오는 코피에 모든 것이 대환장파티다. 모든 것이 잘 안 풀리는 오늘이다. 내 모습을 보고도 주춤주춤 거리는 여자에게 괜찮다고 뒤로 한 채, 우선 손등으로 급하게 막고선 화장실에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휴지를 갖고 들어가는 곳이니 화장실 안에 휴지가 있을 리 만무하다. 우선은 급한 대로 한 손으로 코를 막고선 다른 한 손으로는 코밑에 피로 엉망이 돼버린 하관을 물로 닦아냈다. 제형한테 문자로 휴지 좀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다가 문득 깨달은 것 하나.



"아, 맞다 핸드폰"



급하게 일어서느라 핸드폰을 두고온게 그제야 생각났다. 미쳤나 봐 진짜로. 일단 코피가 대충 멎을 때까지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사람같이 보일 정도가 될 정도로 조금 진정이 될 때 즈음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마엔 시퍼런 멍이 들었지만, 그건 지금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다시 자리에 돌아왔을 때는 강영현은 없었고 언제 왔는지 모를 박제형이 쓰러져있는 김원필 머리 위에 냅킨을 찢어서 하나둘씩 쌓아두기 시작했다. 뭐 해요. 예술작품 만드는 중, 그나저나 너 얼굴 상태가 왜 그래




"옷에 묻은 피는 뭐냐. 엥, 이마에 멍도 듦? 너 누구랑 싸웠냐?"

"보면 몰라요, 지금 코피 나잖아요. 문에 부딪쳤어요"

"아 그래서 영현이가..."

"네?"

"너한테 갖다주란 말은 안하고, 그냥 나한테 이거 주더라."

"......."



제형은 얼음컵과, 휴지를 내게 보였다. 일단 코 좀 막고, 이걸로 이마 찜질 좀 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네준 얼음컵으로 이마에 갖다 대었다. 차가운 감촉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표면에 맺힌 물방울 덕분에, 콧등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면 강영현은 어디간거야? 말을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귀신같이 내 생각을 읽은 제형이 휴지를 돌돌말아 내 코에 넣어주며 말했다.



"자기도 일 생겨서 가봐야 된다더라."

"......."

"멍빼는 연고 같은 거 있다는데 내일 한 번 사러 가."

"......."

"왜, 또,"

"선배, 그 사람은 원래 보통 자기를 무시해달라는 사람한테도 이렇게까지 행동해요?"

"당연히 아니지. 미쳤냐?"



사람 돌게 만든다 진짜. 입술을 수차례 깨물었다. 도대체 이렇게 해서 얻고 싶은 게 뭐야. 나는 건네받은 얼음컵의 뚜껑을 열어 그대로 조개탕 안에 전부 얼음을 집어넣었다. 얼음이 탕 안에 퐁당거리며 내용물을 테이블에 튀게 만들었다. 제형은 기겁을 하며, 내 손목을 잡곤 제지했다. 돌았냐? 갑자기 왜 여기에 넣고 난리임.


"뜨거워서 식힐려고요"

"........"

"........"



중의적인 내 말에 제형은 잠시 아무말 없다가 무음으로 바꾼 내 핸드폰을 건넸다. 야, 전화 왔다. 전화나 받아. 뒷정리 하고있을테니까. 바로 집에나 가자. 전화를 받으려고 일어서는 나에게, 도운이로 저장된 이름이 액정 한가운데에 밝게 뜨는 걸 발견한 제형이 잠깐 한숨 같은 걸 쉬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냥 오지랖 같아서 쭉 내버려 뒀었는데."

"뭘요"

"처신 똑바로 해라."

"......."

"네 심정 복잡한 건 이해하는데, 그걸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지금 이걸 건네준 건 내가 아니라, 영현 선배 쪽이에요. 그 선배한테 그래야죠,"

"너 진짜 바보냐?"

"........"

"........"

"그럼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친구한테 다 얘기할까요? 나 사실 너랑 사귀면서 다른 남자한테 흔들렸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흔들린다. 그렇게 다 말하고 영현 선배한테는 다시 이 휴지 돌려드리기라도 할까요?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왜 나한테만 그래? 나도 할 만큼 다 했단 말이야."



전화가 끊기고, 현재 시각을 보여주는 잠금 화면이 화면을 밝혔다. 짜증과 화가 잔뜩 뒤섞인 내 대답에 제형은 표정 변화 없이 날 바라보다 빈 소주잔에 병에 조금 남은 소주를 모조리 쏟아부었다. 작은 소주잔에 비해 병에서 나오는 소주의 양이 더 많아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술이 잔 밖으로 흘러내렸다. 얼른 전화하고 오기나 해. 그 말에 아무 대답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아까보다 더 바람이 차가워진 것 같았다. 아니, 술기운 땜에 더 그런 건가? 하여튼간 추위 때문에 몸을 웅크리며, 부재중으로 찍힌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얼마 가지 않아 곧바로 받는 도운이다.




"여보세요?"

ㅡ아직 회식 중이야?

"아니, 이제 곧 집에 가려고."

ㅡ어, 바로 갈 거야? 잠깐만 기다려, 10분만. 나 거의 다 왔어.

"너 지금 이쪽으로 오는 거야?"



순식간에 계산까지 다 마쳤는지 가게 밖으로 취한 원필을 질질 끌며, 택시를 잡으려는 제형을 보며 나는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쟤 어쩌려고요?



ㅡ잠깐 얼굴 보고 싶어서.

"..알았어, 가게 앞에서 기다릴게"



전화를 끊자, 어찌어찌 힘겹게 택시에 원필의 몸을 구겨 넣어둔 제형이, 자신도 원필과 함께 택시에 탈 모습을 취했다. 선배도 원필이랑 같이 가게요? 나 얘 집 주소 몰라, 그냥 내 자취방에 재워야지. 수고하세요. 어엉. 문이 닫히는 탁 소리와 함께 택시는 떠났다. 김원필 저거 꼬락서니 보니까 숙취 때문에 내일 자체 공강 때리게 생겼네. 언제 그랬냐는 듯 코피는 어느새 멎었다. 아, 추워. 티셔츠에 코피 묻은 부분이 보이지않게 단추끝까지 채운 얇은 가디건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찬바람에 아까보다 더더욱 몸을 웅크렸다. 고기 냄새랑 담배 냄새가 바람에 의해 살짝살짝 났다.



"...아 맞다, 도운이 담배 냄새 싫어하는데."



비흡연자라 담배 냄새에 더 예민할 수 있다는 말을 인터넷에서 봤던 게, 그리고 길에서 누군가 담배피는 모습을 볼 때, 코를 막고 잔뜩 찡그렸던 도운의 표정이 문득 생각이 나서, 황급히 옷에 밴 냄새를 확인해봤다.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닌지라, 일단 급한 대로 가방에 들고 다니는 가글을 꺼내어들었다. 아, 나도 박제형처럼 핸드크림 갖고 다닐 걸 그랬나. 입안에 화한 느낌이 가득 들 때쯤, 하수구 구멍에 뱉어냈다. 아, 이럴게아니라 근처 화장품 가게 가서 테스트 향수라도 뿌려야 하나라는 고민이 들 때쯤, 도운이 도착했다. 빨리 왔네. 이 근처에서 술 마시고 있었으니까. 아아. 도운은 익숙한 듯, 내 볼에 손등을 조심스레 갖다대며 말했다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차. 추워?"

"밤 되니까 좀 춥네."



춥다는 말을 듣자마자, 망설임없이 자신의 품에 안기게 만드는 도운이다. 약간은 뛰어온 건지, 살짝 숨을 고르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딱 붙어서 안지 마. 냄새나."

"나한테서? 술 냄새 많이 나?"

"아니, 나한테 담배 냄새나니까."

"난 또, 그런거면 상관없어."

"너 담배 냄새 싫어하잖아."

"너 안지 못하는 게 더 싫어."

"많이 능글맞아졌다?"

"싫어?"

"아니, 좋아."

"그럼 됐어."


조금더 도운이와 밀착하며 안고있자, 도운이가 입고있는 남색 후드티 주머니 안에 느껴지는, 아마 추측하건데 에어팟 케이스와 강아지인형. 내가 인형고리를 다시 돌려준 이후로부터, 키링대신 그 인형고리를 걸고다니는 도운이었다.



"근데 하루야."

"응?"

"저기 뒤에 너 아는 사람이야?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길래"

"........."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도운의 말에 뒤돌아봤을 때 보게 된 건 나를 무서울정도로 매섭게 노려보다가 뒤도는 영현의 뒷모습이었을 때. 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걸까.


요즘 들어 영현의 뒷모습만 보게 되는 나인데. 그런 모습을 보고도 이제는 그냥 아무 생각도 하면 안 되는 건데. 왜. 미칠 것 같을까. 큰소리로 영현을 부르고 싶은걸까. 나는 눈을 꾹 감은채로 팔에 힘을 주어 더더욱 세게 도운을 끌어안았다. 안고있는데도, 자꾸만 몸이 춥게만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난 내성적인 아이였어.



누군가 내게 방긋 웃으며 호의를 베푸는 행동을 하더라도 나는 남들처럼 웃어주며 받아주는 것을 잘 못했어. 어느 날, 내게서 자신의 호의를 매몰차게 거절 받은 여자아이는 마음이 단단히 상했는지 유치원 선생님께 달려가 울면서 말했지. 쟤 이상해요. 이상해. 이상해.





그날부터 유치원에서 나는 이상한 아이가 돼버렸어.






학부모 상담 날, 부모님이 유치원 선생님께 그날 있었던 일과 내가 그동안 유치원에서 했던 말과 행동들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때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것을 아직도 기억해. 삭막한 분위기가 흐르는 차 안, 집에 거의 다 왔는데도 불구하고 대뜸 아버지는 쥐고 있던 핸들의 방향을 틀어 집의 정반대 방향으로 운전하셨어. 우리 지금 어디 가요?라고 묻는 내게 아버지는 짤막하게 말씀하셨지. 수영장.








그날은 내 인생에 처음 수영장을 가본 날이었어.


워터파크는 이미 가족끼리 몇 번 갔다 오긴 했지만, 이렇게 정말 수영만을 위해 만들어놓은 수영장을 가본 것은 난생처음이었지. 수업시간이 없는 시간대에 와서 그런지, 나와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 옷이 다 젖어도 좋으니, 그냥 여기서 놀아도 된다고. 그러시더라. 수영장에 발만 담그고 있던 나는 그 말에 망설임없이 곧바로 물속으로 들어갔어. 물속에 풍덩 들어가자, 빈 수영장에 울리는 참방거리는 물소리들을 난 아직도 기억해. 내가 들어간 곳은 가장 낮은 높이의 수영장. 대략 90cm 채 되지않은 높이였던 것도 생생히 기억해.



물속에 있자 익숙하듯 밀려오는 편안함.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내 몸. 그리고 그 모습에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 부모님.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내 앞에 생겨나는 선택지들.

그렇게 나는 어릴 때부터 나는 수영으로 많이 촉망을 받게 되었어. 부모님을 포함해 내 주변 사람들은 내게 많은 기대를 걸어왔고, 나 역시 수영이 싫진 않았어. 수영을 시작하면서, 이상한 아이로 지명됐던 나는 어느새 멋진 아이로 바뀌었으니까.



사람들이 베푸는 호의에 적당히 반응해주면 더더욱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니까. 너 이상해.라는 말이 아닌. 너 멋있어.라는 말을 흔하게 들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말과 행동을 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아.

맞아, 이건 분명히 이건 좋은 상황인 건데.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건 너무나 좋은 일인거잖아. 근데 왜 이렇게 공허한 걸까. 잠이 오지 않는 새벽마다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싶은 기분이 드는지. 글쎄. 내가 느끼는 그 감정을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어. 공허함? 외로움? 이걸 풍경으로 표현하자면 비가 약간은 억세게 오는 날, 흐린 색의 물이 불어나고있는 탄천을 나혼자 덩그러니 우산없이 바라보는 느낌이야. 그게 도대체 무슨 느낌이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른다니까. 그냥 대략적인 느낌이 그래.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수영에 더더욱 집착하게 되었어. 바깥의 소리말고 푸른빛 수영장 아래 물살을 가르는 소리만 들리는 게 너무 좋았으니까. 그때만큼은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할 수 있잖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니까. 어쩔 땐 하루 종일 수영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바보 같은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지.

















불꽃에 아무저항없이 힘없이 불타오르는 물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봤어. 결국 다 이렇게 다 타버릴 거. 모든 게 다 사라져버릴 거. 왜 이렇게 다들 아등바등 살아야하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왜 이렇게까지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려고 했었던 거지. 이상한 아이. 그 별명에서 벗어나려고. 그런 말을 듣게 된 부모님의 슬픔으로 일그러진 표정.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 응, 그것 때문이지. 한참 멍하니 잿더미로 변하고 있는 물건들을 응시하는데 저 멀리서 시선이 느껴졌어.








"........"



쟤, 우리 반 아닌가?

나를 본 것 같은 걸로 추정되는 한 여자애가 급하게 내가 있는 곳을 빠져나가고 있는 걸 발견했어. 흑발에, 거의 허리 중반까지 오는 긴 생머리. 그런 사람은 우리 반에 딱 한 사람밖에 없었지. 항상 무표정으로 다녔던 그 아이. 가끔 별명이 귀신이라고 불리는 걸 들어본 것 같기도 했어. 내게 그 아이의 이미지는 딱 거기까지였지. 아마 지금 내 모습을 다 봤겠지? 다 봤으니까 저렇게 급하게 날 피하는 거겠지.




...근데 쟤는 그 이후로 나한테 어떻게 반응하려나?

궁금해졌어.


그래서 그 이후로 그 아이의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를 자꾸만 눈으로 쫓는게 습관이 되버렸어. 하지만 결론적으로 내게 아무런 제스처를 취하지않았지. 그냥 정말 평소와 같았어. 물론 묘하게 나를 피하는 느낌은 들었지만. 원래도 그리 살갑게 인사를 던지던 사이는 아니였기때문에, 표면적으론 별 문제가 없다는 말이야. 그래, 결국 너도 다른 사람과 똑같구나 싶었어. 그런 결론을 내리기 된 이후론 너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갖지않게 되었지. 내게 관심을 둘 그런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자연스레 너와 엮이는 일이 머지않아 또 생기고 말았어.








"너 마니또 누구냐?"

"아직 잘 몰라."

"아무래도 김하루 같은데? 반 얘들끼리 마니또 다 까봤는데 김하루 한 명밖에 안 남아."

"........"



네가 내 마니또라는 말을 듣게 되던 날. 나는 무심코 창가 자리에 앉은 너를 향해 시선을 돌렸어.


너는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활짝 웃고 있었지.

너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날 처음 알았어. 어느 드라마 한 장면처럼 완벽한 타이밍으로, 창가 사이로 들어오는 노을진 주황색 빛이 뒤에서 조명처럼 널 비추니까 기분이 묘해졌어. 뭐야, 저렇게 웃을 줄 알면서 왜 평소에 그러고 다닌 거야. 살짝은 궁금해졌지.


그때부터였어. 단순했던 궁금증이 점차 다른 종류의 궁금증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래도 나는 이게 얼마 가지 않을 호감이라고 결론 내렸어. 어차피 넌 나와 접점을 만들지 않으려고 저렇게 피하고 있으니. 나도 곧 사그라질 호감일 거라고.















졸업식 눈이 오는 날


너는 내게 대뜸 인형고리를 건넸어.


스마트폰 케이스도 아니고, 2G폰 전용 인형고리라니. 받으면서 얼떨떨했지. 빨간 목도리를 목에 두른 채, 고개를 푹 숙이며 하는 말.






"미안해."

"내가 겁이 많아서, 미안."






미안하다고 말하는 너를 찬찬히 바라보았어. 추위로 핏줄이 다 보이는 상태로 벌개진 손이 작게 떨리는게, 살짝살짝 고개를 들어, 내 표정을 보려고 눈치를 보고있는 네가. 흰 눈이 네 긴 흑발 생머리에 살포시 앉아내려 잘 어울러지는 모습을 보니, 참 예뻐보였다고 하면 네가 듣기엔 좀 많이 이상하려나. 네가 미안하다는 그 말 한마디에, 뭐라해야할까. 나는 분명히 사그라질 호감이라 생각했는데. 내 심장박동이 좀 더 빨리 뛰기 시작하더라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


생각해보니까, 네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게된 그 순간부터 내 시선의 끝은 항상 너였어.

너에게 관심이 쏠릴 때면 있지, 마치 내가 수영할 때처럼 내 머릿속 잡 생각들은 깨끗하게 다 사라지더라.




"누군가 알아준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았어"

"........."




응, 이건 아마도 사랑인가봐.

이제야 내 감정을 정확히 깨닫게되었는데 하필 타이밍이 이렇게도 어긋나는 걸까.

감정의 시작과 관계의 끝이 동시에 일어난다는게, 참 웃기지도 않았지.

이래서 사람들이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말하는 건가봐.






























대학을 가서도 내 상황은 그렇게 별반 다르진 않았어. 사람들은 여전히 똑같았어. 내게 호기심을 가지기도 했고, 이유없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지. 하지만 나는 내게 건네주는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조차 너무 버거워 집에 가는 길에는 근처 상가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속을 모두 게워내는게 습관이 되었어. 이제 나는 다른사람들의 호의와 관심들을 잘 받아내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여전히 예전과 같나봐,


그렇게 어느때와 다름없이 술기운이 감돌며 집에 가는 길, 신호등에 맞춰 발걸음을 뗐는데 급하게 우회전을 하던 차와 재수 없게도 사고가 나고 말았어.


시야가 어둑함과 동시에 눈을 감았다 떴더니 내 앞에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보였지. 그러곤 대뜸 내게 하는 말이 나보고 어깨가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대. 내 양쪽 귀에서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서는 흐느끼고 있는 엄마의 울음소리가 뒤엉켜들려오더라. 응, 완전 최악이었어.



내게 수영 말고는 숨을 쉴 구멍조차 없는데 말이야.



그 사고 이후로 내 인생의 모든 것은 동전 뒤집듯이 완전히 뒤엎어져 엉망이었어. 내 인생의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지. 수영이라는 존재가 빠져버린 나는 다시 이상한 아이로 돌아가야만 했으니까. 두 번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던 느낌을 다시 느낄 수 밖에 없을테니까. 절망스러운 마음에 내 눈 앞에 보이는 걸 뭐든지 바닥에 집어던지는데, 내 기억 속에 잊고 있었던 인형 고리가 불쑥 나타나 바닥에 힘없이 툭 떨어지자 나는 그 인형 고리를 꼭 쥐고선 울고 말았어. 아, 내 앞에 서있는 전신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여전히 고등학생이었지.





























"간만이네"


".....어, 오랜만."





사실은 너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그냥 가끔씩 그 인형고리를 볼 때마다 미미하게 너의 존재가 떠올랐을 뿐이지 그 때의 졸업식날 너를 마주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처럼 이렇게 또다시 감정이 커지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아니, 오히려 그 때보다 더 부풀더라. 아, 아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기엔 네가 동창회에 오지않을까 잔뜩 기대를 하고선 처음으로 동창회에 참석한다고 했었지. 미안, 생각해보니 모순이다. 근데 그 때까진 내 스스로도 잘 몰랐어. 너의 예전과 같은 긴 검정 생머리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예전과 다름없는 네 모습에 다시 나는 너무나 당연한 듯이 그 때 그 시절 고등학생의 나로 돌아가게 되더라. 그냥 널 다시 본 순간 내 마음을 제대로 알게됐어. 좀 욕심을 내보고싶다고. 너 옆에만 있음 왠지모르게 수영을 할 때처럼 숨이 좀 트이는 느낌이라고.






네가 수영대신에 내 숨구멍이 되주면 안될까.

라고 너에게 바라면 그건 너무 이기적인걸까.



그냥 사랑까진 안바랄게. 옆에만 있어달라고 하는것도 안되는걸까.



























ㅡ사실은 있잖아, 도운아. 나 고등학교 때 너 좋아했었어.



하늘이 나한테 준 기회일까.

너도 한번쯤은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해보라고 준 그런 기회인걸까.

근데 그렇다하기엔, 네가 나를 좋아했다고 말하기에는 표정이 참 서글퍼보였어. 왜? 왜 그런 표정을 지었던거야?

















ㅡ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우리.



그래도 내 손을 잡고 배시시 웃어주는 네 표정을 보니까, 그냥 이런 결론을 내게 된 것같아.

네 마음이 어떻든 간에, 그냥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무너지지마. 아프지마."






네가 무너지게되면, 나도 무너지게 돼. 라는 말을 애써 삼켰어.

넌 열로 인해 뜨끈한 손으로 내 볼을 감싸며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 도운아. 사람이 어떻게 살면서 한번도 안 무너지고 살겠어.









"원래 다 그러고 사는거야. 한번씩은"


".........."


"그래도 네 앞에선 그런 모습 안 보이도록 노력해볼게."









누가 들으면 참 요상한 대화라고 생각할 거야.

보통 연인과는 힘든 일을 털어내고 기대고 그러는 경우가 과반수일텐데, 나는 오히려 그런 걸 보이지말라고 땡깡부리고 있는 내 말에도 너는 힘없이 침대에 기대어앉아 웃고만 있었어.
























"근데 하루야."

"응?"

"저기 뒤에 너 아는 사람이야?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길래"

"........."




너를 안고 있는 와중에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직감적으로 느껴졌어. 왠지 모르게 분명히 너와 깊게 관련되었을 사람이라고. 왜냐고? 잔뜩 상처받은 눈으로 너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넌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져있었으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 남자의 한 손에는 뭐가 잔뜩 담긴 흰 봉지를 들고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냅다 길에 던지고 다른 방향으로 틀어서 떠나갔어. 흰 봉투에 튀어나온 내용물들을 얼핏 보니 연고 같은 게 보였지. 연고? 갑자기 연고는 왜.





"....잠만, 하루야 이마에 멍은 왜 그래?"

"아. 실수로 문에 부딪쳐서."

"........"

"왜?"

"아냐. 가자, 냉찜질이라도 하게."


네가 흰 봉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나는 애써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게 하며 그곳에서 도망치듯 네 어깨를 감싸며 자리를 떠났어.




ㅡ도운아 사랑해.

"........."

ㅡ사랑해, 사랑해.



갑작스러운 사랑고백을 너무나 서럽게 울면서 했던 너의 전화.




"왜 내가 좋아?"

"네가 나한테 주는 감정만큼 내가 돌려주지 못하는데."



내가 너에게 주는 사랑을 벅차해하는 걸 나에게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것들이.

아, 그제서야 대충 퍼즐이 맞춰지더라. 나한테 마음이 별로 없는 건 둘째치고, 왜 항상 내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자주 했던 너였는지.


그래, 사실 내가 너를 안을 때 너는 내 허리를 꽉 안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 너한테 사랑한다 한마디 하면 반박자 늦게 돌아온다는 것도 알아.


그래도 괜찮아. 내가 다 괜찮아.

네 마음 애써 부정하면서 끌고 가는 것도 내 욕심이고. 내 잘못이니. 너도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돌아갈 수 있어. 괜찮아. 그냥 나한테 대놓고 보여주지만 말아줘.








ㅡ비겁한 성격이라, 도망치는 것도 잘해. 예전에도 그랬듯이.

ㅡ그것도 상관없어.

ㅡ너 진짜 호구구나.

ㅡ원래 사랑이 그러라고 있는 거 아니야?




이게 내 사랑의 방식인 걸 어쩌겠어.

이게 내가 너에게 유일하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방법인데 어떡하겠어.





























중간고사가 끝났다.

중간고사가 끝난 기념으로 나는 과 동기들과 함께 고깃집으로 향했다. 여기 물 좀 더 주세요. 밥 한 공기 추가요. 쉴 새 없이 여기저기 띵동거리는 주문 벨소리에 알바가 참 힘들겠다란 생각을 잠깐 했다. 왼손을 쫙 펼쳐보니 커플링이 조명에 비추어 참 예쁘게도 빛나고 있었다.



그때, 동아리 회식 이후로 영현을 우연히라도 마주치기가 정말 힘들어졌다.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마주쳤더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영현을 붙잡고 그때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싶었을 테니까. 그래, 다행이야.





근데 나, 지금 이게 잘하고 있는 걸까?

테이블 위에는 오늘 내가 새로 산 향수가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로 놓여있었다. 향수를 산 이유는 술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때 등등, 그때마다 냄새를 가려줄 수 있게 되니까. 후각이 예민한 도운이에게 조금이라도 괜찮을 수 있게. 그거라도 내가 신경을 써야. 그래야 내 죄책감이 덜할 테니까. 근데 그렇게 애쓰면 애쓸 수록 자꾸만 도운이의 얼굴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해져. 밀어내는데, 자꾸만 그 사람이 내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와. 마지막으로 내게 보인 그 표정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처받고 뒤돌아선 그 모습이 자꾸만 가슴을 아리게 만들어.





"...미안해"

"뭘? 누구한테?"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내 앞에서 말없이 폰만 만지고 있던 동기가 그걸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탓에 나는 대충 무시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게. 도대체 누구한테 미안한 걸까. 도운이에게? 영현 선배에게? 아님 둘 다?


내가 너에 대한 감정을 반 박자라도 빨리 알아차렸다면, 뭔가 달라지기라도 할까? 아니.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아. 어차피 넌 좋아하는 사람이 있던 상태였으니까. 응.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하더라도 바뀌는 건 하나도 없어. 그니까 그만 생각해. 미련 버려. 그 사람은 원래 잘 웃어주는 사람이야. 원래 다정한 사람이야. 원래







ㅡ그래 맞아 난 사람한테 미움받는 게 무서워




차라리 나한테 그런 모습 보이지 말던가.
끝까지 완벽한 모습을 나한테 보이던가. 왜 내게 그런 모습을 보인 건데. 괜히 착각하게 되잖아. 꼭 나한테만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만 같은 착각을 들게 만들어




ㅡ그렇게 반응해주는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혹시 너도 그랬던 걸까. 도운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한 번쯤은 티를 냈던 거고, 내가 너를 알아차린 만큼 너에게 어떤 행동해주길 바랐던 걸까.









아, 술에 취하니 모든 세상이 꼭 너 같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널 닮아 보이는 것 같아. 저기 혼자 쓸쓸히 서있는 전봇대마저 널 닮은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전봇대를 꼭 끌어안았나 봐. 다른 사람이 봤다면 그저 술 취한 사람의 주정밖에 보일 뿐이겠지.






ㅡ아프지 마. 무너지지 마.




무너지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나는 자꾸만 무거워지는 머리를 똑바로 하려고 애썼어.




이번엔, 벚꽃나무 아래에 내 손을 잡았던 네 모습이 생각이 나. 흔들리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부탁했던 네 말이. 그 말속에 자꾸만 외면하려고 해도 들렸거든.



나 좀 살려달라고.



근데 있지, 내가 네게 어떻게 무언갈 해줄 수가 있겠어. 지금 나 자신도 이렇게 휘둘리는데, 어떻게 내가 너를 살려줄 수 있겠어. 맞아. 나 겁쟁이인 거. 나쁜 년인거. 근데 어떡해. 네가 나를 부르게 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뒤로 한 채로 너한테 달려갈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도운이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안되는 건데 왜 나는, 너를 다시 마주하게 되면 그런 다짐이 또다시 무너지게 되는 걸까.
교양수업이 끝난 후, 잠깐 학교 카페에 가기 위해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제형은 내게 말없이 담뱃갑을 흔들어댔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 흡연부스에 제형과 함께 들어갔다.







"아, 쟤가 이서현인가."
"......."





여기저기 얼룩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형이 말했다. 시선을 따라 옮기자, 나는 이서현이라는 그 여자보다는 그 사람 앞에 서있는 영현에게 시선이 쏠렸다. 정말 간만에 보는 영현이다. 그새 더 살이 빠진 영현은 그 여자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함께 웃으며 떠들고있는 모습부터, 잘 가라며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말없이 쭉 지켜본 나는 입술을 깨물며 짧아진 담배를 지져 껐다. 이런 네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수도 없이 많이 봐왔는데도 왜 이렇게 구역질이 나오려고 하는 걸까. 질투? 아님, 미움받기 싫어서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 같은네 모습에 대한 동정 때문에? 뭔지는 잘 모르겠어.






"야, 다리."
"......."




나도 모르게 다리를 빠른 속도로 덜덜 떨었나 보다. 제형이 내 무릎을 살짝 쥐었다 떼며 그런 나를 제지해줬다. 그냥 확실한 건, 내 기분이 존나 최악이라는 거야. 그리고, 그런 네 모습을 내가 빈틈없이 안아주고 싶다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진다는 거야. 도대체 어디까지 구질구질 해질 건데.






"......?"



근데 계속 가만 보고 있자니 영현이 걷는 폼새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그 여자가 떠나고 나서도 가만히 그 자리에만 서있던 영현도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아니, 저 사람이 원래 저렇게 균형을 잘 못 잡던 사람인가? 선배. 잠깐 영현 선배 좀 봐봐요. 왜.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뭐를"
"뭔가 곧 쓰러질 사람 같ㅇ.... 선배!!"
"미친, 야 강영현!!!"






갑작스럽게 온몸의 힘이 다 빠진 듯이 스르륵 쓰러지는 영현의 모습에 나는 곧바로 부스 문을 열고 영현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큰 돌덩이가 내 가슴팍을 세게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강영현이 왜 쓰러져. 왜 무너져.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영현의 어깨를 흔들며 영현의 이름을 쉼 없이 불렀다. 자꾸만 눈 앞이 흐려졌다. 선배. 영현 선배. 영현아 정신 좀 차려봐.






"너 지금 미쳤어? 제정신이야? 함부로 막 어깨 흔들지 마."
"......."
"정신 차려."




제형은 내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영현은 어깨를 흔들고있던 내 손을 거칠게 뗐다. 얼른 구급차나 불러. 내 어깨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선 차분하게 말하는 제형 덕분에, 약간 정신이 든 나는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냈다. 119 번호가 뭐였지. 뭐였죠 선배? 나 기억이 안 나. 119가 119지 뭐겠냐. 아 맞다, 119... 여보세요?


























"........."
"야"
"감사합니다.."




이온음료 캔을 건넨 제형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따지 않은 채로 손톱 끝으로만 캔을 톡톡 쳤다. 따줘? 아, 아뇨. 나중에 마실게요.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큰 병은 아니고, 과로로 쓰러진 거래."
"........"
"쯧. 미련한 놈"
"........"
"영현이 아직 안 깼는데, 네가 좀 가볼래?"
"제가요?"
"가고 싶어 하잖아."
"........"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내가 끼고 있던 커플링에 시선을 향했다. 반지를 볼 때마다, 무너지지 말라며 말하는 도운이가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릴 때 형광등에 반짝이던 반지가, 내 눈앞에 자꾸만 겹쳐 보였다.




"아뇨 전.."
"....."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끼고 있던 반지만 만지작거리자, 나와 똑같은 이온음료를 마시고있던 제형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내가 끼고 있던 반지를 뺏어버렸다.



"뭐 해요, 주세요"
"걔 얼굴 보고 오면 돌려줄게. 갔다 와."
"......."
"이런 명분이 생겨야만 움직일 거잖아 너. 지금 만들어줄 테니까, 보고 가라고."





내 반지를 자신의 오른손에 가두며 꾹 주먹 쥐는 제형을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영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냥 마음이 조급해졌다.






















"..........."
"..........."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그 사이에 깬 건지 영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표정 없이 조용히 숨만 색색 고르고 있었다. 힘없이 누워있는 영현을 보고 있자 자동적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울고그래. 영현은 다 갈라진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과로로 쓰러진 거예요"
"..........."
"언제는 남는 게 체력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왜 등신같이 쓰러지는 건데"
"넌, 내가...."
"........"
"불쌍해 보여?"
"네, 존나게요."




그러자 소리 없이 영현이 웃었다. 헛웃음 같아 보이기도 했고, 하여튼 여러 감정이 섞여든 웃음이었다.





"이럴 거면 자주 아플까 봐."
"미쳤어요?"
"이래야 날 봐주잖아 네가."
"......."





힘겹게 팔을 들어 내 손을 조심스레 잡는 영현에, 나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울지 마. 나 괜찮아.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 희미하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눈가를 닦는 영현이 너무 바보 같아 보였다. 여전히 잡고 있던 내 손을 이번에도 네 번째 손가락을 엄지로 살살 매만졌다. 그러자, 지금 내 손에 커플링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나는 곧바로 반사적으로 손을 뺐다. 아니, 이건. 그. 잘못하면 오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을 어떻게라도 해줘야 하는데.






"하루야."
"........"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로."
"....선배."
"이제 그만 네 남자친구한테로 가."





사실, 네가 오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버렸나 보다. 너의 그 말에 힘이 빠지는 걸 보면. 근데 있잖아, 나 괜찮아. 하고 웃는데. 그 누가 그런 모습을 보고 미련 없이 뒤돌 수 있겠어. 누가 봐도 다 무너진 모습을 하고 괜찮다고 등을 떠미는데.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보고 왔어?"
"네."



내게 다시 커플링을 돌려주는 제형에, 나는 곧바로 다시 반지를 끼지 않고,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려고 전원버튼을 누른 핸드폰 잠금화면에밥 먹었어?라고 묻는 도운의 카톡이 보이자 나는 곧바로 다시 전원 버튼을 눌렀다. 눈 화장이 번지든 말든 마른 세수를 거칠게 했다. 진짜 최악. 존나 최악. 등신 같아. 어떻게 이리 한심하냐 나.





"답은 나온 것 같은데, 실행이 문제겠지."
"........"
"기회는 지금뿐일 수도 있어. 잘 선택해."
"그러면 제 남자친구가 너무 불쌍한 거잖아요."
"........."
"가뜩이나 내가 사랑 못 주는 거 알면서도 모든 걸 다 퍼주는 얘인데 그걸 아예 내쳐버리면. 그건 더 아닌 거잖아."
"그럼, 지금 네가 이러고 있는 건 정상적이라고 생각해? 어쭙잖은 동정으로 이렇게 너덜너덜 끌고 갈 거면 차라리 빨리 끊는 게 나아."
"그리고 저 사람이 날 좋아하는 지도 모르는데."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네, 너."
".........."




야 그리고 안 마실거면 그냥 내가 마실게. 제형은 내가 멀뚱히 계속 들고만 있던 캔이 거슬렸는지, 손바닥을 펼쳐 자신쪽으로 펄럭였다. 아니, 줬다 뺐는게 어딨어요. 여깄음.





"........."





이온름료를 2캔이나 마셔서 방광이 터질 것같다고, 잠깐 화장실간다는 제형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꿀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정수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리셋버튼이 있다면 망설임없이 누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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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 작가님ㅠㅠㅠㅠㅠ진짜 깜짝 놀랐습니다ㅠㅠ
•••답글
독자2
읽고 나서 댓글 씁니다ㅠㅠ 영현이 쓰러져서 진짜 놀랐어요.... 도운이랑 영현이 모두 행복했음 좋겠습니다ㅠㅠ
•••
비회원21.140
뜻밖의정주행.. 좋은데여.. 뭔가 읽을때 텀이 있어서그런지 가짜 연애랑 동해바다 사이 기간이 길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보니까 생각보다 짧고,. 도운이랑 오래사겻고.. 아직도 영현 조아하면 이거는...🥺
ㅜㅜ 근데 왜 쓰러져 진심 놀랐어여.. ㅇㅏ푸지마..
ㅎㅏ.. 도운이한테는 진짜 미안함밖에없는거같아여.. 너 제형 여자버전이라며 그거 도운이한테도 해봐ㅠ 진짜 얘네 어떡해요 이셋?!?!??!!?!?!?! 어떡해🤦🏻‍♀️ 저 과몰입녀됐음 또🤦🏻‍♀️🤦🏻‍♀️🤦🏻‍♀️🤦🏻‍♀️🤦🏻‍♀️
너무.. 재밋어여 작가님.. 어떡해요..얘네어떡해..

•••답글
비회원145.196
진짜 작가님 ㅜㅜㅜㅜㅜㅜㅜ 진짜 울어요 이거 찐이야... 작가님 건강하시구 행복하세욤 ㅜ3ㅜ ♥
•••답글
독자3
이렇게 다시 쭉 보니까ㅜㅜ 더 짠하고 마음아프고... 하루야 얼른 도운이랑 끝내자ㅜㅜ.... 도운이도 그래야 덜 힘들거야ㅠㅠㅠ 작가님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해요
•••답글
독자4
숲으로보니 푸른게 보이는거같아요! 아 이때 그렇게생각헤서 그랬구나 이래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쉽게 이해되면서 읽었네요.이런 한편 조심스럽게 말씀드려보는 부분이 이게 혹시나 작가님께 부담스러운일이였을까 조금 걱정되네요ㅠㅠ분명히 생각해두신 틀이있을텐데 그다음내용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해가 될부분인데, 조금만더 앞내용을 생각하면 이해될텐데 이부분을 고민하시다 내리신 결정하신걸수도있겠구나 생각이드네요ㅠㅠ혹시 그랬다면 먼저 진심으로 죄송하다 말씀드리고싶네요..ㅠㅠ

새로운화를 보니 절정으로 가고있네요!! 전에 롤러코스터 하강직전의 기분이 든다 적은적있는데,오늘은 마지막 하강트랙으로 가는구나 생각이들었어요! 향수처럼 그냥 자기자신을 드러내지못했을뿐인데 단지 그뿐인데 막상 주어진상황은 얽힌실타래여서 복잡할 하루의 마음을 여실히 느꼈어요!! 처음부터 읽어서 그감정이 하루단위로 남은채 바로 느껴서 그런것도있는거같아요!작가님이 말하시고자했던 어느순간 스며들어있는 감정을 여실히 느끼네요.

새삼 이렇게 잘 흡수되어 나 자체로 스며들게해준작품을 써주심에 우독 감사하네요.쓰신작품하나하나 사랑하는데 처음으로1화때부터 달려와서그런가 더더욱더 애착이가는거같아요.이 모든건 작가님의 보이지않지만 그보다더 신중했던 설계와 노력임에 감사인사를하고싶습니다!! 그럼, 오늘도 잘읽었습니다!❤️

•••답글
독자5
도운이랑은 다른 글에서 행복하고 여기선 영현이랑 행복해야겠네요ㅠㅠㅠ다 말하면 도운이는 또 알았다면서 다 이해해 줄 것 같아서 더 슬프네요ㅠㅠ
•••답글
비회원151.223
작가님 부탁이 있어요 ㅠㅠㅠㅠ 글이 너무너무 좋아서 그런데 따로 이렇게 모아놓은 단행본을 파일로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두고두고 읽고파요 흥미롭고 지루하지 않은 글을 야금야금 곱씹는 게 너무 즐거워요.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리고 힘드시다면 여기서만 봐도 괜찮으니 답장 혹시나 가능하시다면 답변이 듣고싶어요..!
•••답글
독자6
와... 정말 마음 뒤숭숭하면서 읽었어요 도운이가 너무 안쓰럽기도 하고 ㅠㅠ 근데 도운이 생각하다 보면 마음 한 켠에 속상한 눈빛하고 있는 여우가 얹혀있고..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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