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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변백현] 아라홍련전 (阿羅紅蓮傳) 03 | 인스티즈



아라홍련전 (阿羅紅蓮傳)

03















별 하나 뜨지 않은 조용한 밤이었다. 홍련은 달빛에 의존하여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달이 구름에 가려 세상이 더욱 고요해질 때즈음, 홍련은 제 앞에 펼쳐진 멍석을 발견했다. 재주자리에 쓰이는 흔한 멍석이었다. 익숙하게 그 위에 서자 비로소 보이지 않았던 주위의 것들이 보였다. 각지를 오가며 홍련의 다리가 되어주던, 홍련이 가장 아끼던 말이 무언가에 자상을 입은 듯 피를 흘리며 누워있었고, 홍련의 주변을 감싼 갈대에 다갈색 혈흔이 보였다. 곳곳에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쓴 자들이 맥없이 누워있었는데, 홍련은 그들의 옷차림을 보고 화향단의 향인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홍련이 손을 떨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의 하얀 가면을 벗겼다. 홍련이 아버지라 부르며 잘 따르던 화향단의 단장이었다. 홍련은 눈을 채 감지도 못한 채 차갑게 식어버린 몸뚱아리를 흔들었다. 구슬 같은 눈물이 그의 얼굴을 적시고, 곧 홍련은 미친듯이 기어다니며 주변인들의 가면을 벗겼다. 종종 홍련의 몫을 뜯어갔으나, 심성만은 나쁘지 않았던 홍이, 홍련이 화향단에 처음 입단했을 때 어머니처럼 홍련의 머리를 빗어주던 사향, 난매만큼이나 홍련에게 말동무가 되어주던 영해, 글자를 읽지 못하던 홍련에게 몇달이고, 몇년이고 글자를 가르쳐주던 왕개, 수없이도 많은 자들의, 홍련의 가족들의 죽음이었다.

그들의 피를 잔뜩 묻힌 홍련이 시신 사이에서 얼굴을 가리며 소리내어 흐느꼈다. 끔찍한 일이었다. 그들의 지난 일생을 떠올리느라 홍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순간 누군가의 신음 섞인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눈물로 얼룩진 홍련의 얼굴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스스로 가면을 벗어낸 그는 종인이었다. 홍련이 넘어지듯 달려갔다.





"종인아, 종인아! 정신이 들어?"





종인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홍련이 종인의 얼굴을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피를 토해내며 연신 쿨럭거리던 종인이 자상을 입은 배를 한번, 홍련의 얼룩진 얼굴을 한번 응시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홍련의 얼굴을 보는 종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너... 너..."

"뭐?"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뻐끔거리는 종인의 모습에 홍련이 눈물을 닦으며 귀를 기울였다. 종인의 목소리가 홍련에게 닿을 정도로 크진 않았던 탓에, 홍련을 허리를 더욱 숙였다. 그제서야 종인의 말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너 때문이야... 네 탓이야..."





홍련은 화들짝 놀라며 종인에게로 숙인 몸을 들어올렸다. 종인의 눈빛이 증오와 두려움을 가득 찼다. 홍련을 향한 것이었다.

종인의 원망스런 목소리가 홍련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혹스러워하는 홍련의 눈 앞에서 종인은 피를 토해내며 홍련을 응시한 채 숨을 거두었다. 종인의 몸을 만지려던 홍련의 손에 무언가 쥐어져 있었다. 홍련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녀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고, 칼에 찔린 종인의 배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홍련의 손이 수인의 혈흔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눈물을 눈에 걸친 채, 홍련은 칼을 쥔 손을 놓았다.

쑥대밭의 근원은 다름 아닌 홍련이었다.





"안 돼...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아니야..."





홍련은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홍련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무릎을 끌어당겨 안았다. 가족의 죽음이, 종인의 원망이, 제 손에 쥐어져 있던 칼이 홍련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맴돌았다. 홍련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아주 긴 밤이었다.









"잠행을 나가셨다 들었습니다."

"오자마자 잔소리냐."





경수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 걸맞게 황제는 쓴소리를 귀담아듣는 편이었다. 그 속에 담긴 수많은 걱정과 수많은 애정을 말하지 않아도 황제는 헤아릴 수 있었다. 형제의 우애였고, 군신의 충애였다.

금방이라도 가감없는 쓴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작은 입술을 황제는 뚫어져라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폐하, 태호 어르신께서 아시는 날엔 정말 큰일입니다."

"...내 장인 말이더냐."





이전까진 장난기 가득하던 백현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고개를 숙여 충언을 하던 경수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백현의 낯을 살폈다.

백현은 제 장인을 두려워했다. 사사건건 황제의 위에 있는 사람처럼 굴어대는 장인을 꺾어내고 싶어 했고, 장인이 끔찍해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별을 따는 일이라 하더라도 해낼 수 있는 만큼 백현은 장인을 증오하기도 했다.

경수는 그런 백현의 마음까지 건드리고 싶진 않았으나, 청제의 측근인 태호의 심기를 건드려선 백현도, 백현의 나라도 무사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경수는 늘 백현에게 말한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고. 마음을 갖되, 표현하지 말라고.

어두운 표정은 백현의 최선이었다. 누가 들을까, 누가 백현의 곁에서 태호의 간자짓을 할까 싶어 백현은 경수의 말처럼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폐하."

"..."





경수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백현을 불렀다. 백현의 침묵에 묵묵히 백현의 옆에서 귀를 기울이던 세훈마저 고개를 들어 백현의 낯빛을 살폈다.





"경수야."

"예, 폐하."

"내가 어제 어떤 여인을 만났다."

"잠행을 나가셔서 여인을 만나고 오셨습니까?"





경수가 언성을 높였다. 경수의 목소리는 황제인 백현이 인정할 정도로 늘 근엄하고, 진지했으니 경수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두말할 것이 없었다. 휘둥그레진 경수의 눈을 힐끗 본 백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곱더구나."

"폐하의 존재를 들키신 건 아니겠지요?"

"...내가 똑같은 실수를 할 뻔했다."

"..."

"7년 전 말이다."





경수와 세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직접적으로 백현이 7년 전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경수는 만약 백현이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그것은 청국으로부터 황국을 되찾고 백현에게 영원한 베필이 생겨 그때의 상처가 모두 아물었을 때리라 생각했다. 그런 백현이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상처를 벌리고 있었다. 얼굴을 붉혀가면서.





"고작 여인따위에 나라를 팔아버린 내가..."

"..."

"내가 또 그따위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

"그까짓 아름다움이 뭐라고... 까짓 게 뭐라고..."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 새도 없이 백현은 수도 없이 자책했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으나 온몸으로 울어댔고 두려워했다.

여전히 그날은 백현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머물러 있었고, 그 속에서 백현은 어린아이였다.





"가벼운 사내로 태어난 것이 참 원망스럽구나."









7년 전, 백현 나이 18세.

백현은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 자신의 명희를 가졌다. 황후가 아닌 명희의 간택에 대신들은 갖은 힘을 쏟지 않았고, 당시 선대 황제의 죽음에만 몰두해있던 백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명희의 최종 간택은 주로 황제의 결정에 의했지만 백현은 도무지 관심이 없었으니 궁 최고 실세인 김가(金家) 태호가 간택을 맡았다. 태호는 차후에 황후가 될 제 어린 여식의 곁을 보필하며 황후의 선을 넘지 않을 명희가 필요했다. 그러기에 주제를 모르는 신분이 천한 것들은 명희가 될 수 없었고, 황국의 수도에 든든한 외척을 가진 양반의 여식들도 명희가 될 수 없었다.

그러자 하나가 남았다. 태호는 그녀를 명희로 간택했다.





"폐하, 폐하를 위한 명희가 간택되었습니다."





갓 아버지를 잃은 황제는 새 명희에 대해 시큰둥했다. 오히려 여인에게 심술궂은 장난을 칠 나이였으니, 명희는 황제의 다정함은 꿈도 꾸질 못했다.

황제의 여인이라고는 하나, 금과 은을 좋아하기엔 너무 어려 부귀영화엔 도무지 관심이 없었고, 그렇다고 사내에게 매달릴 정도의 간절함도 없었으니 명희는 그저 궁에 사는 여인과 다름없었다. 궁인들은 그녀를 그녀의 이름인 '애월'이 아닌 '애절'이라 장난삼아 부르곤 했으니 명희의 자리를 탐내는 여인들은 바보 같다 놀림받기 일쑤였다.

명희가 황제와 가까워진 것은 명희로 간택된 지 6월이 지날 무렵이었다.

늘 그렇듯 황제와 멀리 떨어진 궁에서 애월은 황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라던 진달래를 구경했다. 궁에는 진달래가 아주 많아 진달래를 따라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멀리, 저 멀리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는데, 그날이 그랬다.

진달래를 따라 길을 걷는 데 여념이 없었던 애월은 크고 맑은 연못을 발견했다. 푸른 잎과 이름 모를 하얀 꽃이 넓게 펼쳐져 있어 장관이었다. 궁에는 명희가 닿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처음 본 경관이었으나 닿지 못할 곳이 없던 애월은 연못 주위를 걸었다. 주위를 걷다, 또 걷다, 또 걷다 보니 황금색의 도포를 입은 익숙한 형상이 연못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황제였다.





"폐하, 무얼 그리 구경하십니까?"

"아, 깜짝이야!"





인기척을 내지 않은 애월의 걸음에 화들짝 놀란 황제가 쥐고 있던 돌을 떨어뜨렸다. 동시에 와르르 무너지는 작은 돌들이 애월의 눈에 들어왔다.





"돌을 쌓고 계셨습니까?"

"너는 왔으면 왔다 인기척이라도 내야 할 것 아니냐!"

"놀라셨다면 송구합니다, 폐하."





13세인 백현에 비해 두 해나 일찍 태어난 애월은 고작 15세였으나 제법 어른스러웠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노는 것처럼, 화를 내는 백현을 타일렀다.

어린 황제는 씩씩거리며 떨어진 돌을 야무지게 쥐었다. 애월이 백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 하시면 곧 무너질 텐데요."

"네가 뭘 안다고.."





애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현이 마구잡이로 쌓은 돌이 와르르 무너졌다. 부끄러운 백현이 괜히 애월의 탓을 했다.





"네가 와서 그런 것 아니냐! 네가 없었을 땐 잘만 됐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공들여 쌓아야 무너지지 않지 않겠습니까?"





애월이 돌을 쥔 백현의 손에 제 하얀 손을 겹쳤다. 단단한 탑을 쌓듯 평평한 돌을 깔아 천천히 하나씩 모난 돌을 쌓아올려갔다.

백현은 처음으로 여인의 곁에서 숨을 멈추었다. 닿은 손이 전기가 통한 듯 찌릿거렸고, 가까운 숨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천천히 마지막 돌을 쌓자 애월이 백현의 손을 놓았다. 백현이 얼굴을 돌려 애월의 하얀 얼굴을 마주했다. 그날 애월의 환한 웃음을 백현은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애월은 백현의 첫사랑이었다.

애월은 어린 나이에 정사를 논하느라 늘 피로한 백현에게 단잠을 선사해주었고, 선대 황제의 죽음을 잊지 못해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백현에게 대나무숲이 되어주었다. 늘 좋은 말만, 예쁜 말만 해주었으니 백현이 애월과 사랑에 빠지고, 애월이 황제의 여인이 된 것은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애월은 역대 명희 중에서도 황제에게 헌신적이었고, 갖은 보석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궁인들과 백성들은 명희가 황국을 생각하는 황후의 마음을 지녔다고 입을 모아 떠들어댔다.

백현이 18세가 되던 해에 청제를 필두로 한 청국의 군사들이 황국의 문턱을 넘으려 했다. 영문 모를 서신을 가지고.





"폐하, 어찌 된 일입니까. 황국이 청국의 속국이 되다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황국과 청국이 동맹을 맺어온 지가 백 년이 넘어갑니다!"

"폐하,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하루아침에 황국이 청국의 속국이 되어있었다.

황국과 청국은 백현의 고조 할아버지 적부터, 혹은 훨씬 오래 전부터 동맹을 맺어왔다. 대대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황국과 다르게 욕심이 많은 청국은 전쟁으로 영토를 넓혀왔고, 그 덕에 민심이 어그러지는 일이 잦았고 주변국의 원망을 사는 일도 잦았다. 청국이 황국과의 동맹을 백 년이나 지킨 것만으로도 아주 놀라운 일인 것이다.

황국의 영토를 노리는 청국의 태세가 심상치 않았다. 전쟁선포도, 협박도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황국이 스스로 청국의 속국을 자처하는 서신이 청제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이를 빌미로 청국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속이 뒤집히는 것은 어린 황제였다. 백현은 그런 일을 한 기억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청제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틀림없습니다."

"폐하의 인장이 찍혀있습니다! 폐하가 아니면 누가 그것을 감히 찍었단 말입니까!"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선대 황제께서 청제께 가축과 곡식을 약속하며 동맹을 재결의하셨습니다. 십 년도 흐르지 않은 일인데...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의 백현이 감당할 수 있는 원성이 아니었다. 백현에게 글과 정사를 가르치던 백현의 스승인 황효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몸을 떠는 백현을 위해 주위를 물렀다. 원성이 대단했지만 선대 황제 때에도 언제나 해결책을 물고 오는 책사 황효에게 딴지를 거는 대신은 없었다. 다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태호는 황효의 눈치를 살폈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황효가 입을 열었다.





"전염병으로 청국의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주변국들의 동맹으로 청국엔 비옥한 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청국이 황국과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만든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속국이 되어 더 많은 곡식과 비옥한 땅과 백성들을 바치길 바라는 겁니다."

"스승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황제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폐하, 황제의 인장이었습니다. 누군가 황제의 인장을 찍은 것입니다."





백현의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누가 그런 짓을...」중얼거리며 머리를 짚던 백현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무언가 떠오른 듯 백현이 초조해하며 떨던 다리를, 연신 이마를 쓸던 손을 멈추었다. 눈물이 한방울씩, 백현의 볼을 훑고 지나갔다.





"월이는... 어디 있느냐..."





백현의 곁을 묵묵히 지키던 세훈이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벗어났다.





"폐하, 명희가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라 하더라도 청제는 까마귀 같은 사람이라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면 그들에게 번거로운 일이긴 하나 황국이 그들의 군사력을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황국이 청국의 속국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수많은 백성들이 죽을 것입니다."

"..."

"황제께서도 그렇게 되실 것입니다."

"...속국이 되기보다 내가 죽는 것이 나에게 더 편한 일이 아닙니까."

"폐하께 불편한 일을 택하시라 충언드리는 것입니다."





평생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야 할 것이다. 고작 18세의 나이의 백현은 자신의 생사를, 한 나라의 생사를 걱정해야 했다.

눈을 감은 백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눈물자욱이 지워지기도 전에 백현은 몸을 일으켰다. 백현의 스승인 황효와 형제인 경수가 뒤를 따랐다. 그 뒤를 수많은 대신들이 따랐다.

어느새 황국의 최전선을 건너, 영토를 밟아, 황궁의 문 앞까지 달려온 늙은 청제는 어린 황제를 내려다 보았다.





"황국의 황제는 청국의 청제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라."





청제는 어린 황제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청제의 주변으로 기수들이 쥔 파란색 천에 새까만 까마귀가 그려진 깃발이 보였다. 백현은 황국의 전설을 떠올렸다. 까마귀를 조심해야 했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전날 비가 온 탓에 황색 도포에 물기 가득한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무릎을 꿇을 때보다도 천천히 진흙에 손을 올린 백현이 그보다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허리를 숙이고 있는 대신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백성들이 곡소리를 내었다. 백현의 귀에 꽂히듯 들려온 것이 그들의 곡소리가 커서인지, 백현의 죄책감 때문인지 백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숙인 이마를 진흙에 쳐박자 수치심이 몰려왔고, 울분이 터졌으며, 억울함이 밀려왔다. 까마귀를 조심해야 했다.

청제는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고는 곧 말을 돌렸다. 이를 뒤따른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한참을 진흙 속에 이마를 쳐박고 있는 백현을 일으켜세운 것은 황효와 경수였다. 휘청거리는 백현의 몸을 단단히 쥔 경수와 황효의 뒤로 세훈이 달려나왔다. 애월에 대한 정보를 꺼내려던 세훈이 걸음을 멈춰세우고는 당황한 듯 백현의 앞을 응시했다.

곡소리를 내는 대신들 탓에 두통이 가시질 않은 백현이 잔뜩 풀린 눈으로 세훈이 응시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월아..."





황궁의 차림새와는 퍽 다른 차림새를 한 애월이 말을 타고 백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전의 다정했던 눈빛을 말끔히 지워버린 듯 냉기가 감도는 그녀의 모습에 백현의 숨이 멈추었다. 백현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괴로워하는 그 모양에도 애월은 끝까지 백현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며 말을 돌려 청국의 군사들을 뒤따랐다.

애월의 파란 등에 검은색 까마귀가 새겨져 있었다. 백현은 까마귀를 조심해야 했다.





"월아... 월아 어디 가느냐... 월아! 월아!!!"





고작 백현의 나이 18세였다.









홍련은 그날 이후로 밤만 되면 장수천을 찾았다. 어두웠으나 그날 만난 백현의 얼굴이 퍽 귀엽기도 했으나 장수천에 올 때만큼은 명희로 간택되어야 한다는 집념도, 종인과 난매를 향한 죄책감도 조금을 떨쳐낼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날의 첫만남 이후로 백현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겨우 한 번 만난 사내에게 정을 줄 정도로 홍련은 곱게 자라지 않았으나, 습관적으로 장수천을 오가면서 기억 한 켠에 아주 작은 공간을 백현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백현의 슬픈 낯빛을 보면 여전히 외면할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홍련이 홀로 밤새 장수천을 거닌 지 나흘이 되었을 즈음, 백현이 장수천 앞에 서있었다.





"이리 보니 반갑습니다."

"오지 말라 하였는데, 자주 왔나 보구나."

"저는 자주 왔는데, 나으리께선 통 모습을 안 보여주셨습니다."





백현의 낯빛이 어두운 것을 홍련은 진즉 알았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

백현은 홍련과 말다툼을 할 기운도 없는 듯 홍련의 말에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백현은 지난 밤 악몽을 꾸었다. 7년 전 그날 이후로 종종 끔찍한 밤을 보내곤 했지만 애월이 꿈에 나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 덕에 하루종일 정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차라리 장수천에서 조금 산책이나 하면 마음이 나아질까 해서 걸음한 것인데, 애월의 기억이 더욱 또렷해졌다.

홍련은 생각의 늪에 잠긴 듯 아무 말 않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백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황제폐하를 뵌 적이 있으십니까?"





무의식적으로 홍련의 손길을 피한 백현이 그제서야 홍련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백현이 좋아하는 진달래 만큼이나.





"있으면 왜."





백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홍련과 마주한 시선을 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폐하께서는 호랑이를 닮으셨다 들었습니다."

"..."

"황갈색 눈을 가지셨다 들었는데..."

"..."

"나으리 눈도 황갈색입니다."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는 듯한 제 모습에 백현이 정신을 차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홍련의 개구진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농입니다."

"무슨 농을..."

"무슨 일이 있으신 듯하여 감히 제가 나으리의 걱정을 떨쳐내고자 하였습니다."





백현이 그제서야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백현의 가까이에 선 홍련이 연못에 비친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듯, 손장난을 치는 홍련을, 백현은 넋이 나간 듯 쳐다보았다. 둥그런 이마부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턱끝까지, 어느 하나 아름다운 것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에 백현이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네 이름이 무어냐."

"사람들은 저를 홍련이라 부릅니다."

"예쁜 이름이구나."

"헌데, 나으리껜 특별히 이름을 알려드리려 합니다."

"..."

"여주입니다. 제 이름."





홍련이 제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환하게 웃는 홍련의 얼굴 뒤로 달빛이 내렸다. 백현이 다시금 넋을 잃은 모양으로 홍련의 이름을 읊었다.





"여주..."





누군가 제 이름을 불러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홍련은 시선을 떼지 않는 백현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달빛이 비치니 정말로 그의 눈동자가 황갈색으로 빛나는 듯도 하였다.

홍련이 먼저 시선을 피하자 백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곧 홍련에게서 등을 돌린 그의 얼굴은 터질 듯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백현이 홍련에게 들릴 듯, 들리지 않을 듯 조용히 읊조렸다.





"큰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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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 선댓 후 감상~❤
3년 전
독자2
아 선샐님 정말 최고 말해 뭐해~! 금요일에 금같은 글에 맴이 살살 녹습니다요,,, 삼백년동안 연재해주ㅅㅔ요 아니 오백년!!!!!!! 다음 편은 언제 올라오나요 어떻게 기다리지ㅠㅠㅠㅠㅠㅠ
3년 전
독자3
쪼금씩 쪼금씩 과거가 풀리는군요ㅠㅠㅠㅠ 그나저나 꿈과는 달리 종인이도 화향단 식구들도 별 탈이 없어야 할 텐데ㅠㅠㅜㅜ 홍련과 백현의 서로의 마음에 서로가 살짜쿵 들어왔으니 서로가 가진 서로의 슬픔을 보듬아주고 또 관계가 발전하겠져?? 상상만해도 뒷내용이 재밌고 기다려지네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작가님!!
3년 전
독자5
기다리고 있습니다,,,♥
3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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