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앞이 흐릿해 보이기 시작했다.
별일이 아닐꺼라 생각했던 모든것들이
나에게 점점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어느샌가 칠흙같은 어둠속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녀석은 환하고 눈부신 터널의 입구에서 나를 지켜봐 주었다.
[쑨환] A Dream within a Dream
깊게 상커풀진 눈이 떠졌다. 새까만 눈동자는 언뜻 보면 새어나갈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했으나 공허했다. 항상 보는 자신의 방 천장이였다. 태환은 왼쪽눈을 가리고 오른쪽 눈을 가리며 오늘의 정도를 확인했다. 어제와 변함이 없었다. 천장에 있는 검은 선은 어느새 선이였는지도 모를 정도로 흐릿하고 퍼져 보였다. 가슴이 또 먹먹해 졌다. 점점 퇴화해 가는 눈을 느낀다는 것은 너무나 섬뜩하고 삶을 살아가는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중앙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작은 원안은 무엇이든지 볼 수가 없었다. 그 원은 점점 커지더니 눈앞의 화면을 조금남기고 거대해졌다. 가족도 볼 수 없었으며, 사진도 볼 수 없었으며, 녀석도 볼 수 없었다. 오로직 옛 기억속 얼굴만이 아른거릴 뿐이였다. 너무나 오래되어 가끔 코가 길어보이기도 했으며, 입술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태환은 미칠것만 같았다.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한번만이라도 웃는 모습을 본다면... 한번만이라도.... 꼭 한번말이라도.... 보일듯 말듯 커다란 실루엣만 보이는게 마음을 더 애타게 만들었고 미치게 만들었다.
시력을 잃은 뒤로 물안에 들어간 적도 없었다. 어디서 턴을 해야 할지. 어디까지가 바닥의 끝인지. 눈앞은 오로직 파랬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무엇보다 머리는 두렵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심장은 거세게 박동질을 하고 손끝은 그저 빳빳하게 편 채로 움직이질 못했다. 내가 내 삶의 전부를 바쳐온 이곳에...! 내 젊음과 땀과 눈물을 이를 위해 모두 흘렸었는데...! 그동안의 시간과 그동안의 노력들을... 너무나 분하고 울화통이 터져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결국 쑨양의 손길에 건저져 살아난 내 자신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소리를 지르며 울 수 밖에 없었다. 울고 탈진하고 일어나서 울고 또 기절하고. 제발 모든것들이 꿈이기를. 검은 어둠속에서 깨어나 보면 나는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 있기를...
하루하루가 살기 싫어져 죽고만 싶었다.
날로만 심해가는 우울증.
하지만 그럼에도 살 수 있는 이유는 녀석이였다.
나의 삶이였고 나의 심장이다. 무료하게 오전을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듣고만 있을때도. 녀석은 나를 꼭 찾아와 행복한 오후를 만들어 주었다.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어 속삭여 줄때면은 노란색 작은 나비가 나풀거리며 내 귀를통해 몸안으로 들어오는 기분이다. 나비는 나풀나풀 가벼운 꽃가루를 내 심장, 내 눈에 흩뿌리고 내 몸속 곳곳을 돌아다니며 간지럽힌다. 쑨양은 영원한 나의 꽃이였다.
그렇게 나는 녀석의 사랑을 먹으며 하루를 지탱하고 있었다.
*
"태환아.. 장애인 수영 국가대표가 있는거 아니?"
"....네?"
"우리 나라에 시각 장애인 수영 국가대표가 있어"
"..."
"나는 우리 아들을 매우 사랑한단다."
나에겐 구름낀 하늘사이로 내려오는 빛줄기 같은 소리였다. 장애인 국가대표가 있다는걸 들어봤지만은 나와 같은 시각장애인이 있을지는 몰랐다. 다시 내가 살아 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이 들었다. 말라버린 가슴에 물을 끼얹고 싶었다.
*
태환은 오랜만으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준비운동을 하였다. 몇달전 물에 들어가려다 포기한 그날이 떠올랐다. 사실은 지금 너무나 긴장이되 호흡이 일정하지 않았다. 너무나 힘들었다.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물을 무서워 하지 않고 다시 수영을 할 수 있다면. 혹시나 내가 장애인이라도 다시 국가대표가 되어 경기를 뛸 수 있다면. 혹시나 그 모든게 좋아져 눈이 원상태로 돌아온다면. 혹시나.
준비운동을 마친 태환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대기실에서 나왔다. 맨발에 닿는 차가운 타일의 기분이 섬뜻했다. 점점 가까워져 간다. 어머니는 옆에서 괜찮다. 옛날부터 해왔잖니. 무어라 말을 하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다. 방금전 들었던 혹시나 하는 마음들과 의욕들은 사라져 간지 오래이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가까워 질수록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올라올것만 같았다. 어느새 다 온건지 어머니는 손을 놓아주셨다. 그리고 들어가라며 말하셨다.
왠지 어머니의 기대하는 눈이 느껴졌다.
"...못하겠어요.."
"태환아 그러지 말고 발이라도 담궈.."
"싫어..!!! 싫다고!!!"
물이 온통 까맣게 보였다. 진득한 늪처럼 보였다. 저곳에 들어가면 움직이지도 못하고 빨려 들어갈것만 같았다. 그속에는... 그속에는....왠지 내가 있을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눈이 모두 썩어 문드러진 내가 허우적대며 죽어가고 있을것만 같았다. 싫어..싫어 싫어...엄마 제발.. 여기서 나가요 제발요 제발.. 미칠것만 같아요 엄마 죽을것 같애요 숨이 안쉬어져요...엄마..엄마..
"태환아!!!!!"
미끄러운 타일 위로 태환이 쓰러졌다.
*
눈을 떳다. 흐릿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눈을 떳다. 그리고 다시 천장 위의 선을 가늠해 보았다. 원이 더 커져버린것 같다.
"태환.. 일어났어?"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목이 거의 갈라져 태환은 침을 삼켰다.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면 안돼는데.
"몸은 좀 괜찮아?"
"어..좀"
"배고파?"
"아니.."
쑨양은 가만히 태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에 태환은 숨을 깊이 내쉬고 눈을 감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듬직한 손은 어느새 내려와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볼에 가볍게 닿는 입술이 느껴졌다. 볼에 머물던 입술은 귓가로 옮겨가 말랑한 귓볼을 가볍게 애무했다. 쑨양의 뜨거운 혀는 태환의 귓바퀴를 진득하게 핥더니 점점더 내려가 목선에 머물었다.
"흐음.."
"얼마전에 들었어.. 수영장에 갔다며..?"
"응..흐읏.."
쑨양의 커다란 손가락이 태환의 붉은 입술을 넘어 뜨거운 입안으로 헤집어 갔다. 입천장을 살살 긁으며 아찔하게 만들었다. 태환의 머릿속은 이미 노곤노곤해져 애가 탔다. 어느새 쑨양은 태환의 위로 올라가 가슴팍을 지분거렸다. 방안은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져 가고 더워져 간다.
"태환..한번만 더 가보자.."
"아아"
"한번만 더... 나랑 같이 가자.. 나와 함께면 괜찮을꺼야.."
"아..."
쑨양의 손이 어느새 태환의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
경기장이였다. 출발 소리에 맞추어 나는 누구보다도 제일 빨리 출발을 했고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팔을 움직여댔다. 귓가에는 물소리와 경기장을 가득 채운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내 몸은 평소보다 제일로 가벼웠고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1등으로 달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모든것이 꿈이라는걸 알아차렸다. 눈앞이 흐릿했기 때문이였다. 꿈이란걸 깨달은 나는 갑자기 물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입안의 공기들이 빠져나와 숨이 턱 막혔다. 살기위해 발버둥 쳤지만 몸은 더욱 더 무거워 졌다.
"으아악!"
"태환!!"
내 어깨를 흔들며 깨우는 쑨양의 손길이 느껴졌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였다. 너무나 무서워서 맨몸인 녀석의 품안으로 들어갔다. 어젯밤을 치루고 정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아랫쪽은 끈적끈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녀석의 호흡에 맞추어 따라 숨쉬었다.
"무서워..다음에 하면 안돼..?"
"태환.. 몇년전에 기억나? 그렇게 작았는데도 너는 너무나 커보였어"
"..."
"뭐라 하는게 아니라.... 나는 그런 태환 다시 보고싶어.. 너무나 아름다워서..."
쑨양이 그렇게 말하니 태환은 기분이 또 달라졌다. 마음속 울컥한게 느껴졌다. 자존심? 기대에 부응하고 싶단 마음. 시력을 잃고 난 뒤로 자신은 한번도 쑨양을 행복하게 해 준적이 없는것만 같았다. 오로직 우울하게 축 쳐져있어서 쑨양마저 요새 목소리가 푹 죽은것 같아 미안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모습만 보는것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 상처를 받고 괴로워 하는 사람은 태환 자신만이 아닌 것이다.
"그래 해볼께"
"잘 할수 있어. 박태환이잖아"
아주 어렸을적 자신은 물을 너무나 싫어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자. 태환은 심호흡을 하고 몸에 물을 적셨다. 쑨양도 커다란 손에 물을 담아서 태환의 몸에 흘렸다. 처음부터 다시.. 다시 국가대표가 돼기 위해 훈련을 하고.. 비록 장애인 국가대표이지만 대한민국을 가슴에 품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다.
"태환!!!!"
태환은 물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기포들이 올라가는 소리가 잔뜩 들려왔다. 하지만 태환은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마치 넓고 광활한 검은 우주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이였다. 나의 몸은 우주에서부터 바다속 땅 끝까지. 역시나 였을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밧줄이 내 몸을 묶고 아래로 당기는 듯한 기분이였다. 언제까지나 계속 내려갈것만 같은 몸은 어느새 수영장의 가장 차가운 바닥까지 닿았다.
태환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귓가에는 물줄기 소리들이 몽롱하게 들려왔다. 파랗게 일렁이는 물사이로 빛줄기는 일직선으로 오지 못하고 흐물거리며 얼굴을 비쳐왔다. 불안하게 후들거리는 몸에 비해 마음은 굉장히 평안했다. 내 일생의 전부를 바쳤던 이 물속.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태환은 언뜻 보이는 빛줄기를 잡고싶어 손을 뻗었다. 잡히진 않는다.
이곳은 눈물을 흘려도 보이지 않는다. 눈물을 흘려도 알 수 없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 무언가 될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이상 혼자서 바닥으로 가라앉고 싶지가 않다. 나는 아직 살아 있으며 단지 앞이 보이지 않을 뿐. 나를 응원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는 부모님. 내 곁에서 항상 사랑해주고 보듬어 주는 녀석. 모든 사람들. 모든 인연들. 그리고 내가 이루었던 성공들. 불확실한 미래를 기대하면서도 불안해 하던 나의 어린시절. 처음 느껴봤던 많은 사람들의 관심들. 행복. 좌절. 안도. 절망. 그 모든 것들이 물로되어 나는 그 모든것들을 헤엄쳐 다닐수 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느낄수는 있다. 바닥에 가라앉은 나에게 희미하게 다가오는 환한 빛을.
이 지긋지긋한 바닥으로부터 치솟아 오르고 싶다.
태환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리에 힘을주고 수면으로 다가갔다. 온몸이 빛으로 가득찼다. 발끝도 움직여 보고. 흔들어 보았다.
이제부터가 다시 시작
"푸하!!!!!"
"태환!!!!"
한동안 올라오지 않는 태환을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쑨양은 너무나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물위로 동동 떠다니는 밝은 표정의 연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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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하고.. 보충하고.... 하건가고.. 11시에 집에와서 겨우겨우 쓴거에용.......
오늘도 또 우울한 분위기의 글을 썼네요
사실 시력퇴화는 인간극장의 어떤분을 보고 썼어요
그분은 20대 초반에 점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맨날 일어나서 천장의 선을 체크하는것도 그분이 하셨던 일이에요
결국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시각장애인 국가대표 수영선수로
열심히 훈련하고 계신답니다.
그러니 여러분 고난을 겪었을때 꼭 뛰어넘자구요
아이제 자야겠어요.... 벌써 새벽 한시 십육분이야.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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