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관계
여느 엠티와 다를 바 없었다.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펜션에서 저녁을 먹자마자 이른 시간임에도 술판이 벌어졌다. 다들 들뜬 얼굴에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공대 특성상 여자가 많지 않은데 과 동아리이다 보니 스무 명 남짓한 사람 중 여자는 대여섯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사실 이 숫자도 평소에 비하면 많다는 생각이 드는 숫자였다. 옆에 앉은 후배가 계속 쨍알쨍알 말을 걸어온다. 원래 말이 많은 성격도 아니었고 적당히 술을 마시며 옆에 앉은 새내기들의 말에 대꾸를 해줬다. 대충 대답을 하다 들려오는 김종인의 이름에 정신을 차리고 귀 기울였다.
“선배, 종인 선배랑 친하시죠?”
“....뭐, 그럭저럭.”
그 질문에 답할 말을 찾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사실 그와는 박찬열처럼 친한 친구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니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키스한 사이라고 답하는 것도 너무 우습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그와 나 사이의 관계를 정의할 단어가 없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이인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옆에 있는 준면이 형과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그의 시선도 내게로 향해졌다. 눈을 마주하자 더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리고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에게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다.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술기운이 올라와 몸이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는 찬열의 툭툭 치고는 문을 가리켰다. 그는 곧 내 말을 알아듣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저녁이었지만 쌀쌀하지는 않고 적당히 기분이 좋은 온도였다. 대충 펜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입이 심심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 불있냐?”
“저번에 백현이랑 싸우고 끊었는데.”
“그 놈의 변백현. 너넨 이제 지겹지도 않냐?”
“지겨울 게 어딨냐? 볼 때마다 귀여워 죽겠는데.”
“6년이나 봤는데 아직 귀여워?”
“으이구. 도경수 꼬맹아. 좋아하는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일 년이든 삼년이든 육년이든 좋은데 뭐가 지겹겠냐.”
그런가 하며 말꼬리를 늘이며 필터 끝을 지근지근 물었다.
“도경수.”
“왜?”
“김종인 어때?”
“뭐가.”
질문의 의도를 알면서도 부러 모르는 체 했다.
“김종인은 니가 좋아 죽겠다는 티를 내잖아.”
“그런가.”
“너도 그런 거 같은데 아니야?”
필터를 씹고 있던 입이 자연스레 멈춰졌다. 대답이 없는 나를 보며 찬열이 말을 덧붙이려는데 느껴지는 인기척에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우리 둘의 시선은 자연스레 인기척이 들린 쪽으로 향했다. 김종인은 멋쩍게 웃으며 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안 들어오나 해서.”
웃어 보이는 그 얼굴이 취기 때문인지 한층 더 근사해보였다.
“나 먼저 들어간다.”
찬열이 티 나게 자리를 비켜주려 하는 모습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도 술을 많이 마신건지 옅은 알콜 냄새가 풍겨져 왔다. 슬슬 더 취기가 올라오는지 아까 전보다도 자세가 더 흩트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내 입에 물려 있는 끝만 너덜너덜해진 담배를 입에서 빼내며 물었다.
“술 많이 마시는 거 같던데 괜찮아?”
다정하게 물어오는 그 질문에 아까 전 고민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대로 말이 툭 흘러나왔다.
“키스, 할래?”
그는 내 말에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왔다. 그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곧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는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곧 섞여 들어오는 혀에서는 알콜 향이 여전했다. 떨어진 입술에 채 눈을 뜨기도 전에 가볍게 그의 입술이 한 번 더 맞부딪혔다. 눈을 뜨자 바로 보이는 그의 시선은 오롯이 저를 향해 있었다. 혼자서 품고 있다가는 생각들이 뒤엉켜 펑 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랑 나는 무슨 사이야?”
그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이 꼭 아이에게 장난스레 겁을 주는 얼굴 같기도 했다.
“넌 나랑 키스 왜 하자고 했어?”
“모르겠어서. 너랑 내가 무슨 관계인지.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인도 아니고. 그런데 키스는 할 수 있는 사이. 우리 관계를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는 내 질문에 답할 말을 찾기라도 하는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지금 우리 관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걸까 혹은 내 질문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다시 시선을 맞춰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수야. 난 니가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을 때, 아파서 약이 필요할 때, 봄이 돼서 벚꽃놀이 갈 때가 됐을 때, 갑자기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을 때, 밤에 술 마시고 전화할 사람이 필요할 때. 그 때마다 떠오르는 첫 번째 사람이고 싶어.”
“......”
“내가 그 사람이 되도 될까?
“......”
“직접적으로 얘기할게. 사귀자.”
“......”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모호한 우리의 관계를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확정하는 것. 그것이 그가 내게 준 답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모호한 관계에 대한 답을 선택하는 것은 오전한 내 몫이었다. 그와의 첫 키스부터 방금 전까지의 키스. 그리고 항상 다정하게 맞춰 오는 그 눈동자와 얼굴. 문득 방금 나눴던 찬열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곧 그 질문을 지워버리고 그가 제시한 답 속에, 불확실한 관계 속에 나를 던져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그제서야 미묘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그리고 나도 그를 따라 웃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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