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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읽고 암호닉 확인하고 저한테 하고 싶은 질문까지 해주세여'ㅅ'
어린 아빠 17
(부제; 가장 소중한 너의)
중간고사 망쳤다고 징징거렸던 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수능날이 다가왔다. 11월 12일. 이 날이 지나고 나면 나 역시도 수험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괜시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와 정국이는 태평한 소리만 해댔지만. 어쨌든 주위에 수험생이 있지는 않아서 엄청 막 와닿지는 않았지만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은 수능이 딱 일 년 남았고, 그 일 년을 버티고 나면 내가 성인이 된다는 사실도.
수능날에는 학교를 가지 않으니 제가 연습하러 오라는 정국이의 찡찡거림에 정국이의 체육관으로 향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시끄럽던 소리가 멈추고, 코치님의 이야~ 정국이 진! 짜! 여친 왔네! 하는 외침이 들렸다. 맨날 받는 놀림이었는데, 그 때는 우리가 진짜 친구여서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데 정말로 '여자친구'가 되고 나서 듣자 괜히 부끄러웠다. 아이, 코치님 왜 그러세요... 답지 않게 쑥쓰러워하며 체육관 앞 슈퍼에서 사 온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내려놓는데 툴툴거리는 정국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맞아요, 제 여친 놀리지마요. 그런 정국이의 말에 더 싸해지는 체육관의 분위기. 나와 눈이 마주친 호석이 오빠는 우웩. 하며 토하는 시늉을 한다. 곧이어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고는 정국이에게 야유를 쏟아 부었다. 정국이는 야유를 받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게 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수능날이고, 특별히 나도 왔으니까 일찍 마쳐주겠다는 코치님의 말에 정국이가 어이없다는 듯 항의했다. 원래 일찍 마쳐주시기로 했었잖아요! 정국이의 말에 코치님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내가 그랬었나? 기억에 없는데? 하며 괜히 어깨를 들썩이는 건 덤이다. 익살스러운 코치님의 반응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씩씩거리던 정국이도 내가 웃는 것을 보자 그저 표정을 풀고는 웃음을 짓고 만다.
그래서 정국이랑 손을 잡고 나왔다. 밝은 해가 낯선지 정국이가 새삼 우와, 하고 놀란다. 어디 갈까? 정국이의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못 고르겠어... 내 말에 정국이가 오랜만에 데이트하는건데 빨리 정해서 가자며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가 푼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아파서 데이트 취소한 뒤로 한 번도 못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난 곳에 아, 하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노래방가자. 우리 노래방 안 간지 오래 됐잖아. 내 말에 정국이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가고 싶은 곳이 진짜 거기 밖에 없어? 몇 번이고 재차 물어보던 정국이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방을 배정받고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리모콘을 찾아 꾹꾹 눌러 노래 예약을 했다. 잔잔한 반주가 나오고, 자연스럽게 정국이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정국이는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는 마지못해 마이크를 받아든다. 쟤는 운동 안 했으면 연예인 했을거야. 정국이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연예인이 된 정국이를 상상했다. 저 정도면 엄청 잘 생긴 편이니까 인기도 엄청 많을 거고... 아마 아이돌이었겠지... 진한 아이라인에 아이돌스러운 복장의 정국이를 상상하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잘 어울리기는 할 것 같은데, 엄청 어색할 것 같다. 전정국은 전정국일 때가 제일 좋지.
노래방에서 나왔을 뿐인데 벌써 해가 졌다. 수능을 마친 고3들이 모두 거리로 나왔는지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많았다. 멈칫거리며 정국이의 손을 찾아 잡자 정국이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아준다. 배고파... 오늘 아빠가 일찍 오랬는데. 내 말에 정국이는 내일도 볼테니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헤어지는 건 왠지 아쉬워 망설이자 정국이가 오늘만 볼 것도 아닌데 왜 그래? 하며 퍽 다정한 눈으로 나를 달래기 시작한다. 내일 더 열심히 놀려면 오늘 푹 쉬어야지. 결국 정국이에게 설득당해 고개를 끄덕이자 정국이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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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걸 해주겠다는 아빠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저녁은 환상적이었다. 다음 날도 정국이랑 약속이 있다는 말에 아빠가 진짜...? 하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11월 13일만은 절대 양보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빠는 잠시 칭얼거리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도 나갔다 와야지.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같이 저녁 먹자. 많이 양보했다는 투의 아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자 잠을 설치느라 별로 자지 못했음에도 괜히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두 팔을 허공에 뻗어 스트레칭을 하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었다. 잠금을 열자 쏟아지는 문자와 카톡. 덜떠진 눈을 끔뻑거리며 누워서 휴대폰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수영이에게서, 그리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서 온 연락도 있었고 지민 삼촌과 남준 삼촌에게서 온 문자도 있었다. 문자를 잘 사용하지 않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서 온 문자도. 괜히 기분이 몽글몽글하니 좋아져 다시 손을 뻗어 기지개를 키고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방금 도착한 정국이이 카톡 알림이 둥둥 뜬다. 일어났어?
나갈거라더니 진짜 아침 일찍부터 나갔는지 텅 빈 집을 보고는 식탁으로 향했다. 그냥 정국이랑 만나서 밥 먹을까... 냉장고 문을 열며 고민을 하다 물병을 꺼내 물을 마셨다. 정국이랑 약속 시간 전에 챙겨 나가려고 방으로 가려던 차에 식탁 위에 있는 쪽지 하나가 눈에 띈다. 정갈한 아빠의 글씨로 몇 자 안 적혀있는 작은 쪽지. 저녁에 기대해. 이따봅시다. 아빠다운 쪽지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내가 모르는 척 해줘야지, 뭐. 쪽지를 내려놓고는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공들여 꾸미고 나오자 언제부터 서있었는지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정국이가 보인다. 오늘만 봐주는 거야. 툴툴거리는 정국이에게 웃으며 다가가자 정국이가 누구보라고 이렇게 꾸몄어? 하며 다정하게 물어온다. 윽. 안 어울려. 킥킥거리며 웃고는 음, 나를 위해서? 하며 눈치 없는 짓을 하자 정국이는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일로와. 정국이의 손짓에 아~ 날씨 좋다! 하며 딴청을 했다. 정국아, 배고프다... 얼른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울상을 짓자 정국이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뭐 먹고 싶냐는 정국이의 물음에 피자!!!! 하고 맹렬하게 외쳤었는데 진짜로 피자 먹으러 왔다. 물론 파스타랑 샐러드도 있지롱. 헤헤거리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서둘러 피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정국이 표정은 영 구리다. 왜에. 내가 정국이의 볼을 톡톡 치고는 묻자 정국이가 넌 이렇게 좋은 날에 피자가 뭐냐. 하며 툴툴거린다. 나 피자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너 피자 비하? 내가 울상을 짓자 작게 한숨을 쉰 정국이가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기왕 온 거 피자로 배 터질 때까지 먹자. 정국이의 말에 안 구래도 나 구럴 예정인데? 하고 말하자 정국이는 말이나 못하면. 하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별다른 걸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날이 지고 있다. 아저씨랑 약속 있지. 담담한 정국이의 말에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소오롬. 어떻게 알았어? 내 물음에 정국이는 내 머리를 가볍게 톡 치고는 활짝 웃는다. 아저씨랑 너랑 매년 이랬거든? 정국이의 말에 괜히 머쓱해져 그랬나? 하고 하하 웃자 정국이를 또 픽 웃으며 내 머리를 톡 친다. 아, 왜 자꾸 머리 쳐! 내가 툴툴거리자 정국이는 자신이 친 부위를 대충 문지르고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온다.
쌀쌀한 날씨에 으으. 하며 옷깃을 여미자 나를 힐끔 본 정국이가 추워? 하고 물어온다. 그건 아닌데, 좀 쌀쌀해. 내 말에 정국이가 그게 그거지. 하며 옷 벗어 줄까? 하고 물어온다. 아니, 내 옷 두꺼운데. 내 말에 정국이는 준다고 해도 싫대. 하며 제 옷깃을 여민다. 이제 벗어달라고 해도 안 벗어줘.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예예, 달라구 안해요. 하고 무심히 답하자 정국이는 더 삐진 표정을 짓는다.
"얼른 들어가. 연락하고."
"응응."
"생일 많이 축하해."
"응응."
"많이 좋아해."
"응, 응...?"
뭐야, 그 반응. 툴툴거리는 정국이에 허둥지둥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네가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 내 반응에 정국이는 웃음을 꾹 참는 표정을 짓고는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오늘 즐거웠어? 정국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던 정국이가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그 타이밍인가. 혼자 손을 바들바들 떨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걱정하는데 순간 입술을 꾹 누르는 따뜻한 숨결이 느껴진다. 아주 잠시 닿아있던 온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떨어진다. 생일 선물. 씩 웃은 정국이가 다시 입을 뗀다. 라고 하면 나 뺨 때릴 거지? 정국이의 말에 긴장했던 게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새초롬히 정국이를 쳐다보자 정국이는 나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치자. 하며 능글맞게 웃는다.
생일 진짜 진짜 축하해. 아저씨가 널 축하해하는 것만큼 축하해. 진짜로. 그대로 한 번 꼭 안은 정국이가 이제 얼른 들어가라며 내 등을 떠민다. 연락, 연락할게! 정국이에게 떠밀리며 말을 하고는 대문을 열었다. 아직 컴컴한 집 안을 보니 아빠는 오지 않은 것 같다. 으어, 뽀뽀했어. 급 부끄러워지는 기분에 볼을 감싸고 동동거리다가 뛰듯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닫고 다시 동동거리는데 언제 올린건지 내 침대 위에 놓여 있는 꽃다발과 쇼핑백들이 보인다. 천천히 다가가자 꽤 많은 양에 의아해진다.
아니, 그것보다 누가 이걸 내 방에? 떠오르는 의문에 잠시 당황했다가 곧바로 방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컴컴한 거실 한 구석에서 작게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가 불빛이 있는 곳에서 서서히 들려온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딸~ 노래 소리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자 케잌에 불을 붙이고는 활짝 웃고 있는 아빠가 보인다. 불빛에 붉게 물든 아빠의 얼굴을 보자, 왜일까. 괜히 뭉클해진다. 내 방에 선물 가져다 놓을 사람이 아빠 하나 밖에 더 있겠어. 얼른 촛불을 끄라는 아빠의 제스쳐에 눈을 감았다. 속으로 중얼중얼 소원을 빌고는 크게 후, 하고 불자 작게 빛나던 불길은 전부 꺼지고 거실은 완전히 컴컴해진다. 생일 축하해. 작은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거실에 불이 켜진다.
거실의 상에는 생일상이 거하게 차려져있다. 미역국부터 시작해서 내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가득 채운 상을 보자 괜히 기분이 뭉클하다. 매년 받았던 생일상임에도 감회가 색다른 것 같기도 하고... 젓가락을 입에 물고 멍하게 상만 바라보는데 아빠가 내 숟가락에 밥을 퍼고는 고기를 올린다. 아. 내 입을 향해 숟가락을 내밀고는 아빠는 싱긋 웃는다. 겨우 입을 열어 받아먹자 아빠가 잘 먹네, 우리 딸. 하고는 내 손에 숟가락을 쥐어준다. 많이 먹어. 내 머리를 쓰다듬은 아빠가 얼른 먹으라는 듯 내게 눈짓을 한다. 그제야 겨우 손을 움직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빠랑 사이좋게 케이크까지 먹고 나자 아빠는 얼른 들어가서 선물 확인해보라며 내 등을 떠민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등 떠미는 사람이 많아... 툴툴거리면서도 아빠가 설거지를 하는 것을 보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연분홍 빛으로 물든 안개꽃다발. 와... 꽃다발은 처음 받아보는데. 이래서 꽃다발, 꽃다발 하는구나. 혼자서 킁킁거리며 향도 맡아보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구경하는데 톡 하고 쪽지 하나가 떨어진다. 축하해요. 동글동글한 글씨의 쪽지. 우왕. 글씨도 이쁘다. 혼자 방방거리다가 꽃다발을 책상 위에 곱게 두고 다시 침대로 가서 앉았다. 맨 앞에 있는 것부터 차례차례 열었다.
가장 작은 박스를 열자 비싼 볼펜과 공책같은게 우루루 나온다. 딱봐도 누가 준 건지 알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메모 하나. 생일 축하해. 남준 삼촌 글씨체다. 분명 고3 된다고 바리바리 사서 포장했겠지. 초6 때는 중학교 올라간다고 필기구,중3 때는 고등학교 올라간다고 필기구, 고1 때는 고2 된다고 필기구. 하여튼 남준 삼촌은 이런 저런 핑계로 늘 필기구를 사줬다. 그래도 되게 비싼 걸로... 그래서 쓸 때마다 좀 덜덜거리면서 쓰게 된다.
필기구들을 다시 상자에 잘 넣어두고는 한 쪽으로 밀었다. 그 다음 보이는 종이 가방을 열자 옷 두 세 벌이 나온다. 그것도 왠지 위아래 세트로 맞춘 것 같은. 누가봐도 지민 삼촌 취향인데. 귀엽고 단정한 옷을 좋아하는 지민 삼촌의 취향인듯해 보이는 블라우스에 검은 원피스. 그리고 똑같이 세트로 보이는 구두. 구두는 아빠가 보면 기겁하겠다. 혼자 헤헤거리며 같은 모양의 쇼핑백을 열자 또 지민 삼촌의 취향대로 보이는 옷들이 나온다. 그렇게 쇼핑백이 네, 다섯개 정도. 하나하나 어떻게 입어야 어울릴지 고민하며 골랐을 지민 삼촌을 생각하자 웃음이 한 번 나고, 또 그걸 정성스레 하나하나 포장했을 지민 삼촌을 또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이건... 특별한 날이나 정국이 만날 때나 입어야겠다. 다행히 구두는 딱 하나 나왔기에 아빠랑 나갈 때 신으면... 되... 되겠지. 안되면 지민 삼촌 핑계대고. 어쨌든 마지막 쇼핑백에서 긴 듯 짧은 메모가 나온다. 우리 딸 열 여덟 번 째 생일 너무너무 축하해. 우리 딸이랑 어울릴 것 같은 옷 몇 벌만 샀어. 마음 같아서는 매장 하나를 주고 싶은데ㅠㅠ. 어쨌든 태형이 말도 잘 듣고 항상 이쁜 우리 딸보면 내가 다 기쁘다. 정국 친구랑도 오래 가구. 생일 축하해 : )
가장 눈에 띄는 크고 하얀 상자를 열자 가장 먼저 노란 꽃 한송이가 보인다. 이게 프라지아였나... 가물가물한 기억에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히 치워두고는 덮개 같은 것을 들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운동화와 정국이가 좋아하게 생긴 맨투맨티. 그리고 반지인지 링인지 모를 것이 달려있는 목걸이까지 나온다. 하나하나 꺼내어보고 다시 넣으려는데 하얀 봉투가 눈에 띈다. 진짜 누구 센스인지. 킥킥거리며 웃고는 봉투를 뜯었다. 역시나 나오는 편지지도 하얀색. 진짜 전정국... 글씨부터가 삐뚤빼뚤한게 정국이스러웠다.
[자기에게.
아, 진짜 이렇게 편지쓰는 거 너무 낯간지럽고 부끄러워. 그래서 안 쓰고 싶었는데 네 생일이니까 열심히 끄적여볼게. 오늘 아마 우리는 데이트를 했겠지? 그리고 아저씨랑 저녁을 먹어야하는 너 때문에 아침 일찍 만나서 헤어졌을거고. 음... 네가 요즘 피자가 너무 먹고 싶다고 했으니까 아마 점심으로 피자를 먹었을 것 같아. 그리고 네가 이것을 발견했을 때는 아마 9시에서 10쯤. 그럼 그 때까지 네 연락오기만을 기다려야겠네. 어쨌든, 선물은 마응에 들어? 말로만 커플, 커플 하지말고 진짜 커플인 거 티내고 싶어서 한 번 준비해봤어. 이제 우리 이거 입고 자주 자주 만나야 해. 나름 네 취향도 고려해봤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음... 생일 너무 축하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 어린 날 나와 친구가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 그리고 지금 나랑 만나줘서 너무 고마워. 요즘 매일이 너무 행복한 것 같아. 싸우지 말자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네가 화나면 내가 최대한 맞추고 이해해서 덜 싸우도록 노력할게.
아... 진짜 너무 부끄럽다. 하여튼 열 여덟 살 생일 축하하고. 항상 예쁜 내 자기, 늘 나한테만 예쁘길. 어. 사랑해.]
정국이의 편지를 읽는데, 평소같았으면 오글거린다고 진작에 집어던지고 난리를 쳤을건데,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안 들었다. 그저 이 편지 한 장을 채우려고 낑낑거렸을 모습을 상상하자 괜히 간질간질거린다. 말로 듣는 거랑 글로 보는 거랑 이렇게 느낌이 다르구나.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을 정국이의 진심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검은 쇼핑백 하나. 열어보자 각진 네모 상자들이 여러 개 나온다. 온갖 향수와 바디 미스트. 향도 제각각이다. 그리고 연분홍 빛의 손목시계까지.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선물은 처음이다. 그리고 답지 않게 귀여운 편지지도. 정갈한 글씨와 언발란스한 조화를 이루는 편지를 천천히 뜯었다. 정국이처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아빠의 진심이 내게로 날아오는 것 같았다. 고인 눈물이 편지지에 떨어져 글자들을 번지게 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눈가를 훔쳐가며 편지를 몇 번이고 되내어 읽었다.
[사랑하는 우리 딸.
어느덧 네가 내게 온 지도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부족하고 못난 아빠임에도 탈없이 자란 네가 너무나도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워. 아빠는 너로 인해 하루를 살아가고, 너를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아. 나의 열 여덟부터, 너를 만난 순간부터 내 인생은 그랬으니까. 너의 생일을 매해 챙겨주면서 늘 너의 첫 번 째 생일을 챙겨줄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늘 남아. 처음의 생일은 내가 못 챙겨줬어도 앞으로 내가 챙겨줄 생일이 많다는 것으로 나를 위로하곤 한단다.
가장 소중한 우리 딸.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어떤 폭풍우 속에서 헤멜지는 몰라도, 아빠는 너의 별이 되고 싶어.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응원을 하면서 너를 멋진 사람으로 만드는 게 내 목표야. 우선 올해는 향기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을 담은 선물이야. 그렇다고 네게서 냄새가 나는 것은 절대 아니란다.
이제 고3이 된다고 걱정 많이 하는 것 같던데, 돌이켜 보면 그 순간은 정말 별 것 아닌 날들이 될 거야. 나는, 아빠는, 항상 너를 믿으니까, 너의 곁을 묵묵히 지킬 사람이니 너도 꿋꿋이 나아갔으면 좋겠다.
네가 그런 적이 있지. 너의 아빠가 되어서 후회한 적 없냐고. 여자도 못 만나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거렸던 것이 전혀 억울하지 않냐고. 내 청춘을 네가 뺏어간 기분이지 않냐고.
그 때는 웃어넘겼지만 꼭 말해주고 싶었어. 내 답은 전혀, 아니라고. 널 만난 게 내 삶의 축복이야. 너는 존재만으로도 나를 힘나게 하는 그런, 내 가장 소중한 딸이란다. 누가 뭐래도 넌 내 딸이고, 난 너의 아빠야. 그러니 그런 말은 장난으로라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느새 네 나이가 너를 처음 만났던 내 나이라는 것에 나는 새삼스레 감탄하곤 한단다. 그리고 새삼스레 경외로운 기분도 들지. 그래서 네 열 여덟 번 째 생일이 남다르게 느껴지나 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래, 어쨌든. 그럼 우리 딸 열 여덟 번 째 생일도 무척 축하하고, 이대로 밝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아빠는 그것 말고는 바랄 것이 없으니.
가장 소중한 너의 생일을 축하하며, 아빠가.]
***
어후. 거짓말쟁이 빛나는 왔습니다...ㅠㅅㅠ 금방 오겠다고 했는데 제가 늦었져...8ㅅ8
내가 방연시 얼른 끝낸다고 어린 아빠 못 왔어여ㅠㅠㅠㅠ 어후. 그래도 오늘 나름 떡밥 투척!
어. 오늘은 우리 딸래미 생일 편인데, 애초에 우리 딸래미 생일은 수능 다음 날로 정했었답니닿ㅎㅅㅎ 친모가 준 종이에 쓰여있었겠져... 넴. 사실 11월 13일이 저에게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날입니다. 껄껄.
어, 우리 고3 독자님들 수능 무사히 보고 왔어요? 우리 독자님들 잘 보고 오라고 나름대로 응원글도 쓰고, 좋은 문구도 쓰고 그랬는데, 어떻게 힘이 되었을지 모르겠어요. 수능 잘 보고 오겠다는 독자님들의 댓글을 보면서 제가 수능쳤던 날이 생각나더라구요. 생각해보면 11월이었는데 따뜻한 패딩을 입고, 아빠가 태워준 차를 타고 수능을 치러 갔었어요. 긴장은 전혀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밥은 넘어가지 않더라구요. 그냥 담담하게 돌아와서는 고기 먹고, 아... 이렇게 끝이구나. 싶었어요. 어... 뒤에 이야기는 많지만 씁쓸한 기억이니 이쯤 하겠습니다... 하하. 그냥 여러분 지금 이 시간을 즐겨요. 쉬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그렇게 해요.
헐헐. 나 왜 까먹었지. 윤기 트위터보고 나도 저 말 해야지! 이러고 있었는데. 사실 저도 스무 살이 되면 제 삶이 되게 스펙타클하게 바뀔 줄 알았어요. 신기하지 않아요? 아직 졸업은 안 했는데도 겨우 년도의 뒷자리 숫자 하나 바뀐 걸로 술집도 들어갈 수 있고, 성인영화도 볼 수 있고... 스무 살이 되면 정말 바뀔 줄 알았어요. 뭔가 내 삶을 중심으로 무언가 바뀔 것 같았는데 여전히 똑같더라구요. 사람들도 사귀어야하고, 해야할 공부는 늘어나고, 달라진 거라고는 눈치보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 딱 하나? 특별해질 줄 알았는데 변한 건 그대로였어요. 내가 그대로인데 정말 신기하게 저는 어느새 성인이 되어있었어요. 성인이라는 게, 어른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더라구요. 막상 성인이 되니까 다시 아이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어른아이에 남준이 가사가 딱 맞는 것 같아요. 난 애어른이이었지만 이제는 어른아이. 아윽, 하여튼 제가 지금 뭐라고 주절거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윤기 말대로 스무 살도 별 것 없고, 수능도 별 거 아니에요. 뭐... 스무 살 별 거 없다고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해놓고 이런 말 하는 게 좀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스무살이 별 것 없기는 하지만, 또 아주 볼 것 없는 건 또 아니에요.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좋은 일도 생기고. 그렇게 찬란하고 빛나게 살 수도 있어요. 생각해봐요. 그렇게 별 것 없다던 스무살도 다시 돌아오지는 않잖아요? 이제 곧 몇 개월 뒤면 스무살, 그리고 신입생이 될 우리 독자님들에게 어...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요. 실패한 게 아니라고. 여전히 빛나고 있다고. 아, 과제 하다와서 제가 뭔 소리하는지도 모르겠네여. 헤롱헤롱. 하여튼 수고했어요.
그리고 욕심 같지만 제 글 보고 힐링 받길 바랍니당. 그것도 아니라면 정국이랑 남준이 목소리 듣고 힐링 받아여...8ㅅ8
댓글 남겨주는 독자님들도, 추천 해주시는 독자님들도, 독방에 추천해주시는 분들도 전부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늘 고맙구 사랑합니당'ㅅ'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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