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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박지민] 불나비 13 | 인스티즈


자우림 - 망향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13








 더 이상 선택이란 없다.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이다. 제게 남겨진 운명을 따라 걸으면 되었다. 고민할 여지조차도 없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아주 잔인하리만치 선명하게. 그게 저에게는 더 나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모든 경우를 따져 계획을 세우는 것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감히 말하건대, 저는 모든 결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 결말을 예측하기 위해 살아왔다. 그래서 저는 가장 완벽한 결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리고 저에게. 재단할 필요도 없이 깔끔한 결말. 그 모든 과정에는 저의 욕심이 배제되어야만 한다. 뒤늦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그 욕심. 왜 하필 지금에서야. 후회도 늦었다. 후회조차도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제 욕심을 드러내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 박지민 짓이라고 전해.”

 “…진심이야?”

 “그것밖에 더 있어? 어차피 이미 그렇게 알고 있을 거야.”


 지민이 제이에게 말했다. 제이의 상처는 거의 회복되어 가는 중이었고, 지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이는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운전석의 창문은 약간 내려가 있었고, 그 사이로 지민의 얼굴이 있었다. 지민의 표정이 굳건했다. 제이가 제 아랫입술을 씹었다. 별다른 방도가 없긴 했다. 도로에서의 습격, 그들은 그 도로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모두 지민의 탓으로 돌리라는 이야기였다. 살아서 돌아간 이가 없었으므로 지민의 소행으로 알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제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도 문제가 된다.


 “그래, 알겠어. 연화는?”

 “…괜찮아.”


 제이가 연화의 안부를 물어보자 지민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침묵을 길게 유지하지는 않았다. 제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창문이 닫혔다. 제이가 액셀을 밟았다. 지민은 그 차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는 그대로 익숙한 종착지를 향해 달렸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른다.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지민인 척 치료를 받았다. 유일한 방법이었다. 며칠 전의 일이 파급력이 컸던 모양인지 두양애에서는 아직 제이를 호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이는 감으로 알았다. 지금 돌아가면, 반드시 그들은 저를 부를 것이다. 제이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제가 돌아가야 할 곳이 진정으로 그곳뿐이라니, 이제야 비참했다.


 제이가 두양애로 들어서자 내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제이는 순간적으로 숨을 죽였다. 제이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임무 수행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인물이기는 했으나, 이를 제외하면 있는 둥 없는 둥 지냈기 때문이다. 제이가 발걸음을 틀어 훈련장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모퉁이를 지나쳐 오는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눈에 길게 흉터가 나 있었다. 팀장이었다. 그는 신경질이 난 사람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선 껌을 씹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는 은단 냄새가 났다. 그가 제이를 붙잡았다.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면서 배에 있던 상처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제이는 잠시 굳었던 표정을 자연스럽게 풀었다.


 “박지민, 이 쥐 같은 새끼. 진즉 싹을 쳤어야 했어. 넌 알고 있었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나갔던 새끼들은 다 뒤졌어. 괴물 같은 새끼. 관련해서 너한테 임무 내려왔어. 너는 그 자식이랑 다를 거라고 믿는다.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어?”


 제이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잡혀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지민의 말대로였다. 이미 그들은 지민의 소행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팀장은 우선 지민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에 남은 흉터가 사라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제이는 그의 앞에서 말을 아꼈다. 제이가 최대한 제 존재를 없는 것처럼 만들어 살았던 이유에는 지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민이 제이 대신 와있다는 것을 알아채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제이가 고개를 숙이곤 그의 말대로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새로운 임무, 지금 이 시점에서 제게 새롭게 내려올 임무. 지민에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 제이는 피곤한 듯 제 고개를 꺾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 제이. 길게 말하진 않을 거다. 깔끔하게, 박지민부터 처리해.”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이가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러나 입안도 마찬가지로 건조하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과도한 긴장감 탓이었다. 마르는 입술과는 다르게 주먹 쥔 손에서는 땀이 났다. 제이는 이를 감추기 위해 뒷짐을 지고 있었다. 제이의 앞에 선 그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등을 돌려 제이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제이는 그와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으므로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제게 임무가 내려온 것이 다행일지 몰랐다.


 “그야 제일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리안화를 손보는 건 쥐새끼가 사라진 뒤에 해도 늦지 않지.”

 “…….”

 “하나를 둘로…. 애초부터 너희는 실패작이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다. 그러니까 박지민부터 해결해. 그 다음은 리안화가 될 거니까. 디아바이오에서 분명 리안화로 넘긴 자료가 있을 거다. 그걸 얻어보자고.”


 알겠습니다. 제이는 뒤늦게서야 대답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런 제이의 앞으로 권총 한 자루가 내밀어졌다. 이제 넌 그냥 제이가 되는 거야. 유일한. 그 시작에 함께할 동료도 있으면 좋겠지. 그가 말했다. 제이가 손을 뻗어 권총을 받아들었다. 조용히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제이는 저의 무력함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우습게도 그랬다. 제이는 별다른 말을 보태지 못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유일한, 유일한. 그 음절을 곱씹었다.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개소리하네. 제이가 작게 읊조렸다.


 “연화, 뭘 하려는 생각인 거야?”

 “그냥 조금 위험한 걸 해보려는 생각.”


 지민의 물음에 연화가 대답했다. 연화 역시 옆구리의 자상이 회복될 동안 방에 머물러 있었다. 옥경은 자주 연화를 찾아왔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예양 때문이었다. 연화 역시도 예양의 소식을 알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두양애에 있다는 것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들의 본거지를 습격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다짜고짜 예양을 구하겠다고 소수정예로 들이닥치면, 윗선에서 알게 되는 것은 둘째치고 그냥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화가 앞에 앉은 지민의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으레 지민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가봐야지. 그녀에게로.”


 지민이 그 목소리에 침을 한 번 삼켰다. 지민이 그 길에 함께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보안상의 이유를 대며 지민이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은 분명하지만. 지민은 연화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화가 준비하는 동안 평소 그랬던 것처럼 자리를 지켰다. 그 기다림의 시간마저도 지민에게는 소중했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조용한 공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옥경이 없는 탓이었다. 예양이 없는데 옥경이 멀쩡하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옥경에게는 예양에 대해 일언반구 없을 예정이었다. 구태여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기보다는 옥경을 배려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예양은 옥경의 청춘이었으니까.


 차에 올라타 리안화로 향하는 동안 그들은 정적을 유지했다. 지민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걸 모두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연화가 알기를 바랐던 것은 맞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지민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저의 두려움보다는 연화가 더 거대했다. 일전에 지민은 절망의 먹잇감이 되리라 다짐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지민은 연화의 절망마저도 유인해 앗아갈 테니까. 차가 멈춰섰다. 이번에도 지민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길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그래. 조심히 와요.”


 연화가 내리기 위해 문을 열다 말고는 그대로 손을 뻗어 지민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지민을 향해 조심스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지민은 그 얼굴을 기억에 가둬놓을 뿐이었다. 연화가 차에서 내려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언제나처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그녀의 층에 도달하는 데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연화라고 긴장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청과 지민, 심지어는 옥경에게도 태연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건 제 노력이기도 했지만, 그간의 연화로서의 습관이기도 했다. 연화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제가 곱씹었던 말이었다.


 “다쳤다면서. 몸은 좀 괜찮니, 연화?”


 들어서면 연화보다 더 여유로운 모습의 그녀가 있었다. 연화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만큼의 여유를 따라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초연함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 사실 연화는 그 이유 중 하나를 알 것도 같았다. 그녀 역시, 연화였으니까. 지금의 연화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연화. 사무실 내부로 들어서기만 해도 담배 냄새가 짙게 났다. 연화는 손을 들어 허공에 몇 번 저어보였다. 그녀는 연화가 다쳤다는 소식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소식이 있을까? 어쩌면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다 알고 계시네요. 괜찮아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어? 부르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말이야. 신선해서 재밌네. 할 말이 뭐야?”

 “앉아도 되죠?”

 “어어, 그럼. 앉아. 앉아서 편하게 얘기해보자구.”


 그녀가 연화에게 어서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여전히 반대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었다. 연화가 자연스럽게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그제야 연화를 바라보던 그녀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껐다. 그녀가 등을 소파에 쭉 기대곤 팔을 자연스럽게 내려놓았다. 연화의 얼굴은 은은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밀리면 안 됐다.


 “중대한 일이긴 한데, 허락을 구하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그렇다고 알려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도움이 필요한 것도 맞고.”

 “당당하네. 좋아, 들어는 보자. 무슨 일인데?”


 그녀가 소파에 기댔던 상체를 끌어 올렸다. 연화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는 듯 상체를 연화 쪽으로 기울였다. 연화는 입안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연화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녀가 손톱으로 일정하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두양애를 쳐보려고요.”

 “…하. 두양애를 친다라, 음, 그래 뭐. 흥미로운 이야기네. 연화가 두양애를 알고 있다는 건 내 예상에 없던 일이긴 한데.”


 그녀가 짧게 실소를 터뜨렸다. 연화는 두양애라는 음절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연화는 그녀의 반응을 읽기 위해 애썼다. 순순히 긍정의 답을 내놓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갑자기 찾아와 하는 이야기로는 적절치 못했으니까. 그러나 연화가 그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누구도 그녀의 속을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었다. 연화의 삶을 살아온 이였다.


 “그런데 내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고? 누구 마음대로, 연화. 누구 때문일까. 설마 예양?”

 “그냥 제가 그러고 싶어졌어요.”


 그녀의 입에서 예양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녀가 모르는 사실은 없다. 연화는 비죽 튀어나오려는 실소를 간신히 참아내었다. 그녀는 이미 예양까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그냥 둔 것은 어째서일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저번 크라톰 거래로 인해 예양의 안위에 대해 물어보던 그때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을까? 연화의 눈앞에 같은 공간에서의 다른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왜 예양을 그냥 두었을까. 어떠한 연유로.


 “설마 연화가 말로만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한 건 아니겠지. 나를 어떻게 설득시킬 거니? 어디까지 알고 왔어?”

 “설득도 안 하려고요. 잘못되면 리안화까지 끌어내리죠, 뭐. 디아바이오에서 넘긴 자료, 복제에 대한 거 맞죠? 두양애가 그거에 눈 까뒤집는 모양이던데요.”

 “너 지금 나한테 협박을 하러 온 거였구나?”

 “협박이라고 느끼셨으면 어쩔 수 없네요. 그냥 말씀만 드리러 온 거예요.”

 “두양애랑 이번 연화랑 끊어놓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다 물거품이네. …그래,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봐. 살아남고 싶으면.”


 감사합니다. 연화가 말했다. 그녀가 다시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담배를 한 개비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담배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남고 싶으면, 그 어감이 이상했다. 그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연화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상념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생각보다 그녀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연화에게 호의적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연화는 원하는 대답을 얻어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예양의 소속을 알면서 리안화에 남겨둔 것부터, 제게 한 대답까지. 모두. 그녀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연화에서 리안화의 그녀로 자리잡은 것부터가.


 “그런데 말이야, 연화. 모든 게 다 연화 뜻대로 되겠어? 어떻게 생각해. 다 계획대로 되리라고 확신해?”

 “…….”

 “분명 어긋나는 일이 생길 거야. 이건 내가 확신할게. 도와줄게, 연화가 원한다니까. 나는 연화한테는 우호적이거든, 내가 겪어봐서 그런가. 근데 연화, 이건 확실히 하지. 내가 도울 마음이 있는 건 연화가 먼저야. 나머지랑 고르라면 단연 연화라고. 알아듣겠니? 그러니 내가 네 어긋난 계획에 멋대로 침범해도, 너무 열 내지 말라구.”


 그 애는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쓸쓸함이 감도는 말이었다. 연화는 덧붙인 그 말에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타는 냄새뿐이었다. 그 어떠한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연화, 그것은 이제 제게 붙은 이름이니. 떠올릴 수 있는 이름조차도 없었다.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었다. 이름이 없었다. 연화는 그 찰나의 순간에서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조만간 다시 올게요. USB 드리러. 연화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혀 보이곤 걸어 나왔다. 그녀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연화.”

 “응.”


 조수석에 연화를 태우고 운전 중이던 지민이 조심스럽게 연화를 불렀다. 지민은 돌아오는 그 짤막한 대답마저도 달게 느껴졌다. 지민은 이내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음절마저도 사랑한다는 걸, 연화에게 말하고 싶었다. 한참이나 말이 없자 연화가 고개를 돌려 지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유난히도 왜 근래 들어 자주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몰랐다.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연화, 저에게 시범을 보여주던 연화. 며칠 전 총을 들고 있는 연화를 본 탓일까? 연화가 안고 있던 절망. 지민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총을 들지 않았던 이유, 그리고 다시 총을 든 이유. 그 모든 이유에는 지민이 있었다. 지민은 알고 싶었다. 연화의 모든 것을. 그리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리안화에 들어오기 전에 말이야. 부산에 있었다고 했지.”

 “응, 그랬지.”

 “언제쯤 부산을 떠난 거야?”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에 연화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지민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도 지민은 그 답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모두 기억해 두고 싶었다. 물어보지 못해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신호에 걸렸다. 차가 잠시 정차했다. 연화가 자연스럽게 지민의 손을 잡았다. 지민은 연화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꼈다. 잡은 두 손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내 다시 깍지껴 잡았다. 지민은 그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화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연화의 절망을 껴안기 위해 놓아야만 한다면, 저는 그렇게 할 것이었다. 연화가 잠시 고민하는 듯 뜸을 들였다. 그 사이에 신호가 바뀌었다.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열셋쯤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어디 정착해서 살았던 것도 아니었어. 그냥 떠돌아다녔지. 근데 이건 왜?”

 “…그냥. 한 번쯤은 마주친 적이 있지 않을까 하고.”


 부산이 얼마나 넓은데. 웃음 가득한 연화의 말에 그냥 지민도 웃어 보일 뿐이었다. 연화는 지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었다. 제가 연화를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지민은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켰다. 지민의 목젖이 꿀렁거렸다.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연화를 만났어야 했다. 애초에 부산에서 연화를 만났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제가 연화를 데리고 도망쳤더라면. 연화와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았더라면. 그랬으면 연화가 안은 절망감을 없앨 수 있었을까. 연화의 시선이 지민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민은 웃었다. 연화가 그랬던 것처럼.


 “씻고, 잠깐 쉬다 나와. 이따 저녁 먹으러 가자.”

 “알겠어요. 연화도 좀 쉬고.”


 연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화의 방문이 닫혔다. 지민은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민은 그대로 방문을 닫았다. 그러곤 침대 쪽을 향해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침대 옆 테이블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눌러쓴 모자 탓에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제이였다. 둘은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깨지지 않을 침묵 같았다. 지민이 느지막하게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제이가 지민을 향해 총을 겨눴다.


 “지민, 너도 예상하고 있었겠지.”

 “당연하지.”


 제이의 총을 든 자세가 낯익었다. 지민이 알려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이의 사격 자세는 지민을 닮아 있었고, 지민의 사격 자세는 연화를 닮아 있었다. 되려 긴장한 것은 지민이 아니라 제이였다. 지민은 저항할 의사가 없다는 듯 제 양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지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담담했다. 오히려 문을 제대로 닫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와는 반대로 제이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지민이 너무나도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이는 그 비 오는 도로를 떠올렸다. 저는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눈을 감아도 죽음을 목도하던 장면이 재생되었고, 잠을 자면 그 장면이 꿈에 나와 자신을 괴롭히는 탓에 잠을 청하기도 어려웠다. 지민은, 그것을 일상처럼 여기고 있었다.


 “임무가 내려왔어. 너를 처리하라는.”

 “나만 없어지면 돼? 그것뿐이라면 나는 상관없어. 나머지는 머리 좋은 네가, 연화를 다치지 않게 할 방법만 생각해줘. 그거면 돼. 나 혼자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안 나오더라고. 너라면 할 수 있겠지.”


 지민의 말에 제이가 제 입술을 씹었다. 제가 아는 박지민 그대로였다. 언제나 초연해 보이는 그 모습. 어떤 절망에라도 뛰어들어 보일 마음. 모두 연화를 향한 것이었다. 제이는 그 마음을 알았다. 언제부터 지민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제 기억 속 지민은 언젠가부터 그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저와는 달리. 지민을 향해 총을 겨눈 손이 잘게 떨렸다. 손에 땀이 맺혔다. 저는 이미 모든 걸 결정했다. 그의 얼굴을 보기 전부터.


 “연화만 다치지 않게 해줘. 다 결정하고 온 거 아니야?”

 “맞아, 이미 결정했지. 근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욕심부릴게. 미안하다, 박지민.”

 “빨리 쏴. 공격할 때는 망설이지 마. 안 그럼 네가 다치니까.”


 제이가 한쪽 눈을 감았다. 숨을 참았다. 문득 부산에서의 열기를 떠올렸다. 갑자기 그 기억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제 또렷한 기억은 모든 것을 생생히 재생시킨다. 작열하는 태양, 흐르는 땀방울. 다문 입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녹아내리던 달콤한 캐러멜. 제이는 돌아가고 싶었다. 지옥 같은 나날이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제이는 돌아갈 것이었다. 결말을 다시 쓰기 위해서. 제가 바라는 결말은, 사실 이게 아니니까. 제이가 제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그래, 제이? 알겠어. 매미 소리와 섞여 들리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제이의 귓가를 맴돌았다.


 연화가 귀걸이를 빼며 저를 비추고 있는 전신거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제 손 위에 있는 귀걸이와 전신거울을 보니 전에 제 귀걸이를 대신 끼워 주던 지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억일 뿐인데도 지민이 저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아 괜히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제 계획에 어긋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 순간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화는 귀걸이를 원목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지민아, 좀 쉬다 오라니까.”


 그러나 연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연화를 끌어안았다. 그래서 연화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연화가 그 너른 등을 끌어안고 버릇처럼 등을 손으로 토닥거렸다. 연화는 안긴 채로 걸음이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강한 힘으로 연화를 안고 있었던 터라 연화는 그저 미는 대로 밀려날 뿐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그냥 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맞췄다. 연화는 잠시 마주친 두 눈동자에서 절망을 읽을 수 있었다. 익숙한 것이었다. 절망을 안은 사람이 또 다른 절망을 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화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그가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붙어왔다. 입술을 약하게 깨물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가 연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얼마나 더 가까워지려는 것인지, 자꾸만 연화는 그 힘에 뒤로 밀렸다. 평소보다 더 급박한 입맞춤이었다. 연화가 목에 두른 손을 풀고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채며 입술을 떼어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그렇게 말하곤 다시 급하게 입술을 붙여왔다. 연화가 손을 뻗어 그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제 얼굴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는 그의 손 위로 연화가 제 손을 얹었다.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으로는 다시 얼굴을 잡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떼어냈다. 그가 깨물었던 아랫입술이 간지러웠다. 연화가 마주친 두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연화를 향해 있었다. 연화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시선이 제 손 아래로 가려진 그의 손목으로 향했다. 익숙한 나비 타투가 보였다. 흉터는 없었다.


 “너, 제이구나?”


 연화가 그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절망감에 가득 찬 두 눈동자 탓에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연화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눈가가 붉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연화가 무심코 그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연화가 그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냈다. 그러나 그는 연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연화의 얼굴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아, 내 이름. …제이.”


 제이가 울컥 튀어나오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 제이라고 부르는 연화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제이는 그만 눈을 감았다. 이로써 모든 게 끝이 났다.


 이제 후회란 없다. 후회는 모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제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 싶었다. 가정은 없다. 모든 것은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 테니까. 지금껏 발휘하지 않은 용기는 모두 이를 위해 비축해두었던 것이 틀림없다. 절망, 두려움, 저의 사사로운 감정까지 모두 안고 재가 될 것이다. 무엇도 더는 살아 숨 쉬지 못하도록.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거울을 보며 닮기 위해 연습했던 그 모습. 영원히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안은 채로, 저는 용기를 낼 것이다.



202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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