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P.S 파트너
03
유쾌하지 못한 주말이었다. 평소였다면 늘어지게 늦잠을 자거나 백현을 만나거나 혹은 백현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마주친 표범으로 인해 신경이 곤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월요일 아침 학교로 향하는 얼굴이 그 전보다 휑해졌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 정문을 들어서며 신경을 곤두 세웠다. 혹시라도 그와 또 다시 마주친다면 그대로 숨거나 도망갈 생각이었다. 진짜 휴학이라도 해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다 얼마 남지 않은 수업시간에 급하게 강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정문에서 준면을 기다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긴장한 상태로 있었더니 평소보다 훨씬 피곤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날 잡은 준면과의 저녁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조금 늦어지는 준면에 신발 앞코로 바닥을 툭툭 쳤다. 제 발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옆에서 두드려 오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형,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
“배고파.”
“뭐 먹을래? 빨리 가자.”
금방 메뉴를 정하고 나란히 학교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리를 잡고 앉은 준면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맞다. 경수야, 내 동생 오기로 했는데 괜찮아?”
“그 올해 입학했다는?”
“응. 자취해서 얼굴 보기가 힘드네.”
“뭐, 상관없어.”
그 후로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온 음식에 서둘러 젓가락을 움직였다. 한 두입 먹다 생각난 김에 말을 꺼냈다.
“형, 우리 학교에서 형 말고 표범 본 적 있어?”
“내 동생 말고는 본 적 없는데? 왜?”
“아니, 그냥.”
다시 고개를 음식으로 돌리고 다시 수저를 드는데 또 다시 표범의 페로몬 향이 났다. 준면의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향이었다. 신경이 곤두섰다. 갑작스레 긴장한 제 기운에 준면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 봤다. 그리고는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선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 온 그는 준면이 형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신이 있다면 그는 내 편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또 보네요, 도경수씨.”
식사 자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저녁 생각이 없다는 그는 음식을 먹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눈길에 먹은 음식이 되려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식사가 끝나 갈 즈음 준면이 형은 마저 끝내야 할 보고서가 있어 학교로 돌아가 봐야 한다며 계산을 하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형을 따라 얼른 자리를 벗어나려던 내 계획은 나를 잡아 오는 그의 손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에게 끌려오다시피 온 카페에 앉아 그와 마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 책, 제가 가지고 있어요. 언제 드릴까요?”
저 말은 그와 또 다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더 이상 마주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준면이 형 통해서 주세요.”
“직접 줄건데요?”
웃음기를 띤 그 잘생긴 얼굴을 할 수만 있다면 한 대 떼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기요.”
“김종인이요.”
“네, 김종인씨. 부탁인데 그냥 모르는 척 해주면 안돼요?”
“그건 싫은 데요.”
“아, 진짜. 저한테 원하는 게 뭔데요!”
말장난 같은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말소리가 높아지고 말았다. 주변의 시선에 괜히 움츠러들었다 그를 노려봤다. 그 순간 코끝에 다시 표범의 페로몬 향이 진하게 닿아 왔다. 급작스레 밀려오는 페로몬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의 나른한 눈빛이 저를 향하며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마치 그날 밤 저를 뒤흔들 던 그 눈빛과 흡사했다.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작게 얘기했다.
“나랑 계속 만나보는 건 어때요?”
그가 꽤, 아니 많이 잘생기고 괜찮기는 했지만 원나잇 상대와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내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에 없던 일을 실천할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유혹을 견디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 달콤한 향에 머리가 잠식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정말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
겨우 정신을 차려 집에 도착해 보니 집 안 여기저기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마 형이 오늘은 일찍 퇴근한 듯 보였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있는 제 형이 보였다.
“형-”
“오늘 학교 가는 첫날이라더니 왜 이렇게 죽상이야.”
“아, 몰라.”
징징대며 옆자리를 꿰차고 앉자 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내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묻혀 온 거야?”
“응?”
“늑대 냄새가 진동을 하잖아.”
“아...”
그제서야 낮에 있었던 세훈과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짧은 찰나 제 기운을 드러내보였었다. 그 때 베었던 그의 페로몬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나 보다. 실은 그 때 세훈으로 인해 제 몸 하나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제 반응을 예상했던 세훈은 저를 친절히 양호실에 데려다줬더랬다. 그가 저를 침대에 눕혀주고 귀를 잘근잘근 씹어댔던 것만 빼면 별탈없기는 했다. 그 행동이 별탈없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학교에서지?”
“....응.”
표정이 구겨지는 제 형을 보자 시무룩해졌다. 그는 항상 자신을 걱정했다. 자신과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이복형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저희 둘의 아버지는 사자였다. 그리고 크리스의 어머니는 악어였다. 중종과 중간종 사이에서 크리스는 아버지의 혼현을 물려받아 태어났다. 저는 아버지의 짧은 외도로 태어난 아이였다. 자신의 어머니는 사슴이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는 사슴의 혼현을 물려받았다. 제가 17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와 대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아버지를 따라 그 집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스물 셋이던 크리스와 만났었다. 뭐, 그 집에서의 생활이 나쁘지는 않았다. 크리스의 어머니는 제 남편의 외도에 크게 개의치 않았으며 저 역시 크리스와 별반 다르지 않게 대해줬다. 그녀는 보이는 것 보다 훨씬 호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는 여섯 살이나 어린 다 큰 제 이복동생을 끔찍이도 감싸고돌았다. 그에게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이 있었다. 집안에서 유일한 경종인 자신에 대한. 가족들은 항상 집안에서 제 혼현을 더욱 더 철저히 감추었다. 그 사실이 못내 미안하던 차, 대학 진학을 중국이 아닌 한국으로 결정했다. 부모님은 그 결정을 존중했으나, 크리스는 자신의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에 새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저와 함께 한국행을 택했다.
“어떤 새낀지 말해.”
형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꼭 사자가 으르렁 대는 것 같았다. 강해진 그 혼현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형은 곧 제 기운을 갈무리하고는 어깨를 잡아오며 다시 물었다.
“미안.”
“신경 쓰지 마. 실습 나간 학교 학생인데. 한 달만 버티면 되니까.”
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 머리를 흩트리며 말했다.
“내일부터 데리러 갈게.”
“안 그래도 돼.”
“내가 안 돼. 한 달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게 해.”
그의 강경한 말투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고 다짐에 가까운 말을 했다. 진짜 괜찮겠지 하고 스스로 반문해 보았으나 확신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한기에 가볍게 몸이 떨려왔다. 몸에 베어 익숙해 졌던 늑대 냄새가 미약하게 흘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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