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30분이 되자 어김없이 알람소리가 울렸다. 침대 옆 협탁 위로 팔을 뻗은 민석이 손을 되는대로 휘젓는 바람에 시계가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하게 울리던 알람소리가 뚝 멈췄다. 민석은 아직 잠에 덜깬 눈을 비비며 올 겨울에 산 러그 위로 내리섰다. 반쯤 뜬 눈으로 더듬더듬 걸음을 내딛던 그는 협탁에 발을 찧는 바람에 그만 걸레질한 마룻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툴툴대며 침대를 잡고 일어난 그가 그제서야 안경을 찾아썼다. 안경쓰는게 싫었지만 시력이 형편없는 데다 콘텍트 렌즈는 체질상 맞지 않았다. 방문 옆에 걸린 거울에 눈끝이 쭉 올라간 채 입술을 비죽 내민 서른살 먹은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울을 향해 혀를 장난스레 한번 내빼준 그가 까치집을 지은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목이 다 늘어난 회색빛 티셔츠에 그에 걸맞는 골반까지 내려온 헐렁한 바지 서른살 노총각의 모습을 보여주는듯 했다. 비척비척 거실로 나온 민석은 거실 커텐을 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겨울에 비라니 최악이야. 라고 생각한 그가 시계를 보고는 느릿하게 셔츠를 벗고는 장롱을 뒤져 새하얀 니트를 꺼내 입었다. 작년 이맘때 쯤 서울에 올라가겠다고 집을 부랴부랴 싸던 그에게 제 어머니는 신경쓰지 않는척 하시며 가방옆에 던지듯이 놓아둔 니트였다. 그때에는 짐만 될거라고 놓고가려 했던 것을 무슨일이 있어도 가져가라고 걱정아닌걱정을 해주시던 어머니가 고마워지는 순간이였다. 소파에 앉은채 무료하게 시계 초침의 움직임을 쫒던눈을 거두고 일어나 욕실로 들어섰다.
"아, 차가워!"
생각없이 물을 틀던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분명 주인집에서 물온도를 예열해놓지 않은 탓이였다. 눈이 처진 선한 아주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술을 비죽였다.
문앞에 의자를 끌어당겨와 거울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는 그였다.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는 얼굴을 거울로 가까이 한채 한참동안 자신의 얼굴 이곳저곳을 매만져보다 이내 어깨를 축늘어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2013년, 그가 서른으로 들어선 시기이다. 그래도 작년까지만 했어도 나름 이십대라고 자부했었는데. 남자치고는 가느다랗고 예쁜 손으로 얼굴을 늘어트려보기도, 주물러 보기도 해가며 나이치고 나름 탱탱한 피부에 다시 자신감이 생기는 민석이였다. 적어도 일년전까지만해도 이렇게 거울앞에서 자신의 피부상태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적 여유따위는 없었다. 디자인 학원도 다니고 느즈막히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며 나름 바쁘게 살아가던 민석이였지만 이제는 그렇다할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희는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채용하지 않습니다
이말에 민석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니던 디자인 학원을 끊고 방안에 있던 디자인에 관한 모든것들을 치워냈다. 그러고는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고 지금의 민석에 이르게되었다. 대학도 디자인학과에서 차석으로 졸업한 몸에다가 많은 대회에서 입상도 했었지만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다 하여 까인게 벌써 손으로 꼽고도 모자랄정도였다. 나름 저 정도면 해외는 몰라도 국내에서 알아주는 디자이너가 될거라고 자부하던 민석은 이제 한낱 파트타임 알바생에 불과했다. 축늘어진 자신의 발끝을 보며 입을 오물거리던 민석은 고개를 퍼뜩들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자, 이제 쓸데없는 과거팔이는 그만하고 일이나 나가자. 침대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검은색진을 껴입고 입고있던 하얀니트위에 도톰한 검은색 야상을 입었다. 그런 다음 답지않게 추위를 생각한 털달린 모자를 쓰고 큰 백팩을 맸다.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한 그는 느릿느릿 거북이 마냥 발거음을 떼고 털이 수북히 달린 워커를 신었다. 그러고는 등을돌려 빈집에 꾸벅인사를 한채 문을 열고나갔다.
김민석씨 또 지각입니까?
직장상사의 호통이 사무실안을 울렸다. 집에서 부터 늦장을 부리던 그는 타야할 버스를 간발의 차로 놓쳐버린 바람에 회사에 늦어버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숙인채 아무말 없이 발장난만 치던 민석이 한말이였다. 그제서야 마음이 그나마 풀린건지 '자리로 가봐요 그럼' 이라고 한 상사가 그자리에 털썩앉았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백팩 가방끈을 다시한번 고쳐잡은 그는 힘없이 터덜터덜 자리로와 앉았다.
"오늘도 지각이냐? 우리 파트타임 김민석씨 조만간 짤리겠네-"
기분이 풀리기도 전에 옆자리로 쪼르르 달려와 비아냥대는 동료 백현의 말에 가슴에 참을인자를 새기는 그였다. 세번참는자에게는 복이 있을지어이. 큰 눈을 부릅뜬채 백현을 노려보자 민석과 맞먹는 큰눈을 부라리며 자리로 돌아간다. 하아, 도움이 안되는 새/끼. 라고 중얼대던 민석은 더 큰한숨을 내뱉으며 책상위로 이마를 박았다. 저런 새/끼한테도 공적인 자리에서 조아려야 한다니. 자신의 신세를 불쌍하게 여기고는 머리를 한껏 헝크려트렸다. 백현은 나름 이 회사 옴므의 정직원이였고 민석은 파트타임 직원일뿐이였다. 말이좋아 직원이지 알바생에 불과한 위치였다. 새삼 자신의 위치를 느낀 민석은 자리에서 몸부림을 쳐댔다.
"김민석씨 오늘 회장님 오더에요 늦으면, 아시죠?"
말끝에 알수없는 미소를 지은 박대리가 민석의 어깨를 톡톡치고는 바쁘게 어디론가 나갔다. 알죠, 이번에 늦으면 파트타임이고 뭐고 길바닥에 내쫒아진다는 사실을 잘 알죠. 저번에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십분 지각을 했단 이유로 징계위원회가 열렸으니 얼굴도 모르는 회장님이지만 얼마나 깐깐한지를 알수가있었다. 민석은 파트타임의 심부름꾼이긴 했지만 이래뵈도 회사안에서는 옴므 회장의 악세사리를 배달하는 회장직속부하직원이기도 했다.
오더종이를 손에 쥔 민석은 마른입술에 침을 축였다. 오늘도 어마어마 하시네. 종이에 적혀진 공을 세보던 민석은 혀를 내둘렀다. 이번꺼는 잃어버리면 완전 끝장이겠네 끝장. 털모자를 푹눌러쓰고 백팩에 종이까지 꼼꼼히 챙긴 민석은 힘찬걸음으로 회사를 나섰다.
-
12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새하얀이불속에서 무엇인가가 꼼지락 대더니 이내 동글동글한 머리통 하나가 밖으로 툭하니 나왔다. 아무도 듣지않는 상황에서 오분만, 오분만을 중얼대던 남자는 힘없이 이불을 밀어내고는 욕실로 들어섰다.물을 틀자마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수증기에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회장님
..
회장니임-
..
야, 루한
..
어딘가 모르게 인상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그의 비서 준면은 오늘 역시 조마조마한 운전을 하고있다. 마지막으로 루한의 이름을 불렀을땐 대답이라고는 아왜! 뭐뭐뭐! 그래서 왜 계속부르는데! 라는 신경질적인 대답 뿐이였다.
"…오늘 쥬에 회사랑 디너 잊지 말라고"
준면이 말을 끝마치자 아랫입술을 비죽하고 내밀었다. 어딘가 모르게 뜨거운 시선에 백미러를 통해 루한이 앉은 뒷좌석을 보니 역시 거울을 통해 자신을 노려보고있었다.
"김준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오는 루한의 모습에 살짝 주늑든 척 잔뜩 웅얼대는 목소리로 응? 하고 대답을 했다.
"내가 입술 삐쭉대지 말랬지, 잘릴래?"
잘릴래. 저말은 말끝마다 달고사는 말이라 준면은 무서울리가 없었다. 오늘 아침부터 좋은아침이 아닌 잘릴래? 부터 들은 준면이니 말이다. 느에느에 알겠쯥니다, 저 고집불통을 누가 말려. 어린아이 한명 키우는 셈치고 일을 하자 마음 먹었던 준면의 다짐이 더 굳어지는 시점이였다. 루한도 그럴것이 어린나이에 자수성가 한다고 많이 힘이 들었을테고 그 자리를 지켜내야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말로 이룰수 없다는 것을 준면은 잘알고있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타 회사들에게 세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는 그에게서는 어릴적부터 알던 자신은 유일한 안식처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열심히 회사를 향해 차를 몰던 준면이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창문을열었다. 민석씨!!!!!! 하고 부른 그곳에는 한손에는 우산을, 또 한손에는 쇼핑백을 한아름 들고 위태위태 하게 걷는 민석이 있었다. 준면의 부름에 큰 눈을 한껏 뜨며 어! 김경호원님! 하며 아는척을 해왔다.
"김준면 뭐하냐, 안가?"
의자에 등을 기대 눈을 감은채 잠을 청하던 루한은 소란스러운 준면의 목소리에 미간을 좁히며 준면을 쳐다봤다. 그런 루한은 보이지 않는지 민석과 웃으면서 대화하는 준면이였다. 발을 뻗어 운전석 뒤를 두어번 툭툭 쳐보기도 했지만 저를 차갑게 째려 보기만 할 뿐.
"민석씨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봐요?"
준면의 물음에 인상을 팍쓰던 민석이 입을 열었다.
"아 그게 회장님이 오늘도 오더를 이만큼씩이나.."
하고 울상을 지으며 들고있는 쇼핑백들을 들여보였다.
"회사 차 안써요?"
"오늘 정기검진이래요.."
입술을 쭉 내밀고 눈을 축 내린 민석이 순간 차에 가까이 붙었다.
"준면씨 회사가시는 거죠! 그쵸!"
민석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을 눈치챈 준면이 슬몃 뒷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곳에서는 죽일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루한이 있었다.
"ㅇ, 어쩌죠 민석씨 회사가는게 아니라 개인업무 보러가는건데.."
어색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준면이 민석의 표정을 보기 미안했는지 죄송해요!라고 외치고는 잽싸게 창문을 올려 악셀을 밟았다.
"쟤 뭐야, 회장비서한테 차태워달라는건 무슨 생각이야. 못생긴게"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뒷유리를 통해 낑낑대는 민석을 끝까지 보던 루한이 말했다. 그런 루한을 더 아니꼽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준면은 생각했다. 지가 극비로 내 직책을 알리지 말고 회사 경비원으로 알리자 했던건 기억이 나지않는건지, 회사에 면접을 보러온 민석을 보고 놀려먹기 좋겠네 라며 정직원이 아닌 심부름꾼으로 뽑은것도 기억이 안나는건지, 저런 사람에게 우리회사의 미래를 맡겨도 좋을까. 라고. 루한의 끊임없는 불만에 고개를 휘휘 저은 준면은 유하게 핸들을 돌려 사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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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 걍 신혼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