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끝의 시작.>
날카로운 치아가 단숨에 질긴 피부를 뚫었다. 벌어진 상처에서 사내의 체온과 같은 온도의 액체가 울컥, 샘솟았다. 소녀의 붉은 입술이 사내의 상처를 덮고 여린 살을 깨물자, 사내의 몸을 데우던 혈액이 금새 소녀의 주린 배를 채웠다. 소녀는 사내를 살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 사내의 피를 빨던 입술을 떼고, 그가 제 의식을 되찾기를 기다릴 적절한 시기를. 그녀는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사내를 쓰러뜨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억눌러온 본능적인 굶주림은 결국 그녀의 알량한 선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죄책감이 소녀의 시야를 흐려놓았다. 그녀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사내의 머리칼에 맻히고, 끝내 그가 옅은 헐떡임을 멈출 때까지. 그녀는 사내의 새하얀 목을 놓아주지 못했다.
2. 〈오늘; 복숭아 돌고래.>
무딘 사포를 쥔 탄소 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커다란 방진 마스크에 반 이상 가려진 채 붉게 상기된 탄소. 의 얼굴에 방울진 땀이 맺혔다 부러 숱을 적게 잡아 단정하게 내린 새까만 앞머리는 그나마 드러난 이마를 듬성듬성 가려놓았다. 탄소 는 목장갑을 낀 마른 손으로 작은 나무 조각의 표면을 다듬고 있었다. 나무의 질감을 간직한 돌고래가 그녀의 손에서 이리저리 헤엄쳤다. 벌써 몇 년째, 그녀는 손에서 이 작은 돌고래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의 손바닥 만했던 나무 조각을 깎아내고 다듬어 구색을 갖춘 지가 오래인데도 탄소의 눈에는 그 작은 돌고래 조각이 늘 어딘가 어색하기만 했다.
점심 때가 훌쩍 지났는데도 탄소 은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하면 끼니를 거르는 것은 예사였지만 이렇게 오래토록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것은 실로 간만이었다. 크게 창을 낸 작업실은 오후 여섯 시가 훌쩍 지나서야 해가 지곤 했다. 작품을 만드는 게 불편해질 정도로 방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탄소 은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조촐하게 늦은 저녁을 챙겼다.
그녀의 작업실이자 보금자리인 공방에 노란 불빛이 밝혀졌다.
빛이 없으면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하고, 공기가 없으면 숨조차 쉬지 못하는 세상이 그녀에게는 여전히 낯설었다. 단 한번의 선택으로 이전에 누리던 모든 것을 잃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에는 그녀 곁에 남은 이가 너무도 없었다.
세월의 흐름에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100L 짜리 냉장고의 문이 열렸다. 김자반과 즉석밥, 미리 받아놓은 수돗물의 틈을 이리저리 방황하던 탄소 의 손이 결국 물병을 집어든다. 낡은 플라스틱 물병을 돌려 열 힘도 없는지 탄소 의 손이 몇 번을 헛돈다. 종내 이가 시릴만큼 찬 물이 뱃속에 들어차고, 텅 빈 위장을 찌르르, 하고 울려오는 통각에 탄소의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배를 채운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몇 모금의 물로 삶을 연명한 것이 벌써 일주일 째인데도 탄소 에게는,
느껴지는 바가 없다.
3. 〈지민의 기억; 교복과 유니폼.>
투명한 유리문이 힘차게 열리더니 교복을 단정히 자려입은 여학생이 가게에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지민의 건조한 눈길이 문가에 달아놓은 유리종에서 여학생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로 옮겨간다. ' 허탄소.'
정갈한 세 글자의 이름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메이플 라떼 한 잔 주세요."
여학생, 탄소 이 별다른 고민없이 주문을 마치고는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곱씹던 지민의 시선이 탄소 의 것과 얽혔다. 당황한 지민은 황급히 카운터 뒷 편의 조리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메이플 라떼, 메이플 라떼 레시피가 뭐더라. 귓바퀴가 밝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추태람.
지민은 커피 원액과 우유를 말랑한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따랐다. 뒷통수가 따가웠다. 라떼에 메이플 시럽을 뿌리고, 각얼음 몇 조각을 컵에 옮겨 담는 내내 등줄기에 찌릿한 설렘이 감돌았다. 가득 들어찬 라떼가 지민의 손길에 따라 흔들려 얼음과 섞였다.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지민은, 지금 이 잔을 탄소 에게 건네주면 그녀가 가버릴 것을 알았다. 처음 본 고딩에게 느껴야할 바람직한 감정이 무엇이던가. 그는 이미 제 안에 살아숨쉬어야 할 윤리와 그 밖의 모든 것들이 - 이를테면 그녀의 법적생년월일과 자신의 출생년월일 사이의 격차에 따른 아동 청소년 법의 발효 여부 따위가.- 저 멀리로, 아득히 떠나버리는 것을 느꼈다.
탄소 의 교복과 자신의 유니폼 사이의 괴리감 같은 것을 모두 배제하고서라도, 그에게 이런 감정은 낯선 것이었다. 학비나 벌자고 하는 알바에서 처음 본 손님에게 반한다는 건, 다른 이에게는 몰라도 지민 자신에게는 너무도 한심스런 짓이었다. 스스로의 현실이 달콤한 연애와는 동떨어져있음을 그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지민은 스스로에게 고개를 저었다.
"주문하신 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라떼를 받아든 탄소 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고는 카운터에서 멀어져갔다. 역시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탄소 이 유리문을 밀어열자 달랑달랑 매달린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그녀는 이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침내 마감에 가까운 시간이 왔다. 지민의 마음 속에 내일도 그녀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쓸모없는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났다가 다시금 펑 하고 터져버렸다. 곰팡내 나는 탕비실에서 대걸레를 꺼내서 넓지도 좁지도 않은 카페 내부를 닦아내는 내내 지민의 눈 앞에 탄소 의 눈매가, 입꼬리가, 콧방울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옅은 쌍커풀이 진 눈매도 예쁘고, 차갑게 굳은 일자 입꼬리도 예쁘고, 조그맣고 오똑한 콧대조차도…. 지민의 귓바퀴가 다시금 달아올랐다. 구름 위를 걷는 듯 마음이 따갑게 붕붕 떠올랐다.
은혜로우신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지민은 더 이상 청소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발은 분명 바닥을 딛고 서 있는데도 머리카락이 자꾸만 쭈뼛대고 뻗쳐 오르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밤 바람이 절실했다. 한 겨울의 추위는 그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해줄 것이었다. 비참하고, 어두운 현실로.
불도 밝히지 않은 탕비실에 대충 대걸레를 던져놓은 지민은 낡은 파카를 걸쳤다. 하늘하늘한 털이 달린 모자도 꾹 눌러썼다. 집으로 갈 시간. 몸과 마음이 가장 편해야 할 공간이 그에게는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카페를 나오자마자 갖은 걱정에 저 멀리 밀려나가는 탄소 의 얼굴이 다행이었다. 현실은 냉혹하니까. 지민의 고개가 더 깊숙히 파카 속으로 파고 들었다.
4. 〈지민의 기억; Saint John>
디지털 도어락이 단출한 전자음을 울리며 해제되었다. 지민은 철제 문고리를 돌려 열고 현관에 들어섰다. 보일러가 가동 중인 집 안의 공기는 훈훈했다. 살을 에는 겨울 바람에 시리게 얼어붙었던 귀가 녹더니, 슬슬 간지러워졌다.
딱 이 공기만큼의 관심이, 지민이 제 가족 구성원들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밥은 먹었니, 오늘 힘들지는 않았니, 따위의 일상적인 질문들.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 때문에 힘들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좋았다. 그는 그저 이 집에 네가 돌아왔구나. 잘 자고 내일 보자. 하는 암묵적인 의미를 가진 단순한 질문들만을 바랐다. 밥은 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따뜻한 눈길 한 번, 인기척에 따른 고갯짓 한 번,
그러나 지민의 이모와 그 남편, 그리고 그녀의 아들은 그의 작은 바람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들에게 지민은 지긋지긋한 암 덩어리였으며 현대 사회의 진정한 악이었다. 또한 그들은 종종 지민의 부모를 입에 올리고는 했는데, 그 대화에는 매번 십 삼년 전의 교통사고가 함께 언급되었다. 머저리같은 아홉 살 배기의 아들 놈을 꼭 껴안은 채 죽어버린 여자나, 그런 그녀를 감싸안고 같이 죽어버린 남자나. 그들에게는 이유없이 그저 미천하고 천박한 족속들이었던 것이다.
지민은 눈 앞에서 제 죽은 부모가 모욕당하는 꼴을 보고서도 한 번 성을 내본 적이 없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린 집 바깥 세계의 냉혹함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야 이 씨발 좆같은 새끼야, 너 이리 와봐."
지금 제 눈 앞에 서 있는, 꼭 지옥불에서 살아나온 악마같은 모습을 한, 그의 사촌 형 - 태형 -이었다.
"...어?"
대답이 늦었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아. 오늘은 밤이 참 길겠구나. 지민은 당당하게 보이기 위해 애쓰며 태형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왜...?"
피차 다 큰 성인인데다가 나이 차이라고 나는 것도 고작 한 살 터울일 뿐이었는데도 태형에게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움츠러드는 제 어깨를 지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부르면 부르는 거지, 이유는 왜 물어?"
태형이 험악한 표정으로 지민을 내려다보며 빈정댔다. 지민이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몸을 떠는 꼴이 우스운지 태형의 콧웃음이 지민의 앞머리에 와닿았다. 곧, 웃음기어린 태형의 목소리가 지민에게 물어온다.
"넌 내가 무서워서 자꾸 피하고 그러는거냐."
지민은 '내가 무서워서 그러냐.'는 질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민이 아홉 살 철부지였던 그 시절부터 익숙해져야만 했던 것이 바로 태형의 거친 언행이었다. 차라리 저를 비꼬고, 고운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어른들이 나았을 정도로 태형은 지민을 가만두지 못해 안달이었다. 적어도 사나흘에 한 번, 사정이 안 좋을 때면 하루에 한 번 꼴로 자행되었던 끔찍한 폭행과 폭언. 그런 것들을 겪게 해 놓고 이제 와서 '내가 무서워서 그러냐.' 고? 지민은 저도 모르게 치미는 분노에 시선을 올려 태형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일까. 그의 얼굴을 보게 되면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씨발, 뭘 보냐, 너 지금."
순간, 번쩍 하고 눈 앞에 불꽃이 튀었다. 지민은 순식간에 날아온 태형의 주먹질에 놀라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 위로 한 겹, 한 겹 덧대어지는 격한 발길질에 지민은 신음했다. 팔, 다리를 오므려 얼굴과 몸통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애쓰는 모습이, 퍽 애처로웠음에도. 그 마른 몸 위에 올라탄 태형은 이유 모를 분노에 떨며 지민을 향해 끊임없이 주먹을 날렸다.
"왜! 도대체 또 왜 이러는 건데!"
고통에 신음하던 지민의 터진 입술이 달싹이며 비명을 내지르자, 놀란 태형의 주먹이 갈 길을 잃은 듯 멈춰 섰다. '왜'...? 태형조차도 감히 스스로에게 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래, 자신은 왜 이러는 걸까. 왜 지민을 처음 보던 열 살 무렵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왜 자신은 지민을 볼 때마다 이유 없이 화가 나는 걸까. 태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오늘은, 밤이 길 듯하다.
****
하핫..... 정말 간만이네여.............. 중간 중간 똥글을 쌌다가 치웠다가 쌌다가 치웠다가 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써보려구요..
에.. 아무튼 이 글은 뱀파이어 물이구여.. 과거랑 현재가 시그널보다 자주 왔다 갔다 할 것 같아여...
##윤 (이)는 되게 비중이 커여!!! 이번화는 별로 없었찌만...(울뛰) 아 되게 아련해지네여.. 이번에도 망할 것인가!! 기대해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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