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未練)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
개강 전 친구들과 함께 가진 자리에서 신이나 잔뜩 마셔댄 탓인지 평소 술을 잘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취기가 계속 올라오는 듯 했다. 나름 계속해서 정신을 차리며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손에 쥔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들려온다.
[ 아직 애들이랑 만나고 있어? ]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니 지민이가 보낸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곧바로 친구들과 헤어져 집가는 길 이라고 답장을 하니 머지않아 전화가 걸려온다.
" 애들이랑 잘 놀았어? 술은 많이 안마셨지? "
" 응, 잘 놀았어. 조금 많이 마시긴 했는데 엄청 취하진 않았어. "
" 데리러갈까? "
" 아니야, 걸어가면서 술 좀 깰게 "
" 알았어, 집가서 연락해 "
" 응, 끊을게 "
누군가 듣는다면 연인끼리 하는 통화라기엔 조금 짧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지민이는 내게 여러가지 배려를 해줬다. 친구들과의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전화하기 전 미리 문자를 하고, 술을 많이 먹었냐 등의 기본적인 걱정들. 작고 사소하지만 모두 나를 위한 배려들이었기에, 미소가 절로 흘러 나왔다. 그렇게 계속 길을 걷던 찰나에 휴대폰에 또다시 알림음이 울렸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방금 까지도 대화를 주고받았던 지민이겠거니 하고 확인한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내 안부를 묻고 있었다.
「 010-××××-××××」
[ 잘 지내? ]
곧바로 누구세요 하며 답장을 보내니,
[ 김태형 ]
얼마 지나지 않아 오직 이름 세글자만 쓰여있는 답장이 도착했다. 그러나 단지 그 세글자뿐인 문자는 나를 당황시키기에 매우 충분했다. 김태형은 몇달 전 헤어진 내 전 남자친구 였으니. 3년을 만나다가 헤어진 김태형과 나는 끝이 좋지 못했다. 3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변해가고 있었고, 김태형은 그걸 몰랐으며, 나는 알았다. 서서히 눈에 보여가는 변화가 두려워 나는 달라지는 김태형을 무조건 적으로 막아섰고, 김태형은 그런 나를 밀쳐내기만 했다. 서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은 채.
'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니가 내 엄마야? 왜 사사건건 간섭이야. '
' 내가 뭐했다고. 이게 간섭이야? 나 니 여자친구야.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관심을 갖는게 간섭이야? '
' 너는 도가 지나쳤어. 너는 나에게 관심을 갖는게 아니라 내 사생활을 간섭하고 있다고. '
' 어디가 지나쳐. 나는 예전처럼 똑같이 대하는데, 니가 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 니 마음에 들면 관심, 안들면 간섭. '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지는 싸움과 격해지는 언행, 그리고 소홀해지는 김태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나는 먼저 이별을 고했다.
' 우리 헤어지자. '
' ...... '
' 어차피 너 나 귀찮잖아. 사사건건 간섭이나 해댄다며. '
' ...... '
' 이제 그런거 그만할테니까, 우리도 그만하자. 너도 지쳤고, 나도 지쳤잖아. 이대로 질질 끌면서까지 우리 관계 이어가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어 '
' ...... '
' 행복해라, 김태형. 3년동안 고마웠어, 진심이야. '
답장을 하지못하지 못한 채 애꿎은 손가락만 허공에 대고 움직이고 있었다. 만나는 3년동안 줄기차게 외워뒀던 번호인데, 고작 몇개월 흘렀다고 이렇게 새까맣게 잊을 줄이야. 시간이 지나 휴대폰 화면이 꺼지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고 멍한 상태로 그저 걸어가기만 하던 도중 손에서 울린 벨소리가 내 정신을 깨워준다. 발신자는 방금 전의 문자와 같은 번호. 머뭇거리다가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으니 그동안 잘 지냈냐며 재차 안부를 물어온다.
" 잘지내? "
" 웬일이야. "
" 그냥. "
" 나 남자친구 있어. "
" 알아. "
" 박지민이야. "
" 그것도 알아. "
" 알면 대체 전화를 왜 한건데. "
" ...... "
" 아무말도 안할꺼면, 나 전화 끊ㄴ, "
" 나는, 니가 박지민이랑 헤어졌으면 좋겠어. "
" 내가 지민이랑 헤어진다고 해서, 너랑 내가 달라질게 뭐가있어. "
" 그래도 연락은 할 수 있잖아. 그냥, 친구로. "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김태형이 그 이후로도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물론 그 사실을 김태형 주위의 동기들 이야기를 몰래 들으며 처음 접했을 때는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지금은 그저 나에대한 김태형의 사적인 감정이라고만 생각되었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다. 혹여 그 사실을 직면했을 때의 혼란이 나를 휩쓰는 것은 물론 지민에게까지 해가될까봐.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사실은 생각치도 못하게 나를 치고 들어왔으며, 술에 취한 나는 그것을 막기에 너무 비정상이었고, 맨정신이었던 김태형은 약해진 나를 파고들기에 너무나도 쉬웠다.
" 나보고 행복하라고 했는데, 행복하지 못해서 미안해. 남으로 새겨넣으려고 하는데, 잘 안되네. 노력은 계속 하고있어. "
" ....... "
" 너는 나처럼 안그래서 다행이다, 싶으면서 원망스럽기도 해. 그동안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는데, 넌 고작 몇개월만에 그게 다 정리가 가능하다는게 말야. 나는 아닌데. "
" ...김태형 "
" 헤어진 여자친구한테, 그것도 새 남자친구가 생긴 여자친구한테 이런소리 늘어놓는게 미친 짓이라는 거, 나도 잘 알아. 그런데 아직도 너는 내게 그런 존재야. 미쳐버려도 아깝지 않은 존재. 너무 벅차서 감히 새겨넣을 수도 없는. 그만큼 많이 좋아해, 아직도. "
술이 확 깬 듯했다. 김태형과의 통화로 인한 여파는 내 마음 구석까지 모조리 쓸고가 혼란을 넘어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통화도 끊지 않은 채로 김태형이 휩쓸어놓은 흔적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마음 구석까지 모두 건들여 놓은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김태형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미 찾아볼수도 없이 메말라버린지 오래였다. 황폐한 땅 위로 메마른 모래바람만 일어날 뿐,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당초 그 소용돌이에는 미안함, 또는 동정심과 같은 감정들이 한데 모여 있었던 것 이었으니 감정이 생길리가 만무했다.
" 김태형 "
짧지 않았던 침묵동안에도 전화를 끊지 않고 있던 그에게 나는 전해야했다. 이미 감정이 메말라 황폐해진 너란 땅에서 일어난 모래바람이 내 안에서 넓혀가고 있는 지민이까지 덮쳐오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았으니. 나는 이미 새로운 사람에게 감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방해받지 않기를 원하기에, 잔인할지라도 너란 폭풍을 잠재워야했다. 얼떨결에 내 안에 급히 얼룩지듯 새겨진 너의 흔적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지민이에게 죄를 진 기분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 사실을 피하지 않아야 했다. 지민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태형, 너를 위해서.
" 나는, 지민이가 좋아. "
" ...... "
" 나 사실 니가 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피했을 뿐이지. 근데 나 알면서도 혼란스러워. 구석에 내팽겨쳐져있던 조그마한 너에대한 감정이 다시 빛나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더 네 안에서 내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게, 그게 혼란스러워. "
" ...... "
" 이미 끝난 일이야. 나는 진심으로 나를 지워주길바라. 내 안에서 네 공간을 찾지 말아줘.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말할게. "
" ...... "
" 행복해져, 태형아 "
김태형의 대답도 듣지 않고 침묵으로 반 이상을 채웠던 통화를 끝냈다. 아마 나는 너에게 완벽하게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상처의 아픔을 잊기 위한 사람의 본성이 곧 나를 잊게할테니. 그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 말끔해질 때 쯤, 나 또한 말끔하게 지워질테니 너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태형아, 이미 메말라버린 감정을 내가 되살릴수는 없어. 대신 새로운 감정이 새로운 사람에게 차오르면서 그 감정은 더욱 황폐해져만 가다가 결국 가루가되어 사라지고 말지. 네가 온전히 사라졌다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나는 지민이가 좋아. 예전 감정에 미련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을만큼. 나는 진심으로 네 안에서 내가 메말라가기를 바라. 그리고 다른 감정으로 다시 젖어갔으면 좋겠어. 네 마음에 비오듯 내린 새로운 그 감정이 마음 한 구석, 미처 사라지지 못했던 나의 흔적들을 모두 쓸어 내리길. 너의 행복을 말했던 마음에는 네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진심이 담겨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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