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w. 채셔
"김여주."
"……."
"상담."
자습을 하고 있는데 태형이 내게 '여주 너, 국어가 상담 오래.' 라고 전해왔다. 상담의 주제가 무엇이든 갈 생각이 없었다. 응, 하고 싱긋 웃어준 뒤 가지 않았다. 이렇게 행동하면 민윤기가 분명 화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거다. 요즘 소위 말하는 '개기는 것'에 흥미가 있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민윤기가 반응했기 때문에. 어찌 됐든 지금은 민윤기의 요청을 무시한지 2시간쯤 될, 쉬는 시간이다. 작은 도발에 정말 화난 건지 수업 때를 제외하곤 얼굴 보기가 힘든 민윤기 선생님이 귀한 걸음을 하셨다. 예상과 같이 꽤 굳어 있는 얼굴이 간간했다. '상담.'하고 퍽 딱딱한 모습을 보이며 도도하게 나가는 모습이 참, 민윤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 국어 빡친 거 아니야?"
"아냐, 괜찮아."
"빨리 가봐. 국어 빡돌면 존나 무섭잖아."
걱정을 해주는 건 고맙다만 슬슬 귀찮아져서 '응.'하고 애들에게 웃어주곤 밖을 나섰다. 아, 한 명이 웃지 않았는데.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반을 확인했다. 그래, 전정국. 쟤가 웃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니, 그보다 지금은 민윤기가 화나 있을 테니 딴 생각에 빠지면 안 된다. 정도를 지나치면 후회하는 쪽은 민윤기가 아니라 이 쪽이다.
"김태형이 오라고 안 전해주던?"
"전해줬는데 귀찮아서요."
오늘 야간 자율학습 감독이 민윤기인지 텅 빈 교무실에는 민윤기 혼자 앉아 있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미간을 찌푸리던 민윤기는 내 대답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개겼다. 지금 민윤기 마음은 어떨까. 부글부글 끓고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평온할 수도 있다. 단지 내가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민윤기 앞에 앉아서 민윤기의 허벅지를 내 손바닥으로 감쌌다. 순간 움찔하는 이 반응. 헛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꾹 깨무는 이 반응만을 예상할 수 있을 뿐이다.
사는 게 재미 없다고 느껴질 때쯤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민윤기였다. 반듯하고 착한 국어 선생님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담배를 피며 욕을 읊조리는 모습을 내게 보인 이후로 우리는 가까워졌다. 빨리 끝날 줄 알았던 관계는 아슬아슬하게 끝과 시작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속되었다. 민윤기 쪽에서도, 그리고 이 쪽에서도.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났다, 그 모진 얼굴이. 절대 일정량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는 민윤기의 로맨스는 내게 미친듯이 아찔하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이 미친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절대 빠져나갈 수도, 놓칠 수도 없는 이 좆같은 관계가.
"너 요즘 존나 개긴다, 빡치게."
"거기에 빌빌거리는 건 선생님 아니에요?"
민윤기는 크게 허, 하고 웃으며 내 입술을 물어뜯듯 키스했다. 숨결이 틈을 주지 않을 만큼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따뜻한 호흡이 일정하게 나에게 닿았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한다. 이 학교의 사람들은 이 관계를 예상이라도 할까. 아니, 이 발칙한 관계에 대해 생각의 조각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민윤기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모범생에 우등생에 좋은 교우관계까지, 그저 야무진 인기 많은 여학생. 그게 이 학교에서 가지는 나의 위치니까. 이런 망가지고 퇴폐적인 모습은, 이 세상에 민윤기 밖에 없다. 민윤기도 마찬가지다. 가면 속의 생 얼굴을 아는 것은 나 밖에는 없다. 그래서 민윤기가 나에게 더욱 절대적인 의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덧붙여서 민윤기가 주는 그 조그마한 애정, 정해진 식단처럼 매일 정량으로 배급받는 그 관심 또한 내가 민윤기에게 미쳐가는 것을 도왔고.
"네가 나한테 개겨?"
"……."
"웃기지 마."
나쁜 년, 이라는 익숙한 칭호를 들으며 나는 민윤기를 더욱 화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분노는 좋은 것이다. 분노할 땐 온전히 분노의 대상만 생각하게 되거든. 누구 한 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게 애정을 쏟아 부어줄 그런 사람. 민윤기가 채워주지 않는 애정을 가득 메워줄 그런… 사람. 아아, 그러면 민윤기는 얼마나 분노할까. 그 하얀 얼굴이 얼마나 더 찌푸려질까. 나는 반의 애들을 한 명씩 생각해냈다. 내 앞에서 껄떡대는 애들은 편하지만 재미가 없는데. 나는 결국 아까 묘하게 내 눈에 들어찼던 그 무심한 얼굴을 기억해냈다. 우리 반 왕따, 전정국.
"딴 생각 하지 마."
"……."
"짜증나게."
잔뜩 날이 선 말투로 말해오는 민윤기 탓에 나는 생각의 시동을 꺼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안달 난 얼굴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유롭게 민윤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여주야, 괜찮아? 국어 존나 빡쳤더지."
"아냐, 그냥 입시 상담했어."
새빨간 거짓말임에도 아이들은 끄덕였다. 내 입술에서 거짓말이 나온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들. 나는 아이들에게 웃어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전정국 쪽을 한 번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곧장 전정국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 애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뭐였더라, 를 고심하다가 이름표를 보고 '인현아.'하고 여자 애에게 말을 걸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여자 애에게 나는 친절하게 말했다. 인현이 너, 눈 안 좋아서 하나도 안 보인다고 했었지? 앞에 앉을래? 나는 인현의 콧등에 걸쳐진 안경을 보고 대충 찍어 물었다. 인현은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살짝 전정국을 보고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꽤 잘생겨서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다들 나가 떨어지는 걸 보면 전정국의 성격을 알 법도 하다. 사회 부적응자 새끼.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국아, 옆에 앉을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으나, 정국은 반응은 커녕 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야, 존나 천사 아니냐? 아이들의 수군거림 와중에 태형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천사라니, 꽤나 마음에 드는 별명이다. 그렇게 봐주면 봐줄수록 좋다. 나는 전의 책상에서 자습서들을 빼 가방에 담았다. 이내 전정국의 옆에 앉아 책을 정리했다. 정국의 큰 눈이 내 모습을 쫓다가 무심히 시선을 돌려버리는 게 시야로 보였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정국을 길들이는 것은 아마 민윤기의 관심을 내게 돌리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운 일이겠지. 귀찮고 어려운 일을 완성했을 때에 드는 흥분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잘 부탁해, 정국아."
"……."
"이 씨발 새끼가."
갑작스러운 욕설이 들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전정국이 나자빠졌다. 주먹을 내리꽂은 주인공은 김태형이었고, 전정국은 어지간히 아팠는지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정국아! 나는 바로 전정국에게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입술이 찢어졌는지 피가 살짝 고인 상태였다. 놀란 눈으로 김태형과 전정국을 번갈아 쳐다보다, '때리면 어떡해….'하고 일어서서 태형을 달랬다. 씩씩거리던 태형은 거친 말투로 '저 새끼가 니 말 무시하잖아.'라고 말해왔다. 그게 이유라니. 생각보다 순수한 이유에 태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앉아서 정국의 상처를 확인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끙끙거리고 있던 전정국은 내 팔을 밀쳐내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김여주 말 무시하지 마. 알았어?"
애써 좋게 말하려는 태형의 말에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이 새끼가 씹고 지랄이야, 하고 다시 주먹을 치켜올리는 것을 서둘러 막았다. 멋쩍게 내려가는 손을 전정국은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태형은 '미안해, 나 때문에 놀랐지.'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맞웃음을 지어주느라 입 꼬리를 힘겹게 말아올렸다. 그렇게 자습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태형을 자리에 돌려보내는 것으로 상황은 정리되었다.
"괜찮아, 정국아?"
민윤기가 교실에 들어와 잠시 머무는 동안, 나는 전정국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대답 없는 전정국의 입에 내려앉은 피 딱지를 쓰다듬으려다가 그 손마저 밀쳐졌다. 어색하게 내쳐진 손에 다시 샤프를 들고 전정국을 힐끔힐끔 쳐다보자, 전정국은 내 자습서에 무언가를 적어왔다. 꺼지든가, 신경을 쓰지 말든가.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를 무심하게 눈으로 쫓던 전정국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했다. 샤프를 들고 전정국의 교과서에 다시 적었다. 싫은데, 나 너한테 관심이 생겼어. 나는 개구지게 웃었다. 멍하니 자습서에 적히는 내용을 보는 전정국은 왠지 어린 아이 같았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전정국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덧붙임
안녕하세요, 이삐들!
이 글을 혹시나 본 분도 계시리라 짐작이 돼요. 왜냐하면 제가 이 글을 넷상에 올린 적이 있기 때문이죠.
사실 저는 타 그룹 글을 쓰던 사람이에요. 글을 쓰다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어서, 글잡으로 오게 되었고,
이 글을 다시 올린 적도 있는데 그 때는 아직 이 글을 올릴 준비가 미처 되지 못해서 올리지 못했었습니다.
다시 방탄소년단의 얼굴로 글을 쓰는 이유는,
이 글에 너무 애착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또 이제 제가 사랑해 마지 않는 방타니들의 글로 재탄생시켜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였어요.
오늘은 시간이 많으니까 이렇게 글을 세 개나 올리네요. 댓글에 예쁜 말들 너무 감사합니다. 멘탈 충전시켜서 글 데리고 왔어요.
암호닉 신청은 여기서 받겠습니다!
저번에 계속 받다보니 T-T 막 많이 늘어나서 가독성에 문제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일단은 여기서 17일까지 받구 또 받을게요.
아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해오. 정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