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cm - 봄이 좋냐?
아... 머리야.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눈을 뜨자마자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머리 때문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베개 위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그나저나 지금 몇시야.
나는 팔을 뻗어 손을 더듬거렸다.
이 어디즈음에 내 핸드폰이 있을텐데... 잡혀야 할 핸드폰이 잡히지 않았다.
뭐야. 그제야 나는 눈을 부스스 뜨며 고개를 들어보였다.
평소라면 바로 앞에 보였을 내 곰인형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 자리에는 이불을 뒤집어 써서 불룩 튀어나온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누구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이불을 걷어보았다.
헐?
이불 안에는 네가 곤하게 잠들어있었다.
네가 여기 왜 있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젠장.
지금 내가 누워있는 곳은 나의 침대 위가 아닌 너의 침대 위였다.
연하랑 연애하는 법
15
w. 복숭아 향기
"이게 누구야?"
동아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석진 선배가 나를 반겨주었다.
아... 반겨줬다고 말을 하는 건 좀 안어울리려나. 어쨌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오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저건 분명해 비웃음이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쇼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웬일인지 윤기 선배가 침대가 아닌 쇼파에 앉아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들 이래... 오늘 무슨 날인가?
나는 고개를 돌려 윤기 선배를 바라보았다. 윤기 선배는 아직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어."
"왜 그렇게 봐요?"
"신기해서."
"네?"
"너 혹시 킬미힐미라는 드라마 알지?"
"네."
"난 어제 그걸 실물로 봤다."
뭔 소리야...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윤기 선배 때문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석진 선배는 아직도 나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어제... 어제 동아리 회식 있었는데...
내가 거기서 얼마나 먹었더라. 마지막으로 술 먹었던 게 아마... 네가 옆에 있을 때였는데...
멍한 표정으로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근데... 근데 말이야.
기억나지 않았다.
네가 옆에서 술을 그만 마시라고 나에게 말을 한 이후에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이.
-
"진짜 별 일 없었어?"
[그렇다니까요. 선배 어제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요.]
"근데 윤기 선배랑 석진 선배는 나한테 왜 그래..."
[선배 그렇게 술 마신 거 처음봐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야. 그래도 불안하니까 그러지... 나 막 토하거나 그런 거는 아니지?"
[토하는 건 기본 아니었어요?]
"뒤진다."
[화장실 가서 몇 번 등 두드려주기는 했어요.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었으니까 걱정 안해도 되고.]
"나 뭐 했어? 막 돌아다니거나 그랬어?
[그냥 잤어요. 내 옆에서.]
"그렇지? 나 그냥 잤지?"
[네. 그니까 걱정 말고 수업 들어요. 이따가 같이 도서관 가기로 했잖아.]
"알았어... 너도 밥 챙겨먹어..."
다시 한 번 아무 일 없었다는 확답을 받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동아리실에서 나올 때 까지도 키득거리던 석진 선배의 얼굴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확실하게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고 근데 심적으로 뭔가 한 거는 확실하고.
근데 역시나 물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고.
지금까지 술은 수없이도 많이 마셔봤지만 필름을 끊겨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술을 마신 적도 없었고 그다지 술 마시는 거 자체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으니까.
나에게 있어서 술은 잠이 안올 때 한두잔 마시면서 잠 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수면제와도 같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필름이라니.
필름이라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침대가 아니라 네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얼마나 취했길래 집에 들어가지도 못한걸까.
너는 우리 집 주소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밀번호는 모르고 있었다. 아는게 이상하지...
그 말인 즉슨 내가 비밀번호를 누를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필름도 끊겼는데 비밀번호는 어떻게 누르겠어.
아. 몰라.
기억나지도 않는 걸 억지로 생각하려다보니 안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욱 지끈거려왔다.
별 일 없었겠지.
없었다고 말 하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전공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네 말마따나 우선은 수업을 듣는 게 더 급했다.
-
"진짜 하나도?"
"어."
"하~ 나도 기억 안나?"
"안난다니까."
아씨.
불안해지게...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숟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김태형은 연신 '우와.'를 외치며 밥을 우적거리고 있었다.
"선배 진짜 하나도 기억 안나요?"
"응..."
김태형 옆에는 쪼꼬만한 한 신입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박... 뭐였는데. 어쨌든.
대학 올라오자마자 사귄 친구란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소울메이트를 여기서 만났다나.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 아이도 참 고생이 많겠구나 싶었는데 몇 번 보다보니까 둘이 왜 친구인지 알 것 같았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끼리끼리 논다.
"지민아. 나는 절대로 기억 안난다에 500원 걸 거야. 너는?"
"음... 나도 그럼 태태 너랑 같은 쪽에 500원 걸래."
통통한 볼을 씰룩거리며 입술을 오물거리는 생김새와 다르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참 요망하기도 하지.
나는 젓가락으로 쟁반을 탁탁 두드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본인들이 내기를 거는 상대가 바로 앞에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은 신나서 자기들끼리 떠들어대고 있었다.
될대로 되라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탁 하는 소리가 나자 그제서야 김태형의 친구 그러니까 박지민이라는 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야."
"네, 네?"
"좋은 말 할 때 그냥 불어라."
"왜 애한테 그래?"
"넌 좀 닥치고. 어제 나 뭐했냐?"
"누나가 술 퍼마시고 저지른 일을 왜 애한테 물어보냐고."
"그럼 네가 말할래?"
"누나 사랑해."
일을 저지르긴 저질러나보네.
김태형이 저렇게 펄펄 뛰는 걸 보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드라마나 책으로만 봤던 장면이 나에게 찾아올줄이야.
박지민은 나와 김태형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말하라니까 왜 여기로 오고 그러지?
"그냥 거기서 말해."
"쪼금 쪽팔리실 거 같아서..."
"야... 안그래도 불안한데 그렇게 말하지 좀 말고..."
"선배. 그니까요. 어제 선배가 취해서 무슨 일을 하셨냐면..."
박지민은 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여오기 시작했다.
박지민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내 얼굴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김태형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셨어요..."
박지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떠오르는 건 단 한가지였다.
씨발. 좆됐다.
-
되는 게 없는 날은 끝까지 되는 게 없었다.
왜 하필이면 동아리실에 내 충전기를 두고 온건지...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동아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 얼굴은 이제 어떻게 보냐... 동아리 사람들 얼굴은 또 어떻게 봐...
방금 전 키득거리던 석진 선배의 얼굴이 다시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도 충전기는 가지고 와야지.
나는 조심스레 동아리실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충전기만 갖고 나와야지.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동아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둥그런 뭔가 불룩 나와있는 걸 봐서 누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윤기 선배겠지, 뭐...
충전기가 어디있더라.
아까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거 같은데...
아. 저기 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충전기를 가져가려 손을 뻗은 순간 아무도 없던 내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누구..."
"선배."
너였다.
언제 왔던 거지?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너는 내 어깨 위에 네 턱을 살짝 걸치며 뒤에서 끌어안아왔다.
나는 멍청히 두 눈을 깜빡이며 방금 전에는 불룩 튀어나와있던, 하지만 지금은 평평한 이불만 자리잡고 있는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자고 있던 건가?
잠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나를 알아챘는지 너는 푸스스 웃으며 나를 더욱 꼭 끌어안아왔다.
젠짱. 쪽팔렸다.
"이거 좀..."
"왜요? 맥반석 계란한테 안기니까 싫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러니까..."
"지민이가 다 말해줬다면서요? 나는 또 선배가 혼자 기억할 줄 알고 말 안하고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던 사람이 누군데?"
"그니까 기억해낼 줄 알았죠. 이번에는 내가 틀렸네요."
"됐어. 자꾸 말하지마. 진짜 쪽팔려."
"그나저나 지금 외간남자랑 같이 밥 먹은 거에요? 나 놔두고?"
"너도 외간남자거든."
"전 애인이죠."
"됐어. 그냥 동생이랑 후배랑 같이 먹은 거 가지고..."
"저도 그냥 후배였거든요."
"지금은 아니잖아."
그래요?
너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내 배를 살살 문질러왔다.
그래. 왜 한동안 안만지나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너는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보다 천천히 내려와 내 이마에 네 이마를 서로 맞대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너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세는... 가까웠다. 너무나도.
"선배."
"왜."
"어제 해줬던 거 해줘요."
"뭐. 맥반석 계란?"
"아니요.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뭐."
"지민이가 다 말했다면서요."
그니까 뭘...
바로 눈 앞에 있는 네 눈동자가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밀어 네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려는 순간 네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내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춰왔다.
나는 조심스레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네 숨결을 받으며 두 눈을 감았다.
선배가 너무 취한 거 같아서 남준 선배가 선배 부축하고 일어났거든요.
그러니까 갑자기 선배가 남준 선배보고 김남준 어디있냐고 왜 앞에 껍질 벗긴 맥반석 계란 닮은 감자도리만 있냐고 막 그러는 거에요.
다른 선배들 그 말 듣고 다 웃고 그러는데 남준 선배도 이상하게 그냥 웃으면서 선배 보더라고요.
선배가 남준 선배 옷 잡고 막 흔들면서 우리 남준이 빨리 내놓으라고 막 그러니까 남준 선배가 '나 여기있어요.' 그랬거든요?
'우리 남준이 어디있냐고오!'
'선배 남준이 여기 있는데.'
'진짜? 진짜 너 남준이야?'
'그럼 가짜 남준이에요?'
'우리 남준이는 이렇게 계란처럼... 생기기는 했는데 그래도 잘생겼는데.'
'계란처럼 생긴 남준이 여기 있어요.'
'그래! 그럼 남준이 이리와.'
'얼른 들어가요. 선배 너무 취했다. 가는 길에 아이스...'
선배가 갑자기 남준 선배 볼 딱 잡더니 그대로 키스하셨어요.
그냥 쪽 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 찐하게. 옆에서 석진 선배가 휴지 던져도 신경도 안쓰시고 말이에요.
윤기 선배는 어이없다는 말만 계속하고 그러는데도 그냥 계속 하셨어요.
네... 뭐... 이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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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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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편에서 남준이가 화난 이유는 네...
1번부터 4번까지 모두 정답이었습니다.
고로 댓글 달아주신 분들은 모두 맞추셨어요! 짝짝짝
여러분 술은 흑역사를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아주 나쁜 음료수에요. 근데 잠이 안올때는 맥주 한 잔이 최고랍니다.
그러니 다들 적당한 음주는 나쁘지 않지만 너무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나쁘다는 걸 꼭꼭 명심하세요.
사실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건 당연한 거지만요.
암호닉 신청은 마감되었습니다. 다음 신청기간에 신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오늘도 제 글 읽고 사랑해주시는 분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