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날씨가 더워졌다. 왼손에 쥔 콜라 캔이 더운 열기 탓인지 금세 표면에 물방울을 맺혔다.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버스 안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더 이상 태울 수 없을 것만 같은데도 버스 기사 아저씨는 꿋꿋하게 학생들을 더 태웠다. 버스가 출발하자 중심을 못 잡은 학생들이 휘청거렸고 여기저기서 곡소리인지 야유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더욱 꽉 쥐었다. 버스 안은 마찬가지로 더웠다. 비록 에어컨을 틀었다 하더라도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온기를 나누는 바람에 등에 땀이 차는 게 느껴졌다.
아, 이래서 여름은 싫다.
중심을 잡으려 손에 안간힘을 주고 있다 보니 콜라 캔을 쥔 왼손에도 땀이 차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표면에 맺힌 물방울 때문에 습했는데, 손에 땀까지 나니 더욱 찝찝했다. ‘이번 정류장은 시혁 고등학교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안내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내 옆에 서있던 박지민이 재빨리 벨을 눌렀다. 멍하니 창을 바라보며 서있던 내 시야에 벨을 누르는 박지민의 팔이 들어왔다. 그의 팔을 타고 올라가 천천히 고갤 돌려 박지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작고 가늘게 쳐진 눈, 낮고 둥그런 코 그리고 붉은 입술. 나는 천천히 박지민의 얼굴을 훑었다. 그런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박지민 역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덕분에 나와 눈이 마주친 박지민은 '더워.'라고 붉은 입술로 내게 입모양을 해 보였다. 잠시 힐끗 쳐다본 박지민의 이마에는 땀이 살짝 차있었다. 나는 다시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박지민을 따라 입모양을 했다. '나도.'라고.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버스가 멈췄다. 뒷문이 열리자마자 학생들은 카드를 찍고 내리기 시작했고 너도 나도 내리면서 팔 아프다, 덥다는 등의 소릴 한 마디씩 했다. 학생들이 워낙 많이 탔던 탓에 버스는 한동안 서있었던 것 같다. 손잡이를 놓칠세라 꽉 잡고 서있던 손을 풀고 나니 힘이 빠져 그만 왼손에 쥐고 있던 콜라 캔이 미끄러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콜라 캔이 버스에서 내리고자 뒷문에 가깝게 서 있던 박지민의 발에 걸려 멈췄다. 이내 박지민이 허리를 숙여 캔을 줍고는 내게 건넸다.
"아…."
"내리자."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도 전에 박지민은 내리자며 얘길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학생들이 거의 다 내린 듯했고 버스 안에서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사람은 나와 박지민뿐이었다. 나는 허둥지둥 내리면서도 카드를 단말기에 대는 것쯤은 잊지 않았다. 삐빅-. 삐빅-. 나와 박지민이 뒷문으로 내리자마자 버스는 문을 닫고 출발했다. 마치 우리가 어서 빨리 내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쌩하니 말이다.
박지민이 남자로 보이면 01
버스에서 내려도 더위는 여전했다. 분명 엊그제만 해도 춘추복을 입은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 하복을 입게 되었고 풀어 헤쳤던 머리카락은 행여 목에 땀띠라도 날까 싶어 올림머리로 묶어버렸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도 5분 정도는 걸어가야 교문이 나왔기 때문에 나와 박지민은 늘 그렇듯 발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초여름인지라 아직은 아침 햇살이 그렇게 따갑진 않다는 거였다.
박지민이랑 알게 된 지는 어느덧 10년째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내가 이사를 오게 되면서 말이다. 그 당시 낯가림이 있었던 나에게, 낯선 학교에서 혼자 잘 적응해야 한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도 나는 우물쭈물 거리다 겨우 이름 석 자를 버벅거리며 말할 뿐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그것마저도 잘했다며 박수를 유도했고 그에 아이들은 마지못해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짝짝, 박수를 쳤을 것이다. 곧이어 내가 앉아야 할 자리를 정할 때 선생님은 마침 빈자리가 한자리 있으니 그 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가 바로 박지민의 옆자리였고 박지민은 짝지가 생기는 게 그렇게 신나는 일인지 제 앞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말을 하길, "와아, 나 짝꿍 생겼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순수했던 시절이다.
그날부터 박지민은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내가 어색하지 않게끔 말을 걸어준 게 틀림없을 거다. 학교 위치도 설명해주고 아직 책이 없는 날 위해 교과서를 우리 둘 사이에 두어 같이 읽었다. 게다가 서로의 집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서 등교할 때면 길에서 만나니 자연스레 학교까지 같이 걸어가고, 학교에 도착하면 짝꿍이니 계속 마주치고. 또 거기에다가 하교 시에는 방향이 같으니 집에 갈 때도 함께였다. 이렇게 하루 온종일 얼굴을 보는데 어떻게 친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비록 학년이 올라가면서 같은 반 된 적은 몇 번 없었지만 적어도 등하교는 꼭 같이 했었다. 일주일에 다섯 번은 꼭 얼굴을 보고, 가끔씩 주말에는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그렇게 순수했던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 같은 중,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우리의 질기고도 익숙한 연은 계속되고 있었다.
"김탄소."
"어, 어?"
한참 옛 생각에 빠져있을 때 날 부르는 박지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바보처럼 더듬거리는 날 보고 박지민이 비웃는 게 느껴졌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10년의 세월이라는 게 무서워질 때가 있다면 그건 바로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게 된다는 거다. 지금처럼 말이다. 비록 내가 추억 팔이 중이었다는 건 모르겠지만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것쯤은 쉽게 눈치채는 녀석이니까. 나는 무안한 마음을 감추려고 애써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아무 생각 안 했거든?"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얄미운 새끼."
입술을 툭 내밀면서 밉지 않게 째려보니, 박지민이 재미있다는 듯 웃다가 금세 내 표정을 그대로 따라한다. 아니, 저게 진짜! 열이 확 오르는 기분에 발끈하니 박지민은 또 "워,진정해. 진정해." 하면서 날 놀리는 거다. 박지민, 이 더럽게 유치한 놈. 더 이상 상대해주지 말고 갈증이나 해소하자는 생각에 콜라 캔의 뚜껑을 땄다. 뚜껑이 열리기 무섭게 거품과 함께 콜라가 제 존재를 과시하듯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와 내 손을 흠뻑 적셨다. 아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어 절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니 박지민은 또 옆에서 크게 박장대소하기 바빴다. 아무래도 아까 버스에서 캔을 떨어뜨린 게 원인인 듯싶었다.
"김탄소 지금 표정 대박! 완전 사진 찍어놓고 싶어."
"닥쳐, 제발."
하고 으름장을 놓아보지만 그 마저도 박지민의 웃음소리에 먹혀 들어갔다.
젠장,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교실에 가방을 내려놓을 생각도 못 하고 바로 화장실에 직행하여 콜라를 버리고 손을 닦아냈다. 더운 날씨 탓에 탄산음료 특유의 끈적거림이 두 배로 더 느껴졌다. 찝찝하다. 찬물이 닿으니 그나마 괜찮아졌지만. 손을 털어내며 화장실에서 나오자 박지민은 먼저 교실에 들어간 듯 복도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교실로 향했다.
아니, 분명 교실로 향하려던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3-8’이라고 적힌 교실 문 앞에서 멈춰졌다. 우리 반이 아닌 박지민네 반이었다. 나는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젠 창문 너머로 그를 찾는 게 익숙해졌다. 언제 또 자리를 바꿨는지 저번에 박지민 자리는 저기였는데 오늘 보니 다른 아이가 앉아있었다. 그럼 박지민 자리는 어디지?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박지민을 찾았다. 무심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게 게임을 하는 건지, 친구와 연락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얼마 못 가 드르륵하고 교실 앞문이 열리는 소리에 박지민이 고개를 들다가 창문 쪽에서 절 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몰래 보다가 들킨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몰래 보다가 들킨 게 맞지만. 뻘쭘한 기분에 괜히 목덜미를 긁적이며 반으로 돌아가려 했더니 내 휴대폰에서 카톡! 하고 소리가 울렸다. 설마 싶어서 힐끗 박지민을 쳐다보니 제 휴대폰을 흔들며 확인해보라는 듯 가리킨다. 아마, 박지민이 카톡을 보냈나 보다. 치마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휴대폰을 주섬주섬 꺼내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박지민에게서 카톡이 하나 와 있었다.
'왜?'
짧고 간결한 물음이었다.
언제였더라, 아마 저번 주에도 이런 일이 한 번 있었을 거다. 오늘처럼 박지민을 몰래 지켜보다가 보기 좋게 들켜버린 날. 그날은 내가 어떻게 둘러댔더라? 아마도 체육복이 없으니까 빌려달라고 핑계를 댔던 것 같다. 박지민이 웃으면서 ‘내 옷이 맞기나 해?’ 하면서도 순순히 빌려 줬던 날. 움직일 때마다 흘러내리는 소매와 바지를 몇 번씩이나 접어야 했던 날.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인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박지민을_
카톡,
카톡.
‘읽어놓고 답장 안 하는 건 무슨 심보?’
‘또 뭔 생각 해’
하여튼 귀신이다 귀신. 박지민의 카톡에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아니, 적어도 박지민만큼은 나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가끔씩은 좀 몰라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박지민의 카톡에 뭐라 답장을 할까 고민하다가 겨우 답장을 보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생각해도 참 힘 빠지는 답장이었다. 힐끗 박지민을 쳐다보니 내 답장을 기다리는지 손에는 휴대폰이 쥐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박지민 옆에 서있는 여자애가 계속해서 말을 거는 바람에 손에 휴대폰을 쥐고만 있을 뿐 박지민은 내 카톡을 확인하지 않았다. 마음 한 편이 알게 모르게 씁쓸해졌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우리 반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톡 창에는 여전히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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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자족하는 지민이 학원물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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