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왜 하필 이런 날에 짧은 원피스를 입고 왔나 후회가 되었다. 정원에 서 있던 여자는 단아한 남색 원피스에 딱 봐도 몇천만원은 되어보이는 귀걸이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가련한 여주인공에게 니가 감히 우리 아들을 채가? 이거나 먹고 떨어져, 하며 3억이 든 봉투를 던질 것 같은 외모였다. 십만원 짜리 수표를 동전같이 여기는, 돈이 꽉 차서 더는 들어갈 곳이 없는 통장을 가진 그런.
나는 저런 사람들을 돈냄새가 나는 인간들이라고 했다.
돈냄새가 나는 여자들은 대부분 굉장히 보수적이던데. 권순영의 차에서 내려 이미 열려있던 대문-정말 으리으리했다-을 지나 정원으로 걸어갈 때 역시나 그 여자의 눈이 잠시 내 다리에 머물렀다. 아 미친, 신이시여, 제발 치마길이 때문에 일에서 짤리지 않게 해주세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네? 아뇨 별말씀을..."
"일자리를 급하게 구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냥 편하게 어머님이라고 부르세요."
"아 네, 어..머님. ㅇㅇㅇ입니다."
꾸벅 인사하며 여자의 앞에 서자 여자가 생긴 것과 어울리는 고상한 말투로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자신을 편하게 부르라고 했다. 가까이서 보니 이 여자는 중년이지만 아름다웠고 돈냄새가 나는 인간들인 티가 역력했다. 저 귀걸이는 내 집 값보다 비싸겠지. 내 이름을 말하고 멍하니 서있자 여자가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아..ㅇㅇ씨. 분노조절장애가 무엇인지 알죠."
"아, 그럼요."
"주변인들이 얼마나...힘든지 아시고요."
"아...,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뭘 하던 사람이었어요?"
"...네?"
"이 일을 하려고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냐고 물었어요."
"아..저는 화학 계열 회사를 다녔고, 몇 년만에..그만 두었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냥 일이 싫증나서 그만 두면 다른 일이 굴러들어올 줄 알았거든요."
"아, 일이 싫증 나면 바로 그만 두시는 건가요."
아 미친, 말실수.
"아니요, 이젠 그렇게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을거고, 어...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거에요. 다시 일자리를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미리 말씀 드리자면 해고 때문에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절대 고용인을 해고하지 않습니다. 해고하기도 전에 다들 제 발로 나가시더군요."
"....네?"
그렇게 여자와 내 빌어먹을 과거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자신은 해고하지 않는다는 얘기에 멍청하게 입을 떠억 벌리며 놀랐다. 내 얼굴에 나 너무 놀랐어요,써있었는지 여자가 헛기침을 하며 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가 나의 얼굴을 깨닫고 입을 닫자 다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열었다.
"..일이 여간 힘들지않을거에요. 아시다시피, 저희 아들,"
"아, 분노조절장애요."
"...네, 그렇죠."
"....."
"잘 해주길 바래요."
내가 '분노조절장애'에 힘을 주어 말하자 여자가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집으로 들어가자며 안내했다. 아, 그 미간을 보면서 이 미친 주둥이가 또 나댔다는 것을 깨닫고는 오른손으로 내 뺨을 치자 여자가 흘긋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하하,그냥 가만히 짜져있는게 제일 좋을듯 싶네. 여자를 따라서 집으로 들어가는데 집이 정말정말 넓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집이 있구나 싶었다. 복도를 한참 걸어가는데 문득 권순영이 차에서 해준 말이 생각났다.
그 남자, 분노조절장애가 너무 심해서 밖에 나가지도 못한대. 그래? 아 그리고 막 화병 같은 거 생기나봐, 잔병치레도 엄청 많이 하고. 불쌍하네. 이왕 일하게 된거, 진짜 잘해줘라 그 사람한테. 내가 왜 이렇게 아는 사이도 아닌 그 사람을 주둔하냐고 묻자 권순영이 대답을 하려다 '아 아니다,'하며 말았다. 싱거운 놈. 권순영이 말하려던 것이 뭐였을까 생각하며 걷자 거실-이라고 해야될지 모르겠는 곳- 에 다다랐다.
아, 이곳은 거실인가 운동장인가.
그리고 그 곳에는 한 남자가 양 손을 깍지를 낀 채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아, 저 남자가 그. 파란 모자를 쓰고 흰 후드티를 입은 모습이 일반인 같았지만 사실은 분노조절장애가 너무 심해 외출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소개할게요, 이 쪽은 우리 아들 지,"
"이름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쿵, 갑자기 거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여자가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아들로 보이는 사람을 나에게 소개하려고 하자 남자가 이름까지 알려줘야하냐며 여자의 말을 끊었고 여자는 당황했는지 얼굴이 붉어지더니 왼쪽 손을 쥐었다폈다 했다. 아마 불안할 때 나오는 습관인가 보지. 여자의 왼손을 멍하니 보고있다가 문득 시선을 돌리자 남자가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고있었다.
"와, 바깥세상사람이다."
"........"
"지금 바깥날씨는 어때."
"네...?"
남자가 나를 한참을 노려보더니 소파에서 일어나 나에게 걸어왔다.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지만 내가 자신에게 겁먹었다는 것을 알면 대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어 겨우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면서 여자를 힐끔 보니 여자도 마찬가지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이봐 아줌마, 아줌마 아들인데 아줌마도 통제를 못 해? 근데 내가 뭘해?! 내가 겁먹은 눈으로 그 남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자 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느긋하게 양손을 꽂더니 갑자기 날씨는 어떻냐며 물어왔다. 눈을 깜박거리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맑..,맑아요,'라고 하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 맑구나."
"........"
"바람도 선선히 불고 햇빛도 밝고, 기분 좋은 그런 날씨?"
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남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눈웃음이 남자에게서는 보기 드문 예쁜 눈웃음이었다. 웃을 때 예쁘다,생각하며 슬그머니 웃자 남자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아, 나는 이렇게 집에 쳐박혀서 살고 있는데 바깥세상분은 사랑스러운 날씨를 즐기다가 오셨네."
"......"
"근데 너 왜 웃어?"
"........네..?"
씨발, 망했다.
"내가 웃긴가보네."
"......아...아니..,"
외국에서 살다 왔는지 조금은 억눌한 발음이 티가 났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노조절장애가 괜히 분노조절장애가 아니다.
정말 별 것도 아닌, 아니 좋은 일 갖고도 분노를 하고 화가 날 수 있는 것이었다.
"마미."
"......."
날 나른하게 쳐다보던 남자가 마미,하며 몸을 빙그르르 돌려 여자를 마주보았다. 여자는 확실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불안해하는 것도 같았다. 예전에 일하다가 그만 둔 사람들처럼, 나도 그만둘까봐.
"엄마는 이런 멍청한 년들을 대체 왜 우리 집에 데리고와서 나더러 같이 놀라말라야!!"
남자가 갑자기 여자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큰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하자 남자가 고개를 확, 나에게 돌렸다.
"아, 너도 겁먹었구나."
"........"
"한 번 버텨봐, 넌 이 집에서 몇 일 가는지 보자. 제일 길게 버틴 사람이...고작 열흘이었어."
"........."
"아, 너무너무 무서워서 지금 당장 그만둘건가?"
남자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여 삐딱하게 날 보면서 물었다. 지금 당장 그만둘거냐고, 너도 예전의 멍청한 년들처럼 자신에게 겁을 먹은 채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안 보일때까지 멀리 가버릴거냐고. 순간 이상하게 난 그 안의 상처를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고개를 천천히 젓자 남자가 입꼬리만 올려 피식 웃더니 홍지수야, 하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손을 조심히 마주 잡자 남자가 정색을 하며 손에 힘을 지나치게 꽉 주었다. 정말 아팠다. 내가 아, 하며 미간을 구기자 남자가 손에 힘을 풀고 나른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다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음, 이런 사소한 것에도 아파하고 상처받고,"
"......."
"앞으로 나랑 어떻게 친구가 되려고 이래."
"......"
"하여튼, 열심히 해봐. 나중에 보자."
홍지수,라는 남자는 니가 얼마나 오래 갈지 보자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깨로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남자가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여자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다리에 힘이 풀린듯이 주저앉아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미안하다고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다.
"전 괜찮아요."
"....."
"다 각오하고 왔어요. 이제 시작인걸요, 뭐. 가보겠습니다."
여자가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괜찮다고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집을 나왔다. 권순영은 날 데려다주고 바로 회사로 가는 바람에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야할 판이었다.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무슨 돈이 있어야지. 집 밖으로 나와 대문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위쪽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홍지수가 자신의 방 2층 창가에서 나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남자가 무슨 짓을 하던 아픈 사람이고 불쌍한 사람이니까 이해해주고 잘 해주라는 권순영의 말이 떠올랐다. 절대 싸우거나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걸지 말라는 말도 함께. 홍지수랑 친구가 되려면 나도 웃으면서 손을 마주 흔들어줘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나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엿을 날렸다.
| 뿌조 |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암호닉은 받아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신청해주실 독자님들은 [암호닉] 양식으로 신청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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