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 입은 남자는 다 섹시한가요?
w. 채셔
A.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첫만남
"정국아, 오늘은 어때?"
"아파여!"
나를 노려보며 울상을 짓는 정국이. 많이 아팠나보다. 선생님이 우리 정국이 한 번 볼게. 체온계를 귀 속에 갖다대자 38도가 나왔다. 열이 높다. 걱정스러워서 정국이의 볼을 한 번 쓰다듬었다. 잔뜩 뿔이 난 게 보여서 다시 한 번 볼을 쓰다듬었다. 정국아, 일단 약 한 번 놓아보고 경과 지켜 보자, 알았지. 정국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아랫입술을 쭈욱 내민다. 우리 정국이 아파서 어떡한담.
"정국아, 근데 엄마는 안 오셨어?"
"엄마 말고 옆집 누나야 오기로 했는데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누나야'를 찾지만 그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쾅! 열리고 땀에 쩔어 있는 한 여자가 나타났다. 살짝 놀라 여자를 계속 쳐다보았다. 이내 다가와 '정국아…, 누나… 누나 왔어.' 하고 헉헉거리며 다가오는 여자. 혀를 길게 내밀며 정말 지쳤는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쓰윽 올린다. 이제까지 뿔이 난 정국이가 누나아! 하고 여자를 꽉 안았다. 아픈 애 맞아? 정국의 해맑은 반응에 살짝 웃음이 났다. 원래 그 나이대엔 옆집 누나가 예뻐보이는 법이지, 암. 정국이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으며 웃음짓는 여자의 모습이 뭔가, 뭔가 예뻐서 나는 홀린 듯 한참 여자를 보고 있었다. 아기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를 예뻐하는 여자. 여자가 참 예뻐 보였다.
"정국이, 좀 어때요?"
"열이 좀 있어서 일단 약을 좀 놓아보고 경과 지켜볼게요."
"여기서요?"
"네, 일단 병원에 있어보구요. 빠르면 오늘 퇴원하실 수 있으세요."
여자도 정국이와 같이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 '에이, 생일 파티 못 가겠네….' 하고 시무룩해졌다. 정국이는 그런 누나 마음도 모르고 누나를 안고 부비부비. 눈나, 헤헤. …뽀뽀까지 서스럼없다. 여자는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다시 정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의 정국이와 똑같은 표정.
"생일이세요?"
"네, 제 생일인데 이러구 있네요."
"…히히, 누냐아. 뽀뽀."
"으유, 우리 정국이 왜 하필 오늘 아파서. 누나 생일인데!"
생일이냐고 묻자 쓸쓸하게 웃으며 정국이의 말랑말랑한 볼을 쿡쿡 찔러보는 여자. 그런 여자의 행동에 정국이는 누나를 올려다보며 애교를 부린다. 진짜 아픈 애 안 같네. 열이 38도나 되는데. 나는 잠시 기계가 오작동된 건가… 의심했다. 여자는 정국이에게 시무룩한 말투로 정국이의 볼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예쁘다.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릴 뻔한 것을 꾹 참고 입술을 물었다. 여자의 모습에 흐뭇하게 아빠 미소를 짓고 있을 내 모습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보조개까지 푹 들어가 있겠지. 문득 초콜릿 생각이 났다. 서둘러 얼마 전에 사두었던 초콜릿 세트를 꺼내어 내밀었다.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초콜릿 세트를 받아들었다. 정말 아끼는 것들인데. 의사 생활에 가장 중요한 식량인데. 제가 아껴 먹어야지, 아껴 먹어야지 하고 정말 아꼈던 초콜릿들이다.
"생일 선물이에요."
"…어어."
"생일 축하해요."
예뻐서 드리는 거예요. 능글맞은 말투에 밝아진 여자의 웃음을 보곤 정국이도, 나도 따라 웃었다.
B.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사랑에 빠졌을 때
"여주 씨, 정국이 약 처방해줄게요. 약국 가서 정국이 데리고 퇴원하면 돼요."
네. 요즘 자주 감기에 걸리는 정국이 덕분에 여자와 만난지 5번이나 되었다. 자주 아픈 정국이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요즘 미팅이 자주 잡혀서 오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고맙기도 하고. 또 그 덕에 요즘 거의 매일 병원을 들락날락거리는 여자가 예쁘기도 하고. 사정을 들어보니 정국이의 어머니가 드라마 작가여서, 프리랜서지만 정국이를 잘 돌봐주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제껏 할머니와 지냈는데, 요즘 할머니가 여행 중이라 그 몫은 평소 알고 지내던 옆집 여자에게로 넘어갔다고. 마침 종강도 해서 시간도 많은걸요, 하고 흔쾌히 호의를 드러내는 여자는 참 두루두루 사랑을 받는 듯했다. 더군다나 의사 생활에 지친 나까지도 아주 쉽게 긍정으로 물들여버리는 여자였다.
"정국이, 오늘부터 땀 많이 흘리고 바로 에어컨 바람 쐬면 안 돼요, 알았지."
"으응. 알아써."
"정국이, 반말 쓰면 안 되는데."
"아, 맞다! 눈나 미안해. 알아써요,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구 했지."
"아아, 맞다! 눈나 또 미안해. 알아써요, 의사 선새밈."
정국이의 순수한 반응에 괜히 웃음이 난다. 마찬가지의 표정으로 정국이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 나는 자연스레 정국이에게서 여자로 시선을 넘겼다. 살짝 접히는 눈이 예쁘다. 선생님, …이거. 괜히 밍기적거리며 나가지 않던 여자는 가방에서 조그만 선물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초콜릿이었다. 포장에 아무런 상호가 적혀있지 않은 걸 보고 의문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자, 여자는 수줍은 표정으로 '이거 수제예요. 만드느라 고생 좀 했어요.'하고 말한다. 정국이의 고개가 여러 번 이리저리 돌아간다. 이내 고개를 크게 젖히고, 여자에게 '누냐, 내 거는?' 하고 제 초콜릿을 찾는다. 저거, 저거, 크면 질투 많이 하겠네.
"정국이 초콜릿은 없어."
"뭐어? 왜애. 왜애 업써!"
떼를 쓰는 정국이의 엉덩이를 살짝 툭툭 때린 여자는 이내 정국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정국이는 초콜릿 먹으면 이가 아야해. 여자는 뿔난 정국을 안아 올렸다. 정국이의 입술이 두 배로 불었다. 정국이는 대신 누나가 내일 놀아줄게. 여자의 말에도 정국이가 풀리지 않자, 여자는 곧 정국의 볼에 살짝 뽀뽀를 해주었다. 그제야 정국이의 입술이 씰룩씰룩 움직인다. 여자와 정국이에게로 다가가, 정국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이내 여자의 목을 꼭 안고 있는 정국이에게 칭찬 사탕을 쥐어주었다. 정국이가 꺄르르 웃는다. 이거 귀한 사탕이야, 칭찬 받을 어린이들한테만 주는 사탕인데. 정국이가 여자에게 얼굴을 기대며 손가락을 쪽쪽 빨기 시작했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정국이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주고 다시 머리를 쓸어주었다.
"가볼게요."
엄마 미소로 나와 정국이를 번갈아보던 여자는 이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국이도 인사. 여자의 한 마디에 정국이도 여자를 따라 살짝 고개를 숙인다. 나가려는 여자를 성급하게 불러 세웠다. 살짝 돌아보는 여자에게,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쥐어주었다. 여자가 명함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답례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그쪽 계속 보고 싶을 것 같아서요. 안 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진심을 꺼내보이자, 여자는 수줍게 다시 웃었다. 순간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진료실을 감쌌다. 고마워요, 선생님. 휘어진 눈으로 웃으며 여자는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은 어떤 애기가 내 골치를 아프게 해도, 다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기분이 좋다.
C. 날씨 예보, 홍수 나는 날
"자기, 왔네요."
"네, 요즘 정국이 어머니 방송 끝나서……. 오랜만에 병원 왔죠."
"그래도 온 게 어디예요."
요즘은 드라마가 끝나 한가해진 정국이 어머니가 병원을 자주 오셨다. 물론 정국이의 얼굴은 조금 칙칙해진 상태. 그리고 오랜만에, 종방연으로 일이 생겨 여주가 정국이를 데리고 병원에 내원했다. 보호자 온다고 꾸민 건 또 오랜만이네. 오랜만에 머리도 손 봤다. 평소엔 그것도 귀찮아서 잘 안 했는데. 정국이가 간호사 누나를 따라 쫄래쫄래 물약을 먹으러 간 사이, 오랜만에 진료실에 여주와 단둘이 앉았다.
"많이 힘들었어요? 다크서클 봐."
"응, 요즘 태형이가 말썽이에요. 오랜만에 엄청 다쳐가지고 오는 바람에 입원했거든."
"…아, 그 말썽쟁이?"
"응, 그래서 요즘 죽겠어요."
태형이만 오면 아주 그냥 진료실이고, 주사실이고 난리야. 난리. 내 한탄을 들은 여주가 말을 듣다,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왜? 하고 묻자, 여주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왜애, 하고 다시 물으니 그제야 여주는 '자기도 파괴 왕이잖아요.'하고 짧게 이유를 댄다. 아니, 아, 그건. 변명하려다 솔직히 맞는 말이라 반박하지 못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자 인정하는 투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자, 여주는 그것대로 귀여웠는지 다시 웃음을 내밀었다. 이내 여주가 목이 마르다기에, 함께 복도로 나서서 자판기 앞에 섰다. 음료수 두 개를 꺼내고, 가운 주머니에 음료수 두 개를 넣어, 다시 되돌아가려는데 여주가 나를 불러세웠다.
"자기."
"응?"
"입술에 뭐 묻었어요."
어떤 거요? 하고 민망하게 입술을 쓰윽 닦자, 여주가 발꿈치를 살짝 들어 기습적으로 뽀뽀를 해왔다. 깜짝 놀라 손을 떨어뜨렸다가, 미소를 지으며 여주를 끌어 당겼다. 이내 다시 진지하게 키스를 하려는데 저 멀리서 무언가를 놓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둘 다 고개를 홱 돌렸다.
"누냐………."
간호사 누나의 손을 잡고 진료실로 향하고 있던 정국이었다. 올망거리던 눈에 금방 눈물이 들어찼고, 이내 복도가 크게 울리도록 정국이가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하고 눈물을 터뜨린 정국이에게 성급하게 다가갔다. 정국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여주가 재빠르게 다가가 정국이를 안아 올렸다. 서럽게 울어대는 정국이의 엉덩이를 퉁퉁 쳐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장면을 본 것처럼 정국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어댔다. …정국아, 아니야아. 응? 왜 정국이에게 변명을 해야 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애기도 남자다. 커서 훔쳐가는 것보단 지금 아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주가 안절부절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정국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정국이, 아 해 봐."
"시러어, 으아아아앙! 흐끅, 슨새미 미워! 끅…."
"얼른."
오랜만에 낮은 목소리를 내는 내가 무섭기는 했는지, 울면서도 이를 벌리는 정국이의 입 안을 잠시 살폈다. 그리고 입을 다무는 정국이에게 서둘러 뽀뽀를 해주었다. 흐끅, 하고 딸꾹질을 하는 정국이의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멈췄다. 정국이 이에 나쁜 친구가 있어서, 선생님이 방금 치료했어. 정국이가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인다. 여주의 목에 짧은 팔을 두른 정국은, 그제야 눈물을 멈추고 내게 다시 물었다. 그럼 슨새미가 누나야 이빨 고쳐줘써? 정국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정국이 표정이 밝아진다. 하, 이 꼬맹이 적군을 어떻게 해치우지. 지금도 꽤 꽃미남이라 크고 나서는 더 꽃미남 무적이 될 텐데.
"슨새미, 끅, 잘해써. 헤헤."
정국이가 딸꾹질을 하면서도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여주는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정국이의 등을 살살 토닥였다. 하아, 하고 짧게 한숨을 쉰 뒤, 정국이와 진료실로 들어섰다. 여주가 짧게 웃으며 작게 엄지를 들어주었다. ………우리 연애 사실은 정국이만 모르는 걸로. 그 날로 우리나라에 홍수가 내릴 거다.
덧붙임
후.. 다 썼다
뭔가 똥글이라
얼른 쓰고 도망갑니다
안녕
오늘도 고마워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