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07
나는 창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빗방울이 집게손가락 위에 몇 번만에 떨어지는지 세고 있었다.
방 안이 조용한 게 이상하게 느껴진 정국이 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 누구세요. "
나는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의미없는 말을 내뱉었다.
" 접니다, 아가씨. "
마찬가지로 의미없는 대답이 문 밖에서 넘어왔다. 나는 집게손가락 위에 마지막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 들어와. "
정국이 문을 열었다.
" 앞으로 들어올 때 너는 세 번 문을 두드려, 알았지? "
" 네. "
정국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활짝 열려있는 창문 앞의 나를 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 창문을 열어두고 있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요. "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정국이 다가와서 창문을 닫았다. 나는 창문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런 정국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국이 애써 내 눈길을 피하다가 몸을 틀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
" 안 돼. 여기 있어. "
내가 정국의 자켓 옷깃을 움켜쥐자 정국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혼자 있으니까 엄청 외롭단 말이야.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까 그냥 여기 있어. "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세 시간째 방에 틀어박혀 빗방울 세기나 같은 시덥잖은 일만 하고있으려니 공허한 기분이 점점 커지던 참이었다. 정국이 머뭇거리다가 창가에 기대 앉았다. 나는 창문 앞의 화장대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여전히 창 밖에 시선을 둔 채 말을 걸었다.
" 넌 여기 왜 따라왔니? "
" ..... "
" 넌 대답 안하고 싶으면 안 하고, 하고싶은 대답만 하니까 참 편하겠다. "
" ..같이 가라고 하셨으니까 왔죠. "
" 하필 왜 아버지가 특별히 너만 보낸거지? "
우리 집에서 정국은 그리 비중이 큰 존재는 아니었다. 경호원과 하인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을 뿐더러, 잔일을 도맡아 했다. 주로 힘을 쓰거나 경호를 하거나 그 둘 중 하나였다. 그러니 나와 가까이 붙어있을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기 오기 전날, 아버지가 내게 정국과 함께 고모부 집에 가라고 한 뒤부터 내게 그의 비중이 확 커진 것이었다.
정국이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 ..저희 아버지가 아가씨 집안의 경호실장이거든요. 몇 년 전 저택에 불이 났을 때 저희 아버지께서 불 속에 뛰어들어서 저택 안 사람들을 구해냈었죠. 아버지께서 아가씨 가문을 위해 죽음까지 주저하지 않았으니 그 아들인 저도 믿고 보내주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고 싶고요. "
나는 눈을 깜빡였다.
" 근데 넌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지도 모르는데 불안하지 않니? "
"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아가씨를 지키는 일이 제게는 최우선이니까요. 그것에만 집중해야죠. "
정국이 말을 마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귀족
08
" 얘. "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방문을 벌컥 열고 말했다. 정국이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문을 등지고 있다가 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긴 내가 자기를 직접 부른 건 처음일테니 놀랄 만 했다.
" 정원에 나가자. "
" 정원에요? "
" 그래, 비 온다고 앉아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못 참겠어. "
나는 가지고 온 옷들 중에서 그나마 활동적인 옷을 입고 있었다. 정국이 내 옷을 보고 감기에 걸릴 텐데요, 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나는 그의 만류에도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결국에는 정국 또한 옷을 갈아입고 나오게 되었다.
" 어딜 가니? "
" 정원에요. "
고모의 물음에 짧게 대답한 나는 문을 밀고 나갔다. 뒤에서 고모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리 크게 신경쓰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끊임없이 내리는 비로 축축하지만 푹신한 흙을 밟았다. 정국은 내가 정원 벤치에 앉아서 흙바닥을 꾹꾹 밟는 것을 옆에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 너도 할래? "
" 전 못합니다. "
" 그렇게 경호만 하고 있는 거 솔직히 재미없지? "
내가 흙덩이를 한 발로 쿵, 하고 세게 밟아 흙바닥을 움푹 꺼지게 하며 묻자, 정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정국의 대답을 끝까지 기다리면서 그의 팔을 타고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관찰했다. 빗방울이 손가락 끝에서 똑 떨어질 때까지 그는 기어이 대답하지 않았다.
" 또 대답 안 하네. "
나는 잠깐 정국을 쳐다보다가 다시 혼잣말하듯이 정국에게 말을 건넸다.
" 빗속에 앉아있는 거, 어머니께서 보면 분명히 뭐라고 하실 텐데. 귀족은 그러면 안 된다면서. "
" ..... "
"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귀족이 있는 줄 알까? 가문의 영광이 목숨보다 중요하고, 아직도 정략결혼이라는 게 존재하고..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그렇지? 이렇게 저택같은 곳에 나란 애가 갇히듯 살게 된 건 죽어도 모를 거고.. "
" ..... "
" 비라도 그치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이런 우울한 날씨는 날 너무 우울하게 해. "
" ..... "
" 얘, 솔직히 대답 한 번은 좀 해줘라. 비오는 거 너도 싫지? "
" ...네. "
들릴 듯 말 듯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정국의 얼굴에 따라서 살짝 미소가 스쳐지나간 것 같아 내 보조개는 더욱 깊어졌다.
귀족
09
방으로 돌아온 나는 감기 기운을 느꼈다. 나가지 말걸, 하고 후회하는 생각은 없었지만 몸이 으슬으슬 추운 건 사실이었다.
내가 감기 기운이 있다며 다과시간에도 방에서 나가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을 때, 방 밖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을 빼꼼히 열어보니 비스듬하게 정국이 보였다. 언뜻언뜻 고모부와 고모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나가지 못하게 말렸어야지. 쟤가 감기에 걸렸잖아. "
고모부와 고모가 정국을 앞에 세워두고 다그치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
" 이 사실을 쟤네 어머니가 알면 또 얼마나 화를 낼지.. 또 귀족이니 기품이니 온갖 고상한 척은 다 하겠지. 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잘 좀 하란 말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
고모의 앙칼진 목소리에 정국이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입을 뗐다.
나는 정국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문을 소리나게 밀고 나왔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서 그들 앞에 섰다.
" 제가 나가자고 한 거에요. 얘는 잘못한 거 없어요. 말렸는데 제가 나가자고 했어요. 그리고.. 의도와는 다르게 일이 크게 벌어진 건 확실하네요. 온갖 고상한 척-이라는 말 제가 똑똑히 들었으니까요. "
나는 고모와 고모부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한껏 굳어져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 그래, 이게 내가 어렸을 적 봤던 그들의 본모습이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가야, 하며 다정하게 굴던 그들이 겹쳐보여 꽤 기분이 역겨웠다.
나는 그대로 정국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왔다.
" 미안. 내가 나가자고 했는데. "
아니라고, 자기가 더 죄송하다며 고개를 젓는 정국을 보며 나는 픽 웃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밑에서 고모와 고모부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나는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가려 문 손잡이를 잡았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여전한 미안함과 고마움의 눈길이 오갔다. 나는 끝까지 정국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방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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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애인이랑 헤어졌는데 애인 어머님한테 톡으로 마지막인사 남기는거 에바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