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윤기 불륜남, 조각 3
"……!"
폐 한가득 공기가 들어찼다 빠져나간다. 그것을 시작으로 조급한 호흡을 반복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숨이 턱턱 막혔다.
어지러운 시야에 낯선 공간이 자리 잡았다. 부드러운 이불, 푹신한 침대, 하얀 커튼, 상아색 벽지, 갈색 책상, 책장, 소파, 노트북, 커다란 TV. 내 집도 아니고 호텔이나 모텔 따위는 더더욱 아닌 이곳은 어딜까?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나를 찔러오는 향이, 여기가 어딘지를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민윤기. 그 남자의 방이다.
"일어났네?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어. 밥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닌 거 맞아? 영양실조에 과한 피로가 겹친거래, 당분간 요양하라더라. 좀 쉬어."
"…무슨 말이에요?"
"병원에서는 수액만 맞고 나왔어. 우리 집이 편하지, 역시?"
무덤덤한 얼굴에 전에 없이 다정한 어투로 내게 그리 묻는 민윤기는 솔직히 쓰러지기 전에 봤던 그보다도 무서웠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미친 것 같이 느껴졌다. 정말,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물 마셔, 자."
"아."
내게 컵을 주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반지가 없었다. 아까의 그건 착각이 아니었나 봐. 혹시, 그녀와 이혼한 걸까?
예전과는 달리 그 생각은 내게 어떤 희망도 안겨주지 못했다. 나는 다만 무섭고 걱정됐다. 나로 인해 남의 가정이 파괴됐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면서 두려움이 바람에 실려 닿아왔다. 예전의 나라면 신경 쓰지도 않았을, 다른 사람의 입장. 진작에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이 남자를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모든 행위의 대가로 돌아오는 후회는, 나약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컸다.
지레짐작일 뿐임에도 눈물이 흐른다. 죄책감과 고통으로 얼굴이 젖어들지만, 여전히 나는 부끄럽고 민망하다.
이곳은 사죄하기엔 마땅치 않은 장소다. 떠나야 한다.
"저, 집에, 갈래요."
"왜? 나 이혼했어, 너 알고 있잖아. 그 반지는 조금 망가져서 줄 수는 없고, 다른 거 준비해뒀어. 네가 그 반지 가지고 싶어 하는 건 줄 몰랐었거든."
그리곤 입고 있던 재킷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게 이상할 만큼 꺼림칙한 모습이라, 나는 침대에 앉은 채 뒤로 물러났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게 반지를 주시려는 건가요. 당신은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잖아요, 제게 이러지 마세요. 마저 그녀를 사랑하세요. 전, 저는 그녀에게 잘못을 빌고 떠나야 해요. 더는 저를 잡아두지 말아요, 당신.
"반지는 됐어요. 그녀는 지금 어딨나요?"
"글쎄."
"언제, 이혼하셨어요?"
"그 날."
그 날, 이혼하자고 말했어.
아, 고작 두 음절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머리통을 밟으면서, 심장을 꽉 쥔 채 호흡을 틀어막는다.
이젠 정말 길이 없구나. 그 날의 객기만 없었더라도, 어쩌면 민윤기는 나와의 사이를 정리하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도, 오래오래,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나만 아니었어도, 내 입방정만 아니었어도.
그러나 모든 후회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을 때나 찾아오는 것이었고. 그건 우리에게도 통용되는 일종의 법칙인지라, 나는 꾸역꾸역 눈물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그녀를 만나야 해요."
"왜?"
"이제, 절 찾지 마세요."
나는 아주 조심스레 걸었다. 꼭 그렇게 하면 그의 방에 내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리고 문 손잡이를 잡았을 때,
"아!"
"어딜 가? 내가 널 어떻게 찾았는데 다시 날 떠난다고? 될 것 같아?"
어떤 의미로든,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겁에 질리게 했던 그 손에 의해 속절없이 끌려가 무너졌다. 바닥에 찧은 머리가 뎅- 울렸고 부딪힌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나는 앓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의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원한 거잖아. 반지 너한테 끼워달라며. 그래서 내가 반지 사뒀어. 네가 안 골랐길래, 내가 예쁜 걸로 골랐어."
"아니, 괜, 괜찮아요, 제발, 흐윽!"
"싫어? 네가 사달라고 했잖아. 왜 그래, 예쁜 건데. 정말 예쁜 거야. 원래 끼던 것보다 훨씬 예쁜 걸로 샀어."
백금에 다이아가 박힌, 확실히 내가 탐내던 부부의 반지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반지다.
아, 예전이라면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내밀었겠지. 내게 반지를 끼워주는 민윤기의 목에 팔을 두르고, 사랑한다 속삭이며 입 맞췄겠지.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래선 안 된다. 나는 당신에게 그럴 수 없어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흐릿한 시야에 겁을 집어먹고 아무렇게나 손을 휘둘렀다. 억센 악력이 내 손목을 잡아채려다 물러선다. 그는 매우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차가움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가 샘솟았다.
"싫, 싫어요. 갈래요. 집에 갈래요-"
그러나 남자의 손은 결국 내게 닿아왔다. 꼭 잡힌 손목이 무서워 있는 힘껏 그를 밀쳤더니 반지와 민윤기, 둘 다 내게서 멀어진다. 허겁지겁 눈물을 닦고 방 밖으로 나온 나는, 무심코 뒤를 바라봤다가 민윤기와 눈을 마주하게 됐다. 맹수같이 날카로운 눈이었다. 일순 다리에서 힘이 쫙 빠지게 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나는 꿋꿋이 달려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 같더니 -
"안 되겠다, 너."
서늘한 목소리와 비릿한 웃음이 귓가를 맴돌았고, 그때부터 나는 방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 * *
"아침 같이 먹었어야 했는데, 네가 너무 잘 자길래 안 깨웠어. 대신 일찍 올게, 사랑해."
20XX년 04월 XX일, 날씨는 잘 모르겠다. 하늘이 우중충하고 꽃이 흔들린다.
아침 7시. 민윤기가 내 이마에 한 번, 눈꼬리에 한 번, 입술에 한 번. 고루 키스하더니 반지를 쓰다듬고는 재킷을 챙겨 방을 나섰다. 아침부터 회의가 있다더니 평소보다 훨씬 이르게 집을 나선다. 원래는 9시에나 느지막이 출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얼굴을 오래 마주하기 싫어서 자는 시간을 늘렸더니 오늘 이렇게 운이 텄다.
이 방에 감금되고부터는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다.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다. 책을 보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인터넷도 안 되는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이렇게 몰래 일기를 쓰거나. 일기장을 들키면 몇 대나 맞을까? 저번 주에 이 일기장을 가지러 민윤기의 서재에 갔다 왔다가, 방 밖으로 나간 걸 들켜서 1주일간 침대에 묶여 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뻐근하다. 반지를 끼게 된 날로부터 약 3주, 정확히는 19일이 지났다. 그동안 민윤기의 사이코패스 같은 행태에 그 앞에서 토하지 않는 법을 깨우치게 됐지만, 그래도 혼자 있을 땐 구역질이 난다. 그와 닿는 피부의 가죽을 벗겨버리고 싶다. 죽어서라도 여길 나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요즘 생각하는 건데, 내 사상이 꽤 우울해진 것 같다. 감금이라는 게 사람한테 굉장한 영향을 끼치나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몇십 년간 지하에 감금당해 살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봤었는데, 남자가 어떻게 해서 걸린 것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잘 좀 읽어둘걸.
20XX년 04월 XX일, 8시 10분쯤에 커튼이 살랑거렸고 약한 햇살이 다가왔다. 어젠 날씨가 안 좋았는데.
어제 퇴근하고 들어온 민윤기의 욕구를 다 받아주고 아침 내내 끙끙거렸던 보람이 있는지, 그가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냉큼 창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상쾌한 바깥바람이 필요했다. 민윤기는 망설였지만, 출근하기 전에 닫고 나가달라고 말했더니 안심한 눈치로 창을 열어주었다. 그 미친놈은 창문에까지 자물쇠를 걸어뒀었다. 나 같으면 그냥 나를 포기할 텐데, 미친놈이 아닐 수 없다. 그건 그렇고 간만에 바깥바람을 마셨더니 탈출하고 싶어졌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내가 살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 일단 샤워를 한 번 더 해야겠다. 민윤기와 자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다.
20XX년 04월 XX일, 기분 좋은 날씨.
살랑이는 바람과 따뜻한 햇볕 때문에 잠에서 깼다. 착각인가 싶어 눈을 비볐더니 창문이 열려있었다. 민윤기는 수줍다는 듯 나를 보고 웃으며, 앞으로는 아침에라도 창 열어줄게. 하, 기가 차서. 미친놈, 제발 나를 포기했으면 좋겠다. 더러워.
민윤기가 죽든 내가 죽든, 둘 중 한 사람은 죽어야 할 것 같다. 죽여버릴까
아, 내가 미쳐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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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05월 XX일, 최고의 날씨와 최고의 기분.
이게 내 마지막 일기가 될 것 같다. 민윤기가 아침에 꽤 다급한 모습으로 집을 뛰쳐나갔다. 그 와중에도 방문을 잠가서 아쉽게 됐지만, 다행히 창문은 닫지 않고 갔다. 떨어져도 죽지 않을 높이지만, 죽더라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장애인이 돼서 살게 되는 것 빼곤 다 괜찮은 결말인 것 같다. 장애인이 되면 정말로 민윤기의 곁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죽어버리면 그 얼굴 안 볼 수 있기라도 하지.
자, 그럼 안녕, 민윤기.
* * *
"불편하진 않지?"
"…네."
"그러게 왜 그랬어. 너도 내 전 부인 꼴 날 뻔했는데, 내가 널 그 여자보다 더 사랑하니까 봐준 거 알지?"
"그 여자가, 왜요……?"
"아, 내가 얘기 안 해줬나. 그래, 우리 이제 평생 같이 살 사인데 알려줄게. 걔도 너처럼 도망치려다가,"
점심의 메뉴를 읊는 것마냥 평이한 어조. 담담한 목소리. 휠체어에 기대어진 등에 소름이 끼쳐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한테 걸려서 내가 죽였어. 우리 집 지하실에 있던가? 걔도 고아야, 이름아.
| BX |
진짜진짜 마지막입니다! 역시 조각은 짧아야 제맛 ㅠㅠ 원래는 처음에 올렸던 거기서 딱 끝내려고 했어요. 제 사상에 의하면 불륜소재는 결코 해피엔딩 불가라서ㅠㅠ 윤기 슬프고 여주도 슬프고 하면 괜히 저도 슬프구..힝힝 하지만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완결 내 봅니다 사실 이쯤되면 제가 괜히 미친 사람이라 이런 글이 나오나 걱정되기도 :'( 열심히 썼지만 제가 생각해도 별로 친절한 글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독자님들이 걱정되네요ㅠㅠ 죄송합니다 8ㅅ8 그리고 감사해요 덕분에 끝까지 썼습니다!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글에서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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