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학교로 향하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기대되면서도 도망가고 싶기도 한 정말이지 이상한 느낌이었다. 휴대폰 화면이 다시 까맣게 변했다. 세훈이 얘기했던 7시까지는 아직 두 시간하고도 조금이 더 남아있었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손에 땀이 베이는 것 같기도 했다. 사물함을 닫으며 손을 바지에 대충 닦았다. 다시 휴대폰 화면을 켜는데 갑작스레 걸려오는 전화에 당황해서 전화를 꺼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루한씨 맞으세요?]
“네, 그런데요. 실례지만 누구세요?”
[여기 XX병원인데 크리스 환자 분이 교통사고가 나서 보호자 분께서 오셔야 할 것 같거든요.]
“형!!”
응급실 안에서도 튀는 금발 머리 덕에 형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많이 놀랐어?”
“그걸 말이라고.”
“가벼운 접촉사고. 팔에 금간 거 말고는 큰 이상 없대.”
“그래도...”
이마도 같이 다쳤는지 조그만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괜스레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형 친 사람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 베드에 쳐져있던 커튼이 확 열렸다.
“여기요. 동생 분? 죄송합니다.”
하얀 얼굴이 깔끔하게 사과를 해 온다.
“김준면이라고 합니다. 제가 전적으로 잘못한 거니까 치료비랑 다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 쪽은 몸 괜찮으세요?”
“저도 뭐, 별로 크게 다친 데는 없습니다. 많이 놀라신 거 같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예의바르고 깔끔한 태도에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다시 고개를 형에게로 돌렸다.
“진짜 여기 오면서 얼마나 맘 졸였는지 알아?”
“우리 루한, 걱정 많이 했구나. 형이 잘못했어.”
“왜 또 형이 사과하고 그래...”
형은 가볍게 소리 내서 웃으며 내 머리를 살짝 흩트렸다. 그리고는 다시 베드에 몸을 편하게 눕혔다. 며칠 경과를 살펴보기 위해 입원해야 한다는 말에 입원수속을 마치고 간호사가 알려준 병실로 들어서니 형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큰 키 때문에 손목과 발목이 드러나는 폼이 웃겨서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인실의 병원에는 형과 사고를 낸 사람이 같이 쓰는 모양이었다. 그는 벌써 옷을 갈아입고 텔레비전을 틀고 있었다. 막 시작한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수능을 마치고 나오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여덟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형, 미안한데 나 지금 꼭 만날 사람이 있어서 가봐야 될 거 같아.”
형의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병원에서 뛰어나와 택시를 탔다.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 가야했다.
-
매년 뉴스에서 떠들어 댔던 것처럼 수능 한파가 없던 날이었다.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 수능보다는 그 후에 있을 만남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현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운 기분이었다. 그 날은 내가 수능을 치던 날이었다.
시험을 치고 집에 들려 방에 가방을 던져두고는 외식을 하자는 엄마의 손길도 뿌리치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학교는 휑했지만 그럼에도 들뜬 마음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또 시계를 봤다. 아홉시를 넘어서 열시가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날이 찼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루 종일 느꼈던 기대감이 상실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괜히 입 안이 썼다. 걸음을 교문 쪽으로 옮겼다. 운동장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 교문 쪽에서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걸음을 빨라지기 시작했다.
“세훈아.”
거칠게 밭아지는 숨 속에서도 내 이름이 또렷하게 들렸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끌어안았다.
“진짜 갈려고, 다 정리할려고 했는데.”
“정리, 하지마.”
“선생님이나 겁먹지 말죠. 나 진짜 지금부터 선생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씹어 먹을 거야.”
잔뜩 긴장된 그의 몸을 더욱 끌어안았다. 수능이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
[감기 기운은?]
“괜찮다니깐.”
[그러면서 새벽에 그렇게 기침을 해댔어?]
“그건 그거고.”
[진짜 도경수 때문에 출장도 맘 놓고 못 오겠네.]
“일이나 열심히 하지?”
[여기 온천 진짜 좋다. 다음에 꼭 같이 오자.]
“형아 피곤 할텐데 얼른 쉬어.”
[그래 우리 꼬맹이. 형아 갈 때까지 시험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알았거든요.”
짧지도 길지도 않은 통화를 끝내고 보니 준면이 형에게 몇 통이나 전화가 와있었다. 곧바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왜요?”
[어어 경수야. 지금 뭐해? 바빠?]
“아뇨, 그냥 시험공부 하려구요.”
[형 지금 병원에 입원했는데 너무 심심해서 그러는데 책 몇 권만 좀 갖다 주라.]
“입원이요? 형 어디 아파요?”
[별 건 아니고 가벼운 접촉사고.]
“바로 갈게요.”
형이 알려준 병원으로 가 바로 병실로 갔다. 2인실인지 옆 침대에는 금발의 남자가 잠을 자고 있었다. 준면이 형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웃어보였다.
“일찍 왔네?”
“놀래서 바로 왔잖아요. 몸은 괜찮아요?”
“뭐 별로 다친 건 아니고. 며칠 좀 쉬다 갈려고.”
형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종이가방 안에서 책을 꺼내들고는 몸을 편하게 기댔다. 옆에 의자를 끌어 앉아서 형이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요즘 뭐 어때?”
“그냥 뭐 그래요.”
“종인이 자식은 영 죽상이던데.”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잘생긴 그 얼굴이 떠오르며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요?”
“뭐 과 선밴가? 고백했다던데 영 기분은 안 좋아 보이더라. 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형의 말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병실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그제서야 얼굴 가득 장난기가 가득한 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도 나를 보고 꽤 당황한 건지 잠시 멈칫하더니 종이 가방을 침대 옆의 올려두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옷이랑 챙겨오라는 거 다 갔다 줬으니깐 나 간다.”
내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바로 나서려는 그를 보며 준면이 형이 그를 불렀다.
“경수도 지금 갈 건데 같이 가.”
“어, 어?”
“너 지금 간다며. 종인이한테 데려달라고 해.”
가방까지 메어주며 등 떠미는 형에 결국 어색하게 그와 병원을 나섰다. 그는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몰래 훔쳐본 얼굴이 많이 까칠해졌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얼굴이 많이 안 좋네.”
“감기 걸려서.”
“조심, 하지.”
그가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따라 걸음이 멈춰졌다. 그가 몸을 틀었다. 한층 또렷하게 들어오는 얼굴에 새삼 그가 참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준면이 형이 얘기가 생각났다.
“과 선배랑은 잘 되가?”
내 질문에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속으로 괜히 꺼낸 말을 후회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도경수.”
“응.”
“너 일부러 그래?”
“아니.”
“넌 시작부터 끝까지 나한테 너무한다.”
“....미안해.”
“그래서 나도 이제 그럴려고.”
그의 뜨거운 체온이 얼굴에 닿아왔다. 곧 마주한 그의 눈에 어떤 결심 같은 것이 읽혔다. 곧 그의 체온만큼 뜨거운 입술이 맞닿아왔다. 뜨겁게 섞여오는 혀에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익숙하게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있었다. 곧 떨어진 입술에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수야, 나랑 바람피자.”
“......”
“너는 그 사람이랑 사랑해.”
“......”
“나는 너랑 사랑할게.”
“......”
그의 뜨거운 체온이 온 몸을 감싸왔다. 잠시 형이 생각났다. 그리고 더더욱 그에게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항상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의 얼굴이 열여덟 내 얼굴 같아서였다. 지독한 첫사랑을 했던 나는 나와 닮은 그 얼굴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얼굴이 꼭 나같아서.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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