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맹렬하게 핸드폰을 한다. 김남준은 자신의 여자친구와, 나는 박지민과 카톡을 하는데, 김태형이 우리 앞에 선다. 그리고는 각자의 무릎에 종이 쪼가리를 던진다. 뭔가 하고 보니 '스마트폰 중독 테스트' 다. 뭐하는 거냐고 물으면 김태형은 입을 댓발 내민다.
존나 웃긴다. 진짜 핸드폰 중독은 김태형이다. 김태형은 하루 종일 컵라면 하나만 먹고 핸드폰을 한 전적이 있다. 썸원은 내가 아닌 김태형에게 콜 더 닥터 해야 한다고. 김태형은 지금 괜한 심술을 부리는 거다. 그저께 클럽에서 한 여자에게 대차게 까이고 와서 바득바득 이를 갈더니, 우리가 마음에 안 든 거다. 놀부 아내가 흥부 뺨을 쳤다면 이 새끼 심술은 놀부 뺨을 친다.
김태형이 김남준의 주위를 돌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홀드 버튼을 누르니 김남준이 견디다 못해 한마디 한다. 김태형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부릅 뜬다. 야, 너 진짜 망실이다. 김태형은 정말 망실한 얼굴로 김남준을 쳐다본다.
김남준은 김태형을 빤히 쳐다보다 대답한다. 그래 이 개자식아. 김태형은 흡족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간다. 저건 망실도, 망신도 아닌 병신이다.
#2
"이게 뭐야!"
아침부터 소란이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전정국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무슨 일인데.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나갔던 나는 그 자리에 굳었다.
"......."
...이건 뭐 시멘트를 처바른 것도 아니고.
얼굴이 새햐얗게 뜬 채로 인상을 쓰던 전정국은 나를 발견하고는 나에게 하늘색 통을 들이민다. 이거 썩었어. 버려. 뭔가 하고 보니 전에 세일해서 산 BB크림이다. 넌 대체 이걸 왜 발랐는데. 전정국의 말인즉, 어제 여직원 하나가 겨울에도 선크림을 발라야 피부에 좋다고 했단다. 스킨로션이 귀찮다고 세수를 생략하던 게 뭔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
김태형도 무슨 일인가 하고 나오더니 전정국의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방에서 폼클렌징을 들고 와 전정국의 손에 쥐여준다.
"그거 선크림이 아니라 비비야."
"그게 뭔데."
"... 얼굴 하얘지는 거야. 너처럼은 아니고."
전정국의 얼굴에 한 번 더 감탄하는데 김태형이 갑자기 손뼉을 탁 친다. 핸드폰으로 전정국의 사진을 찍어대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화장실에 들어간 전정국은 뒤로하고, 나는 얘가 또 무슨 신종 지랄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김태형의 옆을 지킨다. 잠시 기다리던 김태형은 상대편이 전화를 받았는지 얼굴이 핀다. 거기 세상에 이런 일이 맞죠?
"제 친구가 자다 일어났더니 백인이 됐거든요."
"......."
"네! 증거 있어요. 방금 사진도 찍었어요."
네. 네? 아뇨, 그건 아닌데... 말 한마디에 얼굴이 밝아지다 어두워지다 하던 김태형은 문득 눈에 빛을 내며 묻는다.
"근데 이거 나가면 그런데 말입니다, 하는 것도 해줘요?"
나는 고개를 젓고 방으로 들어간다. 김태형 머리에는 뇌가 아니라 우동 면이 들어있는 게 분명하다. 좋겠다, 김태형은. 밥 걱정 없어서.
#3
나는 김남준과 김태형, 그리고 전정국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선다. 박지민과 데이트다. 손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닫은 나는 다시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온다. 전정국이 빤히 쳐다본다. 신발장을 뒤져 우산을 찾는다. 혹시 모르니까. 다시 손인사를 하고 나간다. 현관문이 잠기기도 전에 다시 연다. 주방에서 포크를 챙긴다. 혹시 모르니까. 또 나간다. 또 들어온다. 거실에서 리모컨을 챙긴다. 혹시...
"스탑."
"?"
식탁에 앉아 노트북만 보던 민윤기가 손가락을 까딱한다. 그쪽으로 오라는 거다. 나는 강아지처럼 쫄쫄 간다. 민윤기는 내 가방을 뺏어들더니 안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둘 도로 뺀다. 텀블러, 우산, 마스크...
"잠깐. ... 그거 단소냐?"
전정국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나는 입을 꼭 깨문다. 뭐, 왜. 준비성이 철저한 신여성 좀 돼보려고 그랬다, 왜. 내 말에 김남준이 한숨을 쉰다. 민윤기는 포크까지 꺼낸 후에야 나에게 가방을 돌려준다.
"너 지금 면접 보러 가는 거 아니고 데이트 가는 거야."
"그래도 잘 보이고 싶은 걸 어떡해."
박지민은 잘생기고, 키는 작지만 넓은 마음이 있고, 섹시하고... 누가 봐도 벤츠라고. 내 말을 듣던 민윤기가 자신의 옆 의자를 툭툭 친다. 앉으라는 거다. 나 늦었는데. 하지만 단호한 민윤기의 표정에 나는 입을 다물고 앉는다.
"이런 거 없어도 예뻐. 그리고 내 눈에 예쁘면 걔 눈에도 예쁜 거야."
"넌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거고."
"난 그냥 습관이라 하는 말 없어."
"......."
내가 입만 삐죽 내밀고 있으니까 민윤기는 설교를 시작한다. 야, 박지민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너 만나준대? 봉사 정신이 존나 투철해서 너랑 만나주는 거냐고. 너 좋으니까 자기 시간 내서 만나는 거잖아. 틀려? 막말로 네가 숨겨둔 애가 있어, 뭐가 있어. 꿀릴 거 없다고. 걔가 벤츠면 넌 람보르기니야. 네 생각보다도 넌 훨씬 괜찮은 애니까 쓸데없는 걱정 그만하고 다녀와. 나는 설교가 길어질라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근데,
"그래도 단소는 한번 챙겨보는 게..."
"......."
"아니면 리코더...?"
민윤기가 손으로 머리를 짚더니 긴 한숨을 쉰다. 나는 얼른 자리를 빠져나온다.
#4
전정국이 몸살에 걸렸다. 끙끙 앓는 꼴을 도저히 못 보겠어서 자진해서 곰탕을 끓이는 중이다. 딱히 걱정돼서 해주는 건 아니다. 절대. 국이 한창 팔팔 끓는데 김태형이 슬슬 기어 나오더니 냄새 좋다며 식탁에 앉아서는 죄 없는 나를 괴롭힌다.
"뼈가 두 개인 걸 두 글자로 줄이면 뭐게?"
"......."
"두개골!"
심지어 두개골은 세 글자다. 그래도 김태형은 좋다고 처웃고 있다. 그럼 뼈가 네 개가 되면 뭐라고 부르게? 나의 무시에도 김태형은 꿋꿋하게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를 가리킨다. 사골! 또 좋다고 처웃는다.
"아마존에는 누가 살게?"
"......."
"아마... 존?"
김태형은 여전히 좋아 뒤지려고 한다. 저러다 진짜 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수지가 자기소개를 하면? 저수지! 저런 건 어디서 배워오는지 모르겠다. 나는 말없이 눈을 꼭 감는다. 반성문 써. 내 말에 김태형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입을 다문다.
#5
방문이 벌컥 열리고 전정국이 들어온다. 나가.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내 옆에 앉는다. 박지민이 너보고 빨리 문자 확인하래. 나는 고개를 들어 전정국을 쳐다본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안 돼. 나 밀당 중이야. 전정국은 혀를 찬다. 꼭 연애도 못 해본 게 밀당이란다.
"여자는 자고로 튕기는 맛이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씨발 놈이. 나는 여자도 아니라는 거다.
"그럼 나 좋아하는 박지민은 게이냐?"
"몰랐냐. 그래서 걔가 나 엄청 좋아하잖아."
"간식으로 개껌 사줘? 개소리 꺼져라."
내 말에 고개를 젓던 전정국은 손수 핸드폰을 찾아 내 손에 쥐여준다. 튕기다가 진짜 튕겨나가지 말고, 연락 잘 해. 괜한 사람 애태우지 말고. 나는 다시 핸드폰을 붙잡고 박지민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에 어떤 대답이 제일 좋을지 머리를 쥐어짠다.
#6
"... 말도 안 돼. 이건 미친 거야."
지각이다. 나는 핸드폰을 보고 절규한다. 당장 이불을 박차고 나가 머리를 묶으며 눈으로 빨래 건조대에서 양말짝을 찾는다. 나는 멀티태스킹도 가능한 존나 신여성이니까. 부산한 나와 다르게 김태형은 학생들이 가장 바쁜 대학은? 부산대학교! 하며 지랄을 가루로 뿌리고 있고, 김남준은 태평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전정국과 민윤기도 그 옆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아직도 잠옷 차림인 나를 구경한다.
"야, 토끼."
"왜!"
바쁜 거 안 보이나. 왜 부르는지 모르겠다. 성질을 내며 대답하니까 전정국은 어깨만 으쓱한다.
"봐봐. 지가 토끼인 줄 안다니까."
"......."
"앞으로는 밥으로 당근만 줄까 봐."
"커피 내놔."
나는 달랑거리는 토끼 잠옷의 귀를 넘기며 전정국의 손에서 커피를 뺏어든다. 넌 좀 괘씸하니까 원샷이다. 전정국은 잔을 깔끔히 비운 나를 째려보고, 김태형은 또 손뼉을 짝 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거기 동물농장이죠? 여기 커피 마시는 토끼가 있는데요.
"김태형 반성문 써."
"헉, 죄송해요. 저 반성문 써야 해서 이따 다시 전화드릴게요."
"두 장 써라."
저 잘하면, 아니, 잘 못하면 다시 못 걸지도... 죄송해요... 시무룩해서 전화를 끊은 김태형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A4 용지를 챙긴다.
#7
버스 밖으로 보이는 편의점마다 빼빼로 천지다. 퇴근 시간이면 다 팔릴 법도 한데 아직도 많은 빼빼로들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저런 거 다 상술이다. 독수리 오형제끼리도 깔끔하게 안 챙기기로 했다. 애새끼도 아니고. 피곤한 몸으로 익숙한 음과 함께 도어락을 풀고 신발을 벗는데, 부산한 소리가 나더니 주인을 기다렸던 개새끼마냥 넷이서 차례로 쪼르르 마중을 나온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너 나한테 줄 거 없어?"
"... 3만원?"
"내 돈 가져갔냐? ... 또?"
... 또 잘못 말했다. 입을 꼭 깨무는데 전정국이 김남준의 말을 자른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 내가 뭔가 빚진 게 있던가 고민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하나하나 곱씹는데, 그러고 보니 네 명 다 등 뒤로 뭔가를 숨기고 있다. 민윤기도 등 뒤로 손을 숨기고 존나 고백하기 전 여고생 포즈다. 너네 뭐 하는데? 내 말에 넷은 동시에 숨기고 있던 빼빼로를 내민다.
"... 이거 안 챙기기로 했잖아."
"그래도 일 년에 한 번뿐인 날이잖아."
"빼빼로가 중요하냐. 다 그 핑계로 서로 선물도 주고 기분 내고 그러는 거지."
"......."
"...너 진짜 준비 안 했어?"
당연히 안 했지. 나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삼킨다. 대신 능글맞은 연기를 시작한다. 그, 그럴 리가. 당연히 준비했지. 서프라이즈로 주려고 소화전 안에다 넣어놨는데. 하하. 민윤기가 눈을 가늘게 뜬다. 하하 씨발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신발을 신고 나간다. 우리 집에는 개새끼도 아닌 애새끼 넷이 산다.
#8
민윤기와 오랜만에 볼만한 영화가 나왔길래 바로 영화관에 달려갔다. 그리고 밖에 나온 김에 장보기까지 해치우기로 했다. 영화관과 통하는 마트에서 카트도 뽑아 한 바퀴를 돌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존나 운명이었다.
"...어?"
"...어?"
바로 박지민을 만날 운명. 왜, 옛말도 있지 않는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고, 박지민은 마트에서 만난다는. 반가운 마음에 카트도 나란히 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박지민의 카트를 쓱 보던 민윤기가 툭 묻는다. 혼자 사세요? 그러고 보니 박지민의 카트에는 햇반부터 시작해 즉석식품이 한가득이다. 박지민은 그렇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같이 저녁 드실래요?"
"네?"
"저희 지금 저녁 장 보던 중이었는데. 같이 먹어요."
박지민은 당황하기도 잠시, 눈에 빛을 내며 대답하는 나와 민윤기를 번갈아 쳐다본다. 나는 팔꿈치로 민윤기를 툭툭 친다. 민윤기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말한다. 와서 저녁 먹고 가세요.
#9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내가 그렸던 그림은 박지민과 콩을 볶으며 오붓한 저녁을 하는 거였다. 그리고 우리가 볶을 콩은 알콩달콩이었지, 박지민이 아니었다고. 박지민을 소파 가운데에 앉히고 왼쪽에서는 김태형, 오른쪽에서는 김남준이 딱 붙어앉아 질문 폭탄을 퍼붓는다. 키가 작네요? 그냥 키도 작고 앉은키도 작네요? 눈이 두 개네요? 코로 숨 쉬네요?
보다 못한 내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박지민을 구출한다. 쟤네가 괜히 겁주는 거예요. 무시해요. 그리고 또다시 질문을 퍼부을까 얼른 주방으로 박지민의 등을 떠미는데 두 거머리가 이번에는 나를 부른다. 불길하다. 용건만 빨리 말해. 나는 일부러 험악한 표정을 짓는다.
"박지민 되게 좋은 사람 같아."
"맞아, 맞아. 존나 마음에 들어."
맞아맞아 같은 소리 한다. 넌 존나 양 뺨이나 맞아 맞아. 요즘 조기 유학이니 조기 입학이니 하는 트렌드에 발맞춰 인생도 조기 포기하고 싶다 보다. 치솟는 살인 충동을 누르며 나는 박지민이 있을 주방으로 향한다. 박지민은 어느새 사온 야채들을 다 씻고 촵촵 소리 나게 썰고 있다. 와, 팔뚝 봐. 핏줄 선 거 봐. 나는 차마 옆에는 못 가고 뒤에서 박지민을 구경한다.
"빨리 안 오고 뭐 해요?"
"네?"
"백허그 해주려고 기다리나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니,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섹시해서 까닥하면 내가 너 덮칠 것 같거든요. 하지만 이대로 말했다가는 너무 변태로 보일 것 같아 참는다. 정신 차리자. 상대는 박지민이다. 나는 내가 괜히 방해가 될 것같았다고 말하며 박지민의 손에서 칼을 빼간다.
"이제 제가 할게요. 그래도 손님인데."
고개로 식탁을 가리키니 박지민은 말 잘 듣는 어린이처럼 식탁에 앉고는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웃는다. 그냥 웃는 것도 아니고 심장이 씨발 떨리게 웃는다. 왜 웃어요. 내 말에 박지민은 어깨를 으쓱한다.
민윤기가 집에 오는 길에 나에게만 조용히 물었었다. 너네 동갑 아니야? 지금까지 말도 안 놓고 뭐 했냐. 민윤기 말이 맞다. 나와 전정국은 친구고, 박지민과 전정국도 입사 동기인 동갑내기 친구다. 말을 놓을 거였으면 진작에 놨다. 하지만 박지민은 존댓말 연애가 생각보다 설레는 것 같아요, 하는 내 한 마디에 굳이 존댓말을 고집했다. 그런데,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신혼 부부 같아서."
"좋다고. 엄청."
이건 반칙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