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만 들면 지겹게 마주치는 동그란 눈이 마구 당황한 빛을 띠었다. 학기 초부터, 가 맞을까. 아마도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올 때 즈음에 내가 알아챘으니 분명 그 전부터 시작되었겠지. 묘하게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저 애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김도영이다.
처음부터 싫어했던 건 아닌데. 개학하고 얼마 간은, 그냥 딱히 관심을 갖지는 않았었다. 나는 나대로 새 친구들을 사귀어야 했고, 그 애는... 이미 친구가 많아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분명히 김도영은 인기가 많았다. 항상.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 매일 멀쩡한 사람이나 쳐다보고, 기분 나쁘게 실실 처 웃는 저런 애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나 챙기는지 모를 일이다.
김도영은 우리 앞집에 산다. 딱 벚꽃이 퐁퐁 피어나기 시작했을 즈음, 분홍빛의 작은 꽃잎이 이리저리 공중을 부유하고 다니는 가로수 길을 사이에 두고 문을 열면 매일같이 마주칠 만한 바로 그 자리에. 그 애와 우리 집 사이에는 고개를 쭉 뻗어도 끝나지 않을 만큼 길-게 벚나무가 늘어서 있다. 좌우로 가득, 예쁜 향기를 뿜어내는 벚나무를 좋아했다. 그런데 나의 매일 아침을 로맨틱한 감성으로 물들이던 그 길은 김도영을 발견한 날부터 최악이 되었다.
교복을 차려 입고 현관문을 쾅 닫고 나면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났다. 작은 마당을 걸어 대문을 열자마자 눈앞에서 웃고 있는 건 새하얀 김도영이다. 그래서 나는 두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어... 여주야."
미친 놈. 눈치도 없나, 이어폰은 장식으로 꽂은 줄 아나 봐. 당황해서 따라오는 하얀 운동화 앞코를 무시하고 그냥 걸었다.
"여주야...? 안 들리려나...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그럴 리가. 난 그냥 네가 짜증나서 그래.
"으음, 사실 내가 너 주려고 이거 하나 가져왔는데 먹을래?"
난 단팥빵 싫어해.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좋아했는데, 이제 싫어. 눈동자가 전부 가려질 정도로 밝게 웃으며 내민 단팥빵을 보자마자 구역질이 났다. 짜증 나. 전부 짜증 나. 너 때문이잖아.
"야아, 너무 한다. 난 너 밥 잘 안 챙겨먹는 것 같길래-"
점점 빨라지는 내 걸음에 맞춰 거의 걷다 뛰다를 반복하다시피 하던 김도영은 바쁘게 속도를 맞추느라 내가 헛구역질한 것은 보지도 못했는지 징글맞게도 따라오며 단팥빵을 들이밀었다. 진짜 싫어. 모든 짜증을 담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내 눈길을 마주 받은 둥그런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제야 멈추어 섰다. 저 창백한 낯짝만 보면 토악질이 나. 속이 울렁거려. 너만 보면. 그래서 네가 싫은 거야.
오늘도 다를 게 없었다. 저 애는 매일같이 쌩하니 지나가는 날 보고 울적한 얼굴이 되면서도 포기하지도 않고 꼭 커다란 강아지 새끼처럼 우리 집 대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현관문을 닫고 도어락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쏜살같이 저도 대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안 기다린 척, 우연히 만난 척. 문을 나서면 나는 우당탕 소리는 다 그것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는 건지 몰랐다. 그저 앞집에 산다는 이유 하나 가지고, 나를 챙겨주고 싶다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같잖은 책임감이라도 갖는 모양이었다. 그게 더 짜증났다.
선선한 봄날씨와 뜨거운 여름 날씨의 꼭 중간쯤 되는 날이었다. 그 애의 시선을 처음으로 알아챈 날은. 새 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치는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 적막한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와 사각사각 샤프 굴러가는 소리들 속에서 처음 눈이 마주쳤다. 동그랗고 까만 눈, 창가 쪽 분단의 마지막 줄, 창문 바로 옆 자리였다. 창가에 반쯤 몸을 기댄 채 손바닥으로 뒷머리를 받치고 빙글빙글 샤프를 돌리던 김도영은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리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라면 멍 때리는 그 시선이 너무 깨끗하게 날 향하고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그 애의 바로 옆 분단, 맨 뒤에서 바로 앞 자리, 내 자리였다. 몰래 시선을 주고받기에는 아주 적합한 자리였다. 물론 나는 그 애와 몰래 시선을 나누는 설레는 짓거리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 재수 없는 눈빛을 함께 쏘아보았을 뿐이었다. 공부는 안 하고 왜 쳐다보는 거야. 약간 신경질이 난 내 시선을 알아챈 그는 눈과 입을 예쁜 초승달 모양으로 접으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공부 열심히 해. 그리고 난 대답했다. 너나 잘 해.
그 애가 정말로 공부를 잘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공부하라고 준 자습 시간에도 멍이나 때리고 있는 애가 뭘 얼마나 하겠어, 생각했는데 김도영이 일 등이었다. 거지 같아서 진짜. 그 멍청한 표정으로 자습 시간을 때우던 게 눈에 선했다. 누군 눈이 빠져라 책만 들여다 봤는데. 정말이지 짜증나게도 투명한 스카치 테이프를 경쾌하게 뜯어내 등수가 인쇄된 종이를 칠판 옆에다 떡하니 붙여 두는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도 보나 마나 김도영의 것이었다.
몰랐는데, 나 말고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적 좋고 인기 많은 김도영은 반장 노릇까지 제법 잘 하고 있었다는 걸.
톡, 표면에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한라봉 에이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였다. 그 꼬다리 위에 살며시 올려놓는 노란색 포스트잇은 내가 제일 자주 쓰는 색깔이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손끝을 따라 간 시선의 끝에는 정갈한 흰색 명찰이 있었다. 김도영, 그리고 그 위에 새하얗게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얼굴까지.
- 오늘은 방해 안 할게. 이거 매점 아줌마가 줬는데 나는 별로 안 좋아하는 거라서! 너 너무 창백해. 비타민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맛있게 먹어! ^-^
병신 같아, 일 등이란 게. 국어는 다 찍었나 봐. 음료수를 누가 먹어, 마시는 거지. 창백하기는 제가 더 쓰러질 것 같이 허여멀건한 얼굴이면서 남 신경쓰는 것도 어지간했다. 그리고, 이건 매점에선 안 파는 거야. 일 층 자판기에만 있어.
진짜 병신인가 봐.
김도영은 한결같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내게 잘 해 줬다. 너 왜 그래? 하고 물어 본 날도 있었다. 봄 날씨 치고 바람이 쌀쌀하던 오후의 운동장에서였다. 남자 애들은 축구 하고, 여자 애들은 피구를 하든 수다를 떨든 알아서들 해라. 무슨 일 있으면 체육관으로 오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피구를 했을 텐데 그 날 따라 몸살 기운이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혼자 스탠드에 주저앉아서 멍하니 공을 피하는 다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발목을 절뚝거리던 김도영이 내게로 걸어왔다.
"안녕, 여주야."
"말 걸지 마. 다른 애들이 쳐다보잖아."
거의 처음으로 나눠 본 제대로 된 말이었다.
"아무도 안 보는-"
"제발."
"알았어."
"......."
"......안 심심해?"
"응."
"음, 발목을 좀 삐어서 축구는 못 하겠더라고. 내가 있어야 우리 팀 이기는데."
방금 멀쩡히 걷는 거 다 봤는데. 발목을 삐긴 무슨, 분명 또 옆에 붙어서 살랑거리려고 온 거였다. 토 나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김도영이 나한테 이럴 때마다, 진짜로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목구멍이 아팠다. 토할 것 같아.
"김도영."
"어, 응?"
"조용히 좀 해 줘. 너 때문에 더 머리 아파."
"아, 미안. 너 머리 아파?"
"네 덕분에."
"헤엑, 머리에서 열이 펄펄 나. 너 몸살 기운 있는 거 아니야?"
갑작스럽게 다가와서 앞머리 위에 폭 올라앉은 손바닥이 차가웠다. 네 손이 차서 그런 것 같은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호들갑도 떨 수 있구나, 생각했다. 김도영은 혼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더니 내 바로 밑 계단에 와서 쪼그리고 앉았다. 풀빛 체육복 지퍼를 열어 끝자락을 잡고 날다람쥐처럼 양팔을 펼치며. 하얀 이가 다 보이도록 씨익 미소지은 김도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뿌듯한 표정을 했다.
"뭐 하는 거야? 안 보이잖아, 비켜."
"바람 다 맞으면 진짜 감기 걸려. 바람 막아주는 건데."
바람 막는다고 감기 안 걸리나.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는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애는 퉁명스러운 내 질타에 음, 하고 입술을 꾹 물었다. 조금 풀죽은 듯한 미소에 미안해지려고 해서 괜찮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피구 보고 싶어? 그 애는 더 밝게 웃으며 양 옆으로 넓게 펼치고 있던 날개를 내렸다. 이제 보이나? 체육복 자락을 쥐고 펼쳤던 양팔을 도로 옆구리에 착 붙였는데도 바람은 조금도 내 쪽으로 불어오지 않았다. 말라 빠져서 몰랐는데, 그냥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도 내 앞의 바람을 전부 가렸다. 키도 키인데, 어깨가 생각보다 넓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 괜찮지?"
히히, 하고 웃는 얼굴이 토끼를 닮았다. 휘이이, 소리까지 날 정도로 거세게 부는 바람이 눈앞의 검은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고 지나갔다. 무슨 봄 날씨가 이러냐. 여주야, 넌 감기 걸리지 마. 내가 대신 걸릴게. 그래야 보람이 있지, 그치.
"너 왜 그래?"
"응? 뭐가."
"감기 걸려도 내가 걸리는데, 네가 왜 바람을 대신 맞아주냐고."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내가 된통 아플 것 같아. 벌 받느라고."
쓸데 없는 소리로 웃어넘기는 얼굴이 발갰다. 오후의 햇빛을 등지고 내 앞에 쪼그려 앉은 등판이 갑자기 커진 것 같았다. 나를 감싼 그늘이 너무 컸다. 계속 실없이 웃으며 내게 말을 걸던 목소리가 자꾸 목을 가다듬었다. 아아... 목이 간지럽네, 진짜 감기 걸리려나.
그 애가 그러니까 괜히 나도 목이 간지러웠다. 계속 침을 삼켰다. 김도영이 날 보고 웃을 때마다 못본 척 하면서. 학교에도 가득 피어있던 분홍색 벚꽃잎이 그 애의 동그란 머리 위에 하늘하늘 떨어져내렸다.
김도영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진짜 몸살이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지. 눈 앞에서 아무리 알짱거려도 신경도 쓰이지 않았는데, 막상 눈 앞에 안 보이니 신경이 쓰였다. 봄날에 바람 좀 차다고 냅다 감기 걸리는 애가 어디 있어. 무턱대고 들렀던 김도영의 집 대문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거절당했다.
"안녕하세요. 김도영이랑 같은 반 친구인데요, 혹시 걔 지금 집에 있나요?"
- ......미안,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지직거리는 인터폰 너머로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음성은 뚝뚝 끊어지다가 그 끝에 터졌다. 기침처럼 격렬하게. 꾹, 무언가 눌러 담는 듯한 음성이었다. 너 괜찮아? 진짜 아파?
대답은 없었다. 담장 너머로 아찔하게 다디단 꽃내음이 진동했다. 벚꽃은 다 져 가는데.
입술이 조금 튼 것 외에는 평소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김도영은 다시 돌아왔다.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변함없었다. 매일 아침 현관문을 닫고, 다섯 발자국을 걸어 대문을 열었다. 그러면 그 앞에서 매일 똑같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인사하는 얼굴은 연한 분홍빛 꽃잎이 우리 주위에 마구 날리는 날에도, 그 잎들이 바닥에 내려앉아 소복한 꽃길을 만든 날에도, 벚꽃이 전부 지고 그 자리에 자그마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 날에도 변함없었다.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라고는 가지런히 뻗은 손에 들린 우유의 맛, 또는 단팥빵을 제외한 빵들의 종류같은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난 김도영만 보면 점점 더 견딜 수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언젠가부터 나보다 반 보폭 정도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맞추게 된 김도영은 가끔씩 날카로운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그 애는 싫었지만, 등하교길에 좀 함께하는 것 가지고 굳이 싫은 티 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앞집이니까, 그냥 그 이유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그 날을 빼놓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실실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었는데, 오늘은 없는 사람처럼 걷기만 했다. 그 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가끔씩 툭툭 터져 나오는 헛기침 소리 뿐이었다. 왜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해? 묻고 싶었는데 왠지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괜히 딴 소리를 했다.
"왜 그렇게 자꾸 기침을 해?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거 있어?"
잠시 대답을 고민하던 김도영이 말했다.
"좋아해서 그래."
"뭐?"
"아니야, 그냥 좋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좋으면 기침을 해? 뭐가 좋은데. 김도영만 보면 미친 개처럼 쏘아붙여대는 나는 아닐 것이었다. 하여튼, 진짜 이상한 애야.
"버스 왔다. 얼른 타."
그렇게 말하며 먼저 뛰어 가 버스를 잡는 뒷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매일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기만 했지 내 앞에서 걸은 적은 없었는데. 군청색 교복 마이가 버스 안으로 반쯤 몸을 기울이며 나를 불렀다. 버찌가 알을 키워가는 늦봄의 오후에도 버스는 꽃잎들이 빗자루에 쓸려 길가로 내몰려진 깨끗한 도로 위를 지나 늘 같은 자리에 섰다. 아직 희미하게 벚꽃 향기가 남아 아른거리는 작은 나무 벤치 앞에서 김도영은 숨이 차 크게 꽃 향기를 들이쉬었다.
"뭐야 진짜. 알레르기도 아니라며. 천식이야?"
좌우로 고개를 천천히 저은 그 애는 잠깐만 쉬어 갈까, 하고 웃었다. 벚꽃이 다 진 새 계절의 한낮이었다. 잠깐 멈추어 섰던 버스가 다시 달렸다. 쉬어가자며 웃는 얼굴이 조금 창백해서 오늘은 틱틱대면 안 될 것 같았다. 별 말 없이 벤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내 앞에 서서 킥킥대던 김도영이 갑자기 휙 등을 보였다. 또 기침이었다. 한참을 콜록대는 등이 새우처럼 굽어 있었다. 그렇게 심하면 병원을 가지 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걱정 섞인 목소리에 또 좋다고 웃음을 짓던 김도영은 나사 풀린 표정과 대조되게도 생각보다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으려고 너랑 있잖아. 멈추지 않는 기침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오른손은 계속 뒷짐을 지고 있어서 몰랐는데, 피를 토할 것 같은 기침을 이기지 못해 결국 쪼그리고 앉은 김도영이 가슴을 팍팍 두드리는 순간 언뜻 보인 손은 손마디가 다 하얘질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쥔 채였다. 그 손아귀 안에서 조금씩 새어나온... 연보라색의 작은 꽃잎들이 보였다. 하얀 주먹에 전부 짓이겨진 작은 꽃잎들이.
"어째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너랑 있으면 나을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병원 가. 너 때문에 나까지 목구멍이 간질거려. 옮은 것 같아."
"옮았으면 좋겠다, 너도."
미쳤구나, 김도영. 또라이 같은 말을 해 놓고도 실실 웃던 김도영의 웃음이 멈추었다.
"이게 많이 아프긴 한데,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너 진짜 어디 아파?"
"정말이야. 나쁘지만은 않아. 사실 난 좀 좋았어. 좀 많이."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린데."
"너도 나처럼."
"......."
"나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나고,"
"......."
"그렇게 웃다가 어느 순간 숨이 콱 막히고,"
"......."
"그러다가 이렇게-"
"......."
"너도 옮았으면 좋겠어."
"야, 김도영."
"네 앞에서 숨도 못 쉬고, 마냥 웃음밖에 안 나고 막 벅차오르는 거 전부 다."
"야, 너......."
"좋아해, 많이."
한쪽 눈가를 찡그리고 웃던 김도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둥글게 말고 있던 몸을 펴 벤치에 앉은 채로 굳어버린 내 앞에 선 그 애가 한번 더 강하게 속에 있는 무언가를 토해냈다. 순간적으로 부풀어올랐던 가슴이 쿨럭이며 쏟아낼 때마다 새하얀 손바닥 위로 팔락이며 튀어나온 여린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허공을 부유했다. 아주 아름다운, 연보라색 꽃가루들이 흩날렸다. 햇빛이 얇은 그 조각들의 뒤편으로 반투명하게 투영될 때마다 꽃잎들은 수십 번을 빙글빙글 돌며 벤치 위로, 바닥으로, 우리의 발등 위로 떨어져내렸다. 봄날이 다 지난 초여름의 한낮이었다. 노란 햇빛이 나뭇잎을 통과해서 아주 조금씩, 조각 조각 갈라져 비추는 그런 시간대였다.
예쁘게 떨어지던 벚꽃이 전부 지고 난 초여름의 집 앞 골목에, 김도영의 손바닥에서 시작된 연보라 빛의 꽃잎이 흐드러졌다. 지난 봄날의 작고 예쁜 벚꽃비처럼 우리 주변의 모든 공간 안에 부드러운 연보라색 조각들이 남아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렸다.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지금은 조금 거칠어진,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음성이 연한 꽃의 조각들처럼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봄날의 운동장에서와 꼭 같이, 내 앞에 가만히 서 있던 김도영이 천천히 벤치의 끝자락에 걸터앉으며 웃었다.
"너는, 아직도 나 싫어?"
아니. 사실은, 간지러웠어. 네가 자꾸 눈을 마주칠 때마다 목이 간질간질해서 짜증이 났어.
네가 날 보고 웃을 때도, 계속 쓸 데 없이 다정하게 말 걸 때도, 뒤에서 따라 걸어올 때도 계속 목이 간지러워서 기침이 났어. 자꾸 주변에서 꽃 향기가 나는 게 집 앞에 벚꽃이 잔뜩 피어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우리 때문이었어. 아직도 이 길에서는 꽃 향기가 나고,
콜록. 그 애를 따라 내게서도 작은 기침이 났다. 입을 가렸던 손바닥 위로 아주 조용히 떨어진, 짧았던 봄 내내 너의 머리 위에서 흩날리던 분홍빛의 작은 꽃잎 한 장과 함께.
자꾸만 목이 간질거리고 속이 울렁거리고 재채기가 나는 게 너를 좋아해서, 였다는 걸 몰랐어. 지난 봄에 계속 내 주변을 맴돌던 네가 나도 모르게 좋아졌던 걸.
어쩌면 우리가 좋아했던 벚꽃비는 눈치 없는 내 마음을 너에게 대신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걸.
"......좋아해. 네가 날 싫어해도 좋고, 그래서 죽어도 좋아."
"안 싫어해, 죽을 필요도 없고."
"좋아해, 여주야."
"......나도, 좋아."
연보랏빛 여리디 여린 꽃발 흩날리는 한낮, 너에게.
- Agapanthus : 사랑의 방문
안녕하세요 도짜림덜! 보풀입니당
고인 물 열심히 쓰다가 기분 전환도 할 겸 순수하고 밝고 아련한 도영이의 고백 하나 써 봤읍니다만은,,, 맘에 드실랑가 모르겠네요ㅎ
블루베리아기토끼 뎡이의 연보라색 꽃잎ㅎㅎㅎ 너무 예쁘지 않나요ㅠㅠㅠㅠ
여주의 작은 벚꽃잎 한 장은 길었던 봄 내내 항상 자기도 모르게 도영이한테 보여 주고 있었던 예쁜 관심!
즐거운 일주일... 되시기 바랄게여...!ㅋㅋㅋ 고인 물도 진짜 곰방 올라옵니다!!
++ 아직까지 QNA 질문 받는 중이니까 자유롭게 궁금하셨던 점 질문해 주세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