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의 여름방학 강의가 열리고, 나 역시 저번 강의와 다르지 않게 조교를 서는 중이었다.
김종현은 수업 도중에 문제를 풀 시간을 조금씩 주는데, 마지막 타임이라 애들이 하나같이 축 처져 있었다. 중간중간에 손을 드는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주고 있는데, 피곤한데도 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보여 마음이 짠해졌다. 김종현 역시 학생들의 상태를 눈치챈 건지 표정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그 특유의 처연한 어두움이었다.
누군가 또 손을 들길래 가봤더니 이번에는 우진이었다. 이번 강의도 우연찮게 시간이 맞았는지 한 강의실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나저나 애가 질문을 하는데 목소리가 다 죽어 있었다.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우진이가 이렇게 힘이 없다니.
질문에 답을 해준 뒤 힘드냐고 묻자 우진이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제 가방 안주머니에서 껌통을 하나 꺼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졸음 쫓는 껌이었다. 책상 한쪽에는 코를 찌를 듯 향이 진한 커피 보틀도 있었다. 그 옆에는 이미 뜯겨진 블랙 커피믹스만 3개.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숨을 뱉었다. 우진아,
"네?"
"커피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은데."
"아. ..이거라도 마셔야 덜 졸려서..."
"수업 끝나면 바로 집에 가?"
"아니요. 저 지훈이랑 독서실 다녀요. 저 뒤쪽에"
아이고야.. 피곤해서 바로 집에 갈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학생들에게 집-학원-독서실의 루트는 생활화가 되어 있었다. 주변 독서실 대부분 다 새벽 1시-2시까지 하던데. 정말 독하구나, 수험생들은 참. 우진이한테 이만큼 달려왔으니까 딱 조금만 더 참자고 격려해주니 우진이는 덧니를 보이며 내게 웃어줬다. 감사합니다, 쌤.
"자아 이제 들어가 볼게. 26번은 6월 모의평가 변형 문젠데-"
넋이 반쯤 나가 있는 학생들의 표정을 한꺼번에 보고 꽤나 놀랐는지 김종현은 몇 초간 아무 말이 없다가 분필을 내려놓았다. 마이크를 고쳐잡으며 널따란 강의실의 수많은 학생들을 휘 둘러본 김종현이 말을 이었다.
"얘들아, 많이 힘들어?"
학생들이 일제히 네- 하고 대답했다.
"지금 너희들이 어떤 마음일지 이해 돼. 처음 평가원을 접해봤으니 결과가 어찌됐든 싱숭생숭할거고, 혹은 쥐고 있던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은 기분도 들겠지. 이맘때 쯤이면 다들 그래. 아무것도 안 잡히고, ..흔히들 그걸 슬럼프라고 해."
"...."
"그런데 중요한 건, 그걸 내려놓는 순간 네가 가지고 있던 가능성까지도 다 놓아버리게 된다는 거지. 한계가 아닌 것을 한계라고 오인하고 도망쳐서 너희가 다다르게 되는 곳은 결국 똑같이 이 자리일거야. 올해 하지 않으면 내년에 이걸 또 해야 하고, 내년에 하지 않으면 내후년에도 또 해야 하니까."
"...."
"내가 항상 강조하는 거 있지? 간절함. 적어도 부끄럽진 않게, 후회 없이 살아야지. 그 간절함이 지친 너희들에게 한 병의 물이 되어서 이 길고 지겨운 트랙을 완주하게 해 줄거야.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믿고 끝까지 달려. 너희는 지금 너희의 모습이 초췌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눈에는 미래를 위해 열정을 바치는 너희가 그 누구보다도 멋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얘들아"
1타 강사 어니부기와의 관계성 05
w. 피나콜라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연구실에 앉아 일하는 중이었다. 에듀101 사이트에서 학생들의 QnA에 답해주며 자주 들어오는 질문들을 메모하고 있는데, 어째 전보다 질문이 더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개중에는 좋은 질문도 꽤 있었지만, 이 시기쯤이면 이미 알고 있어야 할 개념을 질문하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마치 이제서야 사회탐구 공부를 시작한 것 같은.. 그런.
몇 개는 직원들과 함께 답변을 해볼까 생각하다가, 어차피 정리해야 할 다른 자료들도 많았던 까닭에 결국 김종현의 개인 사무실로 들어가는 편을 택했다. 사실 이런 일을 할 때는 김종현과 계속 상의를 하는 게 맞았다. 그동안 단지 내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자주 피했을 뿐. 그렇게 해서 내가 만든 실수에 대해서는 김종현이 속상해할 만도 했다. 어후.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진짜로.
"야 이름아, 이따 점심 같이 먹는거 알지?"
"응 그래야지"
등 뒤로 재환 오빠의 말이 닿았다. 오늘은 점심 먹고 김종현과 사회문화 담당 연구직원들이 소회의를 하기로 한 날이다. 그래서 사문 직원들끼리 다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던 것이다. 지금 점심 시간이 얼마 안 남긴 했지만, 뭐 그 안엔 끝낼 수 있겠지.
김종현의 개인실 문에 노크하자 "들어오쎄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쎄용? 허 참, 오늘 하이텐션인가. 떨떠름하게 문을 열었다. 김종현은 기분이 좋으면 가끔씩 저렇게 애교 섞인 말투로 말하곤 했다. 강의에서 저러면 여자애들 난리 나던데.
"안녕하세요, 저 피드백 받을 게 있어서.."
"아 네, 들어와요"
김종현 앞에 유인물을 쫙 펼쳐놓고 이것저것 물어보자 김종현은 세세하게 답변해 줬다. 나는 유인물에 눈을 고정하고 김종현이 설명해주는 것들을 메모하고 있었는데 왠지 머리 위로 계속 시선이 닿는 게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던 건지 김종현은 내가 고개를 들자마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미 보고 있던 거 다 들켜놓고는 무슨.
사실 이런 적은 적지 않았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넘기고 계속 질문을 이어가려는데 아뿔싸. 배가 고프다는 게 느껴져 시간을 보니 아까 직원들끼리 다같이 먹기로 한 시간보다 10분 가량 지나 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미친 파친... 잠시만요 하고 황급히 문을 열었는데 연구실에는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뭐 연구실에 개미는 원래 없긴 했지만..
핸드폰에 재환오빠의 문자가 한 통 떠있었다.
[ 너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종현쌤이랑 열심히 얘기중인 것 같아서 못 들어감. 먼저 간다 ㅠㅠ 미안! 식사 꼭 하고! ]
아... 뭐 혼밥은 상관없지만 오늘 다같이 새로 생긴 식당 가기로 했는데 그게 아쉬웠다. 그냥 오늘은 대충 제육덮밥 같은 걸로 때워야겠네.
"설명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 이제 식사하러 가볼게요"
".. 성이름 씨!"
"네?"
"그 아까 직원들 다 나가는 것 같던데.."
내가 밥 먹을 시간 뺏은거 아닌가 모르겠네. 엄지손가락으로 연구실 문을 가리킨 김종현이 약간 소심한 어투로 말했다. 아, 혹시 아까 전에 괜히 주인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날 빤히 보고 있던 게 이거 때문이었나? 가만 보면 별 걸 다 신경쓴다니까.
"아 저 괜찮아요. 혼자 먹으면 되죠"
".. 어.. 혼자 먹는 것보다는 같이 먹는 게 낫지 않을까요?"
"네??"
뭔 소리지, 얼빠진 표정을 짓는 나를 앞에 두고 김종현은 핸드폰과 제 카드를 챙겨들었다.
"점심 같이 먹어요, 나랑."
아니.. 나는 그냥 한 말인 줄 알았지, 밥을 같이 먹자는 복선을 깐 줄 알았겠어.. 갑작스러운 김종현의 식사 제안에 뭐 거절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김종현을 따라 나왔다. 김종현이랑 둘이서만 밥을 먹은 적이 언제였더라. 나 완전 쌩 신입이었을 때 두번 정도? 그 외에 같은 식탁에 앉은 적은 회식 때 빼고는 없었다.
근데 왜 나랑 같이 먹자고 하지? 어차피 대부분의 식사를 혼자 때우는 김종현으로서는 혼밥이 외롭거나 싫다는 이유로 밥상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진 않을 거다. 설령 그런 이유라 해도, 둘만 있는 차 안에서까지 어색해 죽을 것 같은 나를 굳이 선택할 이유도 없을 거고. 근데 내가 왜 지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이런 질문을 김종현한테서 듣고 있냐는 말이다.
여기까지 나온 이상 선생님 전 정말 괜찮습니다 혼자 먹을게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도 지금 생각나는 메뉴가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김종현이 편하고 불편하고를 떠나서 난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이 없는데, 그렇다고 정말 '아무거나'라고 대답했다간 어떤 민폐가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니까.
"선생님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음, 저는 성이름 씨가 좋아하는 메뉴로 할게요"
.. 시발 천재다. 내가 먼저 저렇게 대답할 걸. 나는 결국 재환 오빠랑 돌아다녔던 근처 맛집들을 머릿속에서 로드뷰 찍듯 하나하나 생각해내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족발집이었다. 맛있는 집이라고 해서 평소에는 신나게 왔던 곳인데 김종현이랑 오니까 왜 민망하지. 사람이 많아서 문앞에서 주춤거리는데 김종현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나에게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성이름 씨 배고파요?"
"저요? 배야 당연히 고프죠."
"그럼 일단 대자로 시킬게요, 괜찮죠?"
..대자? 내 먹성이 좋긴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닌데. 김종현이라도 많이 먹겠지 싶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족발은 금방 나왔고, 둘다 배가 고프긴 했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추를 집어 쌈을 싸먹기 시작했다.
나는 새삼 김종현의 먹성에 놀랐다. 성격상 침착하게 깨작깨작 먹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김종현은 말 그대로 정말 잘 먹었다. 먹방 하나만큼은 자신 있는 나마저도 놀랄 정도였으니.
뭐가 어찌됐든 잘생긴 사람이 잘 먹으니까 보는 사람은 좋았다. 중간에 족발집 아주머니께서도 김종현을 보시곤 '아이구 잘생긴 청년이 밥도 맛있게 먹네~" 하면서 예뻐하시더라. 늘 습관화된 말투로 하핫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주는 김종현을 보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피식 웃었다가 그런 내 자신에 놀라 허겁지겁 족발을 집었다.
근데 뭐랄까,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기분이 이상했다. 족발 먹으니까 술이 땡기는데 마실 수 없는 이 상황이 답답해서인 것도 맞지만, 너무 말없이 먹어서 그냥 전투적으로 먹는 분위기만 된 기분.
차 안에서처럼 잘 수라도 있다면 차라리 자고 말텐데 지금은 식사 중이라 그마저도 안 되었다. 그렇다고 김종현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이 어색한 자리에서 할 말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원래 사람이랑 둘이 있는게 이렇게 어렵던가...
"선생님. 저번에 강의하면서 학생들한테 조언해주신 거 있잖아요"
"그 평일 마지막 강의요?"
"네. 그게 촬영강의였는데, 그 영상이 TCC로 올라가서 조회수 엄청 높아진 거 아세요?"
"진짜요? 그건 몰랐는데.."
"네, 아~ 근데 그거 보고 진짜 멋있더라구요. 저도 사실 선생님 되려고 사범대 들어갔는데, 정작 졸업해서 해본 거라곤 학원 선생님으로 1년 반 일한게 전부네요..."
사실 나에게도 간절한 꿈이 하나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꾸준히 바래온 '선생님'이라는 직업이다. 중학생 시절에 존경하는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돈에 연연하지 않고 꾸었던 유일한 꿈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면 공부하는 것도 좋았고, 방황하는 아이들을 좋은 길로 이끌어줄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내 꿈은 그닥 거창하지 않았다. 그냥 정교사 자격증을 따서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 그거 하나였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도 훨씬 잔혹했다. 고3때, 좋지만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이 악물고 공부해서 수능 점수도 괜찮게 받은 나였지만 그 이상의 문턱을 넘기에는 난 한없이 부족했나보다. 임용고시를 4번씩이나 떨어지며 참담한 실패를 맛본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학원 선생님 뿐이었고 그마저도 힘들어서 이제는 다른 선생님의 연구실 직원이자 조교로 들어와 있다.
물론 지금 하는 일이 불만족스럽다는 건 아니다. 내 적성에도 맞는 일이고, 다행히 실력 있고 꼰대 기질도 전혀 없는 사람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기에 주위 사람들은 내 일을 꽤나 부러워하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에는 '학교 선생님'에 대한 미련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종현은 어떤 면에서 나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게다가 김종현은 임용도 한번에 패스해서 외고에 발령받아 교사를 했던 적도 있었다. 조교 일을 하면서, 솔직히 김종현이 부럽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한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이런 시시콜콜한 내 얘기를 김종현한테 하고 있었다. 족발을 그렇게나 맛있게 먹던 김종현이 아예 젓가락까지 내려놓고 내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자 괜히 민망해져서 뒷목을 긁었다.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듣진 않아도 되는데..
"성공할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실패가 찾아와요."
"..."
"아직 남아있는 꿈이라면 한 번 더 해 봐요. 실패했다고 가능성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글쎄요.. 연구실 일을 언제까지 할진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은 좀 쉬려고요."
"...나는"
김종현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 컵을 흘긋 보고는 사이다를 따랐다. 이어서 제 컵에도 사이다를 훅 들이부은 김종현이 건배를 하자는 듯 컵을 흔들어 보였다. 짠, 하고 두 컵이 약하게 부딪혔다. 투명한 액체가 조그마한 기포들을 올리며 컵 속에서 가볍게 일렁였다.
"이름 씨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김종현의 눈빛은 꽤나 결연해 보였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참. 나한테는 관심도 없어 보이더니 언제부터 날 응원하고 있었다고. 그래도 나름 진심 어린 격려를 받은 것 같아 한편으로는 좋기도 하고, 좀 간지럽기도 했다. 저런 눈빛에 저런 말투로 말해주니 은근히 설레기도...
아 내가 미쳤나보다.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휘휘 저으며 일부러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생각 없이 식당 입구 쪽을 바라보았는데 예상치도 못한 강다니엘과 옹성우가 있었다. 순간 이 학원가에는 학생들이 끼니를 때울 만한 분식집이나 많지, 어른들이 작정하고 먹을만한 식당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하필 이 시간에 여기를 오냐. 우연이라는 건 참 야속했다.
다행히도 그 둘은 이쪽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일단 황급히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딱 보기에도 뭔가 숨기는 것 같은 나를 눈치챈 건지 김종현이 물었다. 아니요, 라고는 했지만 이미 김종현은 아까 내가 시선을 두었던 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강다니엘 선생님은 그렇다 치고, 옹성우 선생님과는 모르는 사이 아니었나?"
옹성우는 강다니엘과 각별히 친한 대학 선후배 사이었다. 강다니엘과 옛 연인 사이였으니 나는 그 주변의 친한 사람들 몇명을 자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그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 속에서 잊혀졌지만 유난히 옹성우가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눈에 띄는 그의 이름과 외모 때문이었다.
아마 옹성우도 나를 알긴 알 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글자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그를 실제로 본 것조차 내가 조교 일 때문에 그 학원에 발을 들인 이후였다. 결론은 모르는 사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그렇지만 구차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김종현의 말에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혹시 강다니엘 선생님?"
"아니요-"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김종현은 내 말을 믿은 듯 더 묻지 않고 다시 족발을 집었다. 나도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이렇게 어찌어찌 넘어가는 듯 싶었으나,
"근데 저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지?"
족발 쌈을 우물거리며 혼잣말하는 김종현의 말을 듣고 나는 무의식중에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저분들 대학 다닐 때 같이 댄스 동아리 했었어요."
"정말요?.. 엥?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것도 정말 멍청한 실수를 말이다. 이미 망했다.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지만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아.. 진짜 왜 입을 함부로 놀려서. 나는 세상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내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김종현은 진짜 아는 사이냐며 재차 물어보았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밝히지 않을 심산이었다.
"아. 그냥 뭐 데면데면 아는 사이었어요. 별거 아닌..."
"어! 김종현 선생님 아니세요?"
하지만 포장된 족발 봉지를 달랑거리며 우리 테이블로 오는 옹성우 때문에 그마저도 무산되고 말았다. 아니 왜 여기로 오는 거야? 나를 못 알아본 건가? 나는 화들짝 놀라며 아까보다도 더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분명 강다니엘은 나를 알아볼 게 뻔했다. 나는 김종현에게 두었던 시선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와 이거 진짜 골때린다.
"종현 쌤도 족발 좋아하시나봐요. 요즘 맨날 모닝빵, 통밀빵에 우유만 드시더니 왠일로 밥 먹는 모습도 다 보고. 근데 이분은..?"
안 봐도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이윽고 형, 형 하며 다소 급한 목소리로 옹성우를 부르는 강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나 알아보고 저러나. 뭔지 모를 긴장감이 괜스레 심장을 쿵쿵 뛰게 했다.
강다니엘이 몇 차례 그를 부르자, 옹성우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더니 생각보다 대화를 짧게 끝내고 화이팅 넘치는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두 사람이 간 후에도 여전히 자세를 낮추고 있는 내게 고개를 들라는 신호인지 책상을 가볍게 똑똑 두드리는 김종현이었다.
사실 김종현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어디까지 알아챈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단조로운 관계는 아니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그 확신이 김종현의 까만 눈동자에 가득 차 있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불편한 사이였냐고 묻는 김종현에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김종현의 다음 질문에 나는 놀라서 그만 족발을 그대로 뱉을 뻔했다.
"그럼 혹시 저 분이 강의건이라는 사람이에요?"
뭐.. 무슨.. 뭐? 순간 사레가 들러 켁켁거리자 김종현은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괜찮냐고 물어왔다. 불편하면 대답 안 해도 괜찮아요. 김종현은 내게 물을 건네며 안절부절해했다. 아니 지금 불편하고 뭐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아세요?"
"어.. 사실 성이름 씨가 친구분이랑 술 마시고 제가 데려다준 날, 차에 태우고 운전하는데 계속 강의건이라고 중얼거렸거든요. 처음엔 그냥 잠꼬대인 줄 알았는데"
"네?! 그때 저 주사 안 부렸다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이름 부른 것 가지고 주사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대뜸 강의건이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좀 그래서.."
아. 그건 그렇네..
사실 김종현이 여기까지 알게 된 이상 거짓말은 거의 불가능했다. 비밀을 공유할 만큼 돈독한 사이가 아니라서 망설여졌지만, 더 숨겨봤자 찌질해 보일 것만 같았다.
그래 뭐 우리가 방금 헤어졌냐 아니면 몇달 전에 헤어졌냐. 무려 4년을 얼굴도 못 보고 지냈는데 미련이랄 것도.. 미련이랄 것도 없지. 그러니 못 말할 이유도 없어. 나는 괜히 내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세뇌를 시켰다.
"속이고 싶어서 거짓말한 건 아닌데 죄송해요. 옛날에 잠깐 만났어요."
"아뇨 성이름 씨가 왜 죄송해요. 근데 괜찮아요?"
"에이 선생님, 헤어진지 엄청 오래 됐어요~ 괜찮죠 당연히"
"그렇다면 다행인데 아까는 안 괜찮아 보여서.."
안 괜찮아 보여서. 그러네. 그냥 당당하게 얼굴 내놓고 있어도 될걸 왜 굳이 너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을까. 정말 자신있게 잊었다고, 미련도 없다고 그렇게 자부하면서 왜 정작 행동은 떳떳하지 못한 걸까. 괜찮아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왜 안 괜찮지
사실 너와 몇 년만에 처음 마주쳤을 때, 그리고 너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었을 때가 자꾸 생각났다. 나는 그때 느꼈던 기분을 그저 '불쾌함'이라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계속 생각할수록 꼭 그것 뿐만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다. 단지 마음이 인정하지 않았을 뿐.
너 설마 그 사람 다시 만나고 흔들렸어?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극구 부인할 것이다. 야 내가 잊은 지가 언젠데, 나 그렇게 찌질한 사람 아니야 라고 답지 않게 허세까지 부려 가면서. 그 말이 사실이라면 대답하고 나서도 찝찝할 이유가 전혀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대답을 하고 나면 왠지 속이 찝찝할 것 같았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도, 결국 속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걸 가장 잘 아는 것은 내 자신이니까
"..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랬어요."
"..."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새로운 사람으로 치료하는 거고."
"그렇죠.. 아 근데 아깐 당황해서 그런거에요. 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김종현은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변명하듯 늘어놓은 내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다.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성이름 씨는."
"뭐, 언젠가는 그럴 수 있겠죠?"
"음.. 성이름 씨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되죠."
진심으로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면 그 전은 생각나지도 않잖아요. 조금 낯간지러울 수 있는 말을 담담하게 뱉어낸 김종현의 목소리가 귀를 감쌌다.
사실 강다니엘과 헤어지고 나서는 내 자신을 사랑에 낭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었다. 연애를 끊자! 라기 보다는, 딱히 누군가한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기껏해봐야 호감 정도. 굳이 힘들게 누군가를 좋아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고, 인생을 나름 바쁘게 살다 보니 자연스레 그리 된 것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나를 그렇게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그 사람은,"
"...."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마음 속으로 던진 내 물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운을 떼는 김종현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다. 작년부터 이 연구실에서 일했고, 올해 처음으로 강의 조교를 뛰면서 김종현에 대해서는 꽤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가끔씩 저렇게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던지며 훅 치고 들어오는 걸 보면 더욱더.
그랬으면 좋겠네요. 기껏 생각해낸 대답이라곤 이 정도였지만 김종현은 허,허,헣 하며 그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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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염치가 제 키만큼도 없는 작가입니다. ㅎ... ㅎㅎ 아니 분명 며칠 전엔가? 빠른 시일 안에 돌아온다고 해놓고!! 열흘이 훌쩍 넘어버렸네요.. 사실 현생도 현생인데 대체 몇 편 쓰지도 않고서는 글럼프가,, 글이 술술 써지지 않더라구요ㅠ 원래 이것보다 더 길게 쓰려다가 내용이 난잡해져서 결국 여기서 끊어버리네요 ^ㅡ^.. 독자님들의 응원과 신알신, 댓글, 추천 등등 하나하나가 큰 힘이 됩니다 :D 항상 감사드려요 하핫 +) 아 첫번째 강의 장면은 열심히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있을 현재의 수험생들을 위해 삽입했습니다! 종현이의 강의를 빌려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잘 될 겁니다 자신을 믿으세요 <3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