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택운이 원식을 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원식도 그날 밤 자신이 택운에게 한 행동을 기억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원식이 느끼기에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답답했을 뿐이다. 문자든 전화든 모두 무시하고 복도에서 마주쳐 원식이 먼저 아는 척을 해도 무시하고 수업 시간에도 고개를 푹 숙여 책만 보는 정택운, 택운 때문이었다. 행여 원식과 마주칠까봐 야자를 아예 안한 적도 많았고 한 시간 일찍 집에 간 적도 많았다. 평소보다 말수가 훨씬 적어지고 의기소침해진 모습이 종종 눈에 띄어 학연도 슬슬 택운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원식도 안타깝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분명 제 잘못이기에 어떻게든 풀어야 할텐데, 그 기회를 만들도록 택운이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힘들어하니. 원식은 저 때문에 달라진 택운을 보며 가까이 다가가기 망설였다.
신경 쓰이는 일이 많으니 택운은 잠을 통 이루지 못했다. 이전부터 계속 잔기침을 해대던 택운은, 단기간에 바뀐 식생활 때문인지 결국 감기 몸살에 걸리게 되었다. 평소보다 늦은 등교에 거친 날숨을 쉬는 택운의 증상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학연이었다.
"뭐야, 어디 아파?"
"..."
"야! 너 열나잖아"
혹시나 하고 택운의 이마를 짚은 학연이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볼도 뜨겁고.. 택운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학연이 중얼거렸다. 평소에도 자기가 아프다는 걸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데 오늘은 정말 택운의 상태가 심각해보였다. 아침 자습시간이 시작되고 담임선생님이 반에 오자, 학연은 재빨리 선생님에게 가 택운의 상태를 말씀드렸다. 그제야 학연은 택운을 보건실까지 데려다 줄 수 있었다. 3교시 문학시간이 되어 원식이 택운의 반으로 들어왔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정택운 어디갔어?"
"아파서 보건실 갔어요"
원식은 택운의 자리를 쳐다보고 출석부를 펼쳤다. 1교시부터 보건실에 간 모양이었다. 그 밑에 똑같은 표시가 있어 다시 택운의 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차학연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평소에도 둘이 그렇게나 붙어있더니. 원식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대충 길이가 짧은 현대소설을 하나 골라 빠르게 진도를 나가고 10분 일찍 수업을 끝냈다. 곧장 보건실로 향해 택운을 찾던 원식은 한 침대 앞에서 멈췄다.
"너 여기서 뭐하냐?"
"쉿. 조용히 해요, 애 자요"
학연은 택운의 옆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택운을 품에 꽉 안은채. 학연은 원식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 택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택운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는 손길이 꽤 다정해보인다. 택운은 열이 나면서도 추운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학연의 품을 파고들고 있다.
"근데 여긴 왜 오신 거예요?"
학연이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작게 말했다. 택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자 원식은 학연의 말을 무시한채 택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실 타당한 이유가 없어서 일부러 피한 것이기도 하다.
"택운이 요즘 힘없는 거 선생님 때문이예요?"
"..그럴 걸"
"그럼 좀 나가주실래요? 저랑 택운이 지금 오붓하게 시간 보내고 있는데"
학연은 '선생님 얘 좋아해요?' 라고 묻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았다. 택운의 핸드폰을 보다가 우연히 원식과 나눈 문자를 보게 됐는데 분명 둘 사이-원식의 일방적인 애정이겠지만-에 뭔가가 있겠구나, 짐작하던 학연이었다. 내가 둘이 행쇼하게 할 것 같아? 이렇게 이쁜 우리 운이를? 학연은 원식의 눈치를 살피고 다시 택운을 꼭 안았다. 내가 열 다 뺏어갈거야. 얼른 나아라.
*
택운은 1교시 전부터 8교시까지. 점심도 거르고 하루종일 보건실에서 잠만 잤다. 중간에 누가 왔다 갔다 한 것 같았는데. 학연이 목소리도 들렸고. 웅웅거리던 그 울림이 얼핏 기억나지만 택운은 그냥 잠을 잘- 자기만 했다. 누워있던 자리가 축축한 걸로 봐서 자면서 땀을 많이 흘린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아침보다는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 택운은 담임선생님께 죄송하다고 인사드리려 교무실에 갔는데 오히려 선생님께 몸은 좀 괜찮아졌냐는 말을 들었다. 더불어 학연이가 많이 걱정하고 간호해줬다고. '어머니께 전화 드렸는데 학교 끝나고 병원 가보라셔. 오늘 방과 후랑 야자는 하지 말고 먼저 가'. 택운은 선생님께 인사하고 나오면서 살짝 교무실 안을 훑어봤다. 원식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택운은 교실에서 가방을 챙기고 교문으로 향했다. 학연이한테 고맙다고 인사도 못했는데. 그 때 택운의 뒤에서 경적소리가 들렸다. 원식의 차였다.
"태워줄까?"
택운은 그 자리에 멈춰 원식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눈맞춤은 참 오랜만이었다. 멀뚱하게 서서 자기를 보고 있는 택운을 붙잡고 다다다 말하고 싶었지만 원식은 서두르지 않았다. 원식은 택운에게 차에 타라며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제야 택운이 차에 올라탔다. 차가 매끄럽게 학교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설 때 택운은 병원이 생각났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 자체로 원식과 함께 집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기, 원식이 택운을 불렀다. 낯선 호칭에 택운이 원식을 살짝 쳐다봤다.
"-그날은 내가 미안해. 많이 놀랐지?"
택운의 눈치를 보며 뜸을 들이던 원식이 말을 이었다. 택운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택운은 지금까지 자기가 왜 원식을 피했는지 알지 못했다. 무서워서? 화가 나서? 그냥 몸이 먼저 반응해 원식을 피한 것 뿐이었다. 아, 난 그냥 놀란 거였구나.
"근데 술기운에 한건 아니예요. 나, 택운학생 좋아해요"
택운이 원식을 쳐다봤다. 존댓말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덤덤하게 말하는 원식의 표정이 거짓말 같지는 않아보였다. 내가 놀란거였나? 놀란 건 아닌 것 같다. 그럼 왜? 두려워서?
"나랑 연애할래요? 나 완전 잘해줄 자신 있는데"
두려워서? 혐오스러워서?
"선생님 게이예요?"
"24번, 나랑 연애하자고"
"저 남자예요"
"나 지금 차인거야?"
"선생님도 남자잖아요"
왜 하필 이럴 때 신호가 딱 걸리는지. 원식이 일부러 운전을 천천히 한 것 같았지만 택운이 말을 뱉자마자 빨간불이 빛났다.
"난 그냥 정택운이 좋은건데?"
택운은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왜 이 차를 탔을까, 백번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슬슬 한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원식도 저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않았다. 원식은 정면을 보기만하고 택운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기만 했다. 택운은 애꿎은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기까지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안은 조금 답답해보였다.
"난 진심이라고, 정택운"
"아, 네"
택운의 영혼 없는 대답에 원식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나 싫어?"
"..."
"나 싫냐고"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택운의 머리가 또 웅웅거렸다. 이 초봄에 엘리베이터는 냉방중인건지 택운의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아뇨, 싫은 건 아닌데....다음에 얘기하면 안될까요?"
아, 너 환자였지. 원식은 그제야 택운이 아프다는 걸 인지했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는데, 보기좋게 그 다짐을 깨버렸다. 택운과 대화하며 어느 쪽으로든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는데. 원식은 자켓 안주머니에 넣었던 약봉지를 주섬주섬 꺼내 택운에게 건넸다.
"이거 꼬박꼬박 먹고 잠 푹 자야 돼. 식후 30분, 알지?"
"..."
"내일은 아프다고 수업 빼먹지 마"
원식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택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1층이었다. 택운이 고개를 돌리니 원식이 살짝 웃으며 택운의 등을 살짝 밀었다. 문이 닫힐 때까지 원식은 택운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택운은 그냥, 손에 들린 약봉지의 무게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 * *
다음 날, 택운은 전과 같이 뽀송한 모습으로 일찍 등교했다. 어제 저녁을 두 그릇 먹고 원식이 준 약을 먹은 게 효과가 있었다. 오늘은 학연이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했다. 자리에 쓰러지듯 앉아서는 오자마자 한다는 게 택운의 안위를 살피는 거였다.
"오늘은 열 많이 안 나네? 다 나았어?"
"응. 기침하는 거 빼곤 괜찮아"
"다행이다"
학연은 책상에 볼을 맞대고 헤실거리며 택운을 바라봤다. 아, 맞다.
"어제 너가 나 간호해줬다며"
"어떻게 알았어? 누가 그래?"
학연이 벌떡 일어나 택운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혹 원식을 만났을까봐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담임이. 미안해, 어제 인사도 못해서. 고마웠어"
실로 택운에게 처음 듣는 인사였다. 고마워 와 미안해 라니. 학연은 택운을 두 팔로 감싸안고 매달리기 바빴다.
*
문학은 4교시였다. 택운을 보려고 눈을 돌린 원식은 택운 대신 학연과 눈이 마주쳤다. 학연과 마주치자 인상을 확 구긴 원식은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 도중 택운을 흘깃 쳐다보며 어제보다 많이 좋아진 안색에 옅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맞네, 맞아. 칠판 대신 원식만 계속 관찰하던 학연이 원식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했다. 학연이 갑자기 택운의 손을 확 잡았다. 갑자기 잡힌 손에 택운이 멀뚱멀뚱 학연을 쳐다봤지만 학연은 평소의 개구진 표정을 지은 채 수업을 듣는 척 하고 있었다. 택운이 저에게서 시선을 거두자 학연은 원식을 쳐다봤다. 전부터 이미 이 쪽을 보고 있었는지 원식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학연이 눈썹을 찡긋 올리곤 택운의 손을 자신의 입술에 갖다댔다.
"-편지를 다 읽지 못하고 쓰러진 건 여리고 섬세한 인물.."
학연의 입술이 택운의 손등 위에서 떨어졌을 때 택운은 학연을, 학연을 비롯한 학생들은 원식을, 원식은 택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모두 엇갈리고 택운이 무심코 원식을 쳐다봤다. 어느 때보다도 영롱한 두 눈빛이 얽혔다.
"...섬세한 인물의 성격이 드러났죠,"
원식은 곧바로 시선을 옮기고 수업에 집중했다. 학연도 만족할만한 성과였는지 택운을 향해 활짝 웃곤 펜을 들었다.
*
원식이 택운에게 고백한 뒤로도 둘의 사이는 어색하지가 않았다. 택운은 몰라도 원식은 그랬다. 여전히 감독이 아닐 때도 야자시간마다 문자를 보냈고 초코에몽도 매일 바쳤다. 예전처럼 원식이 택운을 집까지 태워줄 때가 있었는데 택운이 백이면 백 다 호의를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오늘도 원식의 문자는 끝나지 않았다.
[깜찍아]
[야야]
[야정택운]
[♥]
[너지금내하트받은거야?]
[왜요]
[택운학생]
[공부 잘하고있지?]
[저번처럼 똥등급 맞아오기만해봐]
[밤마다 너네집 찾아갈거야]
[아니다 너가 우리집와라]
[야 넌 학생이 카톡좀 하고살아라]
[데이터없니? 난 문자가 없는데]
[선생님이 데이터보내줄까?]
[응? 데이터보내줄까?]
[데이터데이터데이트데이터데이터]
[아나도 3학년감독하고싶은데...]
[힝..ㅠ]
[몰래 올라왔다. 헷]
[선생님 지금 너네반 앞이다]
[선생님 지금 너네반 지나간다]
[선생님 지금 가운데까지왔어]
[선생님 지금 너네반 지나기 다섯발 전]
[선생님 지금 너네반 지나기 네발 전]
[선생님 지금 너네반 지나기 세발 전]
[선생님 지금 너네반 지나기 두발 전]
[선생님 지금 너네반 지나기 한발 전]
[선생님 지금 너네반 지나갔다]
[다시 뒤 돌아서 선생님 지금 너네반 앞이다]
[선생님 지금 너네반 지나간다]
[선생님 지금 너네반 가운데가기 다섯발 전]
[선생님 지금 너네반 가운데가기 네발 전]
귀찮아서 답장 하나만 보낸 핸드폰의 액정이 계속 깜빡깜빡 거렸다. 옆에서 택운의 핸드폰을 지켜보던 학연이 택운을 쿡쿡 찔렀다.
'야, 니 핸드폰'
'알아'
'확인 안할거야?'
택운은 도대체 뭐라고 말하는 건지 보자며 문자를 확인했다. 실시간으로 계속 문자가 도착하길래 택운도 화가 났다. 아니 나보고 똥등급 맞지 말라며. 원식의 문자는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택운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갔다.
"어? 택운학생이 웬일이예요?"
"문자 좀 하지 마세요"
"나 문자 안했는데?"
"..지금 장난하세요?"
"나 교무실 가는 중이었는데 마침 같이 갈거라고요?"
원식이 막무가내로 택운의 팔을 잡아끌었다. 택운은 그런 원식이 못마땅했다. 순 지 멋대로에 너무 가벼운 사람같이 보였다. 이 사람 나 좋아한다는 거 맞아? 택운 앞에서 원식은 지나치게 애처럼 보였다. 일단 묵묵히 원식의 손에 이끌려 교무실까지 내려왔다. 이번엔 복도 한가운데가 아닌, 교무실 안이 목적지였다.
"이제 저 가도 되죠?"
원식이 자리에 놓여있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 대답해줘야지"
"뭘요?"
"내 고백에 대한 대답"
원식은 커피포트에 물을 받아 끓이면서 새 종이컵을 꺼냈다. 택운은 원식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내 마음 다 알았으면 좋다, 싫다. 얘기해줘야지. 안 그래요?"
원식은 녹차 티백을 종이컵에 넣고 물을 부었다. 원식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택운은 항상 생각했던 답이 있었는데, 입 밖으로 내뱉기는 쉽지 않았다. 원식은 택운을 힐끔 쳐다보고는 티백을 흔들었다.
"다시 한 번 물을게. 학생, 나랑 연애할래요?"
"교내 연애 금지인거, 모르세요?"
"사제 간 연애까지 금지인건 몰랐는데?"
"우리 들키면 둘 다 완전 매장당하는 거 알죠?"
"너도 이 연애, 생각해보긴 한 거네요?"
원식이 씩 웃으며 컵을 택운 앞으로 건넸다. 녹차가 딱 적당하게 우러나온 것 같았다.
"저 이만 갈게요. 똥등급 살리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해서"
"대답 안할거야?"
"할게요. 왜 저예요? 전 싫어요. 선생님이랑 연애 안할거예요. 그러니까 문자도 보내지 말고 집에 태워주지도 말고 망할 초코에몽도 주지 마세요"
나긋나긋하게 내뱉는 택운의 말을 듣는 원식의 표정이 싸하게 굳어졌다. 이제껏 택운에게 진심으로 대했는데, 택운은 그게 아니었다. 원식의 생각이 틀렸다.
"그리고, 저 녹차 싫어해요"
택운은 빠르게 걸어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힌 문 때문에 택운의 것이 될 뻔했던 녹차가 작게 일렁였다.
-
허허 이번엔 분량이 좀 많져? 원래 3,4편이었는데 확 합쳐버렸습니다! 이게 읽기에 더 편할 것 같아서요.
부족한 글솜씨임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내 사랑 다 줄게요ㅎㅎㅎ거절은 거절^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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