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재수없던 도경수는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재수 없었다. 또 나오면 여긴 내가 늘 있어왔던 자리라고 쫓아내야지, 혹시 또 비비빅 들고 오면 그것만 받고 쫓아내야겠다. 근데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씨발 시계도 없고 핸드폰도 없는데 알게 뭐야. 어제는 몇 시에 왔더라, 지금보단 좀 더 일찍이었던 것 같은데. 아, 근데 걔 이름은 뭐지?-도경수의 이름을 알게 된 건 그 후로도 한참 지난 뒤였다- 이름도 물어보고 쫓아내야겠다. 설마 그 새끼가 또 혼자서 내 이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백현아, 변백현. 이러면서 오면 진짜 한 대 쳐버려야지, 이제 초면도 아니니까. 근데 이 새끼 왜 이렇게 안 오지, 내일도 온다는 건 그냥 해본 소리였나.
"..개새끼, 온대놓고."
결국 해가 잘 지지 않는 여름 하늘이 모든 걸 다 집어삼켜 새까매질 때 까지, 도경수는 오지 않았다. 난 도경수를 기다린게 아닌데, 도경수가 어디서 뭘 하든 관심 없고 여긴 그냥 내가 맨날 있던 자리일 뿐인데. 왜 짜증이 나는지 몰라 땀으로 젖은 이마를 거칠게 닦아내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있던 엄마의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타박에 확 큰소리를 내려다 그저 죄송하다고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 남자였어? 하는 도경수의 말이 머리에 확 꽂히는 것 같아서, 계집애처럼 떽떽거릴 순 없다 하는 바보같은 생각에.
그 다음 날은 할 짓이 없어서 낮에도 정자에 앉아있었다. 절대 집안일 좀 도우라는 엄마의 말을 뿌리친게 아니고, 절대 아침부터 시내에 나가서 놀자는 친구들의 말을 거절한게 아니고, 절대 쌓인 숙제를 또 내일로 미뤄놓은게 아니고, 절대 도경수가 올 것 같아서 와본게 아니고. 할 짓이 너무 없어서 그냥 앉아있었다. 혹시, 혹시나 도경수가 오면, 얼굴부터 한 대 날리고서 시작하면 되는 거고.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이 따분해 풀도 뜯어보고, 길바닥으로 내려가 돌 주워다가 바닥에 낙서도 해보고, 정자 끝에 걸터앉아 발장난도 쳐보고, 몸에 모기가 몇 방 물었는지 하나하나 다 세어보기도 하고, 결국 하루를 통째로 쏟아부은 땡땡이에도, 난 도경수를 보지 못했다.
"..개새끼, 씨발 새끼, 길 가다가 벼락 맞은 코끼리한테 깔려서 죽을 새끼."
낮게 중얼거리며 욕을 퍼붓고 나서, 난 그제서야 내가 도경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따지자면 난 정말 도경수를 기다릴 이유가 쥐똥만큼도 없었는데. 정말 그냥 단지 하루, 재수없는 대화가 오갔던 그런 사이일 뿐인데, 왜 내가 시내 가서 놀자는 말까지 거절하고 널 기다렸을까. 알게 뭐냐는 질문도 이젠 만족할 수 없었다. 근데 이대로라면, 이대로 이어진다면, 넌 설마.
"평생 안 오는 건 아니겠지."
뭐 사실, 하루 더 안 온다면 이제 별로 생각이 안 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럴 것 같을 뿐, 씨발 모르겠다. 이젠 도경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못생기진 않았던 것 같은데, 날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이름 모를 아이야, 나 너 만나면 할 거 많아. 온다고 해놓고서 왜 안 찾아와? 결국 그 날도, 날 찾아온 건 도경수가 아닌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냐는 엄마의 두 번째 잔소리였다.
셋째 날엔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아침 댓바람부터 나가 기다리려 했다. 삼세번의 미덕, 마지막으로 하루는 기다려줄 수 있다 싶어서. 하지만 아쉽게도 엄마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요즘 아침에 나가서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는게 맘에 들지 않는다고, 오늘은 집에서 이불 빨래나 좀 하란다. 아니 그럼, 산구석에 쳐박혀서 할 짓이 밖으로 쏘다니는 것 밖에 없지, 뭘 그런 것 갖고 뭐라 하냐며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이건 이불 빨래를 시키기 위한 핑계일 뿐이니 어차피 어떻게든 난 나갈 수 없다는 걸 알아, 그저 퉁퉁 부은 볼을 한 채 이불 솜을 빼기 시작했다.
결국 평소대로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저녁 즈음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설마 왔다 갔으면 어떡하지, 싶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어, 왔네. 하는 말에 내 눈은 평소보다 배로 커져 있었다. 정자 위에는,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그토록 찾던, 도경수가 앉아있었다.
"어어, 너. 너.."
"온다고 했는데 못 와서 미안해."
"......."
"나름대로 좀 정리할게 있어서."
"..야."
일단 부르긴 했지만 난 바보같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서있었다. 할 말은 많은데, 너에게 들려줄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어서. 살아있는 거 봤으면 됐지, 결국 삼일간의 길고 긴 기다림의 끝은, 또 도경수에게 등을 보이고 집으로 걸어가는 나였다. 아니, 사실 거기서 끝났다면 평생 후회했겠지, 도경수도 그걸 알았는지, 집에서 이불 빨래를 할 때처럼 부어오른 볼을 하고 걸어가는 나의 어깨를, 뒤에서 잡아 돌렸다.
"너 나 기다렸어?"
"..아니."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뭐가 어때서."
"남자친구 기다리다가 삐친 여자같아."
어떻게 넌 삼일만에 만나도 그렇게 재수없을 수가 있니. 어이가 없어져 그저 헛웃음을 짓고 어깨에 얹어진 도경수의 손을 뿌리쳤다. 이를 악 물고서 부들거리며 간신히 맞을래? 한 마디를 내뱉는 날 비웃듯 도경수는, 아니. 하고 날 향해 씩 웃어보였다. 웃는 것도 재수 없어, 씨발. 다시 뒤로 휙 돌아서 가려는데, 이번엔 도경수가 말로 날 붙잡았다. 백현아, 한 마디로.
"..야, 너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나 생각보다 아는 거 많아."
"스토커야? 장난해? 저번에 팥부터 시작해서, 다 어떻게 알았어, 너 누구야."
며칠동안 묵혀뒀던 말을 내뱉으니 속이 시원하면서도 찜찜했다. 찜찜한 이유를 대자면 도경수의 태연한 반응 때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글쎄, 하는 얼굴이 너무나도 뻔뻔해 정말 때릴까, 싶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엄청 옛날에 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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