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옛날에 봤었어."
그래, 그럼 그렇지. 이래야 말이 통하지. 우리는 어떻게든 아는 사이였을 거야, 아니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날 찾아와서 내 신상을 읊을 리가 없지. 사실 신상을 읊은 적은 없지만, 나에겐 도경수가 팥 얘기를 꺼냈단 자체가 꽤나 큰 충격이었다. 팥죽부터 비비빅까지, 나에게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들. 근데 이름 모를 아이야,
"난 네가 기억 안 나는데."
"응, 그렇겠지."
그렇겠지는 뭐가 그렇겠지야, 드디어 말이 통한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이거 완전 순 제 멋대로잖아. 설명이라도 해 주던지, 여전히 도경수는 재수없는 미소를 띄운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생각하면 할 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놈이다. 나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도경수도 아무 말 않고, 우리는 한참을 서로 노려만 보고 있었다. 사실 노려본 건 나 혼자였을 지도 모른다. 도경수가 재수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늘 여유로워보이는 표정 때문이니까.
"아무도 기억 못 할 거야 아마, 그래서 내가 알려주러 온 거고."
뭘 알려주겠다는 건지, 뭘 기억 못 한다는 건지, 목적어가 빠진 채 이어지는 도경수 혼자만의 대화에 상당히 심기가 불편했다. 사람 세워놓고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저러면 멋있어보이는 줄 아나. 도경수는 혼자 정리를 끝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씨발, 저 새끼 저거 멋있어보이는 줄 아는 거 맞네. 아닌 사람은 입술 저런 식으로 안 물어.
"백현아 나는, 너 하나 보려고 여기 온 거거든, 넌 잘 모르겠지만."
누가 물어봤어? 안 궁금해.
"..그래?"
"응, 그러니까 난 앞으로도 계속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소름 돋는 소리 하지 마, 누가 같이 있어준대?
"..그으래?"
씨발, 왜 아까부터 어벙하게 그래, 그으래 같은 헛소리나 하고 있는 걸까. 이상하게 본심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평소엔 워낙 말 하고싶은 걸 참지 못 하는 성격에 친구들에게 늘상 욕을 얻어먹던 나인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결국 나에게 돌아온 건, 또 다시 그 재수없는 미소.
"그러니까 천천히 하자 우리, 내 이름은 도경수."
응, 그래 경수야. 근데 너 혹시 목적어라는게 뭔진 알고 있니? 뭘 천천히 하자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아 답답했다. 일부러 안 알려주는 건가, 싶어 찝찝했지만 나도 모르는 새 이미 난 '아, 그렇구나.. 안녕.' 이라는 말과 함께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마치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는 듯한 느낌에 답답했지만, 이미 내 뜻대로 움짓이긴 힘든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나 이제 집에 가볼게."
"응, 내일도 여기서 기다릴게, 계속 있을 거니까 너 편한 시간에 와."
"그래도 돼? 아니, 그게 말이 돼? 시간 정해서 만나면 되잖.."
아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짓껄이고 있는 거지, 우리가 왜 내일 만나야 하지. 속으로는 방정맞은 입을 수십대 때리고도 남았지만 이제는 유체이탈을 하는 것만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변백현,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도대체 왜 그렇게 혼자 미쳐있어.
"괜찮아, 너 보려고 여기 온 거니까."
"..시간 나면 올게."
그 날 밤, 난 결국 악몽을 꿨다. 도경수가 온 몸에 목적어를 달고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나를 쫓아오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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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 걍 신혼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