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진의 법칙
4. 엘리자는 말했어요
“뭐 마실래?”
“난… 아이스 카페라떼… 요.”
“전 아이스 카페모카로 할게요.”
“휘핑 올려드릴까요?”
“아뇨.”
“총 8100원입니다.”
“아, 죄송한데 따로 계산…”
“같이 해주세요.”
“왜 내 것도 같이 계산해…세요?
카드를 내미는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익숙하게 넘어갈 뻔했다.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보니 전정국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계산하기 편하잖아.”
“그래도… 내 건 제가 살게요.”
“여주야,”
“저기…
전정국이 나를 부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직원의 목소리에 달싹이던 입술이 멈추었다. 윗입술 아래 가지런한 앞니 두 개에 시선이 갔다. 토끼 같네. 남들 다 있는 앞니마저 귀엽다니 조물주도 어지간히 불공평하구나 싶었다.
“죄송하지만 뒤에 손님분들이 있으셔서요.”
“아… 제건 현금으로 드릴게요.
“…”
“…”
“그냥 말 편하게 해.”
“어… 그래…”
“나 알고 있었어?”
“응.”
“헐. 어떻게?”
“같은 고등학교 나왔잖아.”
그랬구나… 결국 연희의 말이 맞았다. 하긴 내가 피해 다녔다고 해서 반드시 전정국이 날 모르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어쩐지 허무해 입안을 짧게 다셨다.
“너는?”
“어?”
“나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
“너 유명했잖아.”
“…”
“인기도 되게 많았고.”
“…”
“지금도 유명하고 인기 많지만…”
“…”
“물론 앞으로도 많겠지…”
내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수습해보고자 던진 말들은 어떠한 반응도 이끌어 내지 못하고 허공에 부유했다. 방황하던 손을 허벅지에 올리니 살짝 땀이 묻어난다. 왜 긴장하고 지랄. 아무 말 대잔치의 향연을 막아준 건 진동벨이었다.
“내가 가져올게.”
소리 없이 일어난 전정국이 내 손에서 진동벨을 빼갔다. 그거 축축할 텐데…! 내 불결한 땀을 전정국이 만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쪽팔렸지만 전정국은 태연하게 카운터로 가서 트레이를 받아왔다.
“여기.”
음료를 건네는 전정국에 혹여라도 손이 맞닿지 않도록 극강의 주의를 기울였다. 진동벨로도 이미 찝찝할 전정국의 불쾌지수를 더는 올리고 싶지 않았다. 전정국은 카페모카를 한 입 홀짝이고선 테이블 위에 내려 뒀다. 맛이 없나. 입꼬리를 문지르던 손으로 오른뺨을 쓸어내린다. 분명 카페에 가자 한 건 전정국인데 어쩐지 전정국이 귀찮아 하는 것처럼 보였다.
“…”
“…”
숨막혀... 최대한 천천히 라떼를 마시며 어서 빨리 김태형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김태형이 돌아온 건 커피의 절반이 사라진 뒤였다.
/
“여주랑 고등학교 동창이라고요?”
“네.”
눈을 둥그렇게 뜬 김태형이 입을 오물거리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싱기하당’며 중얼거렸다. 아마 아이스티 안에 들어 있던 과육을 씹고 있는 듯했다. 김태형이 온 뒤로는 정적이 흐를 틈이 없었다. 음료 마시랴 이야기하랴 쉴 새 없는 김태형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입이 심심해 다 마신 음료수잔에서 얼음을 꺼내 물었다. 시끄럽지 않게 입술을 꼭 다물고 어금니로 얼음을 부수며 다른 사람들의 잔을 살폈다. 거침없이 쭉쭉 줄어드는 김태형의 아이스티와 달리 전정국의 카페모카는 처음과 똑같았다. 나무껍질처럼 진했던 갈색이 옅어진 것만 빼면. 홀짝이는 속도보다 얼음이 녹는 속도가 더 빠른 탓이었다. 입안에 든 것들을 꼴깍 삼키며 갈무리한 김태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여주 고등학교 때는 어땠어요?”
“…”
“형한테 듣기로는,
“별로 안 친했어!”
<형>이라는 단어를 인지하자마자 황급히 김태형의 말을 끊어냈다. 끝까지 듣지 않아도 <형>이 누굴 지칭하는 건 지는 뻔할 뻔 자였다. 김석진이겠지. 전정국 앞에서 김석진은 지뢰와도 같은 주제였다. 다급한 목소리에 김태형이 의아하게 바라봤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래도 김석진 석자가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 일단 다행이었다.
“그래서… 잘 모를 거야.”
유심히 나를 살펴보던 김태형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그래? 하며 넘어가,
“그럼 정국 씨도 형이랑도 같은 학교였겠네요?”
“…”
“아. 석진 형은 모르려나.”
지 않았다. 시발 결국 우려했던 이름이 튀어나왔잖아? 비상경보가 머릿속에 요란하게 울린다. 삐뽀삐뽀. 분위기 좆창나기 일보 직전. 좆창나기 일보 직전. 김태형은 웃으면서 전정국에게 김석진을 설명했다.
“여주 친오빠신데 작년에 제 과선배시기도 했거든요.”
그거 아니야...! 제발 그만 해…! 내 머리도 쥐어뜯고 싶었고 김태형의 나불거리는 입술도 뜯어버리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입을 다물고 부자연스럽게 웃는 것뿐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불안감에 빨대를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슬쩍 전정국을 봤다.
뭐지…? 전정국은 의외로 무표정하게 볼에 난 솜털을 뜯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심드렁한데...?
“전에 형이 여주 네가 고등학생일 때 이야기 종종 했었거든.
"아... 정말?"
"응. 형한테 들었을 때는 되게 무서웠는데 실제로 보니까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랑 완전 다르더라고. 그래서 궁금했어. 다른 사람 눈에는 어땠는 지.”
김태형이 빨대로 아이스티를 휘휘 저으며 히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헤살거리는 미소에 마음이 살짝 누그러진다. 그래... 따지고 보면 김태형 잘못은 아니지. 쟤도 아무 것도 모를 텐데. 그와 별개로 김석진에 대한 분노는 화르륵 치솟았다. 대체 나를 어떻게 설명했길래 무서웠다는 거야. 휴가 나오면 입을 찢어버리든가 해야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게 다 김석진 때문이었다. 속으로 김석진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김태형을 향해 작게 웃었다.
“석진 형, 저도 알아요.”
가만히 있던 전정국이 차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전정국과 달리 내 머릿속은 혼돈의 카오스였다. 진짜 뭔데 이거...? 새로운 의문들이 밀려왔다.
1. 전정국은 나와 김석진이 남매인 걸 알고 있어서 저렇게 태연한 것인가.
2. 전정국은 실연의 상처를 극복했기에 저렇게 태연한 것인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르는게 약이라더니 김태형은 “오오. 역시 아는구나.”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평화롭기 짝이 없는 리액션을 취했다. 사실 나만 빼고 다들 태평해 보였다.
“아참, 여주 동창이면 동갑일 텐데 말 편하게 해요.”
김태형이 말갛게 눈꼬리를 접으며 전정국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딱 김태형이 가까이 간만큼 몸을 뒤로 뺀 전정국이 눈을 깜빡였다.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보였다, 가려졌다… 뻘쭘하게 흐르는 침묵에 무안할 만도 한데 김태형은 여전히 뺀질뺀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정국아. 우리 친하게 지내자.”
김태형이 고개를 바로 하자 전정국도 몸을 바로 한다. 뻔뻔한 건지 넉살이 좋은 건지. 싱글생글한 김태형에 어이가 없어서 심란한 와중에도 헛웃음이 났다. 어쨌든 얄밉다기보다는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느껴졌다.
/
아직 3월 초라 그런지 해는 초저녁에 떨어졌다. 못다 한 과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뤘다. 어쩐지 본래 목적을 상실했던 것 같아 찝찝했지만, ‘발표 주제라도 몇 후보가 나왔으니 됐다’며 마냥 긍정적인 김태형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박지민도 없었으니 이 정도 논의가 최선이지 뭐.
은근히 서늘한 바람에 옷을 여미는데 김태형이 불쑥 물었다.
“여주 너는 지하철 타고 가?”
“응. 나는 지하철…”
잠깐.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장난 테이프처럼 말끝이 길게 늘어진다. 지금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는데...
여기서 우리 집까지 가는 시간은 50분. 전정국과 나는 같은 동네.
지하철 타는 40분 동안 전정국과 단둘이 있어야 함.
= 숨 막혀 죽음.
둘을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해원동에 약속이 있어서… 난 버스 타고 갈게.”
약속은 개뿔. 집에서 밀린 예능이나 볼 생각이었지만 어색한 상황을 피하고자하는 절실함에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전정국은 먼저 보내고 올리브영에서 적당히 시간 때우다 가면 되겠지.
“여기서 해원동까지 가는 버스 없을 텐데?
김태형이 크로스 백을 고쳐매며 나를 내려다봤다. 순진무구하게 바라보는 김태형의 눈빛에서 본능적으로 느꼈다.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으리란 걸.
“지하철로 가는 게 제일 나을 거야.”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전에 내가 자취하던 데가 해원동이거든.”
"어... 그래."
“인천 방향타고 쭉 가다가 당원 역에서 내리면 돼.”
시발.
/
정신을 차리니 나는 전정국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라면 해원동 간다고 구라까지 않는 건데. 당원 역은 원래 내가 내리는 역보다 두 역 뒤에 있었다. 다시 말해 전정국과 40분간 어색하게 지하철을 타다가 나는 다음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 한다는 말. 시발… 나 아니었으면 길 헤멜 뻔하지 않았냐며 엄지를 척 세우던 김태형이 눈에 선했다. 주먹이 부들거린다. 김태형이 잘못한 건 없지마는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
이와중에도 전정국은 주변에 분무기라도 뿌린 것처럼 청초했다. 후진 학교 뒷골목마저 뮤직비디오 현장으로 바꾸는 매직. 반사판이라도 들고 다니는 건 아닐까. 괜히 전정국의 뒤를 힐끔거렸지만 곧은 등짝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고개를 앞으로 돌려 전정국을 시야에서 지우니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지저분한 골목길이다. 분위기가 외모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외모가 곧 분위기였어. 신기한 정국효과에 미어캣처럼 앞을 한번, 옆을 한번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들킬까봐 대놓고는 못보고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봤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비교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전정국을 본 순간이었다.
“얼굴 닳겠다.”
담담한 어조가 마음을 후볐다. 눈이 마주친 전정국이 눈썹을 까딱인다. 아… 쪽팔려. 시선을 떨구고 마른 세수를 하며 차가운 손끝으로 몰래 뺨을 식혔다.
무안해진 나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전정국은 몇 분 동안 묵묵히 걷기만 했다. 가로등을 등질 때마다 아스팔트 위에 흐릿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두 그림자는 가로등이 바뀔 때마다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그에 비례해서 그림자의 키 차이도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 창피함이 어느 정도 가시자 아까 일들이 떠올랐다.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다 입을 열었다.
“저기.”
생각보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아 용기가 난 탓이기도 했고
“궁금한 게 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답답한 탓도 있었으며,
“내가 오빠 동생인 거 알고 있었던 거야?”
아까 고개를 돌리기 전 전정국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 걸 얼핏 본 탓이기도 했다.
“응.”
언제부터, 대체 어떻게? 간단명료한 답에 연쇄적으로 다른 질문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고개를 치켜드니 전정국은 조금 피곤한지 눈썹 뼈 아래를 지긋이 문지르고 있었다. 망설이다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지금 당장 안 캐물어도 다음에 또 물어볼 기회가 있겠지. 나는 여상한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난 또 네가 아무 말도 안 하길래 모르는 줄 알았어.”
“곤란해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아까 형 이름 나왔을 때.”
아. 그때. 김석진 이야기할 때. 음... 곤란하긴 했는데... 그건 너 때문에 곤란했던 거란다… 참 아이러니 하지? 절대 밖으로 뱉질 못할 말을 속으로 웅얼거렸다. 한편으로는 김석진과 관련해 전정국이 나를 배려했다는 점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본인을 찬 사람 이야기가 오고 가는 와중에 그 사람 동생을 걱정한다니. 왠지 모순적이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골몰해 있다보니, 어느새 골목 어귀까지 와있었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역입구가 나왔다. 몇걸음 걷지 않아 골목길과 대로변의 교차점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전정국이 우뚝 멈춰 섰다. 다 왔는데 왜 그러지? 전정국이 코트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내었다.
“조심히 가, 여주야.”
“…너는 안타?”
“나 자취해.”
“어?”
“잘 가.”
담백한 인사말에 나도 얼떨결에 손을 흔들었다. 안녕. 미련 없이 뒤돌아서 가는 전정국에 나도 몸을 돌려 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참 겉잡을 수 없는 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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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기다리신 분들이 남아계실 지도 모르겠어요ㅠ
연재텀은 줄이도록 노력할게요...!
+글을 쓰기 전 저번화를 읽어보다가 깜짝 놀랬습니다
정국이가 뒤돌아 보는 짤이 사실 창문밖으로 떨어지는 짤이더라고요...?
제가 생각한 건 딱 뒤돌아보는 것 까지였는데... ㅠㅠ
그 버전의 짤을 여러개 갖고 있어서 아마 실수로 긴 버전을 올렸나 봅니다...
용서해주세요 흑흑ㅠㅠ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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