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시간.사방이 방음소재로 마감된 벽으로 이루어진 음악실 안으로 남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몰려와 각자의 자리에 착석한다.
몇몇은 손에 들고있던 가죽 케이스에서 조심스럽게 악기를 꺼내어 튜닝하고 또다른 몇몇은 음악실 내에 일렬로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는 악기 앞으로 가 앉는다.조금 산만한 남학생들의 손길과는 다르게 손에서 튜닝되는 악기들의 몸체는 한눈에 봐도 값비싼 광택이 흐르며 그들의 재력을 당연한 듯이 드러내고 있다.몇몇 장난기 다분한 아이들은 혼현을 드러내며 악기를 튜닝하는 소리에 맞추어 장난스럽게 포효하며 나름의 아카펠라를 노래하기도 한다.이 역시 보통의 가정형편에서는 배울 수 없는 음악적 교양이 다분히 함유되어 있는 고급스런 놀이일 것이다.오늘 수업시간에 배울 가곡의 가창시범을 맡은 종대는 음악실 옆 교사실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장예흥 선생님과 잠시 노래를 맞춰보다 수업시간에 맞춰 함께 음악실로 들어가는 중이었다.음악실과 교사실 사이는 바로 옆이라 하더라도 코너를 돌아야 서로 진입할 수 있는 위치다.하지만 벌써부터 들려오는 악기 소리와 아이들의 시끄러운 포효와 울부짖음은 언제나처럼 예흥의 얼굴위로 특유의 밝고 온화한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알람과도 같은 것이었다.
다만,오늘만큼은 달랐다.나름 진지한 모습으로 악보를 읽으며 가창시범 준비에 여념이 없는 종대의 옆에서 나란히 음악실을 향해 걸어가며 귀를 기울이던 예흥의 얼굴 위로 웬 일로 미소가 아닌 궁금증이 떠오르며 이내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응?선생님 왜 그러세요?"
"종대.오늘 좀 저 소리 다르지 않아?"
"소리요?"
"응.음악실에 종대 반 학생들 떠드는 소리."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우뚝 멈추는 선생님을 따라 나란히 멈춰선 종대는 예흥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악보에서 집중하던 시선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외지에서 온 외국인 특유의 맹한 시선을 넘어선 어떤 순수함마저 풍기는 예흥의 맑은 눈동자가 시끌벅적한 악기음과 혼현들의 울음이 들려오는 음악실 문을 향해 밝은 하늘빛을 띄었다.그리고,또 다시 서투른 한국말로 한 마디.
"오늘은 피아노 소리가 없네요."
**
수업이 시작되고 한동안은 예흥의 지휘에 따라 간단한 합주연습이 시작된다.피아노 옆에 선 채 악보를 훑으며 목을 가다듬는 종대를 살짝 곁눈질하던 백현은 가만히 눈을 건반 위로 내렸다.자꾸 기분이 별로였다.새하얀 건반은 오늘도 계속해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고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반짝반짝 햇살을 받아 빛나기만 하는데...자꾸만 건반들 위로 묵직한 음성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시발.」
나한테 왜 그러는 걸까,그 아이.머릿 속에서 울리는 낮고 거칠던 목소리.종대의 사촌이라는 찬열과 벌써 두번째 만남이었지만 찬열은 백현을 볼 때마다 욕만 남기고 사라졌다.자꾸만 떠오르는 찬열의 표정.혈색이 발간 굵은 입술로 낮은 목소리의 욕을 짧게 내뱉을 때마다 백현을 바라본 채 남자답게 발달한 미간도 지그시 찌푸렸었다.
걔 진짜 나한테 왜 그러지..내가 뭐 잘못했나..검은 건반을 만지던 백현의 검지가 시무룩하게 나오는 아랫입술과 함께 주르륵 아래로 추락해 다리 위로 떨어졌다.백현은 마음이 심란했다.내가 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원래 내 성격대로라면 지지않고 같이 욕을 하거나 아니면 달려들어서 물기라도 해야 하는데,박찬열이 늑대라서 그런지 자꾸 뭔가 따지지는 못할 것 같고..또 무엇보다..왜 이렇게 자꾸 나 혼자서....이렇게....
"백현?"
"퓨......"
"백현!"
"헉!네.....?"
생각이 꼬리를 물려는 순간 등을 후려치는 듯한 소리에 깜짝 놀라 백현은 고개를 들었다.얼른 뒤돌아 보니 예흥이 지휘봉을 든 채 백현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세심하게 저를 살피는 예흥의 맑은 눈을 마주하던 백현은 그제서야 교실의 악기 소리가 모두 멈춰있다는 것을 깨닫곤 멍하니 입을 벌렸다.피아노 옆에 서 있던 종대가 의아한 표정으로 악보를 든 손을 내린 채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예흥이 다가와 백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백현.오늘 어디 아파요?갑자기 왜 그래요."
"네...?제가 뭘......"
"백현 지금 귀 나왔어요."
"엉....?"
머리 위를 슬쩍 곁눈질하며 타이르듯 말하는 예흥의 말에 백현은 말을 더듬다 말고 황급히 머리통 위를 두 손으로 더듬었다.아니나 다를까,검은 머리칼 사이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새하얀 강아지 귀가 삐죽 튀어나와선 부슬거리고 있었다.두 손 안으로 작은 포메라니안의 세모꼴 귀가 완벽하게 잡히는 순간,백현은 그제서야 모두의 시선이 제 귀로 향했음을 깨닫곤 얼굴이 달아오른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음악실 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려나는 피아노 의자에 예흥이 살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지만 백현은 사과할 수가 없었다.학교에서 수업 중에 혼현을 드러내는 것은 교칙 위반인 것을 넘어서,체육복을 갈아입다 장난으로 속옷이 드러난 것 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반류들에게 있어 혼현은 극도의 흥분상태이거나 긴장 상태일 때만 본능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으니.특히 백현처럼 경종일 경우엔 괜히 혼현을 드러내 호르몬을 방출했다간 중종이나 중간종들의 짖궂은 장난기를 도발할 수가 있어 특히 예민한 사항이었다.그런데 하필 지금 음악실에서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때에 피아노는 치지 않고 혼현을 드러낼 뻔 하다니.맨 앞자리에 앉은 중종 하이에나 녀석의 입가에 짖궂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아 귀를 가린 채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쩔 줄 몰라하던 백현에게 손을 뻗은 것은 선생님인 예흥이었다.하얀 손으로 백현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준 예흥이 보조개를 띤 미소를 보이며 백현의 한 손을 잡아 내려주더니 물었다.
"백현.양호실 가 보는 게 어때요?"
"아뇨..선생님.저는...그러니까.."
"피아노는 선생님이 칠게요.백현은 양호실 가 봐요."
".............."
"알겠죠?"
"네.."
네가 꼭 양호실에 갔으면 좋겠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예흥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백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피아노 옆으로 걸어나오며 살짝 눈을 마주한 종대가 입모양으로 괜찮냐고 묻는 것이 보였지만 백현은 그저 시선을 피하며 최대한 담담하게 음악실을 나왔다.복도는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는 아직 차가운 봄바람이 조금 뜨거워진 햇살과 섞여 초여름의 기운을 물씬 풍기며 백현의 머리칼을 흩어놓고 지나갔다.혼현은 다행히 다시 들어간 것 같았다.잠시 음악실 문 앞에 멈춰선 채 가만히 밋밋해진 머리통을 만져보던 백현은 터덜터덜 양호실을 향해 걸어갔다.예흥의 말대로 양호실로 가 잠이라도 자서 머릿 속에서 윙윙 울리는 억울한 욕설을 잠재우고 싶었다.
**
"실례합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양호실은 아무도 없었다.어차피 선생님께서 계셨다고 해도 그냥 머리가 아프니 좀 자고 가겠다고 하면 아무 제재도 하지 않으실 분이셨지만.여담이지만 양호선생님은 그 직함에 맞지않게 굉장히 성격이 방만하기로 유명한 분이셨다.단순한 소문은 아닌 것인지,가끔씩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무릎이 까져서 양호실을 찾았을 때도 거의 양호실에 계시지 않으셨다.대신 매번 책상 위에 반듯하게 펼쳐진 약재출납부만이 있을 뿐이었다.아무튼,백현은 오늘도 역시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시는 양호선생님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양호실 문을 닫자마자 벽에 바로붙어있는 맨 구석의 침대로 비척비척 걸어갔다.이유도 모르게 친구의 사촌으로부터,그것도 잘난 중종으로부터 욕을 두번이나 들어먹고 있는 상황은 백현의 심신을 생각보다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빨리 누워서 자고싶다.자고나면 기분이 좀 좋아져 있겠지.스스로를 달래며 백현은 휙,하얀 커튼을 걷었다.
"...........어?"
침대 위엔 찬열이 자고 있었다.
---------------------------------------------------------------------------------------------------------------------------------------------------
-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정말 감사드립니다.덕분에 힘이 나서 이렇게 또 삼편을 끄적여 왔답니다.야호
-암호닉은....제가 받지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ㅠㅠ..만약에 완결이 난다면 꼭 여기 텍파를 올리겠습니다!
그래도 댓글에서 저 ㅇㅇ이에요!해주신다면 왠지 소통하는 느낌이 들어서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긴해요ㅎㅎ
-커플링은 찬백 말고도 있을 예정이에요.등장시기가 조금 고민일 뿐..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