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가 왜 여기서...."
한참을 멍하니 있던 백현이 새까만 눈동자만 불안하게 떨고있다 간신히 숨처럼 토해낸 중얼거림이었다.저를 본 단 두번의 시간내내 욕설만 내뱉고 사라지던 친구 종대의 사촌,잘나고 잘난 학교의 유명인 찬열의 생각을 하다 음악시간에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혼현까지 내보일 뻔하곤 쫒기듯이 들어온 양호실엔 어떻게 된 일인지 찬열이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물론 아직 찬열과 자신의 관계를 딱히 '원수'까지라고 정의할 것은 없지만서도 이 기가막힌 우연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엉뚱한 재회에 백현은 열어젖혔던 침대의 커튼만 부여잡은 채 한참을 가만히 잠든 찬열의 얼굴만 내려다보며 멀뚱히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가끔 복도가 여학생들의 탄성과 진한 페로몬으로 온 공기가 뿌연 분홍빛을 띌 것만 같이 달아오르면 꼭 어디선가 나타나 있던 잘난 자태의 주인공.박 찬열.어쩌다 수업시간 와중에 양호실로 와 잠을 청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조금 피곤한 기색이 서린 얼굴도 역시나 잘생기긴 매한가지였다.재정을 들이부은 귀족사립학교의 길고 넓다란 양호실 침대도 꽉 채우는 기다란 기럭지는 자는 와중에도 멋을 부리는 것인지 모델마냥 살짝 꼬아져 있다.같은 남자가 봐도 영화나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귀족남의 이미지의 정석이라는 생각이 삐죽 치고 올라오자 백현은 왠지 심통이 흥 콧방귀를 끼며 무릎을 굽혀선 찬열의 얼굴이 바로 마주보이게 털썩 주저앉았다.얄미웠다.
"가만히 있는 착한 경종한테 욕이나 뻥뻥 날려놓곤 자기는 맘 편하게 퍼질러 자고 있는 거 봐라,진짜..."
나름 가문의 막내아들로 할아버지,할머니,엄마,아빠,형 할 것 없이 귀여움 받으며 자란 백현에게 찬열이 그 특유의 낮고 거친 목소리로 내뱉고 사라진 '시발'은 꽤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솔직히 예전부터 찬열의 소문은 익히들어 알고 있었다.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사귀게 된 친구 종대가 찬열과 사촌집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는 나름 괜찮은 인맥을 잡은 것 같기도 해 유치하지만 은근히 뿌듯하기도 했다.비록 청소년기의 반류들 사이에서는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경종으로 태어났지만 교우관계에 있어서 리드를 하면 했지,절대 당하고 산 적은 없었다.그래서 종대가 집에서 같이 과제도 하면서 놀자고 제안했을 때는 당연히 승낙하면서 한편으로는 은근한 기대도 했다.그 소문의 박찬열이 종대의 집에 자주 놀러 온다는데 혹시 안면이나 틀 수 있는가 싶어서.그런데 웬걸,그 날 이후로 찬열에게 두 번이나 시발 소리를 들었다.생각하면 할 수록 속상하다.아니,그보다 어이가 없다.날 뭘로 보고.숨을 조금 크게 내쉬며 감은 눈을 살짝 움직이는 찬열의 얼굴을 바라보며 백현은 무릎에 걸친 두 팔에 힘없이 얼굴을 기대곤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경종이라서 싫은거야.....?'
종대의 집에서 찬열을 처음 마주한 첫 날,하루종일 축구를 뛰고 바로 종대의 집을 방문한 터라 피로가 많이 쌓인 상태였다.그 상태에서 저녁까지 먹고나니 잠이 절로 쏟아지는 것이었다.종대네 어머니께서 유럽으로 여행을 가셨다 공수해 오셨다는 카페트는 어지간히도 보드랍고 포근한 판에,결국 종대의 자비없는 손길에 푸스스 정신을 차렸을 땐 저는 이미 혼현을 드러내 한마리 포메라니안이 된 상태였고 찬열은 어딘지 굉장히 충격받은 모습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었다.밝은 거실 조명 아래로 학교에서와는 다르게 진갈색 앞머리를 내린 채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뜨악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던 찬열은 갑자기 툭 내뱉었었다.'시발'을.그리고 종대가 왜 그러냐며 불러대는 것도 무시하고 곧장 계단을 내려가선 커다란 소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불과 며칠 전 벌어진 씁쓸한 첫만남의 기억.백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입 안에서 혀를 씁쓸하게 굴렸다.
아마 찬열은 남의 집에서 혼현을 드러낸 채 카펫 위에서 아무렇게나 누워자고 있던 자신의 모습에 경악했을 것이다.중종들,특히 늑대들은 콧대가 높기로 소문이 자자하니까.
'그래도 너무해...넌 날 잘 알지도 못하잖아.'
그렇다.이해는 하지만 여전히 섭섭하다.그리고 오늘 오전,불과 한 시간 조금 전에는 제가 말을 좀 걸자마자 또 욕을 내뱉곤 사라졌었다.함부로 행동하는 경종이랑은 말도 섞기 싫다는 뜻이 분명하다.울적해지는 기분에 백현은 조금 볼을 부풀린 채 두 팔뚝에 턱을 괸 채 쪼그려 앉아 바로 앞에 보이는 찬열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섭섭해도 이대로 넘어갈 정도의 시크함은 있어야 하는 게 백현이 알고있는 자신의 성격이다.어차피 서로 잘 모르고 친구의 사촌이라는 것만 빼면 조금의 접점도 없는 사이.그냥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와 학교 최고의 인기있는 아이.결론적으로는 극과 극인 찬열이다.그런데,정말 이상하게도 놓지를 못하고 계속 신경쓰고 있다.
찬열을.
'..새끼,잘 생기긴 진짜 잘 생겼네.'
박찬열아.내가 너랑 진짜 친해지고 싶긴 한가 봐.널 좀 동경하긴 하는가 보다.부러운 자식아..나름 남자의 자존심인 것인지 더 이상 중얼거리진 않았다.대신 슬그머니 무릎을 펴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얌전히 수면에 빠져있는 얼굴을 살펴본다.선이 부드러우면서도 남자다운 골격은 다 갖추고 있는 얼굴이 가까이 거리를 좁힌 눈에 가득 들어찬다.짙은 칼눈썹을 입체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이마 아래의 눈썹뼈,버릇처럼 찌푸리고 있는 미간.가운데 새겨져 있는 주름이 눈에 띄어 살며시 손가락을 대고 문질러 본다.미동도 없다.뿌리부터 약간 매부리로 솟아오른 날카로운 콧대로 사르르 손가락을 따라 내려가 본다.오목하게 자리잡은 인중은 간지러울 수 있으니 살짝 거리를 띄워 지나가고.
"..누구야."
"윽...!"
붉고 도톰한 입술.달콤한 말만 속삭일 것 같이 생겨선 제게 오직 두 번의 짧고 굵은 욕설만 내뱉은 요 얄미운 입술.백현의 긴장된 호흡과 함께 얼굴선을 따라 내려오던 검지가 그 입술 위로 닿는 순간,찬열의 눈이 번뜩 뜨였다.그리고 백현은 순식간에 멱살이 잡힌 채 벽에 쾅 박혔다.직통으로 부딪힌 뒤통수가 웅웅 울리고 시야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번득이는 찬열의 두 눈동자가 보인다.호박같은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금색 두 눈동자가.
"...백현?"
"끅........."
중종 늑대의 힘은 생각보다 목을 강하게 조여온다.찬열의 금안이 당혹감으로 흔들리는 순간 백현은 결국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었다.
**
[빠오즈]루한!오늘 저녁 알지?
"아.....민석..."
휴대폰 액정 위로 떠오른 메시지에 루한은 탄식하며 엄지를 움찔거렸다.차마 답장을 보내기가 힘들었다.난생 처음 민석과의 약속이 취소되게 생겼다.그것도 자신이 먼저.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조율이 불가능한 상황임을 스스로가 잘 알기에,루한은 애써 올라오는 욕을 참으며 메신저 창에 답장을 입력했다.한가득 미안함을 표현하며.
[민석,미안해ㅠㅠ]
[나 학교에 급한 일이 생겼어ㅠㅠㅠㅠㅠㅠ]
[정말 미안해ㅠㅠㅠㅠㅠ]
[빠오즈 : 아 정말ㅠㅠ?]
[빠오즈 : 그럼 오늘은 안되겠네..ㅠㅠ아쉽다 오랜만에 만나나했는데..]
[미안해 민석ㅠㅠㅠㅠㅠㅠ]
[빠오즈 : 에이!괜찮아!!ㅋㅋㅋㅋㅋ]
[빠오즈 : 남학교인데 양호쌤이라고 일이 없겠어?]
[빠오즈 : 루한 난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얼른 일 하러 가!]
[빠오즈 : 담에 꼭 보자!]
[빠오즈 : 사실 나도 논문 때문에 쫌 바빴어ㅋㅋㅋ]
[빠오즈 : 힘내 루루!끝나고 시간나면 연락해~]
"많이 해이해졌어,루한.내가 온 줄도 모르고 딴 짓을 다 해."
"닥쳐.기분 안 좋으니까."
굳이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연상이 되는 민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짓던 얼굴은 답장을 입력하려던 손가락이 한 남자의 목소리에 의해 저지되는 순간 곧바로 뒤틀린다.열이 받다 못해 짜증으로 구겨진 루한의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던 남자는 피식 웃으며 커다란 몸을 숙여 작은 카페 의자에 앉았다.아직 잠금을 걸지못한 스마트폰 액정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고 있는 루한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넓은 어깨를 으쓱하며 선심쓰듯 고개짓을 한다.
"네가 말하던 그 중간종 애인인가 보지?답장해.읽은 줄 알고 기다릴 거 같은데."
"非您的业务!停止谈论我的爱人!(신경 꺼!내 애인 얘긴 하지 마라고!)"
"Okay,Okay.buddy..Relax."
순간 중국어로 울려퍼진 루한의 신경질적인 고성에 주변 좌석의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았다.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영어를 읊조리는 크리스를 보는 순간 모두들 시선을 돌렸다.그것은 본능적인 계급적 경계였다.뇌가 판단하기 전 호르몬이 경계하는.
그런 주변을 내리깐 시선으로 곁눈질하던 루한이 깊게 숨을 몰아쉬며 의자의 등받이에 늘씬한 몸을 기대었다.여전히 신경질이 가득한 얄쌍한 얼굴과는 조금 상반되는 남자다운 손가락은 이미 스마트폰의 버튼을 눌러 메신저창을 꺼버린 뒤였다.속눈썹이 긴 반짝이는 구슬같은 두 눈이 저를 마주하고 있는 크리스를 향한다.
"所以,你准备好了吗?(그래서.준비는?)"
"Perfect.Now,i'm a trinee teacher.Teaching Chiness.hah.(완벽해.이제부터 난 교생이야.중국어를 가르치는 교생.하...!)"
"哈,你真的做吧。我是在失去了言语.(하,네가 교생이라니.어이가 없구만.)"
"它是一个时间折叠龙的翅膀。(용이 날개를 접어둘 때인거지.)"
"................진짜 움직이는 거야?"
영어와 중국어가 두서없이 오가던 대화의 끝에서 루한이 문득 크리스에게로 눈을 지그시 치켜뜨며 물었다.루한의 구슬같은 눈동자를 마주보며 크리스는 대답했다.
"Sure."
-----------------------------------------------------------------------------------------------------------------------------------------------------
- 찬백이들 분량을 더 나가고 싶었으나 시간상 체력상 분량상 fail...
- 역시 수많은 댓글들이 절 4편의 키보드로 이끌었습니다.정말 감사합니다.
- 이렇게 서서히 다각이 되어가고...하지만 아직 제대로 나온 커플은 하나도 없고....독자님들께 죄송하고...
- 찬열이가 지쳐보이는 이유는 독자님들께선 다 아실거라 믿습니다.적어도 2편을 제대로 읽으셨다면..하핳
- 중국어와 영어는 번역기 돌렸으니 절대 역번역 하시면 안됩니다.이 글이 '재밌는'에서 그냥 '재'로 보이는 신박한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 크리스랑 루한.너희 뭐하는 놈들이니...나도 잘....ㅋ
- 사랑합니다.
- 하....초록글 ♥ 진심으로 말씀드리는데 제 인티생애 최고의 영광입니다.감사합니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