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나비가 내게 날아와 꽃이 되었다.
나비가 내게 날아와 꽃이 되었다. 그녀의 카톡 상태 메세지로, 바뀌지 않은지 약 5개월이 되었다. 5개월 전에 헤어졌던, 나의 전 여자친구의 프로필 사진은 5달전과 같은 하얀 꽃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갔었던 제주도 이별여행때 찍은 사진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아니라면, 아닌거지만. 그 흰꽃은 제주도에만 피는 꽃은 아니다. 우리집 앞 마당에도, 학교앞 거리에도, 공원에도, 그리고 그녀의 집 앞에도 피어있는 꽃이다. 너무 흔한, 그래서 더 예쁜 꽃이다. 항상 보고있지만 그 꽃의 이름은 모른다. 어쩌면, 찾아 본적이 없을 지도 모른다. 언제나 항상 있는 것의 소중함은 없어지고서야 소중함을 깨닫기 마련이니까. 그녀처럼. 그래서, 조금더 소중함을 느끼고자 이름을 찾지 않으련다.
그녀도 마찬가지 였다. 우리는 5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귀었던 연인이었다. 마지막은 정으로 지냈을 지도. 고등학교 2학년 3반 5번 김성희와 25번 신성은은 5년전 조그만 카페에서 시작했었다. 그리고, 그 인연을 5개월전 그 조그만 카페에서 끝을 맺었다. 오늘도 역시나 그녀가 그리웠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 같은 학부였던 탓도 있겠지만 우리는 징하게 붙어지냈다. 매일같이 보고 살았으니까. 오히려 안 본 날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연인보다는 오래된 부부같았던 우리는 어쩌다 끝을 맺었던 것일까.
오랜만에 우리의 모든 추억이 담겨있는 카페에 갔다. 항상 시키던 모카라떼를 시키고 창가에 자리했다. 문득 벽을 돌아보니 방문록겸 메모판에 우리의 사진이 보인다. 아, 그녀는 여기에 오지 않았구나. 왔으면 이미 저 사진이 없을 텐데. 잠시 사진을 치워버릴까 고민하다 이미 헤어진 연인, 뭣하러 억지로 없애버릴까 하는생각에 그냥 놔두었다. 참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추억을 되짚어 여기 온 나는 뭔지. 혹시나 모를까 그녀가 후에 여기에 왔을때 게시판을 보고 아, 저런 시절도 있었지 하고 추억하기를 기대하며 그 사진은 건들지 않았다. 설마 그녀역시 나와 같은 생각으로 여기에 왔다 그냥 가지 않았을까.
이건 또 무슨 말도 안되는 변명이란 말인가. 그냥, 이제 잊은 것이다. 잊었다. 하고 자위를 해보아도 그녀를 아직 잊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심심하면 그녀의 카톡 프로필을 확인하고, 그녀의 페이스북을 검색해 들어가는건, 잊은 사람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겠지.
“카페 모카 맞으시죠? 여기요.”
알바가 바뀌었나… 처음보는 사람인데
“실례지만, 혹시 여기 알바가 바뀌었나요?”
“아뇨. 아, 혹시 항상 3시넘어서 오셨나요? 여기 카페가 다른곳과 달라서요. 3시에 바톤 넘기거든요.”
그런가. 내가 보았던 사람은 항상 3시 이후의 사람이었나.
“아아, 아마 그런가봐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맛있게 잘 드세요.”
그제서야 카페의 전경이 눈에 담긴다. 5년동안의 나와 그녀의 시간이 담겨있을 줄로만 알았던 그 카페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많이 달랐다. 창문의 채광도, 커튼도, 자그마한 소품도, 그리고 지금 내가 마시고있는 컵조차 바뀌었다. 항상 화분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는 처음보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었다. 그옆의 아기자기한 곰돌이 인형도, 그위의 가렌드도, 전부 처음보는 것이었다. 그런가, 그녀와 나의 사이가 바뀌었던 만큼 여기도 바뀌었구나.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너무나도 당연했던 5년은 흐르는 시간이었으며, 우리의 관계나, 이 카페나 서서히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나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날씨도, 풍경도, 내가 당연히 있던 곳도. 모두, 바뀌었다. 이제야 알것 같았다. 지금이야 말로 그녀를 보내줄 시간이라는 것을. 모든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안 지금, 내가 할 것은 그녀의 프로필을 보며 미련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놓아줘야 하는것을. 내 첫사랑이었던 신성은을, 내 첫 연인이었던 25번 신성은은, 이제야말로 김성희가 떠나 보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카페는 나와 그녀의 추억만 담겨 있었던 공간이 아니라, 그저 내 단골가게였음을 기억했다. 내가 항상본 카페 알바생은 추억의 일부가 아니라, 그저 파트타임을 뛰는 바쁜 알바생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추운 겨울 날씨는 내 심정을 대변한것이 아닌, 그저 겨울이된 것임을 깨달았다. 이제는, 그녀를 그리워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련다. 나에게 5년이라는 시간을 같이 보내주었던 그녀에게 고마움을 남긴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 더이상 그녀는 없고, 나는 혼자이며, 새 출발을 기다린다.
고개를 들어 밖을 보다, 다시 카페를 보니, 아까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던 알바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대충 대학교 2학년 정도려나. 머리를 뒤로 돌려 한번에 묶은 모습이 눈에 박힌다.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강아지같은 눈망울, 집중하느라 약간 벌어진 입, 그리고 옆으로 내려와있는 잔머리들. 생각보다 그녀는 귀여웠다. 다시 카운터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남자친구 있어요?”
“아뇨. 공부하기도 바빠요. 그리고 뭐,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죠. 하하”
없는가 보다.
“오늘 3시에 마친다고 했죠. 오늘 시간 되세요?”
“네? 아… 시간이야 되기는 되는데… 뒤에 다른 알바가 잡혀있거든요.”
“그러면 알바 마칠때 맞춰서 데리러 가도 되나요?”
“지금 뭐하시는거에요?”
“모르겠어요?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거에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쪽과 같이 보내고 싶거든요. 아! 마침 눈도 오네요.”
“데이트 신청이라… 좋죠. 크리스마스 이브에 혼자 보내기는 적적 하니까요.”
성공이다.
“알바 어디에서 하세요?”
“저기 앞 삼거리에 영화관이요. 8시에 마쳐요.”
“8시에 데리러 갈게요. 아, 이름이 뭐죠?”
“뭐야, 이름도 모르고 데이트 신청하신거에요? 여신혜에요.”
다행히 그리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여신혜. 그녀다운 이름이다. 여신…. 재미있다.
“그래요. 여신혜씨. 저는 김성희에요. 이름, 먼저 안물어봐서 기분 나빠요?”
“아뇨, 어짜피 저도 몰랐던걸요. 김성희씨. 조금있다, 8시에 봬요.”
“그래요. 영화관 8시. 저녁, 스테이크 어때요?”
“스테이크는 조금 비싼데….”
“제가 살게요. 제가 데이트 신청했잖아요?”
“그럼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그럼, 조금있다 봬요.”
그녀, 아니, 신성은의 카톡 상태메세지처럼, 여신혜라는 나비가 나에게로 와 작은 꽃망울을 만들었다. 그, 흰꽃은 이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두고, 새로운 작은 꽃망울을 피워 보려고 한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낼 그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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