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 돌아가는 꽃 / 도종환
여름은 찜통 더위 속거추장스런 옷 훌훌 벗듯마음도 가벼이거짓 없이꾸밈도 없이 내 모습 있는 그대로다 보여주며 그리움도 사랑도 폭 익히기 좋은 계절.광활한 우주 속한 점 먼지인 내가별빛 같은 눈동자의 너와어쩌다 인연의 옷깃 스치고살짝 눈이 맞아나 너를 사랑한다는 아련한 황홀감에무더위도 깜빡 잊혀질 수 있으리
- 여름 / 정연복
깊은 산 계곡의 파란 바람꽃 되어머언 먼 바다의 하얀 파도빛 되어당신만을 사랑한다고 소리칩니다그러면 산도 바다도 다 사라지고온 누리 가운데 당신만이 가득합니다
- 온 누리에 가득한 당신 / 공석하
영암지서 관사 양철 지붕 아래 검은 동굴 같은 샘 하나 있습니다 어쩌다 찔레꽃잎 하나 떨어뜨리면 잔잔한 물무늬가 꽃속보다 깊고 검은 하늘 찰랑거리며 흰 별로 뜹니다 내 안에 그대가 꽃잎으로 내려 잔잔한 무늬 하나 그을 때까지 참 맑은 샘물로 가슴 흐리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 샘 / 이승범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 씁니다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당신으로 인해 비어있는 자리마다 깊디 깊은 침묵이 있습니다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당신있는 그곳에도 봄이 오면 꽃이 핍니까꽃이 지고 필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소리없이 흔들리는 붓꽃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자리로 바람이 가득가득 밀려옵니다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땅을 다녀갑니까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와 머물다 소리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 오월편지 / 도종환
이젠 잊읍시다당신은 당신을 잊고나는 나를 잊읍시다당신은 내게 너무 많아서 탈당신은 당신을 적게 하고나는 나를 적게 합시다당신은 너무 내게로 와서 탈내가 너무 당신에게로 가서 탈나는 나를 잊고당신은 당신을 잊읍시다
- 고백 / 이생진
한 번도 닿지 못했던 땅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여전히 처녀림인 곳 반평생 항해 끝 한쪽 발이 먼저 밟은 땅 되돌아갈 길 없이 가죽끈도 없이 꽁꽁 내가 묶인 땅 단 한 번의 애무로 빛과 그늘 속 아무도 모르게 나를 숨긴 당신
- 당신 / 서종택
사랑에 걸린 육체는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깜빡깜빡 기다리는사랑에 걸린 사람들정거장 모퉁이에 걸린 붉은 불빛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고통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당신의 밥, 나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 정끝별
이것이 진정 외로움일까 다만 이렇게 고요하다는 것이 다만 이렇게 고요하게 혼자 있다는 것이 흙 위에 다시 돋는 풀을 안고 엎드려 당신을 생각하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홀로 깊이 어두워져가고 있는 다만 이 짧은 순간을외로움이라 말해도 되는 것일까 눈물조차 조용히 던지고 떠난 당신을 생각하면 진정으로 사랑을 잃고 비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나도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비어 있다고 내가 외롭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새로 돋는 풀 한 포기보다도 떳떳치 못하고돌아오는 새들보다 옳게 견디지 못한 채 이것을 고독이라 말해도 되는 걸까 저 길고 긴 허공을 말없이 떨어져어둔 땅 너머로 빗발들은 소리없이 잠겨가는데빗방울 만큼도 참아내지 못하면서겨우 몇 날 몇 해 홀로 길 걷는다고 쓸쓸하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흔들리기만 하면서 흔들리기만 하면서 고독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 홀로 있는 밤에 / 도종환
제일 처음 발견한 자에게만 하나의 커다란 놀라움이 되고 싶어 나는 항상 숨어 사는 꽃이어요 가까이 다가와 허리 굽혀 들여다보는 자에게만 흐뭇한 위안이 되고자 나는 언제나 숨죽이고 있는 향기여요 애써 찾는 자에게만 그 눈에 뜨이고 싶은 나는 제일로 키 작은 꽃이어요 아주 미미한 죄끄만 꽃이어요 그러나 나는 또 늘 눈뜨고 있는 꽃이어요 아, 나는 당신에게서만 이름을 지어 받고 싶은 그래서 아직은 이름도 갖지 못한 꽃이어요
- 숨은 꽃 / 김혜숙
내 목숨꽃 피었다가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아무런 후회 없이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겨우내 찬바람에 할퀴었던상처투성이에서도봄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듯이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내 마음도 마음껏풀어내었으면 좋겠습니다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한동안 모아두었던그리움도 꽃으로 피워내고 싶습니다행복이 가득한 꽃향기로웃음이 가득한 꽃향기로내가 어디를 가나그대가 뒤쫓아오고내가 어디를 가나그대가 앞서갑니다내 목숨꽃 피었다가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아무런 후회 없이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 내 목숨꽃 지는 날까지 / 용혜원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남아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 꽃씨를 거두며 / 도종환
나의 눈은 낮에는 허술하게 세상을 보고 밤이면 가장 잘 봅니다잠이 들면 꿈속에서 당신을 알아보아요어둠 속이라 해도 내 눈은 빛을 받는 곳으로 향하게 되어요당신의 그림자가 어두움을 드리워도 그것만으로도 그늘을 빛나게 합니다한밤중 깊은 잠에 빠져 장님 같은 눈이 되어도아름다운 당신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여요이럴진대 대낮에 당신을 본다면 내 눈은 얼마나 황홀할까요내가 당신을 보기 전에는 낮은 밤이에요꿈에 당신을 본다면, 밤조차도 밝은 낮이 되어 버리니까요
- 소네트 43 / 윌리엄 셰익스피어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발이 없을지라도 나는 당신 곁에 갈 수 있습니다또한 입이 없어도 나는 당신에게 애원할 수 있습니다내 팔을 꺾어 주십시오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더듬어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내 심장을 멈추어 주십시오나의 뇌가 맥박 칠 것입니다만일 나의 뇌에 불이라도 사른다면나는 나의 피로써 당신을 운반할 것입니다
-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누구였을까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아직도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손가락으로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발짝을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그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나도 그러했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버린 것을 눌러 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저 혼자 삭아가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었다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다 지운저리디 저린 것들이 있을 것이다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굴을 내리닫고침을 삼키듯 목끝까지 올라온 그리움을 삼키고입술 밖을 몇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되가져간 깨알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 끊긴 전화 / 도종환
깊은 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처럼험한 기슭에 꽃 피우길 무서워하지 않는 꽃처럼길 떠나면 산맥 앞에서도 날개짓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그대 절망케 한 것들을 두려워 하지만은 않기로꼼짝 않는 저 절벽에 강한 웃음 하나 던져 두기로산맥 앞에서도 바람 앞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기로
- 다시 떠나는 날 / 도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