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천도와 함께 최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 오늘은 장수왕의 가장 빛나는 한 수! 평양 천도의 그날로 떠나봅니다. Les’s go~!!
413년, 정복왕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합니다. 그리고 즉위한지 15년 되는 날, 장수왕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정을 합니다. 바로 국내성을 떠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곳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합니다.
장수왕 키워드 NO 1. 평양천도
고대 모든 사회 시스템의 중심이었던 도읍지. 도읍지를 옮긴다는 것은 지배층의 반발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평양천도는 큰 무리 없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 이는 일찍이 기획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장수왕의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이 계획했던 것으로 볼 수 있죠.
본격적으로 평양 천도 후, 고구려는 새 시대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고구려 고유문화와 다양한 선진 문물들이 융합하면서 평양만의 독자적인 스똬~일이 탄생합니다.
일명 “평양 스똬~일”! 수산리 벽화 고분에서 한 번 살펴볼까요?
장수왕 키워드 NO 2. 외교
장수왕은 425년부터 491년까지 총 46회에 걸쳐 중국에 조공을 합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조공이라 함은 보통 다른 국가에 조아린다는 느낌이 들지만, 당시 조공은 외교적 수단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조공은 상대국과의 정치, 문화, 군사적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죠.
“조공이라 쓰고, 고수의 외교라 한다” by. 이해영 감독
그런데 이때! 장수왕에게 고민이 하나 생깁니다.
고구려와 대륙의 떠오르는 강자 북위 사이에는 북연이라는 나라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위가 북연을 공격하자, 북연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강대국 북위와 우호관계의 북연 사이에 선 고구려의 상황에서 장수왕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장수왕의 선택은 북연이었습니다. 북위의 계속된 공격에 북연 황제 풍홍이 망명을 요청하자 이를 수락한 것이죠. 장수왕은 북연의 깊이 있는 문물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북연의 거의 모든 핵심 세력이 고구려에 흡수됩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북위! 그들의 입장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명분은 갖고 있었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국력 때문에 감히 공격할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막강한 국력 덕분에 장수왕은 자주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장수왕이 넒은 마음으로 품어준 북연 황제 풍홍은 망명 후 고구려 내에서 북연에서 그랬던 것처럼 황제 행세를 하며 교만하게 행동합니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의 태자를 볼모로 삼아 강력 대응했으나, 풍홍은 반성하기는커녕 송나라에 ‘재망명’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장수왕은 과감하게 풍홍을 죽여버립니다! 송나라와 풍홍이 연결되면 고구려에 불리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죠. 이에 송나라는 고구려에 말 800필을 요구합니다. 송나라가 커지면 자동적으로 북위를 견제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장수왕은 이 요구에 응합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투자’인 셈이죠.
장수왕 키워드 NO 3. 한성함락
북쪽의 외교적 정세를 안정화시킨 후 장수왕의 시선은 남쪽으로 향합니다.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라는 한반도 남부의 정세 변화와 수도 평양을 지키기 위한 방어망 구축이라는 차원에서 장수왕은 한성을 공격합니다. 당시 장수왕의 연세가 무려 82세였다는 사실!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최대 영토를 구축하면서 장수왕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룹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98세. 장수왕은 생을 마감합니다. 이웃나라 북위는 “거기대장군 태부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여 장수왕 사후 특별한 호칭을 내립니다. 북위로서 장수왕에게 최고 예우를 한 것이죠.
장수왕 재위 시절, 주변 여러 국가들에서는 수많은 왕들이 등장했습니다. 장수왕은 당시 최고의 어른이자 시대의 상징이었습니다.
“좋은 왕이 오래 집권하는 건 국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by. 류근 시인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안정적인 사회의 모습을 갖춰나가 고구려 최전성기를 구축한 장수왕. 오늘 <역사저널 그날>과 함께 한 시간동안 찬란했던 고구려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장수왕(고거련, 394~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