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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5/7/12) 게시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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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익명만애 글합작 | 인스티즈

다사다난 일들이 있었지만 마감을 무사히 마쳐준 닝들에게 먼저 감사를 전합니다!

닝들이 열심히 쓴글이니 모두 재밌게 읽어주셨으면합니다!

 

브금이 있는 소설은 브금을 틀고 봐주세요~

혹시 실수가 있었다면 댓글에 달아주시면 고칠게요!

 


 

짝사랑

[디지몬/코시타이]

 

타이치들은 디지몬 세계에서 무사히 돌아온 후 서로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이 금방 현실세계에 적응한다.
그렇게 각자 나이를 먹고 현실에 순응 하게 되면서 친구. 동료를 등한시 해지는 모습이 불만스럽던 타이치는 모두를 모았다.

"뭐야! 왜 다들 안오냐고!!"

Pm. 7시 1분. 전자시계의 회색 전광판이 반짝반짝 나왔다 들어왔다를 반복한다.

띵동.
명랑한 핸드폰 기본 알람음이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렸고 분개하던 태일은 그 소리에 잠시 멈추곤 핸드폰을 열었다.
요즘 학생들이 쓰지 않는 피처폰을 사용하는 모습이 역시 기계치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것 같다.

(미안! 타이치 오빠! 나 지금 브라질에 와있어서!(^-^)v  나중에 봐! 예이! -미미가-)
남미의 근육질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mms로 보내졌다. 밝고 명랑한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한숨을 흘리던 중 바로 다음 메시지가 화면에 뜬다.

(타이치 미안해. 나는 수험생 이잖아. 다음에 보자. -키도 죠)

이 두사람은 어쩔 수 없지.. 싶어 쉬다만 한숨을 마저 내쉰 타이치는 탁 소리나게 폴더를 접어 가볍게 쇼파 위에 던졌다.

"두 사람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들은 왜 안오는데!!"

똑딱똑딱 시간은 흘렀고.
빨간 시계의 네모난 회색 화면에는 49분을 넘어 숫자 50을 나타냈다.
그 사이에 3개의 문자와 하나의 전화가 도착했고 모두 못온다. 미안하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아직 연락이 오지 않는 한사람.
어릴적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실 이 자리를 마련한  나의 최대의 이유.
연락이 아직 오지 않았잖아. 무슨일이 있을거야.억지로 위안하며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잠든 모양이다. 부스스하게 머리를 마구 헝클으며 일어나 어둠속에서 희미한 불빛을  보니 벌써 밤 11시를 지나 2분이다.

핸드폰을 더듬더듬 집어 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갑작스러운 불빛에 괴로워 하며 찡그린다.

부재중 0. 읽지 않은 메세지 0.

괜한 기대였나.. 싶어 실없는 웃음만 흘리다. 이제 가자, 하고 가방 집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보였죠.. 아직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교실 안으로 문이 열리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보인다.

"하아.., 후, 타이치씨.."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힘겹게 몰아 쉬는,  기다리던 그 녀석이 내 눈 앞에 맺혀 보인다.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싶어 눈을 두어번 깜빡 거려 보지만 사라지지 않는 게 아마도, 현실인가보다.

"늦어서 미안해요. 켁.. 후우, 오늘 핸드폰을 깜빡 한 바람에 하아.. 이제야 봤어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호흡을 겨우겨우 죽이며 말을 억지로 이어나가는 모습이..

"뭐야. 어쩐지 너만 연락이 없더라니~ 근데 그래서 그렇게 뛰어온거야?"

새삼스럽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괜히 상기 된 말투를 고치기 어려워 장난치는 듯 한 말투가 흘러 나왔다.

"아니.. 오늘 형 생일이잖아요. 그래서 형 집에서 기다리는데 밤이 늦어서도 안 오고 연락은 안되고. 어디갔는지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빠르게 달려오느라 쿵쾅거리던 심장이 아직 진정이 되지 않은건지 코시로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말을 하는건지 잘 모르는거 같다. 그리고 그 심장병은 전염이 되는건가? 타이치는 그 순간 너무 달리고 싶었다. 아니 달리고 있었다. 코시로의 곁으로-

"너 왜 우냐?"

쿵쾅 거리는 심장 소리가 서로 가까워 질수록 박자가 두근두근 하고 맞춰진다.

울어요? 하고 되 물어 오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타이치가 장난스럽게 그렇지만 진지하게 물었다.

"너 나 좋아하냐?"

-열두시!

시계가 정각을 알린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
동료가 아닌 연인으로서.

"응, 좋아해요. 그러니까 이제 -씨 라고 안불러도 괜찮은 거죠? 좋아하는 사람은 이름으로 부르고 싶으니깐. 응? 타이치?"

 

 

 


[쿠로바스/홍적]애증


“저는 선배가 좋아요.”


너는 언제나 그 말을 시작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


우리 둘만 아는 별장으로 아카시는 나를 불러냈다. 아마도 그의 결혼 소식 때문이겠지…. 아카시 세이쥬로는 한 달 뒤에 결혼한다. 상대는 같은 재벌가의 따님이라고 했던 가…? 남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약간 신경이 쓰였던 것인지 새벽이 다 되어가는 늦은 밤에 날 별장으로 불러냈다. 미소로 날 반갑게 맞이하는 너, 너는 나를 소파에 앉힌 후에야 닫혀있던 입을 떼었다.

 


“선배, 저는 선배를 좋아해요.”

“알아.”

“그렇지만 전 모든 것을 버리고 선배와 사랑의 도피라던가 그런 거 할 수 없어요. 저를 지켜보는 수많은 눈들이 있고 지금 제 위치를 등지고서 선배를 택할 배짱은 없거든요.”

“…역시 그렇겠지.”


아카시는 나와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아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웃으며 나보다는 재산과 지위가 중요하다는 독한 말을 쉽게 던져온다. 애써 무덤덤하게 맞받아쳤지만 그는 나의 대답이 어딘가 맘에 들지 않았던 건지 입꼬리를 내리고 인상을 쓴 채 눈을 감았다. 나는 움직임 없이 그를 쳐다보았고, 다시 눈을 뜬 아카시는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약혼녀와 성대한 축하를 받으면서 결혼식을 올리겠죠. 그녀와 같이 살고 그러다 언젠간 아이도 하나 생기겠죠.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녀에게 마음이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전 예전부터 선배뿐이었는걸요?”


저렇게 생긋 웃으며 맘에 드는 소리만 쏙쏙 골라 말해 사람을 구슬린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유명한 가문의 아드님이고 나이도 찼으니 혼사 문제가 오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때가 되면 물러나야지 혹시라도 그에게 폐가 되지 않게 조용히 사라져야지 하고 수십 번도 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곤 자기를 떠날 수 없게 나를 붙잡는다. 자신은 모든 걸 가질 테니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말한다. 욕심 많은 사람…. 지독한 사람이다.


아무 대답이 없는 내가 약간 불만이었는지 이마를 찡그리며 대답을 하라 툴툴댄다. 대충 알았다고 대답하니 자기딴에는 아직 내가 토라진 것이라 느낀 것이었는지 뭔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계속 절 사랑해 주실 거죠?”

“그러길 바래?”

“당연하죠.”


저한테 남은 건 선배밖에 없으니까. 라고 말을 덧붙인 내 옆에 앉은 아카시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미소는 잃어버리지 않은 채…. 왜 그런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른다. 그저 감으로 느끼는 거지만 가끔씩 짓는 저 미소가 섬뜩할 때가 있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온 인연이지만 꽤 길게 알고 지낸 사이라 자부하지만 지금도 아주 가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에서부터 그렇게 내가 좋다 속삭이면서도 나를 피하는 느낌. 마치 벽을 만드는 것 같았다. 사회를 경험해서 일까? 그는 전보다 많이 변했다.


“아직도 맘 상해 있는 겁니까?”

“아니”

“내가 어떻게 해줘야 기분이 풀리시려나?”

 
그 말을 끝으로 서로의 입에선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카시는 말을 마치자마자 앉아있는 내 위에 올라타 자신의 양손을 내 양볼에 갖다 댄 채 입술을 맞대어왔다. 언제나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사람을 가지고 놀면서 키스할 때만큼은 어서 빨리 자기를 사랑해 달라는 듯이 조급하게 입술을 문댄다. 그의 리드에 응해주자 그는 한 쪽 손으로 내 몸을 훑으며 천천히 쓸어 내려가다 나의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에 약간 움찔거리자 아카시는 내 바지 단추를 풀고는 본격적으로 나의 것을 만져왔다. 처음엔 살짝 툭툭 건드리다 이윽고 한 손으로 감싸 쥐며 위아래로 흔들어댄다. 아카시의 손짓에 내 쪽에서 먼저 안달이나 호흡이 거칠어지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카시는 리드하던 것을 멈추고 내 쪽에서 오는 것을 기다린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늘 이렇게 먼저 달려들어 놓고는 내 쪽에서 안달이 나기 시작하면 행동을 멈춰 버린다. 자신 이외의 것은 생각도 못하게끔 만들어버린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어리광을 받아준다. 내가 달려들어 아카시의 입안을 헤집다 소파에 그를 눕혀 목 언저리를 입술로 지분거리며 입술이 지나간 자리들을 빨갛게 만들면 그제서야 아카시는 양손을 내 볼에 갖다 대고 자신 쪽으로 당겨 서로의 코가 맞닿을 만큼 거리를 좁히고서 나에게 말한다.


“하고 싶어”


++


아카시를 침실로 데려와 서로의 옷을 하나씩 벗겨 내려간다. 이 와중에도 아카시는 집요하게 부풀어 오른 나의 것을 감싸 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카시를 눕히고 몸에 하나씩 자국을 남기며 한 손으론 익숙하게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콘돔과 로션을 꺼낸다.


“흐응…. 하, 아앙….”

“읏! 하아…”


서로의 신음소리가 섞여든다. 아카시는 정신을 못 차리겠는지 침대 시트를 꽉 붙잡고 미간을 좁혔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면서 정신없이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나는 그럴수록 더욱더 집요하게 그가 유독 약해하는 부분만 찌른다. 작은 복수다,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을 즐기는 그를 향한 작은 복수. 내 밑에서 신음을 흘려대는 아카시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들과 함께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 너는 왜 그렇게 변한 건지 내가 미국에 있을 동안 너를 바꿔놓은 것은 무엇인지 하는 그런….


++


중학교 때 농구부 주장과 부주장으로 처음 만났다. 부잣집 도련님 하나가 농구부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콧대 높고 재수 없는데다 제멋대로인 녀석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카시는 그렇게 생각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그에 대한 생각을 정정하고 그를 점점 인정해가고 있을 때 그는 붉어진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며 고백을 했다.


“저 선배를 좋아합니다.”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듯 고백 멘트를 내뱉고 어쩔 줄 몰라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 못 했던 너를 보며 느꼈던 건 일말의 호기심. 남자와 사귀면 어떨까 하는 아주 작은 호기심이 너의 고백을 받아 주라 나에게 말했다. 그 뒤로는 별거 없었다. 주장과 부주장이었으니 당연히 같이 붙어있는 시간이 많았고, 우리 둘 만 있을 적엔 언제나 아카시는 나에게 사랑한다 말해 주었다. 따로 시간을 내면서 데이트 같은 걸 하지 않아도 그는 그저 나와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돈이 나갈 걱정도 없고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적당히 애정표현을 해주면 좋아라 하는 녀석이었으니 솔직히 편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지고 놀진 않았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으나 매력 있는 그였으니 나도 모르게 점점 빠졌더랬다. 그때 즈음이었다 아버지의 상태가 나빠진 시기가. 아버지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중요한 시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나였기에 주장의 자리는 아카시에게 넘겨줬다. 학교가 끝나고 틈틈이 아버지를 뵈러 가느라 아카시와는 잠깐의 인사나 문자 연락이 전부였고, 때 마침 나를 포함한 3학년은 부를 떠나게 되어 그를 만나는 시간이 더 줄었었다.


아버지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고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던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가족 다 같이 미국으로가 아버지를 치료하자며 나에게 말했고, 난 그 의견에 승낙했다. 그리고 졸업식 날 나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감히 사람을 가지고 저울질을 했다. 당시 난 아카시보다는 아버지가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울며 붙잡아 오는 그를 매몰차게 뿌리치고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 제일 마지막으로 들였던 그를 울타리 밖으로 버려버렸다.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고향에 아버지를 안치해 드리고 싶다는 내 의견에 우리 가족은 다시 돌아왔다. 회사를 다니려던 나를 말리며 미국에서 중도 포기했던 학업을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편입한 대학에서 그와 재회했다. 중학교 졸업 때 그를 매몰차게 내친 것이 너무 미안해 다가가길 주저하던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잡아주며 너는 나에게 괜찮다 말했다. 아버지의 소식에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난 그런 너에게 반했다.


++


아카시는 절정에 다다른 것인지 침대 시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떼고 내 목에 양팔을 두른 채 사정했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그를 안아 올려 욕실로 향해 욕조에 그를 앉히고 물을 틀고 나온 후 그와 나의 흔적으로 얼룩진 침대 시트를 걷어내고 새로운 시트를 깔았다. 다시 욕실로 들어가 그를 씻겨주고 나 역시 대충 샤워를 한 뒤 아카시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이미 야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그를 만나서 그런 것인지 포근한 침대에 몸을 뉘이니 잠이 확 몰려와 금세 피곤해졌다. 그런 나를 껴안으며 아카시는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거…. 말해주세요.”

“뭐를.”

“알잖아요, 시치미 떼지 마세요.”
 

대답을 재촉해온다. 그래 해줄게라고 생각하며 입을 떼려다 언뜻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 다시 입술을 붙인다. 그리고 그를 쳐다본다. 그는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 생각해보니 너와 재회한 뒤 너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 말해주지 않았어. 코웃음이 나왔다. 너를 버리고 미국으로 가버렸던 나를 벌주는 건가…? 중학교 때를 떠올린다. 전세가 역전됐다. 하지만 그걸 지금 알아챈들 나는 이미 너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는 닫혔던 입을 열어 너에게 속삭인다.


“…사랑해.”


++


숨소리가 일정하다. 깊게 잠이 든 것 같다. 뭐… 이미 지친 그를 일부러 이곳까지 오게 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 그를 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침대에서 일어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이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나에겐 어머니가 전부였다. 유일한 안식처였다.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육방침에 모든 분야를 혹독하게 교육받아도 어머니께서 나를 보고 웃어 주시는 것에 위안을 삼고 꾹 참고 견뎌왔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난 갈피를 잡지 못 하고 그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꼭두각시 마냥 살았다. 그러다 선배를 만났다. 틀에 갇혀 사는 나와는 다르게 어딘가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 처음엔 존경심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하는 감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에게 고백을 함으로써 교제가 시작됐다. 그가 나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해도 내가 그를 좋아하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 했던 연애였고, 그만큼 소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애정표현도 늘어 갔기에 나와 같은 마음이라 느꼈었다. 이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매 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그는 위독하신 아버지 때문에 주장을 관두었고, 부 활동에 오지 않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와는 짧은 인사와 문자 연락이 전부. 그의 아버지가 나에게서 그를 빼앗아 갔다. 선배는 나에겐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듯 학교가 끝나면 쌩하니 사라졌고, 나는 하염없이 그의 연락을 기다렸었다.


연락이 없는 선배를 만나기 위해 졸업식에 갔다. 선배를 나를 보곤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간 뒤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붙잡는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떠나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야 선배의 진심을 알아챘다. 맞아… 선배는 처음부터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어. 같은 마음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내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던 거야. 나를… 가지고 놀았어. 그걸 지금에서야 떠올리다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길 한복판에서 배를 움켜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그때 사람은 친해지는 게 아니라 구슬려야 한다 생각했다, 옆이 아니라 밑에 두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진심으로 대하면 물로 본다는 것을 알았고 그 뒤로는 내 진심을 알 수 없게 본심을 숨기고 사람을 대하기 시작했다. 나의 울타리 안엔 나 이외의 사람은 들이지 않았다. 더는 사람에게 상처받기 싫었기에 나 자신을 가둬가며 외톨이로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 갔을 무렵 니지무라를 다시 만났다. 내 눈을 피하며 다가오길 주저하는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는, 웃는 가면을 쓰고 그에게 다가가 사정을 들었다.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줬다. 난 그날 선배에게 내가 받았던 상처를 배로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감았던 눈을 뜨고 침대에서 자고 있는 니지무라를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본다.


있죠, 선배는 내 두 번째 안식처였어요.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갈피를 못 잡던 나에게 다가왔던 선배는 너무나도 큰 존재였거든요. …사람의 마음은 정말 간사해서 마음이 동요하고 있을 때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며 이해해 주는 사람을 내 사람이라 생각하게 돼요. 이 사람은 내 편인 것 같고 의지하고 싶고….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다가온 나를 뿌리치기 어려웠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거기서 자고 있잖아, 그렇지? 난 선배를 좋아하긴 하지만 사랑하진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선배는 날 사랑해주세요. 그래야 지금 날 사랑하고 있는 당신은 그때의 내가 느꼈던 감정을 느낄 테니까. …이건 복수예요. 나를 가지고 놀다 버렸던 그 시절의 선배에 대한 복수. 지금의 선배는 참 좋아요, 그리고 너무 미워요. 아마 제 입에서 선배를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걸 알아챈다 한들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 할 거야. 당신은 날 사랑하니까, 내가 당신을 버리지 않는 이상 당신 쪽에서 나를 버리는 일은 절대 없어. 그러니까 선배는 영원히 날 사랑해줘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껴주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고 있는 니지무라의 옆에 누워 그의 품에 안기며 속삭인다.


“저는 선배가 좋아요.”

 

 

 

 

 

[하이큐/다이스가]사랑이 지나가면 (부제:memory in lost time 上)

[남부 후방 지원부 적군의 폭격인한 후퇴]
[남부 후방 지원부 부상자, 사망자 속출]
[남부 후방 지원부, 최초 화학무기 사용피해 사례. 부상자 전원 군병원으로 입원]
[남부 후방 지원부 전원 피해자. 서부에서 긴급 지원부 파견]

 

“거기 신문 있어요. 남부 쪽은 초토화네요.“
“화학 무기라면 부상자들도 생존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을건데..”
“뭐..여기 파견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되나”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여름날 밤.

 

“오늘 불침번 저희니까 나오세요.”
“사와무라는?”
“아까 좀 더 일찍 나가던데, 화장실 들렀다 간다고.”
“야, 빨리 나와 그렇게 밍기적대면서 총질은 어떻게했냐”

 

스무살. 나이에 맞게 청량한 목소리로 상황에 반적인 언어들, 며칠간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얼굴, 흙먼지 잔뜩 묻은 군복. 등딱지처럼 달라붙어 한 몸이 된 총.

사와무라 다이치도 그 무리에 섞여든 다름없는 스무살이다. 밝은 눈과 동료들의 신뢰를 받고있는, 학도병들로 구성된 북부 1사단 대장이다.

 

“사와무라, 적군 동태는?”
“움직이지 않아. 확실히 지친상태야, 남부 쪽으로 지원이 쏠리니 여기 북부는 버린거 같아. 이대로라면 우리가 힘쓰지 않아도 스스로 철수도 가능하겠어”
“네 말대로면 정말 좋겠네. 총질에 익숙해지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긴장은 풀지마, 저들도 최후의 수단이란게 존재 할 거니까. 적군이 움직이는 순간 우리가 바로 쳐들어간다.”
“사와무라 너도 꽤 담담해졌네.”

 

담담해질 수 밖에, 벌써 일년이 지나온 시점이니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게, 그래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루라도 빨리 말이야”
“모두가 동의할거다”
“돌아가면 그 싫은 학교가 좋아질 거 같으니까”

 

하며 소소한 농담으로 더부룩한 마음을 달래는 소년들이다. 1년 전은 고등학생. 한참 일자리와 대입의 전쟁터로 입장하려던 봄, 한발의 총성과 함께 일제히 다른 전쟁터로 모여들었다. 그 후로 스무살. 그 청량함은 잊지 않은채로 이 전쟁이 끝나길 애원한다.

 

불침번은 해도해도 익숙해 지지 않는 법. 한명이 졸기 시작하면 돌아가며 졸기 시작한다. 고개가 이리 꺽이고 저리 제쳐지고. 가만히 보고있으면 웃긴 광경이다. 교실에서만 보던 풍경이 풀내음 가득한 전쟁터에도 펼쳐지고 있으니, 여기서 가만히 있을 소년들이 아니지. 발밑 축축한 흙을 손가락에 집어 거무죽죽한 얼굴 위로 더 까만 선을 그어준다. 킥킥 거리는 소리는 덤. 그러다가도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바로 총구를 겨누는 걸 보면 긴장은 풀지 않았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워내는 자신들의 오락을 즐기는 모습. 다들 즐거워보인다. 제 얼굴에 검은 주름이 생긴지도 모르는 채. 아마 처음보는 사람이 말한다면 십중팔구 바보라는 대답일거다. 바보들.
그리고 그 바보들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 풋풋ㅎ...ㅍ..풋풋하다..!

 

“사와무라 너 두고온 애인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너 그렇게 안생겨서 할 건 다 하고 다닌다?”
“원래 저렇게 생긴 애들이 할 건 더 하는거야 멍청이들아”
“남의 연애사에 신경꺼 머저리들아”
“이야, 대장 애인이랑 첫키스는 했어요?”
“첫키스는 무슨 애인도 아니거든”
“에이, 그럼 뭐야, 이 상황에 밀당 중인겁니까? 편지로 알콩달콩?”
“너네 아들내미 총알로 날려보내고 싶냐?”
“편지에 이름 써 있던데, 뭔지 그...스가와라...스가와라 였나”
“어쭈, 입 안다물어?”
“아- 스가와라씨, 예쁘냐? 귀여워? 같은 학교?”
“이것들이 단체로 고간에 피터지고싶나. 확 그냥-”

 

우어어-

사와무라가 정강이를 차려는듯 발을 휘둘자 다들 재밌다는 듯 웃으며 적당히 피해주고 맞아준다.

 

“빨리 고백해라, 언제 돌아갈 줄 알고. 오늘 편지로 답장하면서 질러버려”
“남이사, 내가 알아서 한다. 고개나 쳐들고 앞이나봐”
“대장, 파이팅!”
“아 진짜 이것들을”

 

어두운 밤하늘 속 수억개의 별들을 각기 다른 소년들이 바라보며 자신의 청춘에 대해 얘기한다. 그 별들은 누구에게나 다정한 빛이기에, 그 빛을 만들어주는 태양이 새로이 뜨는 순간. 청춘은 재개된다.

까만색에서 보랏빛으로 서서히 동이 틀 시간. 꾸벅거리며 흔들리는 고개가

“탕“

날아갔다.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대는 비상벨소리에 모두의 눈이 번쩍 뜨인다. 아까 전 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학도병 한 명을 제외한 모두. 침착함을 유지하며 메가폰을 잡고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다.

 

“적진은 아래에 있다. 사수 옆으로 수류탄배치 대기.”

 

고지 아래에서 불똥이 튀듯 올라오는 총알. 학도병들의 빳빳한 초록색 옷이 진하게 물들기 시작한다.

 

“연막탄 투척. 사수들은 제자리에서 지속하라”

 

치익, 소리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고지 아래로 연기들이 흩뿌려진다. 당황한듯 거세던 총알세례가 잠시 멈칫한다.

 

“수류탄 투척. 사수 위치 바꿔 공격 대기. B-1으로 이동”

 

쌓아둔 박스 뒤로 총알을 피하며 이동하는 사수들의 귀에 다발적으로 굉음이 들리며 하얀 연기 속 붉은 실루엣이 휘날린다. 사수들이 차지하고 있던 길목을 비우고 양쪽 풀 숲 사이로 총구들이 튀어나와 있다.

 

“신호에 공격 개시. 저격수는 최고지로 이동”

 

연기가 걷어지고 적진에는 누군가의 팔다리가 뒹군다. 적군이 그 속을 뚫고 밟으며 절벽을 타고 올라와 박스들을 넘으며 기세 좋게 진군하려는 찰나

 

“B-1 공격 개시”

 

양 옆으로 드리워진 총구에서 발사되는 총알에 무참히 쓰러져간다. 순식간에 선혈이 흐르는 메마른 땅위로 최근접전이 시작된다.

 

“저격수 3초 이내로 공격 개시. 폭탄 설치반은 대장을 따라 열린 통로 이용, 적진으로 침투해 중심을 노린다. 전군 최선을 바란다.”

 

통신 끝. 소리와 함께 적진의 후방과 연결된 열린 길의 입구로 이동한다. 모여 있는 폭탄설치반의 앞으로 조용하게 신속한 발걸음으로 적의 중심으로 향한다. 근접전을 위한 총력인지 비어있는 후방으로 진입완료. 무너지는 막사 사이로 드러난 빨간 깃발의 중심요새. 주변은 사수들로 수비중이다.

 

“나를 포함한 사수들이 길을 만든다. 5초내로 신속히 폭탄 설치후 선후퇴하도록. 3초후 개시한다”
3,2,1

 

탕.탕.타당- 선공격으로 인한 적군 사수 2명 사망. 그 둘의 자리로 신속하게 이동 주변의 사수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비어진 길로 설치반 이동. 안전핀을 해제한 폭탄을 요새의 깃발을 향해 투척. 설치반 후퇴. 뒤이어 사수들이 엄호하며 뒤 따른다. 몇 초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요새는 불타고 안에는 사람 몇몇이 완장을 단 채로 잠들어있다. 전의를 상실한 듯한 눈빛의 적군. 이미 총구는 땅을 향한지 오래다.

 

“응답바람. 응답바람. B구역 전투 종료. 적군 항복”
“응답, 적진 침투 전투 종료. 적군 항복. 전투태세 유지하며 돌아갈 때까지 대기”

 

함정일지도 모르는 동태에 포로들을 데려가며 주변을 향한 총구는 거두지 않는다. B구역 복귀. 살아남은 적군은 바닥에 꿇고 무장해제상태다. 데리고 온 포로들도 마찬가지. 적군이 완전히 항복 선언을 하며 전투모를 벗는다. 이쪽도 그제야 철수를 시작한다.

 

“북부 1사단 전투 종료. 적군 항복. 철수 지원 부탁바랍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갑작스러운 항복. 마치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이 미친듯이 몸부림 쳤다가 포기해 버리는 적군에 약간의 연민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연민은 아주 잠깐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간다. 그 보다 더 연민의 대상인 전우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철수 지원 온다니까 내일 중으로 본부로 귀환 요청이네요.”
“본부로?”
“본부로? 뭐야, 북부도 상황 종료인가. 갑자기 본부라니”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올거면 또 연락이 오겠죠. 자, 어서 자기들 짐 제대로 싸요. 내일 아침에 우리 대장을 안 기다려줄 거 같으니까."
"나 그렇게 인정 없는 놈 아닌데-“

 

장난스레 내 이야기를 꺼냈다가 진짜로 등장한 주인공 때문에 다들 크게 웃는다. 별거 아닌 일인데도. 분명 오늘 불의로 인해 사망한 전우라던가, 전쟁의 불안감이라던가. 이 모든 걸 떨쳐내려 몸부림치는 것이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 웃어보이며. 전쟁 직전의 두려움보다, 직후의 피비린내 나는 그 상태가 더 무서운 법이기에. 그걸 알고 대장이라는 직책에 맞게 전우들을 있는 힘껏 달래는 중이다.

다시 해가 가라앉은 어두운 밤. 포로들은 간이 수용소에. 오늘도 전우들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샌다.

 

“몇개월만의 서울이냐. 가면 뭐 할거냐? 전쟁만 완전히 끝났다면 이리저리 돌아다녀보고 싶은데”
“시청 가까이 우리집이나 한 번 가보려고. 똘똘이 뒷마당에 혼자 두고 왔는데 잘 있으련지..”
“충견이네 혼자 집도 지키고. 난 학교나 가볼련다. 오랜만에 책상 좀 앉아 봐야지. 벌써 손에 글씨 쓰는 방법 잊어버리기 직전이니까”
“그냥 초등학교로 가라”
“뱃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 이 자식들이”
“여기 기저귀 좀 가져다줘라!”

 

자신의 침낭을 옆 전우에게 들어 던진다. 맞아도 좋다며 낄낄거리며 웃는데 이럴 때는 영락 없는 순진한 고등학생이다. 한 곳으로 머리를 모아 한참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오랜 대치상태가 끝난 탓인듯 긴장이 풀리며 자신들도 모르게 하나씩 잠이 들어 골아 떨어진다.

 

촛불의 불빛에 의지해 하얀 종이와 오래된 만년필 하나. 약간 촉이 휜 듯 하지만 글씨는 무리없이 슥슥 잘 써져 내려간다. 전쟁 중 멀리 떨어진 소중한 이들에게 보내는 뻔하디 뻔한 편지. 잘 지내고 있냐, 난 잘 지낸다. 다치지는 않았고. 가족들은 무사하냐. 빨리 다시 봤으면 좋겠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하며 모든 마음을 종이 한 장에 쏟아 낸다. 받는 사람, 스가와라 코시, 남부 후방 지원부 의료부대 소속으로.

 

밤이 걷혔다.
철수지원군도 도착했다. 포로들을 차에 태우고 병정들도 차에 오른다. 어딘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랜 전쟁터를 떠나는 마음이 다들 그렇겠지만.

서울까지 차로 이동하는게 2시간. 가는 동안 곳곳에서 검문을 받는다. 작은 시골까지도 길이 뚫려있으면 검문을 받는다. 하지만 웬일인지 가는 길에 보초들이 안 서있다. 하지만 오랜 전쟁에 지친 학도병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서울로 가는 길이고. 왜 안 서있는지는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중앙에서 긴급 통신. 바로 응답바람. 응답바람”

 

포장되지 않은 길을 차가 덜쿵거리며 가는 와중에 차내에 배치한 무전기에서 신호음이 울리더니 긴급통신. 하지만 왠지 모르게 목소리에서는 그다지 긴급함이 흐르지 않는다. 굳이 느낌을 말하자면.. 뭔가 가벼운느낌. 자신의 어머니에게 통화를 하듯 편한 느낌이다.

 

“북부 1사단 철수 차량 응답”
“어제자 8월 2일부로 적군연합 항복, 전쟁종료를 선포. 다시 한 번 전달합니다. 어제자 8월 2일부로 적군 연합 항복, 전쟁종료를 선포합니다.”
“북부 1사단 철수 차량 전달 완료 받았습니다.”

 

전쟁종료를 선포합니다. 전쟁종료를 선포합니다.
덜컹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전기의 치직거리는 소리에 전달된 편안한 목소리.
내용마저 편안할 줄이야.

 

와아-!
기쁨에 젖어 환호를 부르며 서로를 부둥켜 안는 전우들, 안도감에 벅차오르는지 눈물을 흘리는 전우들. 자신의 가족들,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행복에 젖은 듯한 웃는 얼굴의 전우까지. 나는 아마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있는 듯하다.

서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며 이곳에서 끝나지 않을 인연이라며 서울에 도착할 때 까지 진심어린 말들을 전달한다.

뭔가 더 맑은듯 한 서울의 하늘. 오랜만이다. 시청 안, 말은 시청이지 거의 전쟁 중에는 중앙기지로 사용했던 곳. 그 안으로 들어와 마지막 대장의 임무를 수행한다.

 

“북부 학도 제 1사단 대장, 사와무라 다이치. 어제자 8월 2일 오후 1시 이후 적군 항복. 철수 지원을 받아 중앙으로 복귀 명령을 이행. 오늘 8월 3일 오전 10시 임무완수. 위 상황을 보고 드립니다.”

 

수고했다. 라는 말과 함께 훈장수여. 대장의 직책은 어깨에서 내려간다. 마지막으로 외친 충성과 함께 우리들의 전쟁은 종료되었다.

벌써 시청 앞으로 모여 전쟁터에서 돌아 올 아들들을 찾는 어머니. 애인을 찾는 여인들. 한명한명 나의 전우들도 달려가 그들에게 안긴다. 눈물과 웃음으로 반겨주는 사람들 역시 감동적이다. 이에 맞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모두가 기다리는 곳으로 그들도 날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시장에서 좀 더 안으로, 붉고 푸른 지붕들이 모여있는 곳. 동장님도 돌아 오셨는지 벌써 가족들과 모여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고 있다.

 

“사와무라! 건강히 돌아왔구나!”

 

아, 수선가게 아주머니. 옆엔 어린 아들이다. 이젠 17살이구나. 전쟁에서 막 돌아온 건지 군복과 벌써 한바탕 울어 버린건지 퉁퉁 부은 눈으로 날 보며 인사를 건네 준다.

 

“안녕하세요. 히나타 너도 건강하구나 다행이야. 다들 모이셨나보네요. 얼른 들어가세요!”
“그래 너도 어머니랑 아버지 기다리신다. 얼른 들어가봐라”

 

꾸벅 인사를 드리고 몇걸음 더 발을 옮긴다.

 

“사와무라! 집에 어머니 목 빠지시겠다 얼른 얼굴 비춰라!”

 

옆 집 아키테루형이다. 얼굴을 보니 건강한 듯, 행복해 보인다. 뒤로는 아줌마 아저씨도..어디선가 집이 만병통치약이라던데. 맞는 말이다.

아, 드디어 보인다. 그 만병통치약, 푸른지붕. 마당에는 장독대들이 즐비해있는, 우리집. 대문은 열려있다. 그리고 그 뒤엔..

 

“어머니! 아버지!”

 

역시 만병통치약. 그렇게 엄하셨던 아버지도 날 보며 눈물을 흘리시고, 어머니는 두말 할 것도 없다. 벌써 울고 계셨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얼굴 살 다 없어 졌네 우리 아들..잘생긴 얼굴이 다 어디로 간 거야. 배는 안고프고? 아침부터 오느라 굶고 왔을 거 아니야. 얼른 밥먹자 아들. 엄마가 너 좋아하는 김치찌개도 맛있게 해 놨어”

 

내 얼굴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쓰다듬고 만지고 꼭 안아주시며 그 굳은살 박힌 손으로 날 부드럽게 치유해 주신다. 눈가가 붉어지신 아버지도 내 어깨를 꼭 잡아주시며 온기를 더해주신다.

 

“네, 얼른 먹어요. 봐요. 저 멀쩡해요 나라에서 장하다고 훈장도 주고. 아들 열심히 하고 왔어요”

 

대견하다, 대견해
하며 날 끌어안아 주시는 두 분 덕분에 전쟁통에서의 슬픔은 지웠다. 점심 쯤 돼서야 숟가락을 들었다. 여름날 누워자던 마루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세사람이 모여앉아 서로를 사랑해주며 또 한번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다.

 

어머니, 아버지도 오늘 새벽에 도착하셨다고 한다. 고단한 하루이셨을 터. 저녁 8시도 안되었는데 대충 정리한 안방에 누워 달콤한 꿈을 꾸시는 듯 두 분 다 편안한 표정으로 잠드셨다.

 

오랜만에 군복을 벗고, 몸도 깨끗이 씻고. 아, 오랜만에 아버지와 같이 씻었다. 이런 적 8살때가 끝이 였는데. 튼, 옷을 갈아입고 마을 골목으로 나왔다. 이집 저집 역시 이야기소리가 단란하다. 길을 따라 야채가게의 모퉁이를 돌면 붉은 지붕이 보인다. 대문 앞에는 여름풀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다. 가주는 스가와라 젠조. 아들인 스가와라 코시는 내 절친한 친구다. 그와 동시에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철컹철컹.
쇠문을 두드리는 소리. 불은 켜져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흔들어 보았다. 역시 최후방에서 올라 오느라 늦는건가. 부모님도 같이 가셨다고 들었는데..
내일 오기로 했다. 오늘 모든 지역으로 선포되었다고 했으니 늦어도 내일 오후경에는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새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도 여러 이웃들을 만났다. 역시 모두 밝은 분위기이다. 적어도 우리 마을은 부상자나 사망자가 없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정말로. 스가와라도 건강히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그 사이 천식이 더 심해지진 않았을까. 한 편으론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근데 아마 괜찮을 거다. 마지막 편지도 잘 전달 되었을테니.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눈을 붙이고 고단한 밤을 정리한다.

 

“얘, 다이치 일어나 밥 먹어라. 그렇게 게을러져서야 또 학교는 어떻게 다닐려고!”

 

와, 하루만에 어머니 잔소리 복귀시다. 싫은 건 아니지만. 오히려 좋다. 아버지는 벌써 밥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계신다. 전쟁종료 후 전국 각지의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다. 벌써 다 읽으신 건지 옆 자리에 놓으시더니 어머니가 내온 반찬들과 찌개를 떠 먼저 한 숟가락 드신다. 뒤이어 나도 먹기 시작한다. 역시 맛있다. 가히 전투 보급 식량과는 비교가 못된다. 아니 비교하는 게 이상한거다.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신다. 깨끗이 비운 밥그릇을 내 보이며 어머니께 잘 먹었다고 인사드린 후. 아버지를 도와 마당정리와 안방정리를 끝내니. 시간은 오전 9시..어머니 얼마나 일찍 깨운 거 에요..

 

뭐,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친구들이나 보러 시장 쪽으로 나가보자. 안방에 계신 아버지, 주방에 계신 어머니께 나갔다 온다고 말씀드리고 대문을 나서 길을 따라 쭉 걸어 나간다. 항상 모여 놀았던 정육점 뒤 공터. 쓰레기장 문을 넘어 철문 하나를 더 지나면.

역시.

 

“다이치!”
“대장님 오셨다 대장님”
“야야, 일렬로 서라 인사올려야지”
“시끄러 바보들아 대장한테 맞고싶냐. 확”

 

전쟁통에 갔다온게 맞는 건지 여전히 개구지게 짖궂은 장난을 걸어오며 반기는 녀석들. 오랜 친구들답다. 모두가 모였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없고 죽어서 돌아온 사람도 없다.

 

“사와무라, 최전방은 어땠냐? 총알이 막 튀어다녀?”
“튀어다니면 내가 살아있겠냐 자식아”
“넌 그럼 적군하고 완전 대치였을 거 아니야...나랑 켄지는 무기 지원대대라 적군 얼굴도 못봤어”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그것들 눈이 새빨개가지고..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진짜 전쟁에 미쳐버린 인간들 같았어. 으..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야.”
“너도 대단하다 그렇게 있으면서 안미치고 돌아왔네?”
“진짜 턱주가리를 찢어버릴까”

 

언행도 서슴없이 하는 그들이지만, 역시 좋다. 행복하다. 전우들도 지금쯤 다들 친구들 가족들과 모여 이러고 있겠지. 나중에 꼭 만났으면 좋겠다.

 

“시간 금방가네. 전쟁터에서는 1분이 1년같았는데.”
“벌써 1시야? 슬슬 배고픈데 린네 국수나 먹으러가자. 바로 어제 밤부터 가게 문 여시던데. 모두 잘들 돌아왔다고 얼른 먹으러 오라고 하시네”
“정말? 그 국수 진짜 먹고 싶었는데..아 다이치 너도 같이가자 아저씨랑 아줌마한테는 말 하고 나온거지?”
“어어, 가는 길에 스가네도 들리자. 어제 아직 안온 거 같던데. 지금쯤이면 와 있지 않을까싶네.”

 

스가.
단 두글자에 뭔가 모르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기분이다. 왜지. 불길하게. 왜 다들 얼굴이 굳어지는 건데.

 

“나중에 같이 가자. 스가 오늘 왔으면 피곤할 거 아니야. 푹 쉬어야지”

어색하다. 말투가. 뭘 숨기는데

“그래, 나중에 같이 가.. 부모님하고 있을 시간도 줘야지..”

뭐야, 원래 다들 스가와라도 잘 챙겼잔아. 누구보다 먼저 보러가자고 해야 할 애들이 왜 이러는 건데.

“그래도 스가 얼굴이라도 보고 가자. 걔도 우리 보고싶어 할 거 아니야”

“그냥 가자 다이치..”

 

아, 싫다 이런느낌. 불안하다. 미칠듯이 불안하다. 원래 이런 소리를 할 애들이 아니다. 분명 그래 스가도 빼면 안되지 하며 달려갔을 녀석들이다. 거기에 동화된 걸까 스가에게 찾아가기 두렵다..없으면 어떡하지. 아직 안왔ㅇ..아니 영영 안오ㅁ...

 

“다이치. 뭐해 혼자 멍때리고. 얼른 가자 애들 배고프다고 징징댄다”
“ㅇ...어..”

 

잘 오고 있을거다..괜찮을거다. 맘 속으로 수백번 되뇌이면서 길을 걸었다. 국수가게를 가려면 스가와라 집 앞을 지나친다. 인기척이 없다. 문도 어제와 그대로다. 오늘 밤에 올거다..꼭 올거다.

 

“모두들 왔구나. 어제 밤에는 아무도 안와서 조금은 섭섭했다 아줌마?”
“그래서 오늘 다 같이 왔잔아요. 국수 곱빼기로 국물 많이요!”
“오냐. 아, 코시는 좀 괜찮니? 일주일 전에 실려 온 후로 병원에만 갇혀 지내ㄷ.....ㅇ..어머 사와무라도 왔구나..하..하하 아줌마가 쓸데 없는 얘기를 했지? 자 얼른 앉아 배고프지 다들? 금방 내어줄게-”

 

아하. 그렇게 다들 표정이 굳어있던 이유가 이거구나. 병원에 실려간 스가와라 코시. 내게는 죽어도 얘기하기 싫었나 보네..?

 

“어디병원..”
“ㅅ..사와무라..”
“말해. 어디병원”
“스가 많이 아프기도 하고..힘들ㄱ..”
“어디냐고!!!!”
“서울종합의료워...”
“다이치!!”

 

실려왔다니? 일주일전에? 이미 왔던 거 잔아. 누구보다 일찍 와 있었잔아..많이 아프다니? 천식이 더 심해진건가? 지원부라 적군과의 충돌도 없었을건데

걸어서 30분인 거리다. 서울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었다. 병원이 눈앞이다 환자들이 많은지 병원 앞에만 북적거린다. 신문 거치대..신문... 눈에 보이는 신문 중 아무거나 펼쳐들어 읽어내려간다. 남부...남부..남부...

 

[남부 후방 지원부 적군의 폭격인한 후퇴]
[남부 후방 지원부 부상자, 사망자 속출]
[남부 후방 지원부, 최초 화학무기 사용피해 사례. 부상자 전원 군병원으로 입원]

 

종이는 볼품없이 구겨지고 눈물이 나올려고 해도 나오지 않는다.
살아만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살아만 있었으면 좋겠다.

 

간절한 소망으로 빌고 또 빌며 사람들에게 부딪히며 병원의 문을 열었다. 숨을 뱉어내며 눈 앞에 바로 보이는 칠판.

군인 중환자실 2층. 남부 지원군 205~208호 사용. 그 외 201호~207호

오른쪽계단은 사람이 많다. 왼쪽 계단을 한칸한칸 올라가며 스가와라의 얼굴을 떠올린다. 회색머리, 예쁜 눈, 그 아래 눈물점 작은 입술, 하얀 얼굴..

쿵.

앞사람과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드리려하는ㄷ....회색 눈동자,나보다 약간 작은 키,다정한 목소리...스가...스가와라...

 

“스가와라...스가..스가, 많이 다친거야? 어디, 어디야? 많이 나아졌어? 잘 걷고 있잔아 천식은 천식은 괜찮아? 약은 제때 잘 챙겨 먹은거고? 병원에서 뭐라고 해? 언제 퇴ㅇ...”

“저기..저기요. 절 기억해주시고 걱정해주셔서 정말 고마운데..죄송하지만..진심으로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성함이 어떻게되냐니. 사와무라 다이치. 몇 년 동안 수백번 수천번을 말하고 썼을 이름.

 

“스가..장난 칠 상황 아니잔아 지금. 몇 년 동안 같이 지냈잔아. 우리 같은 학교였고..아버지들도 서로 친하지고...또..”

“그게....죄송해요. 병원에서는 기억상실이라고 하는데.. 저희가 전에 많이 친했던 사이였나보네요. 저 그렇게 나쁘게 살지는 않았나봐요. 이런 분들이 꽤 많이 찾아 오시거든요.”

잘못들은 거겠지?

“그래서 성함이...?”

 

이미 알고 있잔아 스가..내 이름...

 

“사와무라...다이치..”

 

대답 안해줘도 나와야 하는 거 잔아?

 

“아, 사와무라씨군요. 감사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와 주시고. 이런 모습 힘드시면 굳이 앞으로는 발걸음 안하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기억은 사라졌고. 저로써는 아쉬울 것 없는 상황이니까요”

 

 

 

.
.
.
.


“사와무라 괜찮을까..”
“스가 우리도 기억 못하는데..”
“충격 클 거야. 우리도 힘든데”
“어떡하냐..”
 "살아있어도. 이건 너무 가혹한데.."


 

 


 

[다이에이/미사와]lovers

 

 

사람들 수다소리. 장사소리. 아이들 웃고 우는소리. 개 짓는 소리등등 시끌벅적거리기만 하고 별 다른 일이 없는 시장. 그 시장 가운데에서는 마치 하늘에 있는 구름을 옷감 삼아 만든 것 같은 때깔고운 한복을 입은 한 남자,미유키 카즈야가 어슬렁 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이 입은 한복이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허전한 손으로 한복을 어루만졌다. 남자는 그런 자신의 허전해 하고있는 손에게 뭔가를 집어줘야겠다는 생각에 시장 골목 한 켠에 가지각색에 부채를 펼쳐 놓고 팔고있는 가게로 갔다. 일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남자 옆에서 부채를 고르던 한 여인이 부채를 고르던 손을 뒤로 옮기더니 여인의 엉덩이에 붙은 우락부락한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 우락부락한 손의 주인인 남자가 순간 당황하였다.

 


"꽃을 둔 나비 옆에 감히 벌레가 설라하다니....,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디서 진딧물이 잔뜩 묻은 손으로 내 몸에 그 더러운 손을 얹을려하는게냐!"

 


얼굴은 천으로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여인의 말투, 행동들은 그 여인의 얼굴이 귀티가 흐른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런 여인의 말과 행동에 우락부락한 손을 가진 남자는 당황하며 그 장소를 벗어났다. 여인의 그 말과 행동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론 미유키 카즈야 까지. 그때 귀티나는 여인 옆으로 여인보다는 아름답지는 않지만 왠만한 여자들보다 아름다운 그녀의 종이 뛰어왔다. 여인은 종을 찾았다는 듯 종에게 얼굴을 돌려 입을 열었다.

 


"에이쥰 어디갔다..."

 


"아가씨. 마님께서 걱정하십니다. 어여 돌아가야됩니다"

 


여인은 어쩔 수 없단듯이 그 여자를 따라 갈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 두 여인네 모습을 본 미유키 카즈야는 자기네 나라에서는 보지 못 한 조선 여인네들한테 뭔가에 홀린 듯 따라갔다. 얼마나 따라걸었을까. 여인네들은 열려있는 대문으로 자신네 앞뜰로 들어섰다. 미유키 카즈야 또한 그 대문으로 앞뜰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미유키 카즈야 바로 뒤에서 살벌한 기운이 감싸돌았다. 그에 반응한 그는 몸을 돌리자 여인의 종이 그에게 칼을 겨누었다.

 


"뭣 하는 놈이냐.. 뭔 놈이길래 우리 아가씨에게 눈독들이려 하는 것이냐"

 


미유키 카즈야는 그런 종을 훑어보았다. 칼을 잡는 자세. 얼굴,목,팔에 있는 흉터. 그 하나하나가 여인이라 치기에는 너무 과하다 싶었다. 종이 점점 다가오며 칼을 겨눌자 날카롭게 선 칼이 목에 닿았다. 미유키 카즈야 또한 그런 종에 맞서 칼을 집어들었다. 조선에서는 다시는 안꺼내들려하던 칼이였는데 이런 조그만 여인네때문에 칼을 집어들다니. 미유키 카즈야는 잠시 웃어보였다. 종은 그런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 듯이 먼저 칼을 올려 싸우려 들었다. 미유키 카즈야 또한 칼을 들어 싸우기 시작했다. 종의 칼을 다루는 기술들. 정교하게 파고드는 칼끝이 여자의 몸. 심지어 남자의 몸을 뛰어넘는 느낌이였다. 끝을 맺을 수 없는 칼싸움에 잠시 두 사람은 마주보고 멈춰섰다.


순간의 정적.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 옆에서 볍씨를 쪼아먹는 참새. 그리고 뒷뜰 헛간에서 우는 소 소리 뿐이였다. 긴 정적 끝에 입을 연 건 미유키 카즈야였다.

 


"펄럭거리는 치마를 입어서 단순히 칼을 다룰 줄 아는 여인네로 알았는데. 여인네 몸이 아니구나. 그 검술을 보아하니 이런 곳에서 여인네 옷을 입고 종 노릇을 하는게 아니라 왕 옆에서 호위무사라도 해야 어울리는 사내놈인데 왜 여인네 옷을 입고 그러고 있는게냐"

 


"니 놈이 알빠가 아니다. 너야말로 우리 아가씨를 눈독 들이는 이유가 뭐냐?"

 


미유키 카즈야는 그저 웃어보였다. 그 부챗가게에서 만난 여인네에게 눈독을 들였던 것은 사실이였다. 허나 지금은 그 여인네보다 그 여인네 옆에서 성별을 숨긴 채 여인네 종 노릇을 하고 있는 사와무라 에이쥰에게 더 관심이 가져졌다. 남자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기다란 머리카락. 한 듯 안한 듯한 분칠. 그렇다고 여자라고 보기에는 옷으로 가린다고 가렸지만 가려지지않는 온 몸의 상처. 칼을 다루는 솜씨. 외형은 여자였지만 본모습은 사내놈들보다 뛰어난 사내자식이였다. 미유키 카즈야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여인의 모습으로 계속 살아갈테면 이런 곳에서 누추한 종보다는 나한테 시집을 오는건 어떠느냐? 난 니가 정말로 마음에 든다."

 


"그럴 생각 없다. 여기서 지금 그냥 나가던지 아니면 목을 내준 다음 나가던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

 


"그럼 사와무라. 내일 다시 만나러 오겠다."

 


미유키는 그런 반응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사와무라를 등 지고서는 대문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해는 밝게 빛나고 있었으며 미유키 그림자는 대문 쪽으로 더 길게 새겨졌다.

 

 


-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비라서 그런지 비가 내린 다음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사와무라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여인네의 종 노릇을 하며 자신의 성별을 숨겼고 미유키는 그런 사와무라를 담벼락 뒤에서 쳐다보았다. 사와무라 또한 그런 그를 의식하여 담벼락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미유키는 그날 밤까지 사와무라를 만나려고 온갖 수를 써봤지만 끝내 담벼락에서 계속 사와무라를 보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을 넘어 끝내 미유키가 왜로 돌아가야 될 날이 머지않게 된 날까지 미유키는 자기자신도 뭔 고집인지도 모른 채 사와무라와 얘기를 하려고 하였다. 딱히 할 얘기도 없으면서 얘기하고만 싶었다. 무조건 사와무라를 다시 보고싶었다. 그 날도 저번과 다름없이 겨울비가 눈이 섞여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사와무라도 그 외에 사람들도 담벼락이 있는 앞뜰로 나오지 않았다.

 


"빨리 의원을 부르거라! 빨리!"

 

여자가 방안에서 고함을 지르자, 그에 놀란 종은 대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미유키또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종을 보고 놀라 나무 뒤 로 숨었다. 종은 숨은 미유키를 보고서는 다급한 듯 말문을 열었다.

 

"저 혹시 이 근처 어딜가야 의원이 있는지 아십니까? 저희 도련님께서 굉장히 아프셔서 그런데. 제가 올라온지 얼마 안되가지고 이 근처에 대해 잘 알지 몰라서....혹시 아십니까?"

 

"...실례가 안된다면, 이 내가 봐도 괜찮겠나?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렸을 때 부터 의서를 정독한 터라."

 

미유키 말에 종은 여쭈어보겠다고 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미유키는 그 간 도대체 이 집안에 도련님이 누군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여기를 어슬렁 댄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이 간 때깔고운 남정네는 본 적이 없는데 어찌 하여 한번 본 적이 없던건지. 그 때 종은 미유키를 들어오라고 손짓 하였다.

 

"어제 밤부터 도련님께서 열이 나기 시작하는데 약이란 약은 다 다려서 마시게 했는데.. 아직까지 이 모양이시니..."

 

"....!"

 

종에 말을 듣고 '도련님'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보니. 낯익은 사내자식이 누워있었다. 여인네도 사내자식도 아닌 자식. 이때까지 미유키가 그렇게 말을 걸려고 기다렸던 그 사내자식이 예전까지에 곱디 고운 여인네 모습은 어디 갔는지 홀로 몸져 누워있었다. 사와무라의 본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인지라 미유키도 내심 떨렸었다. 여인네로 분칠을 했을때도 이쁘긴 했지만 남정네 모습에서도 여인네 못지않은 아름다움이 묻어나다니. 미유키가 이때까지 떨렸던 이유가 이 곳에 있었던거 같다.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다가가 이마를 만졌다. 이마가 불덩이 처럼 뜨겁자,미유키는 사와무라가 입고있는 옷을 하나 둘 씩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미유키는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종들 보고 나가라고 손짓하였고,여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 나갔다.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몸을 정성들여 닦아내기 시작했다. 사와무라 몸에 미유키 손이 닿자 몸이 이에 반응하여 꿈틀거렸다. 계속해서 손이 몸에 닿자 사와무라가 뒤척이며 일어났다. 미유키는 그런 사와무라에게 웃어보이고선 계속해서 몸을 닦아냈다. 미유키가 아랫도리마저 닦아낼려고 아래 걸친 천 쪼가리를 잡아 벗기려했다. 사와무라는 그에 놀라 몸을 뒤척였고, 미유키를 쏘어 보았다. 그에 아랑곳 않고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가리고 있던 마지막 천 마저 벗겨냈다. 사와무라는 끝내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사와무라...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냐....어째서..."

 

"...너가 부챗가게에서 본 그 아이는 어렸을 적에 남자들로 인해 환양했던 아이다. 그런 아이가 어찌 사내자식들을 좋아 할 수 있겠느냐...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누이가 그때 느꼈을 수치심들은 얼마나 컸을까. 그런 누이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이미 누이는 남자들을 괴물로 보기 시작했고,나 또한 그 놈들과 같은 무리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다. 내가 사랑한 누이가 어떻게서라도 내 곁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거세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렇게 미유키는 사와무라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사와무라는 그런 미유키를 보고 동정하지 말란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사와무라의 눈빛에 미유키는 졌단 듯이 웃어보였다.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죄책감이 컸을지. 느꼈을 사와무라를 보니 미유키는 더욱 더 사와무라를 끌어 안고 싶었다. 그런 미유키의 음흉한 눈빛에 사와무라는 놀라 미유키를 힘도 들어가지 않는 주먹으로 때렸다.

 

"아야야...아프다고....때릴 땐 예고 좀 하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아프라고 때린걸 모르겠는거냐?"

 

"....머리카락은 잘라보는거 어때? 그 여인네 처럼 기다란 머리카락은 잘라도 굉장히 귀여울 거 같은데...아님 내일 다시 돌아가야되는데 나 따라가서 나한테 시집을 오던가?하하.... 보고싶을거다.."

 

조선을 온 지 어느덧 일주일이 넘었고, 미유키또한 이젠 조선에 좋은 일로 발을 들일 일은 없다. 마지막으로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끌어 안았다. 더이상 만날 수 없단 걸 알지만. 차라리 만나지 않으면 좋을 것 같았다. 미유키가 끌어안자 사와무라는 놀라 저항했지만,아픈 몸으로는 뿌리치기에 너무 역부족이란 걸 느끼고 가만히 받아들였다.

미유키가 마지막으로 사와무라를 끌어 안은 채 사와무라 입술을 어루 만지며 말했다.

 

"....정확히 일주일 후. 우리쪽에서는 조선을 쳐들어 올 것이다. 그러니...너는 너만큼은 니 누이를 데리고 떠나가라. 어디를 가든 좋다. 몸을 숨겨라. 어떻게 해서라도. 니가 이 내말을 안 믿을지 몰라도. 제발 떠나가거라.....제발. 너와 니 누이 손을 잡고 될 수 있는 한 멀리 떠나거라...다음엔 나와 두번 다시 만날 일이 없도록 떠나가거라...그게 내 부탁이자 마지막 소원이다."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이 다음 말을 못하게 자기의 입으로 사와무라 입을 막았다. 사와무라는 어안이 벙벙해 그저 가만히 있었고, 미유키는 그런 사와무라를 더욱 더 끌어안았다. 미유키가 입술을 떼어내고서는 사와무라를 눕혀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내일이면 열은 내릴거다. 지나치게 수행한 탓에 그런거니 걱정말거라...앞으로 너무 무리는 하지말고...그리고 마지막으로.....스키다요."

 

 

 

다음날 동이 트고 그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일주일이 지나갔다.

 

 

 

 


[오오후리/아베미하]

 

이건 아주 무더운 여름날의 이야기이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지루하게 느껴져, 나는 다른 세상에 있는 아베 타카야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어떤 곳으로 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도중, 재밌어 보이는 세상을 발견했다. 그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는 야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야구라…. 묘한 표정을 지으며 멀리 떨어져서 야구를 하는 아베 타카야를 바라보았다. 아베 타카야는 누군가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누군지 궁금해서 가까이 갔던 게 잘못이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내가 가까이 가지 않았더라면. 너를 눈에 담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는…….


“큰일이네.”


두근거리는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마냥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표정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너를 보았다. 그렇게 너는 나의 눈에 담겼다.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깊게.

 

 

“다른 세상에 잠깐 있다가 올 수 있나요?”
“방법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잘됐네요.”
“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가보고 싶은 세상이 생겼어요.”


그곳에 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그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건 무모한 일이며, 잘못하면 ‘아베 타카야’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같은 존재가 눈을 마주치게 된다면, 그 존재는 전부 사라지게 된다. 존재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지워져 버린다. 그래서, 그는 나를 걱정하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나는 생각보다 높은 위치에 속해있다. 항상 품위를 지켜야 하고, 정해진 일과를 끝내야 하며, 잠깐의 일탈도 꿈꿔서는 안 된다. 다른 세상에 갔다 온 것도 남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간 것이었다. 나의 외출을 알게 된 그는 화를 냈다. 한 번 다른 세상에 가게 되면, 계속 가보고 싶을 거라고. 그래서 항상 못 가게 막았던 거라고. 한 번 맛보게 되면, 끊을 수 없는 달콤한 유혹과 같았다.


“방법. 알려주세요.”
“제가 한 말을 잊으셨습니까.”
“잊지 않았어요. 저를 걱정하는 이유도 다 알아요. 이곳에 있는 저는 꽤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까요. 갑자기 없어진다고 하면, 다들 놀라겠죠.”
“타카야님…….”


나는 왜 이 세상에 있는 걸까. 그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는 왜 너에게 짜증을 내는 걸까. 내 눈에는 반짝거리며 빛나는 별처럼 느껴졌는데, 그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에게는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제가 알려드리는 방법은 서로의 영혼을 바꾸는 겁니다.”
“영혼이요?”
“예. 이곳에 있는 타카야님과, 다른 곳에 있는 타카야님의 영혼을 바꾸는 걸 말합니다.”
“그럼 그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가 여기로 와서 저처럼 행동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영혼을 바꾸게 되면 둘 중 한 사람은 계속 잠이 들게 됩니다.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갈 때까지 말이죠.”
“저는 그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의 몸으로 들어가서 움직이는 거고, 그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는 제 몸에 들어와서 계속 잠을 자게 된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잠이 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네요.”
“제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합니다. 타카야님의 의견을 무시하는 분은 거의 없으니까요.”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잠에 빠져있어야 할 나의 다른 영혼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잠깐이면 돼.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기간은 일주일입니다. 더 빨리 반응이 올 수도 있을 텐데, 일주일 안에 원래대로 바꿔야 합니다. 만약 바꾸지 않을 경우, 타카야님의 존재는 영영 사라지게 됩니다.”
“…….”
“타카야님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위험, 하겠네요.”
“아마 그곳에 있는 몸에서 빛이 날 겁니다. 빛은 타카야님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빛이 나면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신호이니 잊지 마십시오.”
“네. 기억하고 있을게요.”


그를 따라간 곳은 지하에 있는 어느 방이었다. 방 안에는 커다란 검은 침대가 놓여있었다. 침대에 올라가서 누울 준비를 했다. 준비를 끝내자, 그가 나에게 액체가 담긴 두 개의 병을 건넸다. 투명한 액체가 병 속에서 가볍게 출렁이더니 이내 녹색을 띤 청색처럼 색이 변해서 마치 피콕블루를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그걸 마시면 됩니다.”
“하나는 지금 마시고, 다른 하나는 돌아올 때 마시면 되는 거죠?”
“예, 맞습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은은한 향기가 퍼져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의 마지막 인사를 들으며 병에 담긴 액체를 천천히 마셨다. 수면이라는 파도가 서서히 밀려왔다. 일렁거리는 파도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 아베… 군…….”
“으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서서히 눈을 뜨자 동그란 눈, 마름모 모양의 입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간을 좁히며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 아베, 군…….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놀라며 몸을 피했다.


“야, 너…….”
“…….”
“……미하시?”
“으, 응. 아베군…… 괜찮아?”
“어? 미하시, 아베 일어났어?”
“아, 응……!”
“아베. 괜찮아?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데.”
“쓰러졌다고?”
“응. 기억 안 나?”


내가 약을 마시는 것과 동시에 이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가 쓰러진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원래 이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는 그곳으로 간 것 같았다. 아마 지금쯤, 그가 많이 걱정하고 있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사히 돌아갈 거예요, 아마도.


“일어, 나서 다… 다행… 이다…….”
“그러게. 다행이다.”


제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제 눈앞에 있는 기분을, 오랫동안 느낀 다음에요. 이 기분이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이곳에 있었던 아베 타카야에게. 너는 왜 그렇게 미하시한테 화를 낸 건지 물어보고 싶어. 도대체 어디를 보고 짜증이 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 너의 모습을 보며 위축되는 미하시를 볼 때마다, 누가 날카로운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기분이 드니까.

그럭저럭 잘 적응해가는 중이었다. 걱정했던 부분들은 다행히도 이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의 기억이 내 기억 속에 추가되면서 싹 사라졌다. 그곳에 있는 아베 타카야는 잠들어있어서 내 기억을 알지 못하겠지만, 깨어있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운동 신경도 생각보다 나쁜 편이 아니라서 기억을 되짚어보면서 잘 따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이곳의 아베 타카야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기에, 다 자라지 못한 몸이 조금 불편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너와 연습을 했다. 내가 자세를 잡은 뒤 사인을 하면 네가 내 사인에 맞춰서 공을 던졌다. 미트에 감기는 공의 느낌이 좋았다.


“잘했어.”
“으, 응…….”
“괜찮아?”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땀을 계속 흘려서. 스쳐 지나가듯이 말하자 네가 흐르는 땀을 급하게 닦았다. 그런 너의 모습을 보면 나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저렇게 안 해도 되는데. 미하시와 나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야 했다. 나에 대해서 전부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건 알려줘야 미하시가 나를 조금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하시. 주말에 시간 있어?”
“주, 주말……. 으, 응….”
“음. 같이 어디 갈래?”
“…….”


당황스러운 건지 네가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떴다. 뭘 하면 좋을까……. 나도 좋아하고, 너도 좋아하는 건 역시.


“야구 보러 가자.”


그게 좋을 것 같았다.

 

 

 


야구장에는 사람이 많았고, 응원 소리와 함성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너는 당황했지만, 야구라고 덧붙이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미하시는 야구를 볼 생각에 두근거리는 건지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그건 오늘,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표를 산 뒤, 구장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하는 경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없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낯선 길을 무작정 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자리에 앉은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 경기장을 본 뒤, 전광판을 확인했다. 2회 초. 득점을 한 팀은 아직 없는 상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경기였다. 미하시가 관심 있다는 팀이 공을 던질 차례였다. 타자가 자세를 잡고, 포수가 보내는 사인을 투수가 읽는다. 투수가 빠르게 공을 던졌다. 멀리서 봐도 상당히 빠른 공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공은 포수의 미트에 안착했고, 타자의 배트는 공에 닿지 못했다.


“공. 못 쳤네.”
“으, 응…….”
“엄청나게 빠르다.”
“그, 그, 그러…… 게…….”


투수를 바라보는 미하시의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있었다. 아마 자신하고 비교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하시를 바라보는 사이에 삼진 아웃이 되었다. 투수와 포수가 서로를 격려하며 벤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햇볕이 뜨겁다. 내가 너를 처음 보았던, 그 여름날 같았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이 났다. 사람들이 나가고 난 뒤,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여름의 태양은 바라만 봐도 타들어 갈 것처럼 뜨겁다. 태양의 열기는 모든 것들을 녹아내리게 한다. 너를 만났던 그 날도 그랬다.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너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했다. 전철을 타고 돌아오면서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너는 너만의 생각을 하면서.


“……도착, 했다…….”
“다 왔네. 오늘 같이 가줘서 고마웠어.”
“아, 아, 아냐……. 고, 고마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관계가 나아가기 위해서, 나는 이 말을 꼭 해야 했다. 작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너의 동그란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있잖아. 난 너랑 잘 지내보고 싶거든.”
“…….”
“그니까, 앞으로는 짜증 많이 안 낼 거라고.”
“아…….”
“나 보면서 위축되지 않아도 돼.”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매미 울음소리가 가라앉은 정적을 파고든다. 주먹을 쥔 손에서 땀이 묻어났다.


“좋은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
“…….”
“배터리도. 그 밖에 다른 부분들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였다. ‘다른 부분들’에 담긴 의미를 네가 알아주길 바랐지만, 지금의 너는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안다고 해도,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갈게. 인사를 하며 먼저 돌아섰다. 내 뒷모습을 보고 있는 너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에 온 지 4일째 되는 날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다음 날,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너를 보며 평소처럼 인사를 했고, 하던 연습을 계속했다. 벌써 5일이나 지났는데 큰 진전이 없었다. 관계를 변화시키는 건 어렵다는 걸 여기에 와서 깨달았다.

원래 있던 곳에서는 내가 어떤 의견을 꺼내면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어차피 그 관계는 서로에게 이익을 취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조종하는 말의 일부이고,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을 말을 통해 해결한다. 만족스럽게 일을 해결한 말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내려주면 된다. 그 보상이 꽤 짭짤해서 자기가 나선다며 서로 달려들기 때문에 조종할 수 있는 말은 점점 늘어난다. 무시하지 못할 위치에 있고, 손에 잡히는 권력의 영향력은 크다. 그걸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곳의 사정은 달랐다.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말도, 손에 잡히는 권력도 없으며 내가 관심 있는 사람과의 위치는 동등하다. 만약에 그곳에 있는 나처럼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사양할 것 같았다. 나는 미하시를 통해 이익을 취할 마음도 없고, 그런 관계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 필요한 건 이거였다.

그래도 나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너는 조금 편한 모습을 보여줬다. 내가 말을 걸 때마다 매우 놀라지도 않았고 위축된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말하는 건 똑같았지만, 너의 행동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럼 그건 그렇게 하자.”
“그, 그래…….”
“내가 이러니까 적응 안 되지.”
“…….”
“예전처럼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건 약속할 수 있어.”
“응…….”
“연습하러 가자.”


공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서 짧게 빛이 났다.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몸에서 빛이 나는 건 돌아와야 한다는 신호이다. 반응이 빨리 올 수도 있다고, 일주일을 넘기면 안 된다고 했다. 5일째이니 아직 시간은 있었지만, 신호가 온 이상 천천히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태양 아래 서 있는 너를 보았다. 하얀 목덜미가 아른거리며 빛나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런 너를 두고, 내가 돌아갈 수 있을까.

 

 

 


그 뒤로 신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는 나타나지 않는 신호를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돌아가기 전까지 최대한 너에게 집중했다.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를 걱정하고 있을 그를 위해서라도 돌아가야 했다.


“아, 아베군……. 아, 안, 안녕…….”
“안녕.”


네가 먼저 인사를 해줬다. 항상 내가 먼저 인사를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네가 먼저 인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이니까. 이제는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테니까. 아베 타카야의 가족들에게도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뜬금없는 말에 다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냥 고마워서요. 그게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평소보다 열심히 연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 돌아가서도 후회하지 않게,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 동안 나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러니까 멀리 떠나는 사람 같아.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연습이 끝났다. 야구부의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너에게도…… 인사를 해야 했다. 같이 돌아가자고 말을 하니 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이니까 평소와 다른 길로 돌아갔다. 지나가는 길에 강이 있어서 잠깐 쉬다가 가자고 했다. 강가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노을빛을 머금고 있었다.


“고마워, 미하시.”
“…….”
“아베 타카야의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아, 아베…… 군…….”
“그냥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잠잠했던 신호가 나타났다.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커져서 이내 나를 삼킬 것이다. 너를 바라보며,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미하시.”
“…….”
“……좋아해.”


내 말에 놀란 네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너를 껴안아버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포옹으로 인해 굳어진 너의 어깨를 세게 안았다. 너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좋아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사실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 조금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어. 너와 함께 야구도 하고 싶고, 학교도 다니고 싶고, 그냥 내 옆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있는 곳에는 왜 네가 없을까. 어째서 ‘미하시 렌’은 그곳에 없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너는 왜 내 옆에 없는 건데.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났다. 너를 안았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아, 아베, 아베군…….”
“…….”
“우, 울, 울지, 마…….”


네가 손을 뻗는다. 눈가에 닿은 너의 손가락은 뜨거웠다. 하얀 손가락이 눈물을 훔친다. 빛이 강해졌다. 손뿐만 아니라 온몸을 뒤덮었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병을 꺼냈다. 투명했던 액체의 색이 변해있었다.


“아, 베군……. 잘, 모, 모르겠, 지만…….”
“…….”
“고, 고마, 워……. 조, 좋아, 해줘서…….”


너의 얼굴이 붉게 보이는 건 노을빛 때문에 그런 걸까.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뛴다. 고마워. 그 말이 뭐라고, 너는 나를……. 은은한 향기가 퍼지기 전에 병에 들어있는 액체를 빠른 속도로 마셨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액체가 느껴졌다.


“안녕. 미하시.”


입술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한 번만 더 물어보면 100번째네요.”
“그만큼 타카야님을 걱정하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이렇게 일하고 있겠죠.”
“평소였다면 다른 분들에게 시키셨을 일입니다.”
“오늘은 제가 하고 싶어서요. 일하면서 잠깐 잊고 싶은 기억도 있고.”


눈을 떠보니 일주일 전에 봤던 그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찡긋 웃으며 다녀왔다는 말을 했다. 내가 없었던 일주일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곳에서의 기억이 더 소중했고, 그도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곳과 달리 이곳의 계절은 아직도 봄이다. 밖에 나가면 꽃향기가 느껴지고, 햇볕은 따스해서 나른해지기 좋다. 커다란 나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곳으로 돌아온 지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 동안 그곳에 있었던 타카야님의 기억은 모두에게서 사라졌습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저를 제외하면, 다들 기억하지 못하겠네요.’
‘예.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비밀로 하고 싶은 기억이 있었는데, 사라져서 다행이네요.’


이제 미하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미하시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건 내가 아니라, 그곳의 ‘아베 타카야’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 있는 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 속에 있는 너는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나를 보고 있다. 흐르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고맙다고 말한다. 입술에 닿은 감촉도 여전히 남아있다.


“미하시…….”


무더운 여름을 닮은 너는, 나에게 식지 않을 짝사랑이라는 열병을 남기고 떠났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서 심장이 아팠다. 쉽게 나을 수 없는 이 병을 고치려면 너의 사랑이 필요하다. 나 혼자 하는 사랑이 아닌, 두 사람이 같이하는 사랑.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돌아보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해사하게 웃는다.

그건 어느 무더운 여름날의 이야기였다.

 

 

 


[하이큐/다이스가]마음의 흔적


"저, 혹시 사와무라 있어?"

"아, 응 아마 교실안에 있을꺼야"

"그렇구나. 고마워!!"


꽤나 우리반에 자주 찾아오는 여자아이. 오늘도 또왔네. 용건은 언제나 '사와무라 다이치'. 그 이상의 것은 없다.
그 여자아이는 다이치와 같은 동네에 사는. 다이치의 소꿉친구라고 했다.


"다이치! 너 이거 두고 갔다며."

"아, 고마워. 하필 오늘따라 두고 오는 바람에"

"평소엔 그런 짓 잘 안하더니, 고마우면 맛있는거나 하나 사줘. 알겠지?"

"그래 알겠어. 사줄게 사줄게."


하하호호 웃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생각한다
소꿉친구인 두 사람이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니겠지.
뭐 나도 다이치를 다이치라고 부르고 있고.다이치는 날 스가라고 부르지만 다이치가 불러주는 스가라는 이름이 참 좋으니까.음, 그러니까 우리가 안친하다는게 아닌데.


근데 왜 마음이 흐리지?


-


다이치와 나는 고등학교와서 처음 만난 사이이다. 갓 고등학교에 올라와 아무것도 모른채 낯선 교실에서 멀뚱히 앉아있던 나.
그리고 내 그 빈 옆자리에 앉은 다이치. 우리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먼저 서로 이름을 물었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관심사를 찾았다.
다행히 공통 관심사를 찾았고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친해졌다.
그 때로 부터 벌써 한참이 지나 우리는 3학년이 되었고 고등학교 내내 같은반이 되었다.
그런 우리를 보던 친구들은 너희 진짜 부부 아니냐며 금슬 좋다는 등의 유치한 농담을 던져댔다.
남자들끼리 그런 식으로 엮이는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장난인걸 아니까. 다이치도 나도 그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웃어넘겼다.

 

근데 나는 진심으로. 그 장난이 싫지 않은데. 어쩌지?


-


"스가.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어?"

"내 얼굴 계속 쳐다보길레."


사실 알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다이치의 얼굴을 쳐다보는게 일상아닌 이젠 습관이 되 버린 것을
그러다 다이치의 말 한마디에 깜짝 놀라 정신차리고 나는 그런적 없다는 듯이 얼버무린다.


"에?무슨 소리야. 나 너 본거 아닌데?착각도 병이야 병"


다이치의 표정에서 분명히 나 보던데 이상하네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드러났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모른척한다.너를 신경쓰지 않으려고. 눈을 마주 치지 않으려고

알아 나도, 이거 그거잖아
좋아한다는거.

사람의 마음은 겉잡을 수 없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도망쳐도 마음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내가 거부하면 거부할 수록 그것은 점점 더 커져버려서 나를 짓눌러온다. 난 괴로워지고 아프고 힘들어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 들일 수 없는건

니가 나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 더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저 친구였던 내가. 갑자기 좋아한다고 고백한다면? 진심이라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 아무리 다정하고 착한 너라도 이해 못하겠지. 그래.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매일매일 마음을 가두고있는거야. 자물쇠도 걸어서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이 자물쇠는 열쇠구멍이 없다

 

-


"스가, 자 먹어"

"어? 왠 아이스크림이야?"

"날씨 진짜 덥잖아, 내꺼 사는 김에 그냥 니꺼도 하나 샀어"

"뭐야, 고마워 잘먹을게! 나도 다음에 한번 사줄게"

태양은 성난듯이 뜨겁게 내리쬐고 매미 울음소리는 그칠줄을 몰랐다. 하늘은 여름에 걸맞게 새파랗다 못해 투명해 보였으며 나뭇잎은 햇빛을 받아 꼭 빛나는 것 처럼 보였다.
푹푹찌는 더위는 힘들지만, 여름. 이 여름은 너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태양처렴 열정적인 것도, 비 처럼 침착한 것도,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처럼 다정한 것도

그러니까 나는 여름이 좋아

 

손에 든 아이스크림이 조금 녹았다.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먹지.


-


여름인 만큼 어김없이 장마철도 찾아왔다. 하늘은 새까맣고 먹구름만 가득했다. 그리고 한 두 방울씩 그러다 쏴아-하고 매서운 비가 내렸다.
반아이들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딱 하교할 시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니까.
더 심해지기 전에 빨리 가야 겠다며 아이들은 순식간에 빠져나갔고 고요한 교실엔 너와 나만 남았다.
나는 그 고요함을 깨고 목소리를 내었다.

"이거 장마니까 빨리 그치지도 않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왜, 혹시 우산 없어?"

"아..분명 우산 넣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없네"

"너 답지 않은 실수네, 가자 너희집이랑 우리집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같이 쓰고 가자"

"아니야, 그냥 비 좀 맞으면 어때. 우리 둘이 쓰려면 작잖아."

"우산 엄청 큰거 가지고 왔으니까. 괜찮아. 자 빨리 가자"

다이치의 우산은 확실히 크긴 했지만 그래도 꼭 붙어야 거의 젖지 않게 갈 수 있을 정도였다.
흔하다고 재미없다고 말했던 로맨스 드라마가 생각났다. 아마 그 드라마도. 이런 내용이 있었지 않았나.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될줄 누가 알았겠어.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우리는 걸었다. 아마 이렇게 가깝게 붙어서 걸은 적은 처음 아닐까
걸을때마다 스쳐지는 팔이 간지러웠고 그 소리가 내 귀까지 간지럽혔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라고 할때의 기분은 이런 기분인걸까
문득 너의 쪽으로 고개를 들렸을때 나는 더 이상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쪽으로 좀 더 기울어진 우산. 그 때문에 젖어버린 너의 어깨.
꼭꼭 매달아놓은 자물쇠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마음이 아팠다. 너에게 절때 전해져서는 안될 그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다이치 우산 제대로 써. 너 어깨 젖잖아"

"아 그랬나? 괜찮아 조금 밖에 안젖었는걸"

너의 그 작은 행동하나하나가 날 미치도록 떨리게 한다는걸 널 알까

"스가. 다왔어"

내가 너 모르게 마음을 붙잡는 동안 어느 새 우리집에 도착한 모양이였다.

"그럼 난 가볼게. 우산 썼어도 많이 젖었으니까 바로 씻고 감기 조심해"

"다이치야 말로 조심해!!괜히 나 때문에 미안해서 어떡하지"

"괜찮아. 친군데 뭘 그렇게 미안해해. 그럼 간다!"


다이치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섣불리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뒷모습이라도 좋으니까
다이치의 모습이 완전 사라지자 나는 가방을 매만졌다.

그 속에는 멀쩡한 접이식 우산 하나가 들어있다.

다이치 미안해, 나 거짓말을 했어


그런데, 너무 좋아서. 앞으로도 거짓말 해버릴 것 같아


-


"미안해!오늘도 좀 볼일이 생겨서..사와무라 교실에 있지?"

이 아이. 다이치와 같은반이 아니라서 얼마나 실망했을까. 이렇게나 자주 찾아오다니. 사실 너도 다이치를. 그렇지? 그렇구나.
난 오늘도 이 아이에게 대답을 한다.

"아 어쩌지, 지금 교실에 없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에..그렇구나. 매번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뒤돌아가는 그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교실로 들어갔다.

"스가, 어디갔다왔었어?"

"아 화장실, 다이치 매점가자! 저번 아이스크림 보답해줄게!"


있잖아, 거짓말은 한번 하면 자꾸 자꾸 하게 된데.


-


내가 생각해도 요즘의 나의 모습은 비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였다. 거짓말에 질투라니. 완전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 같은 모습이였다.
이래서 어쩔건데?고백 절대로 하지 않을거면서. 유치하게 굴면서 어떡할건데?
내가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꽤나 정곡을 찌르는 질문. 그리고 나는 아무말 도 할 수 없었다.
스르륵-
교실문이 열리고 다이치가  빨개진 얼굴로  교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덜컥 불안한 마음에 물었다.

" 얼글이 왜 그렇게 빨개?무슨일 있어?"

"음 사실.."


다이치가 말을 얼버부리며 나에게 보여준 것은


"걔가 먼저 이렇게 고백할 줄이야..어릴적부터 친구라 말하는거 많이 망설이고 있었는데. 내가 먼저 못해서 어떡하냐"

레터였다. 러브레터.
아까 내가 거짓말을 해버린 그아이부터로의.
그리고 다이치는

지금까지 본 얼굴중 가장 행복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이제 너를 어떻게 봐야하지?


-


"있잖아, 그냥 차라리 고백 한번 해보는게 나았을까?"

...

"난 거짓말을 해버렸어. 나쁜 아이지."

...

"다이치는 날 친구라고 생각해"

...

"우리는 친구지. 그렇지?"

...

한적한 공원. 아무도 없는 곳. 말하는 상대는 나.
그러니까 말하자면 혼잣말 이였다.이렇게라도 말해보지 않으면 이대로라면 죽어버릴 것 같아서
사실 그 아이가 한 고백을 보고 나도 한번쯤은 말해보는게 나았을까 라는 생각 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마음은 영원히 묻어두는게 맞는 것 같아
만약 고백하고 사귀게 되었다고 쳐도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데? 그 후의 미래는? 성인이 되고 대학을 가고 직장을 가지고 결혼해야할 나이가 되면?
그래 너만큼은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좋은 여자와 결혼하고
예쁜 아이를 낳아서
언제나 행복한,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야지.


"잘부탁해, 다이치를"


나 혼자 덩그러니 있는 이 곳에서. 그 아이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너를 향했던 마음을 지워야지
자물쇠에 열쇠구멍이 없었어서 다행이야. 한순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으로 열어버릴 뻔 한적도 있지만 결국 열 수 없었으니
자, 이건 어떻게 해야 깨끗히 지워지지?


지우개는 자국이 남아버려
화이트는 티가 나는걸
잘라버리는건 아픈데


어떻게 치우던 흔적은 남겠지.
태어나서 이렇게 까지 깊게 좋아해본건 니가 처음이니까
잊으려고 애써도 가끔씩 내마음을 쿵쿵하면서 울려버리겠지
그렇다고 너를 좋아했었다는 걸 후회하는건 아니야
사와무라 다이치. 너를 좋아할 수 있었어서 행복했어. 진짜야.
그러니까 응, 지울게.

 

나는 내 마음에게 마지막을 고했다.
그 흔적은 차마 지우지 못하고 남겨둔채.

 

제 3회 익명만애 글합작 | 인스티즈


 

 

[히로아카/데쿠토도]여름비

 

예고에도 없던 거센 소나기가 내렸다.
어쩐지 오늘따라 허리가 아프더라니. 신발장에서 신발을 우겨 신고 문 앞에 서서 거칠게 쏟아지는 빗방울들을 손으로 훑었다. 나가려니 우산이 없어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고 뛸 준비를 했다. 어차피 샤워도 할 거고, 교복도 여벌이 있으니 빨면 된다. 비록 집에 가면 아버지와 마주쳐야 하겠지만 딱히 걱정하지는 않았다. 여유롭게 생각하며 나가려는 찰나, 커다란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렸다.

“토도로키 군?”

미도리야였다.
가장 마주치고 싶으면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그는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여주며 아는 척을 해왔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미도리야는 내가 비를 맞지 않도록 내 팔을 잡아 우산 안으로 당겼다. 순간 휘청, 몸이 끌려갔지만 이내 손을 뿌리치고 곧장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토도로키 군, 잠깐만! 내 이름을 외치며 조심조심 나를 쫓아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들은 척도 않고 무작정 뛰었다. 물웅덩이를 밟아 양말까지 빗물이 스며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미도리야의 세심한 성격이 싫었다.


어릴 적부터 TV를 틀 때마다 나오던 올마이트는, 히어로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준 인물이었다. 나는 히어로는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괴팍하고 억지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위에서 히어로라곤 나에게 자신의 뒤를 잇기를 강요하던 아버지 인데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마이트는, TV에서 보는 올마이트는 항상 정의롭게 웃는 얼굴이었고, 시민을 괴롭히는 악당을 무찌르고 있었다. 그가 되기 위해 재능이 무엇인지부터 시작해 히어로과를 목표로 정하기까지 했다.

흐름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올마이트같은 히어로가 되고 싶어 충동적으로 아버지의 요구에 따랐지만, 정작 내게 돌아온 건 심각한 근육의 마비와 고통뿐이었다. 어린 내 몸으로는 전혀 할 수 없는 운동을 시키고 재능을 강제로 발전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를 증오했던 어머니는 내가 히어로 훈련을 시작함으로서 참을성을 잃으셨다. 이후 내 왼쪽 얼굴에는 어머니가 들이부근 끓는 물의 흔적이 남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화상을 대가로 내 절반을 차지하는 아버지의 자취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난 단지 히어로를 하고 싶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은 내 예상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온통 어두운 색 뿐이었다.


그런 내게 미도리야는 애증의 존재였다. 그는 올마이트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사람의 눈은 그의 마음속을 대변한다. 단지 올마이트의 사생아 정도로 생각했던 미도리야의 눈은,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정의감으로 가득 찬 눈과 똑같았다. 옆구리를 내주었을 때, 아픔과 함께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강하게 울렸다. 어릴 적의 꿈. 그 어떤 상대에게도 느낄 수 없었던 것. 그는 추악한 내 왼쪽의 재능을, 온전한 ‘나의 힘’ 이라고 말했다. 빛을 받으며 일렁이던 눈빛. 그때서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미도리야와 나의 차이점을.

시합에서 이겼지만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쉬웠다. 뭐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쓰러진 미도리야를 응시할 뿐이었다. 관객석에서는 환호와 동시에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자기가 부추겨놓고 져버리다니, 한심한 놈!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비난하는 멍청한 관객들에게 그 자리에서 외치고 싶었다.
미도리야는 힘없이 당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를 이겼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그는…


“토도로키 군, 한참 불렀잖아!”

내 어깨를 잡아 돌리며, 미도리야가 말했다. 언제부터 쫓아왔는지 가쁜 숨을 내쉬며, 그는 내게 쥐고 있던 우산을 건네주었다. 이걸 왜 나한테.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무작정 내 손에 우산을 쥐어주었다. 꽤 오랫동안 들고 있었는지 손잡이에는 땀이 흥건해 손이 미끌거렸다.

“난 여분의 우산이 있어서 괜찮아. 하지만 토도로키 군은 계속 비 맞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감기 걸릴지도 몰라서.”

감기라니, 우습기는. 코웃음을 치니 움찔하며 날 흘겨봤다.

“내 재능, 빙결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걱정돼서…….”

걱정.
미도리야가 걱정이라고 했다.
그다지 좋은 기분도 아니고, 걱정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난 괜찮으니 미도리야 네 건강이나 챙겨라.” 무심하게 내뱉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미도리야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지만 딱히 무언가를 더 덧붙이진 않았다. 내 대답을 듣고 체념했는지 그는 더 이상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달리 그가 나를 쫓아와주길 바랬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뒤돌았을 때, 미도리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있던 자리를 눈으로 쓸었다. 그리고 걸음을 뗐다.


미도리야, 나는 올마이트를 닮은 네가 싫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 네게 느끼는 감정을,

나는 모르겠다.

 

흐르는 물방울들을 거칠게 쓸며 집에 들어왔을 때, 이미 비는 멎어있었다. 생각은 흠뻑 젖어버린 옷만큼이나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겨우 이런 걸로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아무리 올마이트와 닮아있더라도, 미도리야는 미도리야였다. 평범한 소년일 뿐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마지막으로 본 그의 시무룩한 표정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축축한 비 냄새와, 흔들리던 눈동자와, 습기를 머금은 초록색 더벅머리. 주근깨. 헤진 교복. 눈에 보이는 옷을 급히 주워 입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즈쿠!”


비는 그친지 오래인데, 왜 나는 아직도 아픈걸까.


 

 

[카드캡터체리x블랙잭/도진잭]환상의 31일

-커플링 : 도진잭 (카드캡터 체리 유도진 x 블랙잭 블랙잭)
*본 글엔 설정 날조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여기 온지 벌써 13일째네요."

"그러게."

 

진료소에 온지 13일째, 선생님과의 대화.
선생님은 언제나 보던 모습그대로 신문을 읽고 있다.

 

"오늘은 뭘 하면 될까요?"

"음...청소."

"알겠어요."

 

창고에 쌓여있는 먼지를 털고 꺼내온 빗자루는 꽤 새것이다.
그와 반대로,
진료소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곳 자체는 매우 낡아있다.

 

"수술실은 더 깨끗하게."

"네네."

 

성의 없게 한 대답에는 '말 안 해도 알아서 할것' 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계속 신문만 들여다보는 당신은 관심 없어 보이지만.

 

"청소 다 끝나면 커피 부탁해."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에요?"

"부탁해."

"......네."

 

 

 

 

 

 

 

*

 

 

 

 

 

 

"선생님은 결혼 안하세요?"

"....."

 

진료소에 온지 10일째, 선생님과의 대화.

 

"선생님?"

 

대답이 귀찮은 건지 말하고 싶지가 않은 건지 반응이 없다.
하루 종일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난 대화를 하고 싶다. 좀 더. 선생님과,

 

"누구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야."

"왜요? 고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수입이 있으시잖아요."

"이봐, 이쪽은 무면허라고? 별 해괴한 일을 다 맡아서..."

 

고개를 돌려 노려보듯이 말하던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다시 돌아앉았다.
가장 궁금했던걸 물어본 건데 선생님의 반응이 차갑다.
정적이 내려앉은 방안이 어두워졌다.

 

 

 

 

 

*

 

 

 

 


"선생님 문열어주세요."

 

진료소에 온지 3일째.

 

"선생님!"

 

비가 쏟아지는 밖.
당신은 문을 걸어 잠그고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불을 키고 있지 않은 채 방안에서 가만히 앉아있겠지.
지금 당신의 표정은 아마...

 

"선생님..."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난-

 

 

 

 

 


*

 

 

 

 

 

"선생님은 카레만 드시네요."

 

진료소에 온지 18일째, 선생님과의 대화.

 

"응."

"질릴 법도 한데."

 

카레에 넣는 재료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만들고는 있지만
같이 먹는 내 생각도 하셔야지.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상관없었다는 듯이 선생님은 카레를 쉴 새 없이 입안으로 집어넣고 있을 뿐이다.

 

"내일도 카레죠?"

"응."

 

일주일에 4번은 카레로 끼니를 때우는 이 사람한테 정말 기가차서 지금은 반쯤 포기했다.
맛없는 카레를 만들어버릴까.

 

"카레를 제일 좋아하니까."

 

당했다. 저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그랬었죠."

 

 

 

 

 

 


*

 

 

 

 

 

"안계시네."

 

진료소에 온지 23일째.

 

선생님의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바라봤다.
절벽에 세워진 진료소라 그런지 경치가 놀랍도록 아름답다.
달빛에 반짝이는 밤바다가 부드럽게 철썩이고 하늘에 박힌 작은 별들이 귀엽게 반짝이고 있다.
조용하네―
이런 곳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니.

 

늘 꿈꾸던 곳에 왔어.
꿈꾸던 대화를 했어.
꿈꾸던 사람을 만났어.

 

"행복해."

 

정말 행복해?

 

 

 

 

 

*

 

 

 

 

 


진료소에 온지 20일째.

문틈으로 선생님을 본다.
컴퓨터를 하고 계셔.
발소리를 죽이고 뒤에서 안아버릴까.
눈을 가려서 바닥에 쓰러뜨릴까.
머리를 책상에 박고 뒤로 손을 묶을까.
그냥 그대로 의자에 묶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선생님, 나,


시선을 느꼈는지 선생님이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선생님을 xxx xx.

 

 

 

 

 

 

 

*

 

 

 

 

 

 


"머리...아파요...선생님..."

 

진료소에 온지 27일째, 선생님과의 대화.

 

"약을..."

"아스피린이야, 삼켜."

 

물과 약을 가져다주시는 선생님의 표정이 어딘가 미묘하다.
걱정해 주시는 걸까.
싸늘하지만 지긋이 바라봐주는 얼굴이 눈물에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감사해요."

"......"

"선생님이 미안해하실 필요 없잖아요."

"....."

"제가 죄송해요..."

".....바보 녀석."

 

 

 

 

 


*

 

 

 

 

 


진료소에 온지 4일째.

 

일부러 비를 맞았다.
당신은 관심주지 않기로 한 것같지만
그래봤자,
이 이상 더 내가 괴로우면
당신 역시 괴롭잖아.
매정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딸칵]

 

"......"

"...들어와."

 

봐, 역시 당신은.

 

 

 

 

 

 


*

 

 

 

 

 


"선생님."

 

진료소에 온지 15일째, 선생님과의 대화.

 

"제 이야기 듣고 계세요?"

"응-"

 

커피를 마시면서 뉴스를 보는 선생님은 이미 나는 관심 밖이다.
뉴스에서는 지루한 얘기만 반복해서 나오는데 뭐에 그렇게 몰두한 건지 텔레비전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일부러 쳐다보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더 대화를 하고 싶은데.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알고 싶은 게 많아요.

 

"선생님은 제가 싫어요?

"...."

 

이번에도 대답이 없구나.
하지만 조금 뒤, 무어라 웅얼거리셨다.

 

"어떤거 같은데?"

 

 

 

 

 

 


*

 

 

 

 

 


진료소에 온지 30일째, 선생님의 xxx.

 

선생님이 말한 xxx를 xxx않아서 xx없어.
나는 xx되고 xxx xxxx되는 걸까.
xx싶지 않지만 xx싶지도 않아.

 

"선생님, 저 xxxxx."

"정신 차려."

"xxxx싶지 않아요.xxxx마세요..제발.."

"...xx xx."

 

 

 

 

 

 

 

*

 

 

 

 

 


xxxx xx xxxx, xxxx xx.

 

"xxx, xxxx"

"xxx."

 

xxxx xx xxxxx xxx xxxx xx xxxx xxxx.
xxx, x, xxx xxxx...
xxxx xxxxx xxxxxxxx.
xxx xxxx xx.
xxxxxx.

 

"xxx...xx, xx xx xxxx."

 

 

 

 

 

 

 

 

 

 

 

**


체리는 자기오빠가 쓰러진 후 블랙잭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려고 하는 중이야.
평소에 체리에게 자주 이야기를 해줬던 모양이던데..
그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 것들을 말이야.

체리는 생일은 맞은 오빠에게 생일선물로 '일루전'을 사용해줬어.
체리네 오빠가 무엇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이 사라진 후에 의식을 잃고 말았지.
크로우한테 이런 부작용이 있다는 건 듣지 못했는데 말이야...
도대체 어떤 환상을 봤던걸까?

 

"근데 체리야, 그 사람을 찾아가는 이유가 뭐야?"

"내 생각이지만 일루전 마법 속에서 그 사람을 만났을 거 같아."

"어떻게 알아?"

"그냥....그럴 것같은 생각이 들어..."

"그래, 크로우 마법과 관련된 일이니까 체리의 감이 가장 잘 맞겠지."

"그리고...."

"응?"

"어쩌면 그 사람..."

 

 

 

 

 

 

 

 

 

 

 

 

 

 

 

 


*

진료소에 온 1일째.

정신을 차려보니 마룻바닥에 누워있었다.
어딘데 여기에서 잠을 자고 있던 거지?
눈에 익은 식탁, 자주 보던 소파, 그리고..

 

"왔구나."

 

블랙잭 선생님.

 


 

[쿠로바스/립황ts]

 

립황ts


-립황이라고 적어두고 립황보다 립x몹녀의 요소가 강합니다.
-파트너조x키세키요소가 아주 조금 있습니다.아주 조금~.

 

 

 

료코와의 오랜만의 만남이었다.료코는 고등학생시절에도 끼많고 인기가 많았지만 요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 방방거리면서 졸졸 따라오던 료코가 생각이 나지않을정도로 예뻐졌다.료코가 술자리에 나온다는 소식에 레귤러였던 녀석들도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싸인을 받아야겠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지금은 각자 애인도 있지만 고등학생시절 료코는 모두의 첫사랑이었다.처음에는 예쁜외모에 반했고 농구부 매이저가 되서 열심히 하려는 것도 들리던 소문과는 다르게 착하고 애교많으면서도 털털한 성격에 료코는 몰랐겟지만 다들 좋아했었다.료코가 나온다는 소식에 호들갑떨었던건 레귤러 멤버뿐만이 아니라 내 애인 사쿠라 유키도 마찬가지다.만난지는 1년이 넘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대를 하고 나와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처음으로 여자와 대화를 했다.유키는 착하면서도 당찼다.그런 점에 점점 나는 반하게 되었다.결국 24살 봄쯤 사귀게 되서 25살 겨울인 지금까지 풋풋하게 잘 사귀고 있다.아,이게 아니라 유키는 은근히 료코에게 질투를 했다.그저 아무생각없이 다들 료코를 좋아했다니까 라고 꺼냈다가 나도 료코를 좋아했던거 아니냐면서 추궁을 했는데 여자란 정말 무서운 것같다고 느꼈다.물론 료코가 예뻐서 남자의 본능으로서 두근거린적은 몇번 있었지만(없었다고 부정은 못하겠다) 사랑은 아니었다.유키는 료코가 나온다는 말에 자기도 가겠다며 떼를 썼지만 남자들 사이에 데려가기도 미안하고 료코가 있다지만 료코랑은 첫대면이기도 했고 다른애들도 애인떼두고 고등학생시절로 돌아가는건데 라면서 보채서 결국 유키는 시무룩해하면서 허락해줬다.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는 사이에 료코가 들어왔다.
 

 

"우와"

 


분명 애인 있는 애들인데도 료코를 보면서 감탄을 했다.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대박이라고 할만큼 료코는 더더욱 예뻐졌다.고등학생시절에는 풋풋하고 귀여웠고 체육복 바지를 항시 착용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정말 여성스러워졌다.료코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우리를 발견하자 예전 그 얼굴로 돌아와서 '선배~~'하면서 달려들었다.사실 애들도 료코랑 몇년간은 연락도 힘들었고 이제는 뭔가 다른세계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어색해지지않을까하는 걱정을 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료코는 변함이 없었다.

 


-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 모두들 술에 취해 비틀거리게 되자 유일하게 술에 취하지않은 료코가 일어나서 외쳤다.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마 해산하자는 이야기 같았다.키세는 헤롱거리는 애들을 택시를 태워보내주고 나에게 다가왔다.

 


"선ㅂ...지..ㅇㅓ..에여..?"

 


숭에 취한 나는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선배 일어나봐여!"

 


료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료코는 선배가 자버려서 제집으로 데려왔잖아여 거리면서 나에게 물을 건냈다.아직 비몽사몽해서 물을 마셨다.물을 마시자 약간 정신이 깨는 기분이 들었다.두명 세명으로 보이던 료코가 하나로 보이게되자 나는 주위를 살폈다.

 


"키세..?여기 어디야,..?"
"제 집임다!지금 늦었는데 선배는 거실에서 주무십셔."
"어..어?"
"지금 새벽 1시임다.지금 선배 아직도 정신 몽롱해 보임다."

 


이곳이 료코의 집이라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정신을 깨고나서 본 키세의 옷차림도 당황스러웠다.키세는 아무렇지 않게 있었지만 여자친구도 생겼지만 여자의 짧고 과감한 옷차림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여자들이 자주 입고 다니던 짧은 츄리닝이었다.료코의 그런 모습을 봐서 인건지는 모르지만 아래에서부터 뭔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이기분은 내가 모를리가 없다.나는 료코의 모습에 흥분하고 말았다.친한 여자 후배고 나에게는 유키도 있기에 가라앉게 하려고 침착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려고 하지만 자꾸 머릿속에서는 료코의 가슴이,료코의 다리가 생각이 났다.료코는 내가 머뭇거려하자 나에게 다가왔다.료코가 다가올수록 보이는건 료코의 가슴 료코의 하야면서 길쭉하게 쭉 뻗은 다리였다.시선을 돌리려고 했으나 돌리는 것도 힘들었다.

 


"선배~괜찮슴까?지금 표정 이상함다!!"
"..아..."
"선배?"

 


하면서 다리를 동동 굴렀다.료코는 내가 당황해하자 선배 이런모습 오랜만임다!하면서 손을 크게 벌리더니 안겨왔다.료코의 가슴은 내 팔에 닿았다.부드러웠다.자꾸 그쪽으로 신경이 가려고했다.료코의 행동하나하나가 의미가 있어보였고 야해보였다.분명 이 행동은 고등학교시절에도 나를 놀리기위해 자주하던 행동이었지만 지금 내 상태에는 그러지 못했다.이기분에는 뭔일을 저지를것같아서 료코에게 잔다고 하고 누우려는 순간 료코가 내 손을 잡더니 말했다.

 


"선배!오랜만인데 지금 자기있어여?저 할말 있어여!누구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구요!"

 


예전부터 부탁할일이 있으면 눈을 초롱초롱하게 올려다봤는데 나는 유독 이것에 약했다.여자가 부탁해오면 거절을 못하기도 했지만 료코는 농구부 매니저를 하면서 한번도 여성스러운점을 드러낸적이 없었다.소문탓인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여성스러운 옷은 피하고 체육복이거나 바지이다보니 예쁜얼굴임에도 나마저도 예쁜남자후배녀석으로 인식할수 있게되었다.료코의 옷은 펑퍼짐한 옷이었고 머리도 묶어서 여성이라는걸 느끼기가 힘들었다.물론 외모나 몸매가 우리들과는 전혀 달랐지만.하지만 이렇게 부탁을 해올때는 료코가 여자로 인식이 되었다.그렇다고 료코를 우정이상의 감정으로 본건아니지만 료코를 평소처럼 대할수 없었다.료코는 주방으로 가서 술을 가져오더니 선배 할말이 있어여 하면서 웃었다.미칠것같았다.자꾸 키세가 유키로 겹쳐보였다.꾹 참고 키세가 주는 술을 마셨다.

 


"선배?저 이번에 찍은 cf봤어여?그 감독 너무 싫슴다!그 감독이 갑자기 저를 따로 부르더니 저한테 뭐라고 한줄 암까?벗으라는 검다!"

 


갑자기 흥분이 밀려왔다.키세의 쫑알거리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료코가 아니었다.유키였다.그래 저건 유키다.나는 유키에게 키스를 했다.

 


"유키 미안해."
"선..선배?무슨 짓임까?"

 


성욕이라는 감정만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알람소리에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낯선 환경에 당황해서 일어났는데 옆에는 료코가 알몸으로 누워있었다.잠깐 머리가 멍해졌다.어젯밤의 기억이 점점 돌아왔다.나는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료코를 유키로 착각하고 강간해버렸고 료코는 울면서 반항했지만 나는 내 성욕을 채우는데에만 급급했었다.료코의 다리는 피와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료코는 추위에 부르르 떨다가 일어났다.나를 쳐다보더니 료코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선배 여친있는거 알아요.모르는척 해드리게습니다.어차피 남자를 제집으로 들여온 저도 잘못임다..남자랑 단둘이서 한집에서 술마시려고 한 저도 잘못이 없다고는 못하겠네여.그리고 선배.지금와서 할말은 아니지만 좋아함다.죄송했음다.접겠습니다.그리고 저 바쁘니까 가주세요."
"미..미안해 키"
"전 씻으러 가야하니까 빨리 가주세요"

 

나는 거의 도망치듯 나와버렸다.료코도 유키도 볼낯이 없었다.료코의 고백은 내 가슴속에 콕박혀버렸다.료코의 고백은 차가웠다.

 


-
몇주정도 유키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유키의 연락도 씹었고 모리야마의 연락도 코보리의 연락도 모두의 연락도 씹은채 료코에게 미안하다는 문자와 연락을 해보지만 료코는 받지않았다.그러는 사이,유키는 화가 단단히 난채 나에게 달려왔다.

 


"유키오!너 정말 뭐하자는거야?"
"...미안해.."

 


유키는 울먹이면서 료코를 만난뒤로 연락도 받지않고 친구들한테 연락해봐도 내소식은 모른다고해서 혹시하는 생각때문에 힘들어했다면서 엉엉 울었다.유키를 보니 미안해져서 사과하다가 유키는 울다가 민망해졌는데 킁 거리다가 미안하면 밥 콜? 이러면서 히히 웃었다.나는 유키의 웃음에 몇주가 웃지못했는데 웃었다.웃으면서도 가슴이 콕콕 죄책감으로 아파왔지만 유키를 보니 점점 그 생각도 잊혀졌다.

 


-
유카와의 데이트후 집에 돌아오자 다시금 밀려오는 료코생각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키세?키세니?"
[선배...선배...저..아님다.저 괜찮아여.단어는 찝찝하지만 원나잇했다고 쳐여.]
"....그래도 그건"
[선배 저는...괜히 애인사이에 끼어든 악녀가 되고싶지않아어.이해해주세요.납득이 되지않을거라는건 저도 알아여.]

 


료코는 내가 대답도 하기전에 끊어버렸다.정말 료코말대로 그저 한순간의 불장난으로만 여겨야 하는 걸까.나도 참 예전과 달라졌다.예전이라면 망설임없이 료코에게 갔을텐데 내옆에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유키가 있었다.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
나는 한심하게도 몇일간은 찜찜해 했지만 결국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다.평소처럼 웃고 즐기고 놀고...나는 일부러 료코와의 기억을 마음속 상자에 가둬두고 있었다.쓰게도 나는 료코가 모르는척하자고 했을때 속으로는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료코와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먼 옛날과 같아졌다.잊고싶었지만 그렇다고 그 기억은 없었던게 되는게 아니었다.유키와 저녁약속을 잡을려고 휴대폰을 든 순간 카톡이 울렸다.

 


[선배.할말이 있어요.]

 

 

료코였다.
-
료코는 나를 놀이터로 불렀다.사람들이 많은데서는 말할수 없는 이야기라고 했다.

 

 

"선배..."

 

 

료코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나는 그런 료코의 모습에 당황해서 료코를 다독여주었다.료코는 내 팔을 잡더니 입을 열었다.

 

 

"임신했슴다.저....저...저 어쩌면 좋아여?"
"뭐?"

 

 

료코의 고백은 충격적 이었다.한순간 머리가 띵해져 주위에 있던 기둥을 잡고 정신을 챙겼다.료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낙태?결혼?책임?유키는? 이라는 생각으로 가득차있었다.료코한테 낙태를 권유하는건 정말 사람으로서 거부감이 들었고,낳아서 혼자서 기르라고 하는 것도 힘들고 료코를 책임지자니 유키가 생각나서 뭐라 말할수가 없던 내자신이 역겨워졌다.

 

 

"선배 선배는 제걱정마세여.낙태...사실 낙태같은거 하고싶진않지만 선배인생 망치고싶지않슴다."
"뭐?..."
"사실 선배가... 좋슴다....사실 지금도...좋아여....그치만 선배한테 책임쳐달라고는 못하겠어여.여자친구도 있고 제가 무슨 염치로.."

 

 

료코의 말의 나는 료코를 책임지겠다고 결정했다.그래 이게 맞는거다.생각해보면 이 모든 알의 원흉은 나였다.내가 책임을 료코에게 맡겨서는 안되는거였다.울먹이는 료코를 안아주며 말했다.

 

 

"내가 책임질게.키세."

 

 

료코는 그럴필요없다며 한사코 거부했지만 그 모습에 죄책감과 유키에 대한 생각에 미안함이 내 가슴을 쿡쿡 찔러왔다.나는 료코를 진정시키고는 료코를 안아주었다.

 

 

"선배...선배...죄송해요..."

 

 

료코는 내 품에 안겨서 울었다.이 와중에도 이게 유키였다면..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헤어지자고...?유키오...무슨 소리야?갑자기 왜?"
"미안해.너한테는 이말밖에 못해주겠다.미안하다."
"아니 내가 듣고싶은건 미안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왜?너가 바람이 난다던가 그런건 상상이 가지않아.나는."
".....료코랑 자버렸어.술김에.그리고 애가 생겼어."

 

 

유키의 표정은 나락으로 빠진 애처러운 여인의 표정이었다.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눌러왔다.하지만 여지를 줘서는 안된다.그거는 료코한테도 유키한테도 할짓이 못되는거다.

 

 

"하...하?.....유키오......"
"미안하다.정말."
"........료코지?료코가 꼬신거지?"

 

 

유키는 울면서 소리쳤다.내가 그럴리없다면서 가슴을 퍽퍽쳤는데 그 아픔이 뼈저리게 느껴졌다.유키는 내가 아무말도 안하자 울다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유키오.."
"..미안하다.정말 좋아했어.미안해."

 


유키는 내말이 끝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고 나도 가만히 앉아있다가 계산을 하고 나왔다.복잡한 기분이었다.
-
모리야마에게 료코와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모리야마는 처음에는 실망이라고 화를 내다가 아무말도 못하자 모리야마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난 니가 그럴줄은 몰랐어."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건 아니잖아..?유키한테 사과하고.료코한테도 그러고."

 

 

그날따라 모리야마와 나사이에서는 말이 없었다.서로 술만 홀짝이다가 헤어졌다.
-
주위의 반응은 여러가지였다.료코가 ㅆ.년이라던지 걸레라던지 아니면 료코가 잘어울린다던지 내가 쓰레기라던지 유키가 나쁜년이라던지...유키는 미안하게도 자기 친구들에게 유키가 먼저헤어지자고했고 힘들어서 술마시다가 료코가 위로해줬다가 료코와 사랑에 빠졌다라고 소문을 무마해 주었다.그 소리를 듣고 유키에게 가려고했으나 유키는 나를 보자마자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야 신경쓰지마 하고 돌아서 버렸다.나는 알고있다.유키가 지금 울고있다는 것을.달려가서 안아줄수없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욕이 나왔다.유키와의 만남에 지친 나는 벤치에 앉아 쉬고있는데 료코가 다가왔다.

 

 

"선배...죄송함다.."

 

 

료코는 나를 볼때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이 무슨 이상한 일인가.강간을 한것도 나인데 정작 피해자인 료코가 나에게 사과를 한다는것이 이상했다.그래서 하지말아달라고했다.하지만 료코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선배가 제가 아닌 유킷치를 좋아한다는 건 저도 잘알아여.선배가 힘들어 졌는데..."
"아냐..유키일은 신경쓰지마.너를 사랑하도록 노력해볼게."
"카사마츠선배.."

 

 

료코는 내게 안겨왔다.
-
결혼식 준비는 급하게 서둘렀다.료코의 부모님은 료코에게서 내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기뻐하셨다.나의 부모님은 유키가 아닌것에 불만이신듯했지만 차갑고 예의바르지않을것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싹싹한 모습에 결국 허락하셨다.양가의 허락이 끝나고 나서 료코의 친구들인 세이카가 결혼식장을 싸게 빌려주고 미도리마의 남자친구인 타카오가 료코의 드레스를 맞춰주었다.료코의 드레스 입은 모습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떼어두고 봐서 아름다웠다.그래서 더 미안해졌다.아무리 노력해도 료코는 예쁜여자후배,못된말이지만 성적으로는 흥분할수 있어도 마음이 당기지않는 다는걸 누구보다 내가 알기에 미안함이 들었다.저렇게 예쁜데 사랑해주지못하는 남자와 결혼해야한다니.

 

 

"선배!저 이뻐여?"
"어..어?"
"...안 이쁨까...?히잉-"
"예뻐.엄청."
"히잇-꺄아아아 선배 좋아여"

 

 


료코는 내게 안겨왔고 나는 료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료코는 그날의 일은 잊은 듯이 해맑게 웃었다.

 

 

"키세.근데 그 '선배'라는 호칭 결혼...해서도 계속할거야?"
"네?...음...그러고 보니 계속 할수는 없나여..?"
"아...계속 써도 되ㄴ.."
"으으으으으음!"

 


료코는 고민하는듯한 표정을 짓다가 내손을 갑자기 덥썩 붙잡고 말했다.료쿄의 눈이 바짝거렸다.

 

 


"유키옷치!유키옷치라고 불러도 되여?"
"어?....응"
"그럼 선배도..아니 유키옷치도 저를 료코라고 불러주세여!"

 

 


유키의 해맑은 미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키옷치!말해주세여!"
"응?"
"...료...료코라고..말해주세여!"
"..아...료...료코...?"

 

 

몇달전까지만해도 그저 후배였는데 이제는 애인이고 아내라니.어색했다.결혼은 거의 강제로 한일이지만 료코와의 결혼생활은 즐거울거라고 생각한다.료코는 밝은 아이이고 재미있는 아이이고 눈치가 없고 백치미가 있지만 선천적으로는 착한아이니까.다만 걱정되는게 나는 즐거울지라도 료코는?어린 나이에 임신을해서 애도 낳고.료코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지는 모르지만 여자라면 다들 사랑받고싶어할텐데.내가 사랑을 준다해도 그건 아마 그저 좋은 후배,좋은 친구라는 느낌이고 아니면 가짜사랑임이 틀림없으니까.내 마음속에는 료코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으니까.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자 료코는 벌써 옷으로 갈아입었는지 가요가요~ 하면서 내손을 흔들더니 나를 이끌었다.
-
눈 깜짝할사이에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하객으로는 료코의 중학교시절부터 친구인 애들과 그애들의 애인들과 텔레비전에서 몇번씩 본적있는 연예인도 여럿있었다.그리고 나의 중학교,고등학교 동창들은 나에게 와서 어쭈- 대단하다 하면서 나를 찔렀다.

 

시작하기 바로전에 긴장했는지 나는 화장실이 급해서 화장실을 들렀다.그리고 손을 씻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료코 정말 대단해.무섭지 않냐."
"그래도 료코랑 잘..."


"카사마츠씨 입장준비하셔야해요.빨리나오세요!"

 

 

남자들의 목소리는 나를 찾으러온 사람에 의해 멈춰졌다.내가 나와서 그들을 쳐다보자 그들은 텔레비전에서 몇번 본 사람들이었다.이들에게서 료코의 이름이 나와서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잠시 쳐다보자 그들은 결혼축하한다면서 료코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했다.그말에 잊었던 료코의 임신사실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
주례는 평범했다.어느 결혼식을 가도 들을수 있는 주례였다.멍하니 있는사이에 결혼식은 거의 막바리를 달리고 있었다.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긴장한 마음이 해소되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한여자가 눈에 보였다.최대한 얼굴을 가리려고 노력한듯보였지만 나는 알수있었다.유키였다.

 

 


"...신랑은 신부 키세 료코양을 영원히 사랑하실 것을 맹세하십니까?"
"..........네"

 

 


유키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유키를 볼수없었다.료코와 나는 마주보고 나는 반지를 료코한테 끼워주었다.료코는 기뻐보였다.료코는 워낙 이쁜데 신부여서 그런가 더 예뻤다.하지만 나는 자꾸 무의식적으로 유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료코는 그걸 알고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요.유키옷치"

 

 

료코는 누구보다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나는 대답할수없었다.

 

 

 

 

 

 


-the end-

 

 

 

 

 

 

 


-키세키 전원 농구를 안하고 ts되었습니다.
-슈토쿠는 진학교라는 설정붕괴를 시켰습니다.
-하이자키가 ts되어 카이조에 다닙니다.
-하나미야도 ts됩니다.
-설정붕괴가 많으니까 조심해주세요.
-모브키세가 있습니다.

 

 

 


나는 남부럽지않는 외모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왔다.외모로 여자애들에게 욕도 먹고 왕따도 당했지만 괴롭긴 했지만 버틸수 있었다.내가 못나서 왕따를 당했다면 몰라도 예뻐서라면 그건 좋은거라면서.중학생때는 아카싯치,무라사킷치,아오미넷치,쿠로콧치,미도리맛치라는 친구들도 생겨서 기뻤다.모든 점이 맘에 들고 그런건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생긴 친구들 였기에 소중했다.재미있게 중학교생활을 보내다가 아카싯치는 부모님일때문에 멀리있는 라쿠잔으로 무라사킷치는 이사때문에 요센으로 쿠로콧치는 가까운 세이린으로 아오미넷치는 (자기는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좋아하는 모못치을 따라 토오로갔다) 토오로 미도리맛치는 의대를 가기위해 진학교인 슈토쿠로 가서 뿔뿔히 흩어지게 되어 두려워졌다.행복했다가 그 힘들었던 시기로 돌아가려니 더 힘들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테이코중시절 사이가 안좋았던 쇼쨩이랑 같은 학교,같은 반이 되었다.쇼쨩도 카이조에서 친구가 없었는지 처음에는 서로에게 시비를 걸려고 갔다가 나랑 쇼쨩을 욕하던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 여자애의 뒷담화를 하다가 미묘하게 친해졌다.나랑 쇼쨩이랑은 비슷한 점이 많아서 아직까지도 으르렁거리지만 어두운 점이 비슷했기에 서로를 이해해줄수 있었다.그러다가 나는 쇼쨩의 절친인 하나미얏치를 만나게 되었다.처음에는 하나미얏치의 행동이 재미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순간부터 하나미얏치의 행동에 흥미를 느끼는 내가 있었다.하나미얏치는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하나미얏치는 뒷세계에서는 유명한 걸레이다.걸레라고해서 이남자 저남자에게 대주고 다녀서는 아니고 정확히는 걸레보다는 여왕님이다.남자들은 하나미얏치랑 데이트,아니 그저 손이라도 잡거나 펠라한번해주는 것만으로도 헤롱헤롱하면서 하나미얏치의 충성심 넘치는 개가 되었다.나는 나름 유명한 모델이다 보니 대놓고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나의 약간의 손짓만으로도 남자들은 내편이 되어주었기에 꽤나 즐거웠다.카사마츠선배는 순진해서 모르겠지만 키세 료코는 좋은 아이가 아니었다.카사마츠선배에게 진심으로 반해 농구부에 들어가서는 남자들에게 여지를 주어 남자들을 꼬시지는 못했다.애초부터 그런 손짓이 없어도 남자들은 내얘기를 들어주고 따라줬으니까.하나미얏치는 내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쇼쨩은 농구부매니저를 하면서 애교를 부리는 내 모습에 가증스러워하면서 쇼쨩도 선배들앞에서는 내숭을 떨었다.쇼쨩은 딱히 하나미얏치처럼 남자들에게 기웃거리지는 않았지만 하나미얏치를 따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카사마츠선배가 졸업하고 농구부선배나 동갑이랑은 꽤나 죽이 맞았기에 고등학교시절내내 내숭을 떨며 차갑고 사람을 무시할것같고 차별할것같은 키세는 사실 털털하고 애교많은 여자애라는 가짜이미지를 내세웠다.그래서 다들 쇼쨩과 친하게 지내는걸 보면서 쇼쨩도 사실은 착한애 아니야?하면서 이미지도 좋아지고 쇼쨩은 기분은 더럽지만 나랑 만날건 좋게 생각한다고 나중에 말해줬다.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본격적으로 광고와 예능과 드라마와 영화출연때문에 눈코뜰새없이 바빴다.그래도 중학교친구들과 쇼쨩과 하나미얏치랑은 카톡은 주고받았지만 카사마츠선배와 농구부레귤러들과는 카이조농구부만남같은게 아니면 따로 연락할 기회가 없었다.그러다가 나에게 기회가 생겼다.

 

 


고등학교시절 카사마츠선배는 정말 순진했다.조금이라도 파이거나 달라붙는 옷을 입고오면 평소처럼 때리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는게 눈에 보여 가끔씩은 그런옷도 입고 유혹도 해보았지만 꿈쩍하지않았다.카이조내에서는 키세 료코가 카사마츠선배를 좋아한다는건 유명한 소문이었지만 카사마츠선배는 좋은후배이상으로 나를 보지않았다.그래도 나는 선배는 나 말고 다른 여자에게는 아직도 약하길래 사귈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드라마가 종영되고 휴식기를 가지기로 해서 쉬다가 카사마츠선배가 보고싶어져서 카톡을 열었는데 카사마츠선배의 프사에 처음보는 나보다 외모가 몹시 떨어지는 여자랑 사진이 찍혀있었다.여자의 감으로 그여자는 카사마츠선배의 애인이었다.머리에서 핀치가 나가는 기분이었다.이 나를 두고?내가 그렇게 애교부리고 구애했을때는 무시했으면서?여자로서 모델로서 프라이드가 깎이는 기분에 바로 하나미얏치와 쇼쨩과의 단톡에 카사마츠선배여친 정보를 구한다고 카톡을 하자 하나미얏치는 빠르게 정보를 캐서 보내주었다.

 

 


사쿠라 유키.
25살.ㅇㅇ대학교 유아교육학과 재학중.1년 휴학.

 

 


객관적으로 보면 유키라는 년도 꽤나 미인이다.하지만 연예계에서 활동하다보니 눈이 높아졌고 내친구들도 연예인급이상인 여자애들이다보니 유키라는 년은 꽤나 평범하고 밋밋하게 느껴졌다.카사마츠선배는 이의 어디에 반한거지?다리를 잘벌려줬나?아니 카사마츠선배는 그런걸로 넘어갈 남자가 아니지.돈이 많나?

 

 


그때 카톡이 울렸다.하나미얏치였다.

 

 


[야아-료코 너 짜증나겠다ㅋㅋㅋㅋ나도 짜증나ㅅㅂ]
[ㅇㅇ 이년 뭠까?존/나 못생긴게ㅋㅋ시/발/년ㅋㅋㅋㅋㅋ뭔데여?]
[야 나 한놈 꼬셨다ㅋㅋㅋㅋㅋㅋ]
[누구여?]
[너도 알텐데ㅋㅋㅋ농구부할때 그 세이린 짜증나는 새끼]
[아아 하나미얏치가 키리사키매니저할때 그 짜증난다고했던?ㅋㅋ]
[ㅇㅇ존//나 걔네 우승하고나서 몇번이나 연락하더라?존//나 짜증나서 관두려다가 존'//나 연락해서 너무 짜증나길래 한번 만났다]
[헤에-]
[아 근데 이새끼 ㅈㅈ가 존//나 시//발 내가 본 새끼중에 제일 크더라.그래서 했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얔ㅋㅋㅋㅋㅋ]
[근데 임신ㅅ//ㅂ근데 이거 알리니까 책임지겠다고 졸졸따라다녀서 낙태도 힘들고.내 인생 ㅈ//망]

 

 

 

그때 내 머릿속을 팟하고 생각하나가 지나갔다.

 

 

 

[하나미얏치 ㄳㄳ 그방법이 있아ㅣ;]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카사마츠선배도 그사람만큼은 아니지만 꽤나ㅋㅋㅋㅋㅋㅋ순진하셔서]
[아ㅋㅋㅋㅋㅋㅋㅋㅋ뭐 필요한거 있냐?]
[약.강한거면 좋아여.]

 

 


-
선배에게 약을 먹엿는데 꽤나 잘 참던데 그모습이 귀여워서 죽을뻔했다.은근슬쩍 터치도 해주자 붉어지는게 너무 사랑스러웠다.그러게 그년이랑 사귀래요?제가 있는데.그년보다 가슴도 크고 얼굴도 예쁜 제가 있는데.

 

 

 

선배는 결국 욕구를 못이기고 나를 덮쳤다.선배에게 내 처녀를 줄수있어서 너무 기뻤다.선배의 동정은 내가 아닐지도 모르지만.선배가 나를 자꾸 유키라고 하는것빼고는 너무 좋았다.싫은척 선배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선배가 박아오는대로 허리를 흔들었다.처음이라 상상도 못할만큼 아팠지만 선배라고 생각하니 기뻤다.하나미얏치가 알려준 남자들을 녹이는 기술도 사용해보았다.선배는 그 기술 한번에 가버렸다.귀여웠다.선배는 한번으로는 만족을 못했는지 여러번 내 몸 깊숙히 ㅈㅇ을 뿌려줬다.임신이 되기를 기도하며 지쳐잠들었다.

 

 


옆에서 움찔거리는 기척에 눈을 뜨니 선배가 몹시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나는 마치 이상황을 선배의 잘못으로 몰아갔다.대놓고도 안되고 그렇다고 선배의 행동을 정말 용서해주는것처럼 굴면 의심을 살수있으니까 빙 돌려말했다.몇번이나 연습했던 대사였다.

 

 


"선배 여친있는거 알아요.모르는척 해드리게습니다.어차피 남자를 제집으로 들여온 저도 잘못임다..남자랑 단둘이서 한집에서 술마시려고 한 저도 잘못이 없다고는 못하겠네여.그리고 선배.지금와서 할말은 아니지만 좋아함다.죄송했음다.접겠습니다.그리고 저 바쁘니까 가주세요."
"미..미안해 키"
"전 씻으러 가야하니까 빨리 가주세요"

 

 

 

역시 연기자의 소질도 타고난 나여서인지 어색함이 없이 술술 나왔다.선배 잘못이 아니라 내잘못으로 돌리지만 용서하지 않고 차가운 말투로.지금 선배는 유키라는 년을 만나도 내생각이 날거다.선배가 허둥지둥 나가자 나는 웃었다.크크크크크 거리면서 배를 잡고 침대를 뒹굴었다.하지만 임신이 될가능성이 높은 날이라고해도 임신이 확실치않으니 연락처에서 나랑 자고싶다고 한 유부남들을 여러명에게 연락을 넣었다.처음이 선배니까 괜찮아하면서 나는 침대에 누워서 웃었다.

 

 

 

-
그 남자들과의 섹스는 꽤나 감흥이 없고 아프기만 했다.안싸를 허용하는 대신 이일은 비밀이라고 약속을 했다.이사람들은 다 아내가 있는 사람들이기때문에 나와의 섹스를 함부러 말하고 다닐수도 없을것이다.몇명이 내 몸안에 싸고 갔는지도 모르겠다.일주일간은 남자와 섹스를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선배는 몇번이나 전화가 카톡과 문자를 보냈지만 씹었다.죄송해요 선배-후후
-
몇주가 흘렀고 쇼쨩은 카사마츠선배가 유키랑 만나서 요즘은 꽤나 잘지내고 있다고 말해줬다.그소식을 들으니 요즘따라 배가 땡겨지고 아팠는데 그것이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나는 바로 임신테스트기를 사왔다.역시 두줄이었다.선배의 애가 아니어도 좋아.선배는 그래도 나를 책임질수밖에없어요.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지금 밝힐까 고민도 했지만 결국 아닌척 난 괜찮으니 원나잇했다고 치자며 선배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했다.선배는 그렇게 생각할수 없다는건 내가 더 잘안다.

 

 


임신했다는걸 깨닫자 꽤나 힘들었다.하지만 견딜수 있었다.이제 카사마츠선배는 이제 곧 내꺼가 된다.선배가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왓다고 생각될때쯤 선배에게 연락을 해서 선배에게 임신소식을 알렸다.결국 선배는 내게 져버렸다.선배는 나와 내 아가를 책임지겠다고 했다.선배는 유키와 헤어지겠다고 했다.나는 거짓으로 울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사실 반은 진심이었다.다만 그이유가 선배와 유키를 헤어지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선배인생을 망치것에 대한 미안함때문에.하지만 미안함보다 기쁨이 컸다.

 

 

 

-
선배와의 결혼식준비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선배네 부모님도 결국 더 예쁘고 어리고 싹싹하고 끼있는 나를 선택하셨다.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선배와 드레스도 고르고 이런저런 준비로 많이 만났다.선배의 눈은 나를 보고있지만 나를 향한건 아니라는것쯤은 알고있다.나를 유키와 대입했을지도 모르고 그저 유키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선배가슴에는 유키라는 여자가 가득차있다는건 알고있지만  선배는 그여자랑은 더이상 만날수가 없다.유키라는 여자는 의외로 소문을 잠재워주고 결혼식장에 와서 깽판도 부리지 않았다.하나미얏치랑 쇼쨩이 내 계획을 듣고 소문이랑 뒷처리걱정을 해줬지만 그때는 생각을 안했는데 계획이 성공하고 나서야 걱정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선배는...아니 이제는 유키옷치와의 결혼식은 몇일앞으로 다가왔다.

 

 


아카싯치는 역시 부자답게 식장도 고급스러웠다.아카싯치는 모르겠지.아오미넷치도.미도리맛치도.쿠로콧치도.무라사킷치도.신부대기실에서 기대하면서 대기하고있는데 아카싯치가 남친과 함께 들어왔다.그 남자친구라는 사람은 고등학교동창이라고 했다.그 남자는 아카싯치에게 관심도 주지않았지만 나는 알수있었다.아카싯치가 축하한다면서 나를 부러워할때 그 모습을 다정하게 쳐다보고있었다.그뒤로는 모못치와 아오미넷치가 들어왔는데 아오미넷치는 부럽다하면서 나를 껴안았고 모못치도 예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미도리맛치는 그 럭키아이템이라는걸 들고 남자친구와 손을 꼭 붙잡고 왔다.무라사킷치도 애인이 챙겨주면서 같이 다니던데 부러웠다.억지로 남의 애인을 가로채고 임신하기위해 여러남자와 잔 나지만 그래도 유키옷치의 몸보다 마음을 얻고싶었다.이제와서는 무리지만.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유키옷치는 죽을때까지 유키란 여자를 잊지않을것이다.

 

 


결혼식은 긴장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않았다.평소의 나라면 졸았을 주례인데도 오늘은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긴장이 풀릴때쯤 유키옷치를 쳐다보자 유키옷치는 누군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있었다.가릴건 다 가렸지만 나는 알수있었다.불쌍하고 안타까운 유키였다.나는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어느 누구보다도 예쁘게.

 

 

 


유키옷치 죄송합니다.유키옷치가 죽을때까지 그여자만 바라볼거는 저도 알고있어요.저를 이성으로 보시지않을거라는건 알고있어요.유키옷치는 제가 선배때문에 인생을 망친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에요.유키옷치의 마음을 얻을수 없다면 몸이라도 얻고싶었어요.애초부터 유키옷치가 잘못한거에요.제가 아닌 다른 여자의 곁에서 행복하려고 한 유키옷치 잘못이에요.저보다 떨어지는 유키라는 여자를 만난 유키옷치 잘못이에요.이사랑은 보답받을수없는 짝사랑이라는건 알지만 이게 제 사랑이에요.

 

 


유키옷치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요,유키옷치"

 

 

 

 

 

 

 

-the end-

추가로 이야기를 하자면 죄송합니다.
쓰고나니 립센도 나빠보여..내가 바란건 요망한 키세냔에게 꼬여 안타까운 립센이 보고싶을뿐.
짝사랑이라는 주제로 사실은 처음에는 흔하게 풋풋한 러브스토리를 쓰다가 그러면 립황ts는 문체가 좋지않는이상..ㄷㄷ
중간에 오타라던가 지적할데가 많을거에요.제가 원래 썰을쓸때 꼼꼼하게 쓰는게 아니라서.애초부터 둘이 1살 차이나는줄알고 키세를 24살로 만들었다가 고쳤구요.사실 중간중간 미묘하게 목꽃,고녹,대적(먹적),빙자,도청은 제취향입니다.쓰고나니 파트너x키세키가 제 취향인것같아요.마이너..또륵(고녹 제외
목꽃 너무 뜬금없어서 죄송합니다..사실 홍재도 넣을려고했다가 원래 홍적하려다가 홍재할라했는데 쓰다가 지쳐서 삭제했습니다.
나름 키세가 나쁜냔인걸 비밀로 하려고 노력했지만 알아버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전개가 빠른건 제가 힘들어서..죄송합니다.그냥 대사 조금 나오고 몇줄 쓰고 쑥쑥지나가네얌..그냥 시점이 키세랑 카삼이니까 쑥쑥 지나간거라 칩시다..흐어..
사실 카톡같은건 오타를 내야하나 그리고 하나미야 말투는 뭘로해야하나 고민..
그리고 생각해보니 하이자키 하나미야 키세 동갑이 아니잖아..하나미야가 선배잖아..아 몰라 동갑이라 칩시다.
그리고 나름 복선이랍시고 립센시점에 나오는 료코의 소문들,결혼식장에서의 남자들의 대화,아무리 예쁜여자라고해도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립센의 흥분,립센과 키세에게 결혼식주례의 반응 차이는 모두 알수도있고 모를수도 있겠지만 복선임다.

 

그리고 결말에 대해 말해보자면
결말은 열린결말인데 립황은 결혼하고 이혼안해요.아마도.현실적으로 결혼하고 몇십년이나 지나면 거의 정으로 사귀는데 키세는 립센좋아하고 립센도 모난 성격도 아니니깐 그냥 행복하게 잘 살겠죠.사랑이 없을뿐.키세는 립센을 좋아하지만 립센은 절대 키세를 사랑하게되지않습니다.유키만을 바라봅니다.물론 바람은 안피울겁니다(아마).안타까운 유키랑 립센도 보답받아야져ㅕㅕ이렇게라도.

 

 

유키의 탄생은...
재미없는 잡담이지만 사쿠라 유키라는 이름은 사쿠라 치요 +유키노시타 유키노 에서 따왔슴다.
사실 다른망가 캐릭터(쿠농엔 여캐가 적으니)하려다가 유키는 되게 이쁜축이지만 키세나 쿠농ts여캐들에 비하면 쭈구리같은 외모로 설정했기에 다른망가 캐릭터를 쓰기가 미안하더라구요.다른망가 캐릭터를 쓰면 그 캐릭터 얼굴이 생각나니까.
치요랑 유키노가 평범해서가 아니라 그냥 옆에 내청코 라노벨이랑 노자키군 만화책이 있어서 사쿠라 치요..어 그래 사쿠라 흔하지 그래 성은 사쿠라 유키노 유이 사키 뭐할까 고민하다 유키노로 고르고 유키노라고하자니 어색해서 사쿠라 유키!...
쓸데없이 사족만 길었내요 죄송함다.ㅠㅠㅠ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워낙 립황 리버스가 독보적으로 인기가 많아서 읽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읽어주신분들께는 고맙고 감사합니다...._(_ _)_ 꾸벅


 

 

[하이큐/보쿠아카]

 

'더 이상 버티는건 무리야 들어갈 곳,어디던지 들어가서 일단 피부터 멈춰야겠어.'
아까 다친 옆구리상처가 생각보다 컷던 모양인지 걸으면 걸을수록 벌어져서 지금은 겉잡을 수도 없을만큼의 피가 흘러내린다.그렇게 몰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걷기도 괴로울 때에 창고하나를 발견했다.의심스러운 외관이였지만 지금 나에겐 어디를 따질 여유따윈 없기에 창고 쪽으로 발을 옮겼다.
'여기가 만약에 중요한 창고라면 문이 열릴린 없겠지 문이 열리면 별 볼일 없는 곳이거나,이미 쓸모가 없어진 창고일꺼야.'
살짝 긴장하며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었더니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쉽게 열린다.
창고를 쓱 훑어볼 여유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깊숙히 큰 박스들 사이로 몸을 숨기고 옷을 찢어 옆구리를 꽉 막고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뭐야,그 사이에 쥐라도 들어온거야?"
창고를 잠궈놓지 않고 간 것이 생각나 급하게 돌아왔더니 문에 핏자국이 마르지도 않고 들러붙어있었다.뭐 상관없을려나,이 정도 피면 꽤 다친 모양이니 처리하긴 쉽겠네.하며 한 손에 나이프를 빙글 돌리며 쥐를 찾기위해 창고를 뒤졌다.
"쥐가 아니라 생긴게 딱 고양인데?"
박스들이 겹겹히 쌓인 곳을 훑었더니 비릿한 피냄새를 풍기며 쓰러진 남자의 턱을 붙잡고 휙휙 돌려보니 생긴게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네 취향으로 생겼는데 죽이긴아깝고..역시 데리고가야겠는걸"
하며 남자를 들다 볼에 튀긴 피를 슬쩍 핥고는 얘는 피도 맛있네라고 중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
'?'
피로해서 제대로 떠지지않는 눈커풀을 억지로 들어올려 주변을 살피니 아까 그 창고가 아니라 약간은 낡아보이는 집이다.'여기가 어디지? 내가 창고가 아니라 집으로 들어왔었나?' 이상한 생각을 하고있을 때 쯤 끼익하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방 문이 열렸다.
"어라? 깨있네?"
"?"
"여기?우리집이야 너 말이야 우리집 창고 속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살금 들어와 쓰러져있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가지고있으면서 하는 일은 험해보이잖아 그러니 흥미가 안생길리가 있겠나? 아,허튼 하지마 부상자인 네가 도망쳐봤자 얼마나 도망가고 공격해봤자 이길 수나 있겠어?"
하얀머리에 덩치좋은 남자가 들어오더니 웃는 낯으로 주절주절 말한다.
"...현실적으로 그러네요."
"그렇지? 그러니 가만히 있도록 해 아카아시."
"이름.."
"아,미안 너 깨기 전에 좀 뒤져봤지"
"딱히 볼 것도 없었으니 상관없습니다만 여긴 어디?"
"우리집. 너가 우리집 창고에 쓰러져있길래 데려왔지."
"아,그 창고 방치되어있길래 버려진 창곤줄 알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관리 제대로 해주세요."
"죄송..이 아니라! 네가 먼저 내 창고에 들어왔잖아! 여기로보나 저기로보나 수상한 너를 신고도 안히고 죽이지도않고 데려온 나한테 감사하라고!"
"아,그러네요."
"'아,그러네요'가 아니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잘했어"
라며 내 머리를 톡톡 쳐준다. 사람손을 안타본지 꽤 돼서 그런듯 살짝 울컥헸지만 꾹 참고 물었다.
"근데 대체 하는 일이 뭐길래 저같이 여기로보나 저기로보나 수상한 사람을 집으로 들여요?"
"나?나는 그냥 산에 집짓고 사는 사냥꾼..정도? 자세한건 생략! 그런건 너도 안알려줄거짆아 그리고 널 우리집에 들인 이유는 너 얼굴이 내 취향이라서?"
"네?"
"너 얼굴 되게 내 취향이라고"
"특이하시네요."
"그치?"
"저 이제 괜찮아졌는데 이제 가보겠습니다."
"어딜가려구? 살려준 값은 해야지 않겠어?"
"아..그게"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집을 나서려하니 손목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윽"
"봐바 이 정도에 아파하는데 집 밖으로 나가면 널 잡으러 온 사람들한테 잡히지않겠어?"
"아니,딱히 쫒기고 있는 것도..아니고 아닌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횡설수설하네 아카아시"
내가 쫒기고 있다는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허둥지둥 손목을 잡힌채로 불안해하고 있는 나를 그대로 확 밀쳐 침대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와서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서, 이 침대에 누운 값은 해야지?"
"저..음..살살해주세요."
"큭 너 진짜 웃긴 애다. 그래,내가 너 오독 씹어먹기라도 할까봐?"
"깨무는 것도 싫으니 좀 참아주세요."
"생각해보고"
"윽"
.
덮칠 뉘앙스에 행동을 취하다 부르르 눈을 감고 한번 떨더니 다짐한듯 내뱉는 말이 '살살해주세요' 라니 진짜 얘를 어떻게하면 좋을까 또 다짐한 듯 하면서 무서워하는게 정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독오독 씹어먹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하지만 넌 좀 아껴야겠다.
.
.
여기서 끝..입니다. 씬은 없어여..많은 쌍욕과 질타를ㅋㅋㅋㅋ구상은 다 해놨는데 이게 구상한데로 글 쓰면 진짜 (제가)힘들어져서☆ 마감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나름 열심히 썼는데..제 손에서 완결난 소설은 이게 처음입니다. 짝짝 오메데토! 이제 전 이걸 메일로 보내놓고 밥먹으러 가야겠어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코멘트 부탁드리고 많은 질타 기대할께여..☆☆(아카아시 워더)
-익만의 깜찍이 지방령

 

 

 


 

[쿠로바스/적흑]

 

3월 20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는 이름처럼 피 같이 붉은 머리칼을 가졌다.

 

 

3월 21일

문학 시간이었다. 그가 앉은 줄이 작품을 읽었다. 절절한 사랑을 다룬 현대 소설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내자 심장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또박또박, 발음도 정확했다. 저 달콤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마 나는 귀가 녹아 없어질거야.

 

 

3월 22일

머리가 아파 양호실을 갔다. 그가 누워 있었다. 왜 누워 있냐고, 어디 아픈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근데, 그냥 말았다. 어차피 나 같은 애 알지도 못할테고. 그의 옆 침대에 누웠다. 기회다 싶어 그를 뚫어져라 봤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 높고 잘생긴 코, 크고 도톰한 입술. 그의 모습이 새삼 잘생겼길래 떨렸다. 쌕쌕거리면서 자던데 은근 귀여웠다.

 

 

4월 12일

그는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전교 회장 됐다고.. 앞 자리 여자아이들이 속닥거리길래 자는 척 몰래 훔쳐 들었다. 잘생겼는데 리더쉽도 있고 성격도 다정하다며 꺅꺅 거리더라. 그러면서 그를 갖고 온갖 망상을 펼쳐됐다. 미들 주둥이는 찢어버리는게 답인데.

 

 

5월 1일

등굣길에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가 인사해줬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 테츠야, 안녕. " 정말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는데 가까스로 참았다. 내 이름을 알았냐 물어보니 당연히 알았다며 웃어주는데 너무 기뻤다.

 

 

5월 2일

오늘은 학교 분위기가 싸했다. 무슨 일이지 싶어 조회 시간에 안자고 있었다. 어제 우리반 학생 3명이 얼굴 가죽이 벗겨진 채 발견 됐다며 담임 선생님이 말씀 하셨다. 세상에..., 너무 놀랐다. 내 앞자리 애들이었다. 어떡해... 애들은 건강하냐고 물었더니 표정이 싹 굳으시며 과다 출혈로 발견 됐을 땐 이미 죽었다고 하셨다.

하..,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하늘에선 주둥이 잘놀리길.

 

 

5월 28일

그와 좀 친해졌다. 그는 다정해서 반 아이들을 잘 챙겨주는데 내가 유독 학교를 안나오니 걱정이 많이 됐다고 내게 말해줬다. 그 때 기뻐서 살짝 얼굴이 빨개졌다. 티 났으려나, 나 좀 존재감도 많이 없는데 알아줘서 기분 좋다..

 

 

6월 3일

그의 집에서 시험 공부를 했다. 내가 모르는 문제들을 상냥하게 가르쳐줬다. 문제 알려주면서 팔이 살짝살짝 닿을때마다 얼굴 붉어졌다. 어쩐지 계속 그가 의도적으로 닿아온 것 같았다. 아닐수도 있지만, 진짜면 무슨 의미일까

 

 

6월 4일

치히로가 때렸다. 입에서 피가 났는데 키스했다. 반항하면 더 한짓도 하길래 가만히 죽 닥치고 있었다. 그러더니 지 혼자 헐떡이며 울었다.  나보고 욕했다. 년 이라고 왜 내 동생으로 태어났냐면서. 울며 말하는 꼴이 퍽 우스워 비웃어줬다. 새끼

 

 

6월 5일

허리가 떨어져버릴 것 같았지만 그가 보고 싶어 꾸역꾸역 학교를 갔다. 하루종일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대니 그가 걱정해줬다. 기뻐서 그의 품에 안겨 기절했다. 아, 사실 척이다. 나 연기 완전 잘하거든. 그가 다급하게 뛰어가는게 느껴졌다. 웃음이 나올 뻔 한걸 몇번이나 참았는지 모르겠다. 아, 재밌어~

 

 

6월 6일

요즘 학교를 너무 자주 간 것 같다. 치히로가 또 옆에서 치근덕 된다. 자꾸 목을 핥길래 반응 좀 해주니 좋아한다. 불쌍한 우리 형.

어,

그한테 문자가 왔다.

 [ 오늘은 왜 오지 않은거니 테츠야 걱정된다 혹시 무슨 일 있는건가 싶어 걱정된다 연락줄래? ]

웃음이 나왔다. 너무 행복하다. 연락은 안해야지.

 

 

6월 19일

그가 화를 냈다. 나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나한테 무서운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댔다.

 무서운 일?

이 근방에서 시체가 발견됐다고 여러 구가. 훼손이 심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심지어 몇달 전 시체도 있다고. 무서웠다. 그에게 걱정 시켜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당황하며 다시 달래줬다.

 나도 조심해야겠다

 

 

6월 23일

그와 같이 교문을 나왔다. 시험공부를 명목으로 그의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어서.. 그런데 치히로가 근처에 있었다. 보아하니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 그를 먼저 보냈다. 어쩔 수 없었다. 치히로를 끌고 사람이 없는 곳을 가서 화를 냈다.

왜 왔냐고 얌전히 집이나 쳐갈것이지-! 웃긴게 지가 더러 화를 내더라. 역겹다고 하니 입술을 물어버렸다. 힘만 더럽게 쎄서 뿌리치기 힘들었다. 아직도 피 터진 입술이 아프다. 감히 그와 내 시간을 방해했다.

 열받는다.

 

 

6월 24일

그가 나를 피한다. 아침에 아는 척을 안 하길래, 인사를 했는데 무시했다. 왜지.. 짐작이 안간다. 지금 너무 마음이 아프다. 자살하고 싶어 지금


봤대. 어제 형이랑 그런거 봤대. 형..

 


7월 1일

형이 없어서 요즘 쓸쓸하다.

 


7월 8일

손 떨린다. 이토록 상처 받은거 처음이다. 그에게 형이 일방적으로 그런거라고 나 절대 그런 애 아니라고 그랬더니 그가 픽 웃으면서 " 테츠야,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니?  혹시 나를 좋아했던거니 테츠야? " 하면서 골 때린다고 했다. 장난이라고 웃더니 알고 있었다며, 남자는 어떤가 궁금해서 그랬던거라 했다.

 아아, 일부러 챙겨준거구나 궁금해서...

 


7월 11일

그에게 고백했다. 좋아합니다. 그의 표정이 썩었다.

 

 


7월 12일

오늘은 그와 같이 등교했다. 기분이 좋았다. 조회를 마치고 자려는데 아이들이 수근거렸다.  ' 오늘 왜 안왔지? 연락도 안돼. '

 바보들, 아카시군이라면 내 가방에 있는데


 

 

[원피스/키드로우]

 


요즘 로우가 이상하다. 원래 이상한 놈이었지만 요즘들어 더 이상해진것 같다. 나랑눈도 않마주치려하고 자꾸 피하고, 그러면서 나한테 할말 많아보이는 눈을 하고있는데.. 아무튼 요즘 쫌 이상한것 같다.

 

 

일주일전

 

 

여느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자습시간.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 자식이 원하는데로 하고싶진 않았지만 그 위험한 자식이 무슨 짓을 할지 후폭풍이 싫어서 나온거라고 해두자.들리는 소문으로 도플라밍고의 악행은 단순한 학교폭력이나 일진회 수준들이 아니었다. 나보다 1년선배인 도플은 소문으론 남자여자 안가리고 자봤다는 쓰레기인데다가, 어느 조직폭력배 보스의 후임이라든지 마약을 한다든지 성매매를 한다든지 등등 별별 소문이 다있다. 정작 당사자는 신경도 안쓰고 오히려 즐기는것 같지만..어쨌든 도플과 관련된 일이 좋은 일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하.."


"어이. 로우 좀 늦은것 같군."


"급하게 갈거 있나?"


"훗훗훗. 너다운 대답이군 거기까지 갈필요없다. 저기 창고안에서 얘기하지."

 


왠지 곧 무슨일이 일어날지 상상이가는건 내착각이었으면 좋겠다. 창고쪽으로 걸어가자 도플 패거리 몇명이 스멀스멀 구석에서 기어나왔다. 루피에게는 소각장 간다고 말해뒀는데. 소각장 근처니까 내가 안오면 여기도 찾아보겠지? 빨리 누구좀 데려왔으면 좋겠다.

 


"날 부른 용건이 뭐야"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꽤 흥미로운 소문을 들었다. 로우"


"그래서 그게 어쨌단 거지?"


"들어보니 현재 오랜 친구인 키드를 좋아한다는거 같은데.."


"돌려말하지 말고 빨리 본론을 얘기해."


"훗훗 성질급한건 여전하군. 뭐 네가 내 재미에 조금만 맞장구쳐주면 그 사실을 모른척 해줄 수 있는데 말이지.."


"너 따위의 비위 맞춰줄 생각 없어."

 


점점 패거리가 나를 빙둘러싸는듯 했다. 않좋은 예감이 들어 빨리 나가려고 했는데 이미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듯 하다. 맹수때에게 둘러쌓인 초식동물이 이런 느낌일까.

 


"꽤나 당황한것 같군.로우"


"착각도 정도껏 해. 난 누구씨와는 달리 좀 바쁘거든. 용건 없으면 이만 비키시지?"


"내가 원하는게 뭔지 너는 이미 알고 있는 듯 한것 같은데..아닌가?"


"맞춰주는것도 한계가 있어.말장난할 시간 없으니 이제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훗훗.로우..비싸게 굴지 말라고.어차피 키드를 좋아하는거면 언젠가 하게될 것 아냐? 나랑 잠깐 재미좀 보자는게 뭐가 어렵나? 비밀도 지키고"


"네놈같은 쓰레기랑 얼굴맞대고 말하는것도 수치다."


"훗훗 로우.말이 꽤 거친것 같은데. 진짜 수치심이 뭔지 느끼게 해줄까?"

 


입안에 미처 꺼네지 못한 욕지거리가 남아있었지만 더 했다가는 감당못할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질질끌지?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처럼. 때리지도 않고 대화만하다니... 왠지 도플답지 않은 행동들이다.

 


"더이상 할얘긴 없겠지?"

 


도플은 더이상 대화하지 않았고 나는 창고에서 탈출을 감행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림자 같은 패거리들에게 바로 발목 잡혔고 연이어 미리 약속이라도 한듯 구타가 이어졌다. 나참. 때릴 구실이라도 찾고 있었나..한참을 발에 밟히고, 움직이지 못 할때쯤에서야 발길질이 멈추었고 도플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시간은 많은데 말이지. 너는 너무 성질이 급해. 그것도 매력이지만..훗훗"

 


도플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키드에게만 모두 주기엔 아깝지 않아? 좋은건 나눠 쓰자고."

 


도플의 손이 내 허리를 스쳐지나가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남자를 좋아하게 된것도 이번이 처음이었고, 난 아무런 경험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곳에서 이런놈과 하느니 차라리 키드랑 루피 시험공부 시키는게 나을 것같다. 창고 안은 너무 어두워서 한 낮이지만 도피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옷이 반쯤 벗겨져나갔고, 나는 발버둥조차 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루피 이자식은 왜않오는 거지? 올때가 됬는..

 


"로우!!!어딧어?! 뭐야 왜 이렇게 어두워..?...로우? 거기 누워서 뭐하는거야?"

 

"보면 모르겠냐. 빨리 빨리좀 다니라고. 그런데 혹시 혼자 온건 아니지?"

 

"나 혼자야."

 


..되는 일이 없다..

 


"훗훗. 이게 누구야..루피?"

 

"밍고? 로우!! 너 밍고 자식이랑 뭐하는거야?"

 

"나도 별로 안하고 싶다."

 

"루피. 우리가 뭐하려했는지 궁금한가?"

 


루피 뒤로 도플의 패거리가 스멀스멀 접근했다. 루피만으로는 여길 빠져나갈 수 없겠는데..젠장..

 

"하나도 안궁금해! 로우 바빠. 너따위랑 놀아줄시간 없어! 키드가 찾고있다고!? 나도 빨리 에이스한테 가봐야되!"

 

"내앞에서 재롱만 잠깐 떨어주면 곱게 보내주지. 루피.. 혹시 그말 아나? 들어올땐 맘대로겠지만 나갈땐 아니라는거."

 


도플이 루피를 먼지 쌓인 매트리스 위로 쓰러뜨렸다. 먼지가 공기중에 떠다녀 눈살이 찌뿌려졌다. 젠장..몸이라도 멀쩡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턴데. 아까 괜히 탈출시도를 한것 같다.

 


"루피!!!!"

 


무기력하게 눈을 감은체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데 문이 급하게 열리는 소리와 여러개의 발소리 그리고 여러 고함소리도 들렸다. 나는 밀려오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내가 다시 눈을 떳을땐 하얀 천장이보였다. 그정도로 맞았으니 당연한건가..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병원신세라니.. 몸을 움직이니 약간의 뻐근함만 있었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은것 같으니 금방퇴원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런데 얼굴에 상처가 꽤 많이 났다. 누구한테 맞았다고 자랑이라도 하란건가.. 그러고보니 나는 에이스가 오면서 긴장이풀리고 정신을 잃은것 같다. 에이스는 루피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왔는데, 들어온 사람들 고함소리들중에 내가 기대한 목소리는 없었다.

 


"어? 로우! 정신 차렸네?"

 


루피가 편의점 음식들을 손에 한아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키드는? 지금 누가 쓰러졌는데 병문안도 안온거야?"

 

"아까 까진 있었는데 너무 늦어서 내가 집에 가라 그랬어."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살짝 넘어가고 있었다. 루피는 에이스와 단둘이 사니까 통금이 자유인건가..루피는 잠이 오지 않는지 계속수다를 떨었고, 나도 막 자고 일어난 참이라 다 들어줬다. 루피에게 들은 말로는 에이스가 왔었고, 에이스의 친구들과 도피패거리가 대치상황 이었다가, 학주가 들어오면서 상황이 마무리 됬다고 했다.그리고 이후에 내모습을 보고 도플은 학교폭력으로 징계를 받아서 당분간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됬다. 그나저나 징계가 풀리면 다시 학교에 나올텐데...그이후엔 어쩐다...

 


"아. 로우. 그거 키드도 알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창고에서 도플을 보기전 내가 키드를 좋아한다는걸 들켰을때 그사실이 키드 귀에 들어갈 것은 예상하고 있던 사실이다.

 


"키드는 어디까지 아는거지?"

 

"글쎄.."

 

"루피? 여깃어?"

 

"에이스?"

 

"루피. 너무 밤늦게 있는거 아냐? 로우는 내가 볼테니 넌 집에가. 지금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빨리 가서 집지켜."

 

"내가 로우 병간호 해줘야 하는데.. 어쩔수 없지. 에이스가 나 대신 로우좀 봐줘!"

 

"루피 난 애가 아니야"

 

"내가 잘 볼테니 걱정말고 가봐 루피"

 


사지가 망가져도 기본적인일은 내가 할 수 있다니깐 끝까지 신신당부하는 루피이다. 정작 내 보호자는 오시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어이 로우 자냐?"

 

"아니"

 

"유스타스말이야. 내가 말해줬어."

 

"뭘말이지?"

 

"너가 어쩌다 이지경이 됬는지 그때 무슨일이 있었는지 토씨하나 틀리지 말고 얘기하랬거든. 내가 걔보다 더 무섭겠지만 너 병원 실려가고 유스타스 표정이 사람 하나 죽일것 같이 변하더라."

 


키드가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었다니..뭐 친구일이니까 그렇겠지 뭘또 기대하는건가 나는....

 


"일단은 일방적인 폭행인걸로 말해뒀어. 아 네 옷이 좀 벗겨져 있길래 그거 당할뻔 했다는 얘기도 했다. 뭐 알아 두라고."

 

"...."

 

"안심해. 키드는 아직 니가 걔 좋아하는거 까지는 몰라"

 

"?! 그걸 어떻게 알았지?"

 

"뭐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리고 내눈엔 보이던데. 내가 눈썰미가 좀 있나봐"

 


에이스가 알고 있었다. 전혀 예상 못했지만 나쁠건 없는것 같다. 루피같은 바보한테 들키는 것보단 낮지.

 


"의사가 내일까지 푹쉬고 오후에 퇴원하라더라. 부모님께 연락은 안드리냐?"

 

"애도 아니고. 나 혼자 퇴원 수속 밟을 수 있어. 좋은일도 아니고."

 


에이스는 이미 밤이 늦어서 보조침대에서 곧 골아떨어졌다. 부모님은 나중에 연락 드려야지..

 


아침에 일어나보니 에이스는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가고 없었다. 의사를 만난 뒤 가도 된다는 확답을 받고 병원을 나오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학교는 병결처리 됬을테고 하루 병원침대에 있었지만 아직도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치는듯 해서 집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집으로 가니 역시나 집엔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어젯밤에도 안들어 오신것 같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빨래통을 보니 내옷 밖에 없었다. 문득 키드가 보고 싶었다.

 

 

/

 

 

다시 일주일 후

 


역시 도플이 사고친 일 이후부터 로우가 이상해 진것 같다. 옛날에 그렇게 잘하던 나 꼽주는 일도 그만둔것 같다. 평화롭긴 하다만 이래선 학교다니는 맛이 않나잖아! 내가 유일하게 학교다니는 이유는 밥먹는거랑 로우랑 루피 괴롭히는건데(본인생각과 다른듯) 루피는 다를게 업는데 로우가 좀 변한것 같다.

 


"어이 루피. 트라팔가 요새좀 이상하지않아? 나랑 말을 안해"

 

"너가 싫어진게 아닐까?"

 


루피랑은 제대로된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뭐 아는거 없냐. 걔 혹시 나한테 뭐 잘못했나?"

 

"너가 잘못했을진 몰라도 로우가 너한테 잘못을?"

 

"..됬다 밥이나 먹어."

 


로우는 심지어 오늘 점심도 먹지 않았다! 어떻게 점심을 않먹고 학교에서 버틸 수 있지? 매점에는 빵밖에 없을텐데...로우는 루피하고는 잘 얘기하다가 내가 가까이오면 입을 싹닫고, 갑자기 공부한다. 정말 나를 피하려고 의도하는게 티가 날정도로...

 


로우가 날 왜 피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에 로우가 도플한테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로우한테 화가 났었다. 어째서 나에겐 얘기하지 않았는지. 루피자식 말고 왜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는지. 당사자인 로우말고 에이스에게 들었을때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나한테 미처 알리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도플라밍고에 대한 소문은 우리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 위험한 자식을 로우가 혼자 만나러 가는데..물론 로우가 애도 아니고 얼마나 큰일이 있겠냐만 로우는 당연히 혼자 갔을거고 그자식은 패밀리인가 뭐시긴가 또 주렁주렁 달고 나왔을 것이다. 그럴게 뻔한데..

 


"걱정안할리가 없잖아 로우."

 


이유없이 답답하다..

 


/

 


도플라밍고가 며칠째 소식이 없다. 물론 징계를 받았으니 학교 않나오는건 당연하지만 도플라밍고 라면 오히려 학교밖에서 보복할텐데 일주일넘게 아직도 난 멀쩡하다. 그자식이 무슨짓을 할지 걱정되는건 아니지만 괜히 부모님 걱정끼쳐드리기도 싫고, 또 루피같은 주변인들이 말려들까봐 불안해서 왠지 그자식 페이스에 말려드는것 같아 짜증났다. 그리고 그일이 일어난 뒤로 키드와 기본적인 대화조차 한적이 없었다. 하루쉬고 다시 학교에 갔을때 평소처럼 루피가 옆에서 재잘대는 소리를 들으며 반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키드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죄지은 사람 마냥 바로 키드눈을 피해 버렸다. 왠지 아무렇지 않은척하면 안될일 같았다. 키드도 무슨이유 때문인지 조금 화나 보이기도 했고...그리고 키드도 나에게 아무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단세포자식이 무슨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얘기는 해봐야겠다. 계속이렇게 지내는건 나에게도 키드에게도 좋진 않을테니까..

 


-지이이이이잉 지이이이이잉

 


모르는 번호다. 키드인가?

 


"여보세요."

 

'훗훗 로우 오랜만이군.'

 

"..도플라밍고. 이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뭐. 학교에 널린게 학생기록 아닌가? 유명인 번호하나 따는것 쯤이야 일도 아니지.훗훗'

 

"전화한 이유나말해."

 

'내가 무례하게 군짓을 용서해 줬으면해서 좀 볼까 하는데.'

 


물론 함정인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알아봤자 어쩔수도 없고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이다.

 


"지금보지"

 


/

 


1시간 가량 고민끝에 결국 로우를 찾아가서 말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먼저 말하지 않는한 이 침묵이 해결될리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이렇게 지낼수도 없는 노릇이다.

 


-띵동

 


'누구세요.'

 

"키드다. 로우 있냐?"

 

'오빠 집에 없어요.'

 

"뭐? 왜!"

 

'독서실 갔겠죠.'

 


-뚝

 


로우가 집에 없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래 그자식은 공부에 치여사는 놈이니 공부하러갔겠지.. 근데 좀 실망이다. 난 이렇게 지생각 하느라 전전긍긍 하는데 정작 본인은 독서실에 공부따위나(?) 하러갔단말이지.. 도데체 로우 이자식은 나야 공부야?! 하..그래도 중간에 잠깐 보는건 괜찮겠지..

 


-뚜루루루 뚜루루루

 


'툭. 전원이 꺼져있어.음성사서함으로 연결....'

 


이자식 뭐하자는거야? 나랑 말하기 싫은거야? 뭐야!? 그래도 평소에 공부한다고 전화 꺼놓은 적은 없었는데? 왜 꺼놓은거야! 내가 전화할걸 알았을리도 없고....갑자기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

 


그러고보니 도플라밍고라면 당한걸 되갚아주고도 남을 자식인데 아직까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설마..로우가..

 

 

/

 


에이스에게 전화해서 도플라밍고의 번호를 알아내었다. 에이스도 곧 내가 있는쪽으로 온다고 했다. 그자식 보러가는데 혼자보단 여럿이 낫겠지. 절대 쫄아서는 아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

 


"누구야. 바쁘니까 나중에..."

 

"너 이 홍학새ㄲ 로우랑 같이 있는거 다알아!! 너 이새ㄲ 어디야?!!"

 

'아 키드?훗훗훗 웃기는 상황이군'

 

"너 이새ㄲ 로우 털끝하나 건들여봐!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릴테다!"

 

'훗훗 로우가 자기 없다고 말해달라는군 너를 오지 못하게할 생각인가본데 그렇게는 안되지 이런 재미난 상황을 두고말이야..'

 

"야!망할 트라팔가 자식!!들리냐?! 내가 지금 갈테니까 미안하지만 좀만 더 버텨랴!도플라밍고 이 개새ㄲ야 넌 죽었어!! 어디있는지 빨리 말해"

 

'힌트를 좀 주자면 여긴 거울이 많이 있는 곳이다. 올 수 있으면 와보시든지. 훗훗'

 


-뚝...뚜루루루루

 


도플이 멋대로 전화를 끊자마자 에이스한테 전화가 왔다. 거울이 많은 곳이라 ..

 


"여보세요."

 

'키드? 뭐 건진거 있어?'

 

"에이스 거울이 많은방이 어딘지 알아?"

 

'거울이 많은방이라면 무용실인데 이근처에 그런곳이 있나?'

 

"오늘 휴일이여서 학교 문도 안열었을텐데.. 이근처에 안쓰는 무용실이 있나?"

 

'그런데 없을걸. .'

 


/

 

 

몇달전

 

 

"키드 네녀석 노래실력은 정말 들어주기 싫단말이다. 이런데좀 그만와 차라리 노래 외울시간에 영어 단어 한자나 더 봐."

 

"어이 트라팔가 놀러왔으면 좀 즐기시지? 여기까지 와서도 잔소리냐."

 

"키드 이거봐! 이방은 거울이 엄청 많아!!"

 

"루피 빨리 불꺼버려 못생긴 바보타스 얼굴이 너무 많이 보이잖아."

 

"어이 어이 트라팔가 지금 뭐랬냐."

 


/

 


"에이스! 이근처에 거울이 많은 노래방이 있어. 분수대옆에 있는 노래방이야!"

 

'잠깐만 키드! 나 거기 어딘지 잘몰라!'

 

"루피한테 물어봐 거기 아줌마 성격이 좀 않좋으니까 후문으로 들어와야되!"

 

'뭐? 야 키...'

 


-뚝

 


당장이라도 달려가야된다. 혼자가면 당연히 도움안되겠지만 에이스가 나중에 도와주러 오겠지. 로우가 혼자 도플패밀리와 대적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그 자식이 이번엔 또 어떤 변태짓거리를 할지 생각하면 ...

 


"로우.."

 


택시를 타고 도착하니 거리는 꽤 한산했다. 후문을 찾아서 들어간뒤 카운터를 슬쩍보니 성격 않좋은 아줌마가 있었다. 노래방안은 모두 어두웠다. 방을 하나하나 보는데 익숙한 뒤통수에 피어싱이 보였다.

 


"로우?"

 


키드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열기와 비릿한 냄새가 섞여왔다. 방안에는 로우와 도플만 있는듯 했다. 로우는 벌거벗은채로 도플라밍고 아래에 매달려 있었고, 시끄러운 노래 사이로 로우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로우는 울고있었고 좀 떨어진 곳에는 로우만 보이는 각도에 카메라가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약이 놓여있었다. 로우는 정신없어보이는 와중에도 도플의 손길을 거부하려 애쓰고 있었다.

 


"훗훗 아직도 버틸힘이 있나? 이제 한계일텐데.. 로우. 어서 참지말고 얘기해 그러면 네가 원하는데로 해주지."

 

"미친새ㄲ...쓰레기새ㄲ... 내가 말할것 같아?"

 

"로우 아무래도 약이 더 필요한가봐?"

 


도플은 탁자로 손을뻗어 약을 두세알 정도 집어 먹고 물을 마신뒤 로우의 입술을 깨물어 로우가 입을 벌리게 했다. 로우가 거칠게 반항하자 입술사이로 묽은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도플라밍고는 그 타액을 핥아올렸다. 아무래도 그 소문들은 사실이었던것 같다.

 


"거기까지."

 


키드가 낮게 읊조리며 도플라밍고를 방 바닥으로 패대기 쳤다.

 


"키드? 훗훗 빨리왔군"

 

"아는 곳이여서 말이지...어이 로우 내 목소리 들리냐?"

 


키드가 로우를 불렀지만 지금의 로우에게 키드의 말따위 들릴리가 없다. 도플이 떨어져나간 뒤에도 로우는 달아오른채 계속 괴로워 하고 있었다. 키드는 점점 화가나서 얼굴이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 쓰레기 새ㄲ!!!"

 


키드는 겉옷을 벗어서 로우를 덮어준뒤 도플라밍고에게 달려들었다. 도플은 키드의 발길질을 여유롭게 피하면서 키보드로 노래를 껐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곧이어 도플패밀리가 갑자기 들어와 키드를 제압했다. 노래가 끊기는건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키드 빨리온건 잘한일인데 말이지 훗훗 혼자 온건가? 나를 혼자서 이길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온건가? ...망할 꼬맹이 주제에!!"

 


도플은 키드가 생각했던것 보다 더 쌨다. 키드는 도플과 1:1 대치중 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도플에게 계속 당하기만했다.

 


"훗훗 키드 네녀석 때문에 재미있는 쇼가 다 망쳐져 버렸다. 그럼 쇼를 다시 시작해야 겠지?"

 

"쇼는 무슨 얼어죽을 쇼야?! 이 홍학새ㄲ가! 로우 털끗하나 건드려도 내가 가만않둔다 그랬지!! 너 이새ㄲ 래? 엉?!"

 


키드가 계속 고함을 지르자 도플은 다시 노래를 재생시켰다. 앞 뒤에 있던 방들도 도플 패거리가 쓰고있는것 같았다. 키드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훗훗 키드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나? 지금 네녀석이 큰소리칠 상황이 아닐텐데?"

 

"내가 너따위한테 쫄기라도 한다는거냐?!"

 


말은 당당하게 해도 키드 역시 속으로는 걱정하고 있었다. 에이스가 온다고 과연 해결될까? 좁아터진 노래방에 또 꾸여꾸역 들어왔다가 아줌마가 쫓아오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질테고 거기에서 제일 피해보는건 로우일것이다. 움직일 수도 없고 지금 로우는 매우 곤란한 상황이니까.

 


"키드 더이상 할말이 없는가? 그럼 다시 쇼를 시작해도 좋겠지...훗훗"

 


도플 패거리가 키드를 제압하고 도플은 사악하게 웃으며 키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어이 도플라밍고 그 재밋는거 나도 좀 시켜주지 그래?"

 


도플이 키드의 멱살을 잡은 순간 에이스가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에이스와 키가 엄청큰 사람이었다. 도플은 그 사람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도플라밍고 꽤 반가운 표정인데? 보기 좋은걸?"

 


에이스가 대놓고 비아냥 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도플의 표정은 굳어져있었고, 그걸본 키드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저 남자가 뭐길래...

 


"키드 로우데리고 빨리가."

 


에이스가 말하자 키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 쇼파 구석에 있던 로우에게 옷을 입혀 급히 밖으로 나왔다. 키드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플라밍고와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그냥 나와버렸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싸움이 끝날때까지 물고 늘어져 있었겠지만 로우가 있어서 그러면 안될것 같았다. 어찌어찌 로우를 집근처로 데려왔지만 이런 상태로는 집에 보낼수 없어서 키드는 로우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겨우겨우 침대에 눕혀놓으니 로우는 아직도 어디에 있는지조차 구분안되는것 같았다.

 


"로우!? 내 목소리 들려?"

 

"빨리..빨리.. 해줘.."

 


로우는 키드를 제대로 쳐다 보지도 않고 말했다.

 


"하라는 데로 다 할게 빨리..."

 

"이 홍학새ㄲ가.."

 


키드는 안에서 끓어 오르는 화를 애써 참으며 로우의 옷을 급하게 벗겼다.

 


/

 


로우를 씻긴 뒤 옷을 입히고 옆에 나란히 누웠다. 머리속이 엉킨 실뭉치 마냥 엉망진창이 된것 같았다. 로우가 도플에게 당하고 있었는데 화가나는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평소에 느끼던 분노와는 달랐다. 어렸을때 좋아한 애가 있었는데 그때 누구든지 그애랑 친하게 지내는걸 보면 짜증이났었고 그애에게 가장 친한사람이 나였음을 항상 바랬었는데...그때랑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

 


다음날 아침

 

지끈거리는 머리른 부여잡으며 로우가 스르르 일어났다. 옆에는 키드가 자고있었고, 반대편에 시끄럽게 벨소리가 울려대고 있었다. 동생이다.

 


"여보세요."

 

'오빠 집에도 안들어오고 어디서 잔거야? 걱정되게!'

 

"어제..."

 


순간 어젯밤의 기억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에제 뭐?'

 

"키드집에서 잤어..."

 

'에휴..알았어. 엄마아빤 어제밤에도 안들어오셨어. 오늘은 집에와야되?'

 

"알았어..."

 

-뚝

 

전화가 끊긴 뒤에도 로우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도데체 내가 어제 뭐한거지..도플을 만나서 뭔가 먹었었는데...어제 키드랑 뭐한거지...


키드는 아직 자고있었고 로우는 혼란스러웠다. 어제 뭔가를 먹고 정신을 잃었는데 중간중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났다. 도플에게 한말과 키드에게 한말도 모두 기억났다. 키드에게 무슨말을... 혹시나 하는 맘에 이불을 들춰보니 옷이 입혀져 있었다. 키드 옷이었다.

 


"하아....."

 


로우는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쥐며 고개를 숙였다. 수치스러움을 넘어서서 진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리 키드를 좋아해도 이건...
로우에게 멘붕이 온 사이에 키드가 부스스 일어났다.

 


"어이 뭐하냐 로우."

 


키드의 목소리가 들리자 로우가 벌떡 일어났다. 너무급작스럽게 일어난 탓인지 허리에 느끼고 싶지 않는 고통이 느껴졌다.

 


"으으..."

 

"트라팔가. 허리아프냐?"

 


키드가 별생각없이 로우의 허리를 만지자 로우는 까무러치듯 키드의 손길을 피했다.

 


"허리좀 만졌다고 뭐냐?!!"

 


키드가 어이없다는듯 소리치더니 뭔가가 떠오른듯 표정이 굳어졌다. 둘다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로우가 침묵을 깨며 부엌으로가서 아침밥을 만들었다. 키드와 마주보고 앉아서 아침을 먹은뒤 자연스럽게 텔레비젼앞 쇼파에 나란히 앉아서 티비를 틀었지만 둘다 머리속에 텔레비젼 내용따위 들어오지 않았다. 둘사이의 미묘한 적막감 사이에 티비소리만 시끄럽게 울려댔다. 그러다 문득 키드는 어제 자신이 하려던일이 생각났다. 이대로 있으면 더 어색해질게 뻔해 아무말이나 꺼나보려고 순간 로우를 쳐다봤는데.

 


"?!!!"

 


키드는 자신도 모르게 로우가 이쁜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로우의 턱을 잡당겼다. 닿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을 짧은 시간에 키드는 정신차리고 입술을 뗐다.

 


"미..미안"

 


키드가 바보같이 중얼대자 로우가 기막힌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내가 하려던것을"

 

"..?"

 

"먼저하지 말라고 이 바보타스야."

 


로우는 그대로 키드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사이퍼즈/드렉샬럿]

제 3회 익명만애 글합작 | 인스티즈

 

* 사이퍼즈의 설정을 조금 비틀었습니다.
* 죽어도 리스폰 되지 않는 설정입니다.

 

비구름을 그릴게요. 양갈래 머리를 정갈하게 묶은 소녀가 허공을 향해 몇번 손짓을 했다. 소녀의 손짓을 따라 검은 먹구름이 만들어졌고,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 앞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비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으로 톡톡 물을 만들어뿌리며 멍하니 놀고있을 때 쯤,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샬럿! 샬럿! 한참 찾았잖아!"
"...마를렌언니?"
"오늘 아이스크림 사먹기로 했잖아. 얼른 가자! 사줄테니까."

소녀의 이름은 샬럿이였다. 그 옆에 있는 소녀의 이름은 마를렌이였다. 유일하게 샬럿의 또래였고, 샬럿이 회사로 오게된 가장 큰 계기가 된 이유이기도 했다. 항상 조용히 겉돌던 샬럿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고, 마를렌 덕분에 어느정도 얼굴에 웃음이 피기도했다. 그리고 샬럿이 가장 많이 의지하는 사람이였다. 마를렌은 그런 샬럿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생이라며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둘이 놀러다니는 날이 많을정도였다. 오늘은 샬럿과 마를렌이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가기로 약속한 날이였다. 언제나 그렇듯 마를렌은 샬럿의 손을 꼭 잡고는 회사 밖으로 나갔다.

"여기 진짜 맛있어! 맛도 많으니까 원하는 거 막 골라와서 먹어도 돼!"
"...응."
"...아직도 기분 안 좋아? 그런 아저씨때문에?"
"그래도... 어른들 중에서 제일 나한테 잘 대해주셨단 말이야."
"돌아온다고 했잖아!"
"그래도... 4일째 소식이 없으시잖아..."

샬럿이 이토록 기다리는 사람은 다리오 드렉슬러라는 회사의 창을 사용하는 청년이였다. 항상 혼자있던 샬럿에게 왜 혼자있냐, 하면서 말을 걸어주고 언제나 재밌는 물건을 쥐어주던 사람이였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너 때는 웃어야 제일 예쁘다며 환한 웃음을 보여주던 사람이였다. 그런 사람이 임무를 나가 4일 째, 아무 소식도 없었다. 임무를 어떻게 수행 중인지 아무 보고도 없는 채로.

"걱정마! 오늘부터 일곱밤만 자면 돌아오실거야! 다이무스 아저씨도 그랬어! 일곱밤만 자면 돌아올거라고."
"...진짜? 진짜 일곱밤만 자면 돌아와?"
"정말이라니까! 다이무스 아저씨도 여섯밤 째에 오셨거든!"
"알았어. 기다려볼게."

샬럿은 그날부터 일기장 한쪽에 날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3월 26일, 날씨 맑음. 첫번째 밤]

오늘은 마를렌 언니랑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 저는 딸기만 먹었어요. 마를렌 언니는 더 먹어도 좋다고 했지만
제가 먹으면 안될만큼 너무 맛이 있었어요. 그리고 오늘 드렉슬러 아저씨가 소식이 없으신지 4일 째에요.
그래서 우울했는데 언니가 일곱밤만 자면 꼭 돌아온다고 그러셨어요! 오늘부터 일곱밤동안 기다릴래요.
아저씨가 돌아오시면, 웃는 얼굴로 반길 수 있도록요!

 


[3월 27일, 날씨 비옴,천둥. 두번째 밤]

비가 오고 있어요. 천둥이 쳐서 너무 무서워서 마를렌 언니의 방으로 갔어요. 방으로 갔어요.
그런데 마를렌 언니의 방에 자네트 언니도 있었어요! 마를렌 언니도 무서워서 자네트 언니를 불렀다고 그랬어요.
지금 이 일기도 마를렌 언니의 방에서 쓰는 중이에요! 자네트 언니가 나눠준 사탕을 먹으면서요.
언니도 드렉슬러 아저씨처럼 좋은 사람이라 너무 좋아요.

 

[3월 28일, 날씨 흐림. 세번째 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지만, 구름이 많아요. 오늘도 드렉슬러 아저씨에 대한 말은 없어요. 무슨 일이 있는걸까요?
마를렌 언니는 걱정말라며, 오늘은 케이크와 쿠키가 맛있는 집으로 데려갔어요. 여러가지 과일이 잔뜩 올려진 케이크랑
우유를 먹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러다가 재단...? 이라는 곳의 아저씨랑 오빠를 만나서 같이 먹었어요.
오늘 회사의 일을 돕기 위해, 재단이 합류했다고 그랬어요. 드렉슬러 아저씨가 돌아올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네밤 밖에 안남았어요. 얼른 드렉슬러 아저씨가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3월 29일, 날씨 맑음. 네번째 밤]

오늘 아저씨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아저씨가 많이 다쳤다고 그랬어요. 임무가 힘든걸까요?
다행히 같이 간 로라스 아저씨가 구해주셔서, 엄청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고 그러셨어요.
아저씨가

쓰려는데 자꾸 눈물이 나와요. 이걸 못 쓰면 안 되는데... 지금 소매로 닦고있어요. 그래서 앞이 안보여요.


[3월 30일, 날씨 흐림. 다섯번째 밤]

벌써 다섯밤 째에요. 이제 두밤만 자면 드렉슬러 아저씨가 오시는 걸까요?
아저씨가 오시면, 제일 먼저 아저씨가 좋아하던 커피를 타다 드릴거에요. 제 손으로요!
오늘 자네트 언니한테 맛있게 만드는 법을 배웠거든요. 다이무스 아저씨도 맛있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아저씨가 기뻐하실까요?


[3월 31일, 날씨 맑음. 여섯번째 밤]

드디어 내일이에요! 내일 밤만 지나면 정말 아저씨가 오실건가봐요. 회사의 사람들이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아저씨의 이름이 나왔으니 확실한거겠죠? 아저씨를 축하하려고 제가 케이크도 샀어요. 아저씨가 좋아하던거요.
자...토르? 자허레테? 이름이 어려워요... 아저씨가 이걸 보고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내일이 기대되고 있어요!

 

[4월 1일, 날씨 비옴. 천둥. 일곱번째 날]

일곱번째 날이야! 샬럿이 방글방글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언제나 입던 비옷도 더 깔끔하게 입었다. 혹시나 구겨졌을까 3번이나 거울 앞에서 빙글거리며 돌면서 확인했다. 문제 없다니까- 얼른 가자! 하는 마를렌의 말에 샬럿은 웃으며 알았어! 하고는 마를렌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이면 아저씨가 돌아온다. 다시 평소처럼 웃으면서 놀 수 있다.

"언니 오늘이 일곱번째 밤이야. 오늘만 자면 아저씨가 오시겠지?"
"...어? 당연하지! 걱정마. 오늘 오실지도 모른다고!"

샬럿은 방글방글 웃으며, 주머니에 작은 봉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 몰래 나와서 산 창 모양의 목걸이였다. 드렉슬러가 좋아할 것을 생각하며, 주머니에 목걸이가 제대로 있는지 손을 자주 넣어보기도 하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샬럿을 안심시켰다. 드렉슬러가 돌아와서 다녀왔다! 며 외칠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샬럿이 머리를 풀고 앉아, 펜을 쥐고 종이에 오늘 있었던 일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오늘 밤만 지나면 드렉슬러 아저씨가 와요. 오늘 아침 몰래 나가서 목걸이도 사왔어요! 아저씨를 위한


샬럿이 일기의 첫 줄을 시작할 때 쯤,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샬럿! 하고는 마를렌이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마를렌의 표정은 어두워져있었다. 무언가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은 듯. 샬럿은 그걸 손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다름을 느꼈다. 기분 나쁜 예감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언니? 왜 그래요?"
"샬럿.. 있잖아, 샬럿..."
"왜요?"
"그.. 회의가 열리는... 방... 거기로 오래. 얼른 오래. 급한 소식인가봐."

마를렌이 샬럿의 손을 잡고, 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탁탁 거리며 달리는 소리만이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울렸다. 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를렌은 샬럿을 한번 보고는 문을 두손으로 밀었다. 끼익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방 안에는 타라, 다이무스 등 회사의 에이스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여러 능력자들이 모여있었다. 능력자들의 끝에는 명왕이라는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샬럿과 마를렌이 들어오자 다 모였냐는 말과 함께 타라의 입이 열렸다.

"11일 전, 안타리우스의 클론이 출연한 지역에 소탕을 간 다리오 드렉슬러가 사망. 같이 간 알베르토 로라스는 현재 매우 큰 중상으로 돌아오자마자 까미유 데샹의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지. 현재 장례를 준비 중이니, 모두 그렇게 알도록 해."

타라의 말이 끝나자, 다른 능력자들은 안타깝다는 표정과 말을 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샬럿과 마를렌은 제일 마지막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샬럿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터트렸다. 복도가 샬럿이 훌쩍이는 소리로 매워졌다. 샬럿이 마를렌의 품에 안겨 훌쩍였다. 마를렌은 본인의 품에 안겨있는 샬럿의 등을 토닥였다.

"언니.. 언니..."
"......"
"아저씨가... 아저씨가..."
"샬럿."

샬럿은 한참동안이나 마를렌의 품 안에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샬럿이 눈물을 멈추고 소매로 눈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 정도였다. 마를렌은 샬럿을 부축해주며 자기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자신을 마주보고 누운 샬럿을 토닥거렸다. 이내 마를렌의 토닥임을 받고, 잠에 들었다. 마를렌도 샬럿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샬럿이 검은 원피스를 입고는 방을 나섰다. 회사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회사의 넓은 잔디가 펼쳐진 마당에 검은 색의 큰 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관의 위에는 다리오 드렉슬러라는 이름이 정갈하게 쓰여있었다. 샬럿은 입술을 울지않으려는 듯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드렉슬러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샬럿은 한 쪽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과정을 보고 있을 뿐이였다.


-


어둑한 저녁이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드렉슬러의 장례가 끝나고, 물건을 정리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타라와 다이무스, 치료가 끝난 로라스가 드렉슬러의 방 안으로 들어가 물건의 정리를 시작했다. 드렉슬러의 옷과 트와일라잇의 여러 클랜에 대한 자료들, 취미로 연구하던 자료들 모두 상자에 차곡차곡 쌓였다. 마지막으로 로라스는, 그가 발명한 물품들을 상자에 넣으려 발명품을 모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 사이에서 천으로 곱게 둘러쌓인 무언가가 툭하고 떨어져나왔다.

"뭐가 떨어졌는데?"
"상자같군. 안에 종이도 붙어있어."
"샬럿에게? 일단 샬럿양의 이름이 붙어있으니, 샬럿양에게 가져다주는게 좋겠군."

로라스가 상자와 종이쪽지를 들고는 샬럿의 방으로 들고 갔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는 방에 들어갔을 때, 샬럿은 로라스를 보지도 못할만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샬럿양, 다리오의 방에서 나온거라네. 샬럿양의 이름이 써있어서 가져왔으니 일단 가지고있게."
"...아,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있군. 따듯한 차라도 마시고 오늘은 푹 쉬게나."

샬럿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라스는 수고하라며 방을 나갔다. 샬럿이 로라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상자에 붙어있던 종이 쪽지를 떼어냈다. 익숙한 글씨체로 샬럿에게. 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샬럿은 벌벌 떨리는 두 손으로 종이 쪽지를 펴서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상자는 내 발명품을 재밌게 가지고 논 아이를 위한 선물이다. 항상 웃으면서 내 발명품을 신기해하던 모습이 참 귀여웠지. 그 어린애한테 이런 감정을 품는 다는게 미안하지만, 참 귀엽고 좋은 아이다. 각설하고, 이 상자는 열면 빛이나와서 벽에 별이 나타난다. 비 오는 날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 다는 말을 듣고, 한번 만들어보았지. 지금 임무가 끝나면 멋지게 돌아와서 전해줄 생각이다. 그 때까지는 꼭꼭 숨겨두고 있어야겠지.]


"...아저씨."

샬럿이 쪽지를 보고 상자를 열었을 때, 방 안은 별들로 가득 채워졌다. 샬럿이 상자를 닫았다.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눈을 감았다. 별들이 가득한 곳으로 뛰어들었다. 샬럿이 꿈 속에서 그가 걷던 길을 따라걸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때 쯤, 의식을 잃었다.

 


 

 


후회

 

[종말의 세라프/미카유우]


"유우! 왜 수업시간에 그렇게 엎드려서 대놓고 자?"

"저 선생은 수업을 왜 저렇게밖에 못하는거야, 잠이 올 수 밖에 없잖아?"

"그래도 그건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다음부턴 열심히 들어."

"알았어 알았어."

 

수업이 마치고 울리는 종소리에 잠에서 깨 기지개를 펴는 너에게 다가가 으름장을 놓았더니 상황을 무마하려는듯이 대충 대답하고선 다시 엎드려버린다. 또 자는거냐는 나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는걸 보아하니 또 금방 잠들어버렸다. 도대체 맨날 밤에 뭐하는건지.. 한숨을 푹 쉬곤 발길을 돌렸다. 문을 열고 나오니 너 잡히면 가만안둔다며 친구를 쫓아 달리는 아이, 친구에게 진짜? 하며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여자아이, 선생님에게 부탁받은 심부름을 하러 무거운 종이뭉텅이를 들고 가는 반장으로 보이는 아이와 같이 각양각색의 아이들이 복도에 모여 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런 나날들이 쭉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 큰 바람은 아니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걷다보니 어느새 아카네의 반 앞에 와있었다. 문을 살짝 열고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니 아카네가 보였다. 그 앞엔 친구로 보이는 여자애가 보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가까이로 다가가니 아카네의 친구가 날 놀란 눈으로 쳐다보더니 후다닥 자리를 비켜주었다. 모여있던 다른 무리에게 가더니 우리를 보며 뭔가 소근거린다. 왠지 모를 불안한 느낌이 들지만 그냥 비켜준 앞자리에 앉아 할말이나 하기로 했다.


"요즘 자주 오네? 또 유우 자고 있어?"

"응, 요즘 너무 자는 것 같아. 근데 나 너무 자주 오나?"

"아니 뭐.. 나는 괜찮지만 네가 안 괜찮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저길 봐."

 

아카네가 살짝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방금 아카네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아이와 그 주위를 둘러싼 무리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척 보면 위협적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다 티나게 안 보고 있었던 척 고개를 돌린다. 너넨 타이밍 좀 맞춰야겠다. 역시 불안한 느낌은 틀린적이 없다. 다시 아카네에게 시선을 맞추니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 표정도 느낌이 안 좋고 나와 아카네를 보고 있는 저 무리의 시선도 느낌이 안좋다. 분명히 나에게 득이 되는 일은 아닐것이리라-하고 짐작했다.

 

"지금 이거 무슨..뭐야?"

"뭐긴 뭐야. 너랑 나랑 사귄다고 오해하는거지."

"뭐?!"

"그러니까 우리반에 그만 오는게 좋을 것 같은데?"

"너 지금.. 즐기고 있지."

"글쎄?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정말이지 아카네는 이상한데서 얄궂다. 분명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거다. 모든것은 표정이 말해준다. 난 영락없이 당하고 있다. 다신 이 반에 안올거야!

 

"됐고, 요즘 유우 밤에 뭐하는지 알아?"

"그걸 왜 나한테 물으실까?"

"너네 같은 방 쓰잖아."

"그렇다고 그걸 왜 내가 알려줘야 하죠~?"

"후.. 네가 원하는거 뭐든지 들어줄테니까 말해줘."

"역시 뭘 좀 아네. 유우 사실 밤마다 네 생일선물 만들고 있어."

"뭐?! 그게 뭔데!"

"그것까지 알려주면 유우가 뭐가 돼. 아님 소원 하나 더?"

 

책상을 두 손바닥으로 쾅 치고 일어나서 아 됐어! 하곤 씩씩거리며 아카네의 반을 나왔다. 문을 닫고 여자애들이 꺅꺅거리는 소리가 복도 밖까지 들려왔다. 아마 아카네 친구들이겠지. 아 몰라 어차피 다신 안 올건데 뭐. 그보다 벌써 내 생일이었구나. 나도 깜빡 잊고 있었던 생일을 유우가 기억해줬다. 그것도 생일선물을 만든다고 밤잠도 설치고 있다니.. 정말 못말린다. 처음엔 가족따위 뭐라느니 했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까지 우릴 소중하게 대해주고 있다. 사실 룸메이트 정할 때도 제비 뽑기에서 유우와 같은 제비를 뽑지 못해서 실망했다. 좀 많이. 그래도 이렇게 몰래 내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걸 보면 다른 방이 된것도 장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외엔 다 단점밖에 없는 것 같지만. 마음같아선 당장에라도 그 생일 선물이 뭐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유우를 위해서라도 모르는 척 해주는게 낫겠지. 이제 유우가 자도 뭐라하지 말아야겠다. 설레서 발걸음이 빨라진다. 빨리 가서 유우에게 칭찬해줘야지. 무엇에 대한 칭찬인진 넌 모르겠지만. 어느새 우리반 문 앞까지 와서 문을 여는 그 순간,

 

 

 

 

 

 

 

아직도 꿈인가하고 착각할 정도로 까만 천장이 보였다.

 

 

 


4년 전에 헤어진 네가 꿈에 나왔어. 사실 네가 나오는 꿈은 숱하게 꿔왔지. 깨어 있어도 네가 눈 앞에서 아른거리고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항상 네 목소리가, 네 얼굴이, 네 표정이, 네 몸짓이 머릿속에 떠올라. 꿈 속에 네가 나오지 않은 날은 너무 힘들고 괴로워. 하지만 항상 네가 나와도 그냥 나와 대화만 하고 깨곤 했었는데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는 꿈이라니. 학교에서 나는 자고있던 너에게 잔소리를 하고, 아카네에게 가서 유우가 저렇게 자는 이유를 물어보고, 생일선물이라는 말에 들떠서 우리반까지 가서 문을 여는 순간에 꿈에서 깼어. 그래. 이런 흡혈귀들 따위 없는 평범한, 다른 세계에서 우리 모두가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었겠지. 꿈에서 문을 열었더라면 너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너의 목소리를 한번 더 들을 수 있었을거야. 너를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 생사의 여부도 모르지만 난 네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장담해. 그래서 말인데, 나 요즘 쿠루루라는 흡혈귀의 피를 마시지 않고 있어. 이 흡혈귀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나는 죽어. 평범하게 죽지도 못하고 오니가 돼버려. 쿠루루는 내가 마시지 않다가 못 버티고 다시 돌아간 적이 몇번 있어서 이번에도 후회나 하지 말라며 빨리 꺼져버리라더라. 인간의 피를 마시는 방법도 있지만 난 도저히 그럴수 없으니까.. 유우 네가 살아있을텐데.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 이 현실이 너무 답답해. 만약 우리가 만나게 된다 해도.. 난 지금 흡혈귀가 되어있는데 널 볼 자신이 없어. 피를 마시지 않은지 꽤 돼서 좀 힘들다. 점점 눈 앞이 흐려지고 숨이 가빠와. 이 꿈을 꾸고 나서 더욱 확실해졌어. 난 여기서 나갈거야. 어디에선가 죽어서 네가 날 발견해줬으면 좋겠다. 이 편지도 꼭 봐줬으면 좋겠어. 내 소중한 유우에게.

 

펜을 내려 놓았다. 흐르는 눈물을 어찌 할 길이 없어서 편지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번진 잉크 자국이 짜증났다. 이게 무슨 꼴사나운 짓인지. 그럼에도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너를 생각하면 이렇게도 가슴이 아려오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걸까 너는.

 

 

 

 


*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항상 그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둘도 없는 소중한 가족이 흡혈귀에게 몰상당하는 그 광경.

 

 


"유우, 왜 날 버렸어?"
"답해 줄 때까지 이 꿈은 쭉 계속될거야."
"여긴 유우 네 안에 있는 어둠이니까."

 

오늘도 그 꿈을 꾸었다. 이젠 이 꿈을 꾸지 않으면 무슨 이상이 있나 싶을정도로 매일 꾸는 꿈. 처음엔 이런 꿈을 꾸는게, 어린 미카의 모습을 보는게, 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게, 너무나도 괴로워서 꿈을 꾸지 않으려고 잠을 자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잠을 자지 않는 시간이 길어져 피곤함에 나도 모르게 자는 꿈에서는 더 나를 모진 말로 구석으로 밀어붙였고, 짧게 새우잠을 자도 미카가 나오는건 여전했고 내 귀에 박히는 말도 똑같았다. 여전히 꿈을 꾸고 나선 죄책감이 나를 조여온다. 그나마 요즘은 익숙해졌달까. 처음엔 머릿속이 복잡해져 하루종일 컨디션이 안좋아서 전투중에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며 시노아에게 혼나기도 했다. 그 때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쾅쾅쾅-

 


"유우씨! 긴급소집명령입니다! 도쿄에 있는 흡혈귀의 본거지를 칩니다!"

"잠시만 기다려!"

 


타이밍이 좋은건가. 이 악몽 때문에 깊이 잠에 들지 못하고 깨버린게 도움이 되다니. 웃긴 상황이었다. 실소를 터뜨리며 급히 옷을 갈아 입었다. 장갑을 끼고 검을 쥐었다. 이게 내 검..

 


드디어 흡혈귀를 해치우러 갈 수 있어.

 

 

 

 

*

 

 

 

도쿄에 도착했다. 빠져 나올 때 좀 고생했지만 막상 나와서 거리라고 부르기 애매한 이 폐허를 걷는것도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가 되니 마냥 홀가분하다. 이제 점점 숨쉬기도 힘들어지지만 걷는다. 또 걷는다. 내가 만약 이성을 잃고 인간들의 피를 마실려고 해도 밤이니 인간들이 설마 나올린 없겠지. 지하 말고도 도쿄에도 인간들을 기르고 있는 장소가 있다던데.. 어딘진 모르지만 말이다. 말 그대로 난 혼자다. 여기서 오니가 된다면.. 네가 날 죽여줄까? 죽더라도 네 손에 죽었음 좋겠어.

 

"그나저나 이 밤중에 무슨 명령이야."

"유우씨, 흡혈귀를 다 몰살하겠다던 의지는 어디간거예요?"

"그래도 잠은 자면서 굴려야지!!"

"잔말 말고 따라와 유우!"

 

멀리서 달려오는 검은 옷의 저 무리는.. 아, 지하에 있을때 얼핏 들은것 같은데.. 월..귀조? 였던가? 젠장, 일이 꼬인다. 지금 내 상태에서 인간이 보이면 안된다. 보통 인간의 피를 마셔서는 안되는데.. 제발 그냥 지나가라. 제발! 왜 근데 유우의 이름이 들린 것 같지..이제 죽을 때가 다 되니까 환청까지 들리네. 나 진짜 죽을 때 다 됐나보다.

 

"어 근데 저기 흡혈귀가..?"

"뭐?! 어디?"

"저기요, 저기!"

"한 마리니까 빨리 처리하고 가자!"

 

들켰다. 그래도 아직 저정도의 인원수 정돈 상대해 줄 힘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다. 약간 상대해주다 격차를 느끼면 알아서 후퇴하겠지. 아니면 내가 도망가야한다. 이번엔 정말 결심했으니까. 저 녀석들의 피를 마셔선 안돼.

 

"미카..? 미카맞아?"

"설마..유우?"

 

이건 꿈인가. 아냐, 꿈이 아냐. 정말 내 눈앞에 유우가 있다. 이런 만남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난 끝만을 생각 하고 있었는데 다시 시작을 던져주다니. 넌 월귀조가 되었구나.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다. 그런데 정말 최악의 시나리오만 현실이 된다. 난 흡혈귀에 의해 죽고 흡혈귀에 의해 살아났다. 내가 흡혈귀에게 당하는 장면을 두 눈 앞에서 본 유우는 흡혈귀를 혐오할 것이다. 그럼 나도.. 혐오대상이겠지. 내가 흡혈귀가 된 이후로 생각한 상황이 딱 들어맞았다. 어쩜 이렇게도 현실은 나에게 버거운 시련만 주는지.

 

 

 

유우는 울고 있었다.

 


그런 너의 얼굴을 본 순간 머릿속의 나사가 빠지기라도 한건지 사고는 한 가지의 루트만 탔다. '데려와야 해.'로. 나는 주위에 월귀조 녀석들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무작정 유우에게로 파고 들었다. 이미 내 눈에는 유우밖에 보이지 않았다. 데려와야 했다. 조금 상처는 입었지만 유우를 들고 데려오는데는 성공했다. 착지하자마자 곧바로 유우와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힘이 좀 들었던지라 멀리까진 오지 못했다. 충분히 무리 쪽에서 한꺼번에 내게 공격 한다면 치명상을 입을 정도의 거리였다. 좀 더 멀리 가야했다. 하지만 체력이 더 이상 뒷받침 해주지 못했다. 왜 하필 이런 때에, 왜 하필 널 만났을 때 내가 힘이 없는걸까. 조금 더 너를 빨리 만났더라면.. 내가 죽는 시기를 늦췄더라면 너와 온전히 멀리까지 도망칠 수 있었을텐데. 그래도 난 너를 만났다. 널 만난거다. 이제 삶은 이정도로 끝내도 딱히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유우 바로 앞에서 오니가 돼 버리는건 좀 별로지만. 나에게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이제 끝인가-.

 

"안돼!!!!! 하지마!!!!!!"

"뭐?! 무슨 소리야!!"

"내 가족이야!!!! 하지말라고!!!!!"

 

유우가 소리쳤다. 어차피 저 녀석들은 유우를 구하러 올테니 잠깐만이라도 이렇게 있고 싶었다. 유우가 멈추라고 한 이상 바로 구하러 오진 않겠지. 4년만에 보는 너. 그대로구나. 너무 오랜만이라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되지도 않는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볼까. 생각만 하며 울고 있는 유우의 눈물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유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안된다. 나까지 눈물을 흘리면 유우는 어떡하냐고. 너와 함께라면 어디로든지 도망 칠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무언가 대화를 하고 싶은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자꾸 벙긋거리기만 하다 이내 닫고 만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유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더 오열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우린 이렇게나 서로 보고 싶어 했는데.. 이제서야 만났구나.

 

"미카.. 너 정말 미카 맞지?"

"그럼 누구겠어."

"..정말 보고 싶었어."

"나도."

 

너는 검고 나는 하얗다. 다시 말하면 극과 극.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차라리 내가 그 때 죽어버렸다면 어딘가에서라도 유우를 지켜볼 수 있었을텐데. 이런 비극적인 만남은 안 해도 됐을텐데. 하지만 생각과는 반대로 너무 행복했다. 유우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 너무 행복했다. 살아있길.. 잘한거겠지. 하고 조용히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갑자기 빨리 뛴다. 이건 재회해서라고 보기 보단.. 너무 심하게 뛰고 있다. 갑자기 왜 이러지.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나를 미치게 했다. 지금 여기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면 유우가 위험해진다. 그것만은 안돼. 얼른 유우를 저쪽으로 보내야해.

 

 

콰직-

 

 


그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놀라서 유우의 목에서 입을 뗐다. 그리고 나서 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무슨 짓을.. 겨우 만났다. 몇년에 걸쳐 기다리고 기다리다 겨우 만난 유우라고. 근데? 난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한거야? 유우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더 이상 유우를 볼 자신이 들지 않았다. 이런 내가 혐오스러웠다. 나는 정말, 진짜 흡혈귀가 되었구나. 부정할 수 없는 진짜 흡혈귀. 이젠 사랑하는 사람까지 물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유우에게 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흡혈귀가 된 후로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없었는데.. 유우는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네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난..."

 

달려오는 월귀조의 모습이 눈물에 가려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차마 유우를 붙잡고 또 다시 도망칠 순 없었다. 그건 진짜 못할 짓이었으니까. 저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하든, 날 죽이든 상관없었다. 난 가만히 죽음을 기다려야 마땅했다. 검은 무리의 여자와 남자들이 유우에게 다가왔다. 갈색머리 남자가 유우를 들쳐업었다. 꼴사납게 유우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나에게 빨간머리 남자가 칼을 들이댔다. 도망이나 반항, 싸우는 짓 따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난 유우에게 잊혀지지 않을 큰 죄를 지었기에.

 

"죽을 준비는 되었겠지."

"키미즈키씨, 하지마세요."

"뭐?! 대체 ㅇ.."

"왜 날 살리는거지?"

"당신이 죽으면 유우씨가 슬퍼하니까요. 하지만 두번은 없습니다. 그리고 두번다시 유우씨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멍하니 유우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것 뿐. 난 이제 다시는 유우를 만날 수 없는 걸까. 유우는 그래도 흡혈귀로 변한 내 모습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날 나로 봐준거겠지. 하지만 난 흡혈귀의 본능대로 너의 피를 조금이나마 마셨으니.. 난 이제 너에게 어떻게 보이게 될까. 날 죽였던 페리드처럼? 하, 그렇게 보일 바엔 차라리 죽는게 낫지. 난 아직 너의 동료들을 믿지 않아. 널 이용하려는 걸로 밖에 보여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너에게 있어서 그 동료들이 정말 소중한 동료이자 가족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인정하는 수밖에. 그래, 그 애들에게 유우를 맡길게. 내가 남긴 상처도 잘 회복했으면 좋겠어. 이게 정말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면 편지라도 전해줄 걸 그랬나 봐. 우린 아직 못다한 말들이 너무 많은데, 못 나눈 마음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헤어져 버렸어. 내 책임이 훨씬 크지만 말이야. 그래도 오랜만에 본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동료들이 믿을만 하다는 거겠지? 그래도 내가 너한테, 네가 나한테는 항상 첫번째였으면 좋겠어. 유우, 잘가.

 

 

 

 

사랑해.

 

 

 

 

 

 

 

 


후기/ 아 부끄러워라.. 혹시 고데기 필요하신가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미숙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종세 파세요 미카유우 파세요ㅠㅠㅠㅠㅠ 종세 너무 좋아ㅠㅠㅠㅠ 미카유우 너무 좋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이에이/미사와]IF

 

올해의 첫눈이 내렸다. 첫 눈 치곤 꽤 많은 눈이 소복소복 쌓여 거리를 하얗게 물들였다. 아마도 때아닌 폭설이겠지. 내일 연습은 어쩌려나. 하얗게 쌓인 눈을 감상하기도 전에 입가를 뚫고 새하얀 한숨부터 튀어나왔다. 계속 내리는 걸 보아 하면 내일 아침엔 더 많은 눈이 세상을 물 들이고 있을 것이다. 내일은 연습 대신 눈싸움이나 하자고 하면 당연히 얻어맞으려나.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혼자 푸스스 웃다 빙판길에 헛디뎌 넘어질 뻔할 몸뚱이를 겨우 바로잡았다. 내일 엉덩이 좀 깨지겠는데. 이것저것 품고 있던 생각들을 지우고 흘러내리려는 목도리를 고쳐매니 문득 스치는 생각에 걸음이 멈췄다.


이 목도리, 누가 준거였지?

 

 

 


*

 

 

 


쓸쓸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차갑게 나를 반길 방의 냉기에 한숨을 한 번, 어차피 오늘도 혼자 쓸쓸히 잠들 생각에 또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3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젠 여러 명과 좁은 방에서 함께 지내던 것이 익숙해졌나 보다. 새로운 구단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숙소와 새로운 룸메이트를 만났지만, 고등학교 시절을 가득 채웠던 그 추억만큼 즐겁진 않았다. 이따금 가장 힘들었지만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이 너무 많았고, 돌아가고 싶은 만큼 보고 싶은 얼굴들이 너무 많았다. 다시 그때로 간다 해도 어차피 똑같겠지만, 얼굴이라도 보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어 아직 옛 향수가 채 가시지 않은 고등학교의 일들을 새록새록 떠올려보곤 했다. 그래도 잊어야지. 어느새 성인이 되었으니 새로운 출발로 마음을 잡아야 할 때인 만큼 무의미한 향수병에 시달리며 머리를 쥐어짤 여유는 없었다. 내가 과거에 얽매여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자꾸만 스치는 누군가의 얼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음하하핫!! 이 몸이 왔다, 미유키 카즈야!!"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쳐들어 보니, 뜻밖의 녀석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사와무라? 뭐야, 저 녀석 왜 여기 있어?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떠올랐던 질문들을 삼켜버리니 의문의 답을 추궁하기도 전에 참으로 가관인 녀석의 모습부터 눈에 띄었다. 이 얼어 죽을 날씨에 목도리나 장갑도 없이 얇은 외투만 걸친 채 온 것인지 양 볼과 손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추운 바람에 굳어버린 안면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며 웃는 모습이 곧바로 동사해도 의심스럽지 않을 모습이었다. 너 미쳤어? 놀란 마음에 후다닥 제 목도리를 벗고서 사와무라의 목에 칭칭 감아준 뒤, 급하게 문을 열어 재끼곤 안으로 욱여넣듯이 들여보냈다. 얼어 죽으려는 사람을 집에 들이고서 아뿔싸 싶었던 건, 숙소 생활을 하느라 거의 오지 않았던 자취방의 온기가 매우 냉랭했다는 점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숙소로 들어가기 전, 방 중간에 떡하니 있던 코타츠를 치우지 않았던 것이었다.


"여긴 왜 온 거야?"
"엥? 인사도 안 해줍니까? 신호등 앞에서 사고 날 뻔 한 거 감수하고 왔는데."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말은 하고 나온거야?"
"당연한 거 아님까. 외출 허락 맡고 나왔습니다!"


따뜻한 코타츠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밖의 추위를 깨달았는지, 추웠던 몸뚱이가 서서히 녹기 시작하자 으슬으슬 거리며 몸을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냐고. 이 시점이면 이미 은퇴한 뒤에 일반 기숙사로 옮겨졌을 텐데. 더군다나 함부로 외출을 허락해줄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시간은 10시를 넘어가고, 지금 시각이라면 벌써 소등을 마치고 하나둘씩 잠들어야 할 시간이 아니던가.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감히 허락해줄 곳도 아닌데 이놈은 도대체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요."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사람을 놀라게 만들곤 한다. 똑똑히 들린 말에 되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 거짓말을 하는 놈이 아니니 저 말은 진심이라는 의미였다. 피식 튀어나오는 헛웃음에 녀석은 괜히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사 온 지 얼마 안됐슴까? 곧 빼줘야 할 방이라서 미리 정리해 둔 상자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괜히 화제를 돌리는 걸 보아 하면 자신이 뱉은 말에 후회할 생각은 없는 뜻이겠지.


"헤어졌잖아."


사와무라에겐 비수로 돌아갈 말이었지만 감히 뱉어야만 했다. 굳어지는 얼굴을 바라볼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뻔뻔하게 단호한 얼굴로 사와무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괜히 마음 약해지면 나도 녀석도 무너질 걸 알기에 나라도 괜한 강한 척을 하며 자신을 추스려야만 했다.


"아직은 끝난 관계야, 우리."


작년 여름, 우리는 짧은 사랑을 끝냈다.

 

 

 


*

 

 

 


사와무라를 처음 만난 건 내가 막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세이도에 스카우트 당해 들어왔던 녀석 중 하나. 지저분하지만 재밌는 녀석의 공을 잡아보면서 아마도 울퉁불퉁한 표면을 잘 다듬어주면 굉장한 보석이 되겠지- 싶었다. 라이벌이나 마찬가지였던 후루야와 겨루면서 서서히 성장해가는 녀석을 볼 때마다 하루빨리 배터리를 맞추고 싶단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이 넘쳐나는 투수진 중에서 내게 호기심으로 찾아온 녀석이 훗날 나에게 대범한 고백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어쨌든 녀석이 1학년이었을 땐 그저 팀메이트, 그 이상으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마운드 위의 투수는 항상 빛나는 별과도 같아서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포수를 즐겁게 해준다면 그걸로 만사 오케이였으니까. 게다가 한참 여름대회로 코시엔을 위한 준비가 절정에 다다랐을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거나 줄 정도의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충격의 여름대회가 끝이 나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주전 3학년이 전부 은퇴를 결정한 이후 내가 주장이 된 이후로부터 점점 구멍이 생겨가는 팀을 메꾸고, 혼란스러운 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그것이 큰 부담으로 여겨졌는지 정신적으로 슬슬 지쳐가는 내 모습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웃어본 적도 많았다.

공식전에 나갈 자격이 주어지는 세이도의 1군. 나를 포함한 20명. 1군의 자리를 노리는 2군과 그 외 3군. 80명이 넘어가는 부원들을 한꺼번에 관리할 순 없었지만, 나를 제외한 레귤러 선수들을 이끌고, 나머지 선수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주장인 내가 먼저 앞장을 서야 했다. 가뜩이나 빈약했던 투수진은 에이스였던 3학년 탄바 선배의 은퇴로 인해 여름대회가 끝나고 난 뒤 제일 엉망진창으로 구멍이 난 부분이었다. 팀이 재정비되는 여름 코시엔과 가을 코시엔 사이. 이 짧은 시간 동안 팀을 어떻게 다듬고 채우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결과가 비춰질 것이다. 이 끔찍한 환경과 배합에 나날이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늘어만 갔고, 그 스트레스가 밖으로 터져 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 내게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사와무라였다.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밖으론 나온 내 옆에 슬그머니 다가와 앉은 녀석은 생각보다 다르게 늘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마지막 대회 이후로 입스에 빠져 계속 슬럼프 상태인 녀석의 평온한 얼굴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인 일이었다.


"이 시간까지 뭐하고 계십니까? 안 어울리게 분위기나 잡고."


그래도 평소 같으면 어이, 미유키 카즈야! 하며 다가왔을 녀석이 오늘따라 조용하게 다가온걸 보아 하면 확실히 내 표정도 심각하긴 했던 것 같았다. 머리는 복잡하고,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경기 도중엔 후루야나 사와무라 녀석들 앞에서 선배들만 믿으라고 당당히 소리친 적은 있었지만, 막상 내가 기댈 수 있던 선배들이 사라지니 부담감이 극에 달해 있을 지경이었다. 전 주장의 적극 추천으로 새로운 주장이 된 격이지만 아직도 내가 주장이 된다는 게 팀을 위한 옳은 선택인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스트레스받으며 탈탈 털릴지라도 일단 모두의 목표는 최대치까지 확실하게 끌어 올려주자는 모토로 임하며 버텨보았지만, 생각보다 잔뜩 날이선 가시밭 앞에서 금방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순간 머릿속에 생각했던 말들을 직접 내뱉은 나 자신에 대해 매우 놀라버렸다. 이제껏 제일 든든한 척 해보았지만, 사실은 제일 얼빠진 상태로 내버려져 있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릴 것만 같았다. 모두의 신임을 한 번에 받는 만큼 내가 잘해야 다른 애들도 잘할 것이라는 이상적인 생각에 항상 나만큼은 냉정하고 완벽한 상태를 보이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 건 당연한 거 아님까. 주전이 대부분 3학년 선배들이었는데, 다들 이제 없잖아요."


의외로 덤덤한 대답에 입이 다물어졌다. 항상 최상의 플레이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전 주장의 자리를 내가 다시 완벽하게 채울 수 있으리란 가능성은 적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주장이라는 자리에 가장 큰 부담을 가지고 있는 건 나 자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러 티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건만, 사와무라 같은 바보 녀석도 알아챌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티를 내고 다녔던건지.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슴다. 맨날 혼자만 완벽한 척, 잘난 척해도 사실 선배들한테 의지하고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야구에서 포수는 사람의 뇌와 같았다. 타자의 성격과 투수의 스타일에 따라 수만가지 변수를 생각해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항상 투수를 빛내기 위해 눈에 뵈는 것 없이 플레이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결정적으로 타자가 공을 쳐 냈을 때, 각각에 배치된 선수들에게 모든 걸 맡겨야 할 때도 있었다. 우리들의 여름 대회는 루, 외야, 내야 곳곳에 배치된 주전 3학년들의 활약으로 빈틈을 메꿀 수 있었지만, 지금의 선수진들론 확실히 3학년들 만큼 의지할 사람이 없는 건 확실했다.


"정 힘들면 리더한테 가서 조언이라도 구하면 되잖아요. 아직 졸업도 안 하셨는데."
"지금 3학년들 수험 준비로 바쁘거든."


아, 맞다. 멍청한 대답을 하는 녀석을 보며 헛웃음만 내뱉었다. 사실 나만 이렇게 힘든 건 아닐 테지. 같은 학년인 쿠라모치도 콤비였던 료스케 선배가 은퇴하고, 선배의 동생인 하루이치가 투입된 이후 그 조합에 꽤나 괴리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나마 에이스 기질이 보이는 후루야도 여름 코시엔의 충격이 가시질 않는 듯했고, 사실 제일 문제인 건 사와무라 이 녀석이었다. 마지막 경기의 결과가 큰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녀석을 보면 안쓰럽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지금 태평한 얼굴로 나한테 힘드냔 소릴 지껄인다는 게 참 기가 막힌 일이지. 누가 누굴 걱정해, 자기 하나 챙기는 것도 버거운 놈이.


"선배가 주장이 아니어도 그 자리가 얼마나 버거운지 잘 알고있슴다. 그 성격에 괜히 혼자 짊어지려고 하니까 더 곪아 터지는 거 아닙니까?"


저거 은근히 막말하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하진 않았다. 워낙 자유성향이 강한 내 성격에 주장이라니. 차라리 사와무라가 포수를 한다는 게 덜 놀라울 소리였다.


"미련 터지는 짓 혼자 하는 건 어떻게 말릴 순 없지만 힘들거나 불만 같은 거 들어줄 수는 있슴다. 크리스 선배처럼 해결책은 못 찾겠지만."
"무슨 소리냐, 뜬금없이 와선."
"…알고 있잖습니까. 지금의 전,"


아무것도 못 하고, 팀에 해가 되는 존재라는 거. 완벽하게 말문이 틀어막히는 문장이 뒤통수를 후려치고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이미 사와무라가 슬럼프에 빠졌다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팀에서 가장 열정적인 야구 바보가 결정적 실수로 인해 큰 좌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 팀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마운드 위에 서서 절대 공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세이도 투수들의 큰 공통점이었고, 그만큼 자기 공에 큰 자부심과 경기에 임하고 싶은 갈망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사와무라는 결정적인 순간에서 가장 큰 실수로 인해, 현재 완벽한 슬럼프 상태였다. 그것을 본인 스스로도 자각하며 더는 일어설 기운조차 없었는지 어둡게 축 처진 모습이 안쓰럽다 못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됐네요. 내 고민 같은 건 내가 알아서 할 건데 말이야, 남 챙기기 전에 너부터 챙겨야 하지 않냐?"
"그래도,"
"못한다 못 한다 하지 말고, 본인 스스로 단점을 파악해서 이겨낼 생각부터 해. 후루야 뛰어넘고 에이스 되겠다고 떠들어대던 놈이 고작 여기서 포기해도 되겠어?"
"……."
"나도 크리스 선배처럼 답은 못 찾아줘. 슬럼프는 스스로 이겨내는 거야."
"알고 있슴다."


프로 선수들도 이겨내기 힘들다는 슬럼프를 너무 일찍 겪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이것을 스스로 이겨낸다면 분명 또 하나의 에이스가 될 발군의 자격을 갖출 놈으로 성장하겠지. 그 날의 실수는 스스로에게 내린 시련이나 마찬가지일 테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펼쳐질 야구 인생에 큰 반환점이 될 테지. 게다가 항상 시끄러운 놈이 저렇게 축 처져 있으면 보기 흉하다고.


"그리고 고민 들어주려면 평소처럼 시끄럽게 굴라고."
"무슨 말입니까?"
"원래 맞장구 쳐주는 리액션이 좋아야 말하는 사람도 기분 금방 풀리잖아."


그 말에 꽤나 미묘한 표정을 짓는 녀석의 얼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엔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냥 내뱉었던 한마디가 무슨 영향을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 크리스 선배의 도움으로 슬럼프를 극복한 녀석이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상처를 딛고 일어나 조금은 성숙해져 있었지만 역시나 평소처럼 시끄럽고 쾌활한 모습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성장을 보여준 녀석이 곧 다가왔던 가을 코시엔에서 무서운 활약을 했던 건 아마도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코시엔의 결과를 얻기까지 모두가 겪었던 일과 고생들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값진 성취였다. 특히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와 고난들 속에서도 내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평소처럼 열정 바보로 돌아온 사와무라의 든든한 응원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풀네임으로 버릇없이 부르던 녀석이 언제부턴가 꼬박꼬박 선배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었지만 뭐,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나쁘진 않았다.

가을 코시엔 전과 이후로 사와무라완 사이가 급격하게 좋아진 상태였다. 그저 호기심으로 다가왔던 녀석이 이젠 호감을 뛰어넘을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을 보아 하면 힘들었던 가을대회에서 무너지려는 날 견디게 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았다. 알게 모르게 괜한 투정이나 어리광을 부린 적도 있었으니까. 부끄럽지만 그런 모습도 상관없다는 듯이 포용해주는 녀석의 반응이 만족스러워서 마음 놓고, 잠깐은 걱정들을 내다 버린 적도 있었다.

어느새 내 마음이 사와무라에게로 완전히 기울게 되었을 때, 덥석 녀석의 고백을 받아주었던 날은 2학년 말,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

 

 

 


"됐다. 계속 물어봤자 대답 안 할 것 같고,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고 가."
"오, 그래도 됩니까?"
"어, 학교엔 내일 가서 무릎 꿇고 빌면 어떻게든 되겠지~"


팍 일그러지는 녀석의 얼굴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거짓말이지, 허락 맡고 왔다는 거. 혹시나 해서 하루이치나 후루야에게 문자를 보내보았지만 둘 다 잠이 들었는지 답장은 없었다. 내일 돌아가면 엄청나게 깨질걸. 날 찾아와준 것은 기뻤지만 그래도 허락 없이 숙소를 이탈한 죄가 있으니 일부러 연락을 넣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몰래 나왔을 테니 내일 아침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난리가 날 것이었다. 어디 당해보라고. 침대 위로 걸터앉은 채 잠시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온기를 재어보니, 사람 안 사는 집이라는 걸 티라도 내듯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꽤 오랫동안 밖에 있었던 것 같은데 찬데서 재우면 감기 걸릴 것 같단 말이야. 이불에도 코다츠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아직도 코다츠 온기에 엎어져 있는 사와무라를 불러다 침대에 눕혔다. 아무래도 이불 속 온기가 차갑긴 차가웠는지 금세 춥다고 난리였다.


"그러게 누가 밖에서 멍청하게 기다리랬어?"
"선배가 늦게 온 검다! 기껏 찾아왔는데 너무 냉대하는 거 아닙니까?"


나 이제 여기서 안 살아. 그리고 말없이 찾아온 건 너거든? 선수팀에 들어간 이후로 잠시 사정이 있어서 급하게 구한 집이었으니 더는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다시 보낼 짐마저 상자 하나를 겨우 채울 정도로 적었다. 차라리 선수촌에서 날 찾는 게 빨랐을 텐데, 용케도 여기까지 오셨어. 하여간 진짜 바보는 어쩔 수 없다니까.


"가만히 있어. 계속 움직이면 바람 세서 더 춥다."


이불을 꽁꽁 싸매고도 추웠는지 한참 뒤척거리기를 반복했다. 차라리 코타츠 안에서 자라고 하는 게 더 나을까. 밖에서 오래 기다리더니 결국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미련한 짓은 자기가 제일 사서 하더니만, 이럴 줄 알았지. 이마에 손을 올려보니 생각보다 뜨거운 온기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렇게 아팠으면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지 바보야!


"잠깐 누워있어, 금방 다녀올게."


이 늦은 시간에 문을 연 약국이 있을까. 사방이 온통 주택가였지만 약국 같은 곳을 찾으려면 조금 더 밖으로 가야만 했다. 게다가 자주 오지 않는 동네라서 약국은커녕 편의점 위치도 잘 모르는데. 결국, 한참 동안 뛰어다니다 발견한 편의점에서 산 감기약을 산 뒤, 펑펑 쏟아지는 눈들을 제치고 집을 향해 전력질주를 했다. 기특하게도 집에 가는 길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건지 길을 헤매거나 하진 않았다. 급한 마음으로 달리다 보니 신호등 앞에서 사고가 날 뻔 했지만, 집에서 혼자 누워있을 사와무라가 걱정돼 자꾸만 다급해지는 발걸음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미 우리는 헤어진 상태로 마지막 장을 찍었는데, 더는 팀메이트도 아니면서 왜 아직도 걱정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꽤 요란스럽게 열린 문을 조용히 닫고 방으로 들어가니 편의점에 다녀오는 동안 어느새 잠이 든 사와무라의 얼굴이 나를 반겨주었다. 아직 열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였지만 다행히 오르지도 않았다. 약을 먹으려면 깨워야 하는데, 깨면 더 추워할지도 모르고. 좀 더 상태를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도 한창 유행하는 독감에 걸리지 않았던 유일한 놈이었으니까. 어쨌든 간에 기껏 약사들고 왔더니 태평하게 잠을 자? 헤어졌다느니, 끝난 사이라느니 그딴 말을 면서도 결국 제일 신경을 쓰고 있던 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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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3학년이 되었을 때. 고교 시절 마지막 여름 코시엔을 마치고 은퇴를 할 무렵 감독님은 나를 따로 불러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세이도 야구부를 이끌어갈 차기 주장에 대한 것과 주장으로써 마지막으로 팀을 위한 지적이나 보완점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나를 보내지 않은 채 가만히 생각을 하고 계셨다. 이제 이 방을 나가면 고등학교 야구부 생활이 끝나는 건데 그것에 대한 아쉬움인 것인지, 또 할 말이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침묵에 한참 동안 그 자리를 지키다 드디어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감독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와무라의 대해선 어떻게 할 생각이지?"


순간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더이상 크리스 선배 같은 조언자가 없어도 충분히 성장하며 에이스로 발돋움 한 놈에게 또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것이 있던가? 아마도 포괄적 의미라 생각했던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서 감독님께 다시 물었다.


"너와 사와무라의 관계에 대해선 대충 알고는 있다."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포수로서 투수인 사와무라와 배터리를 짜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진 팀 분위기 속에서 우리 사이가 쉽게 들킬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게 멍청한 판단이었을까. 눈치가 빠른 쿠라모치조차도 알아채지 못하게 항상 조심했는데. 감독님은 변명의 여지를 주려는 건지 잠시동안 말없이 날 바라보셨지만 어떠한 변명도 생각하거나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변명하려 해도 이미 들켰다는 걸 직감한 순간부터 머릿속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셨는지, 감독님도 나를 추궁하려는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나는 오늘부로 야구부를 떠나지만 이렇게 들켜버린 이상 사와무라에게 남은 1년이 나로 인해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부터가 앞섰다.


"둘의 관계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겠다."
"......."
"하지만 앞으로 남아있는 부 활동에 지장을 준다면 내가 개입할 수밖에 없겠지."


맞는 말이었다. 감독님도 아직까진 야구부에 잔류하고 있는 사와무라를 더 생각하는 게 옳은 판단이겠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앞서서 야구에 소홀해진다면 팀에겐 가장 큰 폐가 될 것이고, 본인의 야구 인생에도 큰 영향이 있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끝내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서로가 해가 된다고 느끼기 전에 미리 정리할 준비를 하란 의미라는 걸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이미 선수팀에 들어갈 작정으로 진로를 준비하고 있는 나지만, 사와무라는 아직 더 무한한 가능성과 선택의 길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에라도 내가 그 선택에 대해 걸림돌이 된다면 기꺼이 사라져줄 각오를 해야 했다. 우리가 언제까지 사랑놀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평범한 연인들처럼 언젠가는 헤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겪을 거, 사와무라를 위해서라도 좀 더 빨리 겪게 한다면, 그렇게 하면 너에겐 큰 상처가 될까.


"잘 판단하길 바란다, 미유키."


그리고 그동안 수고 많았다. 그 말을 끝으로 감독님은 먼저 자리를 비우셨다. 그 방안에 혼자 남겨진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한 나름의 배려일 것으로 생각했다. 아마 사와무라가 동성이 아닌 이성을 사귀고 있더라도 똑같은 소리를 하셨겠지. 온종일 학업과 야구만 반복하는 사와무라의 일상에서 나는 곧 빠지게 될 것이다. 이제 같은 마운드에서 연습할 일도, 함께 숙소 생활을 할 일도 없어졌으니까. 정말로 내가 사와무라에게 방해된다면 이 핑계를 대서라도 나는 너와 헤어져야 할까. 스스로 자멸할 선택을 한다는 게 과연 녀석을 위한 일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서로를 위한다는 핑계로 헤어진다는 건 동시에 상처를 주고받는 일인데, 감히 그것을 행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조금 두려웠다. 사와무라에겐 충격요법을 넘어서 더 큰 좌절이 될지도 모를 일인데. 한참 동안 방 밖으로 나가질 못했다. 어느 것이 더 옳은 선택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워 머리를 쥐어짜내 보아도, 차오르는 욕심 때문에 판단이 흐려졌다. 사와무라를 위해 헤어지라고 말했다. 그게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진 아무도 모르는데.


"안나오고 뭐하심까?"


언제 온 것인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행동에 굳어져 있던 표정을 풀고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아니, 그냥. 시원섭섭해서.


"저도 남아있는 선배들까지 은퇴하니까 엄청 섭섭함다. 배터리도 다시 짜야 하고."
"너희 학년에 잘하는 애 한 명 있지 않았나? 1학년 중에서도 잘하는 놈 꽤 있던데."
"그래도 선배랑 배터리 짜는 게 제일 좋아요!"


괜한 어리광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웃어넘겼다. 모든 경기에 참여했던 내가 팀을 떠나면 기존 팀메이트들에게도 꽤 영향을 줄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고 고등학생으로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고, 전혀 다른 스타일의 포수와 호흡을 맞춰보는 것도 투수로서의 성장을 위한 일이었다. 너나 후루야나 잘 해낼 것이라고 믿지만.


"사와무라."
"네?"
"앞으로 같이 야구…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오늘부로 나는 정식 은퇴니까 말이야."


우리도 슬슬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사와무라를 보고서야 겨우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앞으로 너의 모든 일에 내가 영향을 끼쳐 방해가 될 정도라면 이만 여기서 끝내는 게 나았다. 나라는 존재가 너에게 독이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었다. 내뱉은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비수를 내뱉는다. 헤어지자, 우리.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는 마지막 장의 시작을 알렸다. 서로를 위한다는 변명 따위로 포장된 내 말을, 최대한 아름답게 장식해보려는 이별을 잘 받아들여 주길.


"나도 곧 선수팀에 들어갈 거고, 아마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면 이미 학교엔 없을거야. 너희와 은퇴시합을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분간 너와 야구 할 시간은 없다고 볼 수 있잖아."


최근 3년간의 경기 대부분에서 포수들이 중요한 역할을 대신 해주었기 때문에 이번에 투입될 새로운 포수에게도 큰 기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가 투수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되겠지.


"포수는 실전 대비를 위해서 여러 투수와 호흡을 맞추곤 하지만 그건 투수도 마찬가지야."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 더이상 투정부릴 이유 없잖아."
"그게 아님다!"
"뭐?"
"저는 그냥, 그냥…선배랑 더이상 못 만난다는 게 싫은 것뿐인데…."
"그러면 대체 뭐가 문제야?"
?학년 포수가 미유키 선배처럼 뛰어난 애란 것도 알고 있고, 누구랑 배터리를 짜든 어차피 선배는 이제 없으니까 당연한거란 것도 알고 있슴다. 그런데…그런데 지금 그딴 핑계나 대면서 나랑 헤어지자는 게 말이 되냐!!"


아마도 내 딴엔 좋게 달랬던 것 같았는데,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옛날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투수는 어깨 힘이 가장 강한 포지션이라 진심으로 주먹을 날리면…거짓말 살짝 넣어서 죽을 직전만큼 아프다. 예전에 메이 녀석한테 맞아봐서 알거든. 얘 지금 혼심을 다해 주먹 날렸어. 하하, 아픈 배를 부여잡고 있어도 고통스러운 와중에 이번엔 멱살을 잡고 이리저리 흔드는구나.


"누구 마음대로! 절대 안 헤어질거다!! 헤어지자 해도 집착하면서 매달려줄 테니까 각오해라, 미유키 카즈야!!"
"그래그래, 알겠으니까 이것 좀 놔줘."


자세히 보니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이 눈꼬리 끝을 타고서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었다. 서러울 정도로 싫겠지. 이제 자주 만나지도 못할 텐데 괜한 이유나 들먹이면서 헤어지자고 했으니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힌 것 같아 괜히 마음 한 켠이 시렸다. 하지만 사와무라,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이제 못 보는 것도 싫슴다…! 아직도 선배랑 야구하는게 좋고…마운드에 섰을 때, 다른 사람보단 선배가 눈앞에 있는 게 더 좋단 말이에요…."
"사와무라."
"그러니까 제발…헤어지자는 말 같은 거, 하지 마…."
"……"


끝내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 분위기에 대처할 생각도 없이 일단 우는 녀석을 품에 안아주었다. 이렇게 하면 우리 결국 못 헤어져.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픈 이별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 나는 아직도 사와무라를 좋아한다. 그건 이 녀석도 변함이 없다. 감정표현 같은 것에 서툴렀지만 참된 감정에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악역을 자처하며 미움을 사는 것은 익숙했지만 그래도 소중한 사람에게만큼은 솔직한 모습으로, 진실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앞으로 바보 같은 짓 안 하고, 함부로 반말 안 하고, 버릇없게 굴지 않을 테니까…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들켜서 그 때 헤어지자고 하면 군말 없이 헤어져 줄 테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미 감독님한테 들켰는데. 이건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비밀이 될 것 같았다.


"사와무라."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사와무라- 한 번 더 불러보아도 끝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고개를 들려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마주할 생각도 없었으니 가쁜 숨에 벌벌 떨리는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곧 3학년이니까, 앞으로 야구를 하면서 너의 진로를 선택해야 할 기회가 올 거야."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말리지 않을게. 그런데 만약에, 혹시라도. 내년 코시엔에서 좋은 성적 거두고, 은퇴할 즈음에 너가 우리 팀으로 오게 된다면.


"그 때, 다시 시작하자."


헤어지는 건 나도 싫어. 그 말에 신호탄처럼 눈물이 터진 사와무라를 더 세게 안고 조그마한 머리통에 얼굴을 묻었다. 언젠가 사와무라가 우는 한이 있어도, 그 원인이 내가 아니기만을 바랐지만 언제나 사와무라를 웃기고, 울리고, 화내게 하는 건 항상 나였다. 그래, 이것도 나 때문이야. 진작에 널 밀어냈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고, 들키지 않게 더 조심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어.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 잘못이야. 입술을 짓이겨 물곤 한참 동안 사와무라의 울음소리만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더 입을 열었다간 우리 진짜 헤어져야 할지도 몰라.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1분 1초가 아까운 와중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이별의 시간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더 상처받기 전에 여기서 잠깐 쉬자.


"나도 싫고, 너도 힘드니까…."


당분간은 헤어진 걸로 하자. 어떻게 포장해도 아픈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란 힘들었다. 아직 감정표현에 서툰 우리가 사랑의 참됨을 알기도 전에 이별이란 씁쓸함과 상처를 먼저 겪어야 한다는 현실이 억울했다. 경기에서 지면 본인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되고, 슬럼프가 오면 어떻게든 이겨내면 되고, 부상을 입으면 상처가 아물 때까지 휴식을 취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별은 그게 아니잖아. 어떻게 해보아도 쉽게 치료될 수 없는 병을 얻게 되는 것이니 우리가 견뎌내야 할 이별이란 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지금의 우리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방에서 나가는 시점부터, 헤어지는 걸로 하자."


더는 연인 사이도 아니니까 다시 옛날처럼. 버릇없게 미유키, 미유키 하면서 선배 이름 멋대로 부르고, 툭하면 선배 멱살 잡고, 내 앞에선 비글같이 굴어도 크리스 선배 앞에선 얌전해지고, 같이 연습 해주지 않으면 후루야만 챙긴다면서 툴툴거렸던 옛날처럼. 다시 그때처럼 그렇게, 돌아가자.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엔 오로지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방을 나가면 이제 우리는 남이 되겠지만 아직 이 안에 있는 한 연인이라는 조건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으니까. 아무도 쉽게 자리를 비우려고 하지 않고, 서로를 껴안은 채 엉엉 울기만 했다.


차가운 겨울에 시작했던 사랑이 절정에 다다랐던 어느 여름날, 우린 헤어졌다.

 

 

 


*

 

 

 


"아아아악!!"


요란한 비명에 눈이 번쩍 뜨여 고개를 쳐들자마자 뒷목에서 확 느껴지는 통증에 다시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아, 엎어져서 잤나? 아린 뒷목을 붙잡고 겨우 고갤들어 비몽사몽 한 눈을 한참 동안 껌뻑이는데 누군가 내 방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 사와무라였지. 맞아, 어제 밖에서 서 있길래 집으로 들였고, 저 녀석 갑자기 열이 오르길래 편의점 가서 약 사오고, 그 다음엔 그냥 잠들었나?


"왜 이제 깨운거야아!! 지금 몇신줄 압니까?!"
"저기, 오늘 토요일이라서 연습 휴무인데."


맞다, 아직 학생이었지. 알람이라도 맞추고 잘 걸 그랬어. 근데 지금 몇 시더라? 손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열어보니 오후 2시 12분이란 시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둘 다 곯아떨어졌었구나.


"흐어어, 감독님한테 죽었다!!"


감독님?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쟤 자꾸 뭐라는 거야. 벌써 11월을 넘긴 시점인데 이미 여름 코시엔은 끝났을 거고, 억지로 팀에 잔류하고 있었다 해도 가을 코시엔마저 끝난 상황에서 아직도 야구부에 남아있다는 게 말이 돼?


"이미 은퇴했으면서 무슨 야구부 타령이야? 그리고 주말이니까 천천히 준비해도 돼."
"무슨 소리심까!! 은퇴하려면 한참 남았는데요?"


너야말로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잠이 덜 깨서 정신이 없는가 싶었다. 자꾸만 괴상한 소리만 내지르며 멘탈 붕괴 현상에 빠진 녀석을 후딱 욕실에 집어넣었다. 교복은 안 갖고 왔을 게 분명하고, 여기서 학교까지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니까 뛰어가면 금방 도착하겠지.


"학교 안간다고 여유 부리냐!!"


뭐야, 언제 나왔어? 하여간에 정말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는 놈이었다. 기가 막힌 속도로 튀어나온 녀석은 입고 온 외투만 챙긴 채 집 밖을 나서기 위해서 부랴부랴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야, 감기약 가지고 가. 혹시라도 또 감기 걸릴 것 같으니까.


"잠깐만."
"아, 또 뭡니까!"


내가 자주 매고 다니던 목도리를 녀석에게 둘러주었다. 이러면 감기 걸릴 걱정 없겠지. 원래 바보는 감기 안 걸린다곤 하는데 그래도 새벽에 감기 걸린걸 보아하면 완전 바보는 아닌가 봐? 킥킥거리며 놀리자 자신은 바빠죽겠다며 놀아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하여간에 버릇없이 내뱉는 건 여전하지.


"같이 가자. 너 여기 지리 잘 모르잖아."
"오, 혹시 지름길이라도 알고 계신검까?"
"아니, 나도 여기 잘 모르는데?"
"당신 진짜 도쿄 사람 맞아?!"


어떻게 가다 보면 아는 길 나오겠지 하하하. 학교와 가깝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 길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랐다. 여기 내가 살던 동네 아니거든. 도쿄 사람이라고 도쿄 전체 지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어젯밤 눈이 와서 길도 얼어붙었겠다, 길도 찾을 겸 천천히 가지 뭐. 태평한 소리에 속이 타들어 가는지 방방 뛰며 소리를 지르다 결국 아무것도 없던 복도에서 넘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 그러게 내가 조심하라니까. 놀랐던 마음을 추스르고 손을 내밀어 주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고 있었다. 혹시 넘어질 때 머리부터 넘어졌어?


"그냥, 옛날 생각 나서요."


사와무라를 일으켜주곤 나도 덩달아 배시시 웃었다. 나처럼 똑같이 왜 그러냐 물어보길래 그냥 옛날 생각이 났다고 똑같이 대답했다. 연습에 지쳐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사와무라를 일으켜주는 건 항상 내 일이었는데. 일상이 되어버렸던 일이 이젠 옛날의 추억처럼 기억 너머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우리가 멀리 와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아, 학교!!"


다시 학교로 가기 시작했다.

 

 

 


*

 

 

 


생각보다 길이 더 미끄러워서 몇 번이고 미끄러질 뻔한 사와무라를 잡아주느라 애를 먹었다. 이 정도 날씨면 연습도 꽤 곤란할 것 같은데. 급하다며 자꾸만 보채는 녀석을 어찌 해야 할까 싶었다. 기숙사 때문인지, 정말로 야구부 때문인 것인지. 이상한 낌새에 자꾸 괴상한 의심이 들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오랜만에 학교 가는 건데, 별일 있겠어? 주택가를 조금 헤매다가 익숙한 골목길을 따라 쭉 빠져나오니 어느새 학교와 이어져 있는 길목에 닿아 있었다. 시간은 한적한 2시 30분. 조용한 길에서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은 없었다. 고등학교 내내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등굣길을 걸었던 적이 없어서 그런지, 익숙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느낌이 강했다. 세이도에 입학하면서 나는 진짜 야구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고등학교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가장 재밌는 야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정말로 꿈같고, 길고도 짧았지만 값졌던 시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야구도, 사랑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어이, 야!"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 확인했다. 뭐야, 쿠라모치 너냐? 작년 여름, 코시엔이 끝난 이후 모든 스카웃을 거절했던 나를 끝까지 설득해서 지금의 팀에 있게 해준 녀석이었다. 너랑은 참, 악연인지 필연인지. 고등학교부터 독하게도 붙어사는구나. 근데 웬일이야?


"모교 찾아오는 것도 허락 맡아야 하냐? 아, 그보다 우리 방 알람 시계 바꿔둔 거 너지!!"
"아하핳,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인 것 같은데요?"
"역시 너였냐!!"
"하하하핳, 눈치 못 챈 사람이 바보지-."
"아, 됐다. 어차피 오늘은 연습 없는 날이니까. 그런데 너야말로 여긴 웬일이야?"
"아, 나는 이 녀석 데려다주려고…"
"지금 네 옆에 아무도 없는데?"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지?


"방금까지 옆에 있었는데?"
"뭐야, 설마 숨겨진 여자친구?"
"그런 거 없어. 옆에 사와무라 있었는데 못 봤어?"
"…누구?"
"사와무라, 사와무라 에이쥰. 벌써 누군지 까먹었어?"
"…알긴 아는데. 너 혹시, 약 같은 거 잘못 먹었어?"


예상치 못한 답변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소리야, 나 엄청 멀쩡한데. 한참 동안 아니꼬운 눈으로 날 바라보던 녀석이 이내 시선을 거두곤 설마, 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야, 갑자기. 어딘가 찜찜해지는 행동이었지만 굳이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지금은 저 녀석보단 사와무라가 더 중요했으니까.


"야구부 쪽으로 갔으려나."
"아, 연습실 갈 거면 같이 가자. 슬슬 오후 연습하고 잠깐 휴식 시간일 것 같은데."


역시 마운드에 있을까. 안보이니까 괜히 걱정되는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시켰다. 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말도 없이. 늘 걸었던 교정 너머 학교 뒤편에 마련된 그라운드로 가보니 한참 연습의 절정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오치아이 감독님을 중심으로 1군의 연습시합과 제2 그라운드에선 2군의 특훈, 나머지 인원들은 배팅이나 투구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익숙했던 얼굴들도 전부 은퇴를 한 터라 그라운드에 아는 얼굴은 없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놈처럼 발이 빠른 선수도, 코미나토 형제처럼 천부적인 센스가 뛰어나던 선수도, 후루야처럼 괴물 같은 공을 던지는 선수도 이 그라운드엔 한 차례의 계절을 지난 추억처럼 사라져 있었다.


"어? 햐하! 이게 누구냐!"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격한 기쁨을 표현하는 녀석 때문에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 주인공들을 확인했을 때, 녀석의 반응처럼 정말 반가운 얼굴들이 눈앞에 있었다. 후루야, 하루이치. 사와무라와 함께 1군을 함께 달렸던 1학년 녀석들. 150km에 육박하던 괴물 같은 공을 던지던 놈과 친형의 그림자에 가려져 천부적인 센스를 감추고 있던 녀석. 세이도에 갓 입학하여 부족한 점만 가득했던 녀석들이 어느새 3학년이 되어 우리 없이도 코시엔의 승리를 거머쥔 채 은퇴하였다고 들었다. 얼굴은 그대로여도 저마다의 스타일대로 성장한 걸 보아하니 선배로서 꽤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저 둘 사이엔 항상 사와무라가 있었는데. 그나저나 이 녀석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너희들 사와무라 못 봤어?"
"…에?"


애들이 잘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정확한 발음으로 사와무라를 내뱉었기 때문에 확실히 인식하고 보이는 반응이었다. 아까 쿠라모치도 그러더니, 사와무라의 이름을 내뱉자마자 다 똑같이 굳어지는 얼굴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그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들 왜 그래?


"야, 미유키. 너 아까부터 자꾸 사와무라 얘기하는데, 환각 같은 거라도 봤냐?"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뭐 숨기는 것 마냥 얼버무린 게 누군데."
"너야말로 지금 무슨 소리야. 작년 겨울에 있었던 일 벌써 잊었어?"


작년 겨울? 나 그때 학교에 없었는데? 너랑 같이 연습하고 있었잖아. 생각나는 데로 내뱉었을 뿐인데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확 구기며 그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게 아니면 대체 뭐라는 거야. 여름에 이별을 고한 뒤로 사와무라와 연락조차 한 적이 없는데.


"정말로 기억 안 나세요?"
"충격받아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냐?"


하나둘씩 인상을 구겨오는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야. 나는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사와무라와 함께 잠을 자고, 오늘 아침에 함께 대화하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던 그 시간을 부정하는 듯한 모두의 표정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작년 겨울에, 무슨 일이 있었지?


"정말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은데…."
"울다가 뛰쳐나가면서 머리라도 박았나보지."
"너희끼리만 떠들지 말고 말 좀 해줄래? 진짜 기억 안 나."


정말 모르겠다는 내 말에 이유모를 정적이 감돌았다. 평소 같으면 직구로 내뱉었을 쿠라모치조차 입을 꾹 다문 채 괜히 나를 외면하고, 후루야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하루이치가 기어코 입을 열어보려 하는데, 갑작스러운 소름이 온몸에 돋아나며 어딘가 불길한 예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과연 저 입에서 어떠한 말이 튀어나올지. 작년 겨울, 사와무라에게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대체 무엇이 나를 울다 뛰쳐나가게 하였는지, 들어야 했다.


"에이쥰군…작년 겨울에 교통사고로 죽었잖아요."


이젠 내 귀를 의심해야 할까. 거짓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아까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던 애가 갑자기 죽었다니. 내 옆에 있었어. 어젯밤 나와 잠을 자고, 오늘 아침에 함께 걸어오면서 이것저것 떠들기도 했어. 아니야, 아니다. 이것은 거짓이다. 다들 잘못 알고서 이런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게 분명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귀를 틀어막으려 했지만 그런 나를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하루이치는 다시 입을 열며 말을 이어갔다.


"그 날, 연습 끝나고 어디 다녀올 곳이 있다면서 갑작스럽게 외출증 끊고 나갔는데,"


외출 허락 맡고 나왔습니다!


"선배가 자취하고 있다는 곳으로 가려던 참이었나 봐요."


신호등 앞에서 사고 날 뻔 한 거 감수하고 왔는데.


"이거…쿠라모치 선배 통해서 드리려고 했던 건데,"


에이쥰군이 선배한테 드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작은 쇼핑백 안에 들어있던 검은 목도리. 찬 겨울 내내 내가 메고 있던 목도리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아니야, 아닐거야. 아까 사와무라한테 직접 메주였던 목도리인데. 그럴 리가 없었다. 거짓말 하는 거지? 이거 분명 헤어지자 했다고 사와무라와 짜고 치는 장난인 거지? 그럴리가 없잖아. 사와무라가 죽었을리가 없잖아. 그럴리가 없어. 부정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어젯밤부터 줄곧 사와무라와 함께 있었던 내가 그 산 증인이라고. 그럴리가 없어, 절대.


"사와무라 장례식장에서 계속 울다가 뛰쳐나간 거 기억 안 나?"


아니, 아니. 아니야, 그런 거 내 기억엔 없어. 그럴리가 없어. 그 녀석이 죽었을리가 없어. 사와무라는 죽지 않았어. 아까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다고. 죽었을리가 없어. 그 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어. 내 눈으로 직접 봤어. 내 손으로 직접 만져도 봤어. 어젯밤 같이 자고, 오늘 아침에도 있었어. 그러니까 죽지 않은거야. 이거 지금 다들 장난치는거야. 그럴리가 없어. 제발, 이제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 화 안 낼 테니까 그냥 짓궂은 장난이라고 해줘. 얼른.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아니야 그럴리가 없을거야 죽지 않았을거야 그럴 수 없어 어제부터 나와 쭉 있었던 게 누군데 죽었을리가 없어 아니야 아니야 그럴리가 없다고


"어이, 왜 그래?"
"괜찮으세요?"


아니야 아니야 내 기억엔 죽지 않았어 분명 또 마운드에서 나를 기다리면서 연습하고 있을거야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잖아 같이 연습할거야 사와무라가 던진 공 받아주면서 같이 연습할거야 그러니까 죽지 않았어 그럴리가 없어 그러지마 제발 이상한 거짓말 하지 마 그 애의 존재를 부정하지마 아니야 아니다 아니라고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아니라고 아니야 사와무라는 죽지 않았어 나와 같이 있었으니까 죽지 않았어 사와무라는 죽지 않았어 사와무라는…


「금일 밤 9시, 서도쿄 지역 어느 편의점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인해 한 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와무라는


「피해자는 근방에 위치한 세이도 고등학교 소속 2학년 학생으로, 내년 고교 코시엔을 준비하던 주전 선수로 밝혀져 큰 안타까움을 사고 있습니다. 경찰은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죽었다.

 

 

 


*

 

 

 


누군가는 사람의 죽음을 자연의 순리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어이없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 또한 자연의 순리대로 죽어야만 했을까.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이었다면 그 사람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지? 짧은 삶이든, 긴 삶이든. 너가 그렇게 허무한 죽음으로 세상과 작별을 해야 하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널 사랑할 수 있었을까.

어울리지 않게 펜을 들고서 짧은 편지를 적어본다. 수신자는 사와무라 에이쥰, 발신자는 미유키 카즈야.


사와무라.
만약에, 네가 우리 학교로 오지 않았더라면 우린 만날 수 있었을까?
만약에, 너가 날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만약에,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어떻게 했을까.
만약에, 헤어지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죽지 않았을까?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지금 당장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너는 돌아와 줄까?

기다리고 있을게.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답장을 기다리며 편지를 마무리 짓는다.
도착할 주소는 천국.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편지를 부쳤다.


올해 겨울, 우리는 영원한 끝을 맺었다.


[은혼/긴히지]예정된 뉴스


"여보세요? 긴상입니다ㅡ 아아. 기다리던 검은 고양이야."
[형씨 취향도 참 별나네요.]
"사돈 남말 하시네. 넌 어때, 잘 되어가냐?"
[뭐, 토끼가 듣는 약을 구하고 있습니다.]
"평소대로 KHJ로 내보내줘. 케츠노 아나운서가 보도하는 걸 보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아ㅡ 좋은 밤 보내세요]

긴토키는 전화가 끊긴 휴대전화의 검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씩 웃고는 핸드폰 액정을 닫았다. 긴토키는 전화기를 주머니 안에 넣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긴토키의 발걸음이 지나간 곳에는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바닥에 떨어져 울려 퍼졌다.


*


"어레레레~ 거기 히지카타군 아니야아~?"

오랜만이야아~~ 긴토키는 멀리서 보이는 히지카타를 발견하고 두 팔을 뻗으며 달려나갔다. 히지카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문어 빨판처럼 달라붙는 긴토키의 머리를 밀어냈다. 긴토키는 그런 히지카타의 어깨에 팔을 올려 기대려 했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에 불쾌해지기 시작한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팔을 세게 쳐냈다.

"뭐하는 거야 지금."
"아이~ 왠지 기부니 조타~"

마다오라앙ㅡ 술마셔써ㅡ 긴토키는 고개를 들고 비틀거리며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던 긴토키가 앞에 있던 돌멩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밟아버렸고, 중심을 잃어 저 혼자 넘어져 버렸다. 히지카타는 그런 긴토키를 보며 코웃음을 쳤고 발로 긴토키의 다리를 찼다.

"어이, 일어나."

일어나라고ㅡ! 히지카타가 깨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딴 세상으로 간 긴토키의 의식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한숨을 포옥 쉬고 잠시 긴토키를 바라보더니, 그를 어깨에 들쳐매고 발걸음을 돌렸다.


*


"이 놈은 왜이리 무거운거야...!"

히지카타가 긴토키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 가방 안에 열쇠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히지카타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히지카타는 집 안을 둘러보고는 긴토키를 눕힐 침대를 찾았다. 저 방 구석에 있는 침대를 발견한 히지카타는 손등으로 어느새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그 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등 뒤에서 히죽히죽 웃어대는 입매와 날카로운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한채.

"윽ㅡ"

히지카타는 갑자기 목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눈을 찡그리며 신음을 뱉었다. 곧이어 목에서 차가운 느낌이 났고, 히지카타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손을 목에 가져갔지만 허공에서 멈춘 손은 헛수고가 됐다. 손목을 잡힌 히지카타는 고개를 젖혀 뒤를 바라보았고 자신을 바라보며 휜 채 웃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머릿 속에서는 위험하다고 시끄럽게 앵앵대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히지카타의 눈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긴토키는 그런 히지카타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수고했어, 히지카타군."
"너... 뭐 하려는ㅡ"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그렇지 않은 네 탓이잖아?"

그러게 남은 믿는게 아닌데ㅡ 긴토키는 히지카타를 보면서 피식 웃었고, 그것을 바라본 히지카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긴토키가 히지카타의 목깃을 잡고 침대로 집어 던지자 히지카타는 속수무책으로 그 위를 굴렀다. 긴토키는 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내서 히지카타의 바지를 고간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찢고는 드러난 브리프 마저도 찢었다. 갑자기 서늘해진 아래에 히지카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긴토키를 바라보았다. 긴토키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찰칵 소리와 함께 눈 앞에 드러난 경관을 사진에 담았다.

"보기 좋네."
"이 개새ㅡ"
"안돼 안돼. 욕은 나빠, 히지카타. 입이 더러워지잖아? 좀있다 펠라도 해줘야 하는데."

알겠지?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혀를 엄지와 검지로 잡아 당기고 손톱 끝으로 긁었다.

"우읏ㅡ"

긴토키는 혀를 한참 갖고 놀다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손을 히지카타의 고간으로 가져갔다. 미끌거리는 이상한 느낌에 히지카타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잘근 씹었다.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고환을 몇 번 손으로 굴리더니 입을 대어 빨아들이고 이로 깨물었다. 조금씩 피어오르는 쾌감에 자기혐오를 느끼며 히지카타는 가쁜 숨을 뱉었다. 어느새 손은 기둥까지 올라와 위아래로 쓰다듬고 있었다. 긴토키는 손을 조금 더 움직여 끝을 손톱으로 살살 긁고는 말간 액체가 방울방울 맺힌 움푹한 사이를 혀로 핥았다. 할짝할짝 하는 부끄러운 소리와 눈덩이처럼 커지는 쾌감에 히지카타의 눈가가 빨개졌다.

"아... 읏ㅡ 잠ㄲㅡ"

긴토키는 손바닥을 펴 성기 끝을 빠르게 문질렸다. 다가오는 사정감에 히지카타는 입을 작게 벌리고 신음을 내뱉었다.

"아ㅡ"

긴토키의 손바닥에 불투명한 하얀 액체가 튀었고 히지카타는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려 가슴을 들썩거렸다. 긴토키는 차게 식은 눈으로 호흡을 가삐 하는 히지카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제야 눈치챈 히지카타가 온기 없는 긴토키의 눈과 마주치자 사정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얼어붙었다.

"내가 언제 가라고 했어?"
"!!"

긴토키는 주머니에서 딸랑거리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그것을 발견한 히지카타의 눈이 두려움으로 가득 찼고 이를 딱딱 부딪쳤다. 긴토키는 자신이 꺼낸 것에 정액을 발랐고 그것을 이리저리 흔들자 시끄러운 방울 소리가 났다.

"있지, '요도플' 이라고 들어 봤어?"
"!!!"
"그냥 정액 통로 마개라고 생각 해."
"그게 무슨ㅡ"
"전립선 자극도 된다니까 더 이득이지?"

긴토키가 막대의 끝을 요도 입구에 댔고 정액을 발라 미끈거리는 막대는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히지카타의 얼굴이 종잇작처럼 구겨졌고 서서히 밀려오는 이물감과 통증에 히지카타는 입을 벌리고 신음을 내뱉었다."

"윽... 아ㅡ 이 미친ㄴㅡ"

막대는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성기 끝에는 방울만 매달려 있었다. 긴토키는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듯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이제 먼저 못 가겠네?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미소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긴토키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벨트를 풀었고 트렁크도 마저 벗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딸기 무늬가 그려진 트렁크였다. 긴토키는 자기 성기를 히지카타의 성기에 갖다대고는 허리를 움직여 마찰시켰다. 그래도 모자란지 자기 손을 가져가 기둥을 위아래로 쓸었다. 긴토키가 움직일 때 마다 히지카타의 성기 끝에서 방울이 딸랑거리며 이리저리 달랑거렸다. 방울 소리에 히지카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있지, 네 뒤가 자꾸 넣어달라고 벌름거리는데?"
"읏... 누가ㅡ!"

여기가.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엉덩이 골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긴토가 엉덩이 사이를 벌리더니 손가락 하나를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갑자기 들어온 침입자에 히지카타의 몸이 벽돌처럼 굳었다.

"힉, 하지, 하지 마!"
"음, 역시 좀 뻑뻑하네. 어이, 입 벌려봐."

긴토키는 구멍에 넣었던 손가락을 위로 가져가 히지카타의 입술에 댔다. 히지카타의 눈이 일그러져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시, 싫어ㅡ! 더러워!"
"입 벌려."
"싫ㅡ"
"벌려."
"ㅡ"

더 이상 반항 못하게 긴토키가 한 손으로 히지카타의 양 볼을 꾹 눌러 튀어나온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손가락을 피해 혀를 굴려 보았지만 손쉽게 잡혀버렸다. 손가락은 혀 끝, 아랫부근을 갖고 놀다가 타액 범벅이 되자 빠져나갔다. 긴토키는 미끌미끌해진 검지와 엄지를 맞닿아 문질렀고 이내 만족스러운지 그 손을 아래로 내려 자기 성기에 발랐다.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구멍에 성기 끝을 대고 천천히 안으로 밀어넣었다. 차오르는 부피감에 히지카타는 몸을 떨었고 입술을 세게 깨물더니 피가 새어나왔다.

"아... 아파"
"응... 미안. 아프지? 조금만 참아."
"흐윽ㅡ"
"아픈걸 누가 몰라."

바보 아냐? 갑자기 태도를 바꾼 긴토키가 비웃으며 한번에 깊숙히 찔러넣었다. 몸이 흔들리자 성기 끝에 있는 방울이 소리를 냈다. 예상치 못한 히지카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입가를 부르르 떨었다.

"윽ㅡ!!"
"아 조여라. 뭉게버릴 셈이야? 힘 좀 빼라고."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날카로운 통증에 히지카타의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긴토키가 다가가 혀로 핥았다. 긴토키는 피가 나는 히지카타의 입술을 내려다 보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혀 깨물면 죽는다."

말을 끝내자마자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긴토키는 혀를 집어넣어 치열을 훑고 히지카타의 혀에 자기 혀를 문대는 둥 입 안쪽의 깊은 곳까지 탐했다. 입을 맞추면서 긴토키는 허리를 뒤로 뺐다가 앞으로 찔렀고 히지카타의 목 안에서 퍼지는 신음이 입술에 막혀 입 안에서 흩어졌다. 긴토키가 입술을 떼고 허리를 다시 뒤로 빼 어느 지점을 찌르자 히지카타가 허리를 떨었다. 마치 전류가 흐른 듯 한 느낌이 들었고 히지카타의 성기가 고개를 빳빳히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긴토키가 한 곳을 집중적으로 문대자 히지카타는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히지카타의 악문 잇새로부터 침이 흘러나왔고 턱에서 목까지 흘렀다. 그것을 보던 긴토키가 히지카타의 눈을 감기고 흐른 침을 검지에 묻혀 히지카타의 눈가에 치덕치덕 발랐다. 

"큭, 읍!"
"뭐야, 네놈. 느끼냐? 굉장한 변태구만."
"윽ㅡ"
"어이, 신음 참지 말라고. 특별히 얼굴 근육은 마비가 안 되는 약을 사용한건데 말야."

그러면 쓸모가 없잖아?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한 쪽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리고는 다시 깊이 찔러넣었다. 밀려오는 토기와 쾌감에 히지카타는 그저 눈을 감고 이를 악물어 신음을 견뎠다. 그것을 본 긴토키의 눈동자가 차게 식더니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찰싹.

갑자기 얼얼해진 뺨에 히지카타가 토끼눈을 하고 긴토키를 쳐다봤다. 긴토키는 감정 없는 눈으로 히지카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 긴토키는 빨개진 뺨을 손가락 끝으로 쓸으며 솜털을 건드렸다.

"참지 말라고 했을텐데."
"흣, 흐윽"
"그래, 그래."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어깨를 잡고 더 빠르게 위로 쳐올렸다.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다리를 손으로 한번 쓱 훑더니 히지카타의 귀에 바람을 불었다. 히지카타가 움찔 떨었고 긴토키는 귓바퀴를 혀로 핥으며 진득하게 말했다.

"히지카타. 그거 알아?"
"흣, 응, 앗!"
"너. 하나도 안 벗었어."

이렇게 찢어놓으니 보기 좋은데? 긴토키는 훤히 드러난 히지카타의 고간을 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몇 번 튕기더니 기둥을 잡고 흔들었다. 그럴 때 마다 방울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펴졌고 히지카타는 수치심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긴토키가 허리짓을 할 때마다 입은 다시 열리고 다물기를 반복했다.

"하아, 히지카타..."
"읏! 응... 흣!"
"좀만, 하... 조금만 더..."
"힛, 읏, 앗ㅡ!"

히지카타의 내부에 따뜻한 액체가 퍼졌고 빳빳히 고개를 세운 히지카타의 성기가 잘게 떨며 경련했다. 하지만 그저 경련했을 뿐, 여전히 뻣뻣히 서있었다. 게다가 전보다 더 터질듯 부풀어있었다. 긴토키가 사졍의 여운으로 기분 좋게 웃음지으며 히지카타의 기둥을 세게 움켜잡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통에 히지카타는 눈을 부릅뜨고 숨을 들이마셨다. 유난히 아픈 이유가 아직도 서있는 자신의 성기인지 히지카타는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물건을 쳐다봤다. 그것을 본 긴토키가 다른 손으로 히지카타의 눈을가리고 성기를 쥐고 있는 손에 힘들 더했다.

"왜 그래, 히지카타군?"
"윽, 아, 아프ㅡ 그ㅁㅡ!"
"아아, 아직 못 간거구나. 가고싶어?"
"그... 그ㅁ... 윽ㅡ"
"가고 싶다고 말 해봐."
"그런거... 악!"

긴토키는 쥐고 있는 손을 옆으로 기울여 기둥을 휘었다. 하지만 히지카타의 성기는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히지카타는 괴로운지 입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긴토키는 검지로 귀두 부근을 문지르고 감싼 손을 위아래로 왔다갔다 움직였다. 히지카타가 느끼려고 할 때마다 다시 기둥을 꺾고는 말했다.

"가게 해주세요ㅡ 말해봐."
"흑... 악ㅡ"
"'가게 해주세요."
"시, 시ㄹ, 윽!!"
"말 해."
"가, 가게 해ㅈ, 흣!"
"뭐라고?"
"가게... 해주세, 읏! 요오!"
"잘 했어."

긴토키는 눈을 휘며 히지카타의 눈 위에 올려둔 손을 거두었다.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성기 끝에 달린 방울을 손가락으로 팅겼고 방울이 작게 비웃었다.

"근데 히지카타. 그거 알아?"
"흐윽... 앗!"
"난 지금 끝낸다고 안 했다."

긴토키는 입꼬리를 최대한 올려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히지카타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어느새 안에서 부피를 키우는 긴토키에 의해 다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 날 울음을 가장한 신음 소리는 아침까지 멈추지 않았고 검은 제복은 하얗게 물들었다. 맑은 방울 소리는 꽉 닫힌 창문에 팅겨져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밤새도록.


*


"ㅡ"
몸이 움직인다.

히지카타는 콕콕 쑤시는 허리를 팔로 지탱해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분다. 울타리 너머에 수많은 전광판들이 보인다. 그 녀석의 집이 아니다. 히지카타는 자신의 만신창이가 된 몸을 내려다 보았다.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스치기만 해도 아픈 아래는 물론이고 손목엔 멍이 들고 눈은 잘 떠지지 않아 앞을 보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신이 전생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대체 자신은 왜 이렇게 된 걸까. 콘도씨가...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소고는 뭐라고 입을 열까.

히지카타는 삐꺽거리는 몸을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비틀거리며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 찬 문으로 다가갔다.

미츠바를. 만나고 싶어.


*


"흐아아암ㅡ"

좋은 잠을 잔 긴토키는 팔을 뻗어 기지개를 폈다. 이렇게 깊은 잠도 오랜만이었다. 긴토키는 엉망으로 구겨지고 얼룩진 침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거실로 걸어가 소파 위에 있는 리모컨을 쥐었다. 벽에 달린 시계는 9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긴토키는 리모컨의 빨간 전원 버튼을 눌러 TV를 켰다.

[케츠노 아나운서가 보도합니다.]
[예, 지금 여긴 가부키쵸 사거리 앞입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고층 빌딩에서 투신 자살한 한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요,  이 남성은 진선조 제복을 착용하고 있어 현재 진선조는 큰 충격에 빠진 상태입니다. 이 남성은...]

긴토키는 TV화면을 빤히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콧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며 소파 밑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긴토키는 수첩을 이리저리 넘기며 빼곡히 적힌 이름 속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한 페이지에서 멈춘 긴토키는 손에 펜을 쥐어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옆에 무언가를 적었다. 긴토키는 수첩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찝찝한 몸을 씻으러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히지카타 토시로. 7/12]


 

[진격의 거인/리바에렌]왜곡(歪曲)

 

 

 후회 없는 선택을 하도록. 모두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었다. 자신이 한 말에는 책임을 지고 끝까지 이행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고, 옳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이런 나의 믿음대로라면 나는 현재 그른 사람이며,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있지 않게 되지만,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후회라.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찻잔에 내려놓으니 자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낮은 신음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이곳에 경쾌한 달그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에 좀처럼 붙지 않는 이 단어는 머릿속에선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자음들과 달리 목구멍에서부터 꺾임 없이 혀를 매끈하게 지나 세상에 나와 버리는 자음이 두 개나 사용된 이 단어는, 망설임 없이 내뱉어지는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다른 단어들에 비해 무거웠다. 그래서 난 그토록 모두에게 후회 없는 선택을 하라고 했었나. 나의 생각을 그저 강요해버린 건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후회라면 후회다.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다. 무엇을 후회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어떻게 대답해야 이 마음을 완벽히도 털어놓을 수가 있을까. 대답해다오, 에렌아.


 어쩌면, 그것은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인류 최초로 영토를 되찾은 역사스러운 날 밤에 너를 처음 봤었다. 앨빈을 따라 계단을 수십 개나 걸어 내려간 지하 감옥에는 네가 있었다.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침대 위에서 너는 아직 정신을 잃은 채로 있었고,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네가 정신을 차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새하얀 셔츠가 너에게 입혀져 있었다. 어떤 누가 입혔는지 몰라도 잡히면 죽여 버릴 거라 다짐했다. 나 말고 너에게 손을 댄 간 큰 놈이 있었다니. 생각해보면, 내가 언제부터 너에게 이런 감정을 품고 있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인가. 악몽을 꾸고 있는 듯 식은땀을 흘리다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와 함께 네가 눈을 떴다. 초록색의 눈이 열리자마자 나와 앨빈을 바라봤다. 뭔가 질문이 있냐는 앨빈의 말에 너는 흔들리는 눈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너와 우리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물어왔다.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기에 앨빈은 지하 감옥이라고 말해주었고, 너는 그제야 손에 있는 수갑의 존재를 눈치챈 듯 한참을 찰그락 댔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짜증나는 듯 이를 갈던 네가 앨빈이 지하실 열쇠를 꺼내자 반응했다. 인류가 승리하기 위해서, 너 자신의 비밀을 알기 위해선 지하실이 있는 시간시나 구, 또한 월 마리아 탈환이 필요하다는 건 너 자신도 알고 있을 터였다. 내가 너에게 물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냐고. 그러자 너는 숨을 거칠게 고르며 조사 병단에 들어가 어쨌든 거인을 때려죽이고 싶다고. 당차게 말했었다. 아직도 그 표정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죽을 쯤되면 그 표정을 잊을 수 있으려나. 그 말에 나는 그대로 너의 신병을 책임졌다. 네가 배신을 한다거나 날뛴다면 내가 죽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가 그리웠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예쁘게 벌어지는 그 입 하며, 제 호기심을 자극한다 싶으면 영롱하게 반짝이는 초록색의 눈동자까지. 너는 왜 가장 목숨을 잃기 쉬운 조사병단 인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너를 위한 감정을 깨닫고 나니 세상 모든 게 불만스러웠다.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어쩌면 나 자신까지도. 융통성을 발휘해 세상에 공평하게 너에게서도 부정할 것을 찾아본다면, 네가 거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그건 이제 어찌되든 좋았으나 그 사실을 앨빈에게 적나라하게 공개 된 것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던 15m급의 그 거인이 에렌이란 사실을 몰랐다면, 앨빈이 몰랐다면. 훈련병 때 성적도 좋은 너는 아마 쉽게 조사병단에 들어올 수 있었겠지. 그렇다면 나는 앨빈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104기 훈련병들 중에 이번에 새로 들어온 간 큰 놈들이 있을 테지. 그런데 앨빈, 혹시 그 중에 에렌 예거라는 놈이 있나?" 그럼 앨빈은 딱히 숨길 일이 아니니 그렇다고 할 것이다. 내 생각대로 나온 대답에 난 우선 기쁨을 감출 것이다. 네가 들으면 속 좁아 보인다 하겠지만 앨빈의 대답을 듣고 나는 네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 깎아내릴 것이다. 고의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시나브로. 에렌 예거의 주변 사람들만 해도 이러한데, 에렌 예거라는 개인을 믿어도 되는가. 본디 사람은 비슷한 속성끼리 붙어 지내는 법이다. 정말 이 녀석을 받아도 되는가. 규칙상 훈련병의 지원에 따라 갈린 병단 선택은 특정한 사유가 있으면 거절해도 괜찮으나 웬만하면 훈련병 본인의 선택을 존중하여 다른 태클은 걸지 않는 것이 전통이다. 더군다나 그 특정한 사유가 주변 사람들의 인성이 될 순 없다. 그래, 좀 더 양심적으로 말해보자면 병사장의 고집은 사유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앨빈은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을 것이고 정말로 에렌의 조사병단 퇴출을 고려할 것이다. 혹은 더 나아가 갑자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눈치 채고 웃으며 나를 돌려보낼 것이다. 후자의 경우 앨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날 에렌을 퇴출시킬 것이고, 에렌은 영문도 모른 채 퇴출당할 것이다. 그리고 에렌은 자신이 퇴출당한 이유를 알게 되어 나를 원망할 것이다. 나를 욕하고, 도대체 자신에게 왜 그랬냐며 울고, 필히 나를 증오할 것이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니 멋대로 착각하지 말라는 폭언과 함께. 그렇게 난 에렌에게 버림받듯이 미움 받고 앨빈에겐 약점도 잡힌 채로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족할 것이다. 최종적으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만들어졌으니. 너는 어떻게 할까, 에렌. 헌병단에 들어가 나를 바꿀 방법을 찾을까? 아니, 넌 멍청하니까 그런 계획은 세울 수 없다. 그렇다면 넌 무작정 자기를 다시 조사병단에 넣어달라며 고집을 피울 것이고, 나는 그것을 받아줄 수 없다. 너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나의 최우선사항이 돼버린 이상, 너를 월 시나 앞으로 넣어 너를 못 보는 상황이 오더라도 너를 막을 것이다. 네가 그리워도 나는 너를 막는다. 그것이 내 인생의 끝이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냐 만은, 내 가정대로 세상은, 더욱 에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에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사병단에 입단했고 거인화 능력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좋은 점도 있었다. 그 능력 덕분인지 에렌은 꽤 귀중한 취급을 받았으며 최전방의 역할이 아니었던 터라 나또한 안전하게 에렌을 볼 수 있었다.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되겠다며 불완전한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전방을 매섭게 쳐다보는 에렌을 보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에렌은 인간으로도 몇 구의 실적을 올렸고, 한지의 실험에도 순순히 참여하였으니 이정도면 착실한 병사였다. 연속되는 아홉 차례의 벽 밖 조사에서도 에렌은 꾸준히 실적을 채워왔으며 항상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귀환을 이루어냈다. 처음과 달리 거인이 되어도 비교적 이성이 존재하는 상태까지 되었기에 에렌을 연구하는 실험도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실험의 실적이 쌓이고 에렌 앞의 거인들도 쌓여갔다. 한지가 실험이 끝나고 에렌에게 머물고 싶어 했기에 그것은 그것대로 말리느라 귀찮게 됐었다. 조사병단의 모두가 행복한 나날이 계속됐다. 에렌에게 품는 이 마음을 언젠간 말해야 했다. 지금 에렌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다. 내 마음을 말해주어도 에렌은 나에게 웃어줄까? 경멸하지 않을까? 에렌이 나를 더 이상 리바이 병장이라고 불러주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온갖 고민과 함께 시간이 흘렀고 결국 에렌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언젠가 에렌이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은 깨졌다. 에렌이 참여하는 열 번째의 벽 밖 조사가 시작되었고 역시나 에렌는 대형 가장 가운데서 안전한 보호를 받은 채 출발했다. 중앙 후방. 만족할한 곳이었다. 장거리 탐색 진형이 전개되고 병사들이 전방 반원 모양으로 전개되었다. 무사귀환이라는 것은 에렌에게만 해당되었다. 대부분 전과 같이 목숨을 잃거나 팔 다리 중 적어도 한 부분은 정상이 아닌 상황이 계속되었다. 에렌마저 그런 상태가 되지 않길 바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에렌과 함께하는 벽 밖 조사는 언제 어디서든지 정신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기행종이든, 통상종이든. 모두 다 쓸어버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방을 노려봤다. 나선 지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아닌데 우익의 1렬 탐색반에서 빨간색 신호탄이 터졌다. 혀를 찼다. 벌써부터 시작 된 건가. 올 테면 오라지라는 생각으로 쉼 없이 달리고 있으니 우익 곳곳에서 빨간색 신호탄이 연사됐다. 얼마만큼이나 가까우며, 얼마만큼이나 있는 걸까. 앨빈이 초록색 신호탄을 터트려 진로를 바꿨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앨빈,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조심해라."
 "네가 그런 말도 하는군. 리바이."

 

 여러 마리의 말이 한꺼번에 달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미 익숙하고도 익숙한 소리였지만 느낌이 달랐다. 그저, 에렌이 조심하길. 이번에도 무사 귀환하여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길. 소박하다면 소박하고 크다면 클 소원을 빌었다. 진로를 다시 결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빨간색 연막탄이 수없이 터졌다. 지령 반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에렌은 입을 다문채 앞을 노려봤다. 자신의 친구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터이다. 빨간색. 빨간색. 빨간색. 빨간색. 노란색. 네 번의 빨간색 연막탄이 곳곳에서 터지고 곧이어 노란색 연막탄이 눈에 보였다. 앨빈은 담담하게 초록색 연막탄을 들어 진형 전체를 좌익으로 돌렸다. 우익은 전멸이다. 다행히도 우익 쪽엔 에렌과 안면을 튼 사람이 없었다. 에렌의 심경에 변화가 없길 바랐다.

 달리고, 또 달렸다. 이번엔 좌익에서 연막탄이 솟아올랐다. 검은색이었다. 최단 시간 내에 우익이 전멸한 것도 모자라 기행종까지 나타났다. 이젠 우려의 목소리가 아닌 탄식이었다. 그냥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왔다. 중앙에서 가장 안전한 보호를 받고 있는 주제에 하는 말이 이것뿐인가. 혀를 찼다. 좌익엔 에렌과 같은 동기의 병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초조해 보이는 에렌의 표정이 읽힌다.

 

 "앨빈 단장님, 제가 가서 상황을 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안 돼.

 

 "안 된다. 중앙에서 진형이 무너질 수 있어. 게다가 너는 더더욱 이탈하면 안 돼."

 

 에렌이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앨빈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입을 닫는 너의 표정이 안쓰럽지만 앨빈의 선택이 옳았고 이번 너의 선택은 틀렸다. 앨빈이 우익으로 진형을 틀었다. 일단 전멸된 우익이라도 기행종을 만나는 것보단 나은 처사였으니. 그런데 기행종이라 어차피 상관없는 처세였다. 곧이어 내 예상대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빠른 속도로 쿵쿵 거리는 거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15m급의 처음 보는 거인. 역시나 기행종이었다. 이번 기행종은 여태까지 만났던 여성형 거인보다 빠른 속도였다. 손에 하반신을 뜯고 남은 인간의 시체가 보였는데, 멀어서 누군지 보이지 않았으나 거인의 빠른 속도 덕에 금방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깨 직전에 멈추는 금발에 작은 어깨. 아르민 아르레르트였다. 내가 봐도 누군지 알 터였는데 에렌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에렌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틀렸다. 나는 아까부터 알 것 같았던 좋지 않은 느낌의 이유를 지금 알 수 있었다. 에렌은 앨빈에게 묻지도 않고 진형을 이탈했다. 앨빈이 에렌을 불렀지만 듣지 않았고, 나와 미카사 아커만이 에렌을 따랐다. 미카사 아커만이 에렌을 불렀지만 에렌은 들리지 않은 듯 말을 좀 더 세차게 몰았다. 에렌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했다. 이 기행종 역시 에렌을 찾고 있었던 듯 에렌이 보이자 속도를 좀 더 높여왔다. 에렌의 근처에서 나는 소리쳤다.

 

 "저 기행종은 에렌 너를 쫓고 있다! 방향을 틀어! 지령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뒤는 나와 미카사가 맡겠다!"

 

 내 말에 칼을 뽑는 것조차 잊고 손을 물려던 에렌이 뒤를 돌아봤다. 잠시나마 희열을 느낀 뒤 방향을 지시했다. 에렌이 고개를 숙여 말을 빠르게 몰았다. 기행종의 빠른 속도 덕에 방향을 튼다 해도 별 소용이 없었으나 방향을 바꾸는 순간 기행종이 급제동을 걸어야 했기에 그것에 미숙한 듯 기행종은 잠시 속도를 늦췄었다. 덕분에 우린 빠르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고 현재로선 나은 처사가 되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여유 따위 없었다. 기행종이 분한 듯 조금 더 속도를 높였고 금세 따라잡혔다. 뒤를 바라보니 지령반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에렌이 거인화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미카사가 에렌을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났다. 바로 고개를 돌리자 에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쉽게 할 수 없는 내가 화났다. 미카사는 옆에서 연신 괜찮냐며 에렌을 달랬고, 나는 그저 에렌이 편하게 울 수 있도록 뒤를 쳐다 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울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의 에렌이 나를 불렀다.

 

 "리바이 병장님……."

 

 그 말에, 나는 한 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으면 해."

 

 그와 동시에 실명시킬 듯한 강한 빛이 내 눈을 쬐여왔고 눈을 뜨자 거인이 된 에렌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자칫하면 내가 직접 에렌의 목을 쳐야했다. 미카사 아커만은 그런 일은 할 수가 없다. 거인화한 에렌이 크게 소리치며 기행종에게 뛰어갔다. 이성이 남아있는 상태길 빌었다. 부디 어제의 저녁이 마지막 저녁 식사가 아니었길.
 여성형 거인과 같은 맥락인 듯 이 기행종 또한 주위의 거인을 모아왔다. 순식간에 거인 군단이 만들어지고 미카사와 나는 에렌을 엄호하기 위해 말을 버려야했다. 나무가 몇 없는 평지인 것이 큰 흠이었지만 발목이든 힘줄이든 걷지 못한 상태를 만들어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에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어느 때보다 높은 집중력으로 거인들을 쌓아갔다. 목덜미를 썰어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면 더 좋았다. 한 놈만 더, 한 놈만 더. 에렌을 방해하는 것은 안 돼.

 

 "리바이 병장님! 에렌이!"

 

 뭔데.
 나를 급하게 부르는 미카사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어느새 신경 쓰지 못 했던 방향에서 거인들이 몰려와 에렌의 근처로 가고 있었다. 사방이 뚫린 터라 나와 미카사로만은 턱없이 부족했던 게 그 이유다. 죽일 틈도 없이 거인이 몰려와 에렌의 다리를 잡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에렌은 그대로 기행종에게 공격 받았다. 격투가 꽤 되나보군. 기행종의 발길질에 에렌이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피해가 큰듯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이가 뿌득하고 갈렸다. 엄호고 뭐고, 바로 기행종에게 달려들었다. 이성을 지키지 못했다. 인정한다.

 

 "리바이 병장님!!"

 

 거인들을 나무삼아 철사를 몸에 박아 넣으며 기행종의 목덜미 근처까지 다다랐다. 바로 갈아주지. 공중에 뜸과 동시에 칼을 바로 잡자 목을 가렸다. 여성형 거인과 똑같은 방식이다. 지성이 존재하며,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애니와 마찬가지로 이 거인은 에렌이 아니면 죽이지 못 한다. 자칫 하단 죽는다. 여성형 거인의 근처에서 물러나 에렌의 어깨로 넘어왔다. 아파할까봐 철사도 대충 꽂았다. 에렌의 어깨 위 승차감은 딱히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에렌의 귀에 대고 말했다.

 

 "죽여."

 

 동시에 에렌이 크게 소리치더니 여성형 거인에게 달려갔다. 덕분에 중심을 잃으며 떨어졌지만 곧바로 다른 거인들에게 철사를 꽂으며 나름대로 안착할 수 있었다. 살면 좋으련만. 에렌을 싸우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현재로선 에렌 밖에 셋을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에렌은 우렁차게 뛰어갔지만 그 뒤론 내 예상과 완벽하게 달라졌다. 아까와 같이 미카사와 내가 다 처리할 수 없는 거인들이 몰려왔고 다시 한 번 더 에렌의 발목을 잡았다. 다만 변수는 더 많은 수의 거인이라는 것. 그리고 높이가 조금 더 컸다는 것. 에렌은 그렇게 땅에 쿵 소리를 내며 무너졌고 기행종은 땅에 엎어진 에렌을 무자비하게 밟아 짓이겼다. 짓이겼다,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이번엔 미카사도 나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거인들에게 달려들었다. 무자비하게 살육하며 에렌을 엄호했다. 이미 엄호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고 언제 거인화가 풀릴지 모르는 부상들이 가득했다. 심장이 멈췄을지도 모른다. 아, 에렌. 어느 때보다 많이 실적을 세우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앨빈은 나에게 모든 상황을 맡기고 증원을 보내지 않았을 터이다. 두 번이나 한 눈을 팔아 에렌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더 이상 에렌에게 눈을 뜨는 것은 안 된다. 미카사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에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행종이 한 번 더 공격해 올 것 같았고, 칼을 다시 바로 잡았다. 가스가 남아있었으면. 에렌에게 달려들던 거인들은 거의 정리가 된 상태였다. 가스가 안 남도록 최소한 주의해서 썰었지만 덕분에 가스가 바닥 나 아슬아슬한 상태인 게 느껴졌다. 한 번. 딱 한 번 더 날 수 있다. 기행종이 발을 뗐고 에렌에게, 아니, 정확히는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에렌은 이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차라리 인간으로 돌아왔으면. 미카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입에서 피가 흐르며 왼팔은 이미 뜯겨나간 상태였다. 하반신에서는 기행종이 부른 거인들 때문에 너덜너덜한 상태였고 얼굴은 아까의 발길질덕에 짓이겨져 있었다. 그 모습을 다시 보아하니 차라리 혀를 씹고 죽고 싶었다. 그 전에, 저 망할 기행종을 죽이고. 기행종이 발을 뗌과 동시에 나도 발을 뗐다. 한 번의 칼질도 중요하다. 신중하게 가스를 소비해야 했다. 거추장 거리는 망토를 벗었다. 내가 죽는다는 건 상상하지 못 했었는데. 미카사가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싶다. 발을 뗌과 동시에 에렌이 기행종에게 일격을 맞아 뒤로 넘어졌다. 잠시 멍해졌다. 미카사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고 기행종을 공격할 여유도 없이 바로 뒤로 돌아 에렌을 보았다. 습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에렌이 거인에게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도 목숨은 괜찮은 것 같았다. 전투 불능. 아래의 거인을 사냥하고 있던 미카사와 기행종을 노리던 나 둘 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인에게서 빠져나온 에렌에게 다가가려 하자 기행종은 순식간에 달려와 에렌을 낚아챘다. 그리고, 집어던졌다. 에렌은, 집어던져졌다. 땅에 패대기 쳐진 에렌은 누가 봐도 그 자리에서 즉사였다. 믿고 싶지 않았다. 에렌이 이 상태로? 정신도 못 차린 채 무의식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나는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에렌이 죽는 것이지? 에렌이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 것 아니었던가. 어떻게 봐도 그러한데. 에렌은 땅에 부딪쳐진 충격 덕에 모든 관절이 부서진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 또한. 자신이 거인이 되었을 때의 상태와 같았다. 미카사는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았고 나는 이성을 놓았다. 미안하다, 앨빈. 나는 끝까지 이성을 지키지 못한 것 같다. 나에게 맡긴 상황은, 나에겐 너무 가혹하다. 칼을 빼내들어 기행종에게 달려들었다. 여성형 거인과 다르다. 이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이성일 뿐 다른 머리를 쓰는 것은 아니다. 중앙을 향한 것은 본능. 에렌을 찾기 위한 본능인 것일 뿐 다른 지능은 없다. 그렇게 판단하고 나는 빠르게 회전하며 기행종에게 칼을 겨눴다. 내 가스가 분출하는 소리에 미카사 아커만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본능대로 칼을 쥐었다. 내 움직임을 보고 거인의 힘줄을 끊는다. 행동 불능이 되면 목덜미를 썰어내는 것도 간편하겠지. 힘줄과 근육이 밖으로 나와있는 거인들은 잘라내기가 쉬웠다. 여성형 거인에게 하던 대로 팔의 힘줄을 모두 끊었다. 미카사덕에 다리쪽의 힘줄도 웬만해선 다 끊어진 상태였다. 재생 되기전에 목덜미를 썰어야 한다. 왼쪽 팔만 힘줄을 끊은 탓에 거인의 오른쪽 팔이 나를 공격했다. 기행종의 손에 팔이 부딪혀 그대로 부서졌다.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상관없었다. 땅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다. 더 부서져도 괜찮다. 칼을 다시 바로 잡았다. 뼈가 끊어진 이질감이 나를 찔러왔다. 힘을 주면 그대로 삐끗할 것이 느껴졌지만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여성형 거인과 다르게 그대로 목덜미로 썰렸다. 사람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 보이지 않았다. 없었다. 사람의 살이 잘렸을 터인데.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숨통을 끊지 못했나 다시 살폈으나 끊었다. 확실히 끊었다. 거인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연기도 새어나왔다. 인간이 없는 채로의 지능을 가진 거인이 있었던가. 이건 속히 알려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스가 남아있지 않았다. 가스가 남은 건 미카사 아커만뿐.

 

 "미카사 아커만."
 "네, 리바이 병장."
 "명령이다. 당장 탈출해."
 "……예?"
 "여기서 탈출해. 조금만 더 있다간 너와 나 둘 다 고스란히 거인의 밥이 될 거다. 난 병사장이다. 병사를 가만히 죽게 놔둘 순 없어. 일단 탈출하고, 나와 에렌…을 다시 보고 싶다면 그 가스를 써서 탈출한 다음에 증원을 불러와. 에렌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고 지능을 가졌지만 사람이 없다는 기행종 얘기를 해."
 "저마저 이곳에 없다면 병장은 죽을 겁니다. 확실해요."
 "너마저 이곳에 없다면 난 너를 살릴 수 있다. 장담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리바이 병장!"
 "너야말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탈출해라. 넌 한낱 병사고, 난 병사장이다. 명령에 따라. 내가 명령을 내리면 그냥 알겠다고 하고 이행하라는 거다. 나는 지금 가스가 다 떨어졌고, 아무리 너라고 해도 나를 든 채 지령반까지 가지 못해. 거인을 나무삼아 가는 것도 한계가 있어. 어떻게 생각해도 너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다."
 "그렇다면 제 가스를 병장에게 드리겠습니다. 에렌과 남겠습니다."
 "미카사. 보다시피 난 지금 왼쪽 팔이 부서진 상태다. 이 상태에서 입체 기동을 움직인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리고 난 아까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완전히 팔이 아작났고. 그러니까, 나를 살리고 싶다면. 적어도 나라도 살리고 싶다면 당장 가서 앨빈을 불러와. 알겠나?"
 "리바이 병장……."
 "어서!"

 

 미카사는 잠시 내 팔을 쳐다보다가 에렌으로 시선을 바꿨다. 알 것이다. 이성으로도, 본능으로도 이것이 나와 에렌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을. 에렌의 모습을 넘치도록 눈에 담아두기 위해 끝까지 바라보다가 뒷모습을 보여줬다. 훌륭한 병사다. 말이 없지만 미카사 아커만은 그 자체로도 훌륭했기에 군데군데 보이는 나무를 이용하여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내 거인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났고 난 이미 기행종과의 싸움 덕에 흠집이 나고 잘려진 칼을 다시 들었다. 가스가 없어서 목덜미를 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발목의 힘줄을 자르고, 자르고, 재생이 되기 전에 자르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야 만 분의 일 확률로 정말 증원이 찾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나 또한 마지막으로 에렌을 눈에 담기 위해 다가갔다. 이미 너를 알아볼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은 사라진 상태였다. 내가 좋아하던 초록색 눈동자하며, 나에게 수줍게 악수를 청하던 그 손마저 흠집이 나있었다. 너란 걸 알 수 있는 건 옷 사이로 보이는 시간시나 구에 있다던 그 지하실의 열쇠밖에 없었다. 모두가 알고 싶어 했던 숙제였는데, 이렇게 끝나버리는구나 에렌.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어. 언젠가 내가 웃으며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면, 너는 나에게 네 마음도 나와 같다며 화답으로 환하게 웃어줬으면 하길 바랐어. 그것뿐이었는데. 네가 내 인생에 들어오고 나서 내가 사는 이유는 내내 그것 하나뿐이었는데. 내 마지막의 끝엔 네가 있어야만 했고, 네가 있으면 했는데 정말 이루어졌구나. 내 눈이 볼 수 있는 끝까지 에렌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칼을 들어 내 심장을 찔렀다.

 

 

 

 "이거 풀어요! 당장!!"

 

 여기까지가 나에게 생각나는 기억이다. 생각나는 기억이라고 해봤자 생전의 기억은 그게 끝이니 더 생각날 것도 없다. 앞에서 에렌이 찰그락 거리는 수갑을 찬 채로 버둥거렸다. 아, 전에는 안 이랬는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반항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손목에 상처가 남는 것은 싫은데.

 

 "에렌. 그렇게 버둥거리면 손목이 아플 거다. 나중엔 피가 흐를 것임을 알지 않나."
 "저한테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상도 되지 않아요. 제가 뭔가를 잘못했습니까?"
 "잘못…잘못이라……. 거인화 할 수 있단 걸 앨빈에게 들킨 것?"
 "그건 전생의 저잖아요! 지금의 저는 그저 학생일 뿐이에요. 네? 병장님. 병장님도 이젠 병사장이 아닌 그냥 사회생활 하는 어른일 뿐이라고요. 정신 차려요. 정신 차리시라구요, 병장님!!"

 

 그래. 에렌의 말이 맞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할 무렵 보고 있는 풍경과는 다른 풍경이 눈앞을 지나갔다. 익숙한 풍경인데 지금과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렇게 난 TV에서 본 듯이 내 전생의 기억을 찾았고, 나는 곧바로 에렌을 찾았다. 찾는 데만 오 년이 걸렸다. 에렌을 찾는 시간동안 나는 나의 전생의 기억을 전부 되찾았다. 완전한 기억이었다. 혹여나 더 다른 기억이 생각날까 싶어 에렌을 찾고 나서도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더 이상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에렌은 예상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신설 고등학교의 2학년으로 재학 중이라기에 곧바로 학교로 찾아갔다. 마침 하교 시간이었기에 에렌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내 눈에 에렌이 들어왔다. 여전히 그 맑은 초록색 눈은 여전했다. 나는 곧바로 달려들어 에렌을 끌어 안았다. 전생의 에렌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주위엔 미카사와 아르민이 있었다. 교복을 입을 뿐 다른 게 전혀 없었다. 여전히 똑같은 에렌의 주위를 보며 옛날 생각이 나 눈물이 핑 돌 뻔 하였지만 나를 밀쳐내는 미카사의 제지와 이상하게 바라보는 아르민. 그리고 모르는 사람을 보는 듯 나를 보는 에렌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었다. 전생의 기억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었나. 그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살아왔던 그 모든 기억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건 정말 지옥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에렌, 너에게만은 너의 기억을 찾아줄게. 라고.

 

 "리바이 병사장……. 제발요……. 뭐든지 할테니 제발 이것 좀 풀어주고 절 내보내 주세요."
 "뭐든지 한다고?"
 "네. 그럴게요. 그러니까 제발……."
 "내 옆에 있는다고 약속해. 이렇게. 그렇게 한다면 풀어줄게."

 

 하교할 땐 항상 미카사와 아르민과 함께였다. 이래선 에렌의 기억을 찾아줄 수 없었다. 미카사와 아르민 본인에게 해를 가한다면 에렌이 힘들어할 것이다. 그것은 보기 싫다. 그렇다면 그 주위 사람. 미카사와 아르민의 주위 사람에게 중상을 입혀 입원시켰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미카사와 아르민은 병문안 때문에 에렌의 곁을 잠시 떠날 것이다. 내 예상대로 그 날은 에렌의 주위에 아무도 없었고 인적 드문 골목길로 들어설 무렵 나는 에렌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에렌."
 "아, 또……. 다시 말하지만, 전 거인같은 거 모르고 조사병단이 뭔지도 몰라요."
 "몰라도 좋아. 잠시만 내 얘기를 들어봐. 마지막이야."
 "하, 알겠습니다. 말씀해보세요."
 "나, 사실 전생부터 너를 좋아했어. 그리고 지금도 좋아해. 아니, 사랑한다 에렌."

 

 에렌이 경멸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끝입니까?"
 "……응."
 "가보겠습니다. 이젠 찾아오지 말아주세요."

 

 에렌이 매몰차게 말하며 나의 옆을 지나쳐갈 때, 나는 에렌을 기절시켰다. 그리고 현재. 에렌은 양손과 양발이 구속된 채 침대 위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아 제발!! 풀어달라고!! 난 아무 잘못도 없다니까!!"
 "거봐. 넌 아직 전생의 너를 몰라.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이 너에겐 없다."
 "애초 필요가 없잖아! 너같은 사이코랑 같이 있었던 기억을 왜 내가 기억해내야 되는데!"
 "사이코? 왜지?"
 "아, 알겠어. 미카사랑 아르민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한 것도 너지? 나 이런 꼴로 만들려고? 그렇지?"

 

 정답. 나름대로 똑똑한 에렌의 추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미친 새끼……. 진짜 사이코잖아……."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저 다 너를 위한 거였다."
 "정말 나를 위한 거였다면 미카사와 아르민은 건들지 말았어야지!!"

 

 지하실이 쾅하고 울렸다. 에렌의 기억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만든 지하실이었는데, 방음이 잘 되어있을까 싶다.

 

 "아니, 난 네가 제일 중요해. 다른 것들은 필요 없다."
 "미카사와 아르민을 '것들'이라고 표현하지 마. 사이코 새끼야."
 "그게 네 마음에 안 든다면 정정해주지. 그런데, 정말 아무 기억이 나지 않나?"

 

 지하 감옥에서와 같이 붙잡혀있는 에렌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붙잡힌 채 발악하는 에렌에게 욕정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로 두며 에렌에게 다가갔다. 발까지 구속해두길 잘했다. 에렌이 몸서리 쳤다. 에렌의 턱을 붙잡았다.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본 것이니 그동안 못 본 만큼 더 봐둬야 했다. 뭐, 계속 볼 것이지만.

 

 "안 난다고!! 나는 그냥 고등학생이고, 넌 미친 사이코야. 병장? 거인? 벽? 이런 건 아무것도 없어. 없다고!!"
 "에렌. 네가 그것들을 없다고 말한다면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 때의 우리 사이는 부정되어선 안 돼. 벽 밖 조사 전마다 서로를 끌어안고 느꼈었잖……."
 "아, 미친 새끼야 제발 그만해!!"

 

 에렌이 소름끼친다며 내 손에서 자신의 얼굴을 빼냈다. 말이 끊겼지만 그것은 에렌의 외침 때문에 끊긴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끌어안아? 느껴? 전생의 나와 에렌이? 벽 밖 조사 전에?

 

 "……리바이?"

 

 전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의 모습에 에렌이 이상한 걸 느낀 듯 내 이름을 불러왔다.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선 지금 더 심각한 일이 있었다. 전생의 나와 에렌은 서로 좋아하던 사이였나. 그 감정에 사무쳐 서로 몸을 섞던 사이였었나. 올바른 기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젠 이것이 기억인지 나의 상상인지 모르겠다. 에렌이 벗고 있고, 나는 그 위에서 가쁜 숨을 내뱉고 있다. 기억인가? 상상인가? ……기억이겠지. 기억일 터이다. 이렇게 에렌을 간절히 원하는데, 전생의 내가 에렌에게 이 마음을 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상상이 아니다. 에렌과 나는 좋아하던 사이였다. 벽 밖 조사 전에 항상 몸을 섞었고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고 애정 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 기억난다. 다른 놈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항상 조용히 소리를 내뱉었었지. 끝나고 나선 항상 서로를 끌어안고 잤으며 다음 날 있을 벽 밖 조사에서 서로가 무사귀환하길 누구보다도 간절히 빌었었다. 상상일 리가 없다. 이렇게 뚜렷한데, 에렌의 달뜬 숨소리가 이렇게 귀에 생생한데 상상일 리가.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다, 에렌."

 

 왜 사랑하는 사이였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너를 어서 풀어주고 싶었으나 우리 사이를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는 네 모습에 풀어주는 것을 미뤘다. 괜찮다. 넌 그 모습마저 예쁘니. 내가 너를 상처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왔지만 전생의 내가 너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으니 이번엔 네가 나를 위해 살아, 에렌. 나를 위해서 조금만 더 그 모습으로 있어주었으면 해.


 너의 신병을 책임진다고 해버렸으니 자꾸 거짓말을 치는 너의 못난 모습도 내가 책임져야 했다.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에렌에게 다가가 옷을 벗겼다. 그래. 예전엔 많이 했었으니 지금도 괜찮을 것이다. 에렌도 준비가 됐겠지. 역시 예상을 한 듯 버둥거리는 에렌의 모습이 귀엽다. 에렌이 하지 말라는 말만 몇 번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같은 말만 반복하니 귀여운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에렌의 가슴을 지분대자 눈이 커지며 나를 바라봤다. 조금 더 그 표정을 느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에렌의 바지를 벗기고 전희도 없이 곧바로 넣었다. 에렌이 크게 소리 질렀다. 곧바로 키스해 입을 막았다. 조금 있으면 기분 좋아질테니까, 기다려. 바쁘게 혀를 섞으며 허리 또한 움직였다. 키스를 하는데 에렌의 눈물이 흘러 맛이 느껴졌다. 오랜만이네, 이것도. 예전에도 처음에 할 때 이랬었지, 에렌. 기억나지 않아? 난 생생하게 기억나.


 조금만 더 나를 위해 힘내줘, 에렌. 어차피 넌 이제부터 나를 위해 평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원피스/로우루]heaven


'바다가 좋아'

'내게 있어서 바다는, 천국이야.'

 

너는 그저 눈앞의 바다만을 바라본다. 은은한 푸른빛을 띠는 투명한 바다. 보고 있으면 빠져들 것만 같은 우수의 찬 너의 눈빛처럼 느껴진다.

너와 닮은 바다, 너, 그리고 나. 이 모든 것이 있는 우리들의 낙원, 단둘이 영원히 함께할 천국.

그곳에 있는 미래를, 나는 너와 약속했다.

 

 

[로우루] HEAVEN


-인스티즈 익명만애 닝겐씀.
-읽어주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고집때문에 안 썼지만 짤리는 단어가 있다면 아마 일거예요. 이 단어 안 짤리나요?)

 

 

 

*Prologue

...꿈이구나. 이건 꿈이야.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에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잠깐을 생각 없이 앉아있다가 곧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앞을 향해 걸어갔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그저 앞을 향해 쭉 걸어나갔다. 이러다가 내가 지쳐 쓰러지면 그때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꿈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꿈 안에서 잠이 들면 현실에서 깨어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이 익숙해진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정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일단 이곳의 풍경은 내가 살고 있던 세계와 많이 동떨어진 형태를 갖고 있었다. 늘 새까만 하늘은 시간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일렁거리는 모습은 묘하게 섬뜩하여 팔뚝에 오소소 닭살이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한 방울씩 또옥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이곳의 하늘은 제가 바다인 양 물결을 쳤고, 그 속에 별들이 총총 박혀있어 신비로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또 한동안 쉬지 않고 걸었다. 양말밖에 신지 않은 발바닥에 닿는 지면의 느낌이 싫지 않다. 땅에는 모래만이 가득했다. 황토색이 아닌 백금색의 모래. 한 주먹 쥐면 작고 고운 입자 때문에 남는 것 없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다. 희고 부드러운 것이, 마치 어린아이의 뺨인 것 같았다.

약간 폭신폭신했더라면 더욱 좋았으려만. 그렇다면 앉아있을 때 진짜 기분 좋을 텐데. 지금 땅에 주저앉아 있는 이 순간에도 그 점이 아쉬워 괜히 손에 모래를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쏴아―. 파도 부딪히는 소리 같은 바람이 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땀은 전혀 나지 않았다. 헥헥거리는 숨소리도, 많이 걸어 다녔을 때 발목에 느껴지는 저릿저릿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내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난 이곳에서 이질적인 존재란 말인 걸까.

나는 앉아있는 그 상태로 털썩 누워버렸다. 일렁거리는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눈을 감았다. 나는 폭신폭신한 모래 위에서 또다시 꿈을 꾸었다. 현실로 돌아가는 꿈을.

 

 

 

 


*

하늘이 파랬다. 초여름이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축축해졌다. 말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모두가 축 늘어져 있는 마당에 키드는 제 앞에 있는 한 쌍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이 미들아! 좀 떨어지라고! "

 

폭발한 키드가 계속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자 주위에 있던 다른 학생들이 되려 키드에게 입 좀 닥치라며 욕설이 섞인 비난을 해대자, 키드는 괜히 책상을 쾅 치며 거칠게 제 자리에 앉았다. 불만 섞인 그의 투덜거림을 듣는 한 쌍, 로우와 루피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로우와 루피는 작년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다. 또래보다 무뚝뚝하고 어른스러운 로우와 그 반대의 성향을 띠는 루피의 조합은 모두 언밸런스하다며 놀랐지만, 그들은 그것이 틀렸다는 듯이 깊은 우정을 자랑했다. 누가 보면 곤란한 오해를 할 정도였다. 각자의 그림자처럼 밥을 먹을 때도 늘 함께였고, 놀러 나갈 때도 꼭 붙어다녔다. 때문인지 일부 여학생들은 그들을 의미심장한 미소로 쳐다보며 수줍은 미소를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것이 과연 설렘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인지는, 로우와 루피는 알 수 없었다.

올해 그들은 같은 학교에 진학했다. 작년과 달리 남학생들이 득실득실 거리는 남학교. 남자 둘이서 붙어 다니는 것이 썩 보기 좋지 않았는지 다른 학생들은 작년처럼 둘 사이를 의심하곤 했으나, 진짜라면 저렇게 당당하지 않겠지. 라는 결론을 내리며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키드는 달랐다. 새빨간 그의 머리칼처럼 그는 화끈했고, 다혈질이었다. 친화력이 좋아 다른 반인 그들과도 금방 친해졌지만, 행동과 말투는 '남자! 마초!'라는 느낌을 풍기며 로우와 루피가 꼭 붙어서 시시덕거리는 꼴을 보면 항상 화를 내기 일수였다. 그러다 로우와 루피가 둘만 가버리면 그제야 쫄래쫄래 뒤를 쫓아가서 어깨동무를 척하곤 했다. 셋은 서로 제일 친한, 가장 소중한 친구 사이였으나 키드와 로우, 키드와 루피 사이와 로우와 루피 사이는 뭔가 다른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입학 며칠 후, 루피는 로우에게 고백했다. 야자를 마치고 하교하던 길이었다. 고요한 골목길, 깜빡거리는 가로 등불 밑에서 평소라면 절대 볼 수 없었던 두 뺨을 붉게 물들인 그의 모습이 로우에게 묘한 자극이 되었다.
고마워. 로우는 떨리는 루피의 어깨를 꼭 껴안고 웃었다. 그러자 루피도 해맑게,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로우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로우는 달라졌다. 전이라면 거리낌 없이 잡던 루피의 손을 갑자기 뿌리치거나, 루피가 아닌 다른 친구들과 어울렸으며, 루피와 말을 섞는 일이 확연하게 줄었다. 때문에 루피는 달라진 그의 태도에 책상에 말없이 엎드려 있는 일이 잦아졌다.

 

"...로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참다 못한 루피가 그날, 고백했던 그 골목에서 말했다. 행복하게 미소 짓던 그때와 달리 울먹이는 그는 끝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로우의 옷자락을 붙들며 엉엉 울어버렸다. 로우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루피를 다시금 꼬옥 껴안아 등을 토닥였다.

 

"내가 미안해, 미안해 루피. 정말로 ... 정말 미안해."

 

그는 루피가 볼 수 없게끔 고개를 푹 숙이며 그의 뒤에서 눈물을 삼켰다.

너는 사랑받고 있어 루피. 한참을 껴안고 있던 로우는 마지막 말 한마디와 함께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는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루피는 로우를 올려다보며 벙찐 얼굴을 하고 있다가 다시 생긋 웃어 보였다. 처음 고백했을 때처럼 루피와 로우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서로를 바라봤다.


쾅―!
로우가 거칠게 제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루피를 울렸다. 그렇게 밝고 긍정적인 아이를, 웬만해서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아이를. 내가 뭐가 잘났다고. 로우는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루피를 피했던 이유는 갑자기 그가 싫어졌다거나, 애정이 식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루피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의 그 느낌을 아직도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든 고백에 다르게 보였든 루피의 모습, 설렜던 그 느낌…. 이후 루피와 함께 있는 그 순간은 천국이었고, 루피는 새하얗게 빛나는 천사였다. 천국임을 실감하게 해주는 천사. 나만의 천사. 로우는 단지 무서웠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무서웠고, 그 때문에 경멸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눈빛이 두려웠다.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행동들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이 게이라는 걸 알아채지 않을까,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모든 것이 로우에게는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다. 루피마저도.

하지만 오늘 로우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느꼈다. 루피를 사랑한다면서 늘 자신만 생각했고, 결국 오늘 소중한 루피를 울려버렸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뭐?'
'아니면, 내가 싫어진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난 모르겠어, 로우.'

 

방금까지 울먹이던 루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짜증 난다. 로우는 루피에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게 만든 제 모습이 너무 화가 났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루피와의 관계를 말한다면? 로우는 상상했다. 모두의 앞에서 루피를 끌어안고, 자신의 연인이라 말하는 제 모습을. 그리고 보이는 혐오의 눈길들. 안 되겠어 역시. 로우는 오늘도 혼자서 괴로워했다. 루피는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성 정체성에 의한 두려움, 둘 사이의 내적 갈등이 그를 밤새 괴롭혔다.

 

 

-

루피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여기로 결정.
로우는 여러 항목 중 마침내 그려진 동그라미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름방학, 장장 21시간의 보충을 끝내고 남은 일주일이라는 시간, 그동안 루피와 함께하기 위해 찾아놓은 곳곳의 바다 중 한 곳을 드디어 결정지었단 말이다! 함께 수업을 듣는 루피에게 둘만의 여행을 제안했을 때의 반응이란, 정말 귀여웠다. 바다가 최고라며 로우만세를 반복하는 루피 덕분에 로우는 뿌듯했다.
키드를 따돌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1학년 때부터 예체능 계열을 선택한 키드는 마침 보충 수업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 편이야. 처음에는 키드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키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루피로 인해 그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바다로 가기 전에, 미리 잡아놓은 콘도에 짐을 풀었다. 2박 3일의 여행인지라 짐을 두둑이 챙겨온 루피는―루피의 짐 절반은 군것질거리였기 때문에 돌아갈 때 절반이 사라져있었다― 엘리베이터 없이 4층을 올라오느라 낑낑거렸지만, 곧 로우가 들어주어서 날아가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고 나서 옷을 갈아입은 후 재촉하는 루피에 의해 로우는 끌려가듯 바다로 향했다.

 

"어라, 로우. 둘이 온 거야? 루피랑?"

 

젠장. 빌어먹을.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루피를 저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로우에게 아는 척을 하는 노랑머리의 남자는, 상디였다. 애인으로 보이는 주황 머리칼의 여자도 함께였다. 일부러 아는 사람 만나기 싫어서 멀리 있는 곳으로 잡은 건데, 하필이면 왜 이 녀석이랑! 로우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상디의 인사에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짧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는 옆에서 혼자서 재잘재잘 떠들다가 시큰둥한 로우을 그제야 눈치 챘는지 "그럼 안녕"이란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아는 사람이 있어. 루피와 함께 있으면….

로우의 손이 떨렸다. 무서워, 무서워. 로우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미안해 루피."
"아니야, 아픈 건데 어쩔 수 없잖아.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러면 이렇게 고집부리지 않았을 거야 돌아왔다. 바다에서 한참 놀던 루피는 자신을 바라보던 로우의 안색이 안 좋아진 것을 보고 그에게로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상냥한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로우는 차갑게 그를 내쳤다. 로우의 태도에 루피도, 그리고 로우 자신도 당황했는지 아프다며 말을 얼버무려버렸다.

숙소로 돌아올 때도 로우는 일부러 루피와 멀찍이 떨어져 걸어왔다. 자신의 뒤에서 루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고 있었다. 그렇게 결심했음에도 자신은 또다시 루피에게 상처를 주었다.자괴감 때문인지 로우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또다시 내적 갈등은 로우를 괴롭혔다.

 

"지루하지 않아?"
"별로 안 지루해! 로우가 아픈데 지루할 리가 없잖아."
"거짓말."
"아니야."

 

루피는 거짓말을 할 때 꼭 눈을 피했다. 입술을 앙 오므린 채로. 지금 루피도 딱 그 표정이었다.

 

"너 거짓말하면 티나, 루피."
"... 사실 조금 심심해."
"나가자."
"어?"


로우가 몸을 일으키자 루피가 그를 잡으며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우는 미안해서 그런다며 루피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으나 밤바다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주변이 어두워서 누군지 알아보려면 힘들 것 같아 로우는 한 시름 놓고 루피와 함께 바닷가를 걸었다.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루피, 오늘은 정말 미안해."
"..."

 

대답이 없는 루피에 혹시 화가 났나 싶어 로우가 루피를 확인하자 그는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실루엣으로 보아 남녀가 쌍을 이룬 커플들로 보였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껴안고, 손을 잡고, 키스하고 있었다. 루피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또 한참을 걷다가 루피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로우, 나는 바다가 좋아."

 

알아. 그래서 내가 너를 바다에 데리고 왔잖아. 로우가 장난스레 대답했다. 루피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게 있어서 바다는, 천국이야."

"모두가 나를 버려도 바다는 나를 안아줄 거야."

 

루피는 또 다시 말이 없었다. 침묵 사이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다른 연인들의 웃음소리. 조용한 것은 둘 뿐이었다.

 

 "…. 루피."

 

루피가 나를 바라본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로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말이 다른 소리에 묻히기를, 오직 루피에게만 똑바로 들릴 수 있기를.

"네게 바다가 천국이라면 나도 마찬가지야."

"다음에 꼭 천국에서 둘이 함께 살자."

 

너와 닮은 바다, 너, 그리고 나. 이 모든 것이 있는 곳에서 우리 단둘이 평생 함께 살자.

로우는 조심스레 허리를 숙여 루피에게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로우에 루피도 서서히 눈을 감았다.

 

 


-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오늘 로우는 이상하리만큼 속이 메스꺼웠다. 뭘 먹어도 토하고, 음식 냄새만 맡아도 배가 살살 아려왔다. 그는 담임 선생님께 병원 때문에 늦는다는 연락을 한 후에 병원으로 갔다. 장염이란다. 한겨울에 웬 장염. 평소 소식하는 습관을 지닌 그로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오진이 아닐까 싶었지만, 장염이 아니면 딱히 설명할 방법도 없을 것 같아 넘어가기로 했다. 병원에서는 오늘 하루만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로우는 병원진단서를 끊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4교시가 마칠 무렵이었다. 제 옆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루피가 보이지 않자 로우는 앞자리를 두드려 루피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귀찮다는 듯 "알아서 잘 있겠지"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뒤에 자신을 비웃는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순간 로우는 지금 이 상황이 머릿속에 자신이 줄곧 상상해왔던 것들과 겹쳐 보였다. 루피와의 관계 때문에 자신을 경멸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떠나가는 친구들…. 불안했다. 때마침 4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러나 아이들은 평소와 달리 뛰어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데려와. 반의 누군가가 말했다. 목소리에 의해 들려온 이는, 루피였다.

루피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발자국이 찍힌 교복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얼굴은 상처와 멍으로 얼룩져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반 모든 아이는 루피를 타겟으로 하고 있었다. 루피에게 침을 뱉고, 짓밟고, 때렸다. 루피는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것에 반항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순리인 것처럼, 루피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루피에게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다.
괜찮냐며 쓰다듬고, 어루어 만지고 싶다. 로우는 엉망진창인 루피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트라팔가 로우."

 

누군가가 로우를 불렀다. 그러자 루피를 에워싸고 때리던 무리도, 비웃던 무리도, 모두 로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트라팔가 너, 게이야?"

 

쿵. 어떻게 안 거지. 뭐지. 누가 말한 걸까. 바닷가에서 마주쳤던 상디가?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로우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누가 이런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거냐?"
"모르지."

 

이미 로우의 주변에는 반 학생들은 물론 다른 반 학생들까지 모여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우는 갈등했다. 루피를 선택하고 모든 이들의 혐오와 경멸, 멸시를 받고 살 것이냐, 아니면 자신을 선택할 것이냐. 무서웠다. 하지만 루피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트라팔가, 너 게이냐고."
"..."
"뭐야, 진짜 게이야? 루피 저 호모 새끼랑 같이?"

 

미안해.
루피.

로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여유롭게 코웃음을 쳤다.

 

"미쳤냐. 더럽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피가 로우를 바라보았다. 이때까지 아무 미동도 없던 루피가, 로우를 바라보았다. 나는 또다시 루피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전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대못을 박았다. 로우는 루피의 눈을 피하고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에는 또다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가 듣기 싫어 뛰다시피 걸었다.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로우의 발걸음은 복도에서 마주친 한 사람에 의해 멈춰졌다.

키드였다.

키드는 로우를 보자마자 얼굴을 잔뜩 찌그러뜨리고는 말했다.

 

"미친 새끼. 야, 트라팔가...!"

 

로우는 키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뛰쳐나갔다.

그날은 일찍 조퇴했다. 장염이라는 핑계로.

 

얼마 가지 않아 로우는 자퇴신청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루피를 홀로 남겨둔 채 그는 학교를 떠났다.

 

 

 

 


*

잠에서 깨자 눈앞에는 고급스러운 벽지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릿저릿한 몸을 일으켜 세워 문으로 향했다. 여전히 잠겨있는 문에 한숨을 쉬었다. 다시 몸을 돌려 책장으로 가서 아무 책이나 하나 골라 침대에 누웠다. 몇십 번이고 읽은 책이었다. 이 책 몇 페이지에 무슨 구절이 있는지도 다 외울 지경이었다. 지겨워. 하지만 이것 외엔 할 일이 없어 나는 책장을 펼쳤다.

17살, 나는 부모님에 의해 삼촌이라는 남자의 집에 맡겨졌다. 부모님께서는 내게 할 말이 많으신 모양이었지만, 웬일인지 그냥 말없이 나를 이 남자의 집에 보냈다. 노란 머리에 큰 덩치를 지닌 이 남자는 내가 오자마자 방에 가두고, 문을 잠갔다. 나는 절대로 문밖에 나갈 수 없었고, 내가 그나마 이 방 안에서 나갈 수 있는 날은 남자가 문을 열고 처음에는 이 황당한 상황에 문을 두들기고 쌍욕을 하며 남자에게 대들었지만 남자는 나를 "더럽다"는 말 한마디로 입 다물게 만들었다. 나중에 그의 말을 들어보니 나는 동성애자고, 그는 호모포비아라고 했다. 아마 부모님께서 내 일을 다 말씀하신 것 같았다. 남자는 내게 늘 경멸의 눈길을 보내고, 천대했다. 수치스러운 욕을 듣는 것은 일상이었다. 점차 나는 그것에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3년이다. 나는 지금 고등학교 졸업장도 따지 못한 채로 성인이 되어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어서 인간관계는 다 끊어졌다. 친구들도―남은 친구들도 없을 테지만―, 가족도 모두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존―나 싫어."

 

남자가 싫다. 제가 뭔데 날 이딴 식으로 취급해. 내가 제 좋다고 한 것도 아니고. 나는 억울함에 투덜 투덜거렸다.

창밖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시원하다 못해 차갑다. 마치 꿈에서 느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 꿈은 참 오랜만이었다. 3년 동안 이 안에 갇히면서 꿨던 이상한 꿈.바다도 아닌 것이 사막도 아닌 것이, 그저 황무지에 나는 홀로 남겨져 있었다. 바다 같은 곳에서 의지할 사람도 없이 나는 혼자였다. 한참을 걷고 또 걷다가 지쳐 쓰러지면 꿈에서 깨고, 깨고 나면 이 빌어먹을 방 안이고. 그러다 다시 잠에서 깨면 나는 다시 그 공간에 있었다. 어딜 있어도 나는 갇혀있는 입장이었다. 제기랄, 엿 같았다.

끼익―. 그때였다. 내 방문이 열린 것은. 그 방문 앞에는 내가 증오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바닥에 내려져 있는 커다란 가방을 발로 내 쪽으로 뻥 차버리고는 말했다.

 

"꺼져. 나가."

 

그는 할 말만 딱 끝낸 채로 돌아갔다. 나는 한참 동안을 그가 없는 문을 바라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나갈 수 있었다. 나간다. 나간다. 드디어!

가방 안을 보아하니 낯선 열쇠와 주소, 어느 정도의 돈이 들어있는 통장이 들어있었다. 나는 이것이 저 남자가 아닌 부모님께서 준비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직 부모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음에 감동하며 짐가방을 챙겨 서둘러 방안을 뛰쳐나왔다. 영화에서나 보던 뒤 돌아보며 추억을 회상하는 그런 순간은 없었다. 나는 내가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들떴다. 아무도 나를 구속하는 사람이 없었고, 남자처럼 나를 천대하는 인간도 없었다.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었다!

주소를 따라온 곳은 그냥저냥 한 빌라였다. 찾아보니까 요즘 빌라에는 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그러던데, 엘리베이터도 없냐. 나는 내 모든 짐을 낑낑거리며 들고 올라와 문을 열고 던져 놓았다. 그리고서 바로 집 밖으로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나온 세상 밖을 이리저리 누비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익숙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싶기도 하고.

나는 최대한 들뜬 기분을 자제하며 주변을 걸어 다녔다. 그때였다, 내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이 말을 건 것은.

 

"트라팔가?"

 

키드. 키드였다. 여전히 그는 키가 컸고, 새빨간 머리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강렬한 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는데, 오자마자 아는 사람, 그것도 가장 친했던 친구를 만나버렸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니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자취한다.지금은 아르바이트 가는 중이고. 그나저나 넌 자퇴한 이후로 뭘 하고 다닌 거야? 완전 비쩍 말라서는. 꼭 루피마냥…."

 

키드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한 눈치였다. 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이름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 지 몰라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트라팔가, 너 루피한테 가봤어?"
"...아니. 못 가봤어."

 

지금 뭐 하고 지내?

내가 물었다. 키드는 뜸 들이는 듯하더니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죽었어."

 

 

-

 

 

내가 루피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가 다 되었을 때였다.. 불이 새어나오는 집. 키드의 말에 의하면 지금 루피와 함께 살던 형이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키드와 만나고, 루피에 대한 말을 듣고 나서 바로 루피의 집으로 향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내가 이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때 내가 루피를 뒤로하지 않았다면, 내가 곁에 있어 줬다면…. 나는 죄책감에 또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루피 친구라고 했지."
"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동안 한 번도 안 왔었구나."
"친척네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연락도 할 수가 없어서…."
"이름이 뭐야?"

 

로우입니다. 트라팔가 로우.
그는 내 이름을 듣자 놀란 듯이 눈이 커졌다. 그리고 내게 내 이름을 재차 되물었다. 루피는 그에게 나를 무엇이라고 소개했길래 내 이름을 듣고 이토록이나 놀라는 것일까.
그는 내게 기다리라는 말을 한 뒤에 루피의 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노트 하나를 들고 왔다. 그리고 다시 내 앞에 앉았다.

 

"루피가 죽기 전에 남긴 것이 있어."

 

그는 내 앞에서 노트를 펼쳤다. 몇 장을 넘어가니 루피의 필체로 보이는 글씨가 보였다. [천국에 갈게]이라는 짧은 내용의 문장이었다.

 

"이 말 한마디밖에 없었어.난 루피가 왜 죽었는지 몰라. 평소에 학교생활을 잘 말하는 성격도 아니거든. 하지만 나한테 네 얘기를 정말 많이 했는데, 루피랑 많이 친했지?"
"...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가. 루피한테. 알려줄게."


나는 그가 내게 준 노트를 품에 안고 루피가 잠들어있는 곳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의 이름 중에서 난 루피의 이름을 찾으려 애썼다. 한참을 찾아다니다가 나는 마침내 루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유골함 앞에 있는 사진이 먼저 눈에 보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루피의 모습이었다. 3년 동안 그토록 이나 그리워하고, 잊으려고 애썼던, 일부러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사진들이었다. 키드와 셋이서 찍었던 사진, 형과 함께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로 어색하게 찍은 사진 그리고, 나와 함께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초점도 다 흔들려서 버리라고 했는데 버리지 않고 있었구나. 나는 너를 버리려 애썼는데, 너는 나를 기억하려 했구나. 그토록 매정했던 나를 너는 나를 기억하려 했구나.

눈물이 떨어졌다. 지금 내 눈앞에 루피는 너무나 해맑게 웃고 있는데, 이 아이는 이제 없었다.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내가 이기적이라서 그 아이를 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돌아왔다. 양심 없는 새끼. 더러운 새끼. 나는 다시금 노트를 펼쳤다. 천국으로 갈게. 천국, 루피의 천국. 바다. 그리고 나의 천국.

 

'네게 바다가 천국이라면 나도 마찬가지야.'

'다음에 꼭 천국에서 둘이 함께 살자.'

 


내가 루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나는 내게 미래를 약속했지만 냉정하게 너를 버렸고, 너는 나를 남기려 했다.
너와 닮은 바다, 너, 그리고 나. 이 모든 것이 있는 우리들의 낙원, 단둘이 영원히 함께할 천국.


새하얗게 빛나던,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아름답던, 나만의 천사.

너는 그곳에서 행복하니?


대답해줘, 어서. 루피.

 

 

 

 


*Epilogue

나의 그와 함께할 천국을. 그곳에서는 우리의 사랑을 아무도 욕하지 못하고, 평생 단둘이서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바다와 시원한 바람. 지치지 않는 그 세계에서….

더는 함께 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의 천국, 나의 바다.

이제야 비로소 나의 천국이 완성되었다.


나는 행복해, 로우.

그러니 이제 꿈에서 깨어도 괜찮아.


로우가 나를 껴안는다. 쓰다듬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본다.

 

"안녕. 정말 안녕."

 

 


-

 

 

소리 없는 고요함만이 가득하던 공간에서 하늘이 흘러내렸다. 별과 함께 흘러내린 하늘은 반짝이는 백금색의 모래를 적셨다. 그리고 새까만 밤하늘 대신 푸른색을 자랑하는 맑은 하늘, 그곳에 떠 있는 태양 빛이 꽤 따사롭다. 출렁거리는 파도, 그가 만들어내는 철썩이는 소리.

이곳은 바다였다.

 

 

 

 


-이번에는 로우루로 써봤습니다! 시험끝나고 하루만에 쓰는거라 너무 힘드네요 두번째로 참여했던 글합작 너무 재밌었구요 다음에도 꼭꼭 참여하고 싶어요!! 익만 흥해라!!!
-급하게 쓴거라 오타 양해 부탁드립니다...ㅜㅜ

 

 

[프리/소스린]얹힌듯이

기다릴게. 네가 돌아오는 걸 기다릴테니까..
린. 마츠오카 린이 기다리겠다는 말을 한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만 막상 들으니 가슴 한 켠에 무언가 얹힌 듯 했다.

 

 

「뭐, 생각해볼게.」

 

 

는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함이였다.

 

 

 

 


[소스린] 얹힌 듯이

 

 

 

 


소스케가 보다 성공적으로 재활을 끝마치려면 역시 이 곳을 떠나야했다. 기다리겠다고 한 것은 저 자신이나 린은 야마자키 소스케가 졸업식 전에 떠난다는 것이 굉장히 불만이었다. 게다가 사메즈카 수영부의 전통이니 뭐니해서 은퇴식 및 인수인계도 끝났고 학교를 다닌지 완전한 1년도 못 채워 별로 아는 얼굴도 없으니 되도록 빨리 떠난다가 그의 말이었다. 결국 정한 날이 2월 2일, 린의 생일이었다.

 

 

" 왜 하필 이 날 인거냐. "
" 그냥, 서프라이즈의 일종이랄까? "

 

 

아, 그냥 빨리 꺼져나 버려.
린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짖꿎게 말하는 소스케와 저이지만 소스케가 가능한 빨리 돌아오고 싶어 빨리 잡은 것이 우연찮게 자신의 생일이였다는 것을. 소스케는 이제 비행기 시간이 10분 정도 남았다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뿌렸다. 소스케는 솔직히 이런 식으로 급히 떠나기 원하지 않았으며, 싫었다. 자신의 어깨가 고장났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인 겸해서 마츠오카 린과 다시 한 번 수영을 하고 싶어서 온 것이었기 때문에, 아니 그냥 린이 보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니까 굳이 다시 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였었다. 하지만 사메즈카 수영장에서 린이 한 말은 그가 다시 재기를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버렸다. 야마자키 소스케는 마츠오카 린에게 말하지 않았다. 재활을 해도 자신의 어깨가 돌아 올 확률이 낮다는 것을 린에게 감추었다. 린은 자신의 어깨에 대한 죄책감을 가졌다. 어느 날부터 그런 낌새가 보여 그것이 또한 소스케를 죄책감에 빠지게 했다. 어깨가 고장 난 것을 우연히 린이 알아버린 날, 린은 제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원래 울보인 녀석이지만 그런 녀석의 눈물에 제 자신은 약해져 버린다. 그 후 비록 이와토비에게 졌지만 린이 자신이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안도하니 소스케 자신도 편안함을 느꼈다.

 

 

" 언제 돌아올거냐? "
" 나도 잘 모르겠다. "

 

 

린의 눈에 눈물이 맺힐락 말락한다. 소스케 자신도 알고 있다. 수영하고 싶다, 마지막이다라는 핑계로 무작정 린이 보고 싶어 그가 다니는 사메즈카 학원으로 전학 온 것도, 어깨가 고장났다는게 린 만큼에게는 알려지기 싫어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거짓말 친 것과 니토리에게 숨긴 것도, 린이 안도하자 편안함을 느끼고, 린이 울 때마다 제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든 것도 다 린, 린을 자신이 사랑함이였다. 지금의 소스케 심정이 딱 그랬다. 가슴이 막 답답하고 얹힌 듯 무거웠다.

 

 

린 좋아해.

 

 

결국 린이 울음을 터뜨렸다. 린도 소스케를 잡고 싶었다. 그 날 수영장에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라며 공항에 오면서 내내 후회했다. 하지만 린은 야마자키 소스케가 다시 수영장에서 저와 수영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소스케가 자신도 한 번 입 밖으로, 제대로 해주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해주었다. 아, 웃으며 보내주려고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시간이 좀 더 많았으면 자신이 웃으면서 보내 줄 수 있었을까. 린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하지만 소스케는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눈물을 뚝뚝 떨구는 린의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가락으로 한 방울씩 닦아주었다. 울지마, 예쁜 얼굴 다 망가져. 소스케의 다정한 말에 린은 그대로 소스케의 품에 안기어 어깨에 얼굴을 감추었다.

 

 

" 린. 네 대답, 내가 돌아오면 해 줘. "

 

 

린의 머리를 쓸어주며 나지막히 말한 소스케는 린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이제 가야한다. 린은 소스케가 자신이 놔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잡으면 분명 소스케는 가지 않을 것을 알기에 팔을 풀어주었다. 아마도 눈물이 얼룩덜룩하고 눈은 붓고 코가 빨개진 린의 얼굴을 보자 입꼬리를 올려 웃은 소스케가 시간을 한 번 보고 그대로 앞의 게이트로 향했다. 소스케는 자신이 떠나는 날을 당일에 알려주었다. 그래서 이와토비는 물론 아이와 모모타로도 기숙사에 없어 데려오지 못했다. 아마 소스케는 린만이 배웅해주길 원하였을 것이다. 소스케는 여권과 티켓을 직원에게 보여준 뒤, 린에게 돌아 손으로 전화모양을 만들어 연락하겠다고 린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여권과 티켓을 다시 받아들고 게이트 안으로 향하였다. 아예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되기 전, 들어가던 소스케는 뒤돌아 린에게 입모양으로 말했고 린은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 待ってよ, すぐ?る。(기다려, 곧 돌아올게.) "

 

 

 

 


***

 

 

 

 


린도 본래 예정대로라면 바로 호주로 떠나려했으나 정리할게 많아 일단 남기로 하고, 졸업식 하기 전까지는 저는 아직 사메즈카 학원생이니 기숙사에 있기로 했다. 소스케가 떠났다. 제 곁에 항상 있던 그가 없으니 허전하게 당연한 것이었다. 제가 호주로 떠나기 전까지 이 허전한 방에 혼자있어야 한다니. 그가 떠나기 전 침대라도 바꿔줄 걸 그랬나하며 소스케가 짐을 싸느라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는 건 린 몫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있다가 또 나가야했다. 오늘은 소스케가 떠난 날이기도 했지만 제 생일이기도 해 고우와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작년이나 재 작년과 달리 고우와 관계회복한 올해는 나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린은 몇 살인지 기억 안 나지만 독감이 들던 날, 생일이였던 저와 고우 그리고 소스케가 집에서 논 것을 떠올리자 슬며시 웃음이 났다. 소스케와 다시 만나고 항상 곁에 있던 그가 없다니 왠지 모르게 자꾸 가슴 한 곳이 먹먹하였다. 얹힌 건가. 소스케는 제가 울 때마다 그런 말을 해댔는데 지금은 좀 소스케의 그 느낌을 알 것 같았다. 마츠오카 린은 야마자키 소스케에게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사람이다. 린은 안다, 소스케는 소스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재기하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의 욕심이지만 더욱 소스케가 재기하였으면 했다. 사실은 소스케가 예전처럼 저와 수영 시합을 하면서 웃기를 바란 걸지도 모르겠다. 역시 야마자키 소스케도 마츠오카 린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

 

 

 

 


1년하고 반이 흘러버렸다. 올 때부터 예상한 것이여서 별로 슬프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소스케는 자신이 재활을 해도 여기서 더 이상 나아 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만큼이라도 성공한 것이 놀라웠다. 소스케는 1년 동안은 미친듯이 재활에 임했다. 한 가지 말하자면 도착하고 전화하겠다던 소스케는 린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계속이었다. 그 1년 동안은 린이 필요한게 맞았다. 졸업 전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을 뜨면 린이 같은 방에서 자고 있고, 밥도 항상 둘이 같이 먹었고 지겨울 만큼 둘이, 둘이였다. 숨기고 수영을 해 온 탓이라 어깨 통증도 심해져서 재활을 하는데 고통스러웠다. 린, 당장이라도 린이 필요했다. 아아···. 오랜 시간 그가 없이 버텨야 된다는게 지옥이었다. 그리고 반 년, 지옥같던 날들도 차차 무뎌질 때 쯤이었다. 재활을 도와주던 병원도 제게 이만큼 했으면 성공한 것이라고 했다. 수영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잊고 있다가 다시 생각 난 것이 린이었다. 린은 자신이 돌아오면 분명 재활에 성공해서 다시 수영선수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린이 이 말을 들으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또 울겠지, 그리고 다시 죄책감. 자신이 이 곳으로 온 이유가 없어졌다. 린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

 

 

 

 


***

 

 

 

 


" 그래서, 그래서 어쨌는데."
" 그래서 내가 안 돌아왔으면 네 옆에 있겠냐. "

 

 

소파에 앉아 마츠오카 린의 수영경기를 보고 있던 소스케는 옆에 같이 앉아 린의 계속되는 물음에 보고 있던 화면을 멈추었다. 잘 나가는 수영선수 마츠오카 린의 옆에 있는 것은 린의 지지대가 되준 린의 개인 매니저, 야마자키 소스케였다. 그렇다고 소스케가 수영을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도 끝만 나가지 않으면 되었기에 이따금씩 린의 상대가 되주었다. 승부욕이 강한 린이기에 항상 져주는 저였지만. 린은 아직도 소스케의 어깨에 대해 민감한 듯 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린이 소스케의 어깨를 만졌거나 모르고 쳤거나 그러면 저보다 린이 더 놀랬다. 그리고 너무나도 미안해했다. 린이 미안한 것은 아마 그가 소스케에게 기다리겠다는 말을 해서 저 때문에 재활 훈련을 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소스케가 그 때의 얘기를 꺼내면 린은 울 것 같은 눈으로 소스케의 어깨를 쳐다볼 때가 있다. 소스케는 린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긴 뒤 소스케의 어깨에서 눈으로 린의 시선이 닿자 소스케는 그대로 린에게 입을 맞추었다.

 

 

" 린. 난 그 때를 후회하지 않아. "
" 소스케. "
" 그러니 더 이상 내가 수영선수로 재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 갖지마. "
" 넌 내가 기다리겠다는 말에..! "
" 그래, 맞아. 하지만 네가 죄책감을 갖는 건 바라지 않았어. 내가 그저 후회하는 건... "

 

 

네가 이만큼 성장할 동안 네 곁에서 있지 못한 점이야.
소스케의 말에 린은 여태껏 쌓아두었던 서러운 감정들을 터뜨렸다. 린과 소스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합의라도 한 듯, 아무 말하지 않았다. 린은 궁금한게 많았을테지만 제가 다시 복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린의 성격 상으로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돌아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린의 감정에 언젠가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소스케는 개인 숙소로 돌아 온 린에게 차분히 하나씩 말하였다. 정말 자신은 그 때를 후회하지 않았다. 다르게 얘기하면 그것은 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린이 우니까 역시나 얹힌 듯한 이 감정은 역시 버릴 수 가 없었다. 아이처럼 울지만 입술을 꾹 물고 울음을 참는 린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이 눈물은 저로 인해 우는 것이니까 한 편으로는 기뻤다. 린은 제 자신은 울고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웃고있는 소스케를 보자니 얄미웠다. 뭐가 좋다고 웃는 것인지. 린은 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벅벅 문지르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금방 소스케에 의해 소파에 다시 앉혀지고 무언가 말하려던 것 또한 소스케의 입에 의해 먹혀버렸다.

 

 

한참동안 깊은 입맞춤을 하던 린과 소스케는 린의 숨이 차 끝나고 말았다. 숨을 고르는 린을 그대로 밀어 눕히고는 다시 입맞춤을 하다가 목부터 내려 오기 시작했다. 목을 한참을 배회하다가 린의 웃옷을 목까지 올린 소스케는 가슴부터 배꼽까지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슬슬 달아오는 몸에 린은 신음을 참아내었고 그런 린을 보다가 바지버클을 풀러내리고 브리프까지 순식간에 벗기었다. 린은 부끄러워 다리를 오므렸지만 소스케의 손에 저지당하자 고개를 돌려 베개에 얼굴을 감추려고 했고 소스케는 린의 것을 입에 담았다. 한참을 있다가 사정한 린의 것을 소스케는 그대로 삼키었고 소스케는 다시 린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소스케는 내일 훈련이 있을 린을 위해 제 자신은 일단 제쳐두고 린에게 펠라치오만 해준 것이었다. 부풀어있는 제 앞섬에 린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괜찮다며 린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 이제 좀 안 우네. "
" 아, 진짜.. 소스케. "
" 린. 난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좀 좋지 않거든. "

 

 

갑작스러운 소스케의 말에 어리둥절한 린이자 소스케는 린이 울면은 항상 체를 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그런게 어딨냐며 린은 소스케를 바보라고 놀려대었고 울다가 웃으면 큰 일 난다며 소스케는 린의 볼을 손가락으로 잡아 늘렸다. 야마자키 소스케도, 마츠오카 린도 체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다. 이내 린이 소스케의 품에 안기었다. 소스케, 좋아해. 린의 말에 소스케는 놀라 눈이 커졌다가 귀 끝까지 빨개진 린의 얼굴에 다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린은 공항에서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체했다는 것이 아니라 야마자키 소스케와 마츠오카 린이 알고 있는 감정은 그것이었다.

 

 

그것이 역시 사랑이었다.

 

 


 

 

[진격의거인/리바에렌]희망

 

 

꽤 밝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어딜 가도 평판이 좋더라고요. 예의 바르고 착했다. 친절한 아이였다. 뭐 이래서야 원 수사에 진전이 없어요. 진전이. 투덜대며 펜 뚜껑을 딸깍이는 아르민을 향해 쟝이 약하게 딱밤을 때렸다. 작은 비명과 함께 아르민이 제 이마를 감쌌다.

시신은 무려 이 년 동안이나 땅 속에 묻혀있었다. 하지만 해괴하게도 시신에는 상흔 하나 조차 발견되지 않았고 부패되지도 않았다. 제 옆에 서 계속해 투덜대는 아르민을 뒤에 두고 쟝이 의자를 끌며 라이너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커피.”
“내가 네 엄마냐?”
“아 좀―.”


운동화를 질질 끌며 일어선 쟝이 의자에 걸쳐뒀던 재킷을 꺼내들었다. 집중이 안 될 땐 역시 커피다. 마주치는 얼굴마다 슬쩍 손인사를 하고 서둘러 서를 나왔다. 근무 도중에 딴짓하는 걸 들켰다간 그대로 매를 맞을 게 분명했으니까. 서 밖으로 나가니 얼굴 위로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별로 좋지 않은 날씨였다.


“잘 안 풀리냐?”
“뭐 그렇지….”
“용의자는.”
“그러게 말이다.”


 에렌 예거는 혼자였다. 가족도 친구도 그의 곁에 서 있던 사람은 언제나 아무도 없었다. 이웃들에게 몇 번을 물어봐도 같은 대답만이 그대로 돌아왔다. 에렌은 늘 혼자서 집을 나섰고 혼자서 돌아왔다. 그 누구도 곁에 불여서 온 적이 없었다 고. 덕분에 수사에 있어서 크나큰 난황이 생겼다.. 용의자로 지목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질 않았다.


“시신은.”
“아직 부검소에.”
“너도 참 고생이다.”
“야 라이너.”
“이 사건 자살은 아닐까.”


 커피를 마시던 라이너가 흘긋 쟝을 쳐다봤다. 가만히 종이컵을 두루 만지며 중얼이던 쟝이 짧게 눈을 감았다 떴다. 바람에 연기가 날려 손등을 스쳤다. 묘하게 한기가 서렸다.


“근거는.”
“솔직히 지금까지만 봐도 충분히 그렇지 않냐.”
“쟝. 네 녀석, 탐정이냐?”
“뭐?”
“어이 쟝, 잘 들어라. 넌 형사야. 사람 죽인 범인들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너. 그런데 형사라는 놈이 자살이라고 의심하면서 수사하면 범인이 제 발로 기어 나온다냐? 이 때다 싶어서 더 숨어들어가지.”


 큰 소리로 혀를 찬 라이너가 쟝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덕분에 손 한가득 커피를 흘려버린 쟝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탈탈 털어냈다.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열기가 그대로다. 쟝은 후끈거리는 제 손등을 후후 불며 라이너를 째렸다.


“키르슈타인 형사님!”
“어. 왜?”
“알레르토 형사님이 찾으세요!”
“알았어. 금방 간다고 좀 전해줘.”
“네!”


자신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한 페트라가 곧 빠른 걸음으로 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페트라는 최근에 새로 들어온 신입 형사였다. 보기 드문 여형사라 주변에서 그녀를 향한 관심이 꽤나 뜨거웠다.


“어쨌든 나 먼저 간다.”
“자기가 불러놓고 먼저 내빼네.”
“아 좀 봐주라 좀.”
“됐다 얼른 가라.”
“고맙다 다음에 밥 한 번 쏠게.”


서 안으로 들어서자 제 자리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발을 구르고 있는 아르민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고개를 든 아르민이 손 가득 종이뭉치를 들고 뛰어왔다.


“에렌군 친구를 발견했어요.”
“친구? 갑자기?”
“네. 초등학교 때 친구랍니다. 뭐 그렇게 가깝게 지내진 않았다곤 하지만 어쨋든요.”
“너한텐 그게 친구로 보이냐?”
“그래도 그 애가 저희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구요!”
“뭔데?”
“그것까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 주겠다고…,”
“그러지 말고 우리가 찾아가겠다고 해. 주소 받아서 적어 놓고.”
“네? 그분께서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입으로 친구라고 말했다며? 아무 관련 있네.”
“정말 고집 하나는 우주 최강이셔. 아무튼 알겠습니다. 연락해볼게요.”


 친구는 무슨 그저 같은 반 학생 정도였을 거다. 너도 나도 누구든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큰 일을 당하면 친했든 진하지 않았든 입 이곳저곳이 근질거리기 마련이다. 자신만이 아는 그 애의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져서.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그 우월감을 표출하고 싶어서. 그래도 뭐 어쨌든 저런 사람들 덕에 자신들이 먹고사는 거니까. 뭐, 딱히할 말은 없다.


 사람들은 한순간 관심을 가지고 한순간 잊어버린다. 이번 사건은 여러 면에서 나름 큰 이슈가 되었다. 이 년이나 지난 시체의 신원 파악이 비교적 간단히 이루어졌다는 점, 용의자가 없다는 점 등 형사들이 무언가를 발표할 때마다 인터넷이든 입이든 화재로 오르내리기 일수였다. 사건이 이슈가 될수록 힘든 건 자신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들이 시도 때도 없이 퍼져나가 꽤나 고생을 했다.

 그런데 약 이 주일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잊었다. 이 사건 자체를.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제 얼마나 남아있을까. 쟝은 키보드를 빠르게 누르며 생각했다. 누를 때마다 튕겨 나오는 키보드 부분부분의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아커만 형사만 있었어도 이런 사건쯤 식은 죽 먹기였을 텐데 말이야.”
“그러니까. 그 형사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지 아마?”
“젊은 나이였는데 왜 그만뒀는지 참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2년 좀 됐나? 그 사람 그만둔지.”
“그러네. 지금이 6월이니까…, 2년쯤 됐네 벌써.”


아커만 형사. 그는 쟝의 동경의 대상이자 쟝이 형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쟝이 처음으로 형사 이름을 달고 들어온 그 시점, 타이밍 맞게도 형사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아무도 모르게 깨끗하게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 누구도 그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모른다. 모두의 선망의 대상자였던 그는 한순간에 조용히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형사님 부검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건진건?”
“그게 시신의 볼 부분에서 지문 흔적이 발견이 됐는데,”
“지문?”
“네. 그런데 그게 시간도 지난지 꽤 됐고 거의 다 지워진 상태라 검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합니다.”
“얼마나?”
“한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일주일? 너무 긴데….”


기다리는 게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찾던 무언가가 드디어 발견되니 그 찰나의 희망이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하나만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은근히 길었다. 그것만 바라보고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알았다고 전해줘. 조금이라도 일찍 끝나게 되면 연락해달라고도 하고.”
“네.”

 

머리가 아파왔다.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그리 심각할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지만 그 후로부터 무언가 갑갑하고 막막한 상황에 닥치게 되면 종종 두통을 느꼈다.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지금 몇 시정도 됐죠?”
“어…, 8시…,”
“제가 머리가 좀 아파서요. 먼저 가겠습니다.”


어설프게 제 뒤통수를 꾹 누르며 쟝은 웃었다. 실제로 머리가 아픈 탓도 있지만 일도 잘 풀리지 않고 무엇보다 일찍 퇴근을 해야만 할 이유가 생겼다. 이제 곧 최고의 악재가 닥쳐올 것이다. 어쩌면 남은 이번 주의 어느 날보다도 가장 최악의 날을 맞게 될지도 몰랐다.


“뭐? 반장님한테 혼날 거야. 너 분명.”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아요. 코형사님.”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애칭이라구요. 애칭.”


코니 스프링거 형사. 줄여서 코형사. 꽤나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나? 쟝은 속으로 웃었다.


“난 뒷일 책임 못 진다.”
“예, 예―. 그럼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슬금슬금 꽂히는 시선을 피해 가며 재빠르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낮과는 달리 꽤나 차가운 바람이 코 끝을 때려왔다. 빨갛게 변해버린 코의 모습으로 한껏 움츠러든 목을 한 쟝이 버스 정류장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몸 안으로 파고드는 한기가 매서웠다.


‘에렌 예거.’


 에렌 예거. 쟝은 속으로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왜일까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냥 조금 찝찝한 기분이 맴돌았다.


“형사님.”
“…미카사?”
“오랜만이네요.”


 그녀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각을 맞춰 쟝은 손인사를 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격식을 차리는 그의 모습에 미카사가 작게 웃었다. 괜히 멎쩍어진 쟝도 제 뒤통수를 긁적이며 같이 웃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버스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어.”
“더 건강해지신 것 같네요”
“고맙다. 그나저나 그 이후로 세 달만인가?”
“아마도요.”
“시간 참 빠르네.”
“그러게요.”


 뉴스, 봤어요. 짧은 정적 끝에 미카사가 말했다. 그랬냐. 쟝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확실하진 않은데…,”
“……….”
“그분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뭐?”
“아마도, 맞을 거예요.”


 제 목에 둘러진 빨간 머플러를 조심스레 매만진 미카사가 곧은 시선으로 쟝을 쳐다봤다. 이거, 그 사람이 준거예요. 미카사는 고개를 떨궜다.


“몇 년 전에 그분이랑 만났었어요.”
“……….”
“그분이 절 도와주셨었어요.”
“…에렌이?”
“네. 그런데… 좀 신기한 분이셨어요.”


그분이랑 처음 만났었던 건 아마 제가 열세 살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 분도 꽤나 어려보였었죠. 저와 비슷한 나이 또래. 네 그렇게 느꼈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뭐랄까. 굉장히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가지셨었던 것 같아요. 어린아이였음에도 뭐랄까 표정도 행동도 사고방식도 여느 아이들과는 달라보이는 그런 느낌이 한순간 느껴질 정도로요.

 

 

또다. 또 찢어졌다. 미카사는 제 찢어진 볼을 휴지로 짓눌렀다. 금세 피로 젖어버린 휴지를 모래밭에 던져버리고 새로운 휴지를 꺼내들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냥 슬펐다.


“휴지는 아무 곳에나 버리면 안 돼.”
“……….”
“청소를 하시는 분들이 힘들어하시거든.”
“……….”
“너는 어째서 말을 안 해?”
“……….”
“말하는 거 분명 좋아할 텐데.”


 제 앞을 가로막고 선 한 소년이 제게 말을 걸었다. 이상한 소년이었다. 아무도 제 근처에는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하던데. 미카사는 그런 그를 해써 무시했다. 분명 상대하지 않으면 스스로 떠나갈 것. 미카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미카사가 그러든 말든 소년은 미카사의 옆 그네에 앉아 삐거덕 하는 소리를 내며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소년은 이따금씩 또다시 미카사에게 대화를 걸었다. 물론 그에게 돌아가는 대답은 없었다.


“뭐 하는…!”


 갑작스레 제 손을 덥석 쥐는 소년에 미카사가 놀라 그네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곧 어딘가 모르게 멍한 표정의 소년의 모습에 미카사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소년의 시선은 누군가를 응시하는 듯 어느 한 곳에 멈추어 있었다.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는 올곶은 시선의 끝이 다다른 곳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느껴져오는 오한에 미카사는 서둘러 뒤를 돌아 냅다 내달렸다. 소년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여전히 멍하니 어느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했죠. 첫 만남이. 제대로 어딘가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귀신이라고 보는 애인가 뭐 그랬죠. 여전히 제 머플러를 부드럽게 매만진 미카사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그 분과의 두 번째 만남이 있었어요. 그 일이 있고 난지 얼마 안 지나서였죠.

 

 

 저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피해 재빨리 마당으로 뛰쳐나온 미카사가 신발도 채 신지 못한 채 서둘러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내달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서 온갖 욕짓거리를 하며 칼을 휘두르는 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제 팔을 잡아끄는 무언의 힘에 미카사는 힘없이 그쪽으로 끌려갔다. 곧이어 익숙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넌,”
“미카사지? 난 에렌. 에렌 예거야.”
“……….”
“그날 일은 미안해.”
“……….”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다시 왔어.”
“…무슨‥”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줬으면 해.”
“……….”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어.”
“……….”
“내 생각엔 사실일 거라고 생각해.”


 계속해 뜸을 들이는 에렌의 모습에 미카사는 지레짐작했다. 제게 말해서는 안되는 무언가를 에렌은 제게 말하려 하는 것이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가만히에렌의 목소리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가볍게 입술을 뗀 에렌이 말을 이었다. 미카사는 얼굴을 굳혔다.


“너희 아버지, 오늘 밤에 돌아가셔.”
“…뭐?”


 아무리 저를 죽이려 들어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에렌의 말에 기분이 상한 미카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쟨 미친 게 틀림없어. 잠자코 에렌을 쏘아 본 미카사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가지 마.”
“네가 뭔데?”
“……….”
“…네가 뭔데!”
“돌아가면 너도 죽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봤어! 내가, 내가 봤단 말이야!”


 …무엇을? 미카사는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확고한 표정의 에렌의 모습에 미카사는 주저앉아 버렸다. 솟아오른 무릎에 제 얼굴을 파묻은 미카사가 슬프게 울었다. 어째서 눈물이 나는 걸까. 정말 어째서.


“미안해.”
“……….”
“나도 싫어해.”
“……….”
“그렇지만 도와주고 싶었어.”
“……….”
“너는.”


 에렌은 슬픈 표정으로 미카사를 내려보았다. 곧 제가 하고 있던 빨간 머플러를 목에서 푸른 에렌이 고개를 숙인 미카사의 목에 감아주었다. 빨간 머플러가 미카사의 등이 떨릴 때마다 들썩였다.


“이거 너 가져.”
“……….”
“아마 오늘 이후로 못 보겠지.”
“……….”
“미카사, 웃음을 잃지 말아줘.”
“……….”
“그럼, 안녕.”


 그날 밤 미카사의 집 앞에서 배에 칼이 꽂힌 모습의 한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생각났어요. 그분이 해주셨던 웃음을 잃지 말라 달라는 그 말.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게 해주셨던 말씀이었어요. 단순한 우연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냥 신기하더라구요. 제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형사님. 잠자코 미카사의 이야기를 듣던 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렌은 네 아버지가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글쎄요.”
“네 어머니가 했던 말도 알고 있었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알고 계셨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대충 글씨를 휘갈겨 쓴 쟝이 수첩을 접어 제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제 말이 도움이 되셨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카사는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빈소를 찾아뵈야겠어요.”
“그래라.”
“그때 못 해드렸던 말 아직도 궁금해하실지도 모르시니까요.”
“……….”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 형사님.”


 공손히 인사한 미카사는 곧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딸깍. 쟝은 말없이 들고 있던 펜 뚜껑을 딸깍였다.

 

 

***

“영화 같네요.”
“장난이 아니야.”
“그러니까 형사님 말씀은 에렌군에게 특별한 힘이 있었다. 뭐 그런 겁니까?”
“어처구니없겠지만 내 생각은 그래.”
“그게 어제 서도 나오시지 않고 생각하신…”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는 쟝의 모습에 아르민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보기 드문 광경이다.” “빨리 사진 좀 찍어라.” 등 곳곳에서 쟝을 향해 말들이 많았다.


“그런데 정확한 물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문제야.”
“어떻게 보면 다시 원점이네요.”
“……….”
“아 형사님 그 에렌 군 친구라고 전화 왔던 사람,”
“아 그래 어떻게 됐어?”
“내일 오후 세 시까지 역 앞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하시더라구요.”
“오후 세 시…. 알겠어.”


 아르민이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했다. 에렌 예거는 어떤 아이였을까. 정말로 무언의 힘이 존재했던 것이었을까. 아님 미카사 본인은 그를 몰랐지만 에렌은 그녀를 알았었다거나 뭐 그런 거였을까. 수첩 위를 이런저런 글씨로 빼곡히 채웠다. 에렌의 이름을 썼다가 원을 그려 지우기를 반복. 초능력 에렌 궁금 사건 죽음. 두서없는 낱말이 수첩 위를 둥둥 떠다녔다.


“오늘도 많―이 고민하시나 봅니다. 키르슈타인 형사님.”
“…라이너?”
“머리 식히실 겸 약속하셨던 밥이나 사주시지 그럽니까?”
“목적은 그거였지?”
“뭐 아무렴 어때.”


 태연한 라이너의 모습에 쟝이 고개를 저으며 의자 뒤에 걸쳐둔 재킷을 꺼내들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노리고 온 게 분명했다.


“나는 한우로.”
“미쳤구나 네가.”


 휘파람을 불며 먼저 나가는 라이너의 뒤통수에 대고 쟝은 가운뎃손가락을 펼쳐 들었. 여전히 바람은 매서웠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고깃집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곳저곳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왁자지껄한 대화소리. 잔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물론 제 앞에서 수차례 이모님을 찾는 늙은 형사의 목소리도 겹쳐 들려왔다.


“술 마시면 큰일 나는 거 알지? 라이너.”
“에이 한 잔 정도는 괜찮아.”
“빨간 줄 긎게 되기를 스스로 원하는구나 네 녀석이.”


 보란 듯이 제 앞에서 술을 따르는 라이너의 모습에 쟝이 혀를 찼다. 라이너는 그저 신난다는 듯 입안 가득 쌈을 쑤셔 넣은 채로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연신 중얼였다.


“맛있네. 맛있어.”
“그래 실컷 먹어라. 돼지 되도록 먹어봐 어디.”
“이미 돼지다 개새야.”
“잘 아네 뭐.”
“그래서 수사는?”
“몰라 새끼야.”
“왜 또 난리래 혼자.”


 라이너에게 미카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난스러운 행동이 점차 멎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라이너는 말했다. 이상한 얘네.


“네 생각은 어때?”
“아직 초능력이다 뭐다 하는 건 좀 그렇고,”
“……….”
“그냥 미카사란 애 몰래 엄마랑 둘이 아는 사이 아니었을까?”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고기가 잘 넘어가질 않았다.


“미카사의 어머니는 에렌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어.”
“…뭐?”


 먹던 쌈을 내려놓은 라이너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쟝을 쳐다봤다. 쟝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표정으로 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미카사한텐 미안한데 몰래 조사 좀 해봤어.”
“……….”
“그랬더니 이렇네.”


 라이너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고기를 집어먹었다. “지금 심각한 상황이거든?” 쟝이 한심하다는 듯 라이너를 흘겼다.


“그냥 우연일 수도 있잖아. 너 그 애가 한 말 너무 믿는 거 아냐?”
“뭐?”
“솔직히 그 애가 자기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고 말 안 했으면 아무것도 안 믿었을걸? 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너무 분위기에 휩쓸려 갔던 것이었을까. 단순히 우연이 겹쳤던 것뿐이었을까.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더 조사해봐라.”
“……….”
“단정 짓기엔 아직 좀 일러.”
“…그렇네.”


 머릿속이 더 복자해졌다.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앞 길이 막막했다.

 

 

***

“…형사님 오늘 옷이?”
“왜 멋지냐?”
“아니… 그 조사 나가는 것치고 너무 멋있게 입고 오신 것 같아서요.”
“뭐 어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다 왜. 이렇게라도 입어야지 여자들이 다가온다고.”
“아… 네….”


 재잘재잘 떠드는 제가 마냥 귀찮다는 듯 아르민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아르민의 코를 살짝 잡아뜯은 쟝이 재빠르게 뛰어가 커피숍의 문을 열었다. 멀리서 아르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제 쪽으로 뛰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꽤나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에 이상하다…, 분명 여기가 맞는… 아 저긴가봐요!”


 멀리서 저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기껏해야 이십 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바쁘실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마실 것부터 시킬까요?”
“네. 그러죠.”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고 돌아가자 쟝은 그제야 손등으로 턱을 받친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전형적인 형사의 모습에 청년은 약간 긴장한듯해 보였다.


“이름이… 베르톨트 후버 맞습니까?”
“네. 맞아요,”
“나이는?”
“올해 스물한 살입니다.”
“대학생이신 건가요?
“네 그런데 지금은 휴학 중이에요.”
“그렇군요.”


 질문은 쟝이, 기록은 아르민이 했다. 서로는 묵묵히 제 알 일을 했다. 베르톨트는 긴장감에 손 한가득 베이는 땀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이윽고 각자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베르톨트는 음료를 받자마자 몇 모금 마시기 시작했다. 꽤나 긴장한듯했다.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네. …이야기는 제가 초등학교 육 학년 때의 이야기에요.”


 아르민의 손이 더 바쁘게 움직여댔다.

 

 

담임교사가 없는 초등학교 교실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저들이 보는 만화의 캐릭터를 따라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바닥 한편에 앉아 다소곳이 공기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에렌은 혼자서 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에렌은 친구가 없었다. 자신이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다가오는 일도 없었다. 베르톨트는 그런 에렌이 이상했다. 혼자는 외롭지 않을까. 베르톨트는 그런 에렌의 앞에 가 섰다. 책상 가득 그늘이 지는 모습에 에렌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구….”
“뭐? 너 내 이름 몰라?”
“……….”
“같은 반이잖아?”
“……미안해….”


 베르톨트는 인상을 쓰며 에렌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친구에 관심이 없다지만 같은 반 아이의 이름을 모르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자신은 이 인기 없는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괜히 심술이 난 베르톨트는 에렌이 읽고 있던 책을 뺏어들었다. 베르톨트가 자신보다 키가 이십 센티미터는 더 큰 탓에 에렌은 까치발을 들어가며 책을 뺏으려 들었다.


“책이 뭐가 재밌어?”
“책 아냐! 이리 줘!”
“뭐? 이게 책이 아니면 뭔데?”
“어서 돌려줘!”
“싫은데? 메―롱.”
“부탁이야 제발…!”
“야 밀지 마! 야! 야!”


 그렇게 사건은 터졌다. 그만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지고 만 것이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탓에 저절루 눈물이 고였다. 제 앞에 서 어쩔 줄 몰라하는 에렌에 순간 화가 나 들고 있던 책을 찢어버렸다. 에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무슨….”
“날 넘어뜨린 벌이야.”
“…그, 그런…”
“고작 종이 쪼가리잖아! 이것 때문에 내가 넘어졌다고!”


 씩씩대며 화를 내던 베르톨트는 제 눈앞을 지나쳐 떨어진 한 쪽의 페이지로 문득 시선을 돌렸다. 글이 써져있긴 했지만 사진이었다. 분명히 사진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자와 남자 둘이서 찍은 사진이었다. 자세히는 그 가운데에 조그마한 남자아이도 존재했다.


“…책, 아니라고 했잖아….”
“…이건,”
“넘어뜨린 건 미안해. 이건 내가 주워 갈게.”


 남자아이는 에렌이었다. 가운데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에렌의 가족사진이었다. 서둘러 찢어진 사진들을 주워 든 에렌이 남은 앨범 사이에 억지로 집어넣곤 교실을 뛰쳐나갔다.


“야 심했잖아 너.”
“맞아. 가족사진 찢은 거야? 불쌍해.”
“너무하다 너.”


 저를 향해 소곤거리는 아이들 틈에서 베르톨트는 한없이 작아졌다. 결국 제 자리로 돌아간 베르톨트는 그대로 엎드렸다. 여전히 수군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에렌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하루는 지나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에렌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베르톨트는 생각했다. 에렌이 일부러 학교에 나오지 않는 건 아닐까. 저를 더 욕되게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에렌이 괘씸해졌다. 결국 베르톨트는 에렌의 집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돌연 에렌은 모습을 드러냈다. 에렌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베르톨트의 앞에 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여야 할 건 오히려 저 여야 할 텐데 베르톨트는 살짝 인상을 썼다.


“네가 왜 그런 태도야?”
“…미안해.”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무슨 할 얘기?”
“기분 나빠하지 말아줬으면 해.”


 한껏 주눅 들어있는 에렌의 태도에 되려 베르톨트는 답답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내일 절대 그 아이와 놀러 가지 마.”
“그 아이? 설마 애니를 말하는 거야?”
“이름이 애니였구나.”
“네가 걜 어떻게 알아?”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부탁이야 약속을 취소해줘.”
“어째서?”
“그 아이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어.”
“…뭐?”
“…내가 봤어. 그러니까…,”
“너 말이야 이상한 거 알지?”


 황당했다. 느닷없이 제게 이런 말을 해오다니 뻔뻔하지도 않나. 자기가 뭔데 저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베르톨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에렌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더군다나 자신은


“그나저나 너 내가 내일 애니랑 노는 건 어떻게 알았어?”


 에렌에게 내일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아니 에렌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친하지도 않은 심지어 며칠 전에 서로 그런 일이 있었던 에렌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나한텐 보여.”
“뭐?”
“나한텐… 보여.”
“……….”
“내일 넌 그 애의 남자친구에게…”
“시끄러워 말하지 마.”
“……….”
“너한테 사과하려 했던 내가 이상했던 거지. 웃기지도 않네.”


 며칠 전과는 전세가 역전되어있었다. 자신은 당당해지고 에렌은 한껏 주눅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바라던 게 이런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아무 잘 못 없고 잘 못 한 건 저 녀석이다. 애초에 학교에 앨범을 가져왔던 게 잘 못이었다. 그래 난 아무런 잘 못도 없다. 모두 다 저 녀석 탓이다. 저 녀석 때문에.


 그리고 내일, 난 애니의 남자친구에게 많이, 정말 많이 얻어맞았다. 몸 곳곳에 피딱지가 나고 갈비뼈도 부러졌다. 멀리서 절 내려다보며 웃는 애니의 모습이 징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 에렌의 말이. 에렌은 무엇을 보았다는 것이었을까.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몸이 한없이 무거웠다. 누군가가 날 발견해주길 바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뒤 에렌은 전학을 갔다.


“나름 사연이 있네요 둘이?”
“…네.”
“전화로 들었을 땐 그냥 정말 같은 반 정도로 아는 사이인 줄 알았어요.”
“둘이서 별로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이야기 고마웠습니다.”
“…네. 사실 이 이야기를 형사님들께 해야 할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딱히 수사와는 상관 없는 그저 이상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역시 에렌에게는…”
“형사님?”
“에렌에게는 있었어. 제3의 눈이.”
“…네?”
“남들에게는 없는 제3의 눈이 에렌에게는 존재했던 거야. 그는 그 눈으로 사람들의 과거와 미래를 봤어.”
“형사님 아무래도 그건 조금…”


 분명히 있었다. 에렌에게는 제3의 눈이. 쟝은 곧바로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려 예정일보다 앞당겨져 부검 결과가 나왔다. 지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에렌 주위에 있었던 단 한 명의 그 사람. 쟝은 서둘러 서로 향했다.


“저희 사건 부검 결과 나왔나요?”
“그렇긴 한데… 그게…”
“어디 있습니까?”
“여, 여기 있습니다 형사님!”


 쟝의 책상에 놓여있던 결과지를 페트라가 잽싸게 집어 들어 그에게 건넸다. 긴장된 마음으로 천천히 건표지를 넘겼다. 손가락으로 정교히 한 글자 한 글자 훑어내리며 읽어갔다.


“…리바이 아커만……?”
“……….”
“아머캄 형사님 이름이 왜 여기에…?”
“그러니까 내말이 그말이다.”
“…둘이 아는 사이였다는 건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아커만 형사가 형사일을 그만둔 게 이 아이가 죽었을 때랑 시기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보니 맞네.”


 쟝은 허탈함에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지문의 주인은 리바이 아커만. 어째서 그의 지문이 에렌의 볼에? 그에게 에렌의 볼을 잡을만한 어떠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어째서? 도대체 왜? 뒤늦게 도착한 아르민도 결과지를 읽자마자 놀라 빽 소리를 내질렀다.


“전혀 예상하지 못 한 결과네요.”
“…당장 수색해.”
“…형사님?”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답답함에 쟝은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

 어디로 숨어버린 건지 리바이 아커만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벌써 그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다. 건진 정보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쟝은 애써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역시 전직 형사시네요.”
“……….”
“마치 우리가 어디로 갈지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우리 그를 쫓는다는 것도 알까?”
“…글쎄요.”


 초조함에 다리를 떨었다. 그가 가볼 만한 곳은 전부 다 가봤다. 모텔 에렌의 집 그의 집 그의 집 앞 슈퍼 편의점 등 전부 다 찾아갔다. CCTV도 돌려보고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부 물어봤다. 하지만 건진 건 전혀 없었다. 마치 에렌의 사건을 처음 맡았을 때와 같았다. 둘은 도대체 무슨 사이였을까.


“혀, 형사님!”
“무슨 일이야.”
“그…, 그분한테서 전화가…!”
“그분?”
“아, 아커만 형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뭐?”


 쟝을 제외한 다른 형사들도 하나같이 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긴장되는 마음에 침을 삼키고 조용히 수화기 앞으로 걸어갔다. 동경의 대상이자 이제는 제가 쫓는 사람. 쟝은 눈을 감았다.


―여보세요.
―…오랜만이군. …다들.
―……….
―아 너는 날 모를지도 모르겠군.
―아니요. 잘 압니다.
―…뭐 그럴지도. 오늘 밤 여덟시에 서로 가겠어. 나 때문에 다들 수고를 하는 것 같아서.
―…당신 때문이라뇨?
―후회하고 있어. 내 선택에 대해서.


 쟝은 몸이 굳는 걸 느꼈다.


―자세한 이야기는 서에서 하지.


 순식간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쟝의 옆으로 형사들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야?” “아커만이 뭐래?” “이번 사건이랑 관계가 있대?” 형사들의 등쌀에 못 이겨 짜증이 난 아르민이 대뜸 파리채를 들고 휘저었다. “아 좀…!” 아르민의 행동에 그제야 형사들은 한 발자국씩 물러서 쟝을 쳐다보았다.


“조금 있다가 서로 오겠대요.”
“뭐? 그가?”
“네.”
“또? 또? 다른 말은 없었어?”
“후회하고 있대요.”


 서 안이 술렁거림으로 가득 찼다. 쟝은 머리가 아파옴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 가 앉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저번에 찾아오려던 악재는 이거였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아커만 형사가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깝게. 당장 짐작은 갔다. 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사님 괜찮으세요?”
“응. 그럭저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대략 두 시간 남짓 남았다. 그때까지 잠이라도 자야겠어. 쟝은 책상 위로 엎드려 눈을 감았다. 사실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랐다. 갑작스레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다. 하지만 정작 풀린 것은 없었다. 속 안이 답답했다.


 시간은 언젠간 찾아온다. 그렇게 기다려도 거부해도 시간은 찾아온다. 리바이와 대면한 쟝은 묵묵히 고개를 떨궜다. 팔짱을 낀 그의 태도가 너무 대담해 오히려 쟝은 기가 죽었다.


“물어보지 않을 건가?”
“……….”
“내가 아직 형사였다면 너는 내게 아주 많이 혼났을 것 같군.”
“……….”
“내가 먼저 말하지.”
“……….”
“그 아인 내가 죽였다.”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귓가를 강타했다. 쟝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내게도 이유가 있었다.”
“무슨 이유죠?”
“그 아이가 내게 죽여달라고 부탁을 했거든.”
“…뭐라고요?”
“당연히 나도 처음엔 거절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하지만 지켜보니 그 아이는 살아 있는 게 이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더군. 그래서 난 그 아이의 부탁을 들어줬어. 그리고 보았듯이 형사일을 관뒀지. 사람을 죽였는데 어떻게 보란 듯이 태연하게 형사일을 할 수 있겠나?”
“당신이 바라본 에렌의 삶은 어떠했나요.”
“…에렌의 삶?”
“……….”
“불행했지.”
“……….”
“사이코메트리라는 걸 아나?”
“……….”
“네 녀석은 미래를 예지한다는 걸 믿어?”
“……….”
“그 아인 그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었어. 여느 사람들이 보면 신기해하고 대단해 보이는 그런 것들. 하지만 에렌은 두려워했자.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힘은 강해졌으니까. 몸에 스치기만 해도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가 보여. 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겠나?”
“……….”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 얼마나 무서운지.”
“…그래도 죽음은,”
“아니.”
“……….”
“에렌을 죽기를 바랐어. 희망이었다고. 그 아이에게는 죽음이.”
“……….”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품어. 에렌에게는 죽음이 희망이었던 거야. 난 단지 그 아이의 희망을 실현시켜 준 것뿐이였어. 그 아이도 원했고 결국은 행복한 결말을 얻었지.”
“에렌과는 얼마큼 가까웠죠?”
“에렌과 나는 사귀는 사이였어.”
“…네?”
“결국 난 내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목을 쥐어 죽인 거나 다름없는 거지. 잔인하지 않나?”
“……….”
“하지만 지금은 후회가 들기도 해.”
“그렇다면 애초부터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셨으면 됐잖습니까!”


 쟝은 울부짖었다. 리바이는 그런 쟝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과 에렌에게 후회가 들지 않을 선택이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해서든 후회는 남을 것이었다. 그럴 바엔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 낫지 않은가. 리바이는 작게 웃었다.


“언젠간 밝혀질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저희들은 아커만 씨를 찾아내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자수를 하신 거죠?”
“그냥, 그냥 에렌에게 미안해서.”
“……….”
“에렌이 보고 싶더군. 이 년이나 지났어도.”
“……….”
“그러니까 한 번만 보여주지 않겠나? 에렌의 모습을.”
“이미 죽어버린 시신일 뿐입니다.”
“괜찮아. 그냥 한 번만이라도 보여줘. 부탁이야.”


 마치 꼬여버린 실타래 같았다. 쟝은 답답함에 제 주먹을 세게 쥐었다 풀었다.


“널 보니까 에렌이 생각나는군.”


 녀석도 너와 비슷한 성격이었는데 말이야. 리바이는 고개를 숙인채 웃었다.

 

 

2부에서.

 

 

 


1부 FIN.


커플은 리바엘런인데... 둘 연애씬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1부...^6...
사실 1부 2부 나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제 분리...☆
다음 합작 때 아마 2부를 내놓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제에 후회가 없으면... 어딘가에 내놓지 않을까요...?
약 30kb나 되는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럼 2부에서 봬요!
참 이 글은 미야베 미유키님의 낙원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중후반 즈음에 나오는 제3의 눈 대사는 낙원에서 일부 따온 대사입니다.

 

 

 

[쿠로바스/목꽃]그 세상 속에 네가 있기에


※캐붕주의.

 

 

"안들리네."

 

 

 

 

하나미야가 자신의 귀를 잡고 말했다. 이젠 내가 말하는 것도 안들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들렸었다.

아침에 평범하게 눈을 뜨고, 평범하게 세수하고, 평범하게 아침식사를 하며 평범하게 TV를 틀었지만 그에게 들려오는 것은 침묵 뿐이었다. '아-'하고 크게 소리도 질러 보았지만 고요함 뿐이었다. 요 몇달간 그이 청각은 급격히 나빠졌다. 뒤늦게 이상을 느껴 병원에 갔을 땐 의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젠 아예 안들리는건가…?"

 

 

 

 

 

TV의 음량 소리를 높이면서 그가 말했다. 물론 그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화야 한참 전부터 배워놔서 괜찮다. 입모양도 읽을 수 있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그는 스스로를 다독여 보았지만,

 

 

 

 


"괜찮을리가 없잖아…."

 

 

 

 

결국 그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소란스러워 보이는 TV의 전원을 끈 그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들처메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귀 밖으로 흘러나오는 비트의 소리가 꽤 컸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고요함 뿐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등교길은 그의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재잘재잘 떠드는 초등학생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차도를 지나다니는 오토바이의 시끄러운 모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반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우당탕탕 뛰어다녔지만 들리지 않는다. '소리'가.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나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나만.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그는 책상위에 엎어져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

 

 

 

 


"도대체 여기에 왜 온거지…."

 

 

 

 

하나미야가 체육관 문앞에서 중얼거렸다. 그가 농구를 그만둔건 이미 오래전 얘기다. 그 나름대로 고집은 부려보았지만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바로 그만두었다. 팀에 해를 끼치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었다. 부원들, 특히 세토나 야마자키가 말렸으나 그래도 그는 농구를 그만 두었다. 그 뒤로 하나미야에게 화가 났는지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나미야도 알고있었다. 자신이 너무 무책임했다는것을.


그래도 민폐보단 낫잖아.

 

 

 

 

"…구경이나 해볼까."

 

 

 

 

들리지도 않는 혼잣말을 하며 그는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체육관의 안에서는 경기가 한창이었다. 유니폼을 보니 상대팀은 세이린 고등학교였다.

 

세이린이라면…

 

 

 

 

"여기서 뭐해?"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손에 놀란 하나미야가 흠칫하고 놀랐다. 젼혀 기척을 못느꼈다. 상대방에게 위화감을 느끼며 뒤를 돌았을 땐, 키요시가 서있었다.

 

 

 

 

"아? 너였어?"


"경기하는데 하나미야가 안보여서 어디 아픈가 했더니 건강하네? 오랜만이야, 하나미야."


"…어, 다시 만나서 죽도록 기쁘네."


"근데 왜 경기 안 뛰어?"


"…네가 신경 쓸 바 아니잖아?"


"너 어디 아파?"

 

 

 


입모양을 읽느라 대답이 한박자씩 느려졌다. 게다가 발음도 조금씩 뭉개지고 있었다. 아무리 키요시라도 눈치를 못챌리가 없었다. 하나미야는 한시라도 빨리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그에게 대충 대답한 뒤 체육관을 빠져나와 교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내 귀가 안들린다는 것을 알았나? 들켰어? 설마.

 

머리속에는 오직 이 생각 밖에 없었다. 하나미야는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등교길과는 다르게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전봇대는 금방이라고 자신을 덮치면서 무너질 것 같았고, 차도를 지나다니는 오토바이나 자동차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달려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온 도시가 자신을 집어 삼키는 그런 기분.


달리듯이 집에 돌아온 하나미야는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키요시에게서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경이 쓰여 확인하기로 했다.

 

 

 

 

-농구 관뒀어?

 

 

 


그냥 무시할걸 그랬나. 괜히 확인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핸드폰을 대충 아무곳에다 던져놓고 그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농구하고싶다.

처음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농구하고 싶었던적은 손에 꼽도록 없었다. 물론 평소에 열심히 연습을 하긴 하지만 먼저 하고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고보니 키요시, 농구 계속 하고있네. 무릎이 어쩌네, 농구를 못하네 할 때는 또 언제고. 생각해보니 그 무릎 내가 망가 뜨렸었구나. 내가, 그 녀석의 농구를 망쳤구나.


하나미야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나 아니었으면 키요시도 즐겁게 아무생각 없이 농구를 하고있었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죄책감이었다. 하나미야에게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짜증나."

 

 

 

 


하나미야가 얼굴을 묻고있던 베개를 벽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핸드폰을 다시 주워왔다. 화면을 켜보니 키요시에게서 문자가 하나 더 와있었다.

 

 

 

 


- 내일 만날 수 있어?

 

 

 

 

 

짜증나게 뭘 또 만나자는거야.


자판위에서 움직일까, 말까 하던 그의 손가락이 몇개의 자판을 꾹꾹 누르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지려고 했지만 잠깐 멈춘 그가 핸드폰을 바로 잡고 문자 한통을 더 보냈다.

 

 

 

 


- 내일 만날 수 있어?


- 몰라
- 키요시, 다리 미안해

 


베개를 다시 주워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짜증나….

 

 

 


-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만날 장소, 시간에 대한 문자가 와있었다. 그리고 부재중 전화 몇통도. 전화 해봤자 대답도 못하는데. 라고 생각하며 하나미야는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이어폰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키요시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미야를 보자마자 그는 크게 양팔을 흔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큰 덩치 덕분에 주변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입모양을 벙끗 거리리는걸 보니 내 이름도 같이 부르고 있겠지…."


"하나미야-! 여기야! 여기!"

 

 

 

 


하나미야가 재빠르게 다가가서 손으로 키요시의 입을 막았다.

 

 

 

 

"시끄러워."


"아, 미안."

 

 

사실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뭐,뭐라도 먹으면서 얘기할까?"


"…그냥 여기서 해."


"크흠,어… 농구 왜 그만둔거야?"


"…질렸어."


"응…? 그럴리가 없잖아. 무슨 일 있어?"


"…뭐라는거야. 그보다 왜 불렀는데? 고작 그거 물어보려고?"


"진짜 무슨 일 있는거야? 어제 사과도 그렇고…."

 
"아? 사과? 아아, 마음에 안들었나봐? 땅에 머리라도 박아줘?"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사과로 부족하면 내 다리라도 망가뜨릴까?"


"그런게 아니라… "


"뭐 어떻게 하면 네가 내 앞에서 얌전하게 사라질건데?"


"……원온원이라도 할래?"

 

 

 


입모양을 읽을 수 없었다. 무슨 원? 잘못읽은거겠지.

 

 

 

 

"원온원. 네가 이기면 사라질게. 근데 내가 이기면 넌 농구를 다시 시작하는거야."


"뭐라는거야. 원온원은 무슨"


"지금 당장해도 괜찮지?"


"…내가 이기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마."


"알았어."

 

 

 

결국 하게되었다, 원온원. 어떡하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내가 키요시를 이길수있다는 자신이.질게 분명해. 그럼 그땐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하나미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길거리 코트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느새 키요시는 어디서 났는지 공을 들고 몸을 풀고있었다. 벌써 해는 떨어졌고 코트에는 전등이 비추고있는 빛이 전부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시작되었다. '간다'라고 말하면서 키요시는 공을 가볍게 튀기고 있었다.

 

 

 


"뭐야, 생각보다 제대로 하고있네?"


"……."

 

 


키요시가 방심하는 순간 하나미야가 공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대로 슈팅. 하나미야가 날린 공은 링을 맞고 밖으로 튕겨 나갔다. 하나미야는 공이 튕겨간 쪽으로 달려가서 찾아으려 했지만 공이 굴러가는 소리를 듣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공을 찾고있는 그를 보았는지 키요시도 주변에서 같이 찾기 시작했다.

 

 

 

"하나미야! 공 찾았어!"


"……."


"하나미야? 공 찾았다니까?"


"……."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하나미야에 이상함을 느낀 키요시가 하나미야의 등뒤에섰다.

 

 

"하나미야?"


"……."


"저기 하나미야, 내 말 무시하는거야?"


"……."

 

 


키요시가 하나미야의 등을 한번 툭 쳤다. 하나미야는 화들짝 놀라며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키요시를 쳐다보았다. 키요시의 손에는 농구공이 들려있었다.

 

 

"내가 아까부터 하나미야 불렀었는데. 못들은거야?"


"…모,못들을수도 있는거지."


"발음도 어눌해서 입이 아픈가 했는데, 어디 안좋아?"


"……. 몰라,몰라. 도저히 안읽혀."


"어…?"

 


하나미야는 키요시를 향해 해맑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말하는 거지만 말이야, 나 귀가 안들려."


"…응?"


"전혀, 아무것도. 만약 옆에서 건물이 하나 폭발한다고 해도 안들릴걸?"

 

 


벙쪄있는 키요시에게 다가가 공을 뺏은 하나미야가 공을 골대에 던졌다. 이번엔 빗나가지 않고 골대에 정확히 들어갔다.

 

 


"이걸로 내가 이겼네?"


"……."


"왜? 안믿겨져? 금방이라도 내가 그럴리가 없잖아, 바보. 이러면서 거짓말이라고 할 거 같아?"


"…병원은 가봤어?"


"어이야,어이야. 오지랖 발동 하셨나봐? 속으론 꼬시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니야."


"아이고 꼬시다. 저 놈 언제 망하나 기다리고있었어. 결국 자기 혼자 자폭하네. 남의 인생 망쳐놓고 잘 살줄 알았냐? 라고 생각하는거 다 보여."


"아니야,아니라고."


"왜? 내말이 틀려? 맞잖아. 저 자식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

 

 

 

 

마찰음과 함께 하나미야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하나미야가 한손으로 자신의 왼쪽뺨을 감쌌다.

 

 

"……. 그래, 차라리 때리는 편이 낫겠다."


"하나미야. 내 입모양 잘봐."

 

 


키요시가 하나미야의 얼굴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움직여 말하기 시작했다.

 

 

"원망은 했지만 한번도 그런 생각은 한적 없어. 때린건 미안해. 좀 더 자신을 아꼈으면 좋겠다 싶어서."


"……."


"귀가 안들리는게 뭐가 어때서. 하고싶으면 하는거지, 안그래?"


"…미안해, 미안해."


"하나미야가 사과도 하고 별 일이네."


"다리… 망가뜨려서 미안해. 얼마전부터 계속 생각했어. 그 때 내가 왜그랬지, 하고. 사과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런거 해본적이 없으니까…"


"혹시 지금 우는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멍청아."

 


그리고 하나미야는 키요시에게 어눌한 발음으로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후회하고있었다. 자신이 해왔었던 플레이를, 특히 키요시에게 했던 행동들을.

 

 

"아-. 원온원도 졌겠다, 집에나 갈까. 같이 갈래?"
 

"…뭐라는거야. 또박또박 말해."


"흠, 안들린다고 했지? 그럼 이거도 안들릴려나. 하나미야 바보."


"…입모양은 읽을수 있거든, 멍청아?"


"수화를 배워야하나…."


"…수화는 무슨 수화. 졌으니까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에에?! 그거 그냥 해본 소리 아니었어?"

 

 


꺼져,꺼져. 하나미야가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키요시한테 엿을 날렸다.

 

 


"하하. 농담 아니고, 농구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연락해. 수화 제대로 배워놓을테니까."


"몰라,몰라. 안들린다, 안들려-"


"진짜라니까?"


"예이-예이."

 

 

거리를 걸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입모양을 읽는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고요한 거리 속에서 혼자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옆에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은 확실하니 나름 괜찮았다. 지금 이대로라면 침묵의 세상도 나름 괜찮을것 같아.


그 세상속엔 네가 있을테니.

 

 

[신세계에서/사토슌]어떤 날의 외로움과 후회

*오타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글의 내용은 중간쯤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커플링성향이 그렇게 짙은 내용은 아닙니다.
*스바루=슌의 강아지

 

 

어떤 날의 외로움과 후회

이곳에서의 생활 중 종종 너와 헤어지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이런 마음의 병을 갖게 되지 않았다면 너와 나는 아직까지도 둘이 행복했겠지, 그랬다면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라 너와 함께 하교를 하고 있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너와 헤어진 것도 이렇게 보지 못하는 것도 모든게 내 탓이었다. 내 마음의 병 탓이었다. 너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저 나 하나만 고독해지면, 나 하나만 슬퍼지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를 밀어냈다. 그렇게나 나를 사랑해주는 너를 밀어냈다. 중간중간 느껴지는 네 눈빛이 너무나 애절해서, 너무나 슬퍼서, 그 슬픔을 위로해줄 누군가는 빨리 만나길 속으로 조용히 빌었다. 내심 나를 계속 사랑해주길 원하지만, 그건 너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걸 바라고 있는 내게 욕심쟁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저 지금은 네게 사랑받고 싶었다. 내 고독함을, 내 외로움을 네가 달래주길 바라고 있다. 붉게 빛나는 아름다운 네 눈이 보고싶어졌다. 나만을 봐주는 그 사랑스러운 눈빛을 더는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펐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도 결국엔 불가능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을 하면 됐지만 속으로는 썩어갔다. 네가 새로 사귄 그 아이가 질투스러웠다. 내 마음의 병만 아니었어도 너는 나만을 보고 있었으리라 믿고 있는 나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그런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갑자기 내 자신이 바보같아보였다. 널 상처준 날부터 항상 후회해왔다. 너무 심하게 말을 했나,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동안 네 얼굴을 어떻게 보나 항상 고민했었다. 너는 그렇게까지 차갑게 밀어낸 나를 여전히 미련이 있는 듯이 나를 바라봤었고, 나는 애써 외면했었다. 우연히 봤던 그 눈이 떠나온 지금마저도 계속 떠올라서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엄청, 상처였겠지...라고 작게 혼자 중얼거리고는 두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에 닿는 따스한 감각에 살며시 고개를 들어 내게는 마지막남은 가족인, 하지만 그마저도 이전과는 많이 변해버린 스바루의 머리를 옅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스바루의 머리에 손이 닿자 전해지는 온기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춥지는 않았지만 외로웠다. 다른 이들의 온기가 그리웠다. 스바루가 없었다면 나는 정말로 외톨이였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힘을 억누르지 못해 마을을 온통 흉측한 모습으로 만들고 소중한 가족도 잃고 유일하게 주변에 남은 것이 어릴적부터 함께해온 스바루였다. 고마웠다.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마워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스바루는 내게 소중한 존재였고 동시에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남들의 눈에는 어떨지 몰라도 내 눈에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내 가족이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폭주로 인해 이런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모든게 변했다. 마을도, 스바루도, 내 주변도 모든 것이 변했다. 미안함과 외로움 그리고 괴로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내 다리 근처에서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스바루를 들어올려 가시에 찔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 후 수차례 미안하다고 말했다. 알아들은 것일까 눈물이 흘러내리는 내 볼을 혀로 핥아주는 스바루를 보다가 무의식적으로 내 눈물을 닦아줄 너를 떠올리고는 이와중에도 널 떠올리는 나에게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보낸 후 마지막으로 나지막하게 사랑한다고 안녕이라고 한 뒤 네 이름을 읊조렸다.

 

 

[사이코패스/신야아카]모스부호

 


" 하...."

 


텅 빈 집무실에 아카네가 홀로 화면 앞을 주시하고있다. 아직, 현재 조사중인 사건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않아서 며칠 째 밤샘작업을 이어오고 있었다. 물론 힘들었으나 이제는 익숙했고 언제나 각오해오던 일이였기에 괜찮았다. 그런 그녀가 한숨을 내쉰 이유, 그것은 바로 답답함이였다.
드디어 그녀에게도 올 것이 왔다. 바로 시빌라시스템의 주선 시스템. 자신의 성격과 적성, 환경에 맞는 남자를 시빌라가 추천해주는 것. 이 추천알림이 계속해서 울려대 확인도 하지않고 꺼버리기만 수십번. 물론 어디까지나 추천에 불과해 거절도 가능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상대가 별로 인것도, 결혼하기 싫어서도 아닌 자신이 언제 이렇게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가. 이것이다.


아카네가 그녀의 공안국 감시관 인생을 심플하게 정리하자면 이와 같다. 마키시마 쇼고 3년 + 카무이 키리토 1년 반 + 시안에 다녀온지 2년 후. 고작 약 6년 정도만에 자신은 신입에서 베테랑이. 그리고 결혼할 때가 되었다. 정말 너무해도 이렇게 너무할 수가 없다. 그렇게 고민할 때, 스크린도어가 스륵 열리는 소리가 났다.

 

 


" 아, 역시 여기에 있을 줄 알았어. 실례. "

 

 


기노자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노크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아카네는 밤늦게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기노자를 쳐다보았다.

 

 

 

" 오히려 그런 얼굴은 내가 지어야하지않아, 감시관? 지금이 몇신데 아직도 그 일을 하는거야... "

" 아니요, 이상한건 기노자씨예요. 집행관이 이 시간에 돌아다녀도 되는건가요? 저, 책임문제 생긴다구요. "

" 그게 아니야, 또 뭔가에 고민하느라 알림도 못들은 모양이네"

" 무슨.. "

" 우리도 그렇고 2계와 3계까지 다 소집명령이 내렸어. 지금 우리는 대기. 감시관들은 국장실로."

 

 


무슨 일이면 이렇게 늦은 밤에 퇴근한 감시관과 집행관들을 모이라고 한걸까. 망할 국장, 또 무언가 일을 꾸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왔다. 또 사람의 목숨을 간사히 여기는 일은 아닐까, 심란하고 걱정되었다. 집무실 밖에서 시모츠키 감시관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상당히 피곤하고 언짢은 표정이다. 그야 그렇지, 지금은 새벽 2시니까.
나와 시모츠키. 그리고 2계와 3계 감시관들 총 6명이 국장실 앞에 모였다. 다들 얼굴에 피곤함과 긴장감이 감도는 묘한 표정이다. 솔직히 아카네는 지금 이것이 사건이라면, 공안국 입사 이래 가장 최악의 사건일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물론 자신 뿐만아니라 이곳의 감시관들 모두가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 이렇게 늦은 시간 불러내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당장 결정하고 계획해야 할 일이 있어 자네들을 소집하게 되었다. "

" 국장님, 중요한 일인가요? "

 

 


2계의 신입으로 보이는 감시관이 손을 살짝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국장은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그 감시관을 주시하다 손에 들린 큐브로 시선을 옮겼다.

 

 

 

" 중대하다고도 할 수 있지. 자칫하면 중요한 인재를 잃을 수도 있으니까. "

" 네...?"

" 인적손실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말씀이신가요 국장님? "

 

 


당황하는 감시관들 사이에서 아카네는 침착하게 대응해 받아쳤다. 국장은 그런 아카네를 보며 찬 웃음을 지어낸다. 아, 저 인간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구나. 아, 인간아니지. 골치아픈 일은 더 이상 하기 싫은데.

 

 


" 2년전 시안(SEAUn:동남아시아연합)에 시빌라시스템 일부가 도입된 것을 다들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네."

 

 

시안? 아카네는 입에서 헛도는 말과 어이없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2년전 시안 때의 일은 아카네에게 성장을 촉진시켜준 사건이지만. 그 후의 성장통이 너무나도 컸다. 그래, 툭까놓고 후유증이다. 일단 자신이 죽을뻔했고, 전쟁의 참혹함, 그리고 또 다시 사라진 그 사람 때문이다.
그 사람.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코우가미 신야. 아직도 시안에.... 아, 설마 또 그 사람의 일인것인가? 아카네는 이어질 국장의 말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 비록 문제가있었지만 그 쪽의 지도자였던 츄안 한이 재당선으로 다시 지도자에 올라온지도 거의 2년째. 지금 시안은 많이 안정된 상태이고 다시 한 번 시빌라의 도입을 원하고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지. 보내고있는 정보용 서류만으로는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어."

" ........ "

" 그래서 일부 감시관들의 파견이 필요하다. 물론, 파견되는 감시관은 자신이 맡고있는 집행관도 동행해야하지."

" ........ "

" 비록 안정되었다고는하나 일부에서는 내전중. 생명의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내가 함부로 결정하기에는 문제가있어 자네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지금 모인 총 세 계중 한 계가 시안으로 간다. "

" 하, 하지만 국장님. 그러면 일본에서 남은 두 계의 활동에 지장이... "

" 지금 지원자와 신입들을 더 모집중이니 그것에 대한 걱정은 말게"

 

 


그것을 끝으로 국장실을 나온 여섯은 대회의실에서 집행관들과 함께 '어느 팀이 시안으로 갈 것인가'에 대한 토론을 진행중이였다. 아카네와 기노자가 포함된 1계는 솔직히 이제 시안은 별로 마주하고싶지않았다. 코우가미 신야의 옛 동료이기도하고. 2년전 시안에서 그를 만난 아카네와 기노자의 씁쓸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아카네 또한 더 이상 시빌라의 손바닥안에서 굴려지는 것은 싫었다. 츄안 한은 공안국이 심은 인형같은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 더는 그런 연극에서 놀아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카네팀은 전적으로 시안으로의 출장을 거부하였고, 결국 다음날 3계가 시안으로 가는 전용기를 탔다.


3계가 떠난 이후로 그들의 임무까지 떠맡느라 아카네는 더욱 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 굉장히 이상하다. 자신이, 바로 여기에있는데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할 일, 해야만 할 일, 서둘러야 할 일이, 많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사실 그녀는 스스로 자각했다. 자신은 시안에 가 있는 것 같다고. 2년전 그때처럼 그를 찾아다니고 그와 대화한 그 곳으로, 가야할 것 같다고.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동료애, 존경심, 아니 설령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그를, 코우가미 신야를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래 단지 그 뿐이다.

 


*

 


" 시온씨 부르셨어요?"

" 아, 아카네. 어서와. 다름이 아니고, 이상한게 있어서- 아카네라면 알지 않을까 싶어서"

 


시온씨는 스크린화면을 바꾸었다. 아카네는 저곳이 시안이라는 것을, 그녀가 묵었던 숙소의 건물도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저것을, 왜. 보여주시는거지?

 


" 아카네, 혹시 그 때 내가 줬던 공벌레, 기억해? "

" 아, 네. 그 네트워크 연결이 안되는 곳에서 전파연결해주는 것......아, ...?  저 그거, 시안에 두고왔네요"

" 그래, 무려 2년 동안 그 건물에 붙어있는 모양이야 "

" 죄송해요, 그땐 정신이 없어서 수거하는 것을 깜빡했어요 "

" 아니야, 그것보다 아카네. 그 공벌레에서 최근에 몇번씩 신호가 왔거든. 누가 일부러 전원을 껏다켯다를 반복했어. 여기 파일열면 있을거야. 난 잠시 화장실 좀."

 

 

신호? 그 공벌레를 찾아서 일부러 신호를 보냈다고? 뭐지. 시안에 있는 3계에 연락을 해볼까. 아카네는 시온이 알려준 파일을 열어보았다. 정말로 전원의 껏다켜짐의 반복이 기록되어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그녀는 그 이상함을 금방 알아차렸다.

 

 

" 정말. 바보같은 사람...."

 

 

일전에 배운적이 있다. 반복적인 신호 중에 하나로 모스부호라는 것을 과거의 사람들이 썼었고 그것을 지금도 암호용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고. 그리고 그녀는 그것의 원리를 배웠다. 그때, 그 사람에게.

그래. 지금은 곁에 없는 그 사람. 코우가미 신야.

 

 

「 보고싶다. 감시관. 」

 

제 3회 익명만애 글합작 | 인스티즈

 

 

아카네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뭔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고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진못하였고, 그냥 자신의 눈이 어서 뿌옇게 흐려지기만을 바랬다. 심장에 독이 고인 기분이다. 그냥 피하지말고 갈걸. 당신이 있는 그 시안으로 지금, 가야할 것만 같다. 왜 저는 당신을 매일 놓치는거죠. 왜 그런 기회를 매번 놓치는 건가요.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가요 당신이란 사람은.
그리고 그 때도 말했잖아요 코우가미씨,

 


" 이제, 당신 감시관아니라고, 몇번을 말해요...."

 


난 또 이렇게 혼자 울어야하잖아요.

 

 

 


 

[겁쟁이페달/신아라/토도마키]바보의 애정


"야스토모?"

 서른 둘을 맞이한 여름, 신카이 하야토와 아라키타 야스토모는 재회했다.


신카이 하야토X아라키타 야스토모 + 토도 진파치X마키시마 유스케
[겁쟁이페달/신아라+토도마키] 후회


 하늘이 푸르렀다. '이런 날에는 비앙키를 타야하는데.' 아라키타는 뻐근한 목을 가볍게 풀곤 기지개를 폈다. 칠판 위의 필기는 페이지를 놓친지 오래였다. 대학 입시를 생각하면 이렇게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는일이었으나 아라키타는 오늘따라 수업에 집중 할 수 없었다. 적당하게 졸린 톤으로 일본사를 수업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고요한 교실을 가득 메워찼다. 아라키타는 입을 가리며 쩌억 하품을 하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수업이 끝나려면 이십분이나 더 기다려야했다. 아라키타는 하품으로 가볍게 올라온 물기를 손가락으로 훔쳐내고는 시선을 내렸다.

"… 돼지새끼, 잘도 쳐자네."

 아라키타의 시선에 담긴 것은 잔잔한 바람이 부는 창가 자리에 엎드려 잠에 들은 신카이였다. 따사로운 밝은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음에도 그러든 말든 토끼 베개를 베고 곤히 잠에 든 신카이의 얼굴은 아라키타의 자리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듯한 신카이는 베게에 맞닿은 볼살이 살짝 눌린채였다. '볼살….' 자신도 모르게 어느순간부터 신카이의 자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아라키타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주변에 앉은 녀석들이 모두 졸고있어서 다행이네, 엄청 쪽팔리잖아 젠장.' 푹-,하고 한숨을 내뱉은 아라키타가 마른 세수를 했다. '나도 잠이 부족한가보군.' 가볍게 고개를 한번 도리질치며 책상으로 엎드리는 아라키타의 양쪽 귀 끝이 조금 발갰다.


*****


 아라키타 야스토모는 신카이 하야토를 좋아했다. 우정의 의미가 아닌 사랑의 뜻으로. 당연한 말일테지만 아라키타가 처음부터 신카이에게 이런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라키타가 처음 본 신카이는 단순히 후쿠토미의 친구였을 뿐이었다. 그때의 아라키타는 후쿠토미만을 보고있었다. 제게 로드라는 길을 만들어준, 은인같은 그만을. 아라키타가 신카이의 본질은 안 것은 훨씬 뒤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조금 느리게 친구가 되었다. 일학년의 아라키타가 막 양아치를 그만두고 처음으로 로드를 배우는 입장이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남들보다 세배가량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을 해야했던 아라키타에게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후쿠토미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달렸다. 하지만 그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의 실력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아라키타는 주변을 볼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아라키타는 신카이와 만났다.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친구라는 관계를 맺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아라키타에게 신카이는 무거운 의미가 아니었다. 정말로 친구였다. 
 
 어디서부터 되돌려야할지 모르게 된 것은 아라키타와 신카이가 삼학년이 되고나서였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 어느순간 되짚어보니 아라키타는 이미 신카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이유를 찾는 것은 부질없었다. 정말 어쩌다보니 이미 좋아하고 있었기에 아라키타는 꽤나 떨떠름한 심정으로 제 진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쉽게 인정했다고해서 쉽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과 연계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라키타에게는 친한 동성의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게 이 간지러움을 제대로 고백할 수 있을만한 용기도, 말재주도 없었다. 또한 그는 제 자신이 결국 상처만 줄 것임을 알기에 짝사랑으로 남는 것에 만족하기로했다. 그는 제 주제를 잘 알고있었다.

 신카이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가 많았다. 사이클부에서 팬클럽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중에 한명이기도 했고, 직선의 귀신이라는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나 다정한 성격이라던지로 여자애들에게 알게모르게 환심을 사곤했다. 물론 신카이 스스로는 그닥 팬클럽이나 연애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가 맘만 먹으면 -조금의 과장을 보태서- 일주일마다 여자친구를 갈아엎는데도 이상할 것 없는 인기남이라는 사실만은 여전했다. 사이클부에서 신카이와 함께 팬클럽을 가지고 있는 토도 역시도 신카이의 외모만큼은 인정하고 경계할 정도였다. 여자애들사이에서 토도가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왕자님이라 불리었고, 신카이는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이라 불렸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탄탄한 몸매, 그리고 두툼한 입술. 특히 입술에 관해서는 꽤나 오글거리는 수식어도 붙어있었다. '키스를 부르는 입술'이라며, 신카이에게 마음을 품은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종종 그렇게  노골적으로 언급되고는 했다. 

"야스토모, 누가 그러던데 난 입술이 매력적이래."
"… 그 소세지 두개 붙어있는게?"
"너무해 야스토모…."
"어,어이. 뭘 또 그렇게 슬퍼하는건데-… 아씨, 그래 매력적이라고 해줄게."

 그렇게 오글거리는 수식어가 붙은 것에 비해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입술에 무심했다. 정말로 소세지 두개가 붙어있는 거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저 입술에 바라는 것이 키스같이 무거운 의미가 아닌, 자신의 마음을 알아버려 더럽다고하지 않는 단순한 그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아라키타는 쓴 감정을 삼켜내며 입술을 축였다. 그리곤 평소처럼 상처받았다며 우는 척을 하는 신카이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헛웃음을 쳤다.

"멍청아, 네 입술 매력적이라고 해준댔잖냐. 돼지 새끼 입술은 졸라 매력적이다! 됐지?"
"응. 고마워, 야스토모."
"… 멍청하긴."

 언제 우는 척을 했냐는 듯 또다시 능청떠는 신카이의 모습을 보며 아라키타는 말을 참았다. 조금 빨라진 심장박동은 곧 돌아올터였다. 자신의 마음이 들켜버리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전혀 몰라주는 것도 역시 조금은 마음 아팠다. 아라키타는 자판기에서 벱시나 뽑아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카이는 딱히 제 몫을 부탁하려고도, 따라가려고도 하지않았다. 아라키타는 조용히 복도를 걸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눈가가 건조했다. 지독하게 체한 기분이었다. '좋아하지만, 좋아하지마.' 아라키타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


띵-♪
 제 기숙사 방에서 공부를 하고있던 아라키타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문자였다. [ 어중간한 마음이라면 그만두는게 네게 좋을거야. -머리띠새끼- ] 토도에게서 온 문자는 기어코 아라키타를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게했다. 의미심장한 내용에 아라키타가 작게 욕을 중얼였다. 마음이 초조했다.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아라키타는 토도의 기숙사 방으로 향했다. 후줄근한 추리링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체였다. 아라키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예상했다는 듯 곧장 문을 열어준 토도는 평소와는 별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여전히 조금은 촐싹맞게 행동했고, 나르시즘적인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으며 벱시 한 캔을 건네주는 과정마저도 시끄러웠다. 아라키타는 별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짠, 이 토도님이 한결같은 네 입맛을 위해서 손수 자판기에서 뽑아온 벱시라고."
"… 너, 언제부터 알아챈거야?"
"응? 네가 벱시를 좋아한다는거 말야?"
"아니, 네가 보낸 그 문자 말이야! 대체 언제부터 알고있던 거냐고!"

 아라키타가 한껏 인상을 구기며 소리를 치자 장난스럽게 입가로 검지 손가락을 가져간 토도가 아라키타를 향해 '쉬잇- 옆방에서 들어버리면 난감해지잖아? '라고 속삭였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문 아라키타가 짜증난 듯한 표정으로 벱시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따가운 탄산이 아라키타의 목울대를 적셨다. 쓸데없는 이야기 할거면 돌아간다,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아라키타의 손목을 잡아챈 토도가 아라키타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주한 시선에서는 아까와 같은 장난끼가 보이지 않았다. 그 눈동자를 한동안 바라본 아라키타는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잡았던 손목을 놓아준 토도 역시도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가볍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긴 토도가 제 몫으로 가져온 물로 입을 축였다. 그러고보니 평소에 늘 하고있던 머리띠 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진지해보이는 토도의 모습은 아라키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토도는 답지않게 흐릿하게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분명 방금 목을 축였음에도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토도가 아닌 것만 같아 아라키타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벱시를 들이켰다. 조금 덜해진 탄산이 목구멍을 따갑게 지나갔다.

"짝사랑 같은거 하지마, 아라키타."
"… 네녀석이 무슨 상관인데."
"분명 지금보다 더 아파질걸."

 토도의 말투는 어딘가 단정짓는 듯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음에 아라키타는 인상을 구겼다. 차가운 캔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아라키타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토도는 가볍게 마른 세수를 하고는 다시 목을 축였다. 그리곤 말을 꺼낼듯 싶다가도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다시금 목을 축였다. 아라키타는 답답한 심정이었지만 토도를 재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토도는 어딘가 힘들어보였다. 표정에서 영락없이 그것이 드러나보였다.

"고백은 할 수 있을때 하는게 좋아."
"… …."
"우리 졸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잖아?"
"… …."
"상대방이 떠나버리면 영원히 할 수 없게되니까. 그러니까 넌-.."
"네녀석 설마-,"
"나처럼은 되지마라."
"… 소호쿠의 마키시마를 좋아했던거냐?"
"응, 마키짱. 많이 좋아했어, 아니 좋아해."

 토도는 힘없이 입꼬리를 당겨웃었다. 아라키타는 차마 토도와 더이상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소호쿠의 마키시마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은, 우연찮게도 토도의 통화 내용을 들어 알게된 사실이었다. 토도는 마키시마가 영국으로 떠난 뒤, 잠시동안 연습에 나오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멀끔한 얼굴로 부실에 얼굴을 비춘 것은 일주일이나 지나고나서였다. 아라키타는 그런 토도를 신경썼지만 사소한 변화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토도는 돌아온 뒤로 아무일 없다는 것 처럼 굴었다. 마키시마와도 계속 연락을 하는 듯 싶었다. 그래서 아라키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토도의 표정에서는 쓰라림이 드러났다. 아라키타는 제가 평소에 알던 토도와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근데 고백을 못했어."
"… …."
"게속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놓쳐버렸어."

 무엇보다도, 진심으로 자신에게 충고하는 듯한 토도의 모습에서 아라키타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심호흡을 한 토도는 어느새 물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가볍게 눈가를 쓸어내리며 아라키타를 배웅했다. 아라키타는 손에 미지근해진 벱시를 든채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정리가 안된 엉망인 방 만이 그를 반겼다. 아라키타는 남은 벱시를 털어마시고는 침대위로 엎어졌다. 입 안에서는 탄산이 빠진 벱시의 달짝지근한 맛이 맴돌았다. 아라키타는 발에 채이는 옷가지들을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의 방 만큼이나 그의 머리속은 엉망진창으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가벼운 두통이 이어졌다.


*****


 다음 날 토도는 병결이라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라키타는 비어있는 토도의 빈자리를 보고 쳇,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신카이는 토끼 베개를 끌어안은 채로 에너지바를 우물거리며 그런 아라키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내 아라키타가 그 시선을 느끼고 뭐냐, 하고 묻자 신카이가 고개를 저었다.

"먹을래?"
"네가 먹던 것 좀 주지말라고, 바보녀석."
"야스토모는 진파치가 왜 안나온지 알고있어?"
"허? 병결냈잖아, 그녀석. 어디 아픈가보지."

 어이없다는 투로 얘기하는 아라키타에 신카이가 아아, 그랬었지. 라며 얼빵한 대답을 했다.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냥 나는, 어제 야스토모가 진파치의 방에 찾아갔길래 미리 알고 있었나 했어."
"… 어?"
"진파치 많이 아프면 안될텐데, 그치 야스토모."

 밀려불어온 바람 탓에 커튼이 크게 술렁였다. 그 탓에 신카이의 얼굴이 아주 잠깐 커튼의 뒤로 가려졌다가 드러났다. 달라진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에너지바를 오물 거리고 있었다. 아라키타는 저도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는 척 했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아라키타는 순식간에 바짝 말라버린 입안을 혀로 축였다. 괜시리 식은땀이 났다. 판결을 기다리는 범죄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야스토모도 어디 아파? 안색이 안좋네."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그래."
"많이 피곤해? 베개 빌려줄테니까 좀 누워서 잘래?"
"어… 그래, 고맙다."

 얼떨결에 토끼베개를 받아든 아라키타가 황급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엎드렸다. 일부러 신카이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얼굴 방향을 틀어 누운 아라키타는 아직까지도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려했다. 신카이에게서 빌린 베개에서는 신카이의 향이 났다. 아라키타는 그 체향에 코를 묻고 억지로 잠에 청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싶지 않았다.


*****


"저기- 아라키타군? 잠시 얘기할 수 있어?"

 아라키타는 별로 피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점심마저 거르고 모든 수업시간을 내리 잤다. 그 탓에서인지 빌릴때까지만해도 신카이의 체향만이 가득했던 토끼베개에는 아라키타의 향이 섞여들어가 미묘하게 되버렸다. 아라키타는 제게 베개를 빌려준 탓에 불편히 팔을 베고 잠에든 신카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지고 다시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드는 것을 아라키타는 스스로 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신카이의 옆에 토끼베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문자로 이즈미다에게 신카이를 깨워달라고 부탁한 아라키타는 말없이 자신을 찾아온 여학생을 따라나섰다. 보나마나 신카이와 자신이 잘 될 수 있도록 다리를 놔달라는 부탁같은걸 할게 분명했다. 그렇게 교실을 빠져나가 도착한 곳은 동아리방으로 사용되는 빈 교실이었다. 아라키타는 대충 후쿠토미에게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보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교실에는 몇 명의 여자아이들이 더 있었다.

"별로 미안하지는 않지만 나는 다리 놔주는 일 같은거 진짜 못하거든? 차라리 그런 부탁은 후배들이나 토도한테가서 하는게 나을…."

 짝-, 하고 울려퍼진 소리는 분명히 폭행의 소리였다. 아라키타는 어째서 제 고개가 돌아갔는지, 한 쪽 볼이 욱신거려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살다 살다 여자애들한테까지 맞는구나. 아라키타는 맞은 뺨을 감싸 쥔 채로 때린 여자아이를 노려보았다. 얼처구니없게도 그 여자아이는 울고있었다. 유이쨩 울지마, 쟤가 나쁜거야. 너는 잘못한거 없어. 맞은 것은 아라키타인데도 주변의 여자아이들은 아라키타를 때린 여자아이를 달래주고 있었다.

"뭐?"

 아라키타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리 여자애라곤 해도 뺨을 그정도로 내려치면 아픈 것이 당연한데, 왜 맞은 내가 욕까지 얻어 먹어야하는거지? 아라키타는 억울했다. 쌍욕이라도 뱉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유도 모른채 더 나쁜 놈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다시 한번 손바닥이 날라왔다. 이번엔 다른 여자아이였다. 아라키타는 손을 피하려다가 다른 여자아이가 건 발에 걸려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무릎과 턱이, 그리고 팔꿈치가 바닥과 부딪혔다.

"뭔 미친 짓거리야? 너네가 깡패라도 돼? 순 미친 것들 아냐."

 중학생 시절 부상이 있었던 팔꿈치가 바닥과 부딫히면서 찾아오는 고통은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무게가 실린 채로 부딪힌거다보니 로드를 타다가 낙차했을때보다도 더 고통이 컸다. 온 몸이 저릿저릿해 팔을 들어올리는 것 마저도 힘들었다. 여자아이들은 넘어진채로 있는 아라키타의 주변을 둘러쌌다. 툭,툭, 몇몇 실내화의 앞코들이 아닌 척 아라키타의 다리를 차대고 있었다. 하얀 실내화의 앞코가 아라키타 눈에는 역겹게만 보였다.

"아라키타군은 정말 뻔뻔하구나."
"맞아맞아, 그리고 싸가지도 없고."
"하야토군한테 달라붙는거 역겨워, 게이야?"
"뭐야~ 요코짱 그거 소름돋아. 에, 아라키타군 표정봐 설마 진짜?"
"우와, 나 진짜 게이는 처음 봐. 더러워."

 역겨워, 소름돋아, 더러워. 아라키타는 당장이라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직까지도 부딪혔던 턱이 얼얼했고 팔꿈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단지 뼈에 무리가 가지 않았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일은 토도가 아닌 제가 병결을 내고 학교를 빠지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여자애들의 말은 웅웅 귓가를 맴돌기만했다. 아라키타는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팔만 움직인다면 핸드폰으로 후쿠토미나 쿠로다같은 녀석들을 부를 수 있을텐데… 젠장. 아라키타가 올라오는 욕을 삼켰다. 분명히 재활로 완치 판정을 받았던 팔꿈치는 중학교때처럼 까닥할 수도 없었다. 눈 앞이 흐렸다. 이상하게도 중학시절 부상을 입은 자신에게 등을 돌리던 친구들과 여자아이들이 겹쳐보였다. 아라키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라키타는 맘만 같아서는 울음을 터뜨리고싶었다. 하지만 애써 감정을 내리눌렀다. 아라키타는 자신이 참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아라-키타군, 어디 직접 말해봐. 하야토군이랑 무슨관계야?"
"… 돼지 새끼랑은, 그냥 친구라고 망할 머저리들아."
"아라키타군은 정말 입이 험하네, 하야토군한테도 줄곧 그렇게 모진 말하지?"
"응, 야스토모가 조금 말이 거칠긴 하지."

 그런데 너희 야스토모한테 뭐하는 짓이야? 여학생의 어깨 위에 자연스럽게 팔을 올린 신카이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아라키타는 순간적으로 번쩍 정신을 차렸다. 눈 앞에 신카이가 와있다는게 믿을 수 없으면서도 쪽팔리기도해서 아라키타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팔꿈치의 욱씬거림이 조금씩이지만 잦아들고 있었다. 뼈에까지 무리가 간건 아니구나, 자전거를 탈 수 있겠다.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라키타는 이 상황에서조차 로드를 생각하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고통이 잦아감에따라 서서히 정신도 되돌아왔다. 제가 있는 이 곳은 끔찍한 중학교의 야구부실이 아니었다. 이곳은 하코네 학원이었다. 그리고 제 앞에 있는 이들은 그때의 그녀석들이 아니었다.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등장만으로 자신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사실이 조금은 쪽팔렸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에게로 흘깃 시선을 흘렸다. 아라키타는 괜스레 콧웃음이나 쳐주었다.

"돼지 새끼, 드라마라도 한 편 찍냐? 폼잡긴."
"야스토모야말로 양키였으면서 꽤나 여자애들에게 얻어 맞네."
"… 너 내가 양키였던걸-,"
"자자, 이만 가자. 주이치가 기다릴거야."
"저, 저기… 하야토군! 그게, 우리는 아라키타군을 이지메하려한게 아니라…."
"뭐… 그래? 아! 맞아. 거기 너, 토끼베개준거 아마도 너였지? 이런 미안하게 됐네, 그거 방금 소각로에 버렸거든."

 신카이가 평소같이 웃음지으며 여자애에게 사과했다. 아라키타의 뺨을 내려쳤던 녀석이었다. 아라키타는 저린 팔꿈치를 주무르며 충격받아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불러낸 것이 토끼베개 때문이였을까, 아라키타는 이유마저도 어이없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문자로 후배한테 부탁했어, 라고 덧붙이는 신카이의 얼굴에는 정말로 악의따윈 없어보였다. 그래서 더 신카이답고, 귀신같았다. 아라키타는 신카이가 말한 후배를 생각했다. 아마도 이즈미다였을거였다. 무척이나 신카이를 동경하고 있는 녀석이라 군생각없이 곧장 실행에 옮겼을 것이 뻔했다. 솔직히말해서 아라키타는 기분이 좋았다. 신카이에게 달라붙어있는 토끼는 토돌이로 족했다.

"아 야스토모때문은 아니니까 걱정마."
"바보, 누가 걱정을 했다고 그러냐?"
"아무래도 야스토모 네 향이 베여서 버린건가, 하는 생각같은 거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아 물론 그 이유도 조금은 있어."
"뭐라고 돼지 새꺄?"

 반에 남은 여자아이들을 무시한 채로 아라키타와 함께 밖으로 나온 신카이가 아라키타의 다친 팔을 잡았다. 아라키타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올뻔한 고통을 삼켜내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신카이에게 잡힌 팔을 빼낸 아라키타가 본능적으로 팔꿈치를 감싸쥐었다. 버릇처럼 남아있는 행동이었다.

"빨리 부실이나 가자."
"야스토모, 팔꿈치 괜찮아? 부딪혔잖아."
"… 너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
"처음부터 따라왔어. 야스토모를."
"시.발 근데 왜 내가 맞는걸 보고만 있었어?"

 아라키타가 신카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아 쥘 것 같은데도, 아라키타는 팔꿈치는 잡고있는 손에 힘을 넣을 뿐 신카이의 멱살을 잡아올리지는 못했다. 사실 아라키타는 신카이가 모든 내용을 들었다는 그 사실만이 불쾌했을 뿐이었다. 신카이는 조심스럽게 아라키타가 다치지 않은 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아라키타를 향해 물었다. 아라키타는 그 모습에서 어제의 토도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잡힌 팔뚝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아라키타가 말하는 야수의 직감으로는 그랬다, 이건 분명히 좋지 못할 징후라고. 아라키타는 신카이와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너에게 나는 진짜 친구야?"
"… 놔라."
"야스토모, 나는 친구라는 말이 싫어."

 신카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친구라는 말이 싫어, 아라키타는 굳게 다문 입 속으로 그 말을 되씹었다. 그것은 실로 이상야릇한 말이었다. 아라키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빈교실에서는 여자애들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신카이는 교실을 향해 잠시 시선을 던지고는 그대로 아라키타의 팔을 붙잡은 채로 걸어갔다. 아라키타는 반은 자의로, 반은 강제적으로 신카이를 따라갔다. 친구라는 말이 싫어? 그럼? 우린 뭐가 되는거야? 아라키타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신카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소리없는 질문을 던졌다. 신카이는 마치 그 질문을 들었기라도 한 듯, 더욱 단단히 아라키타의 팔을 붙잡고 나아갈 뿐이었다.


*****


 그렇게 도착한 곳은 신카이의 기숙사 방이었다. 정리정돈이 제대로 되지 않은 아라키타의 방과는 대조되게도 신카이의 방은 부끄러울만큼 깔끔했다. 발에 채이는 옷가지들도 없었고, 과자 봉지나 쓰레기 같은 것들은 잘 분리되어 모여있었다. 아라키타는 마치 신카이의 방에 처음 찾아온 것처럼 머뭇거렸다. 신카이는 아라키타를 편한 침대 위로 앉히고 그 앞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마주 보는 자세라 아라키타는 시선을 피하는 것이 힘들었다.

"야스토모, 뺨이 조금 부었어. 역시 그냥 오는게 아니었나."
"쓸데없는 오지랖 부리지마. 이런거 전혀 아프지 않으니까."
"… 역시 야스토모는 입이 거치네."
"여동생이 둘이나 있으면 어쩔 수 없게 된다고, 오히려 남동생이 있는데 욕을 쓰지 않는 네가 더 이상한거 아냐?"
"그런가-. 야스토모 말대로 내가 이상한걸 수도."
"… …."
"… …."

 어중간하게 끊긴 대화 이후 찾아온 것은 더 어중간한 침묵이었다. 아라키타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어색함을 지우려 애썼다. 신카이는 말없이 아라키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가 붉어지는 느낌에 아라키타는 짧게 얼굴로 손부채질을했다. 팔꿈치의 고통은 훨씬 많이 좋아져있었다. 지금은 신체적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긴장감이 더 괴로웠다. 침묵에 짖눌리는 느낌이었다. 아라키타는 이 침묵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감고 로드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기억은 인터하이로 향했다. 인터하이 이일차, 교토 후시미의 미도스지와 스프린터에서 대결에서 패배한 신카이를 이끌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 날은 무척이나 더웠고, 아라키타는 더위와 이즈미다의 쓸데없는 걱정에 조금 신경질이 나있었다. 신카이의 패배를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아라키타는 신카이를 믿기에 본인이 맡은 일에 충실했었다. 에이스 어시스트의 어시스트. 아라키타가 그 날에 맡았던 역할이었다. 아라키타는 기억의 흐름을 조금 더 빨리했다. 아라키타가 끌어줬기에 충분히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던 신카이가 그에게 감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라키타는 꽤나 진정된 마음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바로 앞에 있었다. 얼굴이 가까웠다.

"무슨 생각했어 야스토모?"
"… 알게뭐야."
"생각에 빠진 야스토모의 얼굴 행복해보였는걸."

 아라키타는 신카이를 뒤로 밀어내려 팔을 뻗었지만 신카이는 어째서인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아라키타가 몸을 움직여 조금 더 뒤로 들어가 앉아야했다. 침대의 매트리스가 아라키타가 움직일때마다 조금씩 출렁였다.

"다시 물어볼게. 야스토모, 네게 나는 정말 친구야?"
"… …."
"그런데도 우리는 그때에 키스도, 섹스도 한거구나."
"너…!"

 신카이의 말을 듣자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라키타의 머리속에서는 그가 은연 중에 지우려고 했던 그 기억이 다시금 생생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인터하이 이일차, 하코네 학원의 에이스 후쿠토미가 이일차에서 우승하고 여러 자잘한 일들이 있은 후에 돌아간 숙소에서 벌여졌던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친구라는 말이 정말이지 싫어질 것 같아, … 키스할게."

 신카이의 두툼한 입술이 아라키타가 체 고개를 피하기도 전에 그를 덮쳐들었다. 단단한 공간마냥 아라키타를 아래에 가둔 신카이는 한 손으로 아라키타의 눈을 가로 막은 채로 입술을 맞대어 부볐다. 야릇한 물렁한 촉감이 아라키타의 입술을 잔뜩 감쌌다. 그 여유로운 키스는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라키타는 인터하이 이일차의 밤을 떠올렸다. 아라키타가 한번 더 목욕하러 들어간 욕탕에는 아직까지도 신카이가 버티고 있었다. 같이 씻어본 적은 많았기에 서스럼없이 들어간 욕탕에서 아라키타는 처음으로 신카이와 키스했다. 물기에 젖어 평소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뜨겁고 물렁했던 그 입술에. 이일 차의 승리와 노고를 축하하고 위로하며.

"집중해, 야스토모."
"너나."

 아라키타의 입 속으로 들어온 혀는 그때만큼이나 달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자주 챙겨먹는 에너지바로부터 남은 잔향이었다. 아라키타는 그 달큰한 키스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라키타는 체 삼키지 못한 침이 흘러 제 볼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을 느끼며 신카이와 혀를 섞었다. 이래선 안된다는걸 알고 있었다. 아라키타와 신카이는 고백 한마디 안한 친구사이니까. 이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신카이는 아라키타를 어루달래듯이 혀로 입천장을 살살 간지럽히며 아라키타의 하복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기 편하게 티를 받쳐입지 않은터라 아라키타의 가슴은 쉽게 드러났다. 신카이는 그제서야 아라키타의 눈을 가렸던 손을 풀고는 허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르고 말라 뼈와 가죽을 제외하면 근육밖에 없을 듯한 아라키타의 하얀 몸 위로 얹어진 신카이의 굵직한 손의 형상은 자극적이었다. 슥슥 아라키타의 매끄러운 피부를 쓰다듬던 신카이가 얽힌 혀를 빼어내고는 아라키타의 젖은 입술 위로 가벼운 버드키스를 했다. 짧게 입술을 축인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마른 목선을 타고 가슴팍으로 내려갔다. 아라키타는 차는 숨을 고르며 하얗고 긴 손가락을 더듬거렸다. 손가락에는 신카이의 머리카락이 얽혔다. 신카이는 이에 대꾸하듯이 장난스럽게 오른쪽 유두를 물고는 배꼽으로 내려가 혀를 굴렸다.

"배꼽은 그만하고 이제, …망할."
"이제, 뭐?"
"닥쳐 능구렁이 같은 새꺄."

 아라키타의 짐짓 화내는 말투에 신카이가 가볍게 웃으며 아라키타를 향해 바큥했다. 아라키타는 섹스 중에도 윙크랑 그 기분나쁜 총쏘기를 하고 싶냐며 신카이를 닦달했다. 신카이는 나즈막한 톤으로 아라키타에게 알았어, 알았어. 하고 어린아이 달래듯이 말하고나서야 아라키타의 교복 바지를 잡아 벗겼다. 그리곤 다시 아라키타에게 입을 맞추면서 그도 한꺼풀씩 교복을 벗어던졌다. 방금전까지만해도 발에 채이는 옷 하나 없이 깨끗했던 바닥 위로 옷가지들이 정신없이 뒤섞인 채로 나뒹굴었다. 신카이는 가볍게 아라키타의 엉덩이를 주물거리며 손을 뻗어 서랍 속에 박아둔 핸드크림을 꺼냈다. 윤활제의 대체품이었다. 아라키타는 인상을 구겼으나 신카이는 능숙하게 핸드크림은 손 위로 쭈욱 짜냈다. 싸구려 레몬 핸드크림의 향이 방안을 맴돌았다. 삽입은 힘들었지만 뻑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부드럽게 들어가 기분이 나쁠지경이었다. 움직임은 조금 서툴렀다. 질척한 핸드크림 탓인지 맞물린 곳에서는 움직일때마다 찔걱이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엇박이 된 신카이의 배려없는 추삽질을 아라키타는 싫어하지 않는 편이었다. 오히려 그는 신카이가 다정하게 섹스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마찰로 뜨거워진 결합부의 열기가 금새 온 몸을 휘덮었다. 아라키타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손을 더듬어 신카이의 젖은 등을 끌어안았다. 땀에 밀려 자꾸만 손가락이 미끄러져내렸다. 거친 행위는 아라키타의 머리를 자꾸 벽에 부딫히게 했다. 신카이는 몇번 그러도록 두다가 결국에는 이불을 뭉쳐 아라키타의 머리 위를 막아주었다. 다행이게도 아라키타는 그의 다정한 배려를 눈치 못채고 있었다.

"야스토모, 나 질문,이 있어."
"뭔,데 새꺄,윽."
"야스토모는, 정말로 나랑, 친구이기만해도, 괜찮아?"

 허윽, 허억, 하아, 하아….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신음을 흘렸다. 억지로 더 소리를 내고있다는 것 쯔음은 신카이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신카이는 그런 아라키타의 괴씸함에 일부러 느끼는 곳을 비껴쳤다. 아라키타가 작게 긁는소리를내며 애타했다.

"다시,한번 물을게, 하아, 야스토모, 정말로 나랑 친구,이기만해도 괜찮아?"

 신카이가 아라키타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고는 다시금 질문했다. 아라키타는 눈을 질끈 감은채로 고개를 휘저었다. 쾌락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아라키타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누가 듣던지간에 상관하지 않고 크게, 제 마음 속의 이 무언가가 털어질때까지.

"괜찮을리는, 윽, 없잖아, 이, 바보새끼야."
"그럼 야스토모는 날, 좋아해?"
"그딴거, 쾅쾅 박아대면,서 묻지말라고. 허윽, 머리울려 토할것 같아, 아파, 아파, 신카이, 아파."
"나는 바보야, 네 말대로 나는 바보라서, 제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 후우-.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줘 야스토모. 넌- 나를…-,"

 아라키타가 신카이의 뒷머리카락을 강하게 붙잡은채로 끌어당겨 키스했다. 신카이가 마저 하지 못했던 말은 입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올라간 체온으로 뜨거워진 혀가 강하게 얽혔다. 두사람을 서로를 잡아먹을 것 같이 키스하다 입술을 뗐다. 침이 길게 늘어졌다.

"제발, 그만 닥쳐. 더이상은, 네녀석의 말 같은거, 듣고싶지 않아."
"응, 미안해 야스토모. 내가 미안해."
"… 우린, 친구야. 돼지새꺄, 잘 들어. 우린-… 친구라고."
"응. 야스토모. 우린… 정말로 친구야."

 정사는 거의 막바지를 달려가고 있었다. 여전히 신카이는 배려없는 추삽질을 했고,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등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긁었다. 머리 위를 감싸고 있던 이불은 어느새 밀려서 떨어졌고, 신카이는 더이상 아라키타가 머리를 부딫히지 않게 막아주지 않았다. 아라키타는 쾌락 때문일지, 고통 때문일지 조금 울었다. 신카이도 어느새 울고있었다. 다시금 맞닿은 입술에서는 짠맛이 났다. 묘한 관계는 이 키스를 끝으로 정말 끝이었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내부에 사정했다. 키스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카이가 빠져나오면서 정액과 조금은 섞였을지 모르는 핸드크림의 묽은 액체가 울컥하고 흘러내렸다. 아라키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죽여 울었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벗은 몸 위로 구겨진 이불을 덮어주며 흐르는 눈물을 숨겼다. 결국 그 날 두 사람은 부실로 갈 수 없었다. 시간은 슬프게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


"오랜만이네, 야스토모. 그동안 잘 지냈어?"
"… 뭐, 그럭저럭."
"좋아보여서 다행이야."

 서른 두살의 아라키타는 더이상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평범한 직장에서 평범하게 업무를 처리하면서 애인없이 평범하게 지냈다. 머리스타일도 바꿨고, 벱시가 아니라 맥주를 마셨다. 아라키타는 막 회사에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마트에 들려 장을 봤고, 평범하게 맥주캔 하나를 따마시며 거리를 걷고 있던 참이었다. 신카이와는 정말로 우연히 마주쳤다. 신카이 역시도 더이상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몇달 전 술김에 아라키타가 찾아본 결과로는 이년 전쯤에 부상으로 은퇴했다는 것 같았다. 깔끔하게 짧아진 머리스타일로 드러난 외모는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세월이 흘러 신카이는 더 남자답게 잘생겨진 것 같아보이기도 했다. 아라키타는 맥주로 목을 축였다. 끝맛이 조금 썼다. 아라키타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이 동네에 살고있는거야?"
"어, 뭐 그렇지."
"… …."
"… 할말 없으면 간다?"
"어? 어… 그래. 잘가 야스토모. 만나서 반가웠어."
"잘가."

 신카이를 등지고 걸어가면서 아라키타는 담배를 찾았다. 맥주캔 속에 남은 맥주를 탈탈 털어마시고 봉지에 아무렇게나 던져넣은 뒤에 아라키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신카이와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아라키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생각했다. 잘가, 다시는 만나지말자. 뿌연 연기를 내뱉으면서 아라키타는 생각했다. 내가 그때 솔직하게 고백했더라면 나는 저녀석의 옆에 있었으려나, 아 아니지. 어디 택도 없는 소리를. 저런 멍청이랑 내가 그렇게 롱런할 수 있을리가. 술에 거하게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라키타는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다마신 맥주캔에 비벼끄며 코를 훌쩍였다.

"아, 나도 맞선이나 볼까…."

 이것도 . 아라키타는 헛웃음을 흘렸다. 새로운 맥주캔을 따서 마시는데 자꾸만 물방울이 구두 앞코에 떨어져내렸다. 아라키타는 멈춰서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물방울들은 맥주 따위가 아니었다. 아라키타는 한번 더 코를 먹었다. 울음이 조금 터져나왔다. 답답함에 맥주를 벌컥이며 아라키타는 울었다.

"짜증나게 저 새끼는 왜 더 잘생겨진거냐고, 돼지새끼 주제에."

 아라키타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엄청 추한 모습일 것이 뻔하지만 잠시간은 머물러서 울음을 쏟아내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왜 바보같이 아무말도 못했을까. 스무살 중반 쯤 되었을땐가, 아라키타는 티비 토크쇼에 게스트로 나오는 토도를 봤다. 고교시절 그날에 보았던 토도의 옅은 씁쓸함이 보였다. 토도는 아직도 옭아매지고 있는 거였다. 벗어나지 못한거였다. 그런 토도를 떠올리면서 아라키타는 조금 더 소리내서 울었다. 후회 돼, 후회되서 감정이 버텨지지 않아.

 그리고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

 

 번외1) 신카이 하야토의 사정

 야스토모에 대해서 알게된 것은 주이치가 그를 부실로 데려오기 전의 일이었다. 내가 처음 본 야스토모는 굉장한 비주얼이었다. 알수 없는 돌진하는 김밥머리에, 커다란 벨트를 하고 오토바이 같은 걸 옆에 세워둔 채로 정작 하는 일은 학교에있는 들고양이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있었으니까. 아직도 그 모습은 기억하고 있다. 그탓인지 처음 주이치가 부실로 데려왔을때에는 나도 모르게 아는 체 할 뻔 했었다. 그랬다면 기분나빠 했겠지. 일학년때 야스토모는 꽤나 낯을 가렸으니까. 야스토모가 머리를 자르고 로드에 열중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 속에서 이 감정을 키워갔다. 사실 그때에 잘라버렸어야했는데, 깨닫고 나니까 너무 늦어버렸었다. 그래서 야스토모와 친해졌을때는 솔직히 기뻤다. 정말이지 기뻐서, 기쁨으로 마음이 주체가 안되서, 그래서 사랑인걸 알아버렸다. 일주일에도 서너번씩 받는 러브레터나 고백에도 아무런 감흥도 없었는데, 야스토모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자꾸만 감정이 동요하려했다. 그렇더라도 티낼 수 없었다. 야스토모에게 나는 친구였을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저 야스토모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야스토모가 이런 내 감정을 다정함으로만 인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야스토모에게 있어 친구라는 존재로 가깝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삼학년이 되어서 같은반이 되었을때 우리는 거의 항상 붙어다니곤 했다. 서로의 기숙사실에 놀러가 게임을 한다던가, 연습이 끝나고 같이 목욕을 한다던가. 목욕이 끝나면 몸을 식히면서 벱시를 마시는 야스토모의 체향을 맡기도했다. 다 친구니까 가능했던 일이었다.

 절제해오던 감정이 솟구쳐버린건 인터하이 이일차가 끝난 밤이었다. 이일차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만 솔직히 말해서 내 맘은 그다지 편치 못했다. 두 학년이나 아래인 미도스지에게 정면 스프린터 대결에서 졌다는 사실은 위로를 받더라도 편해지지 않는 나의 큰 실수였다. 나는 하코네의 에이스 스프린터 번호를 달고 있었고, 그날의 어시스트까지 맡고있었는데도. 야스토모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 날 주이치의 어시스트를 해내지 못했을거였다. 야스토모가 아니었더라면. 한자리 수의 번호를 달고 달리는 왕자의 명예를… 내가. 사실 욕탕에 오래 있었던 이유는 감정을 자제하기 위해서였다. 패배의 괴로움과 야스토모를 향한 고마움과 애정, 이 복잡한 감정을 목욕으로나마 잊어버리도록. 야스토모가 한번 더 목욕을 하러 들어올 줄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었다. 한껏 감정이 부풀어올라있을때에 만난 야스토모는 습기에 젖어 촉촉해보였고, 따뜻함에 약간 나른해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는 결국 핀트가 나가버렸다. 야스토모는 욕탕의 다른쪽에서 가까이 다가온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고, 나는 반쯤 나간 정신으로 야스토모와 입술을 맞부딪혔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이 부드러워서 멈출 수 없었다. 야스토모는 나를 밀쳐내지 않았다. 적어도 내 기억상으로는 그랬다. 욕탕의 물이 출렁거리고 나는 정성껏 야스토모의 입술을 빨았다. 따뜻하게 풀어진 몸으로 하는 섹스는 훨씬 매끄러웠다. 야스토모를 사랑하는 일을 도저히 멈출 수 없게 되버렸다. 그날로 있어서.

 야스토모가 여자아이들에게 맞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었던 이유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자고있지 않았고, 내심 야스토모가 나를 깨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야스토모는 토끼베게만 돌려준 채로 여자아이를 따라갔다. 느낌이 안좋았기때문에 나도 바로 따라 일어나섰다. 여자아이는 기억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토끼베개를 줬었으니까. 들키지 않기 위해 조금 거리차를 두고 따라간터라 야스토모가 불렀다던 이즈미다를 만났다. 나는 이즈미다에게 내 자리에 대해 설명해준 다음에 토끼 베개에 대해 이야기했다. 혹시 내가 태우라는 문자를 보낸다면 소각로에 버려달라는 부탁도 했다. 이즈미다는 당황한 듯 싶었지만 곧장 알겠습니다, 아브! 라며 알 수 없는 기쁨을 보이면서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따라간 그 곳에서는 야스토모가 이미 맞고있었다. 나는 타이밍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여자애들 입에서 나와 야스토모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 흘러나왔을때부터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기대하고 있었다. 야스토모는 역시나 우리 둘을 친구라 말했다. 하지만 그 친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야스토모의 눈동자는 말하는 것과는 달라서 나는 그제야 이즈미다에게 태워달라는 메세지를 보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서야 내가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걸 깨달았다.

 야스토모에게 우리 둘은 정말 친구냐고 물었던 것은 내 마지막 발악과도 같았다. 정말 우리 둘은 친구밖에 될 수 없는지에 대한 발악. 나도 눈치가 아예 없는 편은 아니라서 알고는 있었다. 야스토모가 결코 내게 맘이 없지는 않다는 걸. 하지만 섣불리 우리 둘다 말을 꺼낼 수는 없었던거다. 나는 솔직히말해서, 그 날 야스토모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야스토모의 입에서 우린 친구라며 단정짓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말을 꺼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야스토모가 원치 않으니까. 겉으로는 모나보여도 속으로는 착한 그 바보가 결국 나를 배려해서 그렇게 말한거라는 것 쯔음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둘의 어정쩡한 관계는 그 날로 잠시간 끝을 맺었다. 우린 정말 친구처럼 서로를 대했고, 다른 학교를 지망했으며, 야스토모는 프로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다. 그것이 25살의 일이었다.

 32살의 여름, 내가 야스토모와 재회한 것은 정말로 우연의 일이었다. 야스토모는 상당히 멋있어져있었다. 왁스로 넘긴 머리도 반듯한 정장차림새도, 맥주를 마시는 모습마저도. 내가 아프게 사랑했던 십대의 야스토모보다는 훨씬 성장해 있었지만 야스토모에 대한 감정은 아직까지 벌어진 상처처럼 욱씬거렸다. 7년, 그래 7년이나 못만났는데도 이랬다. 너를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은연중에 나는 여전히 너만을 사랑하고 있었던거다. 너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물어보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무서웠다. 싸늘히 날 지나쳐가는 네게 바보같은 인사를 건넨 것도 겁에질려서였다. 네가 조금 멀어지고나서야 나는 네 번호를 묻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고, 너를 잡기 위해 뒤돌아갔다. 담배를 피는 야스토모의 모습은 처음 보는 거라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변한 너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아지랑이처럼 네게 다가가면 갈수록 고교시절의 그 감정이 다시금 싹터올랐다. 네가 울고있는걸 눈치챈것은 네가 두번째 맥주캔을 꺼내면서였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 큰 요동이쳤다. 나는 네 울음을 어떻게 받아들어야할지 고민했다. 지금와서 너를 잡는다고 하면 너는 내게 무슨 말을 할까. 후회라는 기억 속에 담아두어야했던 너와의 마지막 관계 정리가 나를 괴롭게했다. 하지만 이내 주저앉는 네 모습을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고민따위 다 부질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후회로 담아두었던 이 감정을 토해낼거다. 나는 조금더 걸었고 너의 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야스토모, 우리 더 이상 친구하지 말자. 그러니까 그만 후회하자."
"… …."
"너도 나도 바보니까 확실하게 말할게."
"… …."
"사랑해 야스토모."

 나도 야스토모도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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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2) 토도마키 ; 마키시마 유스케의 사정


 진파치와의 연락이 끊긴건 언제 부터였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뭐,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영국과 일본간의 통화료는 너무 비쌌고,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 수록 그리움에 비참해지는건 나였으니까. 연락을 기다리는 것을 하지 않게되면서부터는 정말로 끝일거라고만 생각했다. 사실은 운명적으로 다시 진파치와 연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말, 정말 우연찮게 들린 가게에서 네 얼굴이 실린 잡지를 발견했을때에 나는 솔직히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자국어로 된 잡지를 사보는건 영국에 오고나서는 처음있는 일이라서, 글씨를 읽는것 부터가 꽤나 곤욕이었다. 너와 매일같이 통화하던 때에는 일어가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졌던 일이 없었는데. 몇번이나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야 네 인터뷰가 나왔다. 연예인이 되었구나. 꽤나 잘 어울릴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만 정말로 네가 연예인이 된 모습을 보니 마음 한 켠이 괜스레 간질거렸다.

"푸핫, 연예인이라니 꽤나 잘 어울리잖니, 진파치."

 잡지 한 면을 가득 채운 화보 사진 속에서 머리 스타일마저 달라져버린 네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항상 머리띠만큼은 포기하지 않던 너였는데, 세월이 그것 마저도 바꿔버린걸까 싶어서 조금은 야속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밝게 웃음 짓고 있는 너의 당당한 모습은 내가 잊지 못하는 너와 달라진 것이 없어서, 결국은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잖니… 숏."

 보물처럼 가방 속에 꼭꼭 넣어두었다가 집으로 돌아와 다시 너의 인터뷰장을 펼쳤다. 고작 몇년이 지났다고 영어가 훨씬 익숙해진 눈으로 한자,한자 꼼꼼히 글씨를 읽어나갔다. 너가 말하는 부분은 특별히 두번씩 읽었다. 빠뜨리는 내용이 없도록 꼼꼼히.

/ 고교시절까지는 사이클 부 선수로 활약했다는 떠오르는 샛별 스타 토도, 진부한 질문일테지만 유망주로 불리던 로드를 그만두고 연예계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다른 곳에서는 밝히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토도: (잠시 뜸을들이고) 이거, 확실히 해외에까지 가는 잡지 맞죠? (맞아요.) 사실 연예계를 택한 이유가 따로 있는데요… 이거 좀 위험한 고백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는 조금 머뭇거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토도: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해보고 놓쳐버린 상대가 아직 유학 중이거든요. (웃음) 연예계를 택한건 온전히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한 마음에서부터였어요. 솔직히 말하면 고민하던 중에 캐스팅이 들어와서 덥썩 물어버린거죠.
 어찌보면 공개고백과도 같은 그의 말에 인터뷰 현장이 달아올랐다. 그의 매니저가 당황한 듯 연신 토도를 불렀지만 그는 꿋꿋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토도: 연예인이 되어서, 유명해지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상대방이 나를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저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웃음)
 그럼 아직까지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요?
토도: 어…, 그런거죠. (웃음) 조금 못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 아직 한 번도 애인같은거 만들어 본 적 없고… 첫사랑이에요. 꽤나 오랫동안 진행중.
 떠오르는 남친감이라고 불리며 수많은 여성들에게서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는 남자 토도. 놀랍게도 그는 엄청난 순정남이었다. 고교시절 따로 팬클럽이 있었을 정도였던 그가 아직까지 첫사랑을 진행중이라니, 평소 방송에서 보여주는 능글맞던 모습과는 대조 되어보인다. 대체 그를 이렇게까지나 순정남으로 있게한 그의 첫사랑이 누구일지 궁금해진다.
토도: 당연히 얘기할 수는 없죠.(단호하게) 좋아하는만큼 지켜줘야죠.
 그럼 외국에 유학 중인 첫사랑을 향해서 고백해보는 것은 어떤가요? 이 물음에 그는 방금전까지 보이던 단호함을 지우고는 청소년기의 수줍은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촬영과 인터뷰 동안에서 보이던 당당한 자신감은 이 순간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토도: 에… 그러니까, 일단 먼저 연락을 끊어서 미안해. 몇번이나 다시 연락하고 싶었는데 그때에는 마음을 접으려고 했었어서 연락할 수 없었어. 내 잘못이야. 이런 고백도 전부 직접 해줘야하는데 나 조금 찌질하려나. 고등학생때, 너를 만나게 된건 나에게 큰 축복이었어. 너를 보면서 나는 반성도 할 수 있었고, 뭐랄까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었어.(웃음) 고백하지 못하고 너를 외국으로 떠나보내고, 마음을 숨긴채로 계속 연락하는게 그때의 나한테는 너무 힘들었어. 난 그때 대학 진학도, 자전거도, 가업을 물려받는것도 모두 택하지 않은채로 방황했으니까. 그렇게 엄청 볼품없는 상태로 너와 연락하면서 계속 마음을 키워가는게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서 그래서 널 잊으려고 했었어. 근데 그게 오히려 나한테는 독이 되버렸더라. 엄청 후회했어. 내 바보같은 결정을. 그래서 뒤늦게 고민하다가, 캐스팅 제안을 받게 되면서 마음을 다잡았어. 네게 그때처럼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네가 이 인터뷰를 보지 못할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너를 기다릴거야. 조금 더 멋있는 사람이 되어서, 너한테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설령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좋아해. 엄청 많이, 사랑하고 있어. /

 더이상 인터뷰를 읽을 수 없었다. 멍청하게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네 얼굴 위로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서 황급히 눈가를 훔쳐냈다. 손가락이 흠뻑 젖어나왔다. 나는 진파치의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읽었다. 까맣게 인쇄되어 나온 글자일 뿐인데도, 읽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저릿거렸다. 바보, 멍청이… 그런 말 조금 더 일찍 들었더라면 내가 영국으로 갈 수 있었을거 같아? 갑작스럽게 일본이 그리워졌다. 정겨운 거리, 매일같이 올랐던 치바현의 산. 토도와 함께 올라갔던 하코네의 산까지도. 땀에 흠뻑 젖어가면서도 함께 달린다는 그 하나 만으로도 벅차올라 죽을 힘을 다했던 작은 추억이, 그리워져서 미칠 것만 같았다. 마치 향수병에 걸린 것 마냥. 뭔가에 이끌리듯이 담배가 생각나 겉옷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금방 개일 것 같았지만 상관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 담배를 샀다. 라이터도 샀다. 그리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담배불을 붙였다. 빨간 점처럼 불이 붙은 담배의 끝이 조금씩 타들어갔다. 머뭇거리다 입에 물고 한모금을 빨아드렸다. 매운 향과 독한 맛에 컥, 하고 기침이 튀어올랐다. 금방 눈가가 벌개지고 코가 매워졌다. 바로 담배를 비벼끄고는 남은 것들을 쓰레기통에 박아넣었다. 비싼 것이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환기가 잘 안되는 방안에는 벌써 담배냄새가 퍼졌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비가 내려 그만두고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머리 위로 펼쳐진 잡지가 닿았다. 문득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진파치와 연락이 끊긴 후에 이미 한 번 번호를 바꿨다. 핸드폰의 잠금화면을 열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버릇처럼 외워버린 숫자들이었다. 가망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연예인이 되었으니 번호를 바꾸는 일이 잦았을지도 몰랐다. 국제전화로 넘어갔지만 통화비는 상관하지 않았다. 꽤나 연결음은 오래 이어졌다. 역시 받지 않는걸까 싶어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 전화 받았습니다. 누구세요? ]
"… …."
[ 장난전화인가요? ]
"… …."
[ 아니면, 마키쨩? ]
"… 눈치가 빠르다는 거잖니, 숏."
[ 마키쨩?! 진짜, 진짜 마키쨩인거야!?! ]

 그 순간 왠지모르게 눈물이 터져버렸다. 우는 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야속하게도 자꾸만 소리가 터져나갔다. 오랜만에 들은 진파치의 목소리는 꽤나 성인 남성답게 멋있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만일 내가 그곳으로 돌아간다면, 너는 나를 맞이해주려나.

[ 울지마, 울지마 마키쨩…. 미안해, 내가 미안해. ]
"나는, 네가 보고 싶어… 진파치."
[ 응, 나도 마키쨩이 보고 싶어. 엄청 보고 싶어서 지금이라도 당장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달려가고 싶어. ]
"진파치."
[ 응 마키쨩. ]
"좋아해. … 엄청 많이. 나도, 나도 널- 사랑하고 있어."
[ 마키쨔앙… 나, 나 너무 기뻐. 나도 엄청 좋아해. 엄청, 엄청 사랑해. 마키쨩을 정말 사랑해. ]

 그렇게 내 눈물이 잦아질때까지 진파치는 계속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히로아카/캇테쿠]도망


한바탕 비를 쏟은 뒤의 길거리는 정적으로 가득하다. 가끔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습기가 가득하고 눅눅한 길거리를 걸으려 나오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늦은 봄, 추운 날씨에 겉옷을 꽉 동여매고 우산을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며 입 밖으로 퍼지는 하얀 김을 응시했다. 우산을 받친 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순간, 누군가가 뒷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노란색? 아니, 노란색보다 조금 진한색의 머리를 가진 남자애는 그렇게 자전거 페달을 거칠게 밟으며 내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멀리 멀리 사라지는 남자아이의 뒷모습을, 시선은 끈덕지게 붙잡고 놓치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한 가정집 앞에 멈춰서더니, 녹색 머리의 남자애를 질질 끌고 나와 기어코 자전거 뒷편에 앉혔다. 옷의 끝자락만 잡은 손. 혹시나 넘어지진 않을까 자세를 정비하던 노란 머리의 남자애는 녹색 머리의 남자애가 잡은 손을 한 손으로 꾹 쥔다. 그리고는 페달을 밟아 앞으로 앞으로, 거세게 나아갔다.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서 그 모습을 쳐다봤다. 그리고 나는 한참만에 깨달았다.

아.

작은 탄성과 함께 눈을 감았다 뜨자 보이는 것은 비 오는 거리에 가득찬 정적 뿐이었다.

 

 

*

 

"아, 우라라카양."
[이제야 받았네…, 거긴 좀 어때, 데쿠군?]
"뭐, 그냥 그렇지. 아마 지금의 나랑 가장 맡는 생활이 아닐까?"
[…만족하는거야?]
"응?"
[아, 아니. 나는 데쿠군한테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어. 선택은 데쿠군이 하는 거니까. 그런데 뭔가 목소리가 예전같지 않아서.]
"아니야! 얼마나 재밌는데."
[응! 그럼 다행이다.]
"거기는 좀 어때?"
[뭐, 똑같지. 데쿠군만 없는 걸. 모두 힘내고 있으니까. 그런데, 데쿠군이 말 없이 가고 나서…, 아무래도 풀 좀 죽은 것 같지. 그래도 아직은 잘 지내고 있어 ..아! 엄마가 부른다. 나중에 또 전화 할게.]
"아, 응."
[근데 데쿠군, 혹시 다시 여기에 올 생각은 없어?]

 

우라라카의 물음에 나는 입을 닫았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임이 맞을 것이다. 우라라카는 수화기 너머로 쓴 웃음을 흘리더니, 잘 지내.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겁쟁이처럼 그 곳을 도망쳐 나와버린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가 있을까.


도망치듯 떠나버린 웅영고등학교. 그리고 졸업. 히어로 반이었던 아이들은 모두 잘 되어 이따금씩 매체에 얼굴을 비추곤 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많이 보이는 것은 캇쨩. 다혈질에, 나만 보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캇쨩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숙한 얼굴로 매체에 얼굴을 비췄다. 아, 내 꿈은 히어로였다. 매체에 얼굴을 비추는, 한 때는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처럼 반짝반짝한 얼굴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웅영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보다 많은 것들을 배웠다. 히어로의 꿈이 이루어 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디서 긁어 모았는지 모를 빌런들이 전부 다 학교로 쳐들어 오기 전 까진 그랬다.

당시의 캇쨩은 나에게 열등감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열등감인지, 열등감이 아닌지 모를 것들의 감정들이 뒤섞여 자신조차 자신을 모르게 되었던 그런 상황. 아마 캇쨩은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 지금 생각 해 보면 추측이 아니라 그것은 확신일지도 모른다.


언제였지, 날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올마이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빌런들이 내가 그의 힘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멀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그들이 나를 빌런으로 만들기 위해 납치를 감행한 날, 세상이 까무룩 검게 변하면서도 마지막에 보였던것은 분명, 캇쨩이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 캇쨩만이 나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했던 건, 나도 캇쨩을 좋아했다는 거였다. 동경? 우정? 그것보다 더 크고 부풀어 올랐던 그 감정이.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은 몽롱한 상태에서 간신히 몸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어느 순간이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검게 물든 세상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숲으로 빠져나왔는데, 안개가 짙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까만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그 그림자에 먹히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싸웠다. 싸웠나? 아니, 아니다. 내가 입은 것은 경미한 부상이었고, 그는 나를 죽일 정도로 위협하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안개가 걷히고 눈이 확 트였을 때 처음 보였던 것은 다리가 심하게 부러진 캇쨩이 나를 껴안은 채로 주위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이 상황이 머릿속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플텐데도 빌런들 사이에 둘러싸여 나를 껴안고 있던 캇쨩이.


"일어났어?" 빌런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캇쨩은 나를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한 손으로 내 양손을 붙잡았다. 주위 빌런들의 웃음소리가 키득키득, 커졌다. 그제서야 나는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몸이 조금 욱씬거리기는 했으나, 어디 하나 큰 상처가 난 것은 아니었고 주위의 빌런들도 어디 하나 다쳐보이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 중에서 가장 심하게 다친 사람을 이야기 하라고 한다면, 나는 당연하게 캇쨩! 하고 외칠 수 있었다. 캇쨩은 맑아진 내 눈을 보며 사람 좋게 웃었다.


"일어났냐, 등신자식아?"


나는 그제서야 이 모든 것들이 나로 인해 벌어진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뒤는 나도, 캇쨩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듣기로는 내가 폭주했고 간발의 차로 이 곳으로 들이닥친 선생님들, 학생들이 빌런을 처리하고 나를 가라앉히는데에 애를 먹었다는 것 뿐이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병실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안에 남아있는 것은 나 하나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에 대해 다시 생각을 시작했는데, 기억에 남은 것은 아픔을 참고 억지로 웃고있던 캇쨩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박차고 달렸다.


많은 사람들을 헤쳐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 사람의 병실 앞에 모여 있는, 같은반 '이었던'친구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지 않은 것은, 이이다, 우라라카. 그리고 토도로키군 뿐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건들지 않을게."


내 말에 아이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라라카양과 이이다 군에게서 안타까운듯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나는 병원복 끄트머리를 잡은 채로,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냥, 캇쨩이 어디있는지 말해줘."


토도로키군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앞으로 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꺾어서 바로 옆 병실. 하지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어. 우리는 바쿠고가 멀쩡한 걸 봤으니 다 돌아갈 생각이었고."
"그, 그래. 잘 가."


아이들은 나를 힐끔힐끔 훔쳐보며 지나갔다. 걔 중, 토도로키는 내 어깨에 손을 얹어 위로하는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왜 그랬을까. 위로받을 만한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우라라라양과 이이다군은 안타까운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머뭇머리며 멀어졌다. 나는 그들이 병원 밖으로 나가는걸 확인하고 나서야, 캇쨩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문을 열자 그 안에는 마치 죽은 모양새의 캇쨩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다리에 붕대를 빙 두른 캇쨩은 그냥,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제서야 캇쨩이 했던 모든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어떻게 알고 찾아 온 거야? 내 물음에 캇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계속해서 고른 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제서야 캇쨩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네가 어디있는지 알 수 있어. 네가 숨만 쉬어도.

 


* *

 

"미도리야군! 8번 테이블에 오렌지쥬스 하나랑 딸기케이크 하나!"
"아, 네!"


나 진짜 최악. 인간 이하. 내가 캇쨩에게 가지는 죄책감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우라라카양에게 전화가 온 이후부터 쭉,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악몽을 꾸고 있었다. 두통이 밀려든다. 나는 테이블로 가 딸기케이크와 오렌지쥬스를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뒤돌아 가려던 찰나, 나는 그들의 모습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쳐들어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어색하게 한 분장, 서로의 얼굴을 보며 되도 않은 웃음을 흘리는 것은 분명히, 우라라카양과 이이다군이었다.


"너네..?"


내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우라라카양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더 이상 안돼! 저번에 데쿠군이랑 통화한거 바쿠고군한테 들켰는걸. 위치를 말해주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기에.. 곧 바쿠고군도 이쪽으로 올 거야!"
"뭐?!"


나는 눈으로 다급하게 출구를 찾았다. 그리고 나를 잡고 놔 주지 않으려는 우라라카 양의 손을 떨쳐내려 손을 휘저었다. 순간 몸이 가벼워지고, 땅바닥을 박차고 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통유리로 된 가게 문 앞에, 토도로키 군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라라카 양, 미안해!"


나는 우라라카양이 다치지 않게 발로 그녀를 차서 밀었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자리에 넘어졌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그곳을 벗어나려 뛰었다. 삔 다리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뛰어야했다. 나는 절뚝이며 쪽문으로 나가 뛰었다. 뛰면서 나는 가게를 응시했다. 파란 하늘이 비칠 정도로 시린 통 유리 앞. 기대되는 표정의 캇쨩이 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다리를 붙잡고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가게의 문이 급하게 열리더니 저 멀리서 조그맣게, 우라라카양과 이이다 군이 심각한 얼굴로 캇쨩과 무어라 이야기 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급격하게 무언가를 찾는 행동의 캇쨩.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나였다.


"데쿠-!!"


속에서 일렁거리며 무언가가 폭발했다. 잔뜩 오열을 담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던 캇쨩은 충혈된 눈으로 재빠르게 주위 사람들을 스캔했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시선을 뛰는 쪽으로 고정한 채로, 그가 알지 못하도록 빠르게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남은 것은 절규어린 캇쨩의 목소리 뿐이었다.
골목을 돌아 입을 틀어막았다. 짐승의 본능을 내재하고 있는 캇쨩이 내 숨소리하나 찾지 못하길 바라면서.
 숨을 고르고 나서야 나는 삔 다리가 아파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조심스레 신발을 벗었다. 원포올을 처음 익혔을 때, 힘을 꽤 사용할 수 있게 된 이후론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감각이라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 악문 이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드새끼야."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자지 못한듯 충혈된 눈이 코 앞으로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캇쨩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가 말 했지? 데쿠새끼 숨소리만 들어도 어디 있는지 나는 안다고."


그리고 벽을 세게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 있던 벽이 깨졌다. 그 파편이 날아 얼굴을 스쳤지만 아픔은 느낄 새도 없었다.


"숨을 거였으면,"


캇쨩은 내 멱살을 틀어쥐고 성큼성큼 어디론가 걸어갔다. 달려들어오려던 골목 앞에서 우라라카양과 이이다군이 멈칫 자리에 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숨소리도 안 들리게 숨었어야지, 등신새끼야."

 

캇쨩은 나를 보며 웃었다. 입술이 쭉 찢어졌다.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캇쨩은 사람이 없는 골목 안 쪽으로 들어가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벽에 상체를 기댄 채 캇쨩을 응시했다.

 

"아, 일단 변명 부터 들어볼까."

캇쨩은 빼뚜름히 웃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 없어?"

캇쨩의 표정이 굳더니 곧 커다란 손이 내 목을 틀어쥐었다. 켁! 나도 모르게 입에서 쓴 소리가 터졌다.


"내가 너한테 이딴일 터지고 나서 너한테 바랬던게 있었던가? 아니지. 내가 병실에 처박혀서 수술받을 동안 너는 이딴 촌구석으로 튀었으니까."
"큭..!"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캇쨩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시선이 흐릿했다. 캇쨩은 한참동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틀어쥔 내 목을 놓았다.


"쿨럭, 쿨럭!"


벌어진 입에선 주위의 공기를 무자비하게 끌어모았다.


"니가 그 자리에 가만히만 있었어도 이런 짓까진 안 했잖아, 왜 튀었냐?"
".."
"그것도 말 못해? 그럼 하나만 묻자."


나는 캇쨩을 응시했다. 캇쨩은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병실에 입원했을 때 말이야. 분명히 다른애들 다 병문안 왔을 때 소리 다 들렸거든. 아, 물론 네놈이 왔었던 것도 기억은 하는데, 그 뒤가 진짠지 아닌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숨을 멈췄다. 캇쨩은 아직도 궁금한 표정이었다.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를 보는 캇쨩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다른 것보다 기억에 남는 꿈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캇쨩.."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어떤년이 내가 그렇게 눈도 못 뜨고 있는데 내 몸 위에서 몸을 움직이더란 말이야. 아,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닌데 그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서 불쾌했거든."
"그건.."
"내가 그 때 희미하게 누군지 보려고 실눈을 떴었던 것도 같고, 한데."
"아니야."
"그게 너였던 것 같다고 하면 미.친새.끼 취급 할 거냐?"

 

캇쨩은 입에 완전히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캇쨩의 미소를 응시했다.


"내가 기절해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상태에서."
".."
"너, 나랑 섹스했지?"



버릇


 

[은혼/긴히지]


음...너 손톱도 잘라버리고 무지막지하게 팼는데도 아직도 그 모양이네.

 

손버릇이 참 나빠. 그 버릇 어떻게 고치나 내가 어제 골똘히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시간도 많겠다.뭐,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게. 예전 요시와라뿐만 아니라 카부키쵸에 있는 흉등가에 많이 었었던 일인데...





요즘에는 뭐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긴한데 들어나 봐. 업소에 아가씨들이, 새로 들어오잖아. 그럼 거기에 얌전한 사람들만 모인 게 아니거든.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만 둔다고, 보내달라고, 돈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보내만 달라고 마담 붙잡고 궁상 떠는 것들이 꼭 서넛은 생겨. 왜 그러는지 알아? 2차 가기 싫다고 그래. 앉아서 몸 주물리는 것까진 괜찮은데 눕지는 못하겠다고. 그래서 통사정을 그렇게들 떠는거지.





웃기는 게, 그러는 애들 중에 억지로 끌려온 것들? 없어 하나도. 다 지들 발로 또각-또각, 돈좀 쉽게 벌어볼까 하고 기웃대다 들어온 거야. 나참 그래놓고 갑자기 발을 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 누구는 자선사업 하자고 데려와준 줄 아나...웃기다니까. 



 

아니 뭐 대부분은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며칠 일했으면 그동안 입은 거, 꾸민 거, 살라고 소개해준 방값까지, 그게 다 빚이거든. 그것도 안 갚으면 목줄 간당간당한 빚. 빠져나갈 구멍도 없어. 지들도 다~ 알고 지장 찍은 거라. 테이블에 앉혀놓고, 이거 당장 갚을 자신 있으면 가시든가, 하면서 종이 몇 장 낮짝에다 던지면 끝이야. 쉽지. 그러고 아예 지명이 안 되게 손을 싹 써서, 갚을 길도 없이 빚 점점 불어나는 거 지가 느끼게 해주면 다시는! 입 뻥끗할 생각을 안 해. 사람이 그래. 간사하고. 



 

근데 또 개중에, 그걸로도 포기가 안 되는 아주 끈기 대단한 분들이 계시지. 사정으로 안 되니까 나중가면 아주 깽판을 쳐. 어휴 진짜...그러면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불법.'



 

나 접객원으로 온거지 성매매 하려고 온 거 아니다, 이거 다 불법이다, 나가서 신고한다, 어휴 소리소리를 지르는데 대단해. 그렇게 똑똑한데 어디 변호사나 해보지 왜 룸에를 기어들어왔나 몰라? 그렇게 똑똑한데, 자기 지명한 손님들 중 서넛은 경찰이고 서넛은 검사였던 거, 그건 왜 기억을 못 하실까...





솔직히 그쯤 되면 빚은 문제가 아니야. 아니, 문제는 맞는데, 더 큰 문제는 같이 온 동기들한테 입 터는거지. 또 어디서 쉼터니 뭐니 주워들어서 같이 나가자고 꼬시면 이게 많이 귀찮거든. 혹시나 또 진짜 빚도 안 갚고 튀는 거 놓치는 상황 오면, 몇 명 비는 건 둘째치고 남은 아가씨들이...그거 다룰라면 진 정말 많이 빠져... 얼마나 힘들어?



 

어떻게 다른 수 있나. 대책을 세워야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편하게 가야 서로 좋잖아. 그렇지? 그럼 뭘 어찌해야할까. 영업에 지장 생기기 전에 본보기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하고 생각이 닿아요. 제대로 보여줘야 한동안 얌전할 거 아냐.



 

아가씨 쓰는 업소에는, 어지간하면 골방이 하나씩은 있어. 물론 이럴 때 쓸라고 만들어놓는 데고. 좀 고급지게 훈련소라고도 하고... 뭐 말들은 여러개 쓰는데, 나는 그 중에서 도살장이란 말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 왜냐면 단순하게, 죽어서 나오거든.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른 곳이 화장실 하나는 아니라.



 

뭐 복잡한 방법 안 써. 일단은 그냥 패. 여자 몸이 참 약한 거 알아? 남자가 작정하고 패면 찢어지고 부러지고 이런 건 일도 아니야. 아아, 그렇다고 진짜 부러뜨린다는 소리가 아니라. 일을 시켜야 팬 보람도 있는건데 어디 잘못되면 큰일나지. 딱 정신만 오락가락하게, 웬만큼만 패고 보는 거야. 물론 얼굴은 피해서.



 

그 다음에 어쩌냐면 이름을 불러. 본명이나 원래 쓰던 가명 말고 진짜 듣도보도 못한 걸로. 당연히 대답 안 하지. 아니 실컷 처맞고 겨우 앉아있는 마당에 그게 이름인 줄 무슨 수로 알어...그래서 그냥 멍하니 있으면, 아이고 잘됐다 또 그거 구실 삼아서 줘 패는 거야. 대답 안하냐고. 지금 너 부르는데 대답 안하고 죽고싶냐고.



 

그럼 진짜 죽겠으니까, 이러다 죽게 생겼으니까 일단 네, 네, 해. 너 아무개야? 이러면 또, 네, 네, 저 아무개예요. 저 아무개예요. 벌벌 떨면서. 때리지 말라 이건데.



 

거기까지 왔으면 반은 됐지 이제. 앞으로는 반복만 남았다. 죽으면 안 되니까 중간중간 먹이고 재우고 하면서. 초반에는 그나마 유코니 소라니 대충 이름 구색은 맞춘 걸로 부르다가 점점, 예를 들면 쓰레기, 친구, 할아버지...오만 거 다 갖다붙여. 헷갈리라고 사람도 수시로 바꿔주고. 혹시라도 가만 있으면 너 부르는데 어디다 정신 빼놓냐고 패. 그 짓거리, 길게도 말고 딱 이틀 하지, 그럼 그냥 왁! ...만 해도 대답부터 한다. 적응력이란 게 무서워서.



 

뭐야.



 



무서워?



 

아니, 잠깐만... 이거 내가 진짜 팬 줄 알겠네. 얘기만 들었는데 무서워? 명색의 귀신부장이라는 분이...생각보다 되게 평범하게 사셨구나.어어, 저, 그러지 말고 고개 들어봐,응? 들어. 사람은 모름지기 예의가 있어야돼. 아직 안 끝났대도. 



 

옳지. 



 눈빛 한번 맘에 드네



.



 

어디까지 했나...아 그래. 제일 중요한 단계야. 그렇게 때리고 때리다가, 완전히 정신 놓기 직전에 툭 불러보는 거야. 본명을. 



 



대답 안 하면 처 맞는다고 잘 배웠잖아. 그 와중에 진짜 이름 나오면, 가만히 있겠어? 뻔하지. 네...  



 



근데 네, 하는 순간 진짜 죽는 거야.



 



본명이, 뭐냐, 그래 미츠바라고 하자. 응? 왜그래 난 그냥 생각나는 여자이름을 예로 든 것 뿐인데 눈 부라리지마, 아무튼 니가 미츠바야? 니가 미츠바라고? 하하-이 이게 어디서 를 해, 니가 무슨 미츠바야! ...이러면서 주먹질 발길질. 여태까지 맞은 건 아무것도 아니게. ​참 그러고 어디 고장 안 나게 하는 것도 일이야. 그니까 솜씨 좋은 애들을 써야 돼... 아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하여튼 완전 숨 넘어간다고 꺽꺽댈때 돼서, 니가 미츠바야? 다시 묻는다. 그럼 그제서야 알아듣고 아니에요. 저 미츠바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살려주세요 제발요...




그렇게 한 두어번 아니에요, 하게 만들고 나면, 언제 본명을 불러도 대답을 안 해. 패트병, 할아버지, 하다가 이름다운 이름 딱 하나 들리는데 그것만 나오면 입을 다물어. 귀신같이. 


어후...



돼지는 멱을 따면 그만이잖아. 근데 사람 잡는 건 이렇게 어려워.



오케이, 됐어 이제. 작업 끝났어. ​이, 사람 뇌가 신기해가지고, 보통은 그러면 자기 이름이 각인이 돼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아니야. ​​살자고 그러는 건지 완전히 지워버린다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문 열고 내보내주면? 걔는 자기가 누군지도 몰라. 절대 몰라. 마리오네트잖아. 룸 정도면 몸 대주기보다 사람 대하는게 중요한게 거기에 왜 그딴 인형을 써, 조종하고 버리면 그만~. 쓰레기지 쓰레기.


사실 걔네들, 아까 말했지 본보기라고. 진짜 딱 그게 목적이라 별로 오래 두지도 않아. 까딱하면 니네도 얘처럼 된다, 아가씨들한테 얼추 보여주고, 어디 몸값이나 건질 데에다 갖다 버리면 땡. 본보기도 되고 얼마나 좋아?



 

어때, 재밌지? 내가 아주 특별히, 히지카타, 너한테만 해주는거야. 니 버릇 고쳐주려고. 원래 돈 주고도 못 듣는 얘긴데​ 이거를.










  



 마리오네트...





 내가 너, 딱 그 짝 나게 만들어줄게.

니 버릇 고쳐줄테니까.



[원피스/사보루]

 

 


내부 온도가 뜨겁다. 과열된 살덩이가 서로 부딪힐 때마다 땀이 후드득 흩뿌려진다. 내뱉어진 거친 숨들이 습하다. 맺힌 땀에 시트는 축축해진다. 땀에 푹 젖은 머리끝에 달린 땀이 루피에게 떨어졌다.

 

"루피야 더워.. 제발 이불 좀 치우고 하자.. 응?"

 

"싫... 싫어..."

 

루피는 오늘따라 고집이 심했다. 갑자기 평소와는 다르게 오늘은 뭔가 좀 부끄럽다며 이불을 뒤집어써 하자는 말에 가볍게 응했지만 한 여름에 아무리 얇은 이불이라고 해도 꽁꽁 싸맨 채로 섹스를 하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사보는 헥헥 거리는 루피의 축축한 목 주변을 입술로 짧게 입을 맞춰주면서 덥다, 죽을 것 같다. 등등 어떻게든 루피에게 부탁을 했지만 이불 끝을 두 손으로 꽉 잡고 머리끝까지 덮어선 허리를 움직이는 루피의 고집은 꺾기 힘들었다.

 

 "하... 읏.... 사보... 아... 응... "


 "ㄹ.. 루피.. "


 "아... 아...! 읍...흐읏...... "

 

서로의 허리가 엇박자로 부딪힐 때마다 루피의 표정은 다양하게 바뀌었고 루피가 눈을 질끈 감을 때 눈썹 머리가 따라 올라가면서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사보는 그 장면에 비시 웃으면서 마른 입술을 가져갔다. 사보는 제일 좋아하는 것은 독특하게도 루피의 톡 튀어나온 눈썹 부분이다. 사보는 유독 루피의 눈썹 뼈 부분에 집착이 심했다. 관계를 가질 때뿐 아니라 키스할 때나 같이 영화를 본다던지, 밥을 먹다가도 습관적으로 루피의 눈썹 뼈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루피는 더럽다, 변태냐 등등 싸늘하게 말하면서 하지 말라고 하지만 사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사..사보....나 안돼....이제...하읏....."

 

"루피...으..사정해...이제 괜찮아..후.."

 

사보가 더 적극적으로 몰아붙이자 루피는 아-씨!! 짧게 소리를 지르더니 이불 끝을 쥐던 손에 힘을 풀어 그대로 사보의 목에 뱀처럼 휘감았다. 사보도 미끌거리는 몸을 더욱더 밀착시키고 격렬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뜨겁고 비좁은 공간 안을 마구 휘젓던 사보는 저릿거리는 허리에 힘을 주고 따뜻한 물을 토해냈다.

 

"아-!! 흐읍...으...하.."

 

평소 밝고 씩씩한 표정이 아닌 섹스를 가진 이후 루피의 표정은 야하다. 사보는 루피의 그런 표정을 좋아했다. 사보는 헤- 바람 빠지듯 작게 웃더니 루피의 말간 눈동자를 바라본다. 땀방울이 흘러내려 가면서 사보를 간질였다. 사보는 줄줄 흐르는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쓱 닦아내었고, 닦아낸 손바닥은 한강 수준이었다. 그러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이젠 못 참아 더워 덥다고!!"

 

사보는 이불을 뒷 발로 걷어 차 버리고는 그대로 루피를 안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분명 에어컨도 틀어놨는데 왜 이불을 덮어쓰자고 한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하...더워어...."

 

"그니까 이불 같은 거 덮지 말랬잖아. 에어컨 트는 의미가 없다고 루피. 기다려, 이제 곧 시원해질 거야."

 

사보는 티슈를 쭉 뽑아 루피의 얼굴을 따갑지 않게 살살 닦아냈다. 루피의 말랑한 볼살이 티슈로 닦아낼 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였다. 찹쌀떡을 연상케 하는 루피의 볼을 사보가 쭉 잡아당기며 웃었다.

 

"내 얼굴로 놀지 마 사보"

 

"그치만 너무 말랑말랑해서 기분 좋아."

 

루피는 툴툴거렸지만 저항하지 않는다. 사보는 그런 루피가 귀여워 어찌할 줄 몰랐다. 괜히 자기 쪽으로 꽉 끌어안으며 땀에 절은 살끼리 비비적거렸다.

 

"악! 더워 그리고 땀!! 사보! 더러워!!"

 

"더럽다고?!!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대체 이불은 왜 덮고 하자고 한거야?"

 

"...."

 

루피의 눈이 쪼르르 오른쪽으로 쏠린다. 뭔가 할 말이 있고 그 말머리를 어떻게 잘 꺼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한다거나, 거짓말을 할 때 라는 뜻인데 아마 후자는 아닐 것이다. 사보는 그런 루피에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애초에 거짓말도 못 하는 녀석이고 그걸 알고 있는 사보 이기에 재촉하지 않는다. 루피가 자신에게 직접 얘기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사실.. 오늘 이거 주려고 했는데.. 오후 내내 타이밍을 못 잡아서.."

 

루피가 온종일 꼭 쥐고 있던 주먹을 슬쩍 폈다. 사보의 얼굴이 잠시 멎었다. 루피가 오랫동안 꼭 쥐고 있던 손아귀에 들어있던 건 보석이 박힌 심플한 반지 두 개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쥐고 있던 건지 손바닥은 빨갛게 변해있었고 반지 자국으로 심하게 파여있었다.

 

"루피..너..."

 

"맨날 난 받기만 해서 나도 뭔가 좀 하려구 했는데 음... 딱히 줄 만하게 생각이 안 났어.."

 

아르바이트 끝나고 케이스에 넣어 둘 생각도 못 하고 부랴부랴 사 들고와서는 어떻게 줘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결국 타이밍을 생각 못 해 언제 줘야 할지도 몰라서 일단 이불을 덮어쓰자는 핑계로 반지를 손안에 감춰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보는 대충 루피가 오늘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수저와 젓가락은 양손으로 쓰던 루피가 왼쪽 손으로만 사용했던 거, 옷을 갈아입을 때도 한쪽 손은 거의 쓰지 않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해서 사보가 입혀줬었다. 사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너무 귀엽고 웃겨서 입술이 다 꿈틀거렸다.


사보는 왼손 약지에 루피의 이니셜 L 이 새겨진 반지를 쏙 집어넣었다. 루피는 언제 껴놨는지 이미 약지에 사보의 이니셜 S 가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었다. 가운데 예쁘게 박혀있는 투명하고 반짝이는 보석이 너무 예뻐서 또 한편으론 너무 기특해서 사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격이 얼마나 나갔을까..

 

"예쁘다. 루피 비쌌을 텐데 괜찮아?"

 

"응 그렇게 안 비싸 "

 

사보는 대뜸 물었고 루피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5초 정도 네 개의 눈동자가 서로의 눈동자에 겹쳐진다. 루피는 다시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사보의 눈치를 살폈다.

 

"너 거짓말 하는 거 다 티나 요번 달 월급 제대로 남아 있긴 한 거야? 반타작 났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응......."

 

"거짓말 다 티 난다고"

 

사보는 루피의 코를 살짝 꼬집어 비틀었다. 눈코입이 가운데로 몰리며 오버스럽게 아파하는 게 귀여워 그대로 루피를 끌어당겼다.

 

"정말. 아 사보 그러고 보니 말이야. 그거 언제 뺄 거야! 느낌 이상하다고."

 

"왜 싫어 계속 품고 있을 거야."

 

사보는 루피의 몸속에서 자신의 것을 뺄 생각이 없었다. 루피가 움직일 때마다 사실 조금씩 다시 단단해져 가는 게 느껴지는데 루피는 그것도 모르고 자꾸만 저항했다.

 

"아...조옴...."

 

부끄러워 하는 표정이 귀여워서 사보는 루피의 반응을 더 즐기는듯했다. 말라서 등을 굽을 때마다 톡 튀어나오는 척추들을 손가락으로 쓸고 폭 패인 빗장뼈를 앞니로 잘근잘근 씹었다.

 

"사보 변태야? 나 이제 쉴 거야 힘들단 말이야-"

 

"싫어- 너도 니 마음대로 나 덥게 만들었잖아.나도 이젠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누구 맘대로야?"

 

"당연히 내 맘대로지. 형 명령이야 루피"

 

사보는 그 말을 끝으로 루피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밀착할 때마다 다시 빨려 들어가는 사보의 성기가 두근거려온다.

 

"아....으..."

 

이미 한번 뚫어놓은 길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잔뜩 달궈놔서 예민해진 안쪽을 자꾸 애태우는 사보가 미워 루피는 도끼눈을 하고 노려봤지만 이미 눈도 감고 귀도 닫은 사보는 루피에게 부비적거리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만 올릴 뿐이다.

 

"아- 쫌!"

 

루피가 사보의 턱을 쭉 밀면서 떼어내려 애를 썼다. 사보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딱딱한 이물감이 안쪽 내벽을 쓸며 빠져나가는데 루피는 간드러진 신음을 흘렸다.

 

"루피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니까"

 

사보의 예쁘고 따뜻한 웃음이 루피를 흔들기는커녕 짜증만 돋궜다. 뒤로 물러나려는데 에어컨의 찬 바람에 으슬으슬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 이러면 감기에 걸릴지도 루피의 목과 허리를 단단한 두 팔로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가 뒀다. 어느 정도 식어버린 살들이 다시금 따뜻함을 찾아 꼭 맞붙는다. 사보는 걷어찬 이불을 다시 자신 쪽으로 끌고 와 덮었다.

 

"으응...사보...나 진짜 자고 싶단 말이야..찝찝해서 씻고싶기도 하고."

 

루피의 칭얼거림에 사보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아유 귀여워!!! 사보는 루피의 몸을 팔과 다리로 옭아맸다.

 

"그래, 좋아 루피. 자는 거야 둘이 꼭 끌어안고 자는 거야."

 

"아니 내 말 뭐로 들은 거야!! 빼라니까! 멍청아!"

 

루피가 빽빽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사보도 움찔했다. 그러다 아아, 알겠어 사보는 키득거리며 웃더니 천천히 허리를 뒤로 뺐다.

 

"으..!"

 

답답한 이물감이 뒤쪽으로 서서히 빠져나가자 루피는 얇게 신음했다. 사보가 루피 안에서 나오자마자 쓸리고 부딪히고 조금 부어있는 루피의 안에서 희고 끈적이는 액체가 포록포록 튀어나왔다. 루피는 신경 쓰지 않고 눈을 감았다.

 

"루피, 이렇게 두면 시트 더러워져."

 

"사보가 내일 세탁하면 되지 뭐."

 

"니 다리 쪽도 더러워지는걸?"

 

"사보가 씻겨주면 되지 뭐"

 

"..그래?"

 

사보가 방긋 웃으며 루피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단단하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꽉 눌러 잡았다. 촉감은 매우 좋았다. 사보는 뻐근해진 근육으로 움직이기 힘들 루피를 배려해 조심스레 아프지 않게 안아 들었다. 루피는 그에게 맞춰 두 팔을 사보의 목에 휘감았다.

 

"그럼 이 형아가 씻겨줘야지. 우리 루피 아프니까"

 

"응 깨끗이 씻겨 구석구석!나 피곤하니까 좀 잘 좀 해줘"

 

사보는 루피의 작지만 각지고 날 선 콧대에 쪽 작게 입을 맞추고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사보 난 찬물이 더 좋은데"

 

"안돼 감기 걸려 그리고 그거 근육통 올지도 모르니까 따뜻한 물로 몸 좀 풀어줘야 해."

 

"치- 수영장 가고 싶다. 사보~ 물에 놀고 싶다~"

 

"헤엄도 못 치면서 무슨 수영이야."

 

"사보보단 잘해! 나 어릴 적에 수영 연습 많이 했는걸!"

 

루피가 욕조 안 가득 담긴 물을 주먹으로 팡팡 내려쳤다. 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아 무슨 짓이야 루피! 제대로 씻길 수가 없잖아!!"

 

사보가 질색하며 피하자 루피가 멈칫하더니 씩 웃고는 아예 사보 쪽으로 물을 뿌려댔다.

 

"하하하!!! 사보 푹 젖었어~"

 

"루피 너...."

 

젖은머리가 시야를 가리고 이마를 간질였다. 사보는 루피를 노려보며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저 순진하고 실없는 웃음을 한없이 뿌려대는 루피에게 뭐라 더 잔소리하려고 했다가 어차피 자신도 씻을 거였고 머리 좀 젖는다고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 그냥 생각을 접었다.

 

" 못 말려 정말 진짜 이 말썽꾸러기. 좀만 비켜봐 나도 들어가게"

 

"아? 좁은걸!"

 

"너 씻기려면 이게 더 편하단 말이야."

 

사보가 루피의 등을 앞쪽으로 쭉 밀어내더니 그대로 욕조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루피가 낑낑거리며 불만을 표했으나 듣지 않는 사보였다.

 

"아 불편해- 사보 나가!"

 

"너 씻기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니까 루피"

 

루피가 바동거리자 한 손으로 루피의 어깨를 짓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는 루피의 제일 민감한 부분을 찾아 헤맸다. 열꽃이 핀 목덜미부터 마른 몸이라 깊게 파여있는 빗장뼈까지 아까 이불 속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던 절경들이 사보의 눈에 들어왔다.

 

"으..음..사보....."

 

"루피 괜찮아?"

 

사보의 물음에 루피는 괜히 얼굴만 빨개져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루피는 평소 말이 많지만 이런 행위를 하게만 되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표정이 참을 수 없어서 금새 몸을 부르르 떨어대며 루피를 꼭 끌어안고는 좋아죽으려고 하는데도 루피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무튼 귀엽다.

 

"꽤 안쪽까지 들어갔어. 루피. 관장 해야 할지도?"

 

사보가 발게진 루피의 귀 안쪽 가까이 입술을 가져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움찔거리는 루피의 반응이 재밌다.

 

"싫어. 그거 기분 이상해"

 

루피가 고개를 사보 쪽으로 돌렸다. 명백히 싫다는 표정. 사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피의 이마와 눈썹에 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다정히 떼주었다.

 

"응 안 해. 장난이야 금방 빼낼게. "

 

사보의 손가락이 루피의 안쪽을 쉽게 파고들었다. 뜨겁고 쫀득하게 손가락을 잡아 감싸는 루피의 안은 미끌거리는 점액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손가락을 굽혀 조금씩 액을 끌어냈고 좀 더 깊이 손가락을 집어넣을 때마다 루피는 경련하며 짧게 신음했다.

 

"응...! 읏...응..."

 

마구 휘저어져 뱃속까지 움찔거림이 느껴졌다. 루피는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미간을 구겼다. 신음이 터져 나오는걸 참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었다."

 

"으...응..?"

 

손가락 갯수가 세 개로 늘어나자 루피의 허리가 조금씩 휘어갔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오늘따라 확실히 더 야한 루피 때문에 사보는 마른 침만 삼켰다. 더욱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루피. 얼굴 보여줘."

 

"으...응..."

 

"예쁘다 우리 루피."

 

사보는 또 습관적으로 루피 눈썹 뼈 윗부분을 뜨거운 혀로 핥았다. 쓸데없는 버릇이 들어버렸다. 사보는 물방울이 흐르는 고운 루피의 이마선을 입술로 천천히 미끄러트려 내려갔다. 종착역은 얼굴따라 새빨개진 귓불이었다. 루피는 부끄러워 할 때 얼굴보다 목과 귀가 더 많이 붉었다. 동그랗고 말랑거리는 귓불을 조심스레 빨자 루피가 사보 쪽으로 조금씩 끌려갔다.

 

"아....! 사보...읏.."

 

피부와의 마찰소리가, 입안에서 핥아 오를 때마다 움찔거리는 어깨가,깨물면 금방이라도 톡 터져서 새콤한 과즙을 터트릴 것만 같은 귓불이, 그 와중에도 루피의 뜨거운 안쪽을 휘젓는 손가락이 어디에도 집중을 할 수 없어 사보에게 몸을 맡긴 루피는 마치 푸딩처럼 녹아갔다.

 

"루피...넣어도 돼?"

 

물고 빨고 핥고 수없이 난 이빨 자국에 지쳐 축 늘어진 귓불에 마지막으로 쪽 입술을 맞추더니 나긋하게 속삭인다.

 

"뭘 넣어....읏.."

 

손가락으로 자꾸만 스팟을 찔러대며 루피의 반응을 보는 사보가 미웠다. 루피가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순간 사보가 중지 손가락을 굽어 깊숙한 안 쪽을 눌렀다. 마치 스위치 누르듯 가볍게 쿡 찌르자 루피가 참고 있던 신음을 크게 내질렀다.

 

"으..아앗!"

 

"루피 굉장해 진짜 굉장해.."

 

"아..ㅅ..좀..."

 

루피와 사보의 성기는 이미 다시 단단해져 있었다. 욕실은 이불 속보다 더 뜨겁고 후덥지근했지만 사보는 불평하지 않았다. 루피도 아까처럼 덥다며 징징거리지 않았다. 사보는 루피의 마른 근육이 자잘하게 붙어 단단한 배를 두 손으로 감싸 끌어안았다.

 

"아...사보...거기..."

 

옆구리를 손끝으로 살살 간질이더니 가슴 쪽으로 손가락이 춤추듯 움직였다. 이미 잔뜩 딱딱해 꼿꼿하게 서 있는 유두를 집게손가락으로 가볍게 잡아 쥐곤 아프지 않게 비튼다.

 

"하...ㅅ...앗.. 읏.."

 

건장한 사내들이 의례가지듯 갈색을 띤 유두가 아닌 루피는 좀 더 연한 선홍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이미 발기해있는 루피의 성기를 가볍게 말아쥔 사보가 아프지 않게 문질렀다. 사보의 손길이 왔다 갈 때 마다 루피의 등이 파르르 떨리며 굽혀졌다. 톡 튀어나온 척추뼈를 사보가 사탕 먹듯 빨았다. 어설프게 굽혀져 있는 서로 딱 붙어있던 무릎이 사보의 손에 의해 점점 벌어졌다. 한쪽 다리는 욕조 바깥쪽으로 탈출했고 무릎 뒤쪽을 사보가 한쪽 팔로 감싸 루피의 성기가 완전히 노출되게 했다.

 

"루피. 벌써 이렇게 됐어?"

 

"윽..하...사보도 마찬가지잖아...아.

 

"그러네 나랑 똑같네 루피"

 

사보는 루피의 광대뼈에 입술을 가져갔다.신음을 낼 때마다 온몸이 떨려 움찔거리는 게 사보에게도 느껴졌다. 차가운 물이었다면 금방 식어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뜨거운 물 속에서 여전히 건강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성기가 루피는 원망스러웠다. 이미 한껏 풀려 사보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있는 안쪽엔 남은 정액 찌꺼기와 약간의 물이 들어차 있었다.

 

"괜찮지? 루피."

 

"뭐...뭘..."

 

"허리, 허리 좀 들어봐"

 

사보는 루피의 성기를 만지던 손을 허리 쪽으로 옮기더니 간질이듯 쓸어올렸다. 욕조 바깥을 활보하던 한쪽 다리를 욕조 안으로 다시 들여보내고 바들 거리는 두 다리를 잡아주었다. 루피는 굽어있던 허리를 조금씩 펴들었다.

 

"루피 옳지. 잘하고 있어."

 

"응...힘이 안 들어가 주저앉으려고 하는 루피의 허리를 다시 사보가 잡아주었다. 내가 도와줄게. 작게 속삭이더니 루피를 천천히 자신의 성기 밑으로 맞춰 내린다. 분명히 한참을 뚫어놨던 길인데도 루피의 내벽은 누군가의 침입에 심히 요동을 쳤다.

 

"아..!ㅅ...큽...사보...."

 

"착하지 루피, 힘을 빼. 그래야 안 아파"

 

매일 루피와 관계를 맺는데도 루피는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언제나 사보가 다정한 어투로 타이르듯 조곤조곤 이야기하면서 루피를 안심시키고 긴장을 풀어주었다. 무서워하는 루피에게 계속 이름을 불러주며 강아지를 만지듯 루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아..! 들어...가...ㅆ..크윽...."

 

반쯤이나 집어삼켜 진 사보의 성기가 자잘하게 떨려왔다. 수없이 해온 섹스지만 물속에서 하는 건 또 처음이네, 사보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루피는 천천히 허리를 아래로 내렸고 허리를 붙잡던 왼쪽 손을 루피의 잔뜩 성이 난 성기를 조금은 거칠게 쥐어흔든다.

 

"하읏...악..! 사보. 힘들어, 응...무서워."

 

"걱정하지마, 나 잖아."

 

뿌리 끝까지 쫀득한 내벽이 꽉꽉 감싸 조여온다. 루피는 집어넣는 것도 곤욕이었는지 사보에게 등을 기대 숨을 포르르 내쉬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루피, 여기봐봐"

 

"응...읏..."

 

루피가 상체만 살짝 뒤쪽으로 돌리고 사보가 불편하지 않게 고개를 옆으로 꺾는다 눈이 마주친 둘의 표정은 서로를 흥분시킬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사보가 말캉거리는 루피의 입술을 쪽 빨아먹고는 허리를 움직였다.

 

"사보..응..으응....조ㅁ.."

 

사보의 입안에 집어 삼켜진 루피의 입에서 뭐라 말이 튀어나왔지만 제대로 된 의사가 전달되지 못했다. 오히려 루피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꿈틀거릴 때마다 사보는 집요하게 입술을 가져갔다. 루피의 입술은 곧 사보의 입술로 인해 퉁퉁 부어 있을 것이다.

 

사보의 거친 허리움직임이, 멈출 줄 모르는 루피의 성기를 붙잡고 흔드는 손과, 이제는 누구의 타액이 흐르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비벼지는 두 입술이 루피의 모든 신경을 자극하고 사보가 어릴 적 다쳤던 루피의 왼쪽 뺨에 흉터를 젖은 손으로 쓰다듬을 때 마다 욱신거리는 느낌의 통증마저도 쾌감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루피는 더는 참으려 하지 않고 그저 생각을 놔버렸다.

 

"루피..읏...괜찮지?..후.."

 

이미 눈이 풀려 반쯤 감겨있는 루피는 아래에서 위로 푹푹 파고드는 사보의 성기에 일일이 반응하고 쾌감에 젖은 눈물이 시야를 가려도 사보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사보의 물음에 대답은 못 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선 거친 신음만 튀어나왔다.

 

"으...아앙...큽..윽...하아읏.."

 

"하..하아..루피..."

 

"제..발..하으...못..참아..응...."

 

"참지마, 참지 말고 해도 괜찮아."

 

사보의 기분 좋은 저음이 루피의 달팽이관을 울리고, 마치 미약을 잔뜩 집어넣은 것처럼 달콤하고 나른한 목소리는 루피의 성기를 심히 자극했다. 움찔거릴 때 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갔고 사보의 성기를 강하게 죄이면서 루피는 사정했다.

 

"아..!! 응..읏...아읏..!"

 

"아까보다 많이 나왔네. 괜히...후...뿌듯한걸?"

 

"아...으...흐앗!"

 

아직 사정하지 않은 사보가 이제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단단한 두 팔이 루피의 허리를 감싸고 강하게 몸을 흔들었다.

 

"아!!윽..응..응..!"

 

깊숙히 찔러올 때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욕실 안에 울려 퍼졌고, 거칠게 몸을 움직일때마다 흔들리는 물 표면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보와 루피가 딱 붙어지면서 전해지는 서로의 숨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고,사보는 부드러움을 가득 집어넣은 말투로 루피에게 말을 건넨다.

 

"예쁘다. 얼굴도, 하..목소리도, 깨끗한 피부도, 동그랗게 큰 눈도,후..읏...내가 좋아하는 눈썹 위도, 예쁘게 자리 잡은 근육들도, 뜨거운 속살까지 다 좋아해...루피..하...음..."

 

말이 끝나자마자 사보는 허리를 뒤로 빼 루피에게 빠져나갔다. 내뱉어진 사보의 정액이 루피의 허리 위를 적셨다. 체내사정을 하면 더는 루피가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배려한 것이다. 나긋나긋한 사보의 저음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서로 연결되어 있던 몸이 빠지면서 아까 남아있던 정액까지 모두 빠져나갔다. 이미 적잖게 미지근해진 욕조 안에 차 있던 물은 절반가량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아..아..하으..우...ㅅ...."

 

"아....힘들다...역시 두 번은 힘들어 그치?"

 

사보는 또 버릇처럼 루피의 눈썹에 입을 진하게 맞추었다. 참 독특한 집착을 하게 되었구나 싶었다. 그냥 눈썹 위에 입술을 가져갈 때마다 한쪽 눈을 찡그리고, 다른 한쪽의 눈이 사보를 쳐다볼 때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그때부터 중독되어 버린 것 같은데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눈썹에 집착하니 루피도 하지 말라며 저항할 때가 많았다. 사보는 이미 젖은 솜이불처럼 축 늘어져서는 마치 잠에 취한 듯 작은 숨소리만 내뱉고 있는 루피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이래선 목욕한 거라 하지도 못하게 됐네"

 

"사보..하우....사보 때문이잖아"

 

"응 미안 루피."

 

얼굴은 전혀 안 미안한 듯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보의 얼굴을 루피가 밀어냈다. 욕실 밖으로 나오니 숨이 트인다. 사보가 잠시 루피를 소파에 앉혔다. 긴 수건을 꺼내 소파에 누워서 꺼두지 않아 다 지난 옛 예능프로그램 재방송이 나오는 티비를 보는 둥 마는 둥 멍하니 바라보는 루피에게 다가가 감싸주었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 다 마르지 않아 젖어있는 몸이 차기만 하다.

 

"감기걸려 루피 일어나봐"

 

순순히 일어나 앉는 루피를 흰 수건을 이용해 물기를 닦아주었다.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은 꽤 차가워서 사보는 재빨리 루피에게 잠옷을 입혀주었다.

 

"루피 내일 아르바이트 안 가지?"

 

"응"

 

"나 내일 오전에 수업 없어.오랜만에 같이 밥 먹자."

 

"햄 구워줘."

 

"그럼 당연히."

 

루피의 젖은 머리를 닦아주던 사보가 햄 얘기에 헤실거렸다. 다 커도 어린애 입맛은 여전했다. 루피는 사보처럼 대학을 다니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래서 종종 같이 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어서 둘은 꽤 아쉬워 했었다. 사보가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하고, 다시 자거나 아예 먼저 나가기도 하고 그냥 루피 혼자 편의점에서 밥을 때우기도 하는데 그럴 땐 항상 사보에게 혼이 났다.

 

"사보 추워."

 

"에어컨 끌까?"

 

"아니, 그럼 금방 더워지는걸."

 

루피가 사보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사보는 어쩔 수 없네, 작게 웃더니 루피를 안아 들었다. 사보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꼭 끌어안는다. 침대에 시트를 잘 정돈하고 루피를 천천히 눕혔다. 지친 아이의 얼굴을 하는 루피가 귀엽고, 안쓰럽기도 해서 괜스레 웃음이 났다. 루피는 침대에 눕혀지자마자 최면에 걸린 듯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잘자 루피."

 

사보가 루피의 동그란 이마를 쓰다듬으며 루피의 볼을 살짝 꼬집어 흔든다. 손을 내저으며 하지 말라며 짜증을 부렸을 루피가 요지부동 가만히 있는다. 곤히 자고 있을 루피를 건드리지 말아야지 사보는 루피에게 손을 거두었다. 옆에서 턱을 괴고 루피의 얼굴을 감상하던 사보가 에어컨 리모컨을 집더니 온도를 조금 올린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네, 사보는 이불을 집어 루피 가슴 쪽까지 덮어주었다.


루피가 꼭 잡고 놔주지 않아 잔뜩 구겨진 이불 끝이 사보의 눈에 들어왔다. 다시 눈을 도르르 굴려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예쁜 짓만 골라서 해. 아주.."

 

이제는 침까지 흘리며 잠에 빠진 루피를 한동안 보고 있다가 이불 속으로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이미 꿈나라를 펼치고 있는 루피의 모가 얇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루피의 매끈하지만, 결코 호리호리하지 않은 단단한 허리를 꼭 끌어안고 한참을 부비적거렸다. 살짝 벌어진 루피의 입술 틈에서 색색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보가 루피의 눈썹에 입을 맞추는 것을 마지막으로 잠이 들었다.

 


내일은 식탁에 루피가 좋아하는 불고기와 햄, 계란요리가 올라와 있을 것이다.

 

 

 


 

[원피스/조로산]


1.

 


눈을 떴다. 가늘게 떠진 눈꺼풀 사이로 희미한 아침햇살이 새어 들어와 잠을 방해했다. 조로는 혹시라도 옆에서 곤히 자고있는 이가 깰세라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손을 뻗
어 커튼 자락을 단단히 여몄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편히 자고 있는 모양이다. 옛날 같았으면 진즉에 먼저 깨어나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아침을 맞
아주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바라기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조로는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조로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
려왔다. 조로의 발에 채인 컵이 데구르르 굴러 물웅덩이를 만들어 냈다.바닥엔 물컵과 작은 알약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녀석에게 또 통증이 찾아왔나
보다. 그럴 땐 그렇게 깨우라고 말했는데.


아마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건 더럽게 싫어하는 녀석이라, 단단히 일러둔 제 충고도 무시하고 혼자 밤새 가슴을 부여잡고 끙끙 앓다 겨우 잠듦이 분명했다. 조로는 한숨을 푹
내쉬고 약병을 협탁 위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에 띈 달력에는 2월 22일 오늘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하나 쳐져 있었다. 그것은 오늘 그가 병원에 들러 정기검진
을 받는 날임을 뜻했다. 휴대폰을 밝혀 시간을 확인한 조로는 방의 불을 켜고 곤히 자고있는 남자의 어깨 위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몇 번 약하게 흔들어 깨우자 남자는
눈을 천천히 떴다. 아직 밝은 풍경이 익숙치 않은 듯 그는 다시 푸른 눈을 덮어버렸다.

 


"..몇 시야."

"9시다. 오늘 병원 가는 날이니까 얼른 일어나."

 


병원이라는 말에 단번에 표정을 일그러트린 산지는 그대로 이불을 끌어올리려 했다. 물론 그 마저도 바로 팔을 붙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조로에게 막혀 벌떡 일어나야 했
지만. 결국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을 포기한 산지는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섰다.

 


"왜 어젯밤에 안 깨웠냐."

"깨웠으면 일어나기나 했게, 이 잠 괴물아? 약 먹고 바로 진정됐어."

"......"

"..진짜야 망할 놈아.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결국 톡 쏘아대는 말투에 먼저 백기를 든 조로가 알겠다며 그의 어깨를 잡고 방 밖으로 떠밀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이상 추궁해봤자 이 녀석이 말해줄 리도 만무하니까.

 

 

"이거 놓으시지 마리모? 밥 해야 하니까."

"새벽까지 아파서 골골댔던 주제에, 요리는 무슨."

"안 돼. 안 그래도 영감한테 가게 출입 금지당해서 근질근질해 죽겠는데! 맡겨두고 넌 빨리 가서 눈꼽이나 떼고 와라?"

 


산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으며 널따란 주방으로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산지의 너스레에 덩달아 웃음을 픽 지은 조로는 앞치마를 두르는 뒤태를 감상하며 식탁 의자
를 차지했다. 끈이 단단히 조여드는 허리가, 예전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말라 있었다.

 


"오늘 몇 시에 들어올 거야."

"감독이 놔줄 때. 왜, 빨리 보고 싶.."

"아-니. 오랜만에 니 놈 얼굴 안 봐도 된다는 게 좋아서 미칠 것 같다, 왜."

"니가 감독한테 연락하는 바람에 결국 연습 나가게 됐잖아."

"내 핑계 대고 연습 빼 먹으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곧 무지 중요한 대회도 있는 놈이 나사 빠져가지곤."

 


끌던 냄비의 불을 내린 산지는 분주하게 밥그릇에 밥을 퍼 식탁으로 날랐다. 조로의 밥그릇에는 밥이 한 가득, 제 밥그릇에는 몇 입 될 것 같지도 않은 적은 양이 담겨있었
다. 그걸 보고 무어라 한소리 하려던 조로는 곧 입에 가득 들어오는 음식에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밥 많이 먹고 열심히 연습 해 마리모. 너 메달 따온다는 약속 안 잊어버렸지?"

 


산지의 말에 조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너 선수권에서 금메달 좀 따왔다고 그렇게 농땡이 부리면 파릇파릇한 후배들이 네 자리 언제 뺏을지 모른다?"

"....어."

"그러니까 미호크 감독님 말씀 좀 잘 듣고 해라. 내 트로피 먹튀 할 생각하면 죽어- 진짜."

 


입으로는 잔소리를 쏟아내면서 손으로는 또 제가 좋아하는 반찬을 슥 밀어주는 모습에 조로는 결국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부엌 찬장 한 켠에 자랑스레 자리하고 있는 황
금빛 트로피를 바라봤다. 산지가 처음으로 나간 세계적인 요리 경연 대회에서 당당히 거머쥔 대상 트로피였다. 그 소중한 트로피를 조로에게 안겨주며 산지는 자신의 올림
픽 금메달과 제 트로피를 교환하자고 말했다. 금메달을 따오지 못한다면 끝장을 내버릴 거라는 산지의 속뜻이 담겨있는 내기였다.
조로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산지는 씨익 웃었다.

 


"오늘 병원 갔다가 어디 들릴 거냐."

"나? 오늘 루피 녀석 만나기로 했어."

"루피? 이틀 전에 만나놓고 또?"

"따질 거면 나 말고 루피한테 따져. 이 자식,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엄청 귀찮게 군다고."

 


찬장에서 도시락통을 꺼내며 산지는 투덜거렸다.

 


"루피는 그, 알고있냐."

"... 아니. 아직 말 안 했다."

 


그럼 그렇지. 조로는 안타깝다는 눈으로 산지를 쳐다보았다. 절대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이런 소식을 듣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소중한 지인들에게 차례 차례 소
식을 전했다. 제일 처음으로 들은 게 자신이었고, 그 다음 말한 게 아마 나미였을 거다. 그 날 녀석은 팔뚝에 나미가 때렸음이 분명한 어마어마한 멍 자국을 달고 왔으니까.
하여간 그 마녀 힘도 세다며 팔에 연고를 발라줬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더 늦으면 오히려 상처만 더 커질 거다."

"나도 알아. 알긴 아는데.. 이상하게 루피 얼굴만 보면 입이 안 떨어져."

 


아마 제 딴에는 루피를 배려해준답시고 미루고, 미루는 것이다. 몇 년 전 형을 교통사고로 잃고 큰 실의에 빠진 루피를 프랑스에서 단번에 날아와 꼭 안아준 건 다름 아닌 저
녀석이었으니까. 더 말머리를 떼는 것이 힘든 게 당연했다.

 

 

"그래도 조만간 말하려고. 가게에 초대해서 한 상 거하게 먹여놓고 말해볼까, 생각 중이야."

 


오, 그거 잘 통하겠네. 맞장구를 쳐준 조로는 맛있게 만들어진 주먹밥을 통에 차곡차곡 담고 있는 산지의 머리를 살짝 매만지며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조로의 말에 산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2.

 

 

"밖에 추우니까, 병원 안에서도 목도리 풀지 말고."

"예예."

"가방 바꿨길래 약이랑 호흡기 앞주머니에 넣어놨으니까 잘 확인."

"예예."

 


이젠 조금 성의 없어지려는 말투에 조로는 진회색 목도리를 장난스레 꾹 당겼다. 옛날엔 자기도 이렇게 챙겨본 적 없는데 너 때문에 사람이 용 됐다며 조로는 산지의 코트
주머니에 핫팩과 막대사탕 여러 개를 넣어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산지는 여러 사탕 중 주황색 포장지에 싸여있는 오렌지 맛 사탕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렇게 오렌지 맛이 싫다고 했는데 기어코 까먹은 조로의 굉장한 기억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였다. 식탁에서 도시락통까지 빠짐없이 챙겨 든 산지는 현관 앞에 서서 옷매무새
를 정리했다.

 


"병원 앞까지 데려다줄게."

"오늘은 그냥 걸어가련다.  너 연습도 늦었고, 산책도 할 겸."

"안 돼. 밖에 날이 얼마나 추운데."

"애초에 5분 거리를 맨날 차 태워주는 니가 더 유난이야 인마. 나 간다."

 


혹시라도 조로가 뒤따라올까 싶어 빠르게 현관으로 가 신발을 우겨 신은 산지는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냉큼 문밖으로 나와버렸다. 분명히 녀석이 뭐라 소리치는 것을 들
은 것도 같지만, 더 이상 잔소리는 듣기 싫었기에 콧방귀를 뀌고 대문을 나섰다. 오랜만에 맞는 바깥 공기는 살을 엘 듯 차가웠지만, 폐까지 시원하게 뚫어주는 느낌이 좋
았다. 겨울이라 한란한 거리를 보며 올해 눈은 볼 수 있을까, 고등학생 때 루피 녀석 눈으로 빙수 해먹다가 배탈 났었는데 등의 실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목적지인 병원은
금방이었다. 하늘이 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솟은 대학병원. 산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병원 내로 들어섰다.

 

 

 

 


잠시 호명을 기다리던 산지는 안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블랙과 화이트로 심플하게 꾸며진 진료실 안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성큼성큼 안
으로 들어간 산지는 책상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책상 위에는 '흉부외과 전문의 트라팔가 로우' 라는 글자가 정갈히 새겨진 명패가 놓여져 있었다. 산지는
그걸 바라보며 자기랑 동갑이면서 참 괴물 같은 놈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이 왔는데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차트만 줄창 넘겨보는 로우가 괘씸해진 산지는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그의 품에 던지다시피 건넸다. 그제야 로우는 이게 뭐냐
는 표정으로 그의 눈을 마주했다.

 


"뭐긴 뭐야. 도시락 싸왔어. 니 놈이 하도 빵 싫다고 난리 쳐서 이번엔 주먹밥만 만들었으니까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자꾸 이렇게 무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안 그래도 너.."

"요리가 나한테 무리일 리가 없잖아 멍청아.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너야말로 의사란 놈이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싶냐?"

 

산지의 말에 로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말해도 차피 듣지 않을 걸 아니까. 결국엔 로우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도시락통을 책상 한 켠에 고이 챙겨두었다.

 


"에휴. 이제 얼른 말 해보시지?"

"뭘."

"며칠 전에 했던 정밀검사 결과 말이야. 그거 말하려고 오늘 오라고 한 거 아냐?"

"...음. 일단은 그렇지."

 


로우가 미처 말을 다 떼기도 전에 산지는 커다란 모니터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온통 거멓고 하얀 것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 4개월 남은 거 맞지?"

 


마치 평소의 오늘 밥 먹었냐?와 같은 톤의 무미건조한 물음. 로우는 대답 대신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미 다 안 채로 각오하고 온 녀석에게 또 한 번의 비수를 꽂기란 사
실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로우의 반응에 모니터를 잡은 산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가, 곧 스르르 풀어졌다. 그렇구나. 이미 알고 있었는데 뭐. 작은 중
얼거림이 진료실을 맴돌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젠 정말 모든 희망을 버렸음을, 처연한 눈동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산지는 선천성 심장병 환자다. 어렸을 때부터 수차례의 수술로 겨우 목숨을 연명해온. 루피, 조로와 더불어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였으니 아마 그의 상태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심장이 아슬아슬하게 뛰고 있는 만큼 산지는 고교생활 3년 동안 단 한 번도 또래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본 적이 없었다
. 그리고 창가에서 축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히 웃고 있는 그를 보았을 때가 아마 처음으로 의사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산지는 밖에서 활동할 수 없는 만큼 할아버지의 실력을 물려 받아 요리를 잘했다. 그는 매일 진수성찬을 싸들고 와 한창 혈기 왕성할 때인 친구들의 배를 채워 주
곤했다. 산지는 요리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고, 모두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다. 그래서 산지는 마지막 고집을 부렸다. 프랑스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싶다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해보고 싶은 건 해봐야 편히 눈 감을 수 있겠다고 말하는 산지를 결국 그의 조부도 말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4년 전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라탔고,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건 프랑스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흉부외과 의사가 된 자신을 찾아왔을 때였다.


자신이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을 전달하는 녀석의 말투는 소름 돋게도 덤덤했다. 난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죽음이랑 싸워왔는걸. 그래서 별로 아무렇지 않아. 여태까지 버
텨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제 의사 가운 자락을 붙잡고 펑펑 울부짖는 대신, 오히려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로우는 그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친구를 구하
고 싶어 선택한 꿈이었는데, 정작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로우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산지는 그런 로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남은 시간 잘 부탁해 로우.
그럼에도 로우는 다시 한 번 희망을 끈을 잡았다. 아직, 끝은 나지 않았으니까.

 

 

 


"...약 처방해줄 테니까 무조건 잘 챙겨 먹어야 한다. 조로 녀석한테도 따로 연락 넣을 거야."

"엑. 그렇게 많이? 그 바보가 까먹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하긴 그러네. 진통제는 어떤거 같아?"

 


로우의 물음에 산지는 어제 새벽의 고통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더 센 걸로 줘. 그거 효과별로더라."

"니가 먹고 있는 것도 충분히 센 거지만 처방해줄 테니 너무 고통스러울 때만 복용하도록 해. 진통제 들이켜봐야 좋은 거 없다는 거 알지?"

"네네."

"아, 그리고 온 김에 주사 맞고 가라. 넌 안 그래도 면역력이 약하니까 이런 때에 감기 같은 거 걸리면 위험해."

"윽, 주사? 싫은데.."

"더 이상 내 말에 토 달면 입원 시킬 거라고 했다."

 


입원이라는 말에 단번에 꼬리를 내린 산지는 심통 난 얼굴로 툴툴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남은 시간 동안 병원에서 썩게 하지 않는 대신, 피우던 담배도 끊고 의사의 말에
절대복종하기로 했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야 했던 것이었다.

 


"또 간호사들 살살 구슬려서 애먹이지 말고 얌전히 맞고 가."

"..."

"그리고 이거, 잘 먹겠다. 도시락통은 다음 검진 때 주지."

 


주머니에서 딸기 맛 사탕을 꺼내 입에 문 산지는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로우는 어울리지도 않는 딸기 맛 사탕을 물고 있으면서 어째 손동작은 담배를 피우는 것 같
이 어색하게 굴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3.

 

 

벌써 잔 안에 담겨있던 생과일주스가 반이나 줄었다.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휴대폰을 들여다봐도 오는 연락은 없었다. 자기가 먼저 만나자고 해놓고 늦다니. 산지는 혈
관을 찾지 못해 수차례 찔러오던 주삿바늘 때문에 푸르게 멍이 든 팔을 주무르며 단단히 벼뤘다. 루피가 오기만 하면 아주 엉덩이를 걷어차 줄 생각을 할 참이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카페 음료를 빨아 들이키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특유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장난기를 가득 담은 얼굴
이 눈앞에 등장했다.

 

"루-피. 너 이 자식, 내가 그렇게 빨리 오라고...!"

"화내지마 산지! 내가 선물 데려왔어!"

 

선물? 그러고 보니 루피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옆에는 웬 낯선 이가 서 있었는데, 늘씬한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올리니 자신이 좋아해 마지않는 탐스러운 주황빛 머리가
가슴께 부근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세상에. 바로, 몇 달간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나미였다.

 

"나미 씨!"

"안녕, 산지군."

 

선글라스를 벗으며 루피의 옆에 앉는 그녀를 산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나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나가는 디자이너였다.
분명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패션쇼 준비 때문에 6개월간 프랑스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고 펑펑 울던 모습으로 헤어졌던 것이 눈에 선한데, 왜 지금쯤 프랑스에 있어야
할 그녀가 여기 있는 거지?

 

"오다가 만났는데 산지 만나러 간다니까 나미가 같이 가 쟀어!"

"하지만 나미 씨는 미뤘어. 나한텐 산지 군이 훨씬 중요한걸? 에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어차피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니까 뭐 괜찮아."

 

정 그러면 다음에 맛있는 거나 사 줘. 나미의 말에 산지는 감동받았다는 얼굴을 하며 꼭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두 사람이 얘기하고 있던 그 새 산지가 시켜놓은 딸기 주스
를 홀랑 비워놓은 루피는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산지 요즘 너무한 거 알아? 프랑스에서 돌아오고 한 번도 밥을 안 해줬어!"

"..다음에 꼭 해준다니까?"

"그 말 지금 5번째인 거 알아? 나 산지 밥 먹고 싶단 말이야. 요즘 가게에도 안 나가고."

 


루피의 말에 산지는 초조하게 컵 표면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또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제프가 감기에 걸려서 가게를 닫았다? 아, 이건 저번에 만났을 때 써먹었는데.
결국 울 것 같은 얼굴로 도움의 눈총을 보내는 산지의 신호를 읽은 나미가 다급히 루피에게 지갑을 건넸다.

 

 

"루피 너 배고프다며? 이 카페 케이크 맛있대. 내가 사줄 테니까 내 것까지 얼른 주문하고 와~"

"정말?!"

 

루피는 정말 기쁜 듯 소리치며 바로 자리를 박차고 카운터로 달려나갔다. 계산대 앞에 꼭 달라붙어 뭘 먹을지 고민하는 루피를 보며 산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래서는 안 그래도 짧은 명이 더 줄어들 것만 같다. 탁 풀리는 긴장감에 테이블 위로 쓰러지는 산지를 보며 나미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당연히 루피한테 말 한 줄 알았는데... 아직이었구나."

"입이 떨어져야 말이죠.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다가도 저 녀석 웃는 얼굴만 보면 바로 무장해제 되어 버린다니까요."

 


그래, 루피에게 그런 이야길 어떻게 선뜻하겠어. 나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피는 2년 전 형을 눈 앞에서 잃었다. 그것도 달리는 대형 트럭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다가. 그 후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란 아마 루피에게 어마어마한 트라우마로 남아있
을 것이다. 산지는 장례식장에서 텅 빈 눈으로 자신을 붙잡고 미친 듯이 오열하던 루피의 모습이 계속 겹쳐져서, 이제 살 날이 4개월뿐이라는 사실을 차마 그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늦으면 늦는 대로 루피가 입는 상처는 커질 거야 산지 군."

"마리모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산지는 나미를 바라보며 유하게 웃었다. 다들 이런 반응인 걸 보면 어서 말 해야 하는 거구나.

 

 

"이걸 어쩌죠. 전 나미 씨나 마리모나, 루피에게 폐만 끼치고 떠나는 것 같아요."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 산지 군."

 

 

산지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꼭 잡아오는 나미의 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루피가 케이크 여러 개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오는 경쾌한 발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내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좋을 텐데.

미안해 루피. 너에게 나의 죽음을 고하게 되어서.

 

 

 

-

 


저녁이 되자 거리의 기온이 부쩍 떨어졌다. 아침에 조로가 감아준 목도리를 더욱 여미며 산지는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루피. 아, 사보한테 안부 전해주고."

"응! 산지도 조심히 들어가."

 


다행히 헤어질 때까지 루피가 다시 질문을 던져오는 일은 없었다. 이럴 때 만큼은 녀석이 단순한 게 참 다행스러운 사실이다 싶었다. 산지는 흔들던 손을 내리고 옆에 서
있던 나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귓가를 가까이 댔다. 역시 우리 나미 씨는 눈치가 빠르다니까.

 


"조만간 가게로 초대할게요 나미 씨. 저 녀석이랑 같이 오세요."

"와, 알겠어. 꼭 갈게. 오늘 추운데 무리한 거 아니지? 얼른 들어가 봐. 조로가 걱정하겠어."

"나미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야 루피! 너 나미 씨 집까지 잘 바래다 드려라."

"응!"

 


곧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산지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오늘도 소중한 사람들과 보냈다. 산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방금 해가 져 연한 남색 빛을 한 하늘은 환상적일 만큼 예뻤다. 허공으로 떠오르는 하얀 입김을 보며 산지는 오늘의 하늘도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이제 이 하늘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벌써 8시잖아? 마리모 밥 해줘야 하는데."

 

 

정신없이 하늘을 보다 번뜩 정신이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약간 늦겠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으로 조로의 문자가 3통이나 도착해있었다.

 

[어디냐]

[데리러 가?]

[어디야 요리사]

 

아무래도 상당히 걱정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항상 전화를 하라고 구박해도 이 녀석은 목소리 듣는 게 낯간지럽다는 이유로 결단코 전화는 자기가 먼저 걸지
않았다. 진짜 웃기는 놈이라니까. 산지는 여태 밥도 먹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조로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바삐 했다.

 

 

 

 

 

 

 

 

4.

 

 

조로는 자꾸만 자신을 건드는 무언가에 짜증스럽게 눈을 떴다. 멍한 시야로 아직 새벽도 밝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약하게 제 팔을 붙들어오는 하얀 손만이 겨우 눈
안에 들어왔다. 심장이 덜컹하는 느낌에 깜짝 놀라 침대 밑을 바라보니 필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을 참고 있는 산지가 보였다. 다급하게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운
조로는 꽉 깨물어 터져버린 산지의 입술을 보고는 황급히 협탁에 준비되어있던 물과 약을 가져와 산지의 입을 벌렸다. 고통에 정신이 들지 않는 것인지 초점 없는 눈으로 숨
도 쉬지 못하는 산지가 멀쩡히 약을 삼킬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고개를 젖혀 기도를 열어 숨길을 만들어준 조로가 그 틈을 타 알약과 물을 입 안으로 넣자 산지의 목이
작게 울렁였다. 몸부림치던 움직임이 차차 잦아들었다.

조로의 품에 안겨 거센 숨을 고르던 산지는 얼굴을 조로의 가슴에 푹 파묻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느껴졌다. 옷자락을 잡고 있는 손이 하얗게 질려 덜
덜 떨리는 모양새였다. 또 갑자기 찾아온 고통에 많이 놀랐겠지. 매번 혼자서 참던 그가 자신까지 깨운 것을 보면 예전보다 훨씬 고통이 심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로는 아무 말 없이 산지의 등을 쓸어 내렸다. 조금씩 진정해가는 듯, 등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괜찮냐."

"...깨워서 미안."

"기특하네. 이젠 도움도 요청할 줄 알고."

 


조로는 식은땀으로 젖은 산지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진정하고 나니 뭔가 굉장히 낯간지러운 상황에 재빨리 조로의 품에서 떨어진 산지는 애꿎은 침대에 화풀이
를 하기 시작했다.  침대가 너무 높아서 손 뻗기도 힘들었다는 둥 너는 왜 그렇게 깨워도 쳐 일어나지도 않냐는 둥 살짝 눈물이 고여 빨간 눈가에 식은땀으로 젖은 채 투정
을 부리는 산지를 올려다보며 조로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요리사."

"왜."

"지금 너랑 무진장 하고 싶으면 나가 죽어야 하는 거냐?"

 


그의 폭탄 발언에 산지는 진심으로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조로를 내려다봤다.

 

 


"와, 이젠 아주 막 나가네 이 변태 마리모. 너 방금까지 막 생사를 오갔던 사람한테, 그럴 마음이 드냐? 어? 이 뭐만도 못한 자식아!"

"그럼 네 녀석이 그렇게 섹시하질 말던..."

 


조로는 더 이상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산지는 살짝 벌어진 틈을 파고들어 와 입을 진하게 맞춰왔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산지가 이럴 반응일 줄 몰랐다는 듯 약간 당황하던
조로는 응하는 듯 웃음과 함께 거침없이 산지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비쩍 마른 허리가 한쪽 팔에 들어옴이 느껴졌다. 마음은 다급한데 야속하게도 산지의 상체에 걸쳐진 와
이셔츠는 단추가 더럽게도 많았다. 다음부터 와이셔츠 입으면 다 찢어서 갖다 버릴 거라는 말에 웃는 산지를 번쩍 안아 든 조로는 조심스레 그를 침대에 눕혔다. 키스 한 번
에 숨을 몰아쉬며 작게 눈물까지 고인 산지는 조로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하. 너 이제 어쩔래? 이젠 숨차서 키스도 못 할 것 같아."

"약한 소리 하지 마시지."

 

 

환자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며 웃는 산지의 입가에 쪽 하고 입술을 맞춘 조로는 다시 거칠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웃으며 조로의 목을 끌어안은 산지는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
정시키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남은 시간동안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줄 거야.
평생 사랑할 순 없어도, 평생 기억에는 남을 수 있게. 네가 날 잊지 않게.

산지는 조로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줬다. 그에 화답하듯 부드럽게 섞여 들어오는 혀에 산지는 역시 알고 보면 다정한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짝 걷힌 커튼 새로 어렴풋한 새벽빛이 새어 들어오는, 그런 밤이었다.

 

 

 


5.

 


산지의 발걸음이 오랜만에 잔뜩 신나있었다. 한 손에는 아침부터 열심히 싼 도시락이, 다른 한 손에는 조로의 손이 얌전히 잡혀있었다. 평소에는 낯뜨거워서 거액의 돈을
준대도 죽어도 못 하는 간지러운 짓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끔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사실 산지는 이리저리 굳은살 박힌 조로의 단단한 손을 잡는 것을
좋아했다.

3월 2일 산지의 생일을 맞아 두 사람은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심장에 무리가 온다며 격하게 반대하던 제프에게 매달리고 매달려 겨우 무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
로 허락을 받아 낸 산지는 처음 가보는 곳에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넌 가봤자 탈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뭐가 그렇게 즐겁냐."

"그건 상관없어! 이 몸의 아름다우신 레이디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결국 목적은 그거였냐. 조로는 데이트 와중에도 한눈을 팔려고 하는 산지가 괘씸해 헤드락을 걸었다. 망할 자식이 안 놓냐며 버둥거리던 산지는 곧 항복 선언을 했다. 빨
갛게 달아오른 귀로 투덜거리는 산지가 조금 귀여워 보여 조로는 작게 웃음을 띠었다.

그렇게 투닥투닥 거리며 걷다 보니 가까운 놀이공원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티켓을 끊고 입장하니 내부는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막 입장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혹시
무리가 오지 않을까 산지가 걱정되었지만 오히려 그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뭐부터 하고 싶냐고 물으니 산지는 먼 곳의 롤러코스터를 한 번
바라보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회전목마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에휴. 저 말이나 타자.."

"지금 우리 둘이서 저걸 타자고?"

 


머릿속으로 상상되는 모습에 조로는 진저리치며 한걸음 물러났지만 금세 산지에게 팔을 붙잡혀 회전목마로 향했다.

 

 

"롤러코스터 못 타니까 저거라도 타야 될 거 아냐 이 바보야!"

"넌 저게 나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냐!"

 

산지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서 자꾸 사나이가 뒤로 빼면 동물귀 머리띠를 씌어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눈을 부라렸다. 회전목마 타는 것보다 동물귀 머리띠가 몇 배는 더
싫었던 조로는 결국 꼬리를 내리고 산지가 이끄는 대로 회전목마를 향했다.

물론 회전목마는 싫긴 했지만, 줄을 기다리며 신난 표정을 한 산지를 관찰하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이렇게 좋아하는데 딱히 못 타줄 건 없나 싶었다

 

 

 

창피함의 시간을 이겨내고 겨우 회전목마에서 빠져나온 조로는 또다시 불이 붙은 산지에게 이끌려 이번엔 동물원 차례였다. 철창 안에 갇혀있는 털 달린 짐승들이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 잔뜩 눈을 빛내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산지가 조로에겐 오히려 더 신기했다.
물론 그것도 잠시, 온 지 3시간도 안 돼서 벌써 체력이 고갈되어 버린 산지는 헉헉거리며 조로의 뒤를 따랐다.

 


"힘드냐."

"이 정도 가지고 힘들긴."

"허세는. 음료수 사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조로는 벤치에 산지를 앉히고 음료수를 파는 가판대를 찾아 떠났다. 사실 오래 걸어 다녀 숨도 차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조로와 함께 왔
다는 사실이 즐거워서 연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산지는 조로를 기다리며 숨을 천천히 고르며 다리를 붕붕 흔들었다.

 

그 때였다. 순간 호흡이 멈춤과 동시에 산지의 상체가 크게 숙여졌다. 비명이 나오지도 않을 만큼 심장을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바닥이 핑글 돌며 숨
이 턱 막혀왔다. 억세게 옷자락을 쥐며 떨리는 손으로 이리저리 외투 주머니를 뒤졌지만 약도, 호흡기도 없다. 모두 조로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가방에 있다는 것이 떠올랐
다.  빨리 와. 빨리 와 마리모. 산지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서 비린 맛이 느껴졌다.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아직 도시락도 같이 못 먹었는데.

결국 산지는 고통에 찬 작은 신음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밝게 빛나는 놀이기구의 조명과 함께 지나가던 사람들이 뿌옇게 흐려졌고 점점 숨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멀
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이 놀라 다가오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렇게, 산지는 정신을 놓았다.

 

 

 

 

 

-

 

 

 

 

중환자실의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다급히 의자에서 일어난 조로는 로우의 표정부터 살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때."

"...일단 위기는 넘겼다. "

"..그러냐. 다행이다."

"아니. 미안하다, 조로야."

"..."

"예정일이 더 빨라진 것 같아."

 

 


로우의 말에 조로는 수척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모두 다 제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에게 생명줄과 같은 호흡기와 약들을 가져가 버리다니. 양손에 음료수를 들고
돌아오니 원래 그가 앉아있어야 할 벤치는 모여든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가 보니 그곳에는 창백한 얼굴로 쓰러진 산지가 있었다. 조로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들고 있던 음료수도 내팽개치고 미동도 없는 산지의 호흡부터 확인했다. 젠장. 호흡이 없었다. 다급하게 가방에서 휴대용 호흡기를 꺼내 산지의
얼굴에 씌운 조로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119를 불러달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로우가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산지는 중환자실에서 장장 9시간 동안 끈질긴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그는 겨우 살았다.

조로는 눈을 꾹 감았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저 죄책감만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조로야."

"..."

"4개월이라는 기간은 단지 수치에 불과해. 심장병이란 녀석이 입원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변수는 언제든지 생길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절대 네 탓이 아니란 거다."

"..."

"사실 입원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녀석이 쉽게 그런다고 할까."

"그래서 너한테 말하는 거야. 산지를 설득해줘.

 


로우는 그 말을 남기고 조로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반대쪽 복도로 사라졌다. 조로는 회복실 문 옆에 자리한 산지의 이름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3월 2일. 오늘은 산지의 생일. 이제 정말로, 연인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

 

 

 

"더럽게 늦었어, 마리모."

"참 내. 먹고 싶다고 한 건 너였잖아."

 


상태가 많이 호전되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산지는 호흡기와 기계들이 없는 멀쩡한 모습으로 조로를 맞았다. 혹시라도 조로가 마음 아파할까 봐, 산지는 전혀 아
프지 않은 사람처럼 조로를 맞이하려 애썼다. 조로는 어두운 표정을 숨기고 환자용 식탁을 펼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오오. 맛있겠다. 영감이 딱히 뭐라고 안 했어?"

"그냥 말없이 만들어주더라.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랑 같이 전해주래."

 


빨리 뛰어왔는지 이 추운 날씨에도 온기를 지키며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제프표 야채죽에 산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생일 케이크 못 먹으니까, 대신에
이거 먹고 싶었어. 조로가 건네준 숟가락으로 잘 먹는 모습을 보며 조로도 작게 미소를 띠었다.

 


"생일인데 맛있는 거 못 먹어서 어떡하냐."

"아플 땐 이 죽보다 맛있는 거 없어.

"퍽이나."


"있잖아. 절대 네 잘못 아닌 거 알지 마리모?"

"..."

"따지고 보면 이런 상태로 놀러 가자고 조른 내가 잘못이었어. 참 바보같다니까."

 


산지는 숟가락으로 죽을 휘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조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산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너 좀 괜찮아지면, 우리 여행갈까."

"...어? 갑자기 뜬금없이 웬 여행?"

"그냥. 어디든지 가면 좋잖아. 뭐, 니가 잠시 살았던 프랑스라던가, 아니면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이탈리아라던가."

 


갑작스럽게 스케일이 커진 조로의 제안이었지만 이내 여행이라는 말에 들뜬 듯 산지는 죽을 먹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럼 4월까지 기다릴래."

"왜?"

"딱히 외국은 지금 가고 싶은 곳은 없고, 옛날에 너랑 나랑 루피랑 로우랑 다녔던 고등학교 있던 동네 가보고 싶어서. 아, 나미 씨도."

"그럼 왜 4월까지 기다리냐. 지금이라도 당장 갈 수 있는데."

?월에 가면 벚꽃이 피잖아. 그 지역 벚꽃 축제로 유명한 거 몰라? 봄에 가면 얼마나 예쁜데."

 


앨범에 남아있을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려 보면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사진의 배경으로 벚꽃들이 어마어마했으니까. 하지만 딱히 고등학교에 큰 추억
도 없을 녀석이 다른 여행지도 마다하고 그곳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 조로는 조금 의아했다.

 

 

"쯧. 그럴 줄 알았다. 네 녀석 까먹었지?"

"뭘?"

"너 고2 때 나한테 고백했잖아."

 

 

조로는 산지의 말에 가방에 챙겨온 약병을 차곡차곡 정리하다 모두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그와 동시에 비집고 나오는 6년 전 기억에 조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어이없네. 다짜고짜 멀쩡히 하교하던 사람 붙잡아서 고백이나 해대고. 심지어 생판 대화도 안 해 본 사이에."

"..어쭈.  그만해라."

"그렇게 다급했어 마리모?"

 

그만하라고 했지? 결국 조로는 익살스럽게 웃는 산지의 볼따구를 세게 잡아 늘였다. 조로의 반응이 상당히 재밌었는지 볼이 아픔에도 산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산지는 노란색의 2학년 명찰을 자신이 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학년 때 병이 재발해서 쓰러진 뒤 큰 수술을 받고, 아주 기적적으로 그는 생을 연
장했다. 그리고 노란색 명찰을 달고 다시 학교에 올 수 있게 된 산지에게 당시 생판 남이었던 조로는 냉큼 다가가 고백을 건넸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 못해 조로가 미친 줄 알았다.

입·퇴원을 반복하느라 학교에 자주 오지 못해 같은 반이었지만 딱히 마주친 적도 없었고 특별히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고백이라니. 사실은 뒤에서 알게
모르게 지켜보고 있던 조로를 알 턱이 없는 산지는 질색하며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친한 척을 해오는 조로와 그 친구 두 사람에게 결국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해간 함께했던 시간과 더불어 추억이 쌓여가고 내심 조로의 고백을 의식하고 있던 산지는 그 해 겨울에 대답했다. 나도 네 녀석이 좋은 것
같다고.

하필 난생처음 사귀는 연인이 너냐며 산지는 말로는 불평 불만했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녀석은 알고 보니 아주 유명한 고등학생 펜싱 선수였고, 1학년 때 저와 같은 반이었다는 사실,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는 짝지에게 관심을 갖다가 결국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
실, 그러다 1학년 말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자신이 잘못될까 더 이상 끌 수가 없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다 라는 것이 산
지의 결론이었다. 제 고집으로 갔던 프랑스에 머물렀던 4년 동안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준 것도 조로였으니, 산지는 약간 달아오른 얼굴로 애꿎은 링겔만 만지작거리는 그
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 하여튼 오늘 열심히 싼 도시락도 못 먹었네. 만든다고 돈 많이 썼는데.."

"다음에 놀러 가면 그때 또 싸가면 되잖아."

"응. 그러네."

"요리사."

"왜."

 


산지는 갑자기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조로의 눈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갯짓을 했다.

 


"루피한테 얘기도 하고,"

"응."

"4월달에 여행도 다녀오면."

"..."

"그 땐 입원하자."

 

조로의 말에 산지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싫다고 했는데도 니가 그런다는 건, 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거지. 난 네가 더 살았으면 좋겠고 너희 영감도, 루피도, 로우도, 나미도 다 그러길 원할 거다. 그러니까 하자. 입원."

 


산지는 조로의 절절한 목소리에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았다. 내가 병원 대신 너희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만큼, 너희들은 병원에서나마 나와 있고 싶은 걸 테니까.

 

 

"응. 할게 입원."

 

 

착하네. 조로는 다시 산지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알겠다."

 


산지는 그제야 다시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6.

 

 

"요리사."

"악!! 깜짝 놀랐잖아 마리모 자식아! 심장에 안 좋게 놀래키기나 하고 진짜.."

"그러게 왜 불러도 대답을 안 해."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서재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산지는 난데없는 조로의 등장에 수첩을 확 덮어버렸다.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뭘 그렇게 열심히
적나 싶어 고개를 기웃거리던 조로는 놀라게 했다는 죄로 산지에게 뒤통수 세례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레시피야 레시피! 오랜만에 정리도 좀 하고, 루피한테 먹일 것도 구상하고."

 


…너 나한테는 이런 거 해 준 적 없잖냐. 투정 담긴 목소리에 산지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넌 맨날 맛있는 내 요리 먹으면서 뭘 바라? 알고 보면 굉장히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조로는 산지의 말에 그런가? 하고 수긍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그런 반응일 줄 알았다는 듯 산지는 웃었다.

 

 

"그래서, 부른 이유가 뭔데."

"아. 배고프다 요리사."

"...어. 롤로노아 씨. 지금 11시인데? 너 곧 올림픽도 나가셔야 할 선수가 몸매 관리 안 해도 되냐?"

"니 녀석이 다 알아서 해주는 데 관리가 필요한가? 그래서 배고픈데, 안 만들어줘?"

 


배고픈 사람은 절대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제 약점을 훤히 꿰고 있는 그 대답에 졌다는 듯 산지는 조로를 데리고 부엌으로 나왔다. 능숙한 솜씨로 앞치마 매기부터 냉장고에
서 필요한 재료만 딱딱 골라내 손질하는 산지를 보며 역시 저 녀석은 요리할 때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조로는 생각했다. 어느새 식탁 위의 술병까지 따낸 조로의 앞으로
늦은 밤에 걸맞는 가벼운 안주상이 도착했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아주 입안으로 들이키는 조로를 보며 산지는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잘 먹
어서 좋다니까.

 

"맛있냐? 에휴. 너 그러다 술배 생기면 어느 레이디가 주워가주시려나."

"별로. 니가 주워가라."

"나는 술고래 마리모 키울 자신이 없거든?"

 


조로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마치 자신의 옆에서 떠날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산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로의 표정을 읽고 눈치챈 산지의 목소리 톤이 한
층 더 밝아졌다.

 


"연습은 잘 하고 있어?"

"뭐. 일단은."

"루피가 맨날 전화해서 자랑해. 자기 이번에 신기록 세울 것 같다고."

"아아. 맞다. 이번에 그 녀석 덕분에 육상 성적 좋을 거라고 하더라."

 


역시 내 밥을 먹고 자란 것들은 뭘 해도 된다니까. 산지는 간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만간 너랑 루피 보러 선수촌 놀러 갈까? 맛있는 거 들고."

"그건.. 안 돼."

"왜! 나 너 경기하는 거 보고 싶어."

"그럼 8월에 보러오면 되잖아."

 

 

산지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때쯤이면 난 이미 이 땅에서 없는 존재일 텐데, 조로는 아직 허무맹랑한 기적을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태껏 버텨오고 지금에라도 함
께 할 수 있음이 산지에겐 기적이었다. 그럼에도 거기다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다. 사실 지금 당장 가슴을 졸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조로일 테니까. 나는 좋은 기억과
추억 안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조로는 한때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아픈 기억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야 하니까. 산지는 심장이 아닌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아릿하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꼭 그렇게 될 거니까. 아니, 된다."

 

산지는 아무 대꾸도 없이 조용히 젓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한다면, 울컥해서 해선 안 될 말까지도 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7.

 


산지는 쓰러졌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로우가 밤을 새워가며 그를 깨우려 고군분투했지만 야속하
게도 그는 거의 일주일을 잠들어있는 중이었다. 로우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번엔, 루피 녀석이 알아버렸다.

 


주말을 맞아 잠시 선수촌을 벗어나 두 사람의 집을 찾아갔던 루피는 또 한 번 찾아온 호흡정지 때문에 발작을 일으켜 구급차로 이동되는 산지를 보았다. 불안한 얼굴로 다
급히 구급차에 따라 올라타는 조로를 보고선 두 사람과 나눠 먹으려고 샀던 딸기 케이크가 무참히 바닥으로 추락해 볼품없이 뭉개져 버렸다. 구급차가 출발해버리고 잠시
후, 루피는 지체없이 바로 로우가 있는 병원으로 내달렸다. 계속해서 산지의 모습과 2년 전 에이스의 모습이 오버 랩 되어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래도 꾹 참고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간호사에게 물어 로우의 진료실을 찾아갔지만, 그는 없었다. 아마 산지에게로 간 것임이 분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산지는 아픈 걸까? 심장이 아픈 건 알고 있었지만, 많이 아픈 걸까?


루피는 로우의 진료실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충격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산지는 건강할 텐데, 왜 자꾸 이런 불안한 생각만 드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참
이었다. 루피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아주 반가운 얼굴이었다. 조로! 루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굴을 보자마자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조로. 나, 나 이
상한 걸 봤어. 산지가 아픈 것 같은데, 많이 아픈 거야? 지금 어디 있어? 산지 괜찮아? 조로는 루피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힘겹게 웃었다.

루피. 그 녀석, 이제 많이 힘들대.

그는 지금 자리에 없는 산지 대신, 루피에게 그의 죽음을 고했다.

 

 

-

 


따뜻한 온기가 손으로부터 느껴졌다. 그 낯선 느낌에 산지는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무겁고 또 호흡기가 얼굴을 덮고 있어 답답했지만 눈을 뜨려 애썼다. 잠시 시
야가 익숙해지고 난 후 보이는,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꼭 붙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루피였다.

산지의 시선이 뒤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조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산지는 알아챘다. 결국엔 루피가 알아버렸구나. 산지는 놀람 대신
그저 잡힌 손에 조금씩 힘을 줬다. 그것을 느끼고 고개를 든 루피와 눈을 맞췄다.


"야. 너 왜 여깄어."

 

큼. 조금이라도 멀쩡하게 말해보려고 했는데 민망하게도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산지.. 진짜 아파? 아픈 거야?"

"응. 미안해 루피. 빨리 말 안 해줘서. 나 아파."

"괜찮아. 걱정하지 마 산지. 트랑이가 치료해줄 거야. 엄청 실력 좋은 의사니까.."

"이걸 어쩌냐. 이건 로우 녀석도 못 고쳐."

"..."

"나, 네 형 곁으로 가. 에이스 말이야."

 


산지의 말에 루피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조로의 말이 정말이었나 보다. 그래서 지금 산지 손이 이렇게 차갑구나. 에이스도 떠났던 날 이렇게 손이 차가웠어. 산지
도 결국 내 곁을 떠나는 거야? 이렇게 빨리? 루피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산지는 그 모습에 고개를 미약하게 흔들었다.

 

"아니지 바보야. 니 옆엔 마리모도, 로우도, 또 여러 사람이 있지만 지금 니 형 에이스는 곁에 아무도 없을거아냐"

"..응."

"내가 특별히 그 녀석 친구 해주러 가는 거야."

 

산지의 말에 루피는 너라면 안심이 된다며 눈물을 슥 닦고 배시시 웃었다.

 


"맛있는 거 해준다는 약속, 아마도 못 들어 줄 것 같네."

"그건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산지는 쉴 새 없는 루피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조금 많이, 피곤했다. 그런데도 산지는 루피의 말을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귀에 담았
다. 그런 두 사람의 곁으로 조로가 다가왔다. 그는 루피에게 말했다.


"나미가 찾아왔다는데, 여기로 데려와 줘. 그 마녀는 여기 병실 위치를 모르니까."

"나미도 왔어? 앗, 그럼 다녀올게."

 

루피는 나미를 맞을 생각에 재빠르게 병실을 박차고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조로는 산지의 옆에 앉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표정은 상당
히 많이 복잡해 보였다.

 


"다행이다. 그래도. 난 진짜 난리 날 줄 알았는데."

"너 잠든 동안 났었어. 살려내 달라고 로우 멱살까지 잡았으면 말 다했지 뭐."

"…멱살? 휴. 왜 내가 다 미안해지지. 안 그래도 지금 잠도 못 자고 있을 텐데."

"맞아. 그러니까 넌 반성 좀 해야 된다."

 


산지는 조로의 말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잠도 쏟아질 거고, 몸도 잘 부을 거다. 통증도 호흡곤란도 더 자주 찾아올지도 몰라."

"그렇구나.."

"여행 못 갔는데, 입원시켜서 미안하다."

"됐거든. 나중에 가면 되지. 나중에."

 


말없이 머리를 쓸어주는 조로의 손길을 느끼며 산지는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 참기 힘든 졸음이 쏟아져 왔다. 나미 씨도 온댔는데, 자면 안 되는데…

 

 

 

 

 

 


8.

 

 


산지는 로우로부터 외출 허가를 받았다. 자고 일어나서 밥 몇 숟갈 뜨는 듯 마는 듯 하다가 다시 며칠 간 잠에 빠지고 하는 생활을 반복하던 산지의 몸 상태가 웬일로 멀
쩡한 날이었다. 로우는 끝까지 나가지 않길 원했지만 산지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바로 조로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여분의 짐을 더 챙겨야 한다는 조로를 집
으로 보내고, 산지의 행선지는 바라티에였다.

이른 새벽부터 불쑥 가게로 찾아온 산지를 제프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왔냐는 말과 함께 그를 부엌으로 불러들였다. 산지는 오랜만의 넓은 바라티에의 주방을
천천히 거닐었다. 제가 쓰던 식칼부터 각종 요리 기구까지 손으로 한 번씩 쓸었다. 가게에 나오지 않아도, 아니 나올 수 없음에도 제 자리는 언제나 이곳에 있는 모양이었
다.

 

"있잖아 영감."

"왜 부르냐 애송이."

"영감은 그때 나 왜 데려왔어?"

 

산지의 질문에 제프는 냉동고에 기댄 채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라 하면 아마 아동복지원으로 급식 자원봉사를 나갔던 때를 말하는 건가. 산지와 제프는 아동 복
지원에서 처음 만났다. 부모가 선천성 심장병을 치료할 수 있는 수술비를 마련할 여건이 안 돼 울며 겨자 먹기로 양육권을 포기한 아이가 산지였다. 제프는 아직도 또렷하
게 기억했다. 아저씨 요리 잘해? 꼬맹이답지 않게 맹랑하게 호기롭던 눈을. 그가 의족이 내는 독특한 발소리를 내며 산지가 하는 것처럼 주방을 걷기 시작했다.

 

"허구한 날 아파서 픽픽 쓰러지고, 수술하고, 바락바락 땍땍거리고. 처치곤란 꼬맹이이긴 했지."

"에이. 너무한 거 아냐?"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든 거였지만."

"역시 영감 취향은 알 수가 없네."

 

산지와 제프는 말없이 주방을 걷고, 또 걸었다.

 


"오너 제프."

"…왜 부르나 부주방장."

"오랫동안, 더럽게 신세 많이 졌습니다."

"..."

"이 은혜, 아마 죽어서도 못 잊을 거예요."

 


두 사람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제프는 자신의 뒤에서 조용히 울려고 애쓰는 산지를 위해 굳이 뒤돌지 않았다.

 


"그런 거 필요 없다. 그냥, 감기 조심해라, 산지."

"..."

"너는 그런 잔병치레 하는 게 더 무서우니까."

"..."

"내 아들 해줘서, 고맙다."

 


산지는 무너지려는 마음을 겨우겨우 붙들어 맸다.

 

 


-

 

 

"나왔다 마리모."

"빨리 왔네. 허. 너 눈탱이 밤탱이 됐다."

"…시끄러 눈치 없는 마리모 새꺄."

 


꼭 이런 분위기에 훼방을 놓는 조로에게 정강이 킥을 한 방 먹여준 산지는 쓰린 눈가를 마구 부볐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로에게 물었다.

 


"짐은 다 챙겼어?"

"어. 특별히 더 챙길 것 있으면 지금 챙겨."

"아니. 딱히 없....아 맞다. 잠깐만."

 


산지는 후다닥 서재 안으로 달려가 손에 여러 뭉치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

 


"병원 가는 길에 우체통 있지?"

"어. 아마도."

"거기다 부쳐야겠네."

 

조로는 누구에게 부치는 편지냐고 묻지 않았다. 사실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었다. 소중한 이들에게 보내는 것들이겠지 분명.

방에 편지를 잘 챙겨 넣은 산지는 조로에게 출발하자고 고갯짓 했다.

 

산지는 신발을 신기 전 갑자기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디가 아픈 건가 싶어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다시 재빠르게 서재의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따라 들어
가려는 조로에게 오지 말라고 소리친 산지는 몇 분간 책상에 앉아있더니 다시 밖으로 나와 신발을 신었다. 뭐했냐고 물어오는 조로에게 비밀이라고 쐐기를 박은 산지는 발
을 탁탁 바닥에 두드렸다.

 

 

"준비 다 됐냐."

"응."

"그럼, 갈까."

 

 

 

 


-

 

 

 

 

 


-

 

로우는 간호사들에게 급히 오더를 내리고 5층 병동으로 내려왔다. 산지의 심장이 심상치 않게 뛰고 있단다. 거의 한달음에 병실 앞으로 달려온 로우는 심호흡을 한 번 하
고 조심스레 병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아주 오랜만에 아무런 생명 연장 장치 없이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하고 있는 산지가 있었다. 다가오는 로우를 발견한 산지는 난
처하다는 듯 웃었다. 바로 루피 때문이었다. 루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산지의 옆에 꼭 붙어 쉽사리 그의 손을 놓지 못했다.

 


"산지.. 가지마. 안 가면 안 돼? 맛있는 거 해달라고 안 조를게. 자꾸 귀찮게도 안 할게. 응?"

 


그렇게 말하며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는 루피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없음을 산지는 속으로 한탄했다. 울지마 바보야. 맛있는 거 해달라고 졸라도 좋고 귀찮게 해도 좋았
다. 산지는 그저 루피가 자신 때문에 아프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넌 잘 할 거다 루피. 그렇지?"

"응. 응."

"나 대신 마리모 연습 안 빼먹게 감시도 해주고."

"응. 응."

"이제 나 없으니까 니가 나미 씨 지켜주는 거야."

"응, 응."

"그래. 그거면 됐어. 바보야."

 


나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게 싫어서 눈물을 닦아내고,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항상 웃는 얼굴이 예쁘다고 말해주던 산지
였으니까, 마지막 가는 길 정말 웃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마음에 난 홍수를 꼭꼭 틀어막았다. 루피는 어느새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는 로우를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한 번 산지를 바라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제 인사 다 했어. 바보같이 울면서 활짝 웃는 루피의 얼굴에 산지는 눈물이 나려던 것을 꾹 참았다.

 


"가서 에이스랑 기다리고 있어. 에이스 무지 좋은 사람이니까 산지랑 잘 지낼 거야."

"그럼."

"…산지. 안녕. 아프지 마."

 

그제서야 루피는 산지의 손을 놓아주었다.
루피가 약간 뒤로 물러나고, 산지는 나미와 로우의 얼굴을 한 번씩 눈에 담았다. 말할 힘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인사 하고 싶은데, 이젠 정말 끝이 다가왔는가
보다. 하지만 산지의 눈빛에 두 사람은 웃었다. 그런 말 안 해도 다 전해졌다는 듯이.
이제 우린 그만 나가보자. 저 녀석도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니냐. 로우는 조로를 한 번 흘긋 쳐다보고 나미와 루피를 밖으로 이끌었다.

 

 

모두가 나가고 병실에는 산지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흘렀다.

산지는 조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아 달라는 의미였다. 조로가 손을 잡고 자신의 옆에 앉을 때까지, 산지는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들을 정리했다.

 

 

"..음. 일단 고마웠다."

"..."

"그 때 나한테 다가와 줘서 고맙고, 4년 동안 기다려줘서 고마워. 또 지금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내가 원해서 한 일이었을 뿐이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산지는 떨리는 호흡을 감추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니까 조로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은데, 자꾸만 몰려오는 잠 때문에 눈앞이 온통 뿌옇게 흐렸다.

 

 

 

"..걱정돼. 그리고 무서워. 내가 니 앞길의 걸림돌이 될까 봐 나 편하게 갈 수 있게 잘 지낼 수 있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안되냐."

"...난 그런 거짓말은 못 한다. 널 많이 사랑한다 요리사. 그래서 니가 없다면... 정말....넌, 망할 녀석이다."

"....조로."

"..하지만 니가 무섭다고 한다면 죽든 살든 어떻게든 버텨보겠다. 정말 아프고 힘들어도, 나중에는 결국 널 묻어둘 수 있겠지."

 


결국 산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미치도록 무서웠다. 조로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워 자꾸만 눈물이 났다. 끝까지 담담한 척 해보려고 했는데, 마지막이
라고 생각하니 정말 사신이라는 게 있다면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무릎 꿇고 싹싹 빌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목이 메오는지 산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꼭 금메달 따고.."

"..."

"그러다 착하고 예쁜 숙녀 분이랑 결혼해서 귀여운 애도 보고.."

"..."

"그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오랜 시간이 흘러 네 녀석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면, 그 때 루피랑 로우랑 나미 씨랑 다 같이 찾아와."

"..."

"끝내주게 맛있는 진수성찬을 차려줄 테니까 그때 동안 기다리고 있을게."

"..."

"알겠냐 마리모."

"..."

"대답. 해 줘."

 

 

조로는 겨우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먹먹함이 자꾸만 그와의 마지막 시간을 방해했다.

 

 

"와. 그럼 내가 너무 아깝겠는데. 어쩌냐. 내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취향은 아니라서. 아, 물론 나미 씨는 여전히 아름다우시겠지만 말이야."

"....진짜 바보냐 넌."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스러운 농담에 조로는 작은 미소를 띠었다.

 

 

"세 사람한테, 영감한테 꼭 내 안부 전해줘. 마지막 잘 갔다고."

"그래."
.
.

"....심장이 점점 느려지는 게 느껴져."

"..."

"버틸만큼 버텼다…. 그치. 잘했어."

"로우가,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있을 거래 늦었네..벌써 새벽이야."

"잘 거냐."

"응..잘거야. 너도 얼른 자.

"그래. 나도 잘 거다."

"응. 좋은 꿈 꿔, 조로."

 


조로는 너도 좋은 꿈 꾸라는 말 대신, 점점 힘이 풀려가는 산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산지는 잠시 꼼지락거리며 조로의 두꺼운 손마디를 쓸어내
리더니 이내 곧 깊은 잠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조로는 잠에 든 산지를 천천히 눈에 담고, 또 담았다. 그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맞잡은 손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잘 자.. 잘 자. 잘 자라.. 요리사."

 


잘 자.. 잘 자. 잘 자라. 산지. 산지. 그곳에서는 못 다 산 인생 행복하게 보내라. 난 널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아. 지금은 아플지라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
도 제발 행복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그렇게 살아. 그렇다고 거기서 헬렐레 아무 여자나 만나면 화낼거다. 그러라고 이렇게 보내주는 거 아니니까.

조로는 산지가 무섭지 않도록 계속해서 속삭였다.

사랑해.

어슴푸레한 새벽 달빛이 창문을 투영해 고요히 잠든 산지의 얼굴을 비쳤다. 곧 적막을 가르는 새빨간 음이 귓가를 울렸다.

 

 

 

 

 

 

 


完.

 


늘씬한 몸매를 소유한 한 여성이 커피숍 내부로 들어섰다. 선글라스를 벗은 나미는 커피숍 내부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보이지 않는 초록 머리에 아직 상대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아무 테이블에 착석하려고 했는데 웬 낯선 손이 불쑥 자신의 손목을 잡아챘다. 깜짝 놀란 나미가 소리를 지르려다가 모자와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지 않
았던 상대방의 날카로운 눈을 보고서는 기가 차다는 듯 속삭였다.

 

"뭐야. 조로? 아니, 너 왜 이런 꼴로 있어?"

"...묻지마라."

 

나미는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로 중무장한 조로를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기사, 그 이후로 인기가 아주 급! 상승하셨지, 롤로노아 조로 선수? 나미의 말에 조로
의 눈썹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하여간, 얄미운 표정으로 제 맞은편에 앉는 나미를 보고 괜히 오랜만에 아까운 시간 쪼개 마녀를 만났다 싶은 마음이 들던 참이었다.

 


"대체 왜 보자고 한 거냐."

"몇 달 만이면서 까칠도 하셔라. 그냥 잘 지내나 싶어서. 루피가 그러는데 요즘 집 밖으로 잘 안 나온다며? 아주 폐인 납셨어 그냥."

 


나미는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래도 얼굴을 보니 딱히 크게 걱정할 것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놓였다.


조로는 8월 올림픽에서 펜싱 부문 금메달을 거머쥐고 바로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그 후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활동해 매스컴에 나타날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메달 수여
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묵묵히 눈물을 흘려 화제가 되었던 젊은 펜싱 유망주의 은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쉽게 끊이질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이 멋있다고 따라다
니는 소녀 팬들도 더러 생겼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나미는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티비를 통해 봤던 조로와 루피의 모습을 쉬이 잊을 수가 없었다. 하
늘로 떠나버린 산지가 알게 모르게 지켜주고 있는 건지, 주위 사람들 모두가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던 두 사람은 오히려 그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단단한 모습으로 메달을 따냈다. 그 눈물을 본 나미는 머리를 세게 울리는 강렬함에 자신도 왈칵 눈물이 났다. 왜 산지 군이 두 사람을 믿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믿고 떠난 그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장면을 본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을 강렬함일 테니까.

 

 

"밥은 잘 먹고 있어?"

"이렇게 살아 있는 거 보면 그렇다는 거겠지."

"대답이 너무 삐리하거든?"

 

 

나미는 우아한 손짓으로 커피잔을 들어 쓴 커피의 맛을 봤다. 그 동작 하나하나에도 열렬히 반응해주는 이가 없다는 게 사실 아직도 잘 실감은 안 났다. 나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옆에 놔둔 핸드백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말없이 커피만 홀짝이고 있던 조로의 눈길이 그 종이봉투를 향했다.

 


"뭐냐 그건."

"네가 꼭 읽어봐야 하는 거."

 

그리고서 나미는 봉투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던 조로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갔다.
봉투에는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유의 글씨체로 '나미 씨께' 라는 글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산지의 글씨였다.

 

"이게 왜.."

"보낸 날짜가 4월 1일이야. 사실 나도 루피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우편함을 잘 안 봐서 이런 게 왔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조로는 멍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어 곱게 접힌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파스텔톤 색의 편지지는 완벽히 나미를 위한 산지의 취향이 맞았다. 조로는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폈다
. 편지는 총 3장이었다.

 


"아. 앞의 두 장은 읽지 않아도 좋아. 그냥 단순 러브레터거든."

 


나미의 웃음 섞인 말에 세 번째 장을 펼쳐 들었다. 요리사다. 정말 산지가 쓴 글이었다.

 


「추신. 나미 씨께 염치없지만 작은 부탁을 드릴려고 합니다. 있잖아, 나 망할 마리모에게는 편지를 부치지 않았어. 같이 살고 있으니까, 아마 짐 정리를 하면서 찾아내 주

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그놈 머리는 못 믿겠더라고. 그러니까 아직 그 미련한 바보가 날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미 씨가 좀 도와주지 않을래? 그럼 이만 정

말로 편지 마칠게. 그동안 많이 고마웠어요 나미 씨. 」

 


조로는 고개를 들어 나미를 마주했다. 그의 표정은 당최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산지 군은 역시 똑똑하네. 아주 정확하게 들어 맞췄잖아."

"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너 아직..그, 유품 정리 안 했지."

"...어."

"에휴. 산지 군이 보내는 마지막 인사, 안 받을 셈이야?"

 

 


우리한테는 편지를 다 남겼는데, 설마 너한테 안 남겼을 것 같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미는 그제서야 알아챘다는 표정의 조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었다. 나미에게 편지를 돌려준 조로는 황급히 카페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밖에 눈 오니까 미끄러지지 마! 나미의 외침을 뒤로하고 조로는 집을 향해 달렸다. 하얀 눈이 소
복소복 쌓인 거리에 조로의 발자국이 빠르게 찍혀갔다.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온 조로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매일 매일,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산지의 부재
로 그의 향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조로는 딱히 흔적을 억지로 지우고 싶지 않아 산지의 짐을 정리한다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조심스레 서재의 문을 열자 다를 것 없는 내부가 조로를 반겨주었다.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선 조로는 산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펜 한 자루와 여러
가지 음식 사진들과 노트들. 자신이 놔둔 금메달 빼고는 다 그가 남기고 간 그대로였다.


조로는 의자를 빼 털썩 앉았다. 막상 오긴 했지만 무엇을 보라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자연스레 손이 책상 위의 여러 노트들로 갔다. 하나를 선택해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요리 레시피가 가득한 레시피 노트였다.

 

 

"....참."

 


조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망할 요리사 녀석은 끝까지 너무나도 친절한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자기가 사라진 뒤 조로가 제대로 밥을 챙겨먹지 않을까 봐 간단하게 할 수 있
는 모든 요리를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중간중간 밥 안 챙겨 먹으면 지옥 끝까지 쫓아갈 거라는 멘트가 산지다워서 조로는 아주 오랜만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몇 개의 노트를 넘겼을까, 다른 것들과는 다른 노트 하나가 조로의 눈에 띄었다. 알 수 없는 프랑스어로 적힌 표지를 넘기니 그의 글씨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글들이
있었다. 모두 산지가 쓴 일기였다.

 

 


「1월 2일. 날씨 추움.

 일기를 덥석 사버리긴 했는데,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거 죽으면 마리모 녀석이 다 훔쳐 볼 텐데. 아니지.
 어디다가 숨겨놓으면 절대 못 찾을 테니 못 보려나.
 아. 뭘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음, 오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4개월 남았다는데.
 나 어떡하지. 녀석들한테 돌아가고 싶다.」

 

 


「2월 1일. 날씨 추움.

 오늘 드디어 귀국했다. 새벽 일찍부터 시차도 안 맞고 이게 무슨 고생인지.
 졸려서 더 못 쓰겠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마리모는 여전히 잘생겼더라.
 ...윽. 오글거려. 사실 만나자마자 싸우긴 했지만.」

 


「2월 14일. 날씨 추움.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발렌타인 데이다.
 사실 무의미하긴 하지만 뭐. 나미 씨한테 초콜릿을 드렸으니 상관없다.

 안 좋은 소식이랑 같이 드려서 좀 미안하긴 하다. 그래도 팔에 멍 자국 많이 냈으니까 그걸로 봐줘요 나미 씨.
 또, 조로한테도 초콜릿 줬고. 망할 녀석이 달다면서 별로 먹지도 않았지만.」

 

 


「2월 22일. 날씨 추움.

 오늘 로우 병원에 다녀왔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4개월 남았단다.
 정말 무섭지도, 슬프지 않다. 다만 나는 주변인들이 많이 걱정된다.」


이 일기는 이어지다 뒷 내용을 볼펜으로 거세게 지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조로는 진한 잉크 냄새에 그 흔적을 엄지로 한 번 쓸어내리고는, 다시 다음 장을 넘겼다.

 

 

 

「2월 29일. 날씨 나름 풀림.

 오늘 망할 영감에게 허락 맡으러 갔다가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그것도 팔로 맞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단단한 의족으로 때리다니.
 아직 정강이가 욱신거려 죽을 것 같긴 하지만 뭐, 놀이공원에 간다는 게 어디야.」

 

 


「3월 15일. 날씨 맑음.

 집에 정말 오랜만에 들린다. 병원에서 로우가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던지.
 그렇게 집이 그리울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쓰러지는 바람에 마리모한테 좀 미안하다.
 그 녀석은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할텐ㄷ」


이건 산지가 퇴원 후 다시 병원에 입원하기 전 그가 쓰다가 자신에게 걸렸던 그 일기인 모양이었다.

 

 

그 후로 이어지는 일기는 더 이상 없었다. 몇 장 채우지도 못한 일기를 조로는 휘리릭 넘겨보았다.

그리고 그 끝에 달했을 때, 그곳엔 또 다른 글이 적혀있었다. 조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지금 내 일기 훔쳐보는 거지 마리모? 볼 게 얼마 없어서 배알 꼴릴거다. 흥.
   사실, 정말로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그곳엔 내가 없다는 거니까. 좀 기분이 이상하기도 해.
   넌 잘 지낼까. 밥은 굶지 않고 있을까. 내가 레시피까지 정성 들여 정리해놨는데 들여다보지도 않으면 진짜 죽어서도 괴롭힐 거다!」

 

옆에 없는데도 마치 산지의 잔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조로는 괜히 찔려와 웃음이 났다.

 

「지금 니 녀석이 내 뒤에 있어. 그런데도 쉽게 입이 안 떨어져서. 이렇게 글로라도 남기려고.
   이 말만은 꼭 너한테 하고 싶었다.
   아우 씨. 더럽게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말 못하고 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음, 있잖아.

   난 네 꿈이 담긴 거칠고 커다란 손이 좋다.

   마리모 닮은 그 녹색 머리도 좋아.

   항상 뒤에서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우직함도 그래.


   내가 항상 장난으로 말해도, 난 사실 니 놈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널 좋아해.
   응. 그래. 이 말이 꼭 하고 싶었어 조로.

 

   너랑 루피, 금메달은 땄을까. 또 매일 매일 내 생각은 할까. 기억력도 나쁜 게 얼굴 까먹진 않을까.
   사진 많이 남겨 놓을걸. 그냥, 마지막이라니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

 


산지의 글씨가 점점 흐려졌다.

 


 「좋아해. 조로. 좋아해. 」

 

 


편지는 그렇게 끊겼다. 조로는 마지막 줄을 읽고, 또 읽었다. 아주 오랜만에, 턱을 괴고 대부분이 그와의 추억일 여러가지 것들을 떠올려본다.

눈에 보이는 스탠드도 건드려보고, 연필꽂이도 건드려보았다. 또 책상 위에서 처량히 주인 잃은 금메달도 한 번 슥 쓸어내렸다.

산지의 횡설수설한 마지막 편지로부터 오랜만에 느껴보는 왠지 모를 이 포근함이 좋았다. 마치 산지가 곁에 있는 것처럼.

아직도 마지막 말에 6년 전 4월의 봄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열린 창문을 타고 산지를 닮은 하얀 눈송이 하나가 조로의 볼 위로 내렸다. 그 차가움에 조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늘은 꿈에서 요리사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이었다.

 

 

 

 

-

 

 


*연인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절절하고 애틋한 그런 조로산을 쓰고 싶었는데 아마 잘 안 된 듯 싶습니다 ㅎ..여기까지 장장 54.8kb의 긴 글 읽어주신 닝겐들 고마워요ㅠㅠ

*키워드는 버릇. 사실 잘 나타나지 않아 약간 아쉽기도 하지만, 산지의 버릇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부터 써왔던 '일기' 되시겠습니다. 끼워 맞추기 같은 건 진짜 기분 탓입니다.

*마감 늦어서 수고해준 총대 닝 정말 고맙고 미안해요. 날아간 한 단락을 겨우 채우고, 마감 시간 제한이 사라졌다는 공지를 보고 시간 부족으로 급히 삭제했던 장면을 몇
개 더 썼어요. 많이 귀찮고 짜증 났을 텐데 정말 거듭 고마워요♡ 시험기간 때문에 3일 만에 겨우 쓴 망글 읽어준 닝겐들 한 번 더 고맙구요 s2

*마지막으로 조로산 행쇼했음 좋겠습니다!

 

 

[닌타마/케마이사]우리는 이렇게 될것을 알았다.

제 3회 익명만애 글합작 | 인스티즈

 

 

"이번에도 타소가레도키성의 닌자대 대장이 다 휩쓸었다며?"


아, 너의 이야기다.


"완전 괴물 아닙니까?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정작 본인은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잖습니까. 맞아, 당신은 타소가레도키성의 닌자대 대장 본적 없습니까?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닌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케마? 켄마?"

"케마 토메사부로예요."


이 이름을 내뱉는것도 오랜만이었다. 졸업후 처음 만난 네 모습은 처참했었다. 배를 관통한 죽창을 뽑지도 못한채 부러트려서 그대로 끌고 온 모습이라니. 늘 승부다! 하고 외치고 다니던 네 모습과 어쩐지 닮아있었다. 너는 죽음따위에 지지 않을것을 알고있었다. 실제로 그래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때의 너는 그런 내 바람을 그대로 들어주었다. 너는 살아있었다. 당장 숨이 멎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정도의 상처를 가지고 너는 살아있었다.


"굉장하지. 아직 젊다고 들었는데. 그 전 대장과 싸워서 이겼다며? 아군이라면 든든하지만 적이면 정말 성가시지. 갓 대장이 되자마자 죽을뻔 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그때 차라리 죽는게 우리에게는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그런말 하지 말아요. 당신들을 살리고 있는 내가 뭐가 되나요?"


붕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토메사부로, 너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건 너의 명성을 크게 떨치면 떨칠수록 더해질 것이다. 든든한 아군, 죽길 바라는 적군. 그것이 너의 위치였다. 누군가에게는 커다랗고 단단한 무기이자 방패지만 누군가에게는 더할나위없이 거슬리는 존재인 것이다.
너의 목숨은 절벽 위 비바람속 나무 하나와 같다. 수많은 빗물이 너를 향할것이다. 네가 온 힘을 다해 땅을 짚고있는 그 뿌리에 기어코 힘이 빠지기를 원하며 너를 위협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네가 잡고있는 땅이 되어 너를 돕겠다. 나는 네가 살길 바라는 사람중 하나이니까.


"그건 그렇고 당신이 가까이 오거나 머물다 지나가면 전부 당신이 다녀갔다는걸 아는거, 알고있습니까?"

"네? 어떻게요?"


관통한 죽창을 뽑아 낼 때였다. 이미 과다출혈 된 상처가 응고되는 시점에서 출혈을 저지시키는 물체를 제거한다면 피가 주체할 수 없이 뿜어져 나올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너를 살리기 위해 강한 압박과 함께 죽창을 뽑았다. 너는 처음듣는 비명을 들었다. 학원에서는 들어볼 일이 없었던, 살기위해 발악하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울었다. 네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것을 알아서,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것을 알아서. 상처자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 위로 붕대를 감았다. 지혈이 먼저였다. 붕대를 감고 고정할 즈음에 너는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듯 했다. 역시 너구나, 이사쿠. 네 첫마디였다. 다 터진 입술로, 내 이름을 부르며 웃었다. 화가 났다. 울컥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이 바보야. 이때 확실하게 알게되었다. 너와 나는 더이상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을것이라는것을 알았다. 미안해, 토메사부로. 이 사과는 너를 향한것일까.
떨리는 손을 다잡았다. 배를 관통한 상처가 아니더라도 자잘하고 꽤 큰 상처가 많았다. 화를 내며 치료를 했다. 내가 떨고있는게 불안해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불안하면 손을 떠는 나의 버릇은 아주 어릴때부터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치료하는 이가 불안해 한다면 치료받는 이는 그 배로 불안해 한다는걸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나의 불안감을 전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 이건 불안해서가 아니다. 화가나서 떨고있는거야, 토메사부로.


"그것 참 기이하게도 당신 냄새가 난단말이지. 치료하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약초냄새가 베어서 역한 약초냄새가 고작일줄 알았는데 말이야. 뭐라고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당신 냄새가 강하게 나. 그걸로 사람들은 먼 발치에서도 당신이 있다는걸 안단말이지. 특히 붕대에서 말이야, 약초냄새보다 당신 냄새가 더 강하게 난다고."

"하하, 그렇습니까. 약초냄새보다 강하다니, 붕대를 가까이 하고 살아서 그런가 보네요."


타소가레도키성 근처에서 너를 만남으로써 이틀 후 도쿠타케성과 전쟁중인 오오마가토키성으로 향한다는 계획은 미뤄졌다. 너는 근 사일간 고열에 시달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너를 두고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타소가레도키성의 전쟁은 서서히 진정되어가고 있었다. 많은 부상자와 전사자가 있었다. 네가 부상자로 끝나길 바랐다.
사일째 아침 눈을 떴을때 너는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너는 웃었다. 그런 나는 기겁해서 너의 어깨를 잡고 눕혔다. 나의 몸 아래 너는 눕혀졌고, 나는 너의 상처를 살폈다. 처음 아물지 않던 상처를 생각하면 안심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이삼일간 너를 치료할 생각이었다.


-고마워, 이사쿠. 내일 아침에 성으로 가야겠어.


며칠만 더 머물다 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너는 곤란하다는듯이 웃으며 거절했다.
타소가레도키성의 새로운 영주는 굉장히 급한 사람이라고 했다. 잣토씨를 이기고 대장이 된지 얼마 안되었을때 전 영주가 암살로 죽었다고 했다. 지금의 영주는 전 영주보다는 어리석지 않지만 매우 호전적이고 다혈질이라며 맞춰주기 힘들다며 웃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마 네가 돌아오지 않아 화가 났을거라며, 되도록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전 영주도 현 영주도 별로라면 왜 그 성으로 갔냐고 물었다. 차라리 쵸지처럼 서로 만나기 힘들더라도 서로 칼을 겨누지 않을 수 있는, 네가 편한 곳으로 향하지 그랬냐고 타박했다.


-네가 여기있으니까.


우리는 동실이니까, 하고 외치던 네가 생각났다. 내가 달고 다니던 불운은 너와 동실을 하며 너에게 조금 옮겨간것 같았다. 주변에서는 그런 너를 보고 쁘띠 불운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너는 불운을 달고다니던 나와 함께해주었다. 그렇구나. 내가 여기있기 때문에.


-타소가레도키성에서는 네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 조금 불운하지만 실력좋고 상냥한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네 냄새가 나.


4학년때즈음이었나, 본격적으로 보건위원회에서 붕대나 약초따위등을 취급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때의 보건위원회는 불운하지만 딱딱하고 강압적이어서 저학년들은 중요한 치료도구에 손도 대지 못했었다. 잡일거리만 도맡아 하다가 붕대와 약초들을 처음 만지게 되었을때 나는 기뻐했었다. 그래서 붕대와 약초냄새를 달고다녔다. 그때 너는 말해주었다. 보건위원회 사람들은 전부 약초냄새가 강하게 난다고. 그러나 너와는 구분이 된다고. 멀리서부터 약초냄새와 함께 너의 냄새가 난다고. 네가 들고 있는 붕대에서도 너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고. 그래서 이상하지만 네 냄새를 맡는게 버릇이 된것같다고, 너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그 버릇 그대로 가지고 있어. 나는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을 치료할거니까. 내 냄새와 너의 명성이 어디까지 퍼지는지 승부다, 토메사부로.


승부다, 네가 입에 달고다니던 말이었다. 그런 내 말에 너는 놀란듯 눈을 크게 뜨더니 금세 크게 웃었다. 웃지마, 상처 터진다.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에도 너는 계속해서 웃었다.


"그래서 당신은 다음엔 어디로 가나?"

"여기가 어느정도 정리되면 타소가레도키성으로 가려구요. 요즘 도쿠타케성과 전쟁중이니까요. 아마 전사자보다 부상자가 많을거예요."


너의 성격을 안다. 정말로 필요하지 않는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필요할거야. 
거의 사년만에 너를 만나러 간다. 그동안 나는 동기들을 만나고 학원을 찾아기도 했다. 동기들은 모두 제각각 제 길을 걷고있었다. 정말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훌륭한 닌자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오랜 회포를 풀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그때의 우리는 꿈 많은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손에 수많은 피를 묻히게 될것을 알았음에도 실제로 익숙해지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져갔다. 그래도 모두 하나같이 제 본성을 져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쵸지는 너무 멀리 있어서 차마 찾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학원에 찾아갔을때 우연히도 만나게 되었다. 쵸지는 다른것보다 우리들과 칼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너와 센조는 전장에서 서로를 마주한적이 있다고 들었다. 둘다 무사히 돌아가기는 했지만, 다음에 보게 될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센조는 말했다.
오랜만에 보게 된 후배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고 있었다. 우리가 리키치 선배에게 그랬듯이. 우리는 전장을 누비고 실전훈련이 아닌 실전에 임한다. 후배들은 그것을 원하고 있겠지. 그러나 나는 이야기 하는것을 피했다. 리키치 선배처럼 좋은 이야기와 좋지 않은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말해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음의 전장에서는 너희와 내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죽어가는 너희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피했다. 선생님들은 이해하는 눈치였다.
토메사부로. 다른 동기들은 한번씩 찾아온 학원에 너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너의 이야기를 학원 사람들은 흘러드는 소문으로만 들었을테지.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나러 간다. 너의 이야기를 내가 들려주기로 했다. 아마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너는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의 중간에서 나를 보겠지.
우리는 모두 손에 피를 묻혔고, 그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을것이다. 살아돌아온다는 약속도 할 수 없고 상처입지 않는다는것은 거짓이다. 일류가 될 것이라는 꿈많은 우리들은 핏물에 물들어버렸다. 가까스로 남겨진 우리의 본성은 또한 언제 피에 물들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

그런 너를 나는 만나러 간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에 있는 너를 만나러 가.
그러니 살아라, 토메사부로.

 

 

 

 

 

 

 

네가 왔다. 너의 냄새가 전장을 감싸안고있다.
지금 오면 안될텐데. 네가 내 꼴을 보고 또다시 그때처럼 울고 화를 낸다면 나는 어쩌지.


-살아.


다시볼때까지 살아있어. 다치는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알고있으니까. 그래도 죽지는 마. 살아. 살아, 토메사부로.
고열에 시달릴때 너는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 떠나지 않으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계속 내가 읊었다. 내가 고열에 시달려 정신이 없을때만 읊었던걸로 보아서는 내가 듣지 않기를 바랐겠지. 그것 자체가 부담이 될거라고, 너는 또다시 남을 배려한다. 살아, 토메사부로. 살아.
냄새가 다가온다. 너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너의 발걸음 자체는 가볍고 통통 튀듯이 한발한발 움직인다. 그러나 네가 가진 의약품들의 무게와 네가 지고있는 짐들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래서 너의 발걸음은 무겁고 투박하게 다가온다.
손과 다리에 힘이 풀린다. 전장에서 방심은 금물인걸 알고있다. 언제나 날카롭게 긴장을 세워서 사각없이 모든걸 경계해야하는데, 네가 곁에 있다는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놓여 긴장이 풀린다.


"대장님!"


긴장을 놓으면 순식간이었다. 가까스로 긴장의 끈을 단단히 다잡는다. 순식간에 적들의 급소를 찾는다. 움직이지 못하지만 죽지는 않게끔 조절하는것이 가장 힘들다. 차라리 센조처럼 죽이는게 나을텐데. 몇년전 만난 센조는 나처럼 애매한 마음가짐이 아니었다. 운이 좋아 살아돌아왔지만 다음에 본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정도로.
이사쿠, 네가 이런걸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차피 전장에서 수백 수천번을 보게 될 광경이지만 내가 보여주는것은 싫다. 너는 사람을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너는 몇번이고 몇번이고 주변인들에게 닌자에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는 소리를 들었지. 나와 승부한 잣토란 사람도 너에 대해 물었다. 닌자와 어울리지 않는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냐고 내게 물었다. 너는 너도모르게 나만큼 주변인에게 걱정을 끼치고 다니는것을 알까.
더이상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너의 발자국 소리와 냄새는 한층 더 강하게 난다. 사람들의 작은 탄성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환호성에 가까운 것으로, 네 존재에 대한 반가움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네가 보일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고개를 돌리기가 어려워졌다. 바로 몇발자국의 거리, 너는 나에게 화를 낼까.
다 찢어져 넝마조각에 가까운 피로 질척거리는 소매 끝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난다. 그것은 잠시 떨어졌다가 이내 손목으로, 팔목으로 다가온다. 따뜻하다. 나의 죄책감과 더불어 네가 살아있다는것이 너무도 안도스러운 모순되는 감정에 너의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숨이 막힌다.


"토메사부로,"


잡힌 팔목 위로 네 떨림이 전해져 왔다. 내가 너를 또다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손은 떨리고 있음에도 침착했다. 자신의 불안을 타인에게 옮기지 않기위해 부던히도 노력하던 너의 버릇은 아직도 여전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네 냄새가 내 몸 구석구석 가득히 찬다. 약초냄새와 함께 너의 냄새는 언제나 내게 있어 안도감을 주었다. 너를 찾는 나의 버릇 역시 여전하다.
고개를 돌려 너와 눈을 마주했다. 눈시울이 붉다. 붉게되어 부풀어 오른것이 아마 나를 만나기 전에도 눈물을 터트렸나 보다. 치료해주던 병사의 가족 이야기라도 들은걸까. 너는 정말 닌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타인의 감정에 그렇게까지 공감을 해주다니. 학원에서도 그랬다. 실습때에 죽이게 되는 동물 하나에도 너는 눈물이 고였다. 미안해, 하며 죽이기 직전 너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그 짧은 순간에도 반격은 올 수 있으니 그 버릇을 고치라는 선생님들의 말씀과 동기들의 타박에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지금의 너는 살리기만 하니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버릇 역시 그대로겠지.


"다치지 말라고 했잖아. 다치지 마."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약속 할 수 없었다. 이미 약속을 깬것은 수십번, 나의 명성이 올라가고 너의 이름이 알려질 수록 그것은 더더욱 지켜질 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언젠가부터 너는 나에게 강하게 부탁하거나 약속을 강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크게 다쳤을때, 학원에서의 자잘한 상처가 아닌 치명적인 상처를 만들어왔을때, 너는 나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며 울었다. 다치지 마. 너는 울면서 같은말을 반복했었다. 미안해, 토메사부로. 너는 나에게 사과를 했다. 왜?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그 누구도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렇게 될것을 알고있었으니까. 학원을 졸업할때부터, 6학년까지 살아서 진급했을때부터, 같은방을 쓰게되었을 때부터, 같은반이 되었을 때부터,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이렇게 될것을 알았다.

그래도 이사쿠, 나는 한가지는 지켰다. 네가 바라던것 하나는 지켰다.
나는 살아있다, 이사쿠.

 

 

 

 

 

 

 


 

 


 

[다이에이/미사와]들꽃을 탐하다

 


 탐화(探花).
 조선 팔도에서 글공부를 꽤 했다면 도전한다는 3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과거시험에서 3등에게 주어진다는 그 직책. 수만 명의 응시자들을 제치고 33명 안에 들어 급제한 것도 모자라 갑과 세 명, 을과 일곱 명, 병과 스물세 명 중 장원, 방안 다음으로 긍지가 높은 탐화랑. 본디 중국 과거제도에서는 탐화라는 것이 급제자 중 최연소자를 의미하던 것으로, 꽃을 찾았다. 즉, 어린 인재를 찾았다는 의미였다. 창방의에서 왕이 하사하는 어사화를 중간에서 여러 급제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영광스러운 자리였기에 이 탐화를 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더랬다. 그리고, 여기. 스물한 살의 나이에 탐화에 오른 한 남자가 있다.

 


 “미유키, 여기 들렀다 갈래?”

 

 어깨가 뻐근하다. 도대체 탐화를 바라는 놈들은 이 수치를 알기나 할까. 창방의가 끝나고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급제를 축하했지만 솔직히 장원이 아니라면, 흥미가 없다. 임금이 하사하는 어사화를 들고 다른 급제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그 일은, 어사화를 전달받는 상대가 아는 사람이었다면 더욱 곤혹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런지. 어사화를 주는데 분명 나보다 낮은 성적으로 급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웃음을 찾는 그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분함에 못 이겨 창방의가 파하자 바로 본가로 달려가서 아버님께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 사내라면 다시 학문 증진에 힘써서 장원을 노려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었다. 그러자 아버님은 너 같은 놈이 갑과에 오른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며 호통을 치시곤 나를 방에서 매몰차게 내보내셨다.

 

 “미유키?”

 

 나름대로 많은 말을 준비하고 열었던 방문이었는데, 순식간에 부서져버리니 뭔가 오기가 생기기도 하는 게 묘한 기분이었다. 본가는 북촌에 있었으니 궁궐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본가에 도착하는 것에 많은 시간이 든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피곤해지고 쉬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다. 탐화는 우습다고 생각하는 나의 알량한 생각 때문인지 아버님의 호통 때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본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푹 쉬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본가에서 나와 쿠라모치를 무작정 데리고 나왔다. 내가 쿠라모치의 집에 들어가자 쿠라모치의 양친은 나를 반기는 모습이셨지만 어딘가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도 보이셨다. 기분 나쁜 티는 낼 수 없었고 섭섭한 티는 더욱 낼 수 없었기에 쿠라모치에게 조용히 말해 쿠라모치 또한 나를 따라 나왔다. 이제 말 위에 앉아있기도 지쳤다. 나 때문에 같이 나와버린 쿠라모치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야! 미유키 카즈야!!!”
 “어? 어. 야, 왜 갑자기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장난하냐? 지금까지 니가 내 말을 몇 번이나 무시한지 알고 나서 하는 말이야?”
 “하하하,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왜 부른 거야? 쉴 만한 곳을 찾았어?”
 “응. 여기.”

 

 그제야 우리가 어디 앞에 있고, 이곳은 어디이며, 쿠라모치의 등 뒤로 어떤 집이 있었는지 머리에 들어왔다. 궁궐 근처에 있는 저잣거리가 주변에 있는 걸 보아 본가에서 나온 지는 별로 안 됐다. 그런데도 이렇게 밤이 깊었나. 좀 있으면 통행금지령이 내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말이 이렇게 느리게 움직였던 거지. 다시 또 생각에 빠져버릴뻔했을 때, 쿠라모치의 등 뒤가 눈에 들어왔다. 밤에도 불빛이 가득한 것을 보니 기생집이다. 게다가, 화려한 자태를 보아하니 내향각이다. 쿠라모치의 히죽거리는 웃음이 재수 없다.

 

 “웃기냐?”
 “아, 왜. 좋잖아. 넌 공부만 하던 샌님이라 모르겠지만, 기생들이 얼마나 좋은데.”
 “내가 공부만 했다니, 우리 아버님이 들으시면 네 혀를 뽑으실 거다. 아마.”

 

 쿠라모치의 입이 잠시 동안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나 이런 데 안 좋아하는 거 알지 않나. 내향각이라도. 난 기생들 별로 좋은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닌데.”
 “근처에 묵을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는 거 알잖아.”
 “차라리 순라군한테 잡혀서 감옥에서 자는 게 더 낫겠어.”
 “아, 미유키 제발. 그래. 내향각은 꼭 기생을 안 불러도 된다고 했으니까, 너는 그럼 묵을 방만 달라고 하고 바로 들어가서 쉬어라. 아마 내 기억엔 여각도 같이 한다고 했으니까. 너도 어른들한테 인사하고 다니느라 피곤하잖아. 여독이라도 풀자.”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게.”

 

 험하지만 긍정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내 말을 이해한 듯 쿠라모치가 활짝 웃더니 말에서 내려와 대문 앞에 섰다. 나도 딱히 예절을 갖출 필요는 없었지만, 쿠라모치의 기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쿠라모치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예의를 갖춰야 하니 일단 말에서 내려왔다. 한 나라의 정치를 맡을 대장부가 벌써부터 기생집에 이름이 알려지다니. 난 이 자식이 을과 합격자라는 게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쿠라모치의 얼굴에 만연한 웃음꽃을 보고 있으니 여기에 아껴뒀던 기생 년이 있나 싶다. 표정이 관리가 안 되니 나 원 참, 칼바람 속에서는 어떻게 살아남으려는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리 오너라.”

 

 쿠라모치가 우렁차게 말하자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접객은 확실하네. 기생집이나 사람이나 다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다. 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내향각의 자태가 보인다. 깔깔거리는 기생들의 웃음소리와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그렇고 그런 소리부터 내향각의 등불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소리까지. 문을 여니 과연 한양 최고의 기생집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래봤자 나는 저들을 안 반길 거지만.

 

 “엥, 기생집에 웬 사내놈?”

 

 ...사내? 내향각의 자태에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쿠라모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 앞을 보노라면, 딱 일꾼 행색의 사내놈이 하나 보였다. 급하게 입은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잘 헤지는 것인지 약간 풀어진 저고리에 자신의 몸보다 훨씬 커서 소매 끝에게 먹혀버린 손이 눈길을 끌었다. 소매에 손이 먹혔는데 바지 사정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 바짓단을 꽤 접어 돌아다닐 수는 있는 모양이었다. 급하게 문을 연 것인지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붉어진 볼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아마 이 감정은 사내와 사내 사이에 생겨서는 안 될 감정이겠지. 이 사내놈의 키는 나보다 낮으려나. 나이 또한 나보다 작아 보인다. 열일곱, 열여덟 정도의 앳돼 보이는 얼굴이다. 아직 손님을 맞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숨을 몰아쉬며 생긴 붉어진 볼이 더 붉어졌다. 귀엽다.

 

 “내향각이 언제부터 기생들이 양반을 맞이하지 않았느냐?”

 

 쿠라모치의 말에 눈이 커졌다. 정곡을 찔린 것인가. 아래로 내려져 긴장감에 꼼지락 거리는 손이 귀엽다. 한양 최고의 기생집이라더니 사내놈이 사내를 맞을 리가 없겠고, 필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 말하지 못할 사정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귀여운 사내놈을 구해주고 싶어졌다. 아니, 왜인지 모르겠다니. 사실 이유는 알고 있다. 다만 이 이유를 멋대로 내 감정과 엮어 정의해버린다면, 나는 괜찮지만 저 사내놈은 어떻게 될까. 오랜 시간 봤던 것도 아니고 이 감정을 깊게 생각해본 것도 아니라서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아무리 한량 같은 사내이고 주위가 한량탐화라고 놀려댔었어도, 뭔가 저 사내가 엮인 감정이기에 조심스러워야 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아, 저... 원래는 그것이 옳긴 합니다만..”
 “쿠라모치.”
 “어."
 "여기서 묵는다. “
 “…….어?”

 

 사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의 내렸다. 한량이라고 욕할 거면 욕해. 젠장.

 


 거참, 처음 볼 때도 그리하였지만 보면 볼수록 나를 미치게 하는 외관이라. 어느새 내 초점은 모두 사와무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사와무라 에이준. 열일곱 살의 노비로, 이곳에서 일한 지는 칠 년이 되어간다고 했다. 내향각의 기생들과 칠 년 동안 먹고 살면 여자에 도가 틀만도 한데, 아직 연애도 한 번 못 해본 숫총각이라, 내향각의 기생들에게 잔뜩 귀여움 받고 사는 것 같아 보였다. 기생 년들, 계 탔군.

 

 “저...”
 “음?”
 “조금만 나와 주시면 안되겠슴까?”
 “아아, 그래.”

 

 사와무라는 오후의 가장 더울 때 밖에서 물을 떠왔다. 밖에서 떠온 물을 내향각의 물 저장고에 넣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물 저장고 앞을 가리고 앉아있으면 나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몰라서 수줍게 나를 부르는 사와무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뿐이랴,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사와무라가 통행할 수 있을 만큼의 길을 만들어 놓고 그 옆에 서 있으면 떨떠름하면서도 자신의 진로엔 방해되지 않으니 뭐라 하지 못한 채 복잡한 마음으로 물을 넣는 사와무라를 볼 수 있다. 그때 보이는 게 절경이라. 손매에 먹혀버린 줄 알았던 손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운이 좋으면 손목까지 내게 보여 왔다. 그 얇디얇은 손목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고 이렇게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와무라가 물을 떠와 넣는 모든 과정이 끝나면 아직도 옆에서 서있는 나를 보며 허리를 반쯤 접어 꾸벅 인사한 후 총총총 뛰어간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것을 다른 기생 년들에겐 사와무라가 보여주지 않았으면 하길 빈다.

 기생 년들은 내가 내향각에서 한동안 머문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 온갖 추파를 던져왔다. 주로 사와무라를 통해 손수 만들었다며 자수라든지, 자신들의 높은 손님이 특별히 준 진귀한 과일 등을 나에게 보내왔다. 사와무라가 쭈뼛쭈뼛 그것들을 나에게 건네 오면 나는 그것들 보단 그것들을 집고 있는 사와무라의 손이 먼저 보였다. 물론 대부분이 소매에 먹혀버려 보이는 것은 손톱이 있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그러면 온갖 일을 하느라 짧아진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물어뜯어 짧아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손톱이 보였다. 그런 버릇을 가지면 안 될 터인데. 내 기필코 사와무라의 저 버릇을 고쳐놓으리라 다짐했다.

 내향각은 북촌에 위치한 꽤 큰 크기의 유곽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높은 자제들만 오고,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발로 움직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들만 힘들다. 사와무라가 밑에서 힘든 사람들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밖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오는 길이었다. 분명 기생과 함께 놀고먹는 게 아닌데도 일단 내가 묵는 방으로 가기 위해선 내향각의 대문을 지나야 했기에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바깥에서도 그 모습이 보이게 창을 활짝 열고 술을 먹고 있었다.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불빛 덕에 얼굴이 잘 보였는데, 그래. 병조판서의 아들, 나루미야 메이였다. 아버님들의 권력 덕에 친분이 쌓여진 뻔한 뒷배경의 벗이었다. 결국 나루미야도 남자긴 남자라고 고개를 저으며 지나가는데, 활짝 열린 창덕에 내가 나루미야를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나루미야도 나를 볼 수 있었다.

 

 "미유키!!“

 

 미친 새끼.
 그 길로 나는 나루미야에게 붙잡혀 그 방으로 들어가졌다. 평소 나를 노리고 있던 것인지 내가 나루미야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 방의 기생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며 나를 반겼다. 사와무라가 지극히도 보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떨떠름하게 앉아서 나루미야와 몇 마디 주고받았는데, 술을 그렇게나 마신 주제에 말은 술술 해댔다. 탐화로 급제한 것이 꽤 널리 퍼진 것 같았다. 나루미야는 을과 급제자였고, 모레쯤이면 이제 일 안 하고 버티는 것도 안 된다며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울상이었다. 그걸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 하자 나보고 변했다며 옆에 있던 술을 또 벌컥벌컥 마셔댔다. 물론 말리지는 않았다. 그 덕에 그 많던 술이 순식간에 동이 났고,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나루미야는 마당으로 자신의 옷가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접선이며, 버선이며 간혹 돈도. 미을 구경하는 것도 오랜만이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제 싫증이 난 듯 주위 기생들에게 저것을 주워오라고 시켰다. 기생들은 이미 나루미야가 미처럼 물건을 던질 때부터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눈치 채지 못한 듯싶다. 술의 힘은 위대하다. 기생들은 안절부절 못하던 도중 창밖으로 사와무라가 지나갔다.

 

 “사와무라!”
 “…….예?”
 “거기 네 근처에 물건들 좀 주워오지 않으련?”

 

 사와무라는 그제야 자신의 발 근처에 물건들이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본디 자신의 일이기도 하니 몸을 숙여 주섬주섬 나루미야의 물건들을 품에 안아 챙기기 시작했다. 별 말없이 말을 따르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생들은 흐트러졌을 자신들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일단 미이라도 병판의 아들이니 잘 보이고는 싶을 터이다. 그렇게 이 재밌는 판도 끝나는 건가 싶어 자리를 뜨려니 잠자코 있던 나루미야가 나지막이 말했다.

 

 “싫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어요. 나루미야 님?”
 “싫다고.”
 “무엇이…….”
 “아 그것도 못 알아들어? 당연히 남자 새끼가 기생집에서 먹고 자는 것도 싫고, 여자들 밑에서 말이나 고분고분 듣고 있는 것도 싫고, 내 물건이 저 새끼한테 묻는 것도 싫고, ㅁ…….”
 “나루미야, 그만 하지?”

 

 나루미야의 앞섶을 비틀어 잡았다.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여버렸다. 그 덕에 상에 있던 술과 몇몇의 안주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이곳에 있는 사람은 병판의 아들과 좌의정의 아들이 있는 방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루미야의 눈빛이 몽롱하다.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

 

 “왜? 네가 왜 저 종놈을 감싸는데?”

 

 대답할 수 없다.

 

 “대답할 수 없겠지. 알고 있어.”
 “그게 무슨,”
 “위선자 새끼. 당당하게 말하지 그래?”
 “미.”

 

 대답할 수 없었던 건 그저 확신이 없었을 뿐이다. 이 모든 소동을 지켜보고 있을 한 사람에게 내가 지금 혀를 놀린다면 그 사람에게 얹어질 짐들이 너무 가혹하여 아무 말 안 하고 있던 것뿐이다. 그런데 나루미야 이 새끼는 오랜만에 봐 놓고선 사람 속이나 뒤집어놓는다. 이 마음이라는 것이 입 밖으로 꺼내진다면 결국 정의가 되어버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항상 고민하고 걱정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하루 종일 눈으로 사와무라를 쫓고 장시에서 사와무라에게 어울리는 비단의 색을 생각하더라도 표현은 해오지 않았다. 그런데 나루미야가 복선을 만들어버렸다. 잡았던 앞섶을 손에서 풀자 나루미야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취기가 완전히 돌은 것인지 어느새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사내놈을 치우기 위해선 사내놈이 필요할 것인데, 지금 사와무라는 내가 빌려야 할 것 같으니.

 

 “너희들, 힘을 다 모아도 나루미야를 못 들 테지.”
 “예? 잘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다. 그럼 그냥 이대로 두어라. 어차피 옮기지 못할 거 이상하게 두는 것보단 낫다. 고뿔에 걸리지 않게 이불이나 덮어주고 조용히 나가거라. 나중에 자신에게 왜 이렇게 해두었냐고 화낸다면 내 이름을 대고.”
 “아, 송구하오나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다 알고 있지 않느냐? 왜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지?”

 

 내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얼굴이 빨개지는 게 웃기다. 나루미야와 함께 있던 기생은 네댓 명. 힘을 합치면 나루미야 정도는 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고상하고 우아하게 보이길 원하는 것 같아 노동까지 시키진 않았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니 도포자락이 펄럭였다. 사와무라는 아까 그 위치에서 꼼짝 않고 서있었다. 고개를 숙인 것이 뭔가 불안하여 신도 제대로 신지 않고선 빠른 속도로 걸어가 사와무라의 상태를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히 나루미야의 그 모진 말들 때문이겠지. 기필코 죽이리라 다짐했다.

 

 “사와무라. 이곳은 보는 눈이 많아. 내 방으로 가자.”

 

 작게 떨리는 그 어깨가 안쓰러워 꼭 잡으며 말했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끄덕였고, 나는 사와무라가 고개를 들지 않고도 부딪히지 않도록 부축했다. 곧이어 내향각의 부지지만 내향각은 아닌 여각에 있는 나의 방에 다다랐고, 사와무라는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여각의 다른 손님들은 운 좋게도 모두 나가있었고, 지금 이 곳에는 나와 사와무라밖에 없었다. 그것에 안심하고 사와무라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니 나루미야가 던진 물건에 맞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너무 우연처럼 그 앞을 지나가기에 혹시 맞았을까 걱정했었는데. 쓸데없는 것이었나.

 

 “다 울었어?”
 “…….예.”
“왜 울었는데?”

 

 사와무라의 입이 꾹 닫힌 채 열리지 않는다. 곧 대답을 해주겠지. 대충 내용은 예상은 간다만. 스스로 저 입이 열리기 전에 사와무라의 행색을 살폈다. 또 재빠르게 일을 하고 온 것인지 머리가 헝클어져있다. 얼굴은 눈물 자욱이 난 것 빼고는 괜찮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일을 급하게 한 것인지 저고리가 흐트러져 하마터면 가슴팍이 보일 뻔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남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것을. 혀를 차며 사와무라의 저고리에 손을 대었더니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 나 같아도 그러나? 머쓱해진 마음에 저고리를 손으로 가리키자 이해한 듯 자신의 저고리를 다시 묶는다. 한 마디밖에 보이지 않는 저 손가락에 사람이 미친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감사……함다.”
 “감사인사는 됐고, 이제 대답.”
 “……. 아. 서러워서……. 그랬슴다.”
 “뭐가 서러웠는데.”
 “나루미야 님이 하신 말씀이, 다 맞는…말이라서.”

 

 죽인다. 죽일 거야, 나루미야.
 그 후론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씩 훌쩍이며 이것저것 말하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정신이 아득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잡았다는 게 유일하게 생각이 난다. 이상하게도 아무도 사와무라를 부르지 않았기에 그때는 사와무라와 꽤 오래 얘기할 수 있었다. 이것저것. 나루미야 이놈이 잘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그런 거에 울지 마. 사내놈이.”
 “죄송함다…….”
 “뭐가.”
 “나루미야 님이랑 친하지 않으심까? 근데 괜히 싸우시게 만든 것 같아서…….”
 “괜찮아. 걔는 원래 이상한 애야.”
 “그러면 다행임다.”
 “단순하긴. 근데 너 왜 나한테 미유키 님 안 해?”
 “…….예?”
 “나루미야한테는 나루미야 님, 나루미야 님 하면서. 왜 나한테는 미유키 님, 안 하고 선비님이라고 하냐고. 내 성이 싫어? 이름으로 부를래? 카즈야 님이라고 해봐.”
 “아, 저. 저기…….”
 “그래. 그냥 내가 부르기 싫나 보구나. 알았어.”

 

 속으로 얼마나 미친 듯이 웃었는지 모른다. 이것저것 얘기하다보니 사와무라의 기분이 풀려서 모르게 어느새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나루미야가 망친 작품을 내가 수습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루미야의 흉을 보면 사와무라는 눈에 생기가 돌아 그 얘기를 들었고, 같은 장난이나 거짓말을 계속 쳐도 넘어왔다. 아, 바보 같아. 미유키 님이라고 부르라고 고집 피우니 사와무라의 동공이 흔들렸는데, 그게 나한테 읽혀버렸다. 그래서 더 괴롭히고 싶어서 짐짓 토라진 티를 내자 사와무라가 땀을 뻘뻘 흘리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안절부절 못 하며 앉아있는 것이 나를 잘 따르는 개를 키우고 있는 것 같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귀엽다.

 

 “미……. 유키 님…….”

 

 오늘은 죽을 때까지 내 인생에 확실하게 기억될 날이다.

 

 나루미야가 내향각을 나가고 하루는 사와무라에게 갑자기 장난이 걸고 싶은 하루가 있었다. 뭐, 일 분 일 초마다 걸고 싶기는 하지만 그 날은 유독 심했다. 여느 때와 같이 기생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돌아가던 사와무라를 불러 세웠다. 공부를 하던 도중이라 꽤 지쳤었는데 역시 그 날도 사와무라를 보니 한순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 사와무라에게 장난을 걸고 싶었던 이유는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 걸까. 여하튼 막상 세워놓고 보니 할 말이 없어 평소 궁금하던 것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사와무라.”
 “네.”
 “기생들이 내 얘기 많이 해?”

 

 남자라면 다 궁금해할만 하지. 암. 그렇고말고. 사와무라의 표정이 복잡했다. 마치 왜 이런 것을 궁금해 하지. 라는 표정.

 

 “많이 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하긴 함다.”
 “오, 그래? 뭐라고 하던?”
 “탐화로 급제하신 똑똑한 분이시라고. 집도 잘 살아서 최고의 남편감이라고 합디다.”
 “보는 눈이 있네. 더 없어?”
 “…….아…….”

 

 뭔가 있다.

 

 “말해봐. 괜찮으니까. 이거 가지고 기생들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게.”

 

 대신에 너한테 뭐라고 하겠지. 사와무라가 계속 입을 뗐다가 붙였다가 하며 사람 속을 타게 만들었다. 궁금하다.

 

 “잘생..기셨다고.”

 

 그래, 이 말을 네 입으로 하기가 싫은 거였구나. 사와무라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런 풍의 말투였기에 나름대로 상처를 받아버렸다. 티는 내지 않았다. 땅바닥만 바라보는 사와무라의 정수리마저 수줍어 보였다. 미쳤다. 상처 받고 나서 바로 귀엽다고 생각하는 양반이라니. 지조도 더럽게 없다.

 

 “그래, 내가 탐화라는 얘기도 했단 말이지……. 어. 근데 사와무라. 너 탐화가 무엇인지 알아?”
 “아..에..저..그니까…….”

 

 모른다.
 확실하다.
 확실히 모른다.
 이것은 대어를 낚을 수 있는 장난이라는 것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사와무라는 완벽하다. 아마도 당황스러우면 땅바닥을 쳐다보며 손끝밖에 보이지 않는 손을 맞잡아 꼼지락 거리는 게 버릇인 듯하다. 이 모습을 본 게 내가 오고 나서 몇 번인지 모르겠다. 세었다면 좋았으련만. 아쉽다. 저런 귀여운 모습을 기록해두었다가 사와무라에게 보여준다면 사와무라는 어떻게 대처할 지 너무 궁금했다. 꽤 재미가 있을 터인데.

 

 “음. 탐화가 뭐냐면, 꽃을 탐하다. 라는 뜻인데.. 과거에서 합격자 발표를 하는 의식을 창방의 라고 해. 거기서 탐화랑은 머리에 꽃을 꽂고 주상이 주시는 꽃을 받아 다른 합격자들에게도 꽂아줘. 이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에 피어있던 들꽃을 꺾어 사와무라의 머리에 꽂았다. 어사화에는 꽃이 들어가는데다 탐화의 역할은 충분히 진실이니 이것은 모두 다 거짓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와무라의 순진한 눈빛을 보며 거짓말을 하는 자신을 합리화중이냐고 묻는다면,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대답해야겠다. 사와무라는 자신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나 알아듣고 있을까.

 

 “성적이 좋을수록 많은 꽃이 꽂혀. 탐화는 꽤 높은 성적이라고 할 수 있지. 탐화는 주상께서 직접 꽃을 꽂아주시는데, 나는 그때 이만큼이나 꽂혔어. 사와무라.”

 

 들꽃을 한 주먹 뜯어 차례대로 사와무라의 머리에 꽂았다. 화관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꽂아놓으니 미칠듯이 귀여운 게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사와무라의 머리 곳곳에 노란색과 흰색의 꽃이 섞여있었다. 누구 작품인지 정말 완벽하다. 갈색을 띠는 사와무라의 머리카락 위에는 수술과 꽃잎밖에 보이지 않았다. 예쁘다. 줄기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고심했다. 내가 마지막 꽃을 꽂고나 서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던 듯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그제야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더듬더듬 짚어보더니 헉. 하며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양반이 꽂은 거니 멋대로 뽑을 수도 없을 테지. 울상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에 그것을 보며 웃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웃음을 멈추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완벽함을 위해선 중얼거리는 것도 필수다. 아, 아닌가. 주상께서는 특별히 나를 총애하여서 저것의 배는 꽂아주셨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군. 이 정도의 말을 사와무라에게 들릴 정도로 말하면 사와무라는 깜짝 놀라 나에게 허리를 숙여 “안녕히 계십시오!”라며 크게 인사하곤 도망쳤다. 달렸다도, 벗어났다도 아닌 말 그대로 도망쳤다. 그렇게 꽃이 꽂히는 게 싫은 건가 싶어 잠시 기분이 상했으나 금세 괜찮아졌다. 왜냐하면 사와무라가 도망치다가 멈추고 다시 돌아와서 내 앞에 바짝 서더니

 

 “그래도 고..고맙슴다. 이것들.”

 

 하며 머리에 꽂힌 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다시 재빠르게 도망쳤다.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멍하니 있다가 사와무라의 뒤통수가 안 보일 쯤 되어서야 이해가 되어 크게 웃고 말았다. 아. 귀여워. 도망치는 사와무라의 흔들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꽂아놓은 꽃들 또한 흔들거렸다. 몇 개는 빠지기도 했는데, 그게 사와무라가 지나간 길에 꽃길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 그것 또한 운치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이제 입궐하여 일을 시작해야 했었다. 입궐 날짜가 다가올수록 사와무라를 이곳에 그대로 두고 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언제 또 나루미야가 와서 사와무라에게 눈물 자욱 생길만한 일을 저지를 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나이 지긋한 남자가 사와무라를 잡아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와무라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일단 변할 일이 없으니 정의를 내려 보자 하여 쿠라모치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맨처음엔 기겁 하더니 나중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내 말에 귀 기울여 줬다. 그리고 우린 계획을 하나 짰다. 실로 완벽했다. 상인들에게 걷어드리는 비단 중에 고급으로 한 필 주기로 한 보상이 마음에 걸리지만, 아무렴 어떤가. 내 마음에 쏙 드는 대책 없는 계획이었으니.


 나름 정들었다면 들었을 내향각을 뒤로 하고 말에 올라탔다. 기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나야 그간 사와무라 말고는 기생들과의 대화를 일절 금했기에 누가 누군지 모른다지만, 쿠라모치는 꽤 얼굴이 익은 듯 기생 한 명 한 명을 놓치지 않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어차피 휴가 되면 저 놈은 내향각으로 달려올 듯 한데 왜 저런 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잠시 살펴보니, 사와무라가 안 보였다. 여자들 사이에 있기 싫었나? 그래도 꽤 얘기를 나눈 사이였는데 인사라도 하였으면 좋으련만. 서운한 마음이 묻어나왔다. 사와무라는 그저께부터 내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어제 내향각을 둘러보았지만 사와무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기생들의 짜증내는 목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어디로 간 것이지. 생각하고 있으니 용기 있는 기생 둘이 나에게 다소곳이 걸어와 인사했다.

 

 "벌써 가신다니 아쉽습니다."
 "더 머물다 가시지요, 카즈야 님."

 

 사와무라에게는 힘겹게 들을 법한 카즈야 님을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다니. 사와무라가 좀 배웠으면 좋겠다.

 

 "그래, 나도 아쉽구나. 그런데, 사와무라는 어디있느냐?"
 "모르겠습니다. 그저께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내 놈을 왜 찾으십니까?"
 "아니다. 몰라도 된다. 가자, 쿠라모치."

 

 쿠라모치의 말을 강제로 이끌자 쿠라모치가 잠시 균형을 잃었다가 급히 되찾으며 신경질을 냈다. 간단하게 무시하고 일단 내향각을 떠났다. 북촌의 풍경이 계속 보였다. 아깐 정말 말에서 떨어져 죽는 줄 알았다며 뒤에서 볼멘소리로 말하는 목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니 상관없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사와무라를 못 본 게 마음에 걸린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볼 얼굴이긴 하다만. 계속 보아도 부족한 것이 연의 얼굴이니.

 

 "미유키. 뒤에서 누가 널 부르는 것 같은데."
 "응?"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쿠라모치의 말을 따라 뒤를 쳐다 보니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없는 것을 보아 남자다. 말을 멈추고 가만히 그 사내를 쳐다보자 사와무라였다. 깜짝 놀라 말에서 내리자 사와무라가 내 앞에서 멈추며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채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것이 꽤 고생한 것 같았다. 손에 뭘 들고 있는 게 티가 났지만 손을 등 뒤로 돌려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뛰어온 것일까. 그렇게 착각하니 서운했던 마음이 금세 녹았다. 나도 참 지조 없는 사내다. 기쁜 티를 감추고 짐짓 화난 표정으로 서있으니 사와무라는 금세 놀란 표정을 지었다. 쿠라모치의 인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먼저 가준 듯 했다.

 

 "하아…하아…. 왜 그렇게 일찍 가심까."
 "무슨 일이냐. 양반 가는 길을 함부로 세우다니."
 "아, 죄, 죄송함다. 그래도 드리고 싶은 게 있슴다."

 

 사와무라가 등 뒤에 두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번에 내가 사와무라에게 꽂아 주었던 것과 같은 들꽃들이 모인 다발이었다. 보기만 해도 꽃내음이 절로 나와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다. 색감도 찬란한 것이 도저히 들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알면서도 묻는 내 물음에 사와무라가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

 

 "……임다."
 "무어라고?"
 "……들꽃…임다."

 

 그래, 그렇구나.

 

 "어째서 이것을 나에게 주느냐?"

 

 사와무라의 고개가 들리지 않았다. 바닥을 보고 있는 그 얼굴의 색깔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볼을 만지면 뜨거울까. 눈에는 눈물이 매달려 있을까. 지금 입을 맞추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탐화로 급제하셨다기에 저에게 해주신 것처럼 선비님 머리에 꽃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그만 들꽃을 꺾어버렸슴다. 가신다는데 전 아무것도 드릴 게 없어서……. 한 송이보단 두 송이, 두 송이보단 세 송이, 꽃이라도 잔뜩 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많이 꺾어버렸슴다. 꺾어놓은 걸 모으니 이렇게 많이 생겨버렸슴다."

 

 아아. 그저께부터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때문이었나.

 

 "처음엔 조금만 꺾자라는 생각이었슴다. 하루만 나가자는 생각이었슴다. 하지만 계속, 계속 더 드리고 싶어서 그저께도 나가고, 어제도 나갔슴다. 그래서 일도 하지 않았슴다. ……저, 꽃을 꺾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슴다. 죄송함다. 꽃을 꺾어서, 이런 버릇이 생겨버려서 혼내실 거라면 부디 그래주세요."

 

 당찬 말에 비해 숙인 고개를 들진 않았지만 내민 손 또한 넣지 않는 너의 모습에,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허리가 아파왔다. 홍문관 놈들은 뭘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임금이 갑작스럽게 방문을 할 때도 있었고, 그것이 잦으면 하루에 네댓 번은 됐었다. 주변 사람들은 총애를 받고 있는 것이라 부러워하였지만 실상은 건방진 풋내기가 일은 잘 하고 있나 감시하는 그릇된 총애였다. 초시, 복시 모두 현재의 조정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기에 그럴 만도 했다. 과거의 나는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던 것일까.

 

 "어이, 미유키-! 또 일이다. 너 때문에 우리까지 죽어나겠어."
 "아, 진짜. 죄송합니다. 이거 뭐라 말씀 드려야 할지.. 주상이 차라리 먹고 놀고 하셨으면 좋겠네요."
 "하하하하, 그건 우리도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야. 이렇게까지 빨리 생각해내다니, 역시 총애 받는 신참답다."
 "……그거, 좋은 겁니까?"
 "……아니. 미안하다."

 

 웃을 시간도 없이 한숨을 쉬며 바로 붓을 들었다. 그런데 눈에 익지 않은 글씨들이 보였다. 지금까지 보았던 필체가 아닌 쓸데없이 정갈한……. 마치, 주상의 필체와 같은. 난 아직 주상의 필체가 눈에 완전히 익은 게 아니었으니 단정 지을 순 없었다. 필사가 유난히 잘 된 것인가 하고 읽으니 우리 담당이 아니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 잠시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어? 왜? 바쁜데 지금. 업무 시간이잖아."
 "그럼 갔다 와서 벌 받겠습니다."

 

 성균관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형이니 눈 감아주겠지 하며 뛰쳐나갔다. 뛰며 종이를 읽어도 아까 읽었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역사서에 관련한 내용이 나열되기에 춘추관의 일이 잘못 전달되었나 하고 있으니 맨 마지막 부분에서 내 이름을 언급하며 당장 자신을 만나러 오라는 주상의 말이 담겨져 있었다. 이런 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작은 글씨로 사와무라가 언급되어 있었다. 이런 미친 주상이. 체면이고 뭐고 궐내에서 이렇게 바쁘게 뛰어다닌 사람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나밖에 없을 것이다. 곧바로 언급된 장소인 규장각에 도착하자 각신들이 모두 나가 텅텅 빈 건물이 보였다. 각신들이 한창 바쁠 시간인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왕이 일부러 내보냈다는 소리겠지. 이 종이는 사실이다. 요새 홍문관의 일이 규장각에 많이 뺏긴 터라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면 안 좋은 소문이 들릴 지도 몰라 안절부절 못 하고 서있으니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짚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뛰어왔나 보군, 카즈야."

 

 왕이 있었다.

 

 "아, 아닙니다."

 

 먼저 얘기를 꺼내야 하나.

 

 "급했나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송구하오나 소인은 이해가 되지 않사옵니다."
 "카즈야.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나?"

 

 ……뱃속에서부터 죽을 위험을 겪고 태어난 왕이라 그런지. 뭔가 다르긴 다르다. 아무리 평소에 왕을 욕하고 조정을 비판하는 시문을 냈어도 떨리는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어찌……아셨습니까?"
 "말해주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과인은 자네에게 벌을 내리고 그 사내를 욕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알겠사옵니다. 그럼 소인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십시오."
 "무엇을 걸 것이냐?"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 말에 왕은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다 정해뒀으면서. 각신들이 언제 올지 몰라 불안하다. 불안한 티를 꾹 참느라 미치겠다.

 

 "무엇을 원하냐니……. 역시 자네답군. 그럼 자네의 베필이 직접 쓴 편지는 어떤가."
 "무슨 그딴……그런 것을 원하시옵니까. 조금 더 값진 것을 말씀하셔도 될 ㅌ……지금, 베필이라고 말씀하셨사옵니까?"
 "그래. 베필. 무언가 잘못 되었느냐?"

 

 ……베필이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것인가? 내 베필이라면 어딜 둘러보나 사와무라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임금은 사와무라의 존재를 알고 나를 불렀으며, 이미 '그 사내'라고 지칭했다. 그런데, 지금. 베필이라고. 사와무라를. 언급. 했다. 웃음이 감춰지지 않았다. 임금의 앞이니 웃음을 참아야 하는데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풉…푸흡……. 조금, 아니 더 많이 값진 것을 말씀하시옵소서. 소인이 성심성의껏 준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것 말곤 필요 없느니라. 가끔 과인이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 자를 통해 편지를 주거라. 그러면 된다. 이제 물러가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정말 지극히도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미유키 님이 내향각을 떠나신지 세 달이 지났다. 아니, 네 달인가? 하루하루를 그저 흘러가듯이 보내는 탓에 날짜가 셈되지 않는다. 미유키 님을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높은 관리들만 받는 누님께서 오늘 창방의가 열린다고 하셨다. 창방의가 무엇인진 몰랐지만 꽤 좋은 의식 같았다. 그때는 그래, 그렇구나. 라고만 생각했고 그 날 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문을 열어버렸다. 개를 잡으려다가 담장 근처까지 가버렸고, 결국 놓쳐버렸다. 일어나면서 보이는 담장 사이 틈새에 양반 둘이서 말 위에 탄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눈에 푸른색 도포를 입은 양반이 들어왔고, 그대로 나는 숨을 쉬지 못했다. 곧이어 둘 중 청록색 도포를 입은 남자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의 내용으로 보아 아마 내향각에서 쉬고 갈 듯 하였다. 원래는 초향이가 열어야 하는데, 초향이가 보이지 않았다. 늦게 열면 떠나갈까 봐 급한 마음에 내가 문을 열고 말았다. 내 예상대로 사내놈이 문을 열었다는 타박이 들려왔고 내가 또 깊이 생각을 안 해서 한 행동 때문에 손님이 떠나가겠구나 후회하였다. 이렇게 푸른색 도포의 사내도 더 이상은 못 보겠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곧이어 들리는 푸른색 도포의 사내의 목소리는 뭔가 좋은 기분의 목소리였다.


 그가 내 머리에 꽃을 꽂은 날, 나는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내향각에서 어린 기생들은 종종 잘생긴 남자의 친절에 그대로 사랑에 빠져 한동안 정신을 놓은 듯이 보냈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나를 보면 이해가 충분히 되고도 남았다. 일을 하다가도 계속 실수를 했다. 그릇을 떨어뜨리고 손님의 발을 밟을 뻔  적도 있으며 누님들의 치맛자락을 밟아 넘어뜨릴 뻔한 적도 있었다. 내 상태가 안 좋은 걸 안 누님들이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내향각 밖으로 보냈다. 누님들의 짐꾼 역할을 맡아 따라 나온 것 빼고는 처음 나온 것인데, 혼자 나온 것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어딜 가야 하나 고민하다 무작정 걸으니 사람이 드문 길이 나왔다. 아직 바닥이 정리가 되지 않아 드문 것이겠지.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람이 드물수록 꽃이라든지 풀이라든지 무성했다. 갑자기 미유키 님이 생각나 버렸다. 부끄러운 마음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다 문득 그도 언젠가 내향각을 떠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쯤 떠날까.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그를 위해 뭔가 선물을 해주고 싶어 길가의 들꽃들을 하나 둘씩 꺾었다. 어차피 정리될 길인데, 미리 내가 정리해두자. 라는 생각으로 꺾으니 어느새 나름대로 모여졌다. 모인 들꽃의 양을 보자 그제야 양심의 가책이 들었고 이미 꺾어버린 것 어떡하나 싶어 일단 품에 모두 안고 내향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계속 나갔다. 한 송이만 더, 더, 더. 계속. 예쁜 꽃이 보이면 드리고 싶은 마음에 계속 모았다. 그것을 들고 내향각의 내 방으로 돌아가 한 손에 들어오도록 예쁘게 정리하였다. 이 꽃은 여기에 두면 되겠고, 이 꽃은 여기에. 좋아하셨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하나로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노력한 것은 처음이었다. 가시에 긁혀 손에 피가 나도 아프지 않았다. 썩 마음에 드는 모양새를 하였기에 어서 드리려고 미유키 님의 방문을 두들기자 인기척이 없었다. 무례한 것은 알지만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깨끗하게 정리된 방 안이 보였다. 심장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깜짝 놀라 지나가던 초향이에게 묻자 가셨다며 시간이 꽤 지났다고 말해왔다. 아, 안 돼. 곧바로 내향각을 뛰쳐나갔다. 방향도 모른 채 그냥 무작정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혹여나 꽃이 상할까봐 품 안에 꼭 넣은 채 쉼없이 달리자 말 두 마리와 그 위에 타고 있는 양반 둘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정갈하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유키 님. 크게 소리치자 쿠라모치 님이 뒤를 돌아봤다. 그는 나를 발견한 듯 곧장 미유키 님에게 말을 걸었고 곧이어 미유키 님이 내 쪽을 보고 말에서 내렸다. 알아봐주셨구나. 감사하다.


 그렇게 그가 떠났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가 그립다. 그도 내가 그리울까? 마지막에 세상 사람에게 다 알려지도록 큰 소리로 그를 불렀는데, 그는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그가 그렇게 원하던 말을 사람들에게 다 들리도록 크게 했었는데. 그가 떠나고 정확히 31일이 지난 후, 내 노비 문서가 태워졌다. 내 눈 앞에서 태워진 노비 문서에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행수 어르신께서 나는 이제 내향각의 노비가 아니니, 더 이상 내향각에 둘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칠 년간의 정이 든 곳은 나를 매정하게 떠나갔다. 챙길 짐도 몇 없었다. 머리에서 조심스레 빼낸 들꽃의 꾸러미를 먼저 챙겼다. 나는 이제 노비가 아니다. 천민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값을 대신 치러준 것이다. 그것이 미유키 님이셨으면 좋았으련만. 떠나는 길에 다른 누님들이 나를 배웅해주셨다. 착한 누님들이다. 내향각에 있기 전 짐으로 길을 떠났다. 이름마저 변하지 않은 낙화골. 한양의 몇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 내향각의 화려한 풍채 속에서 살다 보니 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가난함이 보였다. 떠나기 전에는 이런 집에도 만족 했었는데. 차가운 방바닥과 무너질 것 같은 지붕이 두렵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집 안에 들어와 그를 생각하고 있다. 윗목도, 아랫목도 둘 다 차갑다. 형제는 원래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내향각에 들어온 지 2년만에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원체 건강이 안 좋으셨던 분들이라 들어도 덤덤했으나 그 날 밤, 나는 꽤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아마도 이렇게 쓰러져가는 집이기에 그간 팔리지도 않은 것이겠지. 이제 아무것도 안 하며 버티는 것은 안 된다. 내일부터는 어떻게든 일을 구하여 먹고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을 감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근 두 달간 사람 소리라곤 들을 수 없었던 나이기에 인기척과 인기척이 아닌 것은 구분하기 쉬웠다. 이것은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는 소리다. 현재 시각은 사경 쯤. 이 늦은 밤에, 통행 금지령이 내린 이 늦은 밤에 누가 찾아왔단 말인가. 걸리면 곤장 20대다. 누군지 몰라도 일단 살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무섭다.

 

 "거, 거기. 누구심까?"

 

 인기척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다가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린다.

 

 "네 지아비."

 

 카즈야 님이다. 당장 이불을 박차고 문을 열어 그에게 안겼다.

 


 아버님께 남자와 연을 맺고 싶다 하자 나는 그대로 혀를 뽑힐 뻔하였다. 옆에 계시던 어머님이 아니셨다면 난 지금쯤 병자가 되어있겠지. 내 자식 놈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어도 나 또한 아버님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결국 나는 임금의 은혜를 택했다. 임금과 하였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아버님은 그대로 쓰러지셨다. 깜짝 놀라 아버님을 부축해드리자 나의 뺨을 때리셨다. 이번엔 어머님도 말리지 않으셨고, 나는 아무 말도 안 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당연한 거니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왕이 허락한 마당에 무엇을 막을 수 있을까. 아버님은 일단 나를 돌려보내고 사와무라와 함께 다음 날에 찾아오라 하였다. 허락의 말씀을 해주실까. 기쁜 마음에 사와무라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가장 괜찮은 옷을 입혔다. 역시, 옷걸이가 좋으니 어떤 것을 입혀도 예뻐 보여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다음 날 아버님께 찾아가자 아버님은 사와무라를 보고 아무 말 없으시더니 결국 한숨을 쉬시며 허락을 내려주셨다. 사와무라는 연신 아버님과 어머님께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고, 내내 굳은 표정이시던 아버님은 미소를 지으셨다. 어머님은 사와무라의 싹싹함이 마음에 드셨던지 머리를 쓰다듬으시는 특혜를 내리기도 하셨다. 그래도 임금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런 날은 없었겠지. 아버님의 은혜(본가에서 꺼져서 나가서 살라는)덕에 집도 얻었다. 그리고, 우린 지금 바로 그 집 마당에서 혼례를 치루고 있다. 가을 날씨가 좋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달빛도 좋았다. 처음 모습 그대로 달빛에 비춘 사와무라의 얼굴이 보고 싶어 일부러 햇빛이 아닌 달빛 아래의 혼례를 택했다. 어차피 둘 뿐인데, 우리 맘대로 하자라는 식에서 무작정 정해버린 엉터리 혼례였다. 하늘도 우리를 축복하는 게 분명했다. 고개를 내리니 나름 바쁘게 준비 중인 모습들이 보였다. 비록 둘만의 혼례지만 그래도 정식 혼례를 치룬다고 하니 가슴이 무겁게 뛰어왔다. 와,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 아, 아니구나. 어제도 안 괜찮았어. 낮에도 그랬어. 아침에도 그랬고. 사와무라쪽 하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결과인가 싶어 뒤통수를 긁었다. 내 쪽의 하객 상태도 괜찮은 것은 아니니 말 다했다. 쿠라모치와 항상 내 시중을 들어주는 심부름꾼인 돌형이. 끝. 그래도 뭐 어떤가. 하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


 곧이어 사와무라가 방에서 나왔다. 초례청을 앞에 두고 앉은 사람의 복색이 둘 다 남자의 복색이라니. 조선 최고의 초례일 것이다. 옆에서 쿠라모치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참으려 애쓰는 것 같지만 괜찮다. 나도 웃기니까. 사실 사와무라에게 여성이 입는 한복을 입히고 노리개를 달게 하고 싶었으나 끝까지 뜯어 말리는 바람에 입히지 못했다. 내 평생 한이 될 것이다. 그래도, 달빛 아래 사와무라의 얼굴은 사내의 간을 뺏어간다는 그 옛날 구미호의 모습처럼 아름답다. 밤이라서 얼굴 색깔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달빛이 환하게 사와무라의 얼굴만 비추고 있어 다 보이는 걸 어떡하지. 일러두어야 하는 것일까. 사와무라의 얼굴이 빨갛다. 내 마음처럼 떨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사와무라를 보며 씨익 웃었다.

 

 "순서도 죄다 지켜야 하나?"
 "안 지키면 내가 일부러 온 이유가 없잖아. 미유키."
 "넌 왜 왔어? 빨리 가버려."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아닌 것이 하나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 나루미야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온 거야 저 놈은.

 

 "위선자 새끼. 아, 이젠 위선자가 아니신가. 우리 미유키님."
 "다 알고 있었어. 저 녀석. 역시 무서워 죽겠네."
 "스승한테도 약점 잡아서 거래 건 놈인데 뭐가 두렵겠어."

 

 위선자 새끼라는 말이 그 뜻이었나. 역시 무서운 자식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나루미야의 등장에 사와무라가 깜짝 놀란 듯 어느새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딸꾹질이라니 정말 앞뒤가 안 맞다. 분위기를 잡고 싶어도 계속 찾아오는 돌발 상황이 우스워 크게 웃었더니 모두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아, 정말. 예상했던 대로 안 흘러가네."
 "네가 연관된 건 다 나사 하나씩 빠졌었잖아. 새삼스럽긴."
 "정말 새삼스럽다."

 

 쿠라모치와 나루미야가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 그럼 나도 예상을 깨주지. 돌형아, 그 둘을 붙잡고 어서 나가."

 

 돌형이가 가만히 있다가 불려 진 자신의 이름에 깜짝 놀랐다가 일어나서 나루미야와 쿠라모치를 들었다. 돌형이는 큰 몸집인데다 본가의 큰 자재까지 혼자서 들었던 괴력의 사내였다. 그렇기에 작고 얇은 축에 속하는 쿠라모치와 나루미야는 쉽게 들 수 있었다. 집까지 손수 바래다주는 것은 돌형이에게 귀찮은 일일 터이니 일단 여기서 멀리 떨어뜨려놓으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표정의 사와무라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자 사와무라가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밖에서 쿠라모치와 나루미야가 비명을 지르며 놓으라고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그래도 수고해준 놈들인데, 너무했던 처사인가 싶어 문을 열어 그 둘을 내려놓으라고 하려고 몸을 틀자, 사와무라가 내 소매를 잡았다.

 

 "……두 분한테는…나중에 따로 사과 말씀을 드려요……."

 

 응. 그래.
 당연한 걸.
 잠시 뇌가 미쳤었나 보다. 사와무라를 두고 나가려 했다니. 그대로 사와무라를 끌어 안으며 몸의 중심을 사와무라 쪽으로 옮기자 미리 펴 둔 이불 위로 둘 다 쓰러졌다. 급한 마음에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들을 벗는데, 이제 둘의 비명 소리도 안 들리는 것이 사와무라와 나의 거친 호흡 소리와 옷 벗는 소리만 들려왔다. 바람도 불지 않는 밤에 불 하나에만 의지해 서로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데, 사와무라의 그 눈빛이 얼마나 야해 보이는 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사와무라의 옷을 벗기는데 그 사이에 드러난 허리가 보여, 나도 모르게 사와무라의 허리에 손을 대고 그 위로 지분대는 손길을 올렸다. 정신이 아득하다. 몽롱해지는 게 빨리 사와무라를 잡아먹고 싶다. 내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벗기지 않았지만 사와무라의 옷이 점점 사라진다. 느껴지는 내 손길에 사와무라가 헉, 하는 표정과 함께 내 손을 탁 하고 쳐내며 말했다.

 

 "어, 어딜 만지심까!"

 

 아. 사와무라. 제발. 화나려고 한다.

 

 "불 꺼."
 "ㄴ, 네?"
 "원래 남자가 불 끄는 거 아니라서 내가 못 꺼."
 "……저도 남자임다."

 

 울먹거리며 말하는 사와무라의 표정에 한 번 더 정신을 놓을 뻔했다. 가까스로 차린 건데 이렇게 쉽게 사라질 줄이야. 내 아래에 깔려 발도 제대로 못 구르면서 할 말은 다 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손을 움직인다면 사와무라가 야한 소리를 낼 터인데, 그것조차 듣지 못 하고 문턱에서 발목을 잡혀버리다니. 애통할 따름이다. 사와무라의 가슴팍에 올려진 손에서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나 떨고 있구나 싶어 몸을 숙여 사와무라를 안아줬다. 너는 세상 물정도 모르더니, 네 마음을 곧게 말하는 것도 모르는 구나. 손톱을 정갈하게 두는 법도 모르고, 도움이 청하는 방법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방법도 모르고. 사와무라가 울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저, 지금, 사실 되게 무섭슴다. 하지만……미유키 님 때문에 참고 있슴다. 그러니까, 선비님이 저를 여자라고 부른다면 여자가 되겠슴다. 그러니까……살살 해주세요."

 

 이번엔 정말 못 참겠어서,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느끼며 내가 불을 껐다.

 


 

 

[하이큐/오이카게]두 소년의 랑데뷰


이 글은 본 애니메이션과 완전 다른 설정으로 쓰여진 픽션입니다.글 속 배경은 영국이며 두 주인공의 이름 역시
영국이름을 따왔습니다.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은 글 중 나오지 않으며 오이카와 토오루의 작중 이름은 fin입니다.

 


두 소년의 랑데부

 

 


흐리터분한 날씨.창밖을 마구 들이치는 빗소리에 낡아빠진 딱딱한 침대시트에서 몸을 일으켰다.영국의 날씨는 제 기분처럼 제 멋대로였다.한참 비가 쏟아지다 그치고,또 다시 비가 쏟아졌다.학교를 가야하지만 가기싫었다.어두운 방안 블라인드 틈으로 누군가 이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검은 우산이 서서히 들리고 그가 우뚝 제 집앞에 서 있었다..생김새가 똑같은 영국인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외모였다.우리 둘은 철저히 배제되었다.그들 사이에서 우린 이방인이였고,냄새나는 동양인이였다.

키가 작고 왜소한.검은 머리와 검은 눈.나는 그들에게 배척 당했고,어딜가든 늘 혼자였다.먼지가 쌓인 침대에서 일어나 서둘러 집을 나섰다.늘 같은 시간에 집 앞으로 찾아오는 그를 혼자두고 싶지않았다.

“비 오잖아.”

“응.”

우산을 두고 왔다.추적거리는 비가 어깨를 적셨다.우산이 없다는걸 인지하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돌아세웠다.검은 우산이 제 쪽으로 드리워졌다.우리는 곧바로 학교로 가지않았다.나는 그가 딴길로 새는것을 알았고,우리가 학교로 가지않는다는것을 알았지만,굳이 가는길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핀이 들린 곳은 낡아빠진 레코드점이였다.새로나온 음반을 찾는건지.그는 한참동안 레코드 점 이곳 저곳을 들쑤기 시작했다.LP판에 돌아가는 레코드는 드문드문 쇠소리를 냈다.맘에 드는 음반을 찾은 모양인지 제 바지주머니에 든 동전을 주섬주섬 꺼냈다.

레코드점을 나와 우리는 마을의 외각진곳에 위치한 정신병원 앞에 있는 호수로 향했다.다 젖은 벤치에 앉자 바로 축축한 비가 바지를 적셔왔다.우리는 이곳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누군가 들으면 비웃을만한 이야기나 눈앞에 보이지 않는 먼 미래던가.덜 성숙된 미성년들의 대화는 늘 그렇듯 비슷한 패턴이였다.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바지가 젖었어.”

“나도.”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핀과 함께하는 시간.장소.공간은 나를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닥에서 건져냈다.핀은 아무말 없이 입고 있던 셔츠를 제 무릎에 던져줬다.나는 망설임없이 셔츠로 빗물에 젖은 제 얼굴을 닦아냈다.호수 수면 위를 떼리는 빗줄기는 점차 약해져갔다.

“조슈아 패거리들이 몰려와서 해코지 하진 않았지?”

“응.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라.”

“다행이네.”

영국의 공립학교에 다니는 동양인은 핀과 나를 포함해 다섯명.그리고 그 중 한명은 악질 중에 최악인 조슈아 떼거리 중 한명이였다.핀과 다른 수업을 듣는 나는 늘 그에게 이유없는 폭행을 무차별적으로 받아야했다.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발길질을 받던 나를 구해준 핀이 나타난 이후로 그는 나를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더 패줬어야 하는건데.”

“그 정도면 됬어.”

마주친 손등이 차갑다.우리는 아무말 없이 입술을 포갰다.맞잡은 손은 입술과는 다르게 따뜻했다.핀은 언젠가는 같이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자주했다.나를 버린 나라는 어떤 곳인지.비가 자주 오는지.궁금한것 투성이였다.그는 서툰 일본말을 우스꽝스럽게 구사했다.웃음을 참으려던 나는 그 발음에 낄낄거리며 허리를 젖히고 웃어버렸다.

늘 그랬다.우리 둘이라면 뭐든.무엇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것만 같았다.

 

비가 온다.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열었다.버릇처럼 자연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오늘은 항상 같은 시간에 집앞을 찾아오던 그의 발걸음이 끊긴지 일주일째되던 날이였다.후드티를 걸치고 밖을 나섰다.우산은 필요하지 않았다.머리 속을 휘젓는 불안한 예감이 서서히 드리워지는것을 느꼈다.서둘러 그의 집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핀과 다른 혈육인 제 누나였다.린지는 나를 탐탁치않아 했다.적색빛이 맴도는 머리카락과 볼자욱에 가득한 주근깨.나를 보자마자 린지는 크게 놀라하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그 눈은 붉게 물기에 젖어있었다.퉁퉁 부운 눈자욱을 보고 그녀가 울었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그녀는 아무말 없이 내게 오늘 자 신문을 건내고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굳게 닫혀진 문을 뒤로 하고 신문을 펼쳤다.

젖어가는 빗물에 영자가 번져간다.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영국의 호수 마을.Lake District의 공립학교에서 동양인 소년 폭행으로 숨진채 발견.”


꽤나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였다.내게 질낮은 농담을 하던 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귀를 두드린다.함께 가기로 했던 그곳은.밤새 나눴던 이야기들은.오로지 감정에 충실해 서로에게 이끌려 저질러버린.어딜가든 너와 함께였던 그 시간들을.

나 혼자  감내 해야하는거니.

경찰의 말에 따르면 학교에 질이 안좋은 패거리들의 소행이라고 보여진다했다.알고보니 조슈아 패거리들이 작당을 하고 핀의 뒤따라 늦은 밤.아무도 없는 골목길로 몰아세워 칼로 위협을 하다 결국 복부를 여러차례 날카로운 단도로 찔렀다고 했다.


장례식은 입관의식.그리고 안장의식으로 진행됬다.스테인글라스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볕에 의해 반사되어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성당에 안치된 관 속 핀은 흰 속사포에 덮혀져있었다.조심스럽게 흰 천을 걷혀내자,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로 눈을 감은채 편안히 잠들어있었다.

해가 저문 가을밤.시끄럽게 울어대는 메뚜기소리와 어두움에 드리워진 잔잔한 수면의 호숫가.전혀 나와 닮지않은 내 아버지라는 작자는 늘 폭력을 행사했다.7살의 나이에 생에 처음으로 가출을 시도했고,그곳에서 핀을 만났다.파란 환자복을 입은 그는 정신병원에서 탈출을 감행했다고 했다.얼핏 보기에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가 죄수복을 입고 있는것 처럼 보였다.반항기에 가득찬 그 눈은 왠지 모르게 비뚤어져 있었고,날에 잔뜩 서 있었다.우린 그날 처음 서로를 보았지만,왠지 모를 동정과 연민에 서로를 다독였다.그 후로 줄곧 집앞에 찾아왔던 너는 제 자취를 감추고 내 눈앞에 나타나지않았다.왜 나는 너의 집을 찾아가볼 생각 조차 하지 않은걸까.

너의 말들은 나를 늘 부끄럽게 만들었다.직설적인 화법으로 나를 옭아매고 마구 휘둘렀다.
감정에 충실해야한다는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쉽게 제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서툰 고백도 덜 여문 소년의 티가 물씬 나는 얼굴을 붉히며 차마 두 입술을 떼어 말하지 못했다.언제나 내게 일방적인 고백을 쏟아내는 너에게 늘 그런 점이 미안했다.

하얗고 정갈한 얼굴 위로 투명한 액체가 쏟아졌다.흰 천을 도로 덮고,나는 왼손에 들린 너와 닮은 붉은 장미꽃을 천 위로 올려놓았다.한 시간 뒤에 안장의식이 시작된다.가까운 친지와 친구들이 함께 하는 자리일 것이다.그 어디에 내가 낄 자리는 없다.

덜 여문 상처위로 다시 퍼붓는 폭력에 벌어진 상처를 다시 원 상태로 돌려놔준 너는 척박한 이 사회에서 동양인이 살아남기 위해선 총을 다룰 줄 알아야한다 했다.흰 천이 덮힌 얼굴 위로 나는 미처 너에게 전하지 못한 사랑을 속삭였다.

오른손에 쥐어진 총구에 힘이 실렸다.고요하고 적막한 성당을 빠져나왔다.서둘러 조슈아 집을 찾아갔다.무방비한 그는 내가 제 집으로 찾아온것에 놀랐고,제 손에 쥔 총구를 보고 뒷걸음을 쳤다.망설임없이 그 이마 정중앙을 조준했다.탕-소리와 함께 찍소리도 못하고 쓰러진 그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끈적하고 뜨거운 피가 제 손등에 묻어났다.

질척거리는 손을 그 옷에 닦아냈다.빗물에 섞인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총을 쥐어들고 밖을 나섰다.술에 취하지도,마약을 하지도 않았지만 두 다리가 비틀거렸다.두 시선은 힘이 풀려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너가 묻힐 무덤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다가가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찬송가가 묘지에 울려퍼졌다.총소리와 차갑게 식어버린 어린 얼굴이 겹쳐보였다.단 한발의 실탄이 들어있는 총을 머리맡에 겨누었다.곧이어 차갑고 어두운 땅속으로 너는 사라졌다.굳게 닫힌 관위로 흙더미가 쏟아져내렸다.빗물이 눈가를 찌른다.나는 약에 취한것 마냥 피식대며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꿈 속에서 우리는 영국의 작은 해변도시인 이스트본의 해변가를 걷고 있다.검지 손가락에는 금색으로 도금된 반지가 끼워져있었고,해변가에는 오아시스의 Whatever이 잔잔한 해변가에 울려퍼졌다.자갈밭 위에 흰색 베일을 두른 신부가 환한 미소를 짓고,사진사의 손에 들린 카메라에 플래쉬가 마구 터졌다.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몰려오는 파도와 함께 우린 행복하게 웃었다.

너는 여전히 일어가 적힌 단어사전을 펼쳤고,우스꽝스런 발음으로 단어를 읽어내려갔다.그리고 자갈밭에 앉아 나는 얌전히 속삭이는 그 소리를 들었다.


핫도그를 파는 덤프트럭의 카세트의 노래소리와 함께 눈꺼풀이 감겨왔다.너와 함께할거야.그곳이 어디든.날카로운 철이 깔린 길이든.커다란 불이 집어삼킬듯 내게 다가와도 나는 니가 잡은 이 손을 절대 놓지 않을거야.

처연한목소리로 절절한 고백을 하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어린 연인이다.어떤 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함께 할거야.

기다릴게.다시 만날 그날을.


fin.


 

 

[은혼/오키카구]내가 당신을 볼때


 

* 이 글에서의 소고와 카구라는 결혼한 신혼부부입니다.

 


  

 

1. 그가 보는 그녀의 습관 - 사다하루

 

그녀는 항상 자신의 애완동물에 사다하루라는 이름을 붙인다. 처음으로 키운 애완동물에도 사다하루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는 사다하루 1호로 불린다.

현재 키우는 하얀 개(?)도 사다하루다. 그리고 몇 년 전 투구벌레 시합 때 가져온 쇠똥구리도 사다하루로 불렸다. 얼마 전에도 사다하루를 두고서 문제가 일어났었다.

 

“사디~ 할 일 없으면 사다하루 30호 밥이나 줘라, 해.”

“걔가 토끼였나?”

“어떻게 지금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사다하루 30호를 모르냐, 해? 설마,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살림 차리고 있는 거냐, 해?”

“아니, 솔직ㅎ..”

“진짜 바람 핀거라기도 하냐, 해? 파피가 하는 말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왜 너 같은 사디ㄹ..”

“아니! 지금 사다하루가 몇 마린데 내가 어떻게 사다하루 몇 호인지 다 알고 있겠냐, 차이나.”

“지금 사다하루 무시한 거냐, 해? 여기 있는 사다하루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생명이다, 해!"

“화 내지마. 뱃속에 애 들어. 그리고 난 아무한테나 마음 안준다고. 너 아닌 암퇘지년들도 지긋지긋하다, 정말. 그냥 여기 있는 사다하루에게 다 밥 주면 되는 거지?”

“사디.. 사디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냐, 해? 나는 그 아무가 아니라는거네! 근데 사다하루 32호는 이틀에 한 번씩 밥 먹어야 한다, 해! 답답하니까 내가 그냥 줄 꺼다, 해!”

 

사다하루 먹이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짧은 상황극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바람필 사람이 아니란걸 알기에 가볍게 말장난으로 외도에 대한 상황을 자주 만들어 낸다.

그나저나 어제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새로운 사다하루가 있었다.

 

“얘는 사다하루 39호다, 해! 사다하루! 파피에게 인사해라, 해! 길 가는데 귀여워서 그냥 사버렸다, 해!”

 

나이는 어디로 먹은 건지 처음 만난 그 시절과 달라진 게 없는 나의 아내다.

 

 

﹡﹡﹡

 

 

2. 그녀가 보는 그의 습관 - “히지카타, 죽어!”

 

내가 본 그는 항상 마요라의 뒤에서 “히지카타, 죽어!”라고 외치면서 대포를 쏜다. 그가 마요라를 미워하는 이유도 다 알고 있지만,

마요라가 죽으면 크게 슬퍼할 사람 중 한명인 것도 다 알고 있다. 아무튼 그의 “히지카타, 죽어!” 입버릇은 일생에 단 한번 뿐인 결혼식 때도 나왔다.

 

“신랑분! 이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망할 히지카타 죽어!”

 

이 상황은 사회자가 시켜서 나를 안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면서 벌어졌다. 소고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요라는 얼굴이 붉어지고 진선조 대원들은 다들 웃었다.

결혼식 때 찍은 동영상에도 그의 외침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얼마 전, 진선조에 다녀왔을 때 또한 일이 생겼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해결사 아가씨를 이렇게 만든 놈이 누구래, 소고? 나도 이제 삼촌이 되는건가, 하하하.”

“왔냐?”

 

고릴과 마요라가 나를 반겨줄 때 마요라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 앞에서 마요라가 담배 피고 있던 것이 그의 눈에 띄었던 것이었다.

 

“히지카타상, 그래도 임산부 앞에서 흡연은 안 되죠? 그러니까 히지카타 죽어. 뱃 속에 애 잘 못되면 책임이라도 지실껍니까?”

 

아무리 내 앞에서 담배 못 피게 한다고 해도 계속 죽으라는 부정적인 말을 하는 그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처음 봤을 그 날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히지카타 죽어!”를 외치는 그다.

 

“그런데 너도 내 앞에서 계속 죽으라는 말 하면 뱃속에 애 듣는다, 해.”

“안 그래도 요즘은 진선조에서만 죽으라는 말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그래도 파피가 입버릇이 그렇게 험해서 되겠냐, 해. 애가 파피 닮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해.”

“나 닮으면 유리 검이겠네. 그래도 널 닮은 것보다는 낫지 않냐?”

“이, 사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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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가 보는 그녀의 습관 - “~해”

 

그녀는 하는 말마다 “~해”를 붙인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사디! 나 해결사에 가봐야 된다, 해. 긴쨩 당분 먹는 거 내가 감시 하지 않으면 당뇨병 걸릴 꺼다, 해. 신파치도 지금 수련하러 가서 딴죽 걸어줄 사람이 없다, 해.”

 

이제 애 엄마가 될 사람인데도 “~해” 말투는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를 마미, 아빠를 파피라고 부르는 습관도 있는데,

나중에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를 마미라고 가르치고, 아빠를 파피라고 가르치는 불상사가 생길까 걱정이다.

처남의 말투를 들어보면 “~해”는 그녀의 습관일 뿐 야토족이나 그 가족의 습성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녀의 이러한 말투는 몇 달 전에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 때는 뭐처럼 비번 날이라 집에 있던 날이었다. 소파에 앉아 선풍기를 틀어놓고 TV를 보고 있었는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진선조 나리~ 우리가 지금 댁내 아내를 납치했는데 말이야, 꽤나 귀엽더라고? 요시와라에 팔아버릴까 생각중ㅇ..”

“그럼 바꿔봐, 진짜로 내 아내 납치 하고 있다면 목소리 정도는 들려줄 수 있잖아?”

“소고!! 나 무서워.. 빨리 풀ㅇ..”

“어디서 되도 않는 거짓말이야. 적어도 사기를 치려면 말투 정도는 따라해야지, 안 그래? 너는 조만간 경찰서에서 보자고.”

 

보이스 피싱이 왔을 때 정말 유용한 말투다. 누가 “~해” 말투를 쉽게 생각할까 더군다나 그녀는 나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거의 없다.

이 일이 있고서 며칠 안 지나서 경찰서에서 범인을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다음에 사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녀가 잡혀 간다면 그 때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아마도 진선조의 총 인력을 동원하지 않았을까 싶다만. 그런 일은 안 생기는 것이 제일 좋은 법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런 허접한 인간에게 당할 사람이 아니라서

마음 놓을 수 있다. 어쩌면 “~해”란 말투는 작고 귀여운 그녀에게 딱 맞는 말투일지도 모르겠다.

 

“차이나, 넌 언제까지 말끝마다 해를 붙일 거냐?”

“사디는 내 말투가 바꼈으면 좋겠냐, 해?”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면 다행이다, 해. 나는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내 이상형이니까 이번 생은 나름 잘 살았다, 해.”

“그럼 나는 네 이상형인건가? 뭐, 그것도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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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녀가 보는 그의 습관 - 바주카포

 

그는 처음 봤을 그 때부터 바주카포를 써왔다. 사무라이가 맞기는 맞는지. 그가 검을 쓰는 것보다 바주카포 쓰는 것을 더 많이 봤다.

보통 가벼운 사건 처리는 바주카포로 하고, 지난번에 국장을 구하러 간 것과 같은 전투에서는 검을 사용한다. 사귀기 전에, 항상 만나기만 하면

그와 싸우던 그 때 바주카포에 맞아서 다칠 뻔 한 적이 많다. 이 점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이야기 한다.

 

“내가 바주카포에 맞아서 다쳤으면 사디 너 같은 거 아무도 데려가줄 사람 없었을거다, 해.”

 

라면서 말이다. 언제는 그의 뒤에서 바주카포를 들고 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더니 바주카포는 능숙하게 쓰기 힘들다며 빼앗았다.

그가 집에 바주카포를 전시해두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에 가면 바주카포만 열 개는 넘는 것 같다. 그 중에 유난히 금빛 테가 둘러진 다른 것보다는 비싸 보이는

바주카포가 있는데, 이는 마요라를 죽일 때 쓸 대포라면서 애지중지하고 있다. 그의 바주카포 사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때는 작년 크리스마스였다.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거다. 열어봐.”

“...지금 장난하냐, 해?”

“네가 지난번에 목줄이나 수갑은 싫다고 말해서 고민하다가 고른 거라고~”

 

그에게 받은 바주카포는 못써봤다. 후에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도 바주카포를 선물 할 것으로 보인다.

 

“사디는 나중에 나이 들면 바주카포 장인 하는 건 어떠냐, 해?”

“장인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라고. 나는 바주카포 사용하는 게 좋지 만드는걸 좋아하진 않아.”

 

이전에 진선조도 직업이 무장경찰인 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힘들 테니 다른 직업을 미리 생각해보는 게 어떻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진선조에 남아있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진선조가 그렇게 오래 갈 수 있으련 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내가 제안한 바주카포 장인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 빼먹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는 막부에서 나오는

연금으로 살꺼라면서 뭐하러 나이먹고 일을 하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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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가 보는 그녀의 습관 - 벽장

 

그녀는 해결사에 있을 때 벽장에서 자서 그런지 결혼 하고 난 후에도 벽장에서 잔다. 결혼 한지 얼마 안됐을 때는 이제 집도 넓고 넓은 침대도 있는데

벽장에서 자지 말고 방에서 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 그녀였다. 해결사에서 지낼 때는 어렸으니 벽장에서 자도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나이도 들고 홀몸도 아니니 좀 더 넓은 곳에서 편하게 자길 바랐는데 말이다. 언제는 그녀와 벽장을 두고 진지하게 이야기 했던 적도 있다.

 

“차이나 넌 왜 저 좁은 벽장에서 자야하는데?”

“사디가 없으면 너무 집이 넓게 느껴진다, 해. 그냥 좁은 데에 있으면 안 외롭고 좋다, 해.”

“그럼 내일부터라도 자택근무로 돌릴까?”

“네 녀석은 진선조에 계속 있는게 차라리 낫다, 해. 그리고 사다하루가 있어서 괜찮다, 해.”

 

역시 그녀는 지기를 싫어해서 “네 마음대로 해라, 해.”라고 한번쯤 말해줄 수 있는 것도 진선조에 있으라고 말했다. 그래도 좁은 벽장에서 자는 이유를

알고 나니 맘 편히 진선조에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전엔 보통 진선조에서 자고 오는 날이 많았지만 그 이후로는 출퇴근하는 식으로 집에서 잘 수 있게 달라졌다.

다음에 이사를 가게 된다면 그 때는 이런 습관을 고치게 벽장 없는 집으로 가던가, 아니면 좋은 벽장이 있는 곳으로 가던지 해야겠다.

그나저나 우리에게 다음 집이라는게 있긴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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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녀가 보는 그의 습관 - 기물파손

 

그는 일주일에 한번, 시말서나 경위서를 쓴다고 집에 오지 못하는 날이 있다. 이유는 한 번도 빠짐없이 같았다. 기물파손. 그가 바주카포를 자주 사용하다보니

불필요한 곳에 포가 조준 되어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시민들이 진선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갖게 된데 큰 기여를 한 것도 그가 아닐까 싶다.

지난주에는 무장 강도범을 추적하면서 바주카포를 사용했는데, 강도범에게 조준 된 것이 아니라 그 옆의 전봇대에 조준 되어 사고가 일어났었다.

그 덕에 이번 달 월급은 적게 들어오게 생겼다. 아이가 나중에 파피 닮아서 학교에서 사고치고 다닐까봐 무섭다. 언제는 기물파손을 두고 말다툼을 벌인 적도 있다.

 

“이 사디야! 이번에도 월급 적게 들어오면 어쩔꺼냐, 해. 그리고 이러다가 간방가면 어쩔꺼냐, 해.”

“이때까지 몇 년을 간방 안가서 괜찮아~ 그리고 지금 나 걱정해주는거냐? 욜, 차이나 그래도 나를 남편이라고 생각하기는 하나보지?”

“ㄴ..나는 내 걱정하는 거다, 해! 사디, 네가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아와서 스콘부도 못 사먹고있다, 해!”

 

분명 나는 기물파손을 두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딴죽걸기를 싫어한다.

아무래도 안경을 불러서 딴죽 걸어달라고 부탁을 해야 될 것 같다. 내가 그에게 딴죽을 걸때면 걸때마다, 나를 남편 걱정하는 아내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맨날 사고 치고 들어오는 그가 걱정은 되지만 그에게서 그런 소리는 듣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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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가 보는 그녀의 습관 - “사디”, “도S"

 

그녀는 결혼 하기 전에 만났을 그 때부터 나를 “사디” 또는 “도S”라고 불렀다. 이러한 호칭은 결혼하고 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결혼하고서 “여보”나 “자기” 등의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보다는 평소의 호칭을 부르는 것이 우리에겐 더 잘 어울렸다.

몇 년 간을 만나면 싸우기만을 반복했는데 지금 와서 달달한 분위기라니.. 하나도 안 어울린다. 그녀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상황이 있긴 하다. 부탁할 때 말이다.

 

“소고~ 나 스콘부가 먹고 싶다, 해. 스콘부 사도 되냐, 해?”

 

지난번에 스콘부를 너무 많이 산다고 한 뒤로 함께 장 볼 때는 잘 안 산다. 그래도 몰래 사오는걸 봤지만, 가끔은 장보러 가서 이렇게 말하면서 100개 정도 사기도 한다.

이름을 부르는 상황은 이럴 때도 연출된다.

 

“소고! 나 사다하루 사면 안되냐, 해? 사다하루 37호가 외로워할꺼다, 해. 그 애에게도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다, 해.”

 

이전에 집에 키우고 있는 사다하루가 많으니 이제 더 이상 사다하루를 사지 말자고 했었다. 그 이후로 마음대로 사오는 일은 없지만 꼭 그 전에 이름을 부르면서

사고 싶다고 전화를 해온다. 생각해보니 1년에 한번쯤은 부탁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이름을 부를 때도 있다.

 

“소고~ 오늘 사온 치파오 예쁘지 않냐, 해? 역시 나는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뻐서 다 잘 어울리겠지만!”

 

이렇게 평소보단 다리가 더 드러나는 치파오를 입고서 맞아줄 때도 있다. 뭐, 어느 정도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이유 정도는 간단히 알아맞힐 거라고 생각한다.

아, 생각해보니 나보다 어린데 왜 오빠 소리 한번 못 들어봤을까.. 뭐, 그런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기대도 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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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녀가 보는 그의 습관 - “차이나”

 

그는 나를 항상 “차이나”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 옷차림 때문인 것 같다. 언제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차이나! 여기 와서 이것 좀 해봐.”

“차이나 아니다, 해! 지금은 기모노 입고 있는데 왜 차이나냐, 해!”

“꼬맹이라고 할까?”

“내가 너랑 키도 별로 차이 안 나는데 왜 꼬맹이냐, 해! 자존심 상한다, 해!!”

“그럼 부인이라고 해주리?”

“너 같은 사디 자식에게 그런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차이나가 더 낫다, 해!”

 

우리 부부의 말다툼을 보면 그렇지만 항상 내가 지는 편이다. 나도 지는 편은 아니지만 도S인 그는 정말로 남을 놀리는데 도가 틔인듯했다.

아무튼, 예전엔 “차이나 계집애”라고 부르던 것을 “차이나”라고 하니, 이정도면 나름 장족의 발전 아닌가 싶다. 그가 나를 이름으로 부를 때는 딱 한 상황 밖에 없다.

처음으로 이름을 들었던 그 날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다.

 

“사디! 잘자라, ㅎ.. 지금 뭐하는거냐, 해? 더운데 달라붙ㅈ..”

“카구라.. 그냥 이대로 있어주면 안돼?”

“오늘 힘든 일 있었냐, 해?”

“그 때 네가 나랑은 죽어도 삐-는 못하겠다면서. 그냥 꼭 껴안고 자게 두라.”

 

이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들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 때라면 아마도 첫날 밤이였던 것 같다. 그가 도S라 밤자리가 무섭다면서 거부했었는데 그게 맘에 걸렸는지

아무리 술을 먹고 오는 날에도 덮친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사실 이 날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뭔가 미안하기도 했다. 이 날 처음으로 허락을 해줘서 그런지

그 이후로 삐-하고 싶을 때 이름을 부른다. 정말, 그 외에도 자기가 불리할 때는 이름을 부른다. 이런 음란마귀.

 

  

 

 



[하이큐/오이스가]


[하이큐/오이스가] 버릇
AU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는 설정

 

1. 스가와라는 설렘을 느꼈다. 벚꽃이 흩날리는 4월, 학교 정문 앞, 남고에서 말이다.

 

2. 스가와라는 저가 이렇게 생각해놓고도 참 어이가 없었다. 옆 학교에는 예쁜 애들이 자자한 여고도 있었다. 스가와라의 친구도 그 여고에 여자 친구가 당당히 있었고, 그 친구를 제외하더라도 남고와 여고사이에서는 오묘한 썸이 흘렀다. 그런데, 그 여고를 마다하고 설레는 상대가 같은 반의 어쩌다 앞자리가 된 작자라니. -사실 이 부분에서 스가와라는 쾌재를 불렀다. 아싸. - 이름은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했다. 출석을 부를 때 엇듯 들은 이름을 스가와라는 입으로 굴려봤다. 어감이 좋았다, 카와. 오이카와. 그렇게 이름을 되새기기라도 할 것 마냥 몇 번을 굴려보다가, 앞자리 이름의 주인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입을 닫았다. 들렸나? 뭐라고 하면,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지 뭐. 스가와라는 아예 턱을 괴고 오이카와가 하는 냥을 지켜보았다. 초반에는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선생님의 말을 듣는가 싶더니, 금세 풀어져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다가,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놓고는 샤프심을 차곡차곡 세우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 보며 스가와라는 눈을 접었다.

 

3. 반 내에서 오이카와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굳이 따지면 굉장히 좋은 편- 이었다. 적당히 말도 받아치고, 성격도 나쁘지 않고, 배구동아리 활동도 한다 하였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마찬가지로, 여느 반 친구들 마냥 서글서글하게 굴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면서도 무언가 불편한 기분이었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이 이상한 것이겠지. 곧 생각을 접었지만 스가와라의 마음은 여전히 불퉁했다. 완전, 연인도 아닌데 뭐하는 짓이야 나. 그런 저의 마음을 자각하면서도 스가와라는 조소를 내뱉었다.

 

4. 좋아하는 사람에게 눈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로,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친구와 밥을 먹으러 갈 때, 쉬는 시간, 부 활동, 어쨌거나 오이카와의 학교  생활은 스가와라가 빠삭하게 익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스가와라의 친구가 물었다. 오이카와. 싫어하냐고. 스가와라는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지만 친구는 스가와라만큼이나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러면 대체 오이카와를 계속 보고 있는 이유가 뭔데! 스가와라는 할 말이 없었다.

 

5. 이번에 그 친구가 -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 스가와라에게 말했다. 너, 오이카와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거였어? 이번에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 눈치는 좋은데 어쩜 노리는 것 마냥 족족 빗나가는지. 스가와라에게는 고마울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스가와라가 헛웃음을 뱉으며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요즘 통 하는 짓이 오이카와 같았단다. 스가와라는 무슨 소리냐며 상체를 기울였다. 친구 본인은, 사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스가와라는별 소득 없이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6. 하지만 친구가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이카와가 저를 볼 때면 꼭 뒷목을 쓸었다. 스가와라 저도 오이카와마냥 뒷목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오이카와는 맛있는 반찬을 한 쪽에 남겨뒀다 마지막에 먹었다. 스가와라도, 다 같이 먹어버리는 습관을 관두고 맛있는 반찬을 남겨먹었다. 오이카와는 지루할 때면 노트를 찢어 종이 공을 가지고 놀았다. 저도 심심할 때면 종이 한편을 작게 뜯어서 가지고 놀았다. 스가와라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볼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이 봤을 때 얼마나 꼴불견이었을까, 오이카와는 다행히 의식을 하지 않는 건지, 평소보다 조금 더 그 행동을 반복했다. 벌써 친구한테 들켜버렸다는 사실이, 더 눈치가 빠르면 이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스가와라는 침을 삼켰다. 젠장, 무의식중에 무슨 짓을 한 거야!

 

7. 그 뒤로 스가와라는 오히려 오이카와를 더 의식하며 밥을 먹었다. 오이카와를 더 의식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고, 오이카와와 눈도 잘 안 마주쳤다. 이게 뭐야, 왜 하필 좋아하는 사람이 오이카와인가. 옆고의 예쁘장한 여자애였다면 저도 이렇게 까지 피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밥을 먹을 때, 스가와라는 저번처럼 맛있는 반찬을 다른 반찬들과 같이 먹었다. 지루할 때는 펜을 돌렸고, 오이카와와 눈이 마주……. 마주 친 적이 없다. 스가와라는 이마를 짚었다. 참도, 힘든 사랑하는 구나 싶었다. 빤히 바라볼 때는 몰랐는데, 새삼 나타나서 왜 내 마음을 콕콕 찌르는지. 왜 그것이 무의식중에 행동으로 드러난 건지. 확실하게 마음을 접어야겠다. 스가와라는 아예 오이카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8. 하루는 오이카와가 저를 불렀다. 스가와라는 심장이 뛰어 입을 꾸욱 다물었다. 들킨 건가, 벌써 들킨 건가. 뭐라고 하면 어쩌지, 정말 싫다고 변명을 해야 하나. 스가와라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쳐지나갔지만 오이카와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에잇, 뭐야. 그게 아닌가? 스가와라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냐면, 오이카와와 저는 이렇게 따로 불러내서 얘기를 할 만큼 돈독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 못 참겠다. 오이카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질 것이 뻔했다. 스가와라가 먼저 새치기를 쳤다. 야, 그.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말뜻을 모른다면 뭐야, 이 는. 하고 지나쳤을 것이고 말뜻을 알아차렸다면 아, 그렇구나. 하고 말았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구나 싶어 마음이 싱숭생숭 했다.

 

9. 확실히, 그 뒤로 오이카와의 행동이 이상했다. 물론 전만큼 주시를 하고 있던 건 아니지만 나름 빤히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았던 스가와라의 객관적인 눈으로 봤을 때, 이상했다. 뭔가를 따라 하려고 애쓰는 듯이 보였고, 잘 안되면 언제나처럼 뒷목을 슥 쓸어내리고는 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스가와라와 통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번에는 대화할 때 꼭 눈을 마주치려 했었는데. 역시 그거였나. 스가와라는 그동안 저가 피했으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10. 또 하루, 다음날 오이카와가 또 한 번 저를 불렀다. 스가와라는 아예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 씨, 갈구면 뭐라고 설명하지. 네가 좋아서 그랬어? 죽어도 말 못한다. 존경……. 존경했어? 암만 봐도 존경하진 않았다. 싫어하긴 커녕. 아이씨. 스가와라는 숨이 턱턱 막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점심시간이라 빈 교실을 향해 스가와라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오이카와에게 맞을 각오까지 되어있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들어오자마자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하려는지 앞문, 뒷문, 창문까지 모조리 닫았다. 스가와라는 애꿎은 손가락만 뜯었다. 바깥 창문에서 햇살만 화사하게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둘 사이에서는 침묵이 일었다. 오이카와가 시끌벅적한 운동장을 한 번 보더니 조용하게 물었다.

 

정말 별 뜻 없어?

스가와라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별 뜻이 있을 리가!

왜?

왜? 스가와라는 그 질문에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이 들었다. 별 뜻 없으니까 별 뜻이 없는 거지, 왜 거기에 ' 왜 ' 라는 질문이 붙는가. 마치 그냥, 이라고 했더니 왜? 라고 묻는 것 같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질문이 이어지는 그것 말이다.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스가와라가 머릿속에서 고심한 답을 찬찬히 골라내고 있을 때 오이카와가 새치기 하여 입을 열었다.

나는 별 뜻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스가와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정말 저가 너를 싫어하거나 좋아해서 내 뺨을 한 대 치고 싶다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 건가?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볼을 쓸었다. 강냉아, 아빠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나는 별 뜻 있었거든, 그거에.

젠장. 이젠 무슨 말로 흘러가는지 감도 안 잡힌다. 스가와라는 소심하게 오이카와를 올려다보다 눈을 깔았다. 그래, 먼저 따라하고, 좋아하고. 터무니없는 짓을 한 저가 죄지, 죄야. 스가와라는 이제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입술을 꾹 물었다. 그래! 사나이답게, 한 대 맞거나. 뭐, 옅은. 그렇게 하자!

너 그거 알아? 되게 귀여웠는데.

이건 또 무슨……. 스가와라는 감이 안 잡히다 못해 그냥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뜻 모를 말에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신체는 그 말에 반응해 홧홧 타오르고 있었다. 이 싸나이야. 그만 좀 해.

너, 나 따라했잖아. 그거 되게 귀여웠다고. 안 들킬려고 애쓰는 모습도 괜찮았고, 아, 물론. 조금 기분 상하긴 했어. 안 들키려는 척 하면서 끝까지 눈으로 나 쫓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내가 그걸 몰랐을 것 같아? 천하의 오이카와가.

스가와라는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대단한 눈치시네요 진짜. 잠깐. 그런데. 스가와라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저거, 좋은 뜻 아니야? 스가와라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귀엽다. 분명 귀엽다고 했다. 아니, 놀리는 것이 아닌가? 스가와라는 슬슬 자기 좋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아, 그리고 나도 너하고 많이 똑같은 짓했는데. 몰랐어? 네가 난감하면 머리 귀로 넘기는 거 보다보니까, 뭐 나도 그렇게 되고. 핫소스빵 좋아하지? 그거 입 터지게 넣고 우유하고 같이 우물우물 먹잖아. 그것도 꽤 괜찮더라고.

스가와라는 아예 눈을 크게 뜨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가 낮게 웃었다. 개학식 날 보았던, 저가 첫 눈에 반했던 그 웃음을 뗬다. 오이카와는 다시 물었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스가와라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많이 신경 쓰였어?

햇빛이 밝았다.

응.

스가와라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동안 저가 피했으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쿠로바스/녹고]

 

 

누군가를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아주 심각한 버릇이다.
물론, 그냥 몇 번 쳐다보는 정도가 심각하다고 치부되어버릴 것은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안다.
그게 몇 번이 아니라 계속, 습관적으로, 그것도 몰래, 라면 내 말에 대충 납득이 갈 것이다.
확실히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 모르겠다. 깨달은 순간 그것은 이미 나의 일부인 마냥 자리잡고 있었다.
버릇은 들이기도, 고치기도 힘들다.

 

 

 

 

 


"야 너 청소 똑바로 안해? 키무라네 파인애플로 갈아버린다?"
"아, 미야지 선배, 그건 좀 너무하잖아요!"
"어이-키무라. 파인애플 한 세개,"
"저는 예전부터 청소를 잘하는 멋진 남편이 되는게 꿈이었습니다!"

 

 

 

 

 


첫인상은 결코 좋지 않았다.
친한 척 말을 걸어와선 남의 물건을 비웃으며 알짱거리고.
신경쓸 가치도 없다고 판단해 그냥 무시했건만, 같은 동아리 부서에 들어 정말 이상할만큼 잘 해줬다.
밥을 같이 먹고, 그 무슨말을 해도 그냥 가볍게 넘기고, 등하교를 함께 하고.
그 유들유들한 성격은 누구에게나 통하는지 많은 친구들이 따랐고, 그럼에도
그 친구들의 공세나 요구보다도 나를 우선으로 했다. 방과 후 왜 저런 좋은 애가 나같은 애와
같이 다니냐며 본인들 딴엔 목소리를 죽여서 말했을 험담을 들으면서, 나도 그에 동의했다.
나도 이해가 안가는데 본인들은 오죽 답답했을까.

 

 

 

 

 

나 혼자가 아닌, 독단적인 것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그런 이상한 기분을 안겨준 것이
슈토쿠, 특히나 이 녀석 이었다.  농구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언제나 함께 기뻐하고, 함께 힘들어 했다.
라쿠잔에게 졌을 때는 정말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물론 인사를 다 했지만, 찾아오는 패배의 씁쓸함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창피하게 눈물이 흐를 때, 이 녀석도 함께 울었다.
그래도 역시 농구는 재밌다며, 앞으로 함께 계속 우리들과 함께 하고 싶다며 평소의 경박한 웃음이
아닌 본연의 웃음을 띄우며 말 할 때, 울고 있지만 굳건해 보였다.처음으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본인도 울고있던 주제에 말이다.
그리고 이상한 버릇의 시작을 신호하듯 가슴에 낯선 느낌이 퍼져갔다.
그 때부터 일 것이다. 마냥 시끄럽게만 들렸던 목소리가 어쩐지 계속 듣고 싶고
왠지 다른 녀석들과 즐거워 보이면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으며
나도 영원히 이 녀석과, 슈토쿠와 함께 농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니, 농구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습관적으로 안경을 올리고, 테이핑 된 손의 끝부분을 꾹꾹 누르는 버릇,
시합 직전 오하아사와 관련된 것들을 한번 다시 점검해 보는 버릇.
이 외에, 인정하고 싶지 않던 이상한 버릇이 또 생겨버렸다.

 

 

 

 

 

 


"어이, 미도리마, 너는 경트럭에 치이고 싶냐? 혼자 서서 뭐 하는 거야?"
"아 왜 우리 신쨩한테 그래요? 저러는거 한 두번도 아니잖아요!"
"타카오, 조용히 하라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인사를 다 할 뿐 지금은 잠시 생각에 빠졌던 것
뿐이라는거야."
"미야지상 그러면 저도 지금부터 생각을 할테니 청소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너네 둘 다 온몸으로 청소하고 싶지?"

 

 

 

 

 

 

가벼워 보이지만, 농구할때만큼은 또 진지하다. 지는 것을 싫어하고, 내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 하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 별난 구석도 많다.
가끔 날 불러놓고 아무 말도 안 한다던지, 의미모를 말들을 한다던지. 언제는
대뜸 밤에 한번 보자고 해 나갔더니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냥 웃어버리기만 했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적당한 말만 둘러대면서 분명히 자기가 하고 싶던 말을 회피하는 모양새였다.
그 웃음은 그동안 몇 볼 수 없던 아주 희귀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나의 마음 어딘가를
불편하게 했던 웃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내 버릇이 이러한 녀석의 행동들을 좋을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버릇들은 점점 더 그를 빛나게 보이게 했고 해서는 안 될 말들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고 발악했다.
또한 자꾸만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혹시 그 때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가. 왜?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건가.
아니, 애초에 이런 감정은 그런 연애의 감정이 맞긴 한 건가. 그냥 나한테 다가와 준 사람이
처음이어서 우정과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한참을 근거없는 생각들로 답지않게 뒤척이다가 잠들었던 수 많은 날 중 어느 밤에,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꿈을 꾸었다.
중학교 2학년, 남 몰래 연정의 마음을 품고 있던 교생 선생님에 대한 것 이후로 처음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온갖 뒤죽박죽인 상태인 머리를 애써 부여잡고 대충 학교 갈 준비를 한 후 집을 나왔을 때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녀석은 언제나 처럼 내가 나오자 환하게 웃었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무작정 시선을 피했었다.
처음에는 본인이 새삼 너무 잘생겨서 못 보겠냐느니 부끄러워서 그러는거냐느니
실없는 소리들을 해대다가도, 계속되는 내 이상한 행동에 점심시간 옥상에서
답답하다는 듯 내 앞에 바로 섰었지. 두 손으로 내 머리를 부여잡고 발꿈치를 양껏 든,
다소 힘들어보이는 자세로 내 눈을 맞추며 무슨 일 있냐고 답지않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 때 나는 결국 인정해 버렸다.

 

 

 

 

자각 한 이후로 계속 떠오르는 그에 대한 생각은 심지어 농구에도 방해가 되었다.
뭔가 계속 날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니까 슛을 쏠 때도 집중이 안 되었다.
물론 시합중에 동료의 동선이나 행동을 좇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 모든것들 하나하나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결국 보다못한 오오츠보 선배가 잠시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오라고 하셨고, 그에 따라
체육관 뒤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고, 이럴바엔 그냥 말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뜨자마자 신기하게도 바로 눈이 마주쳤지.
걱정된다는 듯  빨리 다시 오라며 언제나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내가 만약 지금 내 감정을 말해버린다면, 저 얼굴은 금새 일그러 지겠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던, 당황하는 표정을 짓던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내가 바라는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역시 그건 그만두자, 라고 결정 내려버렸다. 어떠한 이유던지 간에,
이 녀석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사양이니까 말이다.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다. 역시 운명에 따르는게 맞다는 것이다.
첫 인상이 최악이었던 너가, 정말 나와는 정 반대인 너가 내 버릇이 되어버릴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어느 순간 나는, 매일 아침 오하아사를 보며 전갈자리의 것도 빠짐없이 기억해두고 있던 것이다.
난 언제나 인사를 다 하며 하루의 럭키아이템을 빠짐 없이 챙긴다.
그 날 게자리의 운세 순위는 높았고, 그 어떤 것도 양심에 찔리는 일을 행한 적이 없다.
그러니 틀림없이 이 버릇은, 이상함에는 분명하지만 못된 버릇은 또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 하나뿐인 에이스님이잖아요. 그치?"

 

 

 

 

 

 


너에게 습관처럼, 버릇처럼 빠져버린 것이었다.

 

 

 

 

 

 

 

 

 

 

 

 

 


아, 나는 정말 이상한 버릇이 있어. 아니, 이건 버릇이라 하기에는 좀 애매한가. 그런데 어쨌든,
확실한건, 나한테 달가운 버릇은 아니야. 절대로.
한 사람을 계속 신경쓰는, 의식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어. 물론 내 성격에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지. 항상 모두와 골고루 친하게 지내고 '좋은 친구'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해.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안 그래 보여도 나 요즘 되게 혼란스럽거든.

 

 

 

 

 

처음엔 진짜 반은 장난이었어. 좋은 의도도 아니었지.
중학교 때 나를 처참하게 쓰러뜨려버린 천재. 복수할거라 다짐했더니 같은 학교 동료라니.
어이없는 상황에 말이나 걸어볼까 해서 예의 그 웃음으로 다가갔었어.
그 고고하신 모습이 어딘가 웃기고, 평범하지 않은게 관심이 갔어.
언제나 벽을 쌓고 남들을 차갑게 대하는 저 사람에게, 인정 받는다면 끝내주겠지.
저 냉정한 사람이 나한테만 마음을 열고 의지하면 정말 재밌을거야.
나는 그렇게 질이 좋은 녀석은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단순히 재미로 접근했던 건데.

 

 

 

 

 

"아, 미야지 선배. 결국 키무라 선배 데리고 파인애플 가지러 가 버렸어. 우리 그냥 도망갈까?"
"안된다는 것이다. 그냥 있는다면 파인애플로 끝나겠지만, 만약 도망간다면 내일 갖가지 종류의
온갖 과일들로 맞게 될 것이야."
"풋, 그렇긴 해. 하아, 둘만 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네. 신쨩, 처음봤을 때
진짜 웃겼던 거 알아? 럭키아이템이라니."
"난 언제나 인사를 다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때 너의 첫인상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는 거야.
앞으로는 누군가와의 첫 만남에서 다짜고짜 그렇게 웃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말도 안되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기가 막혔지. 나도 사람이니까.
역시 천재들은 다 어딘가에 결함이 있는건가, 하는 생각까지 해 봤어.
하지만 또 실력은 말할 필요도 없어서 아무도 그 '왕자님'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지.
그리고 짜증과는 별개로 이상하리만큼 재미있어서, 꿋꿋하게 견뎌내고
내가 생각해봐도 귀찮을 정도로 치근거렸어.
뭐, 누구나 적당히 잘 대해주면 알아서들 따라주고 좋아해주었으니까.
근데 미도리마는 예상보다 더 완고한 태도로 마음도 안 열어주고 선을 그냥 딱딱 긋더라.
그 모습은 아, 내가 진짜 성공하고 만다, 하고 쓸데없는 투지를 다짐하게 만들면서도
이상하게 내 어딘가와 닮은 것 같아 더 눈길을 끌었어.
항상 누군가와 교류를 하면서, 사람을 사귀면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끼게 해 준거야.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관계들. 만난적이 있긴 한건가, 하는 애의 생일파티에 초대되기도 하고
누군지도 모르겠는 애가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부르면서 체육복을 빌려가고.
깊은 구석 어디하나 없는, 모두와의 살얼음 같은 관계에 나는 도취되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이런거 말고, 조금 더 깊은 그런 관계를 나누고 싶다는 내 목소리를 그냥 무시했어. 귀찮잖아.
쟤 친한척하면서도 왠지 차가운 느낌이라서 별로야, 라고 말하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애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그냥 비웃음만 나오더라.
그야, 그렇게 생활해도 꽤 살만 했던걸.

 

 

 

 

 

 


"에이, 그래도 지금은 좋잖아?"

 

 

 

 

 

 

근데 너네들도 잘 알지? 좋은건지 그 반댄건지 어쨌든 미도리마는 좀 다르잖아.
물론 표현은 잘 안해도, 가끔 다가오는 그 어색하고 서툰 손길이 묘했어.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말들이 뭔가 나를 진짜 '나'로 봐주고 있다는 대충 이런 느낌도 줬어.
나에게 마음을 열게 하겠다고 다짐했던 장난의 성공이 가까워 지고 있다는 확신이
가져다 주는 기쁨보다도 사람 대 사람으로, 동료 대 동료로 미도리마와 가까워 지고 있다는
기쁨이 훨씬 더 컸어. 이상하게 말이야.
지금까지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타입이었던거야. 진중하고 조용조용한 말로 은근히 위로해주고.
절대 가벼운 말도 안하고, 안 그래 보여도 배려심 깊고 아닌척해도 항상 자신을, 우리 팀을, 나를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항상 생각해준다는 것도 잘 알아.
그리고, 조금씩 미도리마는 변하고 있었어.
혼자가 아닌 모두와 농구하는 것을 행복해 하고, 전적으로 나를 믿고 시합에서 뛰어 주고.
정말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웃어주기도 하고.
그리고 그건 나아가서 내 감정에 이상한 불씨를 드리우고야 말았어.

 

 

 

 

 

 

"시끄럽다는 것이다."
"음, 싫다고 그러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다. 나는 너 좋다고 계속 계속 말하고 있는데."

 

 

 

 

 

 

미도리마 앞에서 즐거워 하고 웃던 가짜가 버릇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고, 당연한 것이 되었어.
그건 또 진심이 되었고, 결국 이상하게 정신을 차려보니까 농구랑 미도리마 생각만 하고 있는거야.
근데 있잖아, 미도리마랑 나는 완벽히 다른 사람이잖아.
나는 하찮을 정도로 평범한 인간. 그 외에는 무엇도 아니야.
성적은 전교권에다가 천재고, 뭐  잘 생긴 얼굴. 그런 애가 나한테 가당키나 하겠어?
지금이야 같이 이러고 있지만, 내 감정이, 우리들의 실력차가 점점 커져갈수록
미도리마 곁의 내 자리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지. 인정하긴 싫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거의 유일한 파트너가, 그것도 동성주제에 자신을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니.
그거 솔직히 불쾌하잖아.
몇 번은 진짜 힘들고 못 참겠어서 그냥 털어놔 버리자, 하고 큰 맘 먹고 다가간적도 몇번 있긴 했어.
근데 결국 하는 족족 관뒀어. 나 은근 막 나가는 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도저히 못 하겠더라.
사람들이 들으면 토하는 시늉을 할 정도로 끔찍한데, 특히나 미도리마가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겠어.
바로 확 차가워지는 그 얼굴을 상상해 보니까, 역시나 무서워. 차라리 그냥 이대로가 좋은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멍청했어. 버릇의 무서움을 간과했던거야.
버릇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막 뭐라하지, 먹물처럼 퍼져서 내 시야를 그냥 초록색으로 물들여 버렸어.
시야가 넓으면 뭐해. 그냥 다 푸릇푸릇 하다고. 원래 초록색 따위 안중에도 없었는데.
끊어내야 한다는 거 잘 알겠는데, 끊는 방법은 또 모르겠어.
진짜 버릇 주제에 아주 못 돼서 힘들게 해. 아, 어떡하지.

 

 

 

 

 

 

"대답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것이다."
"응, 그래. 나도 신쨩이 정말 좋아!"

 

 

 

 

 

 


아아, 망했어. 그냥 모든 게 다 필터링 되어서 보이기 시작하잖아.
농구도 더 잘 해 보이고 막 이상해. 리어카도 하루종일 끌어주고 싶어. 뭐 어짜피 그러고 있지만.
아 맞아, 그리고 어느순간부터 날 계속 쳐다봐.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거 진심 엄청 신경쓰여.
물론 나도 엄청 신경 쓰고 있지만 뭔가 대놓고 묻긴 좀 그래서 맨날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긴 하는데,
그냥 완전 정공법이라니까? 설마 자기 딴엔 몰래 쳐다보고 있다던가, 하는거 아니겠지?
나 방금 하품했는데 어떡하지. 나 방금 되게 못생기지 않았나?
하고 엄청 사람 귀찮게 한다고. 괜히 또 이상한 상상하게 만들고, 솔직히, 너네들도 그렇잖아.
어떤 애가 너 계속 몰래몰래 쳐다보면 그런 류의 생각 밖엔 안 들잖아. 안 그래?
..또 나 좋을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진짜 바보냐, 너는."
"어? 웃었지? 신쨩 방금 웃은거지?"

 

 

 

 

 

 

 

근데 이 버릇 있잖아. 마냥 짜증난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계속 이러고 있으니까 그냥 이대로 둬도
괜찮을 것 같아. 그냥 왠지 안 사라졌으면 좋겠네. 웃기지?

 

 

 

 

 

 

 

 

 

 

 

 

 

 

"미야지, 파인애플 가지고 오긴 했는데, 차마 저 분위기 사이로 날릴수가 없겠는데?"
"어이구 눈새에 삽질에.. 사귈거면 빨리 사귀든가 이 미친 커퀴들아!!!!!!!!!!!"


 

 

[소울이터/키드마카]

솔직히 지금, 그는 매우 당황스럽다. 겉으론 별 일 아닌 듯한 도끼눈을 유지하고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단 말이다. 아니, 왜, 이 여자가, 우리 집에 있는거지? 살면서 집에 여자라곤 리즈와 파티 뿐이였다. 게다가 그 둘은 자신과 영혼을 나눈 무기일뿐.

 

 


" 하... "

 

 


복잡한 심정에 한숨 뿐이다. 혹시 자신이 말로만 듣던 그 쓰레기인 것인가. 아닌데. 나 데스 더 키드, 현 사신의 아들. 이 이름만으로도 굉장히 정의롭게 살아왔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인데 지금 이 상황엔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 답이 나오지않았다.
그는 앞머리를 세게 흐트렸다. 그 와중에 침대 윗 벽의 비틀어진 액자가 거슬려 바닥과 수평하도록 고쳐놓았다. 이 빌어먹을 시메트리 정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이어지는구나. 그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궜다.
침대 위에서 엎드려 웅크린 자세가 되었다. 아버지, 이 상황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째서 마카가 제 옆에서 자고 있는 것인가요. 홧김에 고개를 쳐들고 옆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귀여웠다. 사실 마카의 시메트리함이 돋보이는 트윈테일 머리가 참 맘에 들었었는데. 왜일까 헝클어진 모습도 나쁘진 않았다. 레몬베이지색 머리카락이 마카의 목주위에 흐트러져있다. 아, 쓰다듬고 싶다.

 

 

"......!"

 

 

미친? 미친. 한마디로 미친이다. 아니 제정신으로도 이런 말을 내뱉다니. 자신은 정녕 미친 것인가. 그래, 쓰레기인가보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짓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않았다. 아니 내가 왜.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사신의 영혼을 타고났는걸. 그래, 어제의 일이 자세히 생각나지도않는데 결론부터 짓다니.
그는 회상이라는 것을 시도해보았다. 사무전 축제날이라서 장인과 무기들이 파티를 함께했다. 아, 자신은 축사를 마치고 같은 장인들끼리 샴페인을 가볍게 나누었다. 그래 고작 샴페인뿐이다. 그 길로 자신은 집에와서 잠이 든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느 단계에서 마카를 만났는지 짐작조차 가지않는다.

일단 침대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물론 뒤는 한 번도 돌아보지못했다. 사실 아까 머리모양과 얼굴만보고 미처... 그 아래는 보지못했다. 상의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자신이 매우 바보같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냥 확인차 집주인의 입장에서, 순수하게, 보면 되는 것을 무엇이 찔려 보지못했던 것인가! 내가 쓰레기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지금이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아, 흥분하지말자. 내 멘탈의 시메트리가 깨지고있으니까. 그래.

 

 

조로록-

 

 

민트티를 찻잔에 따르자 상쾌한 향이 전해졌다. 하지만 먹으려고 따른 것이 아니다. 다만 무언가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 무언가는 아마도 어젯밤의 일인 것 같다. 식탁에 앉아 찻잔을 돌리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허리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한다. 딱히 뻐근하지도않고, 허리도 큰 일을 치른 느낌이 없다. 팔도 다리도 딱히...

 

 

" 아, "

 


.........? 어깨가 좀 쑤신다. 알이 배긴 것은 아니고 뭐랄까, 시큰시큰한 느낌이다. 아까 침대에서 내려올 때 부딫혔던가. 갸웃하며 아픈부분을 자세히 보려하는데 침실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순간 경직한 그는 천천히 침실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조금 정상적이지 못했다.
어깨를 보기 위해 잠옷 윗쪽 단추 두개를 풀어헤친 채였기 때문. 살금살금 침실로가는 키드의 모습은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였다. 하지만 바보는 그것을 모른다.

 

 


" 마카, 깼어? "

"..키드? 너......"

 

 


조금 흔들리는 듯한 마카의 레몬색 눈동자를 키드는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유를 모른다. 그래서 어림짐작을 시도했다. 그래, 마카도 낯선 곳에서 일어났을 놀랄만하지,하고. 그녀의 경계심과 혼란스러움은 보이지않는지 바보는 어색하지 않기위해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계속 묵묵부답이던 마카의 입에서 딱, 한마디가 나왔다.

 

 

" 키드. 말하는 건 좋은데 말이야.. 내, 내가 일어날게 "

" 어? "

 

 

무, 무슨말이지. 고심하던 키드는 마카의 시선처리가 부자연스러움을 알아채고 직감적으로 눈동자를 내리깔아 상의를 보았다. 아 이런 XX. 침대에 앉아있는 마카와의 대화를 위해 상체를 숙이고 있었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래 쓰 쓰레기. 하하. 하.


정신이 나간듯한 키드를 바라보던 마카가 눈웃음을 지었다. 좀 전까지는 매우 당황했지만 마카는 누구와는 다르게 어젯밤의 일이 점점 생각나고있었다. 장인들의 축배에 소울이 몰래 끼어들어 키드의 샴페인을 독한 주로 바꾸어놓았다. 그런 소울을 다그치다가 마시지말라는 말을 전하는 것을 깜빡했다. 그의 무기인 리즈와 파티가 파티장에 이미 뻗어있기에 아무래도 키드혼자 돌아가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키드를 거의 끌고 가다싶이 이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잠들었다니. 이것은 실수였다.
마카는 키드를 한 번 불렀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만났다. 마카가 먼저 입을 뗀다.

 

 


" 가져와 정장이랑 넥타이. 아, 넥타이가 아닌가. 해골 브로치. "

"...마카? "

" 사무전에 가야지. 아버지께 안부드릴 시간 지나지않았어?"

 

 

 

마카가 씩 웃으면서 풀어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제의 피곤이 가시지않았는지 조금 풀린듯한 눈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일단 마카의 말대로 정장과 브로치를 들고왔다. 그것을 나이트테이블에 올려놓으니 마카가 주섬주섬 일어난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눌러내렸다. 풀썩하고 솜털이불에서 공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랄까, 조금 충동적인 행동이였다.
얼떨결에 다시 침대에 걸터앉게된 마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하고 키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 모습에 다시 마카의 레몬색 눈동자에 빠져드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곤 속으로 외쳤다. 아, 마카 이게 무슨 느낌인진 모르겠는데..

 

 


" 뭔가 위험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 

 

 


뱉어낸 말에 마카의 반응이없자 키드는 극도의 긴장감을 느꼈다. 뇌가 어지러워 막혀버린다는게 어떤 느낌인지를 현재 체험하고 있었다. 이러다 호흡곤란으로 죽어버리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잠시 마카가 키드의 이름을 불렀다.

 

 

" 나 더 있다가라고? "

" 어. 어, 어? "

 

 

뭔가 더 어필하면 마카가 그렇게 해줄 것 같은 분위기다. 아주 세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그러함을 표시했다. 마카가 다시 한 번 웃더니 뒤로 풀썩 누워버렸다. 그녀의 상반신이 휙 넘어가는 것을 보고있자 진정이돼지않았다. 뭐가?

 

 


" 그럼 나 더 누워있을래. 어제 너 끌고왔더니 솔직히 몸이 무거워 "

" 날 끌고와....? "

 

 


아차 싶어서 아까 미처 보지 못했던 어깨를 살펴보았다. 눈동자를 최대한 굴려 바라본 어깨는 빨갛게 약간의 압박한 흔적이 보였다. 마카가 그런 그에게 미안하다며 손을 잡고 끌기엔 무거워 어깨를 잡고 지탱하면서 왔다고한다. 손을 합장하듯이 모은 그녀가 그렇게, 귀엽지않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도, 그렇게. 그녀의 옆으로 누웠다.
다 큰 남자 하나를 끌고오는 마카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 아마 지금 마카는 양팔에 알이 잔뜩 배겼을 것이 분명하다. 뭔가 웃기기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특한 마음이 들어 마카를 안아버렸다. 그녀가 손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안겨버렸을 때 그는 탄식하며 이름을 불렀다.

 

 

" 키드..? "

 

 

그녀의 부름에 억누르고있던, 참고 있던 것이 흔들렸다. 나름 사신의 피라고 이성이 본능에 비해 아직은 조금 더 강했다. 잘, 참고있다 데스 더 키드. 더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꼭 안긴 그녀를 떼어놓긴 싫었다. 그 때 마카가 작게 웅얼거렸다. 아, 이성아 제발 저 목소리를 듣자. 그래, 그리고 정신차리자.

 

 


" 심장이 되게 빨리 뛴다 "

" ...... "

" 떨려, 소울말고 이렇게 안겨본적 처음이야."

" ...... "

 

 

핀트는 나가버렸다. 아니 이미 나간지 오래였을지도. 마카의 자신에 대한 설레임 표현한 것. 그리고 소울녀석에 대한 ...질투? 아무튼 의식이 희미해진다. 그래, 이성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기력해지는 의식 속에 마카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시메트리함을 고집하던 그의 버릇을 본능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역시 마카의 머리카락은 시메트리보단 이렇게, 흐트러졌을 때가 제일 좋았다. 레몬색 머리, 레몬색 눈동자. 그래, 그녀의 입술에서도 레몬맛이 날 것이 분명하다.
 

 

".........하"

 


역시, 났다. 아주. 아주 진한 레몬맛이였다.

 

아, 맛있다.

 

 

 

 

 

 

 

 

 

 

 



추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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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겐1
선댓!!
8년 전
닝겐23
아 선댓도 했겠다 이제 쥐구멍만 찾으면 되겠네 ^-^ 닝블리들 똥손이어서 미안해
8년 전
닝겐2
선댓!
8년 전
닝겐3
선댓
8년 전
닝겐4
선댓
8년 전
닝겐91
와 대박이다 다들 사랑해 다 내 취향이야 와 대박
8년 전
닝겐5
선댓
8년 전
닝겐10
일단 스크랩 추천
8년 전
닝겐6
으악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부끄러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49
총대닝도 수고 많았고 부끄러운 글이지만 잘 읽어주길 바라 ㅠㅠㅠㅠㅠㅠㅠㅠㅠ다른 글 써준 닝들도 수고 했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7
선댓 ㅠㅠㅠ잘보고올겡
8년 전
닝겐125
익만에 똥손들 없다는거 틀린말없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와 다들 진짜진짜 잘썼다ㅜㅜㅜㅠㅠㅜㅠㅠㅠㅠ다들 고생많았고 총대닝도ㅠㅠㅠㅠㅠㅠ고생했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ㅠㅠ다시한번읽어야지..
8년 전
닝겐8
선댓!
8년 전
닝겐9
와우!!
8년 전
닝겐11
선댓
8년 전
닝겐12
쓰니얏
8년 전
닝겐25
나 오이스가 쓴 닝인데 수정댓글을 확인을 안해서ㅠㅠㅠㅠㅠ마지막 한 문장 좀 지워 중ㄹ 수 있을까..?? 복붙에 문제가 있었나봐 (쪽팔)
8년 전
닝겐35
지금 모바일이라 고치기가 힘들어 미안!ㅜㅜㅜ
8년 전
닝겐38
ㅇ아이고 ;ㅁ; 아니야 나중에 시간나면 그 때라도 고쳐줘ㅠㅠ총대닝 고생했어! 헉 세상에 오타도 보인다 옅은이 아니라 여튼..!
8년 전
닝겐13
선댓
8년 전
닝겐31
헝 진짜 모두 진짜 수고했어! 잘볼께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14
수고했어합작닝들ㅜㅜㅜㅠㅜ잘읽을께♡♡
8년 전
닝겐15
선댓 선추천
8년 전
닝겐21
일단 합작 낸 닝들 수고했고 총대 닝도 고생 많았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다들 수고했어ㅠㅠ
8년 전
닝겐16
선댓!! 닝들이랑 총대닝도 수고했어!!
8년 전
닝겐17
선댓
8년 전
닝겐18
선댓 선추천!!!!!
8년 전
닝겐19
선댓11111!!!!!
8년 전
닝겐20
금손닝들아 미리 고맙다
8년 전
닝겐22
ㅅㄷ
8년 전
닝겐63
총대닝이랑 글쓴닝 다들 수고했어!! 아직 다 안읽었지만 다들 너무 잘썼다ㅠㅠㅠㅠ
8년 전
닝겐24
선댓
8년 전
닝겐26
합작 낸 닝들 모두 수고했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나하나 다 읽어봤는데 똥손이라고 한 닝들 진짜 다 거짓말쟁이야ㅠㅠㅠㅠㅜㅜㅠㅠㅠㅠㅠㅠㅠ 와 진짜 닝들 다 글 잘쓴다 한 명도 잘 못쓴 닝 없었고 이거 쓰느라 힘들었을텐데 수고했어~!! 내가 파는 커플링도 많고 하나하나 다 대단하다 진짜 멋져 닝들 자랑스러워 역시 내 최애 닝들이야ㅜㅜㅜ 고생했어 수고했어!!♡♡ 나중에 재탕 또 해야지 전부 다 재밌고 주제가 슬퍼서 그런지 넝물ㅜㅜㅜㅜㅜㅜ 아무튼 닝블리들 고생했어 고마워~~♡
8년 전
닝겐27
오 좀잇다가 읽어야지 수고햇어요들
8년 전
닝겐28
ㅅㄷ
8년 전
닝겐29
나 적흑 쓴 닝인데 모바일은 원래 브금 안보이나ㅜㅜ
8년 전
닝겐37
내 글 브금이 안보이넹...
8년 전
닝겐39
모바일 브금트는거 오류나나봐ㅜㅜ나도안돼
8년 전
닝겐51
나 오타 있어! 욕이라 그런가..?
8년 전
닝겐53
응 욕은필터링될껄?
8년 전
닝겐30
헐헐 벌써 공개...!!! 합작 참여한 닝들 모두 수고 많았어ㅠㅠㅠ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봐야지..
8년 전
닝겐58
워... 내 글이 제일 짧고 별로인 느낌ㅠㅠㅠㅠㅜ 아직 다 보진 못했지만 닝들 너무너무 잘썼어!!!
8년 전
닝겐32
와 다행이다 잘 써진거같아......
8년 전
닝겐33
오우
8년 전
닝겐34
와 다 아
8년 전
닝겐36
이제 글도 올라왔겠다 집 앞 강으로 가볼까~는 장난이고 나는 그닥 잘 쓰지 못했지만 다른 닝들은 다들 잘 썼겠지... 다들 수고 많았어! 총대닝도 수고 많았어요♥
8년 전
닝겐40
모두 수고했어 사정으로 못낸닝들도 보니깐 많던데 다음기회엔 꼭봤으면 좋겠다ㅠㅠ
총대닝 너무너무 수고했고 예쁜 글써준 참여닝들도 수고했어 모두 감사하다♥♥♥♥♥

8년 전
닝겐42
스크랩 해놓고 이따 자기전에 침대에 누워서 천천히 봐야짛 ㅎㅎㅎㅎㅎㅎ짱신나
8년 전
닝겐41
글 읽던 닝인데 후회에 미사와 if 글 브금이 자동재생 되어있어여!!
8년 전
닝겐46
아 왜그러지 자동설정안했는데(당황)
8년 전
닝겐43
다들 수고했어ㅠㅠㅠ좋다ㅠ
8년 전
닝겐44
우와우와 다들 수고했어 ㅠㅠㅠㅠ 이제 하나씩 정독해야지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45
선댓
8년 전
닝겐47
로우루쓴 닝인데 와 진짜 내꺼 똥망이야... 닝들아 보면서 욕하지 말아줘 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48
다들 수고 많았어!!! 총대닝도 진짜 수고했어!!!!ㅠㅠㅠ
8년 전
닝겐50
지금 사정상 컴퓨터를 쓸수없는입장이라 수정이 불가피해!ㅜㅜㅜ내일 다고칠게!
8년 전
닝겐52
다들 아주아주 수고 많았어!!!!
8년 전
닝겐54
와 오이스가 다이스가....ㅜㅠㅜㅜ
8년 전
닝겐55
다들 수고했어!! 내꺼 똥망이다..
8년 전
닝겐56
다들 수고했어!!!잘읽을께~~♥
8년 전
닝겐57
아 뒤에서부터 읽고있는데 키드 짱귀여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ㅋㅋ잘살렸다!!수고했어
8년 전
닝겐59
ㅅㄷ
8년 전
닝겐60
하...녹고다이스키...눈새들이지만 다이스키 녹고는 ㄹㅇ입니다
8년 전
닝겐61
보쿠아카ㅇ 왜 씬 없는데!!!!!!!!!!!!!
8년 전
닝겐62
제출닝들도 총대닝들도 전부 수고하셨습니다ㅠㅠㅠ 특히 총대닝 진짜 수고 많았어ㅠㅠㅠㅠ그리고 이번 펑크가 엄청 크게 난 만큼 펑크낸 닝들 익명이라 가볍게 펑크낸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있다....ㅜㅜ...... 전부 수고했어!
8년 전
닝겐64
총대닝! 브금 반복재생이 안되는데... 나만 이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물어볼게
8년 전
닝겐65
음 일부러 반복재생 안눌렀었어~번거롭게해서 미안 긴소설들은 불편하겠다 아 나 쓰니임
8년 전
닝겐76
총대닝 ㅜㅜㅜ 신아라+토도마키 글에 헛,소리가 필터링 됐다 첫번째 번외 바로 위에 "나도 맞선이나 볼까" 밑에 지문에 이것도 . 이렇게 돼있는 거에 헛.소리 라고 넣어줄 수 있을까??
8년 전
닝겐66
미사와 if 쓴 닝인데 복붙하다가 이상한 오타 생긴것 같아....(오열) 그 1학년 포수 하는 부분에서 "가 있어야하는데 ?가 있넼ㅋㅋㅋㅋㅋㅋㅋ나 편집하면서 뭐했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단두대로 간다)
8년 전
닝겐68
내일 고칠게~괜찮아 그정도는
8년 전
닝겐75
고마워!!! 수고했어 쓰니야ㅠㅜㅜㅜ
8년 전
닝겐67
닝블리들 다들 수고많았어♥♥♥♥ 선댓후감상!
8년 전
닝겐69
데쿠토도만 읽고 일단 댓그류 화 진찌 쩐다 ㅠㅜㅠㅜㅠㅜㅠㅜ 닝들 수고 많았어!!!!!!!!
8년 전
닝겐70
호우 자살각~~~~##~총대닝 슈고했어!!!
8년 전
닝겐71
아으 어떡해 쪽팔린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다들 수고많았고 진짜 고생했어 총대닝도!!!!!!!
8년 전
닝겐72
고맙다고 하는닝들 다고마워~닝들덕에 합작끝낼수있었어
8년 전
닝겐73
선댓
8년 전
닝겐74
하일단 총대닝 글쓴닝들 모두 수고했어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77
와 ㄴㅐ 글 끄집어 내리고 싶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총대닝도 수고했어~
8년 전
닝겐78
녹고... 대박
8년 전
닝겐79
아 조또마떼 주제들이 슬플수밖에 없다지만 제 찌통이 이빠이데스ㅜㅜㅜㅜㅜㅜ아잠깐만ㅜㅜㅜㅜㅜㅜㅜ제발 이어지라고ㅜㅜㅜㅜ엉엉
8년 전
닝겐80
아 신야아캌ㅋㅋㅋㅋㅋ왜 글에서도 이어지지못하니
8년 전
닝겐81
케마이사ㅠㅜㅜ익만에 닌타마ㅠㅜㅜㅜ이사른ㅜㅜㅜㅜ애아이ㅡㄱ이동실동실동시닌ㄱ닌
8년 전
닝겐119
이케이케 돈돈!! 닌덕 많은줄알았는데 안보여 닌닌한 덕질하자ㅠㅠㅠㅠ
8년 전
닝겐82
닝들ㅠㅠㅠㅠㅠㅠㅠㅠㅠ넘 수고많았구 다들 잘 썼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 넘 감격스럽다ㅠㅠㅠㅠㅠㅠ다들 사랑해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83
와.....대박이다
8년 전
닝겐84
오 초록글 축축
8년 전
닝겐85
쩐다
8년 전
닝겐86
되게 재밌게 썼어! 이런 합작 또 했음 좋겠다!! \ㅠㅠ처음 참여하는거라ㅠㅠㅠㅠ 근데 제대로 수정 안된게있다..대화랑 설명이 겹쳐있다니//나닝 빠가...
8년 전
닝겐87
흐그우융귱ㅇ유ㅠㅠㅠㅠㅠㅠㅠ왜 다 찌통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88
다들 수고했어! 총대닝도 정말 수고 많았어!
8년 전
닝겐89
헐 너무좋아... 다들 고생했어ㅠㅠ!!
8년 전
닝겐90
헐 신야아카 현실탄식.......감정이입했어... 이제 다른것도달린다...! 총대닝 수고했어!!
8년 전
닝겐92
와....적흑....레알 소름돋았어..
8년 전
닝겐93
조로산 울뻔했다...
8년 전
닝겐94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사보루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좋아서 현실 욕 나올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95
오키카구 겁좋.....
8년 전
닝겐121
오키카구 좋다고 해서 다른닝이 쓴게 아닐까 하고 봤더니 오키카구는 내꺼뿐이더라ㅠㅠ 고마워! 사실.. 팬픽 이번이 처음인데 다음에는 더 나아진 실력으로 찾아올께!
8년 전
닝겐156
오어아ㅏㅇ라ㅏㅏㅏㅏㅏ ㅛㅏ랑해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96
보고싶다감시관ㅠㅠㅠㅠㅜ아카네울지마....
8년 전
닝겐97
선댓! 선스크랩! 새벽에 몰아볼거얏!
8년 전
닝겐98
선댓!! 새벽에 봐야지~~~~
8년 전
닝겐99
다들사랑해정말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진짜 신야아카누굴까..사랑해...진짜...
8년 전
닝겐102
22....뽀뽀해드리자 진심아련함...
8년 전
닝겐100
후기데스... 진짜 꼼꼼히 다 읽었는데 필력이 부족해서 한 줄씩만...
[짝사랑]
코시타이 - 연하공은 옳다... 이름 부르는 거 겁나 옳다
홍적 - 요염한 아카시와 우직한 무지개가 옳다
다이스가 - 이거 멉니까?; 연재해 주시죠... 브금이랑 글이랑 딱 맞게 끝나서 소름 돋음
미사와 - 이건 멉니가... 후... 미유키 한복이라니 스키다요
아베미하 - 모니터빛이 뜨겁다... 금손을 처음 본 날 같다...
다이스가 - 마치 스가가 속삭이는 듯한 문단 마지막처럼 저는 기울어지다가 쓰러졌읍니다
데쿠토도 - 이게 그 아카데미아? 영업당한 듯 ㅋㅋ ㅋㅋ ㅋ ㅋ ㅋ 옳습니다.....
도진잭 - !!!!!!!! !1!! !!!! !1 1 1! !! ! ! ! ! 1 ! !! !! !! ! 1 1 1 ! ! ! !! !! ! ! ! ! ! !! ! !!!
립황ts - 립황이라고 써 있는 방망이로 후두룩초ㅑㅂ챱 처맞은 느낌이 듭니다
보쿠아카 - 얘는 피도 맛있네..... 피도 맛있ㄴ;ㅔ.... 피도 맛잇네......피도맛잇내...........................후후.....
적흑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 바보들아..... 이거 슨 닝 지금 제 가방 안에 있댑니다
키드로우 - 콘푸라이푸 먹느데 읽다가 우유 솓았ㄷ따.... 분량이 대단합니다
드렉샬럿 - 샬럿이라는 글자가 아름답게 보인다 샬럿....샬럿 샬럿.... 샬ㄹ...럿...샬럿

8년 전
닝겐111
[후회]
미카유우 - 일상생활AU인 줄... 일상생활AU라니 글자에서 짠내남 ㅋ ㅋㅋ ㅋ 웅 나도 사랑해.....쪽쪽(미카: ??
미사와 - 아니 이게 모야 넘 좋아서 먹던 거 뱉었다 진자로... 저 토해도 되나여? 카타칸 저 화내도 됩니까? 이자식아
긴히지 - 머냐 긴토키 왜 웃도리는 안 찢는데 이사람이......감질맛나게......ㅎㅎ 있다 밤에 또 읽어얒...ㅎ.ㅎㅎ 긴히지...떡..ㅎ.ㅎ.ㅎㅎ.ㅎ
립엘 - 제가 좋아하는 리바엘런 요소들이 다 등러가잇어여..........에렌은 교복을 입었겠지...?ㅎㅎ(철컹철겅 강추...데스....이건 책으로 나와야 합니다 통판하시죠
로우루 - 단어가 짤렸읍니다... 후 필터링이 원망스럽다 통판...통판 해주시죠
소스린 - 아아악 아아악 아아악 힉 넘 젛아서 비명이 튀어나왔네여...후....사랑한다
리바에렌 - 내가 네 엄마냐 뻘하게 웃겻다 경찰 쟝이라니.... 은혜롭다.. 신비로운 에렌이라니 은혜럽다 아주 옳다 아주 옳아 빨리 3회 합시다 2부가 보고 싶어요
목꽃; - ; ; ; ; ; ; ; ; ; ; ; ; ; ; ; ; ; ; ; ; ; ; ; 아 넘 좋아서 땀이 나네.... 세상.........제가 셍상이라는 표현 참 좋아하는데요 먹어보겠읍니다.....
사토슌 - 멉니가 제가 원작을 안봐서 잘 모루겟지만 음 아름다운 글입니다.........후 강추 필력 대단하신 분 저 내일 신세계에서 봅니다
신야아카 - 말이 필요합니가??????????????????????? 아..............극장판 또 보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박수
신아라, 토도마키 - 아 님들 이거 꼭 보세요 제발 아 별표창 날리고 ㅣ은 글이다 정말..사랑해..... 아 넘 저아서 주체가 안 되네........너무 알름답습니다...결혼하자....평생 키보드만 잡게 해줄게.......저 번외2에서 기함햇읍니다 넘 져은ㅋㅋ 통판하시길......
캇테쿠 - 진짜 필력 넘 좋아요 ㅠㅠㅠ 서로 이름 부르는 게 너무 좋고..... 비 오는 거리 가득찬 ~~ 부분에서 주먹울음했읍니다..... 히로아카 좋은 작품이네..... 진자 필력이....와 넘 잘쓰셔

8년 전
닝겐127
와 후기 정성스렵다ㅠㅠㅠㅠㅠ내꺼읽어줘서고마워요ㅠㅠ
8년 전
닝겐133
고마워요ㅡㅜㅠㅠㅜㅠㅠㅜㅜㅠ
8년 전
닝겐147
그 결혼 받아들이고 싶ㅇ... ㅋㅋㅋㅋㅋㅋ 진짜 고마워 ㅠㅠㅠㅠ 재밌게 읽어준거 같아서 마음이 뿌듯하다
8년 전
닝겐101
대박이다 슼슼 몇번이고 봐야지 총대닝,써준 닝 다 수고했어!! 잘읽을게!
8년 전
닝겐103
사보루 쩐다 진짜 내용이 따뜻한데 야해
8년 전
닝겐104
오키카구 진심ㅋㅋㅋㅋㅋㅋㅋㅋ전부음성지원되는 기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8년 전
닝겐122
그렇구나ㅋㅋ 망한글에 칭찬해줘서 고맙고 다음에는 더 나아진 글로 합작에 나타날께:)
8년 전
닝겐128
전혀!!!!내가 글 보는 눈이 은근 까탈스러워서 망작이면 읽지도 않은다고!! 좋은 글 올려줘서 고맙고 다음에도 좋은글 올려줘♥
8년 전
닝겐105
바보의 애정 써준 닝....ㅠ 진짜 잘봤어ㅠㅠ 토도마키 신아라 다 찌통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106
(동공지진) 고마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길기만한 똥글인데도 읽어줘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107
ㅠㅠㅠㅠㅠㅠ똥글아니야ㅠㅠㅠㅠㅠㅠ 짱좋았어ㅠㅠㅠ
8년 전
닝겐108
글 수정하고 나서 펌금지로 설정해줘! 아무래도 그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서..
8년 전
닝겐109
그리고 다들 금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총대닝도 글 잘 올려줘서 고마워!
8년 전
닝겐110
조로산 너무 슬퍼어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눈물난다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113
수고했어 ~~! ㅠㅠㅠㅠㅠ잘읽을게 밍나
8년 전
닝겐114
슼슼!!!두고두고 계속 읽어야지!!
8년 전
닝겐115
다이스가 마음의 흔적 읽다가 울었어...진짜...마음아파서 어떡해 우리 코우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작가닝아 이거 제발 연재해줘어...
8년 전
닝겐126
고마워요 이렇게 과분한 칭찬도 받고..읽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8년 전
닝겐116
워후!!!!!!!!
8년 전
닝겐117
수고했어 다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두고두고 읽어야지 슼슼
8년 전
닝겐118
쓰니야~미안한데 브금 이름들 알 수 있을까?
8년 전
닝겐131
음 미안~ 구별하기 쉬울려고 닝들이 쓴 제목으로 다바꿔나서 원곡제목들 몰라~
8년 전
닝겐120
다들 수고했습니다!♡♡♡♡♡
8년 전
닝겐123
헠 익만금손닝들...다수고했어ㅜㅜㅠ
8년 전
닝겐124
슼슼!!!!닝들 수고했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129
조로산 읽다가 울었다.. 닝블리들 진짜 금손중에 금손이구나..
8년 전
닝겐138
울어줘서 고마워:) 는 말이 좀 이상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
8년 전
닝겐130
헐 블랙잭이라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헐 선생니뮤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132
와 울뻔했다
8년 전
닝겐134
ㅎ... 다시보니까 수위만 쩌는 똥글을 싼 느낌이다.. 읽어져서 고마워요 닝블리들...☆★
8년 전
닝겐135
미카유우ㅠㅠㅠㅠㅠㅠㅠ하ㅏ라ㅏㅠㅠㅠㅠㅠㅠㅠ나도 사랑해ㅠㅠㅠㅠ원작에서라도 아뤄줘라ㅠㅜㅜㅜㅜ
8년 전
닝겐136
새벽의 연화 수연연화 목록에 있었던거 같은데 왜 없지 펑크났니ㅜㅠㅜㅠㅠㅜㅜㅠ 기대하고 있었는데ㅠㅜㅠㅜㅠㅜㅠㅜ
8년 전
닝겐137
222222..나에겐 메이저
8년 전
닝겐139
헐 대박 헐 선댓 슼슼
8년 전
닝겐140
조로산 울었잖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141
와 후리 아베미 읽고소름돋았다 너무좋아
8년 전
닝겐142
와... 진짜 장난없다ㅠㅠㅠㅠㅠ 익인들 진짜 다 사랑이구나ㅠㅠㅠㅠㅠㅠㅠ 사랑해 익인들ㅠㅠㅠㅠ
8년 전
닝겐143
선댓! 글써준 닝들 고마워
8년 전
닝겐144
헐 히로아카 대박........소름돋아써....
8년 전
닝겐145
선댓!! 슼슼 새벽에 읽어야지ㅠㅠㅠㅠㅠ
8년 전
닝겐146
와 슼... 셤 공부 마치고 새벽에 읽으로 와야지
8년 전
닝겐149
아 이제야 다 읽음 ㅠㅠ 다들 수고했어 ㅠㅠ 짱잼 ㅠㅠ
8년 전
닝겐150
으앙 ㅠㅠㅠㅠㅠㅠ수고햇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읽어봐야지 다
8년 전
닝겐151
후회 긴히지 쓴 닝 나와
사랑해줄게 ㅠㅠㅠㅠㅠ 나랑 살자ㅠㅠㅠ

8년 전
닝겐152
와 다들 금손이시다..!
8년 전
닝겐153
미치겠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나하나 읽고있는데 전부 덕통당할것같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닝겐들아ㅠㅠㅠㅠㅠ겓콘시요ㅠㅠㅠ

8년 전
닝겐154
슼슼슼
8년 전
닝겐155
긴히지들 왤케 다.... (왈칵
8년 전
닝겐158
닝들 이거 뭐가 젤 쩌니ㅜㅜ?
8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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