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왜곡에 과도한 중국색 논란으로 폐지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는 지난 22일 첫 방송 됐다. 첫 화 만에 중국 동북공정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지자 광고주들이 모두 이탈하고 방송사 SBS는 편성을 취소했으며, YG스튜디오플렉스크레이브웍스롯데컬처웍스 등 제작사 3사는 제작을 중단하고 해외 판권 계약을 해지했다.
SBS와 제작사 3사의 입장문에 따르면 ‘조선구마사’는 100% 국내 자본으로 제작됐지만, 중국풍 미술, 소품 등 중국색이 짙었다. 태종과 세종, 최영 장군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묘사했다고 하기에는 도를 지나친 왜곡이 있었다는 비판도 많았다. ‘조선구마사’를 보고 분노한 시청자들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민원을 넣고, 청와대 국민청원을 하는가 하면 제작 지원 및 광고를 한 기업들에 항의를 보냈다. 이는 1화가 방영된 후 만 하루가 지나기 전에 대부분의 기업이 지원이나 광고 철회로 이어졌다.
전주 이씨 종친회는 “역사왜곡 동북공정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즉각 방영중지를 요청한다”는 입장문을 냈고, 최영 장군의 후손인 동주(철원) 최씨 대종회는 ‘조선구마사’ 측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특히 ‘조선구마사’의 박계옥 작가는 중국의 콘텐츠 제작사 항저우쟈핑픽처스유한공사 한국법인(쟈핑코리아)와 집필 계약을 체결했는데, 쟈핑코리아의 이사가 중국 인민일보 한국대표처 이사를 겸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구마사’의 박계옥 작가의 전작 ‘철인왕후’에서도 “조선왕조실록도 한낱 찌라시네”라는 대사가 나와 논란이 됐고, 방심위에서 심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권고’ 조치를 의결한 바 있다. 이전에도 국내를 배경으로 하는 tvN 드라마 ‘여신강림’에서 편의점이나 버스 정류장에 중국어로 된 포스터가 나오거나, 작중 인물들이 인스턴트 훠궈를 사서 먹는 장면으로 빈축을 샀다. 또 다른 tvN 드라마 ‘빈센조’에서도 중국제 비빔밥을 먹는 장면이 나와 논란이 됐다.
이번 사태는 ‘차이나머니’가 직접적으로 문화콘텐츠의 제작에 투입되지 않았음에도 중국색이 짙어지는 사례가 증가하던 것이 ‘조선구마사’를 계기로 고증과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며 한꺼번에 폭발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복, 김치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는 등 중국의 문화공정이 국민감정을 자극하고 있는데도 중국 자본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조선구마사’에서 역사왜곡 논란이 터진 상황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영화‧드라마‧게임 같은 문화콘텐츠에 중국 자본이 유입되거나 중국 진출을 바라고 중국의 취향에 맞춰 제작된다는 비판이 많았는데,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중국의 문화공정 논란이 더 노골적으로 변하며 심리적 거리가 더 멀어지는 모양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유독 중국 쪽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례도 늘었다.
최근 중국은 전 세계 문화콘텐츠산업계에 대규모의 자본을 이용해 외압을 행사하고 있다. 결과는 좋다고 보기 어려웠다. ‘트랜스포터4’, ‘퍼시픽림: 업라이징’ 등 차이나머니를 받아들인 영화는 중국을 제외한 국가에서 혹평을 받았다. 디즈니의 ‘뮬란’도 같은 논란이 있었다.
‘뮬란’의 크레딧에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 투루판 공안국에 감사하다’는 문구가 삽입되면서 디즈니가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인권 탄압에 동조하냐는 논란이 불거졌다. 하지만 정작 ‘뮬란’은 중국에서도 흥행 참패를 겪었다. CNN비즈니스, CNBC 등 외신에 따르면 ‘뮬란’이 개봉 첫 주말 3일 동안 2320만달러(한화 약 263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뮬란’에 한 주 앞서 개봉한 영화 ‘테넷’이 3000만달러(약 340억원)를 기록한 것에 미치지 못한 수치다.
중국이 문화콘텐츠산업계 전체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는 비판은 기존에도 많았다. 우리나라는 특히 한반도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 이후 중국이 한류 콘텐츠 수입을 제한한 ‘한한령’으로 인해 중국과 계속 불공정무역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국산 게임은 사드 배치 이후 4년 만에 컴투스의 ‘서머너즈 워: 천공의 아레나’ 정도만 서비스 허가권을 얻었지만, 중국 게임은 국내 시장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었다.
시장경제사회에서 자본의 유입이 자유로운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중국 기업들의 운영은 그렇지 못했다. ‘한복 문화공정’ 논란의 중심에 있던 중국 페이퍼게임즈의 모바일게임 ‘샤이닝니키’는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한복은 한국의 전통의상이 아니다”라는 중국 네티즌의 주장에 동조하며 한국 게이머들에게 비난을 쏟아붓고 서비스를 종료했다. ‘저니’, ‘스카이: 빛의 아이들’ 등의 게임을 개발한 댓게임컴퍼니의 제노바 첸 대표도 한국의 ‘갓’을 두고 중국에서 “갓은 중국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자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냈다가 꼬리를 내린 바 있다.
차이나머니의 문화콘텐츠산업 잠식은 이미 상당 부분 이뤄졌고, 중국의 문화공정은 민간 단위를 넘어 일어나고 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지난 1월 29일 중국 정부 계정으로 운영되는 장쥔 유엔 주재 중국 대사가 마치 김치를 중국 문화인 것처럼 만드는 사진을 올린 것을 비판하는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장쥔 대사는 지난 1월 3일 “겨울 생활도 다채롭고 즐거울 수 있다”면서 “한 가지 방법은 직접 만든 김치를 맛보는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앞치마, 위생장갑을 끼고 김치 한 포기를 든 상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사진을 올렸다.
일각에서는 국내 콘텐츠 제작사들이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K-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넷플릭스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국 시장과 중국 자본을 선택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국내 게임을 중국에 퍼블리싱하면서 성장한 중국의 거대 IT기업 텐센트도 최근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각국의 중소게임사에 투자하면서 몸집을 키우고 있다. 텐센트는 지난해 12월 JTBC스튜디오에 투자하기도 했다.
텐센트의 대규모 투자 소식에 관련주가 급등하기도 했다. 텐센트의 대규모 게임사 인수설이 돌자 국내 게임주는 일제히 상승 곡선을 그렸고, JTBC스튜디오가 텐센트로부터 1000억원 규모 투자를 유치하면서 모회사 제이콘텐트리의 주가가 전 거래일 종가보다 10.8% 오른 채 장을 마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투자를 호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비판이 많다. 텐센트는 직접적인 경영 활동 간섭은 하지 않았지만, 중국 정부의 손길에서 자유롭지 못해 영화‧드라마의 사례처럼 각종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게임학회 학회장인 위정현 중앙대 교수는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텐센트는 넥슨 ‘던전앤파이터’와 스마일게이트 ‘크로스파이어’가 키워준 기업인데, 한국게임으로 성장한 기업이 한국게임사를 사겠다는 말에 한국이 기대감으로 들뜨는 것을 보면 심한 절망감을 느낀다”면서 “자존심이 있다면 ‘텐센트에 맞서서 자신들의 역량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텐센트가 기업을 사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뜨는 것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 ‘삼계탕’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했다고 설명한 것에 항의하는 등 중국의 문화약탈 행위에 대응하고 있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 마을에는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데, 생가 입구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라고 적혀있거나,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중문판에도 세종대왕, 김구 등 역사적 위인과 김연아, 이영애 등 한류스타도 조선족으로 소개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며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정확히 알려줘서 올바르게 수정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