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색하다고 서로 낯을 가렸었는지 이제는 너, 나 할거 없이 서로 어울려 술판을 벌리기 바쁘다. 이럴때 술의 긍정적인 힘은 참 굉장하다. 한 때는 사이가 안좋던 사이도 또 얼굴만 알고 이름은 모르고 지내던 사이들도 이렇게 이어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술에 의해 늘어지는 사람들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고 분위기도 사람들 마냥 늘어졌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 '첫사랑' 이라는 말을 꺼내었고 분위기는 급속도로 좋아졌다. 어리기만 하던 서로를 어른이되어 만나는 동창회 자리라면 더더욱이 그 효과는 좋았다.
야! 사실 그 때 내가 너 좋아했었다, 하는 용감한 발언을 시작으로 속속들이 오래 묵은 고백들을 꺼내었다. 한 번 걸려라 하는 심보의 밑밥들이 섞인 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20대로 접어든 어른들의 10대스러운 순수함도 뭍어 있었다. 우현이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렸다. 술기운에 바로 떠오르지 않아 조금 머리를 굴리는 시간이 필요 했지만 왜 하필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에 떠오르는건지. 쓴 알콜이 목에 걸리자 기침을 내뱉은 우현이 턱 밑에 흐르는 술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괜찮냐는 옆 친구의 말에 괜히 놀라 어, 어, 응. 하는 바보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 남우현. 너 술들어 가니까 조용하다? 첫사랑 이야기 좀 해봐. 너 은근 인기 많았잖아. "
우현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말에 사람들의 이목이 우현으로 쏠렸다. 내가 인기가 많았다고? 그랬었나. 우현이 물로 입안을 헹구며 대충 둘러대고 대답을 회피 하려는데 이어 들려오는 여자의 말에 우현이 뱉으려던 물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아ㅡ 찝찝해.
" 근데 너 학생 때 여자친구 왜 안사귀었어? 설마 첫사랑이 짝사랑 이였어? "
" 야, 야. 난 아직 없어. 첫사랑 이런거. "
싱거운 우현의 대답에 금방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고 질문을 한 여자는 어깨를 으쓱 하며 그래? 하고서는 이내 다른 사람들과 섞여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현이 괜히 두근 대는 심장에 술을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내 첫사랑은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는 당연하고 내 친한 친구들 마저도. 왜냐하면 내 첫사랑은,
남자다.
*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에 일어난 우현이 비틀비틀 걸어가 냉장고에 기대다싶이 서서 물을 따라 마신다.
" 으ㅡ 머리야. "
머리도 머리지만 슬슬 쓰려오고 울렁거리는 속에 맑은국 이라도 끓여먹을 생각 으로 우현이 냉장고를 열지만 냉장고는 텅텅 비었다. 신경질적으로 냉장고문을 닫은 우현이 대충 눈곱만 떼고 모자를 푹 눌러 쓴채 집 앞 마트로 향했다.
*
눈에 보이는 대로 물건을 집어 담은 우현이 서둘러 계산을 하고 두둑히 가득 들어찬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휘청 거리는 몸에 어제 너무 달렸구나, 하며 후회를 해보지만 혼자 사는 마당에 이런 후회는 하나마나 였다.
빈 골목에 우현이 슬리퍼를 직직 끄는 소리만이 가득 했다. 아니, 가득했었다.
" 애 잃어버렸나. "
골목 끝에서 누군가를 찾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애를 잃어버린 모양 이었다. 지훈아 어딨니? 지훈아! 하는 목소리가 1초도 쉬지 않고 들려왔다. 우현이 무거운 봉지에 아린 손바닥 때문에 다른 쪽 손으로 봉지를 바꿔 드는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눈에 들어왔다. 한여름에 뛰어다니기는 한참을 뛰어다니며 애를 찾았는지 땀범벅 이다. 우현이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가까워지는 얼굴이 애처로워때쯤.
" ... 어? "
우뚝 발걸음을 멈춘 우현이 멍청한 소리를 내었고 애를 찾는 남자와 얼굴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가오는 남자. 혹시 키 이만하고 얼굴에 데일밴드를 붙인, 그러니까 뽀로로 가방을 메고 있는데..., 남자가 무어라 떠들어대지만 들리지 않는 우현이 마른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이내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건 무슨 의미의 웃음 일까. 우현의 의문 섞인 자조적인 물음 이었지만 아마 이 물음은 우현이 아닌 남자가 더 궁금할지도 몰랐다.
" 이렇게 보네. "
" 네? "
" 형. 나야, 남우현. "
" ... 남우현? 우현이? "
" 응. 오랜만이다. "
첫사랑이 남자 라는 아이러니한 옛 추억에도 불구하고 우현은 정상적으로 여자들과 연애를 해왔었다. 근데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은 누구나 미련이 남는게 아닐까? 아마 그 바람 빠진 웃음은 다시 재회한 이루어지지않은 첫사랑에 대한 예상하지 못한 반가움. 만약 그게 아니라면,
" 근데 지금은 이럴 시간이 아냐. 우현아, 미안한데 내 아들 좀 같이 찾아줘. "
애아빠가되어 다시 재회한 첫사랑에 대한 허탈함? 혹은 이제 가능성을 열어둘수 없게된 첫사랑에 대한 다행스러움? 우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김성규는 언제나 이렇게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