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90년대 말 (아닌가 제대후였나? 2000년대 초??),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10년전 제가 대학생 때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때 경희 사범대를 다니고 있었는데(지금은 경희대 영어교육과 없어졌죠 후훗;)
어느 화창했던 봄날의 아침
교육행정학 강의를 듣기위해 4호선 지하철을 타고(그때는 저희집이 안산이어서) 등교중이었습니다.
평일 늦은 오전시간인지라 지하철에 자리가 꽤 많이 비어있어서 저는 느긋하게 앉아가고 있었죠
책같은 걸 좀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지하철 문쪽에 혼자 서있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지하철칸에서 유일하게 자리에 앉지 않고 서있는 사람이었죠.
나이는 저와 비슷한 20대 초반으로 보였고, 등에 맨 가벼운 책가방이나 옷차림에서 왠지
저처럼 늘 지하철을 타고 매일 어딘가를 가는 학생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각 장애인인 듯 한 손에 지팡이를 든 그 아가씨, 참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문가에 혼자 서있었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제 머리속에 들더군요.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를 매일 다니면서
지하철에 자리가 비어있어도 한번도 자리에 앉아서 가본 적이 없겠구나..
지하철에 앉을 자리가 있어도 늘 저렇게 서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겠구나..
젊은 날의 객기라고나 할까요?..
전 별로 고민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최대한 평범하고 정중한 투로(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았어용)
그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 죄송하지만..
저기에 자리가 많이 비어 있는데 앉으시겠어요?"
저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습니다. ;
전 그렇게 말을 걸면서도 속으론 '갑자기 모르는 남자가 다가와 불쑥 이렇게 말을 걸어서
그냥 수상한 마음에 거절할수도 있겠구나.'도 싶었습니다. 그래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죠.
그런데 그녀는 한 5초정도 가만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제게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 "네."
나는 그녀를 데려와 제 옆자리에 앉혔습니다.
"어디까지 가세요?"
"@@역까지요."
(@@역이 어디였는지 지금은 너무 오래되서 기억이 안나지만, 그것이 2호선 역이였다는 것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네에.. 그럼 사당역에서 갈아타시겠군요?"
"네."
그리고나서 저는 그녀에게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싫어서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저에게 더이상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표정도 참, 처음부터 시종일관 - 아주 마네킹 얼굴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죠...
지하철이 사당역에 다다르려 하자, 그녀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나서
지하철 문쪽으로 척척척 혼자 걸어갔습니다.(어찌 그 위치를 머리속에 다 기억하고 있었던지 말이죠;)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중요한 수업이라 지각하기는 좀 그랬거든요.
그래도 이상하게 좀더 도와주고 싶은 맘이 들더군요.
그래서 저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제가 2호선 승강장까지 바려다 드릴게요."
그녀는 이번에도 그냥 짧게 "네." 그러더군요.
여전히 얼굴은 참 목석처럼 무표정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한쪽팔을 조심스레 살짝 잡고 그녀를 이끌려고 했는데
그녀는 사실 저보다도 더 잘 척척척 귀신처럼 위치를 알고
승강장 통로를 걸어나갔습니다.
하여간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왔다갔다하는 그 통로길을
나란히 말없이 걸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호선 승강장에 함께 도착했죠.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에 아무 말이 없었고
저역시 뭐.. 할말은 없었습니다.
드디어 2호선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오는 방송이 들려왔습니다.
곧이어 지하철이 승강장앞에 서고
그녀는 몇몇 사람들을 따라 지하철 안으로 말없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곤 아직 열려져있는 문 가까이에 혼자 서있었죠.
전 뭐라.. 그래도 한마디 작별인사 정도는 해야 할것 같아서
최대한 밝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녀가 여전히 목석같은 무표정의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나서였습니다...
지하철 문이 스르륵 닫히고 지하철이 이제 막 출발하려는 찰라였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마네킹 얼굴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던
그 아가씨가 갑자기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혼자서 미소를 짓는 얼굴이
닫혀진 지하철문 유리창으로 제 눈에 보였습니다...
10년도 더 지난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저는 이름모를 그녀의 그 환한 미소를
마음속에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나
지하철을 타고 가시다가
지하철안에 혼자 서있는 시각장애인분을 보시면
용기를 내어 자리를 안내하거나 양보해 봄이 어떠실까요?
그 분들은 지하철에 앉을 자리가 생겨도
편히 앉아서 지하철을 이용해 본 기회가 별로 없으셨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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