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일(金弘壹) :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이다.
1898.9.23~1980.8.8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선생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구이저우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 1923년에는 한국의용군사령관을 지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 국민당 소속의 국민혁명군에서 소장까지 진급했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지원하였다.
일제가 패망한 후인 1945년 11월 국민혁명군에 다시 복귀하여 두율명 소장의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으로 부임하였고, 중장(2성장군)으로 남경의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으로 부임하였다.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임관되었다. 이는 그의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아, 12329의 군번을 부여받고 특별히 육군 준장으로 임관하였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개전초기 그는 국방부에서 개최된 군원로회의에서 서울포기 및 한강이남에서 방어선 구축안을 제시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그에게 주어진 직책이 없었기에 참모학교로 내려가 있었다. 전쟁 초기 한강 방어선 구축을 먼저 건의했으나 당시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이었던 채병덕이 거부하여 한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졌다. 이후 전황은 점점 심각해졌고, 결국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잘못된 명령으로 인해 국군 5개사단이 서울에서 철수하기 전에 한강교가 폭파된다. 이로써 국군의 5개 사단이 한강 이북에 고립되었고, 이로인해 대부분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선전했던 1사단마저 사단장인 백선엽이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고 이야기했을 정도.
이때 구원 투수로 등장,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보직한다. 말이 사령부지 휘하 병력이라곤 공황상태에 빠져 패주하는 병력들이 전부였다 백선엽의 <군과 나>에 의하면, 부하에게 말끔하게 장군복을 다려오라고 한 다음 위엄있는 모습으로 서서 흩어져 도망치는 병력들을 불러 세웠다고 한다.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에게 신뢰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 다시 부대에 복귀하게 한것. 게다가 잘생기셨다 이렇게 긁어모은 병력으로 지연전을 펼쳐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강에서 7일이나 버티는 기적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국방부번사편찬연구소의 표현은 "탁월한 지휘능력"이었다. 그야말로 채병덕이 싼 똥을 완벽하게 치우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국방부 발간 6.25전쟁사에서 김홍일 장군을 미친듯이 빠는데 다 이유가 있다 이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1군단이 된다. 당연히 초대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지연작전의 개념이 없던 국군에게 지연작전 개념을 수립하였다. 1950년 7월 이후 국군의 지연작전은 거의 대부분이 김홍일 장군의 구상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약:
대통령 이승만은 도망가고, 국방방관 신성모는 무능하고, 총사령관 채병덕은 삽질하고,
한강다리 끊는 바람에 한강 이북의 국군 병력들이 무기 장비 죄다 버려두고
편제따위 개나 줘버리고 개별적으로 뗏목 타고 도망와서 개판 오분전 되어있는 국군 1군단을 완벽하게 재건해낸 능력자.
재건된 1군단은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7일이나 북한의 진격을 막아내고 일사정연하게 후퇴해서, 지연작전의 개념을 처음으로 확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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