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최승자, 너에게 中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네가 사귀던 애는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내가 네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랐지.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벽에는 네가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고
바구니엔 네가 만든 천가방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좁은 방 안에서,
네가 만든 노래들을 속으로 불러보면서.
세상에 노래란 게 왜 있는 걸까?
너한테 불러줄 수도 없는데.
김승일, 나의 자랑 이랑 中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이상, 절벽 中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내 부모였다
나는 그것이 극 중이라는 걸 알았고
밝고 활기차 보이는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다가
내 손톱에 찔려 화가 난 것을 보았다
극이 중단될까 두려워진 나는 사과하고 또 빌었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 하는 것이 조심스러워 눈치만 보았다
그들과 나는 소풍을 갔는데 햇빛이 눈부셨는데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극 중이니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고
애써 웃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극은 계속 진행되었다
강성은, 여름 한때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너로 너는 나로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이것으로 너에게 건넨다
너는 그것을 그것으로 나에게 건넨다
이제니, 작고 검은 상자 中

나무와 나무 사이
섬과 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어디에나 사이가 있다
여우와 여우사이
별과 별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
그 사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물과 물고기에게는 사이가 없다
바다와 파도에는 사이가 없다
새와 날개에는 사이가 없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사이가 없는 그곳으로
류시화, 여우 사이

먼 불빛들 사이
우뚝 서 있어라. 운명처럼
그대를 사랑한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으므로
허연, 진부령 中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 편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는 소릴 들었다
사랑한다면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사랑한다는 감정의 판지를 덮고도 이토록 추운 것은
혓바닥으로 죽은 강물을 들이켜
한꺼번에 휘파람 불 수 없다는 증거
한 덩이의 바람이 지나고
한 시대를 에워 가릴 것처럼 닥치는 눈발까지도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는 소리로만 들렸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말만 거셌다
이병률, 아무한테도 아무한테도 中

돌아오는 길에는,
으레 영혼을 삶는 장면을 상상한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답다.
오은, 시집「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시인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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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아이가 공룡피자가 먹고 싶다길래 터무니없는 주문 넣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