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거병
제목 보자마자 이 인물을 떠올리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고조 유방이 한을 건국한 이래 80여 년 동안 한나라는 '문경의 치'로 나날이 국력을 신장시키고 있었다. 이후 무제대에 이르러 그 강대해진 국력을 바탕에 두고, 위청과 곽거병 등 한 제국의 명장들은 예전부터 중원의 변새를 위협하던 북방의 흉노를 향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였는데 특히 곽거병은 바이칼호까지 진격하는 엄청난 군사적 위업을 세웠다. 흉노 세력하 대부분의 초원지대들이 이 20대 초반의 젊은 장수에게 모조리 쑥대밭이 되고 만 것이다.


이세민, 이정
626년 이세민이 당의 황제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동돌궐의 힐리가한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 밖 40여리까지 진격해오자 이에 이세민은 돌궐의 철군을 대가로 칭신납공(稱臣納貢: 스스로를 신하라 칭하며 상국에 공물을 바침)을 약조하는 엄청난 굴욕을 맛보게 된다.(위수의 맹약: 渭水之盟) 그러나 4년후 동돌궐이 내분을 겪자 이세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정으로 하여금 철륵의 설연타와 손을 잡고 동돌궐을 공격, 마침내 힐리가한을 포로로 사로잡고 동돌궐 잔여세력을 굴복시켰다. 이후 이세민은 중화의 황제로서는 최초로 유목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천가한(天可汗)이라 불리는 위용을 자랑한다.

남옥
마치 유방에게는 한신이 있었던 것처럼, 주원장에게는 남옥이 있었다. 1371년 사천(四川)을 평정한 이래 남옥은 서달의 북정에도 참전, 야마천(野馬川: 지금의 커루룬 강)과 토랄하(土剌河: 지금의 투울강)에서 쾨케 테무르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후에도 남옥은 흥화(興和)와 토번의 반란을 진압, 운남의 원 세력을 평정한 이후 1387년엔 마침내 명의 제일 큰 골칫덩어리였던 북원의 나하추를 항복시켰다. 그러나 1년 후 북원에서 원 순제의 손자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가 즉위하여 변새를 어지럽히자 남옥은 또다시 북정을 감행, 그들에게 재앙을 안겨주었다. 이 때의 일을 '명사: 남옥전' 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원주(元主)가 태자 천보노(天保奴), 기병 수십기와 함께 달아났다. 남옥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이를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원주의) 차자(次子)인 지보노(地保奴)와 비, 공주 이하 1백여인을 붙잡았다. 또한 추격하여 오왕(吳王) 타아지(朵兒只), 대왕(代王) 달리마(達里麻) 및 평장 이후 관속 3천명과 남녀 7만 7천여인, 아울러 보새(寶璽), 부칙(符敕), 금패(金牌), 금은인(金銀印)의 여려 보물, 말과 낙타, 소, 양 15만여 마리를 얻었고, 불태운 그들의 갑주나 의장은 쌓아 놓은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승첩을 경사로 보고하자,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칙서를 내려 그 공을 기리고 위로하면서 그를 위청(衞青), 이정(李靖)에 비견하였다. 또 합라장(哈剌章)의 영을 격파하고, 사람과 가축 6만을 노획했다. 군대가 귀환하니, 양국공(涼國公)으로 봉작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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