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을 암살하려했다? 혹은 거북선을 태웠다?
라는 역사왜곡으로 배설의 후손들이
용감한 우리 조상을 능욕했다며 고소를 하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물론 배설은 이순신 암살미수라든가 거북선을 태운적이 없다
그건 영화속 판타지일뿐이다
그럼, 역사 기록에 그려지는 배설은 어떤 사람일까?
당대 기록으로 배설이라는 사람을 평가해보자.

배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 9월 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는 이당시 합천군수였다.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서생 김면이 의병을 일으켜 맹활약을 할때
합천군수였던 배설은 의병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의병들을 크게 곤란하게 만든 전과가 있다.
기록을 보자...
<정경운의 '고대일록'中 부록 '인명록'>
배설(裵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한(仲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ㆍ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 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여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조경남의 난중잡록 임진년 9월 기사>
김면이 배설(裴楔)을 시켜 부상현(扶桑峴)에 매복을 시켜 개령(開寧)에서 응원하러 오는 적을 방비하게 하다. 배설이 약속하고는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서생에게 절제(節制)를 받아서 그를 위해 중로에 매복한다는 말인가.” 하고 드디어 가지 않았다. 이날 밤에 성주의 적이 개령에 달려가서 급함을 알리매 개령의 적이 크게 왔는데도, 우리 군사들이 알지 못하고 이튿날에야 바야흐로 성을 지킬 기구를 준비하였다. 응원하는 적이 불시에 크게 이르러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에워쌌으며 성중의 적 또한 성문을 열고 앞뒤에서 공격하였다. 김면이 갑자기 말에 올라 먼저 나갔으나, 우리 군사들이 기와 북을 버리고 도망해 무너지다.
자...한번 생각을 해보자..
정부가 무능하여 민간인들이 의병을 조직해 싸우는것 그자체가
목민관이자, 전시에는 군지휘관된 자는 부끄러워 해야하는법이다..
그런데 합천의 수령이자 전시 지휘관인 배설은
민간인들이 조직한 의병들을 하고 있다..
심지어 약속까지 해놓고
"내가 서생따위의 명령을 듣게생겼냐" 면서
약속을 어겨 의병들을 크게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
배설은 이때의 잘못으로 이듬해 곤장을 쳐맞는다
배설은 이후, 1594년도 원균의 후임으로 경상우수사가 된다

정유년.칠천량 패전에서..그 유명한 원균의 도망으로 삼도수군이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고
배설 역시 이때 휘하의 전선 8척을 수습하여 달아난다
많은 사람들이 칠천량 해전에서 수많은 장수들과 군사들이 전멸한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죽은 장수는 거의 없다.
실록을 보면 대부분 살아서 도주했다.
이후 배설은 정유년 7월, 이순신과 만난다.
그럼 또 기록을 보자
<이항복-백사집 이충무공유사>
이때는 군이 막 패한 뒤라서 주선(舟船)과 기계(器械)가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공이 명을 들은 즉시 단기(單騎)로 달려 회령포(會寧浦)에 이르러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을 길에서 만났는데, 이때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겨우 8척이 있었고 또 녹도(鹿島)의 전함 1척을 얻었다. 공이 배설에게 진취(進取)의 계책을 물으니, 배설이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서 스스로 호남(湖南)의 진영 밑에 의탁하여 싸움을 도와서 스스로 진력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는데 배설은 과연 배를 버리고 가 버렸다.
위 글은
이항복이 배설의 인물됨을 평하는 기록이다
배설이 이순신을 만난이후부터 그가 도망칠때까지
가장 세세히 기록된건 난중일기다
그럼 난중일기를 좀 보자..
<이순신 - 난중일기 정유년>
7월 22일 [양력 9월 3일]<신축>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고, 원균(元均)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8월 12일 [양력 9월 22일]<경오> 맑다.
아침에 장계를 초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발포만호(소계남)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 편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 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릇치건마는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정유년 7월 22일에 이순신이 배설을 만나고, 8월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8월12일에는 배설의 부하장수들이와서 배설이 도망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한다..
계속해서 보자...
8월 17일 [양력 9월 27일]<을해> 맑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장흥땅 백사정(장흥읍 원도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수사배설(裵楔)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배설(裵楔)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
배설은 상급자인 통제사 이순신이 탈 배를 보내준다고 약속해놓고
보내지 않은 모양이다. 그때문에 괘씸하게 생각하는 이순신..
그런데 생각해보면 배설은 이미 임진년때도 의병들과 약속을 해놓고
그걸 어겨서 낭패를 보게 했던 전과가 있다
8월 18일 [양력 9월 28일]<병자> 맑다.
늦은 아침에 곧바로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멀미를 핑계를 대므로 보지 않았다.
다른 장수는 보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고의적으로 이순신을 피하는 배설..
8월 26일 [양력 10월 6일]<갑신> 맑다.
전라우수사가 왔다. 배의 격군과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꼬락서니가 놀랍다.
전라우수사가 전라우수영 전력을 이끌고 통제영으로 합류한다
그런데 격군도 제대로 없고 화포나 각종 준비태세가 개판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경상우수사 배설도 이꼴을 보았을것이다.
그리고 압도적인 일본수군과 싸우면 패할것이라 판단한듯하다
배설이 계속 이상징후를 보이면서도 아직은 통제영에 머물러있는데..
전라우수영 개판 전력이 합류하는 꼴을 보고
도망을 결심한것으로 추정된다
계속 기록을 보자..
8월 27일 [양력 10월 7일]<을유>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는 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째서 피할 생각만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8월 28일 [양력 10월 8일]<병술> 맑다.
새벽 여섯시 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 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 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葛頭: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적선이 멀리 도망하기에 더 뒤쫓지 않았다.
뒤따르는 배는 쉰여 척이라 고 했다.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이상징후는 계속 보인다. 참다못한 이순신이 배설에게
"왜 피하려고만 하느냐"면서 호통까지 친다
급기야 일본 수군의 정찰대와 전투까지 벌어진다.
이때도 배설은 도망치려고 했다..
8월 30일 [양력 10월 10일]<무자> 맑다.
그대로 벽파진에서 머물렀다. 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배설(裵楔)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裵楔)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裵楔)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배설이 달아나려고 계속 기회를 보았지만
자신의 부하장수들의 눈도 있고 눈치를 보다가
결국 꾀병으로 몸조리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육지로 하선한다.
9월 2일 [양력 10월 12일]<경인> 맑다.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도망갔다.
결국 몸조리 하겠다는 핑계를 댔던 배설이 3일되 새벽에 도망쳤다.
배설의 후손들은 배설이 몸이 아파 고향으로 요양하러간것이지
도망친게 아니라고 웃기는 소리를 하는데,
진짜 아팠다면 밝은날 상급자인 이순신에게 정식으로 보고하고
어딘가에서 요양하겠다는 공문을 띄운뒤 정식으로
몸조리 하러갔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말 없이 새벽에 튀었다...
게다가....
아픈놈이 자기 고향까지 왜적들의 점령지를 단기필마로 돌파한다..
이후 배설의 기록을 보자...
<정경운의 고대일록>
○1599년(기해) 2월 25일 을해(乙亥)
배설(裵楔)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배설은 몸을 피하여 도망을 쳤으나, 결국 잡혔다.
스스로 만든 허물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
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정경운은 임란 당대의 사람으로 '고대일록'에 배설의 최후를 적고있다.
배설에 대한 평가는 이항복, 정경운,조경남,이순신 모두
약속을 저버리고 비겁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선조실록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3일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도망친 배설이 무뢰배들을 모아 모종의 일을 꾀한다는 실록의 기사다
(선조실록 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3월 6일
전 수사(水使)배설(裴楔)이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아비 배덕룡(裴德龍)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은 모두 방송하였다.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
1597년 9월에 적전도주...즉, 탈영을 한 배설이 1599년에야 잡혀서 처형된다.
배설의 후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조상을 좀 괜찮은 사람으로 금칠 하고싶은 모양인데
당대의 기록 대부분은 위와 같다..
혹자는 자신의 전선 7~8척을 이순신에게 빼앗기자
잦같다고 때려치고 달아났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는 웃기는 소리다..
삼도수군통제사 휘하로 들어가 명령을 따를뿐,
이순신이 배설의 지휘권을 빼앗은게 아니다.
사단장이 새로 부임하면 연대장의 병력을 빼앗은것인가?
이순신이 상급자로 왔을뿐, 경상우수영의 지휘권은 배설에게 있다.
이순신은 배설을 통해 전체 수군을 지휘하는것 뿐이다.
그게 싫어서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떼죽음이 되든말든,
새벽에 도망칠 이유가 된다고 보는가?
소규모지만 김억추의 전라우수군도 합류해서
이순신 휘하로 들어온다.
군 조직체계인 명령체계가 싫다고 탈영하는 지휘관이라니..
변명치곤 웃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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