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시인 이인로(李仁老)의 지리산 시에 「죽장 짚고 청학동 찾아드니/수풀 건너 백원숭이 우는 소리―」 하는 대목이 나오고,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유방선(柳方善)의 지리산 시에도 「개닭 소리 들리지 않는 깊은 산중에/해 떨어지자 원숭이 우는 소리 들린다」 했다.
송강 정철도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로 시작되는 시조에서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불제 뉘우친들 어떠리」 했다.
짐승 우는 소리를 원숭이 울음으로 시적인 표현을 할 수 있겠으나
행여 야생 원숭이가 한반도 남방에 살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조선조 초에 편찬한 한국 지지(地誌)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원숭이 원(猿)자가 든 지명이 네 군데나 나오는 것도 이 의문을 부추겨 준다.
이 지명 모두가 북한이 아니라 남해안을 비롯한 남한인 것이 그렇다.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조에 원산향(猿山鄕)이 있다 했고, 남해에 있는 진도(珍島)에
가흥현이 있었는데 백제 때 지명이 원산(猿山)이었다 했다.
인천도호부조에 춘추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원도(猿島)가 기재돼 있다.
주의를 끄는 것은 지금 전라남도 여수(麗水)의 백제 때 이름이 원촌현(猿村縣)이었다는 점이다.
소섬이니 노루섬 등 짐승 이름의 지명은 많지만
우리나라에 살지도 않은 짐승 이름으로 지명 삼는 일은 희귀한 일이기에 그렇다.
우리나라에 원숭이가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고려 때 왜구가 납치해간 남녀 600여명을 쇄환했던 태조 3년에
일본에서 선물로 원숭이 한 마리 바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원숭이였다.
세종 때 말(馬)병이 번지자 누군가 일본에서는 마구간에 원숭이를 더불어 기름으로써 병을 예방한다 하고,
원숭이를 못 구하면 마구간에 원숭이 그림이라도 그려 붙여 방재한다는 말을 듣고
일본에서 6쌍의 원숭이를 들여와 제주도에 방사했었다.
원숭이 해 벽두인 며칠 전 남해 지방에 야생 원숭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하여 ‘행여나―’ 하고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울에서 벗어난 사육 원숭이겠지만 이를 계기로 야생 원숭이의 생존 가능성을 훑어 보았다.
세종 16년 4.11일[서기1434년]에 임금이 전라도 감사에게 지시하기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김인( 金? }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원숭이 여섯 마리를 잡아 길들이게 하여, 지금의 목사
이붕(李鵬)에게 전해 주고 왔는데,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육지에
가져오게 할 것은 없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든지 와서 주의하여
먹여 기르겠다면 육지로 가지고 나와서 풀이 무성한 섬[島]이나
갯가에 놓아기르게 하되, 혹시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잡아 가지
못하게 하고 힘써 번식하도록 하라.”라는 기록과
다른 하나는 세종 18년 6.16일[서기1436년]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 최음산(崔淫山)이 원숭이[ ?子]와
노루[獐] 한 쌍을 바치니,명하여 상림원(上林園)에서 기르다가,
그 뒤에 인천(仁川) 용유도(龍流島)로 옮겨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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