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편
1. 대륙의 정세
명은 14세기 요양에 요동도사를 두고 여진을 건주, 해서, 야인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성조 영락제 승하한 후 명의 대여진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는데 명의 세력 약화를 틈타 몽골 세력이 여진 정벌에 나섰고 몽골에 항전하는 과정에서 여진은 민족적인 자각을 하게 되었다. 1589년 건주 추장 누르하치는 심양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군주를 칭하는 등 여진 세력을 통합하여 자립적인 기반을 갖추었다. 그러나 대명 관계는 조심스럽게 하면서 용호장군의 직위를 하사받는 등, 명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려 명은 여진의 세력이 명을 위협할 정도로 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명의 국력은 급격히 쇠약해졌는데 연 평균 3만명의 인원과 연간 600만량의 군량을 투입하였지만 경제적 보상은 거의 전무했다. 조선으로부터 막대한 재화를 약탈했지만 거의 부패한 장군들과 관료들 수중에 떨어져 명 재정에는 보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명나라 황실의 사치까지 더해져 명의 국세는 조선에 원병을 청해야 할 정도로 쇠약해지게 되었다. 여진세력은 명의 쇠악함을 틈타 만주 일대에 세력을 확장했으며 명의 거점인 무순과 청하를 함락시키자 조선에 청병을 하기에 이른다.
2. 조선 조정의 움직임과 명의 청병
만주에서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비변사 관료들은 再造之恩을 이유로 대대적인 원병을 징발하자고 주장하나 광해군은 경계만 엄중히 하고 사태를 관망할 것을 지시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살아남은 자는 얼마 되지 않는데, 수만명의 병졸도 징발하기 어려울 것이다. 수천 명의 병졸을 징발하여 의주 일대에 주둔시켜 상황에 따라 진퇴시키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좌의정 한효순은 “우리의 훈련되지 않은 군졸들에 여진에 싸워 질 것이 분명하나 우리는 명과 부자의 의리가 있고 나라를 지켜 준 은혜가 있으니 군비를 이유로 난색을 표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와 함께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조정의 여론은 재조지은을 갚고 의리명분에 따라 명에 원병을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광해군은 3차에 걸쳐 명의 청병을 거절하였으나 조정 신료들의 거듭된 요구로 1619(광해군 11)년 총 포수 3천 5백, 사수 3천, 살수 3천으로 구성된 총 1만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고 사허루 전투에 참전하였다.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에 밀지를 내려 “명과 청의 전세 여하에 따라 태도를 결정하라”며 무모한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라고 지시했다.
후금에 대한 정세판단에 대하여 광해군 즉위 당시 함경감사 장만의 치계에 따르면
“... 그들의 소굴에서부터 동쪽에서 북해의 끝까지 그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로써 우리의 근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남목에 뜻을 둔 것으로 보아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저들이 반드시 조선으로 출병할 날이 올 것이나 우리의 훈련되지 않은 군사와 원망 높은 민심, 주먹만한 돌로 쌓은 성과 조잡한 기계 등으로 저들을 막아내기 어려우니 방비하는 계책을 조정에서 새워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처지에서 광해군은 거듭된 명의 원명 요청을 거절하였다. 우선 임진왜란 때와 달리 민생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징집 출병하다가는 국경을 넘기 전에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또한 광해군은 문서의 주체가 요동순무와 요동도사라는 이유로 청병을 거절하였다. 국가와 국가간의 청병 요청이 황제의 날인이 없이 일개 지방관이 보낸 문서만으로 원병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상황을 알리려고 파견된 사신들은 요동에서 가로막혔는데 원정군 총사령관 경락 양호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의 사정에 정통하였으며 청병 요구에 소극적인 광해군의 정책을 비난하였다. 그는 조선이 청병에 쉽게 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청병 요구를 지속했는데 그 저의는 조선과 청 사이를 갈라 놓으려는 책략으로 본질적으로 이이제이 정책인 것이다. 비록 조선의 군사력이 허약하여 전력에 큰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청의 대륙 진공을 지연이라도 시켜 보겠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광해군이 황제의 칙서 없이 파병을 강행하는 비변사 대신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현실적으로 청병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선 그는 임진왜란 당시 분조의 책임자이며 선조 재위 시절 전란의 발발에 선조 자신이 책임을 지며 몇 차례 양위를 하겠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이미 그는 위기의 궁극적 책임자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나라가 폐허가 된 상황에서 청병에 응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판단했으며 무엇보다 신흥 강호 청을 적대시하면 그 피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임진왜란도 조선 조정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 피해가 커졌고, 임진왜란 때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고 의주에 피난을 간 선조를 보필하면서 여진을 비롯한 만주 일대의 사정에 정통했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 임진왜란 때 명의 구원병 파병에 감사를 느끼는 여론이 깊어 만약 청병요구에 계속 불응할 경우 자신의 집권 기반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도 있었다.
하지만 파병을 함으로써 국가의 기반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일이 더 위험하다 판단하여 파병을 하더라도 소극적인 정세 관망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한 이른바 [폐모살제]사건이 성리학적 명분론에 위배된다는 정치적인 반대 여론이 높아 광해군이 매우 심각한 정치적인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이런 정국을 정면 돌파하기 위해서는 파병에 동조하느니 차라리 광해군이 추진하는 외교안보정책의 지속적 추진을 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비변사 대신들은 재조지은의 명분 외에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원병 출병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영의정 정인홍과 이이첨은 파병을 하지 않을 경우 명의 견책이 우려되고 다시 전란이 터질 경우 명이 조선을 돕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병을 주장하였다. 나름 우국충정의 뜻으로 한 주장이지만 국제정세에 어두웠다는 반증이었다.
파병 반대 광해군 동조 세력은 박자홍, 임연 등 일부 소북 세력과 윤휘 등 일부 서인 황중윤 등 일부 남인들이었다. 광해군은 황제의 칙서가 없다는 이유로 청병에 반대했으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단 명분론을 강조하는 반 대북 세력의 승리로 보이는데 중립외교를 내건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강홍립의 패전 이후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냈는데, 그 중 하나는 만포진 등을 굳건히 수비하고 만주 일대로 깊숙이 진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왜군을 막는 일은 거대한 함선으로 왜의 육군이 상륙하는 일을 막고 여진을 막는 것은 북방 진을 굳건히 수비하여 적병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만약 북방으로 깊이 진군할 경우 국경 수비가 허술해져 외적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였다
4. 심하 전투
한편 명은 조선의 출병에 고무되어 청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심하전투이다. 명군은 양호, 이여백 등으로 구성된 임진왜란 참전 명정들을 중심으로 청군과 조우했으나 두송군 등 좌우 주력 부대가 격파되고 명장 유정이 전사하는 등 참패당했다. 조선군은 사실상 청군에 항복하였는데 조선 조정은 강홍립의 항복에 분개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다. 장계 내용에는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 등이 오랑캐 진영으로 들어갔으며 조선군이 명군을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자 오랑캐들이 명군을 때려죽였다고 했다.
이에 명은 이를 문제삼아 조선에 외교적 압박을 가해 오기 시작했고 비변사 대신들은 일제히 강홍립과 김경서의 직을 박탈하고 가족들을 구금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이를 대원군이 받아들이지 않자 양사 대간들이 합세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전해진 소식과 달리 강홍립은 적극적인 친청 행보를 보이기보다는 항복보다는 강화의 형식으로 문제를 수습하고자 했다. 먼저 청이 강화를 제의하였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이를 수락하였다. 강홍립은 강화를 할 경우 3~4천의 군졸들의 목숨은 살릴 수 있을 것이라 보면서 목전의 청과의 충돌을 잠시 늦출 수 있다는 명분으로 강화에 응했다.
즉 광해군은 적극적으로 친청 행보를 바로 보이기보다는 사태를 관망하며 중립 외교를 취하고자 했다. 이는 조정 중신들의 반대라는 정치적인 이유와 함께 아직은 명이 완전 몰락한 것은 아니므로 명의 압박에 대한 정치 외교적인 부담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청이 강화 제의를 먼저 하게 된 것은 우선 청의 주적은 당장 명이었고 명의 대부대와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굳이 후방을 교란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군사력이 비록 청에 비하여 한참 열세였던 건 사실이지만 전선을 분산시키게 되면 그만큼 병력의 손실과 주력 서부전선(대명전선)의 약화가 어느 정도는 불가피해진다. 또한 청에서는 조선의 어려운 사정과 열세인 군비를 잘 알고 있었다.
5. 강홍립의 귀환과 조선감호론
그러나 강홍립은 바로 귀국하기를 원했지만 청의 장수들은 누르하치를 만난 후 조선으로 귀국할 것을 종용했고 마침내 조선군 4천명은 청의 철기에 둘러싸여 청의 훼도알라성으로 향하게 된다. 귀국 후 조정 대신들은 강홍립 등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광해군은 이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반대하는 한편, 오히려 패전의 책임을 파병을 종용한 비변사 대신들에게 돌렸다. 즉 대부분의 서인, 남인들은 물론 북인의 거두 이이첨과 정인홍마저 파병을찬성한 마당에 광해군과 파병 반대로는 소수에 불과했으나 워낙 전력이 열세고 대륙의 판도가 바뀌고 있기에 패전은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강홍립에게 후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1619년 4월 후금의 사신과 도원수 종사관 정응경이 누르하치의 친서와 도원수 강홍립의 장계를 가지고 조선에 왔다. 이에 광해군은 청과 강화를 맺자 하였으나 비변사 대신들은 격렬히 반대하였다. 오히려 평안감사 박엽의 서명이 첨부된 서신을 후금에 보냈다. 한편 명은 조선에 첩자를 보내 광해군이 강홍립 등을 어떻게 하는지를 정탐하고 있었다.
요동에서는 조선과 청이 밀착한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명에서는 조선감호론이 대두되었다. 조선감호론이란 재차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는 한편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 조정에 대단한 파장을 불러왔다. 형식적으로 책봉-조공의 외교관계가 이어져 오긴 하였으나 실제 내정간섭은 받지 않았던 조선이 명의 내정 간섭을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진주사 이정구와 부사 윤휘를 명에 파견하여 의심을 풀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분주하였다. 이정구는 명 조정 다수의견이 조산감호론을 지지하고 있으며 병부상서 황가선이 이에 반대한다 하여 탄핵당한 사례를 보고하였다. 명의 의심을 풀기 위해 조선감호론과 서광계를 직접 공격하지 말 것과 압록강변에 되도록 많은 병력을 배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물론 조선감호론은 조정 내 대청강경세력을 자극하였는데 광해군의 중립 외교가 조선감호론을 불러왔다며 강홍립 등을 처벌하고 청의 서신을 받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정부의 해명은 성공하여 광해군 12년(1620년) 이정구는 조선에 명 황제의 칙서를 보냈다. 칙서의 내용은 대략 조선이 청과 강화하는 일을 막으려 하고 조선감호론보다는 온건한 방법으로 후금에 대한 연결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후 계속하여 대청 우호정책을 이어나갔는데 대신들은 지난번 심하전투에서 패전하고 살아 돌아온 이민환, 이일환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조선감호론 사건은 조선 정치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먼저 대청 강경론자들은 명의 칙서를 무기로 광해군의 대청 온건정책을 공격하는 중요한 구실을 삼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선감호론 해명을 위해 명에 파견한 이정구라는 인물이다. 이정구는 인목대비 폐지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배제되었다. 그런 그가 돌아온 것은 조정에 있어 서인 세력의 재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 결국 3년 후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음은 물론이다.
1619년 조선에 온 명 사신 원견룡은 거듭 청병을 요구했는데 요동이 청의 수중에 떨어지면 조선의 안위와 직결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광해군은 조선의 국방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압록강과 평안도를 튼튼히 지키는 일이라 하고 청병이 침투할 경우 방어에 전념할 것이라 하면서 명의 청병 요구를 단호히 반대했으며 오히려 명의 청병 요구를 묵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의 청병 요구는 계속되었는데 1621년 요동경략이 조선에서 구리냄비 1만개를 거두어갔고 왕소동이 격문을 보내 다시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명은 감군 양지원을 조선에 보내 “요동을 잃는 건 중국 입장에서는 탄환 하나를 잃는 것에 불과하지만 조선이 침략을 받게 된다”며 청병을 거듭 요구했다. 군선 100척과 군량과 병력 징발을 요구했는데 조선은 선박은 제공했지만 병력 동원은 회피하였다. 명-청 전쟁에서 명이 갈수록 패퇴하는지라 요동 등의 명나라 유민들이 압록강을 넘어 국경을 넘어오는 일이 빈발하였다.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모문룡은 물론 명나라 백성들이 조선 땅으로 계속 밀려들어와 난리가 심해지자 광해군은 의주 부윤 이상길에게 되도록 압록강을 넘어 밀려드는 명나라 사람들을 타일러 돌려보내고 이도 여의치 않을 경우 배를 태워 등주와 내주 등 중국 내지로 보내라고 지시를 내렸다.
조선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팠던 사안은 평안도 철산 가도에 주둔하던 모문룡의 존재였다. 모문룡은 아예 장기 주둔을 하려는 태세를 보이고 있었고 청군은 1621년 12월 바다를 건너 모문룡을 공격하였는데 모문룡은 도주했지만 이 때문에 인근 의주, 철산 등 조선 지역이 황폐화되는 등 극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청에 항전할 것을 거듭 주장하였으나 광해군은 이에 반대하며 오히려 모문룡을 바다 건너 멀리 피신시키는 방책을 강구하였다. 명의 모문룡에게 나름 최대의 예우를 가하되 모문룡을 빌미로 청이 압록강을 넘어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이었다. 명은 거듭 청병을 요구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외교적인 책략으로 잘 모면하고 모문룡 문제도 무마하였다. 청의 군사적 위협에도 적절히 잘 대응하는 줄타기 외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6. 광해군 외교정책에 대한 평가
이는 광해군이 밀정을 보내 만주와 중국 대륙 내부의 정보를 열심히 수집하고 치밀하게 분석한 덕에 따르는 것이고 임진왜란 시절 분조를 운용하면서 전쟁통에 위기관리를 해 본 경험이 있어 누구보다도 노하우가 풍부할 뿐 아니라 서북 지방 등 여진과 가까운 지역에 오래 머물고 여진 사람들과 오랫동안 접촉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당대 조선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외교 전문가였던 것이다.
7. 인조반정 그 후
인조반정을 일으킨 후 서인정권은 군비 확충을 내새우며 총용청, 수어청을 비롯한 각 군영의 증설에 나섰다. 헌데 이는 북변 수비보다는 중앙 도성 방어에 치중하는 것이었고 광해군 때 마련되기 시작한 북변 방어 및 각 지방의 군사체제는 지리멸렬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은 서인정권의 친명배금정책과 이괄의 난이었다. 서인정권은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난하며 요동을 정벌하여 명에 돌려주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무엇보다 가시적으로 가도에 머물던 모문룡을 지원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모문룡에게 접반사를 파견하여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 이괄이 휘하 1만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비록 도원수 장만과 안주 방어사 정충신의 활약으로 난을 진압했지만, 서북변 방어 주력군 2/3이 가담하여 방어 체계가 사실상 완전 붕괴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패잔 잔당들이 처벌이 두려워 압록강을 넘어 후금으로 넘어가면서 조선 조정의 배청숭명정책을 폭로하고 조선의 내부 사정을 낱낱이 고해 바치게 되자 후금은 분개하여 조선 침략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괄의 난 이후 서인정권은 훈련도감, 호위청, 어영청, 총융청을 합쳐 총 24,700명의 군사를 모아 수도권 방어를 하려 했으나 실제 군사력은 황해도 이북은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괄의 난으로 국경 방어 병력 3만 중에서 2만이나 반란에 직간접으로 가담하여 1만명 미만의 군사만이 남아 국경을 수비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며 궁여지책으로 지극히 수세적인 방어전략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적이 거점 군사도시인 안주를 공격하면 국왕은 바로 강화도로 몽진하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주축으로 하삼도의 병력을 모아 방어전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시적 지연책에 불과한 것으로, 군권을 장악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기는 했으나 정작 국방 강화에 대한 실체적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명분론을 내새운 추악한 권력 쟁탈전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광해군의 국내정치
1. 폐모살제론과 권력투쟁
서인정권은 폐모살제의 명분론을 내새웠으나 이것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는가는 결국 현실적인 권력의 역학관계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일단 대북세력의 권력독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당파를 배제한 독선적인 정치 운영이 없지 않았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책임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즉위 이후 숱한 역모 사건에 시달렸는데 이는 광해군의 권력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창 대군을 지지하던 서인 세력은 신권의 세력을 기반에 둔 정책을 지지했고 이러한 노선은 인조반정 이후 더욱 강화되어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에서 서인은 기년설 등을 주장하는데 주자의 주장에 입각하여 왕과 사대부의 예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내새운다.
2. 회퇴변척사건
광해군은 즉위 초년부터 사림 세력과 대립각을 새우게 되었다. 집권 대북파가 주도한 이른바 회퇴변척사건인데 정인홍은 광해군 3년(1611) 장문의 상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들을 시류에 따르는 간악한 무리라고 보았다. 또한 이황을 정자의 제자 주행기에 빗대었는데 주행기는 비행을 일삼아 짐승만도 못한 무리라는 악명을 남긴 사람이다. 이는 대북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남명 조식 학통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 회퇴변척사건이 사림 다수의 격렬한 반발을 사게 되었는데 정인홍 등 대북세력은 남인의 시조라 볼 수 있는 이황 뿐 아니라 기호의 이기이원론자로 볼 수 있는 우계 성혼도 비난하였다. 말하자면 서인과, 소북, 남인을 모두 공격한 것인데 광해군 정권의 타 당을 배제하고 독선적인 국정 운영이 나중에 인조 반정의 빌미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정책을 바탕으로 전란을 막고 어려운 와중에서도 북변 수비를 위해 수만의 군사를 징발하였으며 대동법을 시행하여 점진적으로 국가 재정의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외교에서의 빛나는 성과가 부정되게 된 것은 국내 정치에서의 친명배금여론과 이를 가면을 쓴 서인 세력의 헤게모니가 큰 원인이 될 수 있다.
3. 아노미 상태에 빠진 사림과 권력장악
당시 많은 사림들은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임진왜란으로 왜구로 멸시했던 침략에 국토가 유린되는 엄청난 비극에 직면하였음은 물론 북방의 여진족이 대국 명을 제압해 나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기 싶지 않은 집단적 인지 부조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집권 세력이 내부 모순 심화와 외부의 압력 강화의 심화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면 집권 세력이 소멸하거나 교체되거나 이와 반대로 집권 세력이 위기를 빌미로 더욱 강력한 권력을 잡아나가는 경우가 있다.
인조반정의 경우 다수의 사림 세력들이 임진왜란으로 극심한 위기에 몰린 세력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집단적인 반동 현상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 광해군 대북 세력도 남명 조식의 학통을 계승한 일단의 정치세력에 불과하였는데 결국 이는 정치투쟁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비판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서인과 북인 등 여러 집권 세력들이 보여준 행태와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책임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우선 북인 정권은 임진왜란 때 실전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새운 무장 출신들이 많다. 이들이 재조지은을 주장하며 친명배금을 주장하는 대다수 사대부들에 대하여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점은 현장에서 명군보다는 백성들의 필사적인 항전이 이 나라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종결 이후 선조는 재조지은을 강조하며 명군에 대하여는 극진한 사례를 아끼지 않았으나 거의 대부분의 의병장에 대하여는 공신에서 제외할 뿐 아니라 많은 공을 새운 의병장 김덕령 등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는 등 지배 체제에 대하여 위협을 가질 만한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재조지은 논란은 근본적으로 기자을 정통으로 내새워 공자와 주자를 계승한다는 소중화 양반사대부들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것이다. 비록 광해군이 재조지은 자체를 부정하거나 한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며 또한 광해군이 성리학이나 사림 세력들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재조지은 논란은, 서인 정권이 정세 유무와 관계 없이 재조지은을 내새워 광해군 정권을 내새웠다는 것이 안보와 국방을 내새워 정작 국가 안보를 희생하는 정치권의 행태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4. 이괄의 난으로 드러난 권력투쟁
인조반정의 핵심 인사인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사실 그가 불만을 품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었다. 함경도 병마사 출신이었던 이괄은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무력을 제공했으나 서인 중 쿠데타를 일으킨 핵심 세력인 공서파가 자기들 중심의 논공행상을 이어감에 따라 이괄은 한성판윤직에 머물게 되었다. 조정의 모문룡 지원 접반사 파견과 청의 군사행동 움직임이 보임에 따라 이괄은 서북면병마사로 파견되게 되었다. 그런데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등이 역모를 꾀했다고 무고하고 이괄의 막강한 병력을 우려한 서인들은 일단 이괄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분노를 느낀 이괄은 병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이괄의 난은 논공행상의 불만을 품은 이괄 개인에 대한 비난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후금과 대치하는 위급한 국방 상황에서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병력 절반 이상을 동원하여 조정을 공격하는 행태를 보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논공행상의 과정이 추악하게 진행되는 과정에 역모라 밀고하는 과정은, 그들의 폐모살제 주장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해 존명배청하는 논리가 주도적인 여론이었기도 했지만, 그 뒤에 추악한 권력쟁탈, 명나라를 존중하는 걸 이데올로기로 삼아 정권을 유지하려는 행태로 보인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친일파들이 대거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였다. 한국의 우익에는 민족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미국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정치상황과 매우 흡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5. 광해군에게는 잘못이 없는가
반면 광해군이 인조반정을 자초한 측면에 대하여도 잘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소북 세력을 제거하고 즉위 원년에 임해군을 귀양보내 많은 반발을 사게 되었는데, 이는 소수정권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통치를 했다는 점에서 딜레마일 수 있을 것이다. 회퇴변척사건이 일으난 후 사림 세력의 공론은 등을 돌리게 되었는데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통해 불타버린 경복궁 등 왕실의 위신을 새우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많은 전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1619년 명이 심하 전투에서 청에 패하여 만주에서의 힘의 균형의 붕괴로 위험이 가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궐 건설을 멈추지 않았다. 광해군은 국방력 건설에 집착했음에도 오히려 궁궐 건설에는 과도한 집착을 보였는데 여기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분호조, 조도사 등의 작폐로 민원이 증가하고 있었다.
분호조나 조도사에는 천민들도 많이 끼어 있었는데 이들의 징수 과정이 양반층의 감정적 불만을 사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무리한 궁궐 축조사업의 강행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대하여 냉소적인 태도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조정 여론은 물론 재야 여론까지 광해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도사 핵심인물인 김순이 광해군 대외정책 핵심 인물인 윤휘의 심복이었다는 점은 서인 남인 등 반대당파의 빌미를 제공하였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영건을 징수하기 위해 광해군은 심지어 관직을 돈을 받고 팔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정권 실세 이창정의 회고에서 드러난다.
6. 광해군을 위한 변명
하지만 광해군의 정책을 모두 불합리하다고 매도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집권 여당이었던 이이첨의 대북파마저 광해군의 대외 정책에 반기를 드는 상황에서 광해군은 궁궐 축조와 교하 천도 논의 등을 통해 정국 주도권 장악을 꾀했을 것이다. 광해군은 1618년에서 23년까지 자신의 경호대장인 훈련대장을 무려 11번이나 교체되었는데, 인조반정 때 포살된 이흥립은 광해군 몰락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조가 26년 동안 불과 4번만 교체한 것과 다르다. 내정에 있어 관료 기구를 불신하여 훈련대장과 같은 최측근 경호대장조차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리 만무했다. 여기에 명에 해명사로 보낸 이정귀 같은 경우는 서인 인물로서 광해군 정권은 점차 인조반정 이전에서부터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처음 반란이 터졌을 때 광해군은 “이이첨의 짓이 아닌가?” 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이첨은 주지하다시피 북인 정권의 실세 중 실세이다. 그는 광해군 정권의 일등공신이다. 그런 그에게 의심을 할 정도였으니 광해군 재위 시절 그의 처지가 얼마나 곤란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집권 여당 내부에서조차 대통령을 부정하고 색깔 빼기를 이어가는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왕세자로만 무려 17년을 있었고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반대파 신료들에게 시달렸던 광해군. 분조를 직접 운용하면서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했음에도 즉위 자체가 불투명했던 광해군이 일관되게 중립 외교전략과 내정에 힘쓰는 모습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광해군의 궁궐 등 영전 축조 사업이 지속된 것도 광해군의 불가피한 선택, 궁지에 몰린 왕권을 사수하려는 최후의 전략이었을 수 있다.
광해군의 경제사회정책
1. 대동법의 시행
광해군의 경제정책 중에서 대동법은 가장 괄목할 만한 조치였다. 임진왜란 이전 170만결이었던 토지가 전후 54만여결로 축소되어 민생은 물론 국가재정은 극심한 피폐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 원년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혜청을 실시하고 우선 경기도부터 대동법을 실시하게 된다.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이미 선조 때 이이는 대공수미법을 전란 중 유성룡은 수미법 실시를 건의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선혜청에 도제조, 제조, 낭청 2인을 두고 봄, 가을에 거쳐 토지 1결당 8두를 수취하였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교서를 내려 “급하지 않은 공부, 군졸들의 도고, 토호들의 수탈 등 백성을 피폐하게 하는 일체의 폐단을 시정하라...”하였다. 이로서 戶에 부과하던 공물이 전결에 부과되어 백성들의 부담이 한층 경감되었다.
대동법은 각지에서 진상하는 공물에 대한 각 방납인들의 중간 수탈이 심해지자 선혜청을 설치하여 1결당 8두씩 미국을 거두어 선혜청에서 시가에 맞추어 방납인들에게 분급하여 물가를 조절하였다. 또한 유통경제의 발달과 이에 편승하여 성행하던 방납을 공식적인 국가재정 차원으로 편입하여 이를 제도적으로 제어하려는 장치이다. 전란으로 민생과 토지가 황폐화된 상황에서 종래의 공납제도로는 정상적인 수취 제도의 운영을 기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2. 대동법에 대한 논란
대동법은 실시 1년만에 혁파론이 대두하였는데, 대동법을 건의한 영의정 이원익은 유지를 주장하였고 우의정 심희수는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대간들이 좀 더 시간을 지켜 보고 존폐 여부를 지켜보자고 하였다. 대동법 실시 1년 후 선혜청은 많은 이익을 보았는데 대동법 시행으로 중소농민들과 하류층 양반들은 큰 이익을 보았으나 향리, 대지주, 방납자들은 손해를 보기도 하였다. 대동법 폐지를 주장하는 양반들 주장에 힘입어 선혜청 유사 당상 박이서가 탄핵되는가 하면, 선혜청이 폐지되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다. 이에 경기도 농민들을 중심으로 선혜청 혁파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대동법에 대한 찬반양론이 조정에서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비변사는 대동법을 전국 8도에서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광해군은 이를 거절하였고 강원도 관찰사 홍서봉은 강원도 지역에 실시를 건의했으나 역시 이를 거절하였다. 이는 반대세력을 의식한 행동으로 생각된다. 대동법이라는 신법의 신속한 시행의 후폭풍을 염려하여 점진적이고도 신중한 추진을 원한 것이다.
3. 대동법 시행의 주체는 누구인가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 1년 후에 성과를 보고하는 비변사의 보고에서, 이의 장점과 폐단을 잘 알고 이를 시정하는 후속 조치를 강구하라고 주문한 데에서 광해군은 뒷탈 없는 대동법의 시행을 바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동법을 추진했던 주체 세력으로 북인 세력이라는 견해와 남인 세력이라는 견해가 있다. 대북세력이라는 견해는 대북세력의 개혁 주체성향과 대지주들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민생 안정 정책을 위해 대북정권이 대동법 시행의 주요 동력이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 남인 서인 세력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어 이들은 당시 정권을 대북이 주도하고 서인 남인은 비변사의 소수 세력이었고 당시 개혁에 저항하던 양반관료세력의 대부분은 북인이 점유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대동법이 광해군 이후 전국적으로 그 시행이 점차 확대되었고 18세기에 이르러 잉류 지역인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에 걸쳐 시행되어 서인 정권이 이를 반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 대동법 시행이 광해군 연간에 이미 전국에 걸쳐 시행하자는 주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던 것은 개혁에 대한 저항이 매우 광범위했다는 것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서인 정권이 대동법을 강력하게 추진했다면 그 시기를 좀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나 당초 계획보다 시간이 지연된 것은 양반 관료들의 반대에 의한 것이다. 무엇보다 향리 등 지방 토호세력이 북인 세력과 남인 세력 중 어느 쪽에 가까웠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지방 향리 세력의 경우 재지 사족의 학풍에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비록 광해군 당시 대북정권이 요직을 장악하였으나 대북정권의 권력 기반이 탄탄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역적으로도 서부경남 일대에 치우쳐 있어서 기호 지방의 다수를 점한 서인과 경상 좌도와 일부 기호 남인을 구성하는 남인 전체에 비하여 인재 풀이 컸다고 보기 힘들다.
대북정권이 강력한 왕권강화 및 폐모살제 논란과 명의 청병 요청이라는 난제를 정면돌파하기로 한 것은 오히려 정권기반의 취약성을 반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명의 청병 요청을 지지하는 게 재지 사족층의 대다수 여론이기도 하였으며 여론의 향방이 광해군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요컨대 광해군이 대동법을 비롯한 개혁작업 추진에 상당히 열의를 가졌고 북인 정권이 대동법 추진의 주도 세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나 서인 남인 정권이 대동법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대다수 민심이 대동법에 우호적이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대청 강경책으로 돌아서고 수어청 등 군비를 확충하면서 필요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납의 안정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민생의 부담을 줄이는 대동법의 시행을 늦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인조반정 후에 서인 정권의 소수파 파트너 역할을 했던 남인 세력은 왕권 강화와 중소농 육성을 통한 왕권강화설을 내새웠는데 이들이 대동법 추진에 우호적이었던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4.호패법의 시행과 혁파
호패법은 호구를 명확히 하여 인정수를 조사하고 직업, 계급에 따른 신분을 증명하며 무엇보다 군정, 요역의 기준을 밝혀 백성의 유망, 도피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호패법은 태종 13년(1413)년 시행되었으나 백성들의 기피로 무산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군적이 문란해지자 광해군 2년(1610)에 그 시행이 다시 논의되었다. 조선의 군사제도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농병일치제에서 납포군화로 변하려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임진왜란 피해 복구가 한창인 때에 여진족의 군사 위협에도 대처하기 위해 군제 개혁이 절실하였다.
이 와중에 호패법 재실시가 논의되었는데 이항복, 이정귀 등은 군역을 많이 확보할 수 있고 외방의 한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 것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며 호패법 실시를 찬성하였다 . “큰일을 하는 과정에서는 사람들의 말이 많이 생기는 법이며 절차가 복잡하여 절목이 많이 들어 하기 쉽지 않겠지만 조정에서 흔들림 없이 이를 시행한다면 반드시 많은 군사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니 사소한 반대와 소요에 구애받지 말기를 바랍니다”
간했다
반면 이이첨을 비롯한 대간에서는 “근간에 호패법이 시행된 결과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한유자들이 각지에서 도성으로 몰려와 학적에 등록되려고 하니 그 등록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게 되었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많은 백성들이 도주하여 결국 국왕이 원망을 들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호패법 실시 찬성 여론이 우세하여 호패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갔는데 당시 여진에 맞서 군정 확보가 어려웠고 수포와 숙위 역시 쉽지 않은 상황에서 군적 확보를 위한 호패법의 필요성은 대체로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정에서는 호패법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상당한 효과를 보게 되었다.
호적에 등재되지 않던 자들이 모두 호적 등재를 회피할 수 없게 되어 몇 년을 두고 보충하지 못했던 허위와 궐호의 숫자를 이제는 검속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라감사 윤집 등은 호패법 시행이 전체적으로는 큰 성과를 내고 있으나 일부 계층의 불만이 상당하여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무마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호패법 논의는 주로 서인과 남인측이 제기하였고 북인정권은 이에 제동을 거는 형식이었다. 호패법은 광해군정권의 집권 기반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민생이 피폐해지고 민생을 살피고 조세 기반과 군사 기반을 아울러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호패법의 재건 문제는 이후 정국 주도권을 놓은 매우 중대한 정책현안이 되었던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실록 사평은 호패법 혁파의 책임을 광해군에게 돌리고 있으나 이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로서 광해군으로서는 군정 징집과 함께 민심도 수습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왕실 위신을 새우기 위해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이어오는 상황에서의 민심 불만도 고조되는 상황도 호패법 논란에 영향을 미쳤다 볼 수 있다.
맺음말
우리는 광해군을 통하여 단지 정변으로 사라져 간 국왕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광해군을 미화하여 광해군은 무조건 선이라는 입장을 가지는 건 모두 곤란하다는 점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광해군의 대외정책은 국가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중대한 결단이었으며 이것이 더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조정 대신들 심지어 집권 세력이었던 대북파들마저 분위기에 편승하여 반대하였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광해군이 폭군으로 비난받는 건 후세의 역사가들, 즉 승리한 서인 세력의 평가일 것이다. 그들은 노론을 거쳐 노론 벽파와 세도정치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 전체의 집권 세력으로 군림하면서 광해군에게 정당한 역사적 해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무리한 궁궐 축조 및 반대당파를 배제한다는 정치적인 반발이 있었으나 이 점도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궁궐 축조에 상당한 비용이 수반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궁궐 축조는 왕조의 마지막 상징이며 더군다나 광해군은 궁지에 몰려 있었으므로 왕궁 축조를 최후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광해군은 서인과 남인 들을 배제하였다고는 하나 실제로 비변사에 남인 서인 당상들도 상당수 참여하였고 북인이 주도하기는 하였으나 서인 남인 인사들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북인 정권의 권력 독점은, 조선왕조 시대 집권당들이 대체로 권력을 점유하는 성향에 비추어 큰 무리는 아니었다고 본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비추어 폐모살제가 패륜이라 이를 분명히 반대하는 명분론이 대세로 자리잡았던 건 사실이고 이것이 분명 그 당시에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폐모살제론은 강력한 군권을 장악했던 태종이 사돈과 처남들을 즉결처형하고 형과 동생, 왕족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철권 통치를 했음에도 태종이 패권 군주로 매도당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들 세종은 문치주의의 흥성과 동시에 아버지의 패도정치를 따르지 않으려 했지만 동시에 그의 부친이 패도군주로 낙인찍히는 일도 원하지 않았다. 태종 실록을 기록한 건 바로 세종조와 그 신료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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