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장옥정 사랑에 살다' 에서 멜로가 흥했던 만큼 사관이 고쳐썼다, 희빈 장씨가 당대 역사관의 피해자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사실이며 장희빈은 숙원 시절부터 철저히 인현왕후를 농락하였다.
1. 중궁전 넓은 화단에서 숙종과 같이 희롱하며 놀다가 숙원 장씨가 갑작스럽게 무릎을 꿇고 중전에게 죽여달라는 말을 하였다. 내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서 일부러 쇼를 한 것인데 매우 무례한 행위였다.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자신이 왕비가 된 후에는 더욱 심했다. 대개 임금의 내명부 기강을 잡기 위해서 무례한 후궁을 보면 회초리를 드는 것은 흔했다(인현왕후도 장희빈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린 적이 있다)
그러나 중전 장씨는 최씨(숙빈)에게 고문을 했다...


그냥 아기, 어미까지 싸그리 죽이려 한 것이다.
그리고 영수왕자는 저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약하게 태어나서 고작 출산 1~3달 만에 죽고 만다.

중전 장씨의 막장으로 인해 인현왕후는 복위된다.
중전 장씨는 희빈 장씨로 강등되었고, 이후 숙빈 최씨는 연잉군(영조)을 낳았다.
그러나 장씨의 욕망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복위된 인현왕후 민씨를 폐비로 불렀다는 사실을 실록에서 대놓고 적어놓았다.(실록이 승자의 기록이니 하는데, 연산군일기를 보면 비록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적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도면 막장이다. 그런데 저주까지 했다. 조선사 최악의 성격파탄자 숙종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현왕후가 병사하고 이어서 희빈 장씨도 사약을 받는다. 숙종은 앞으로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는 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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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종이 두 여인이 죽고 남은 숙빈을 이현궁에 유배 보내듯 했다는 썰이 있는데, 사실 뻥이고 숙빈은 그 이후에도 궁에서 계속 살았다.
궁에서 숙빈이 거처했다는 기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걸 보면, 최소 연잉군이 혼인하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야 이현궁으로 갔을 것이다.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을 숙빈이 중전이 될까 걱정돼서 그랬다는 것도 있는데, 그런 거 없다. 최씨는 엄청나게 한미한 집안이었고, 오히려 중전 유력후보는 영빈 김씨였다. (조선시대판 금수저 임) 영빈 김씨와 숙종이 사이가 나빠서 저런 법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희빈 장씨는 중인이었지만 역관집안이라서 재벌이었다. 최숙빈이랑은 급이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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