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8년(선종 5년) 9월 선종은 태복소경 김선석을 요나라에 와견하여 그들의 각장 설치계획 폐기를 요구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문제를 재삼 제기하는 것이 비록 예절에 어긋나는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나 지난 날 보낸 글월에서 우리나라 전체 백성들의 의사를 이미 밝혔고, 여러 번 보낸 사절을 통하여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염원을 묵살하니 어찌 다시 말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다행히 당신처럼 공정한 임금을 만나 다시 한 번 우리의 심정을 말하노니, 삼가 돌이켜 보건대 승천황태후가 집정하였을 때에 책명을 보내 관작을 주었으므로 황태후의 성덕을 칭송하고 공물을 보냈더니 우리의 성의를 표창하기 위하여 특전을 베풀어주었다.
그리하여 요동성 서부는 거란에 붙이고 개사수(압록강 동북지방에 있는 작은 강) 동부는 우리의 영토로 확정했던 것이다. 또한 귀국 성종의 통화 12년(994년)에 예방사절을 보냈을 때에 정위 고량이 다음과 같은 천보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고려국왕 왕치에게 이 글을 보낸다. 동경 유수 손녕의 보고에 의하여 당신이 9월 초에 장정들을 동원하여 성책을 수축하려 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10월 상순에 벌써 준공했다고 하니 당신은 특출한 재능으로 모든 사물에 정통하며 우방에 대한 태도가 성실하다는 것을 알겠다. 이에 멀리 공물을 보낸다.
금번에 농한기를 이용하여 먼 지방에 있는 장정들을 모아 중요한 나루터에 성책을 쌓음으로써 광막한 들판에 침입하는 도적들을 방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며, 현 정세에 매우 적절한 조치다. 더군다나 저 여진이 제때에 황화를 입음으로써(거란을 섬김으로써)나의 위신에 눌려 감히 딴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 성책 수축 공사를 빨리 끝내도록 노력허여 양국의 영원한 안전을 기할 것이다.>
이 조서의 간곡한 내용을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 우리의 대신 서희가 국경문제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귀국의 동경 유수 손녕이 명령을 받들고 와서 상의함으로써 각각 양쪽 경계를 맡아서 모든 성들을 구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공진을 압록강 구당사로 안문에 파견하여 낮에는 동쪽 강변을 감시하고 밤이 되면 내성에 들어가 자면서 귀국의 힘을 입어 점차 좀도적이 제거되고, 그 후부터 경비를 하지 않아도 변방 정세가 더욱 좋아졌다.
아직 성종의 조서에 먹도 채 마르지 않았고, 황태후의 자상한 말씀이 어젯일 같은데, 갑인년(1014년)에는 하천에 선박을 비치하여 통로를 열었고, 을묘년(1015년)에는 우리 고을 성내에 들어와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을미년(1055)에는 궁구란자(교각)를 설치하고 정자를 만들었다가 바보년(1O55년)에 우리의 요구에 따라 철거하고 우리에게 보낸 조서에는 <기타 세세한 문제도 일정한 약속을 지키게 하겠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또 임인년(1062)에는 의주, 선주 남쪽에 매매원(일종의 세관)을 설치하려고 하였을 때 우리가 여러 차례에 걸쳐 문제를 제기한즉 기존 시설을 보수하고 새로 설치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갑인년(1074년)에 또 다시 정융성(의주) 북쪽에 새로 탐수암을 설치하니 우리가 이것의 철훼를 요구하였다. 이에 시설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가 대대로 귀국을 성의껏 대접하였고, 해마다 사절과 공납을 보냈으며, 몇 번이나 사신을 시켜 글월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탐수암, 성책, 다리 등 일체 시설을 철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 새로운 시장을 설치하려고 하니, 이는 귀국 선대 임금들의 유지에 어긋나는 것이며 우리의 간곡한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천리 길을 우리 사신이 계속 오가며 90년 동안 가져다 준 공납도 보람 없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분개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새로 조상의 뒤를 이은 이래 우방으로서의 임무를 삼가 지키면서 나의 성의를 다하려는 이때, 어찌 사소한 이속을 도모하기 위해 그 같은 시설을 경영하고 있는가? 영토가 귀국과 연결되어 있어 선린정책을 쓰려고 약속하였지만 이 좁은 지역에 각장을 설치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하란 말인가.
그런 까닭에 글월을 빈번이 띄웠는데도 당신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위로는 하늘이 두렵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바라건대 당신은 지방 관리들의 잘못된 의견을 물리치고 우방의 중대한 관심사를 고려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들판에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어 자기 생업에 안착하도록 함으로써 우리 백성들을 경동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의 호의를 잊지 않겠다.'
이 편지를 받은 거란은 김선석에게 답신을 주어 고려로 돌려보냈다. 그 회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장 설치를 정지하라는 항의서한을 여러 번 받았다. 이 같은 사소한 일로 그렇게 여러 말을 할 까닭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시일에 적당하게 처리하려고 한다. 더군다나 아직 설치할 기일도 정하지 않았으니 부디 안심하고 성의를 다할 것이며, 심각한 의구심을 풀고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기 바란다.'
거란은 이 핀지를 보낸 후 고려 조정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양 2천 마리, 수레 23대, 말 3필을 보내왔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
'문제를 재삼 제기하는 것이 비록 예절에 어긋나는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나 지난 날 보낸 글월에서 우리나라 전체 백성들의 의사를 이미 밝혔고, 여러 번 보낸 사절을 통하여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염원을 묵살하니 어찌 다시 말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다행히 당신처럼 공정한 임금을 만나 다시 한 번 우리의 심정을 말하노니, 삼가 돌이켜 보건대 승천황태후가 집정하였을 때에 책명을 보내 관작을 주었으므로 황태후의 성덕을 칭송하고 공물을 보냈더니 우리의 성의를 표창하기 위하여 특전을 베풀어주었다.
그리하여 요동성 서부는 거란에 붙이고 개사수(압록강 동북지방에 있는 작은 강) 동부는 우리의 영토로 확정했던 것이다. 또한 귀국 성종의 통화 12년(994년)에 예방사절을 보냈을 때에 정위 고량이 다음과 같은 천보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고려국왕 왕치에게 이 글을 보낸다. 동경 유수 손녕의 보고에 의하여 당신이 9월 초에 장정들을 동원하여 성책을 수축하려 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10월 상순에 벌써 준공했다고 하니 당신은 특출한 재능으로 모든 사물에 정통하며 우방에 대한 태도가 성실하다는 것을 알겠다. 이에 멀리 공물을 보낸다.
금번에 농한기를 이용하여 먼 지방에 있는 장정들을 모아 중요한 나루터에 성책을 쌓음으로써 광막한 들판에 침입하는 도적들을 방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며, 현 정세에 매우 적절한 조치다. 더군다나 저 여진이 제때에 황화를 입음으로써(거란을 섬김으로써)나의 위신에 눌려 감히 딴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 성책 수축 공사를 빨리 끝내도록 노력허여 양국의 영원한 안전을 기할 것이다.>
이 조서의 간곡한 내용을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 우리의 대신 서희가 국경문제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귀국의 동경 유수 손녕이 명령을 받들고 와서 상의함으로써 각각 양쪽 경계를 맡아서 모든 성들을 구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공진을 압록강 구당사로 안문에 파견하여 낮에는 동쪽 강변을 감시하고 밤이 되면 내성에 들어가 자면서 귀국의 힘을 입어 점차 좀도적이 제거되고, 그 후부터 경비를 하지 않아도 변방 정세가 더욱 좋아졌다.
아직 성종의 조서에 먹도 채 마르지 않았고, 황태후의 자상한 말씀이 어젯일 같은데, 갑인년(1014년)에는 하천에 선박을 비치하여 통로를 열었고, 을묘년(1015년)에는 우리 고을 성내에 들어와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을미년(1055)에는 궁구란자(교각)를 설치하고 정자를 만들었다가 바보년(1O55년)에 우리의 요구에 따라 철거하고 우리에게 보낸 조서에는 <기타 세세한 문제도 일정한 약속을 지키게 하겠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또 임인년(1062)에는 의주, 선주 남쪽에 매매원(일종의 세관)을 설치하려고 하였을 때 우리가 여러 차례에 걸쳐 문제를 제기한즉 기존 시설을 보수하고 새로 설치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갑인년(1074년)에 또 다시 정융성(의주) 북쪽에 새로 탐수암을 설치하니 우리가 이것의 철훼를 요구하였다. 이에 시설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가 대대로 귀국을 성의껏 대접하였고, 해마다 사절과 공납을 보냈으며, 몇 번이나 사신을 시켜 글월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탐수암, 성책, 다리 등 일체 시설을 철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 새로운 시장을 설치하려고 하니, 이는 귀국 선대 임금들의 유지에 어긋나는 것이며 우리의 간곡한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천리 길을 우리 사신이 계속 오가며 90년 동안 가져다 준 공납도 보람 없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분개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새로 조상의 뒤를 이은 이래 우방으로서의 임무를 삼가 지키면서 나의 성의를 다하려는 이때, 어찌 사소한 이속을 도모하기 위해 그 같은 시설을 경영하고 있는가? 영토가 귀국과 연결되어 있어 선린정책을 쓰려고 약속하였지만 이 좁은 지역에 각장을 설치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하란 말인가.
그런 까닭에 글월을 빈번이 띄웠는데도 당신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위로는 하늘이 두렵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바라건대 당신은 지방 관리들의 잘못된 의견을 물리치고 우방의 중대한 관심사를 고려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들판에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어 자기 생업에 안착하도록 함으로써 우리 백성들을 경동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의 호의를 잊지 않겠다.'
이 편지를 받은 거란은 김선석에게 답신을 주어 고려로 돌려보냈다. 그 회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장 설치를 정지하라는 항의서한을 여러 번 받았다. 이 같은 사소한 일로 그렇게 여러 말을 할 까닭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시일에 적당하게 처리하려고 한다. 더군다나 아직 설치할 기일도 정하지 않았으니 부디 안심하고 성의를 다할 것이며, 심각한 의구심을 풀고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기 바란다.'
거란은 이 핀지를 보낸 후 고려 조정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양 2천 마리, 수레 23대, 말 3필을 보내왔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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